플라톤의 <국가> 강해(73)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수와 계산 기술, 지성적 이해(521c-526c)
이제 논의 주제는 동굴의 비유에서 제시된 구제의 임무들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겨날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521c-526c]
*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는 그러한 교육과정은 ‘밤과 같은νυκτερινός 낮으로부터 진정한 낮을 향한 영혼의 전환ψυχῆς περιαγωγὴ’ 즉 ‘참된 철학’φιλοσοφία ἀληθῆ을 가능케 하는 배울 거리들μάθημα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한 배울 거리들이 생성하는 것το γιγνομένον으로부터 ‘있는 것’τὸ ὄν으로 영혼을 이끌어낸다.(521c-d) 물론 앞에서 다룬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ῇ과 시가μουσικῇ도 배울 거리들이지만 신체단련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몸의 성장과 쇠퇴를 관장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배울 거리가 아니다.(521d-e)
* 그리고 시가 또한 습관ἔθος을 통해 화음ἁρμονία과 장단ῥυθμός을 전수해주는 것이지 앎ἐπιστήμη은 아니다. 기술들도 모두 손을 쓰는βάναυσος 일로 보여 그러한 배울 거리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가와 신체단련과 기술들τέχναι을 빼고 어떤 배울 거리가 남아있을까?(522a-b)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배울 거리로 모든 기술τέχναι과 사고διάνοια와 앎ἐπιστήμη이 사용하는 공통의 것이면서, 누구나 제일 처음에 배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 수ἀριθμός와 계산λογισμός을 제시한다.(522c) 특히 계산하고 셈할 줄 아는 것은 전사πολεμικός에게 필수적인 배울 거리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찾고 있는 것들, 즉 ‘본성상 지성적 이해로 인도하는’τῶν πρὸς τὴν νόησιν ἀγόντων φύσει 배울 거리들에 속하는 것이다.(522d-523a)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전적으로 ‘있음’οὐσία을 향해 이끌어주는 것임에도 아무도 이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감각αἰσθήσεσις에 속한 것들에서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불러내는παρακαλοῦντα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살핀다. 우선 감각에 속한 것들τὰ ἐν ταῖς αἰσθήσεσιν 중에서 어떤 것들은 감각에 의해 충분히 분간되기κρινόμενα 때문에 탐구ἐπίσκεψις를 위해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불러내지 않는 것들이고, 어떤 것들은 감각으로는 어떤 건전한ὑγιὲς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지성적 이해가 탐구하도록 요청하는 것들이다.(523a-b)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지 않는 것들은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것’ὅσα μὴ ἐκβαίνει εἰς ἐναντίαν αἴσθησιν ἅμα들이고, 반면에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는 것은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멀리서 보든 가까이에서 보든, 감각이 그것을 특별히 더 그것이라고도 그와 반대되는 것이라고도 분명히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명확히 구분해 주기 위해 지성적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523c)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손가락δάκτυλος의 비유를 끌어들인다. 만약 우리가 새끼손가락ὅ σμικρότατος, 약손가락ὁ δεύτερος, 가운뎃손가락ὁ μέσος 이 셋을 가까이에서 보는 경우 가운데에서 보이든 끝에서 보이든, 하얗든 검든, 굵든 가늘든, 그리고 그런 어떤 경우든 이것들 각각은 똑같이 손가락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그 손가락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대중들의 영혼은 손가락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지성적 이해에게 묻도록 강제되지 않는다. 그 경우에는 시각ἡ ὄψις이 영혼에게 손가락과 그것에 반대되는 것τοὐναντίον을 동시에ἅμα 제시하지ἐσήμηνεν 않기 때문이다. 앞서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그 경우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거나παρακλητικὸν 일깨우는ἐγερτικὸν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523c-d)
* 한편 시각ἡ ὄψις은 손가락들의 큼τὸ μέγεθος과 작음τὸ σμικρότητα을 충분히 보는가? 이 경우 시각은 그것들 중 어떤 것이 가운데에 있든 끝에 있든 시각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건가? 촉각ἡ ἁφή은 손가락들의 굵음πάχος과 가늚λεπτότης, 부드러움ἢ μαλακότητα과 딱딱함σκληρότητα을 감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인가?(523e) 다른 감각들도 그럴까? 아니면 감각들 각각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딱딱한 것에ἐπὶ τῷ σκληρῷ 적용되는τετάχθαι 감각을 부드러운 것에도ἐπὶ τῷ μαλακῷ 적용될 수밖에 없어서 이 감각은 ‘동일한 것을 딱딱한 것이면서 부드러운 것으로 감각한다.’ὡς ταὐτὸν σκληρόν τε καὶ μαλακὸν αἰσθανομένη고 영혼에 보고할까?(524a) 답은 후자이다. 감각은 동일한 것을 딱딱한 것으로도 부드러운 것으로도 보고하고, 가벼운 것의 감각과 무거운 것의 감각이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영혼에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 감각이 동일한 것을 부드러운 것으로 알려온다면ἑρμηνεί 그 감각이 동시에 단단한 것τὸ σκληρόν으로 제시하려는σημαίνει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당혹해할ἀπορεῖν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벼운 것의 감각’ἡ αἴσθησις τοῦ κούφου과 ‘무거운 것의 감각’ἡ αἴσθησις τοῦ βαρέος이 무거운 것τό βαρὺ을 가벼운 것τὸ κοῦφον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제시할 때도 마찬가지로 영혼은 그 감각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당혹해 할 수 에 없다.(524a) 그래서 영혼은 그러한 보고 내용을 이상스러운ἄτοπος 것으로 여기고 탐구ἐπίσκεψις가 필요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에 따라 영혼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 계산λογισμός과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불러내서 보고된 것들 각각이 하나ἓν인지 둘δύο인지를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각각이 하나이고 함께해서 둘이라면, 영혼은 그 둘을 분리된κεχωρισμένα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분리되지 않은’ἀχώριστος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524b-c)
* 앞의 상황에서 시각은 ‘크고 작음’μέγα καὶ σμικρὸν을(촉각의 경우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분리된κεχωρισμένον 것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συγκεχυμένον 것으로 본다. 즉 ‘큰 것이면서 작은 것’으로 감각한다. 그러나 영혼은 그것을 구분해서 이해하기 위해 시각과 반대로, 그것들에서 ‘큼’μέγα과 ‘작음’σμικρὸν을 보도록 강제된다.ἠναγκάσθη(524c) 그래서 영혼은 여기 어디쯤에서 처음으로, ‘큼’τὸ μέγα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한 ‘작음’τὸ σμικρόν이 무엇인지τί ἐστὶ를 묻게 된다. 우리가 한쪽을 가지적인 것τὸ νοητόν이라고 부르고 다른 쪽을 가시적인 것τὸ ὁρατὸν이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524c) 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조금 전에 어떤 것들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παρακαλοῦντα 것이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 것들이다. 요컨대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 함께 감각에 들어오는 것들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지성적 이해를 일깨우지 않는 것이다.(524d)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사고와 지성적 이해가 영혼에서 발생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 생겨나는지를 설명한 다음, 지성적 이해가 수행하는 계산과 탐구의 근간에 수ἀριθμός와 하나τὸ ἓν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524d) 만약 하나가 그 자체로 충분히 눈에 보이거나 다른 어떤 감각으로 파악된다면, 굳이 하나가 ‘있음’으로 이끌어주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것에 대립하는 어떤 것이 항상 그것과 동시에 눈에 보이나 그렇다고 특별히 하나οὐσία로 드러날 정도가 아니라면 그때에는 판정 내려줄ἐπικρινοῦντος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은 영혼으로 하여금 혼란스러움을 일으키는ἀπορεῖν 경우이기 때문에 영혼은 자기 자신 안에서 사유ἔννοια를 발동시켜 탐구ζητεῖν와 동시에 하나 자체αὐτὸ τὸ ἕν가 도대체 무엇인지τί ποτέ ἐστιν를 묻도록 강제되는ἀναγκάζοιτ᾽ 것이다.(524e) 그렇게 해서 ‘하나에 대한 배움’ἡ περὶ τὸ ἓν μάθησις은 영혼을 ‘있는 것을 구경하는 쪽으로’ἐπὶ τὴν τοῦ ὄντος θέαν 인도하며ἀγωγῶν 그쪽으로 방향을 바꾸게μεταστρεπτικῶν 하는 힘을 갖게 된다.(525a)
* 그러나 시각은 동일한 것을 하나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ἄπειρος 것으로 본다.(525a) 그런데 하나 내지 모든 수가 시각 때문에 동일한 그런 일을 겪을 수는 없다. 그래서 계산 기술λογιστική과 산수ἀριθμητικὴ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시각과 달리 가시계를 벗어나 동일한 것을 진리로πρὸς ἀλήθειαν 인도ἀγωγός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찾고 있는 배울 거리들에 속하는 것이다.(525b) 전사에게는 군대의 대오τάξις 정비를 위해서, 그리고 철학자에게는 생성γένεσις으로부터 벗어나서 ‘있음’을 접해야하므로 이것들을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 수호자φύλαξ가 전사πολεμικός이자 철학자φιλόσοφος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배울 거리를 법으로 정하고 나라에서 가장 큰 일들에 참여할 사람들로 하여금 지성적 이해 자체를 통해서 수들의 본성을 구경하는 데에 이를 때까지 – 무역상이나 행상들처럼 사고팔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그리고 영혼 자체가 생성으로부터 진리와 ‘있음’οὐσία 쪽으로 방향 바꾸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 계산 기술을 연마하게 해야 한다.(525b-c)
* 특히 이 배울 거리는 기묘해서κομψός – ‘행상 일을 하기’καπηλεύειν 위해서가 아니라 – ‘앎을 얻기’γνωρίζειν 위해서 수행할 경우 우리가 원하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모로 쓸모χρήσιμος가 있다. 그것은 영혼을 위쪽으로 강하게 이끌고 ‘수들 자체에 대해서 대화하도록’περὶ αὐτῶν τῶν ἀριθμῶν διαλέγεσθαι 강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군가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체를 가진 수들을 영혼에 제시하면서 대화를 한다면, 영혼은 그런 대화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525d).
* 이런 문제에서 ‘대단한δεινός 사람들’은 누가 하나 자체αὐτὸ τὸ ἓν를 말로 나누려고 시도할 경우, 결코 하나가 여러 부분μόρια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525e) 만약 누군가가 그들에게 ‘어떤 수들에 관해 대화하고διαλέγεσθε 있는지’ 즉 ‘그것들이 어떤 수들이기에 당신들이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로 각각 모두가 모두와 같고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수는 사고하는 것만διανοηθῆναι μόνον이 허용되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영혼이 진리 자체αὐτὴ τὴ ἀλήθεια에 이르기 위해 지성적 이해 자체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임이 밝혀진 한, 이 배울 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수적이고 대단히 효과적이기까지 하다.(526a)
* 그리고 선천적으로 계산에 능한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어떤 배울 거리도 대체로 빨리 익힌다. 또한, 더딘 사람들도 계산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면, 다른 이득은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이전의 자신보다 빨라진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진전을 보인다.(526b) 더구나 배우고 연마하는 데 이보다 더 힘이 드는 배울 거리는 쉽게 찾을 수도 없고 많이 찾을 수도 없다. 이 모든 이유로 이 배울 거리는 빼놓지 말아야 하며 최고의 자연적 성향을 지닌 자들은 이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52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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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1c-523a : 앞으로 논의될 교육 과정이 앞서 동굴의 비유에서 언급된 영혼의 전환(518d-e)을 가능케 하는 배울 거리이고 그것이야말로 생성하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to on으로 영혼을 이끄는 것이라는 말은 장차 변증술을 목표로 하는 철학자를 위한 교육 과정이 다름 아니라 앞서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공히 관통하고 있는 것 즉 인식과 실천의 상승과정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곳의 논의 또한 앞서 논의의 동일 구도 즉 가시계로부터 가지계로의 상승적 전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청년기의 신체단련과 시가라는 배울 거리를 지나 그러한 상승의 최고 목표로서 변증술적 앎에 이르는 첫 단계로서 감각으로부터 지성적 이해로의 상승 내지 전환으로서 수와 계산 즉 수학 교육이 제시되고 있다. 요컨대 철학자를 위한 배울 거리의 첫 단계는 가시계의 감각적 지각의 단계로부터 가지계의 사고 단계로 전환 상승하는 것이다.
* 522a ‘시가는 .. 앎epistēmē이 아니다’ : 앎의 원어 epistēmē는 일반 기술적 앎에서부터 최상의 형상적 앎에 이르기까지 사용 범위가 넓다. 참고로 다양한 기술들이 앎으로 규정되는 사례는 아래와 같이 플라톤 대화편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테아이테토스> 146c-147c, 198a-c, <소피스트> 232a, 257d, <정치가> 258b-d, 297b, 300e, 305a, <필레보스> 55d-e, 57a-b, 58b-c, <알키비아데스 1> 125d-e, <카르미데스> 165c, 166a, 170b, 170c, 173c, <에우튀데모스> 289b, 291b, 292c-d 등. 이 점에서 보면 시가나 신체단련도 기술적 배울 거리의 하나로서 넓은 의미에서 앎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말의 의미를 선분의 비유를 기준으로 사고dianoia 단계 이상의 앎으로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 523a 지성적 이해noēsis : 그러나 지성적 이해의 원어 noēsis는 최상의 형상적 앎의 단계에 한정하지 않고 그 아래 단계인 사고dianoia 단계의 앎을 두루 포함하는 말 즉 가지계ta noēta 일반의 앎으로 넓게 사용되고 있다. 앞서 선분의 비유(509d-511e)에서도 noēsis는 때로는 ‘형상적 앎’epistēmē에 국한해서 때로는 수학적 앎까지 포함한 가지적인 것(ta noēt)에 대한 앎 모두에 두루 사용되고 있다.
* 522b ‘기술들도 모두 손을 쓰는 일로 보여’ :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기술들의 상당 부분이 손을 쓰는 일이기는 하지만 기술이라고 해서 모두 손을 쓰는 일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이곳 시가(음악)도 제1권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일종의 기술이고(335c) <정치가>에 나오는 왕의 정치술도 기술이다.
* 523e : 이곳에서 ‘큼’τὸ μέγεθος과 ‘작음’τὸ σμικρότητα, ‘굵음’πάχος과 ‘가늚’λεπτότης, ‘부드러움’ἢ μαλακότητα과 ‘딱딱함’σκληρότητα은 각각 greatness, smallness, thickness, thinness, softness, hardness 등 추상명사로 실물을 가리키는 말 이를테면 ‘큰 것’τὸ μέγα, ‘작은 것’τὸ σμικρὸν과 구분되는 말이다. 전자는 사고의 대상 내지 산물이고 후자는 감각의 대상 내지 산물이다.
* 523e – 524c : 세 개의 손가락을 보면서 시각은 각각이 모두 손가락임을 알려준다. 최소한 손가락들을 보면서 그것에서 손가락과 대립되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반대적인 것이 함께 감각되지 않아 지성적 이해까지 소환되지 않는다. 즉 지성적 이해 단계까지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손가락들의 크기나 두께 무게 경도 등 속성들의 경우 감각은 어떤 때는 이렇게 어떤 때는 저렇게 감각하거나 또는 그냥 감각되는 대로 구분 없이 다른 속성들을 섞어서 함께 영혼에 전달한다. 시각은 물론이고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이다. 촉각의 경우도 두꺼움과 얇음, 딱딱함과 부드러움 등 동일한 대상에서 반대적인 속성들을 분리하지 못하고 그것들 섞어서 ‘두꺼운 것이면서 얇은 것’, ‘딱딱한 것이면서 부드러운 것’이라고 감각한다. 무게 관련한 감각 또한 가벼움과 무거움을 분리해서 감각하지 못하고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섞거나 때론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감각하여 영혼에 전달한다.
* 524a ‘이런 상황에서 그 감각이 동일한 것을 부드러운 것으로 알려온다면 그 감각이 동시에 단단한 것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당혹해할 수밖에 없다.’ :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감각이 동일한 것을 부드러운 것이라고 알려올 경우, 감각이 그것에 관한 다른 정보로서 동시에 알려 준 것 즉 그것은 단단한 것이기도 하다라고 했을 때 그 단단한 것이 가리키는 것이 앞서 부드러운 것이라고 말한 그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영혼은 당혹해 할 수 밖에 없다’
* 524a ‘딱딱한 것에 적용되는 감각을 부드러운 것에도 적용될 수밖에 없어서’ : 딱딱한 것과 관련된 감각이 따로 있고 부드러운 것과 관련된 감각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은 감각 즉 촉각이 적용된다는 뜻이다. 이어서 나오는 ‘가벼운 것의 감각과 무거운 것의 감각’이란 말도 가벼운 것의 감각과 무거운 것의 감각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무게와 관련한 같은 감각이다. 그러한 같은 하나의 감각이 정반대의 성질마저도 동시에 함께 영혼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이 무게와 관련한 감각의 경우 역시 앞서 촉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당혹하게 만든다. 그 감각이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동시에 제시할 경우, 영혼은 그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가리키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각기 따로 있는 것인지 당혹해 할 수 에 없다.(524a)
* 속성들과 관련한 감각의 경우는 나의 감각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누가 그것을 감각하느냐에 따라서 수없이 다양한 차이들은 물론 그 반대적인 것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프리카인과 에스키모인들이 같은 온도에 대해 정반대의 성질로까지 감각할 수 있고 같은 온도의 냄비에 대해서도 거칠 대로 거칠고 닳고 닳은 요리사의 손과 앳된 어린이들의 손이 감각하는 내용은 큰 차이가 있다. 이렇듯 각각의 감각들은 나의 감각 내에서도 동일한 것에 대해 반대적인 것들마저 구분 없이 섞어서 영혼에 제시하고, 사람들 간 동일한 것에 대해 반대되는 감각적 견해들도 동시에 내 영혼에 전달된다. 이럴 경우 영혼은 당황aporein할 수밖에 없다. 동일한 대상이 동시에 그 반대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급기야 지성적 이해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지성적 이해는 즉각적으로 그것에 반응하여 ‘그것은 무엇인가? ti esti’라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을 통해, 보고된 내용들에서 ‘큼’과 ‘작음’, ‘두꺼움’과 ‘얇음’, ‘딱딱함’과 ‘부드러움’, ‘가벼움’과 ‘무거움’을 자기동일적 하나로 구별 분간해 낸다. 사고가 그러한 것들을 그 섞인 것들에서 분리 구분해 내는 것이다. 이로써 가시적인 것to horaton으로서 하나로 뭉뚱그려 뒤섞인 상태의 것 이를테면 ‘큰 것이면서 작은 것’은 마침내 각기 하나로서 ‘큼’과 ‘작음’으로 분리되어 비로소 가지적인 것to noēton이 된다.(524c) 요컨대 사고는 가지적인 산물로서 ‘큼’과 ‘작음’이라는 개념지를 추상하여 그것을 토대로 각 손가락들의 크고 작음을 구분하여 손가락들의 크기에 관한 분별적 지식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사고는 큼과 작음이라는 개념적 지식을 토대로 감각 내용에서 함께 섞여 있는 큰 것과 작은 것들이 측면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큰 것은 어떤 측면에서 어떤 관계 속에서 큰 것이고 작은 것은 어떤 측면에서 어떤 관계 하에서 작은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약손가락의 경우, 가운데 손가락과의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작은 것이고 새끼손가락과의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큰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혼은 언젠가 동일 대상에서 어떤 성질이 본질적인 것이고 어떤 성질이 우연적인 것인지도 모두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이로써 영혼은 감각으로부터 촉발된 당혹스런 난문aporia을 통과하여 참된 배움으로서 감각적인 가시계를 떠나 가지계로 진입한다. 아무려나 이 부분의 논의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즉 감각이 영혼에 전달하는 보고 내용은 어떤 경우 반대적인 것까지 구분 없이 섞어서 전달하는 등 일체의 고정성 내지 규정성을 갖고 있지 않아 영혼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523c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것’ : 이 문장은 동사 ekbainei와 전치사 eis의 의미를 살려 ‘반대되는 감각으로 동시에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아직 단순 지각 상태에 머물러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포함하는 뒤섞인 감각으로까지 넘어가지 않은 것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아직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으므로 지성적 이해를 자극하지 않는다.
* 아마도 플라톤이 당혹감을 주는 사례로 실체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큼과 작음, 딱딱함과 부드러움 등 실체에 부대하는 속성 류의 것들을 끌어들인 배경에는 당대 소피스트들의 행태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소피스트들은 측면이나 계기, 속성 등 우연적인 것들을 파르메니데스를 끌고 와 마치 배타적 일자성을 갖는 것인 양 내세워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궤변적 쟁론술을 자주 구사했기 때문이다. <에우튀데모스>에서 디오뉘소도로스가 클레이니아스를 공격하는 논변에서도 그런 행태가 보인다.(277b-c) 그것을 쉽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궤변이다. 즉 클레이니아스에게 ‘배우는 일이 있느냐’를 묻고 ‘그런 일이 있다’고 그가 답하면 ‘그것은 앎을 받아들여 앎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당신은 지자(智者)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곧 이어 ‘무언가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자인지 아니면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인지’를 그에게 묻고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고 답하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도 속한다’는 것을 근거로 ‘당신은 무지자(無知者)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런 연후 ‘지자와 무지자가 반대’라는 것을 근거로 ‘당신 스스로 지자이자 무지자라고 말한 꼴’이니 ‘당신은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공격하는 식이다. 그런데 어떤 것은 알고 어떤 것은 모른다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각기 측면적 앎의 상태로서 동시에 병립 가능한 것이다. <국가> 이곳에서 감각이 반대적인 것들과 관련해서 지각하고 있는 것 즉 ‘큰 것이면서 작은 것’ 또한 동일한 것에 대한 측면적 지각들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람에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동시에 같이 있듯이 같은 손가락일지라도 측면에 따라 ‘큰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클레이니아스 또한 어떤 측면에서는 지자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무지자이다. 그럼에도 디오뉘소도로스는 반대적인 것들이 한데 섞일 수 없음을 근거로 클레이니아스를 공격하고 클레이니아스는 이곳의 영혼처럼 그 공격에 당황한다. 그런데 손가락의 경우나 앎의 경우나 모두 각기 감각과 궤변이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구조는 비슷하지만 그 당혹스러움을 벗어나는 과정은 방향에서 서로 반대이다. 이곳에서는 영혼이 사고를 통해 ‘큼’과 ‘작음’이라는 추상적 개념치를 분리해 내는 방식으로 감각이 초래한 당혹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났다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거꾸로 디오뉘소도로스의 공격의 빌미가 된 ‘지자’와 ‘무지자’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지자일 수도 무지자일 수도 있는 측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디오뉘소도로스의 공격에서 벗어난다. 요컨대 소피스트들은 측면에 불과한 것들을 서로 배타적인 개념지로 호도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고 이곳의 감각들은 사고를 통해 배타적 개념지로 충분히 구분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임에도 그 단계에 못 미쳐 그냥 반대적인 측면들까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하나로 뒤섞어 감각하는 방식으로 영혼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 이곳에서 영혼이 직면하는 당혹감 또는 난문aporia은 감각적 가시계에서 반대적인 것들이 동시에 함께 주어짐으로써 촉발된 것이지만, 그러한 난문들은 물질적 가시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 선과 악과 같은 윤리적 문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참과 거짓,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 경건과 불경건, 쾌락과 고통 등과 관련한 일상의 주장들을 하나같이 난문에 빠트리는 장면들은 허다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소크라테스적 난문들은 진정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당혹감을 주어 탐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철학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곳에서도 영혼이 마주하는 당혹감은 최상의 배움을 향한 상승과 전환의 첫 발을 내딛게 하는 발판이자 기폭제가 된다. 말 그대로 철학은 당혹과 놀라워 함thaumazein에서 시작된다.
* 524d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사고와 지성적 이해가 영혼에서 발생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 생겨나는지를 설명한 다음, 지성적 이해가 수행하는 계산과 탐구의 근간에 수arithmos와 하나to en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런데 그러한 구분에 ‘수와 하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우선 구분과 분간이 된다는 것은 대상들 각각이 어떤 단일한 일자적 규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일자적 규정성으로서 자기동일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타자와 분명한 구별이 불가능하다. A는 A로서 일자성이 확보되고 B는 B로서 일자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A라는 ‘하나’, B라는 ‘하나’가 성립하고 그것들 모두 각기 나름의 일자성을 갖는 서로 다른 ‘여럿’(多)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여럿이 성립해야 비로소 그것들 간의 비교, 차이가 드러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도 드러나 이른바 그것에 대한 객관적 탐구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가시계의 물질적 감각적인 것들은 늘 생성 변화하고 그 안에 반대적인 속성들마저 뒤섞여 있어 자기동일성의 확보가 어렵고 그에 따라 동일한 것을 ‘하나’en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apeiron 것으로 본다. 이렇듯 감각은 더 이상 대상들을 제대로 적확하게 지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은 사고 작용을 통해 그것들에서 물질적 감각적 변화의 요소들로부터 이를테면 큼 자체, 작음 자체라는 자기동일자를 분리해낸다. 예를 들어 A, B라는 속성들이 가시계에서 뒤섞여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사고는 그곳에서 감각적 시간성을 제거하여 ‘A는 A’로 ‘A는 A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 B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으로 – 추상해 낸다. 이를 통해 비로소 그것들은 구별과 분간이 가능한 각기 ‘하나’이면서 동시에 서로 구분되는 ‘여럿’이 되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동일률과 모순률, 배중률을 사고의 기본 원리로 삼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 공간적 사고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자가 다름 아닌 ‘수’arithmos이다. 사고 단계를 구성하는 핵심에 수학이 자리하고 배울 거리의 첫 단계가 수학이 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누군가 단일성의 개념을 형성해보려 시도하지 않았다면 산수라는 과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자극하는데 수학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
* 물론 플라톤에서 사고가 가시적인 것들에서 각각의 자기동일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배경에는 그 각각의 것들에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eidos이 자리하고 있다. 가시적인 것들은 그 형상들을 마치 그림자처럼 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수학적 자기동일성과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이 갖는 자체성은 다르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수학적 자기동일성이 형상이라는 자체적 존재에 연원해 있다는 데 근거하여 수학에 기반한 사고 단계의 개별 학술들 즉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의 학문성을 확보한다.
* 그러나 오늘날 비합리주의 계열의 주장처럼 형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플라톤이 말하는 사고 내지 지성적 이해는 실제 시공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에서 시간을 제거하고 공간적 존재로서만 그것들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재하는 현실의 실상을 배반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노자(老子)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 설파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은 어떻게든 현실을 말로 설명해내려는 현실 구제의 이념을 지향한다. 틀리면 그 이유를 대고 바로잡는 것 또한 말로 하는 논변이다.
* 525a ‘시각은 동일한 것을 하나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apeiros 것으로 본다.’ : 이 말은 시각의 대상인 가시적 물질적인 것들이 반대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변화무쌍하게 수많은 측면들과 계기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가시적 물질계는 존재론적으로 이미 그 자체로 무규정적apeiron인 것이다. 영혼은 형상 인식을 토대로 이러한 무규정성에 분유된 규정성peras을 간취하여 지성적 이해로 하여금 대상 세계의 분별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여럿으로 구성된 현실 세계의 구별 자체를 부정하는 파르메니데스적 허무주의와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가 극복된다.( <박홍규 전집> 3. 형이상학 강의 2. “플라톤의 허무주의 극복” 참고)
* 525a 계산 기술과 산수 : 플라톤은 이곳에서 계산 기술logistikē과 산수arithmētikē가 예비적 배울 거리의 첫 번째 교과임을 명시하고 있다. ‘산수’의 원어 arithmētikē는 오늘날 좁은 의미의 수학 즉 수론을 뜻하는 영어 arithmetic의 어원이 되는 말로 계산 기술을 내용적으로 포함하고 있다.(<필레보스> 56d) 그렇다고 arithmētikē를 오늘날 수, 양, 공간의 구조와 성질, 변화, 논리 등을 연구하는 넓은 의미의 수학 mathematic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수학 mathematics는 정수론,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 위상수학, 이산수학 등을 포함하는 말로 대수학조차 확립되지 못했던 플라톤 당대의 arithmētikē와는 비교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범위가 넓고 복잡하다. 사실 영어 mathematics는 이곳에서 ‘배울 거리’로 번역되고 있는 mathēma가 어원이다. 그 배경에는 퓌타고라스 학파가 자리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전반의 퓌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Archytas(플라톤의 <편지>에 따르면 플라톤과 교유가 있었다)는 산수arithmetica, 기하학geometria, 천문학astronomia, 음악musica을 ‘모든 존재의 근본 형상이며 서로 한 형제인 수와 크기를 다루는 교과들’로 함께 묶어 ta mathēmata로 부르고 그것을 공부하는 퓌타고라스 학도들을 hoi mathēmatikoi로 불렀다.(Diels & 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Band I, Zürich/Berlin 1964. p.432 참고) 고대 그리스에서 ta mathēmata가 ‘배울 거리 일반’을 뜻하면서 훗날 수학의 어원이 된 것이나 이곳에서 플라톤이 형상적 앎을 획득하기 위한 예비적 배울 거리들로 산수,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 모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플라톤에게 수학은 논증적 보편성을 담보하는 학적 인식의 근본 토대가 되고 그러한 플라톤의 관점은 현대 이론 물리학의 근간을 관통하고 있다.
* 525d ‘누군가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체를 가진 수들을 영혼에 제시하면서 대화를 한다면’ : ‘몸체를 가진 수들’이란 감각적 대상을 단위로 두고 세어진 수들 이를테면 사과 두 개, 말 세 마리, 물 세 컵 등으로 표현된 수들이다. 물 한 컵에 두 컵을 더해도 한 컵이 되는 것을 근거로 ‘1+2도 1이 될 수 있다’는 궤변도 몸체를 가진 수와 순수한 수를 구분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이다. 수학자들이 감각적 몸체를 가진 수들이 아니라 오로지 사고의 대상으로서 수만을 승인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 525d ‘배울 거리가 여러모로 쓸모chrēsmos가 있다’ : 플라톤에게 앎은 그 자체로 좋음 즉 실천적 유용성을 수반하는 것이다. 일부 플라톤 연구자들이 그를 철저한 공리주의자로 해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계산 기술과 산수 또한 영혼으로 하여금 생성으로부터 있음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질서와 대오를 중시하는 군대 즉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서 쓸모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강조하려는 것은 그러한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배울 거리는 기묘해서 ‘영혼을 위쪽으로 강하게 이끌고 ‘수들 자체에 대해서 대화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하도록’의 원어 dialegesthai가 ‘변증술적 대화 능력’의 의미로도 함께 쓰이고 있음을 고려하면 수학 교육의 가장 큰 쓸모는 무엇보다도 바로 가장 위쪽 즉 좋음의 극치로서 형상적 앎에 이르는 변증술의 토대가 된다는 데 있다. 이 점은 차후의 배울 거리와 관련해서도 반복해서 강조된다.
* 525d ‘배울 거리가 행상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이 말은 이른바 순수 이론적 교과를 상업적 이익을 위해 가르치고 배우려고 하는 당대 지식인과 대중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 말 역시 앞서 언급했듯이 근본적으로는 예비적인 배울 거리로서 산술 내지 수학의 쓸모가 그러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형상적 앎을 획득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글라우콘은 이후 제시되는 예비교과들에 대해서도 매번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눈치 없을 정도로 대중들의 관점을 반복해서 대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모습 또한 해당 교과들을 순수 논증적인 차원에서 다루고자 하는 플라톤의 의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일조한다.
* 526a ‘그것들이 어떤 수들이기에 당신들이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로 각각 모두가 모두와 같고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 여기에서 ‘당신들’이 가리키는 것은 당대의 기하학자, 천문학자, 화음 이론가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나중 그들 이론의 한계를 분명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일단 수학을 강조하는 이 단계에서는 일단 당대의 수 이론을 승인하고 있다. 수는 감각적 대상처럼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몸체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사고로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형상(이데아)으로서의 수도 아니다. 앞서 선분의 비유에서 사각형 자체가 그려진 도형으로서 사각형도 아니지만 형상으로서 사각형 자체가 아닌 것과 같다.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에서 사고의 대상을 수학적인 것으로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의 내용은 사고dianoia의 대상이 수학적인 것임을 충분히 알아차리게 해준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 1.6.987b에서 플라톤이 감각물과 이데아 사이에 수학적인 것들이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만큼 플라톤에게 수학은 앞으로 다루게 될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과 더불어 변증술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예비 교과이자 개별 학술로서 최상의 지위를 공유한다.
* 525b : 본성에 따른 천부적 능력이 우선시 되고 있지만 누구라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진전을 이룰 수 있음 또한 강조되고 있다.
* 526c ‘배우고 연마하는 데 이보다 더 힘이 드는 배울 거리’ : 플라톤은 앞서 제6권(503e-504d)에서 ‘가장 큰 배움’to megiston mathēma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길고 힘든 단련의 과정이 필요한지를 언급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것은 힘든 것’(ta kala chalep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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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제기하는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지각에서 가지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로의 전환은 어떤 인식론적 입장을 갖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견과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손가락에 대한 감각적 지각은 손가락이 아닌 지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단순 지각으로서 지성적 이해를 자극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칸트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 대상이 손가락으로 인지되었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감각소여data에 손가락이라는 오성적 개념지 즉 범주의 개입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에 속하는 것들 가운데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는 감각도 있고 그것이 지성적 이해를 자극한다(523a)는 언급도 마찬가지의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그 감각이 지각한 내용은 거울처럼 순수하게 대상을 수동적으로 모사한 감각소여가 아니라 이미 반대적이라는 오성적 판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론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의 감각 대상은 오로지 감각소여로 주어질 뿐이어서 그 지각 내용들에 그 어떤 지성적 이해도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다만 지각된 잡다한 관념들의 내적 연합의 법칙에 의해 개연적인 집합성만을 갖는 것으로 구별 인식될 뿐이다.
* 아무려나 이곳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철학자를 위한 이곳의 교육 과정 또한 구도상 앞서 살핀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인식과 실천의 상승과정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이곳에서 제시된 수학 교육은 선분의 비유 상 의견doxa이 지배하는 가시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pistis의 단계로부터 추론적 사고dianoia와 지성nous가 지배하는 가지적인 것들ta noēta에 대한 지성적 이해noēsis의 단계로의 전환periagōgē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장차 제시될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과 함께 본 곡으로서 변증술적 앎을 준비하는 서곡을 구성한다. 앞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이 개별학술들technai은 본 곡으로서 변증술에 이르는 토대가 된다. 변증술이 지적 직관에 크게 바탕을 두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개별 학술들이야말로 설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문의 실질적인 정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별학술들을 바라보는 플라톤의 시선을 고려하면 그가 오로지 형상에 대한 인식에만 매달렸다는 통상적 이해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 아무리 그것이 자체성을 갖는 최상의 앎이라고 해도 자기동일성에 기반한 개별 학술들에 대한 앎을 획득하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개별학술들은 이미 그 자체로 중차대한 학문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칸트 인식론의 ‘감성’(Sinnlichkeit)과 ‘오성’(Verstand) 그리고 ‘이성’(Vernuft)(좁은 의미)의 지배 영역을 큰 틀에서 플라톤의 인식 단계와 비교해보면, 비록 칸트의 인식론이 실재론자 플라톤과 달리 인식을 구성하는 주관에 치중되어 있다할지라도 그것들 각각은 가시계의 감각aisthēsis과 가지계의 추론적 사고dianoia 그리고 형상계의 지성nous에 대응한다고 볼 수도 있다. 오성 차원에서 물자체는 불가지이지만 이성 차원에서는 최소한 그 존재가 알려진다는 것도 사고 차원의 개별 학술적 앎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변증술 차원의 직관적·총체적 앎과의 간극에 대한 플라톤적 상념과 일정부분 닿아 있다.
* 이제 논의는 사고 단계의 첫 출발로서 산수 교과를 거쳐 나머지 예비교과로서 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으로 이어진다. – 끝 –
다음 강해 :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기하학(526c-527c), 천문학과 입체 기하학(528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