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철학(6) – 왕선산의 코스모고니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6)-왕선산의 코스모고니

1)

형이상학이란 자연의 질서를 기초하는 원리를 밝히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의 핵심 원리는 최종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는가를 통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자연이 음양의 동정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왕선산의 주장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형이상학이 설명하려는 질서는 과학이 다루는 구체적 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일반적 질서다. 그 가운데 핵심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범주 또는 층위에 따라 구별하고 그 생성을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자연에는 물체와 생물 그리고 인간이 있는데 그 생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가 형이상학의 성패가 달린 문제다.

과학에 관한 왕선산의 입장에 관해 이규성은 왕선산 대신 방이지의 ‘질측지학’을 소개한다. 이규성은 “방이지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관점은 왕선산의 관점과 같다”(129)고 단정한다. 방이지의 말은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과학은 ‘일체를 모두 궁극적 원리인 것으로 집착하여 사물의 개별적 영역을 멋대로 덭어 가려 구체적 원리들에 대해 정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생성의 철학, 127쪽)

“물에는 그것의 원인이 있다…그 불변적 측면과 변화의 측면을 추론한다. 이것을 질측이라 한다. 질측은 곧 통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생성의 철학, 128)

질측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탐구다. 통기는 그것의 원리에 대한 탐구이니 곧 철학이다. 이런 관점은 우주와 합일에 머물렀던 황종희와는 구별된다. 왕선산은 철학이 과학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2)

자연은 누구나 알다시피, 물체의 세계와 생물의 세계, 그리고 인간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그 차이점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런 것은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에 속할 것이다. 물체와 달리 생물은 재생의 능력을 지니며 인간은 인식과 자유의지라는 정신의 능력을 가진다.

왕선산이 제시한 형이상학 원리 즉 음양이라는 두 가지 기체의 동정이 이런 자연이 물체에서 인간으로까지 발전하는 생성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단 사물은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사물이 물체냐 생물이냐, 인간이냐는 그것을 이루는 기의 질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① “태허 가운데 응취한 것은[무기적 물질] 무겁고 혼탁하여 다른 사물이 침투할 수가 없다.”

② “식물은 땅에 뿌리박고 있어서 오행이 결합한 땅의 유형적 기를 받아서 성장한다. … 다만 형질만 있고 성은 없다.”

③ “동물은 땅 위로 나와서 오행의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은 기를 받아 태어난다. 형체가 신으로써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각기 자신의 성을 머금고 있다.”(생성의 철학, 267-268 요약)

④ “인간만이 순수한 형태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청통의 기 즉 신기 혹은 신리를 그대로 자신의 내적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의 본체가 영민하면 할수록 그 작용도 더욱 광대하다.”

이상 인용문을 볼 때, 기질에 관한 왕선산의 특별한 설명은 없지만, 자연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는 청탁과 경중, 응고와 유동, 폐쇄와 투과(대소?) 등과 같은 기질의 성질에 대한 설명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물체는 대체로 탁하고 무거우며 응고된 기질의 운동이며 반면 인간의 정신은 맑고, 가볍고, 유동적 기질의 운동이며 전자는 서로 폐쇄되어 있고 후자는 서로 투과한다. 서로 투과하므로 상호작용하고 서로 감응한다.

3)

그런데 기는 하나이다. 그 기는 사실 음양 두 기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상호작용한다는 면에서 하나라고 한다. 이 하나의 기가 어떻게 해서 위와 같이 자연의 범주나 층위를 구분하는 여러 기질로 나누어지는가? 이규성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각종 물질의 물리적 작용은 응고된 형질의 부분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질서를 유지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은 그 속에 내재하는 성 때문이다.”(생성의 철학, 220)

“동물의 수준으로 올라가면 성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많으므로 욕망과 지각의 능력을 갖는다. 이것은 청통지리라는 자유로운 투과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생성의 철학, 220)

“유에 따라 사물이 다른 운동성을 보이는 것은 형질의 응고성이 지니는 차이와 본체를 한정적으로 품수 받은 양의 결합 결과이다.”(생성의 철학, 222)

“인간은 형질의 개체성을 넘어 만물에 감응하는 잠재력을 지닌다.” (생성의 철학, 220)

“성은 사물과 인간이 서로 차이가 있으나 신묘성 즉 형질의 폐쇄성을 관통하는 관철의 힘을 가진다.”(생성의 철학, 222)

이상의 구절을 볼 때, 성과 형질이 구분된다. 형질은 응고적이며 성은 관통적이다. 사물로 갈수록 형질이 많고 인간으로 갈수록 성이 많으니 사물은 응고적이고 인간은 관통적이다. 그런데 성은 리가 형질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질은 어떻게 나오는가? 기가 응결하여 형질이 되었다고 한다.

“이가 형질에 내재한 것을 성이라고 한다. 음양의 내재적 감응지리가 사물의 성이다. 이것을 왕선산은 건순지성*이라 한다. 그러나 기의 응결인 형질의 응결 정도와 방식에 따라 수많은 다양한 사물이 형성된다.”(생성의 철학, 219)

이 구절에서 성은 음양의 상호작용 리의 작용으로 설명된다. 반면 형질은 기의 응결로 설명된다. 여기서 기의 응결이란 무슨 뜻인지가 모호하다. 기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기는 부단히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 가운데 양기에 대립하는 음기로 보기도 어렵다. 음기 역시 수렴하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양기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억지로 추측하건대, 기의 응결이란 기의 여러 종류를 전제로 하고 이 여러 기가 상호 달라붙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마치 8괘나 64괘가 여러 효의 층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결국, 여러 기가 달라붙으면 기가 탁해지고 무거워지고 운동성이 느려지는 것이어서 물질적인 것으로 된다는 말로 보인다. 거꾸로 기가 응결을 벗어나 순전해지면, 자신의 순수성을 회복함으로써 가볍고, 맑으며 유동적인 것으로 된다는 말로 보인다.

주*) 곧 설명하겠지만, 순전한 기는 인간 마음의 질을 지닌다. 여기서 성이 ‘건순지성’이라고 하는데, 이 성은 이런 순전한 상태의 기에서 나타나는 리를 의미할 것이다. 건순지성은 인간의 마음에 나타나는 리 즉 심성을 ‘청통지리’라고 할 때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기의 음양이라는 운동과 달리 기의 응결과 해소 즉 취산이라는 운동 역시 존재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음양의 운동을 가로 운동이라 하면, 취산의 운동은 음양 운동과 수직하는 운동으로 그려 보면 전체의 운동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파의 운동에서 파장(음양 운동)과 파고(취산) 사이의 관계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다.

4)

여러 기의 취산에 의해 물질과 정신이라는 물질의 층위가 발생한다. 그러면 여러 기에서 각 기는 하나의 차원을 이루어 그 속에서 음양의 운동을 이룬다. 이런 운동을 통해 음양의 순열조합이 만들어진다.

“현상 세계도 ‘수많은’ ‘다양한’ 이라는 규정을 갖는다. 이 다수성의 출현 과정은 음양의 상징인 양효와 음효가 6열로 배열되어 64괘를 형성하며 이의 순열 조합에 의해 수가 증가되는 방식으로 확산된다.“(생성의 철학, 149)

“단순한 본체는 순열조합적 과정으로 현상화한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하게 증가한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음양의 재출현에 불과하다.”(150)

이상의 설명은 왕선산에 대한 이규성의 해석으로 보인다. 이규성의 설명을 검토해 보면, 기가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된다. 이런 층위에서 음양 운동이 이루는 순열조합에서 사물의 범주가 출현하며 개별 사물은 하나의 복합적인 음양의 운동 상태가 된다.

이런 설명이 정확하게 왕선산의 자연 설명에서 나오는지 필자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규성의 설명을 따르자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설명이라 하겠다. 사실 이런 설명은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음양으로 오행을 설명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발상에 속한다.

음양으로 오행이 설명된다면, 이때 오행은 4괘로 설명된다. 즉 음양이 중첩되면서 4괘가 생기고 그 각각에 오행이 대입되는데 이런 발상을 확장하면 운동 상태에 있는 만물은 각 층위에서 음과 양의 중첩적으로 조합하여 이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이규성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8괘로 보면 이 괘는 화이고 감 괘는 수인데, 양 괘는 상반적인 모습을 한다.

5)

황종희에서 개체는 본체가 없으며 만유는 기의 운동이 지나가는 매듭에 불과하다. 반면 왕선산에서 기는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각 층위에서 음양이 상호작용한다. 이를 통해 만물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는 동시에 그 음양의 운동을 통해 상호 소통한다. .

그렇다면, 아직 중층적 운동을 전개하기 전 순전한 원초적인 기 즉 그 기의 가장 근본적인 본체는 무엇인가? 이규성은 왕선산의 체계를 범신론에 빗대어 범심론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심이란 곧 기체의 본질을 의미한다.

원초적인 기가 심적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는 응결하면 물적인 기질에 이른다. 그 기질이 해소되어 순전하게 되면, 그 기질은 유동적이며 영묘하게 된다.

“실재는 유적 본성으로 구획되어 있지만, 그 경계선을 잘라서 볼 수 없는 것은 우주의 연속적 본성에 기인한다. 실재의 궁극적 구조는 고체성의 극한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 연속성에서 얻어진다.”(생성의 철학, 260)

“우주의 본질이 심리적 원리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경험된 것을 본질로서 유추해낸 것이다. … 세계의 본질은 연속적 흐름으로서 하나의 생명 원리이다.”(생성의 철학, 258쪽)

이와 같이 사물과 인간을 이루는 우주적 기는 본질적으로 마음이다. 마음이 우주적 기의 본체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지만*, 우리로서는 이규성의 주장대로 일단 우주적 기의 본체가 마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가자.

주*) 여기서 이규성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을 상정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런 목적론적 우주론이 왕선산에게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목적론적 체계를 인정하더라도 원초적 기가 심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확립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물론자처럼 원초적 기의 본질은 물질적이지만, 이로부터 정신적인 기질이 발생한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이규성은 왕선산의 체계가 목적론은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왜냐하면, 왕선산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기질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세계일 뿐이며, 여기서 개별 사물은 곧바로 우주적 기와 통하기 때문이라 한다.

6)

이런 발상에서 이규성의 철학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개별 사물은 마치 남녀와 같이 자기의 층위에서 음양이 운동하는 치우친 상태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개별 사물은 중정으로 복귀하려 하는 운동을 전개하려 하며, 그 때문에 자기와 대립하는 것에서 힘을 빌려오는 상보적 관계를 맺는다. 이를 상반 상성의 관계로 규정하였다.

이제 하나의 사물은 여러 층위를 지니고 각 층위에서 음양이 운동하는 것이라 한다면, 사물들의 상반상성의 관계는 층위를 넘어서까지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층위가 중첩되었다고 할 때, 아래층과 위층의 음양이 서로 교차해서 관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예를 들어 이괘와 감괘의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물은 감 괘이니(가운데 층이 양), 화는 이 괘(가운데 음)이니 서로 상반한다. 말하자면 가운데 층에서 음은 가운데 층의 양을 끌어당기고 아래층이나 위층에서 양은 마찬가지 층위에서 음을 끌어당기는 관계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 층위의 복합체인 사물들 사이에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관계가 성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이제 사물은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고 층위 간에 음양 운동이 서로 교차할 수 있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한 사물의 운동상태에서 나타나는 음양의 상반상성의 관계를 만물 간에 여러 층위에서 생겨나는 음양의 상반상성의 관계로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서 이규성은 소통성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앞에서 황종희의 경우, 사물은 본체를 결여한 채 홀리즘적 방식으로 소통했다. 그런데 왕선산은 위에서 보듯이 사물의 고유한 본체를 통해 자주성을 인정한 채 동시에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지금 저 현상은 하늘의 색과 땅의 색, 순수한 것과 잡된 것으로 인해 문채를 얻고, 장단과 종횡으로 인해 양적 한도를 얻는다. 견고하거나 약하고 움직이거나 멈추어서 그로 인해 형질을 얻고 대소와 동이로 인해 고유한 경향성을 얻는다. 일월성신으로 인해 광명을 얻고 진흙이나 흑색 토양으로 인해 산물을 얻는다. 초목과 꽃과 열매로 인해 재물을 얻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산과 평원으로 인해 절기를 얻는다. 귀는 구멍을 열어 들을 수 있으며 눈은 눈동자를 가지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로 통일되게 된다. 현상은 다양성으로만 언제나 있을 수 없으므로 역의 논리로 통일된다.”(232 재인용)

7)

사물의 본성이 출현하는 기질의 문제는 추상적인 차원이다. 이것은 추상적 차원에서 사물의 본성을 다룬다. 그런데 자연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복합체다. 인간을 예로 들자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의 복합체다. 그러므로 복합적인 사물은 본성이 출현하는 기질 말고 다른 물질의 기질도 동시에 가지면서 여기서 사물의 도와 기[器]의 관계가 출현하게 된다.

하나의 사물은 음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본성을 지닌다. 이 본성은 운동 속에서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지만, 다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니, 이 본성은 지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하나의 사물은 그 본성의 바탕이 되는 기질 즉 형질이 있다. 이것이 곧 기[器]이다. 사물의 본성은 그 바탕이 되는 형질의 음양 운동 위에 또는 그 속에서 출현하니, 여기서 출현하는 본성을 도라 한다.

여기서 도와 기[器]의 관계가 문제 된다. 앞에서 이규성은 기질의 관계를 기의 중층적 발전 개념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다시 도기의 관계는 기질 층간 관계가 더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그 관계는 우선 수용성 즉 담지자 개념이다.

“기가 토대가 되고 도는 그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는 추상적 원리가 의존하는 그릇이다. 그것은 기와 그것의 산물인 만물을 질서의 담지자로서 이해하게 하는 개념이다.”(생성의 철학, 256)

기[器]는 본성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한계 때문에 본성이 다양하게 발생하며 여기서 하나의 사물에서 개별적인 다양성이 나타나게 된다. 즉 이 즉 도는 하나지만, 기[器]는 다양하다. 하나의 도는 순수하지만, 기 속에 받아들여진 도는 불순하다.

또는 이규성은 왕선산에서 도와 기[器]의 관계를 다시 체용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든, 여기서 두 기질의 관계, 본성과 기의 관계는 모호하지만, 대체로 두 요소의 동시적 필요성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느 것도 결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물체를 이루는 층위 간에 음양의 교차 운동이 가능하다면, 도와 기의 관계는 결국 하나의 사물 속에 복합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로 볼 수 있으니, 여기서 도와 기의 관계를 앞에서 말한 층간 음양의 교차 운동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규성의 생성철학(5) – 왕선산의 존재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5)-왕선산의 존재론

 

1)

앞에서 말했듯이 이규성은 90년대 초반까지 황종희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일원적 기라는 실재로부터 소통성의 가능성을 찾았다. 그러나 우주적 기의 음양이 교체하는 운동 양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규성의 판단에 따르지만, 우주적 기의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부당하게도 유가의 차별적 질서로 되돌아갔으며, 현성파는 무차별 평등 사회를 꿈꾸었지만, 다만 기의 흐름이 변화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일원적 기의 운동으로는 만물의 소통성의 토대를 마련할 수는 있지만, 홀리즘의 위험을 간직한다.

90년대 중 후반 이후 한국 사회의 시대적 정신이 변화했다. 90년 초반까지 연대를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던 운동 세력은 후퇴하고 서구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불어닥쳤다. 이 사상은 여러 면모를 지니지만, 그 핵심은 개인의 자발성에 대한 강조였다. 그 때문에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 소통적 연대라는 새로운 시대 정신이 출현했다.

2001년 이규성은 <왕선산-생성의 철학>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추구했던 형이상학을 왕선산의 철학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1 이규성의 책의 서문에서 황종희의 철학은 내재의 철학인데, 그를 다루면서 생성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졌고 생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에 나오는 ‘내재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은 서로 동전의 이면으로 보이고 다만 강조점을 어디에 두었는가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종희와 왕선산에 관한 이규성의 해석을 면밀하게 비교해 보면, 두 철학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황종희의 ‘내재 철학’에서는 본체라는 개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왕선산의 ‘생성 철학’에서는 본체라는 개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물의 본체 개념이 없으면, 홀리즘의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사물의 본체 개념을 전제로 하면 개체의 자주성이 확립되지만, 개체들은 서로 독립하여 연대 가능성이 약화된다. 이를 통해 이규성이 황종희를 떠나 왕선산으로 이행한 이유가 밝혀진다. 즉 이런 이행은 이규성이 시대 정신의 변화에 따라 소통성 못지않게 개인의 자발성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규성이 소통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통성을 홀리즘적 단계에서 고양시켜 개인의 자발성을 인정하면서도 소통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자 한다. 이것은 이규성 자신의 철학적 의식 자체의 발전을 의미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이규성의 철학적 정신은 이때부터 드러난다고 보겠다. 문제는 황종희의 철학에서와 달리 왕선산의 철학은 음양 두 기의 운동으로부터 본체를 확립하기는 하는데, 여기서 어떻게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가이다. 이제 왕선산의 철학으로부터 소통 가능성을 찾기 위해 고투하는 이규성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신 유가 형이상학 전반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이다. 주희에서 태극의 동정이 음양을 낳는다. 황종희에서 음양은 하나의 기의 두 대립적 양태다. 이 음양의 동정이 교체하는 양상이 곧 이법이다. 그러나 왕선산에 이르면, 그 관계는 달라진다.

왕선산에서 음양 두 기(음양 대신 인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하나의 기이면서 동시에 둘로 나누어져 운동한다. 왕선산에서 음양 자체가 실체 자체이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상호작용하니 그런 점에서 음양은 하나의 기다.

이 운동 속에서 음양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그런 균형 상태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균형 상태가 태극이며 태극은 운동이 발전하여 균형에 이른 상태라면, 아직 운동이 발전하지 않은 미발의 상태가 곧 무극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지에서 운동으로 다시 정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끊임없는 운동일 뿐이다. 음양의 균형 속에 나타나는 정지는 절대적 정지가 아니라 음양이 운동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정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태극은 음양의 기의 운동과정이 나타내는 매순간 조화의 극치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화에서의 조화의 극치이다. 따라서 태극은 기라는 실체의 속성이다.”(생성의 철학, 155)

음양의 동정이 만물을 이루니 여기서 만물은 나름대로 고유한 본체를 지닌다. 그 고유한 본체는 기의 동정 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동정 자체가 이루는 균형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체는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질료적 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일월의 형체는 만고불변이다라고 했다. 형체란 그 규모와 겉모습을 말하며 질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질료는 날로 바뀌나[일신] 형체는 여일하다.”(왕선산, 사문록, 생성의 철학, 176 재인용)

 

3)

그러므로 왕선산에서 현상적 사물은 “양면적 성격과 조화로운 규칙성”을 지니며, 이는 음양의 “상호 교환 관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139)라고 한다. 양자가 균형을 이루는 모습 즉 ‘혼융한 합일’은 곧 ‘태화’이며, ‘충화’다. 또는 양자 관계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이기지 않는[불상리 불상승] 관계에 있다.”(159)

“그러나 그[태극]의 실제는 음양의 혼융한 합일일 뿐이기 때문에 음양이라 이름 지을 수도 없다. 그리하여 다만 그 궁극성 때문에 더할 것이 없는 것을 서술하여 태극이라 한 것이다…. 음양의 본체는 인온이 서로 얻고 동화하면서 변화하여 천지에 가득차 있으니, 이것이이른바 태화이다. 장자는 것을 위대한 조화라고 했다.”(왕선산, 사문록, 생성의 철학, 154, 재인용)

“음과 양이 적대함이 없는 것을 충이라 한다. 그것의 청탁이 작용을 달리하고 다수의 나뉨이 평등하지 않으나 공을 같이 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는 것을 화라고 한다. 충화가 천지에 유행하고 천지는 그것을 완비하여 서로 화합함으로써 소산물을 널리 풍부하게 한다.”(생성의 철학, 158)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왕선산의 철학을 변역의 철학이며 회통의 철학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음양과 동정, 태극과 무극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마치 촛불2과 같다. 촛불은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고요한 촛불의 형태를 유지한다. 이 힘의 균형 속에 이루어지는 촛불의 모습이 곧 촛불의 형상이며, 그것은 정지한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가운데서 성립하는 균형을 의미한다. 이규성은 이런 왕선산의 도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의 통일 개념과 닮았다고 한다.

 

4)

음양의 운동 속에서 운동은 항상 균형만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 운동은 상호 부조화하는 가운데 서로 침범하는 대립 한 가운데 존재한다. 그 균형은 곧 운동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시종도 없으며, 그 사이에 휴지나 틈도 없다. 이런 운동 속에서 사물이 형성되니 그 운동의 균형은 일정한 ‘수’를 이룬다. 사물의 운동 상태는 항상 부조화하고 서로 침범하는 대립 속에 있으므로 그것은 운동의 ‘상’을 나타낸다.

“태극은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에 있으면서 시초도 없고 종말도 없어 틈이 있을 수도 없다.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도 모두 그것의 상이며 하나에서 만 가지에 이르기까지 수는 모두 그것의 수이다.”(생성의 철학, 157)

음양의 운동이 조화의 균형 상태를 이탈하지 않을 때 중정이지만, 음양의 운동은 항상 대립 속으로 나가니, 이런 운동 상태는 균형으로부터 이탈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중정의 상태로 돌아가는 시기이니 곧 변역의 시기다.

왕선산의 철학에 따르자면, 주역의 64괘는 사물의 균형 상태를 표현하지 않는다. 주역의 64괘는 사물이 중점으로부터 이탈한 상태 즉 변역의 상태를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은 다시 중점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탈과 복귀, 변역과 중정이 교체되는 이런 운동을 이규성은 “반대적인 것의 화이부쟁” 또는 “일지일지의 운동”(생성의 철학, 167)으로 표현한다.

 

5)

왕선산의 존재론은 두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하나의 관점에서 운동은 본체에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운동 상태 자체는 본체로부터 이탈한 상태다. 투쟁은 운동의 비본질적 성질이다. 그것은 극복되고 순화될 과정상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161)

이렇게 각 사물이 고유한 본체가 존재하는 세계는 한편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처럼 각자 자기의 이데아를 지켜나가는 세계다. 따라서 이 세계관에서 양명학의 일원적 기의 운동에서나 또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의 창조적 진화에서 보듯 “새로운 요소의 생기와 이것이 과거의 단순성과 결합하여 질적으로 좀더 복잡한 총체성을 생산해 나간다는 전진적 존재론은 나오지 않는다.”(생성의 철학, 161)

“이로써 그는 중국 특유의 유기적 세계관을 방대하게 형성했다. 따라서 그의 세계관은 기계론보다는 역동적이지만, 전진적 친화적 세계관에 비해서는 회귀적인 원환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생성의 철학, 164)

그러나 왕선산의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만물은 이런 균형을 본체로 하지만, 그 자신은 어떤 운동 상태에 있다. 즉 만물은 균형을 중심으로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고 다시 중심으로 복귀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의 상호 투쟁과 상호 보완이라는 관계가 나온다.

예를 들어 남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양에 치우친 상태이며 여자는 마찬가지 인간을 중심으로 음에 치우친 상태이니, 이렇게 각자 반대로 치우친 존재이므로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이미 자기 내에서 중심인 인간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그런 가운데 서로 복귀하는 힘을 빌려주고 빌려 받는 상보적 관계를 이룬다. 이 관계가 곧 상반상성의 관계이다. 이렇게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남녀는 사회적으로 중심의 통일을 이룬다. 이 중심의 통일은 남녀 각자가 자기의 중심으로 복귀한 것이며 동시에 남녀가 이루는 통일체이다.

자연에서 사물은 자기가 존재하는 범주나 층위 속에서3 각자 서로 대립하는 음과 양으로서 상호 투쟁하는 동시에 서로 보완한다. 사람에서 남녀가 그러하다면, 지배층과 피지배층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각층에서 이런 상반상성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늘과 땅, 물과 불, 꽃과 새는 서로 싸우고 서로 돕는다.

사물의 균형과 고유성의 측면에서 사물은 개별적이며 자주성을 지닌다. 그러나 사물이 운동 상태에 있어서 자기 내로 복귀하려 하며 상반상성의 관계에 있다는 측면에서 소통성을 지닌다. 이규성이 왕선산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런 자주성과 소통성이 동시에 가능한 형이상학적 토대이다.

 

6)

그러나 문제는 이 본체의 모습이다. 이규성은 본체에 대한 설명과 관련해서 왕선산의 오류를 지적한다. 왕선산의 음양이 동정하는 운동을 개념적으로 본다면 음과 양은 상호 평등할 뿐이다.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위는 아니며 다만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하나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도 왕선산은 운동 가운데 양과 음의 역할을 분담하며 양이 음에 대해 우위를 가진다고 본다. 양은 강건하며 음은 유순하니, 건의 강건성이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와 변화의 주인이며” 음의 유순성은 리를 지켜나가는 것 즉 “변화를 수용하여 작용을 성취하는 것”(생성의 철학, 172)일 뿐이다.

양과 음의 통일이 사물을 이루지만, 그 가운데 양이 음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은 왕선산 자신의 형이상학으로부터의 이탈이며 결국 전통적 유가 질서로 복귀하려는 것을 정당화할 뿐이다. 이규성은 음양에 대한 이런 해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문맥에서 강건성은 집단을 응집하는 지배의 주체성이 된다. 그것은 집단을 새로운 미래로 열어젖히는 창조성이 아니라 군거 본능에 지배된 곤충적 주체성이 된다. 집단화된 음의 세력은 강건성의 주체에 의부해야만 자연 질서에 따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생성의 철학, 173)

[회원동정] 오주연 회원 <제2회 중천학술상> 수상(2026년 3월 14일) [한철연 소식]

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주연(건국대) 회원이 중천철학재단과 중국철학회가 선정하는 제2회 중천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안동섭 울산대 교수와 공동수상했습니다. 시상식은 3월 14일 원주 호텔인터불고에서 열렸습니다.

수상 논문은  「주희 철학에서 앎과 실천의 관계에 관한 고찰 – 진지(眞知)를 중심으로」(2025) 입니다. 한국중국학회에서 발간하는 『중국학』 제113집(2025년 08월 31일)에 게재되었습니다.

2024년 「주자학의 도덕실천동력에 관한 연구 : 주희의 진지와 퇴계의 리자도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오주연 회원은 2019년 즈음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세미나 활동을 시작하였고, 얼마전 출간된 단행본 『다시, 동학』(동녘, 2026.05.11)을 분과원들과 함께 썼습니다.  2023년 5월에 ‘고대 중국의 비극적 세계관과 인간의 조건-맹자의 명론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월례발표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학술논문으로 「다산 정약용의 현능론 연구 -상서고훈(尙書古訓)을 중심으로 -」(2026), 「덕 윤리와 정약용의 덕론」(2023) 등이 있으며 한중 전통철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자리에서 활발한 학술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주연 회원은 뜻깊은 상을 받게되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유학이 말하는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탐구하는 연구를 지속할 것’이라며 자신의 의지를 밝혔습니다. 앞으로 오주연 선생님의 활발한 연구와 활동을 기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주투데이» 기사 링크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참조 : https://www.wonju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9576

 

출처 : 원주투데이(https://www.wonjutoday.co.kr)

 

 

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

박제와 파묘의 정치학, 비난의 칼날인가 비판의 죽비인가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박제와 파묘의 정치학, 비난의 칼날인가 비판의 죽비인가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26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유현상(숭실대학교)

 

데이터는 AI산업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이용자의 명령 혹은 의도에 부합하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AI는 가능한 한 많은 관련 데이터를 검토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데이터 축적은 AI산업 발전을 위한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용량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상 자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데이터로 저장되는 정보의 상당량은 말과 글로 생산된다. 한번 생산된 말과 글이 디지털 세계에 등록되는 순간 영구히 저장된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이를 ‘박제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저장된 정보는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 다시 소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일들을 최근에는 ‘파묘된다’고도 한다. ‘파묘’라는 단어는 동명의 영화가 화제가 된 이후에 빈번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파묘’라는 단어를 쓸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정치권의 말과 글들이 ‘박제’되었다가 ‘파묘’로 이어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다양한 종류의 SNS와 유튜브 같은 플랫폼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 주권자들이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히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 그 자체가 나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마이크를 잡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타인의 박제된 말과 글을 소환해 파묘하는 방법들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인들의 말에 많이 주목한다. 물론 주권자는 정치인들이 일관된 정치적 입장과 행보를 요구할 수 있다. 변절과 배신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으면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기 어려운 이유이다. 따라서 ‘박제’된 말과 글이 현재의 모습과 불일치하거나 모순되는 것으로 입증될 때 ‘파묘’는 매우 예리한 칼이 된다. 우려되는 점은 합리적인 비판을 통해 민주적 역량을 강화하는 약속 대련 정도로 그칠 논쟁이 잘 벼린 칼날을 휘두르는 진검승부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때 동일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활동했던 정치세력이나 평론가들도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처럼 상처 주는 말들로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같은 진영에 속해 있었다는 말인가?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판의 언어로 그쳐야지 비난의 언어로 치명상을 입히려 해서는 안 된다. 적을 만들기는 쉬워도 연대할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서로 상처를 깊게 주고 받은 사이는 더더욱 연대하기 어렵다. 비난의 언어는 비판의 언어보다 훨씬 주목받는 ‘박제’가 되고 너무도 손쉽게 ‘파묘’될 수밖에 없다.

‘박제’와 ‘파묘’는 정치인들이나 공개적으로 언급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신중한 언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의 아이러니가 예상된다. 그것은 박제된 타인의 말과 글을 파묘하는 방법으로 공격했던 사람들의 언행 역시 박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락가락하는 정치인들의 언사야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치는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판단은 수학적 판단이 될 수 없다. 정치가 상황과 시대 정신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으면 수구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명심보감>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내 몸을 베는 칼이다.” 비판의 죽비는 정신을 차리게 하지만 비난의 칼은 동지와 내 영혼을 베어버릴 수 있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614

이규성의 생성 철학(4) – 왕명 좌파와 그 한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4)-왕명 좌파와 그 한계

 

1)

이규성의 책 황종희- 내재의 철학 가운데 뒷부분(6장)은 양명 좌파로 알려진 현성파의 철학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이지가 집중적으로 논의되는데(7장),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이 책이 쓰인 시기 즉 90년대 중반의 시대적 분위를 잘 보여준다.

89년 민주화 이후 그런 가운데 급진적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회적으로 평등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적 변혁의 전망에 들뜨기 시작했다. 이런 전망에 기초해 남북의 통일을 향한 염원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치적 실패(군부의 선거를 통한 재집권)로 좌절한 지식인들은 마침내 필사적인 투쟁을 전개했으니, 이 시기 많은 청년이 좌절과 분노 속에서 목숨을 던졌다. 다른 한편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기왕에 고조된 심정은 갈피를 잡지 못해 허둥거렸다.

이런 시기 이규성은 양명학의 형이상학에 기초하지만, 유교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황종희의 철학에 멈춰있을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양명 좌파를 통해 제시된 평등주의적 경향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식은 이규성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아래는 186-188쪽에 걸쳐 주장된 이규성의 논리를 정리한 것이다.

① “어느 경우에는 기존 문화의 전반적인 파괴가 지배적이고 어느 경우에는 문화의 비판적 계승이 지배적이다.”

② “모든 유형의 저항들의 인성론적 기초는 … 저 원융한 흐름을 추구하는 무의식일 것이다.” “서로 융통하는 우호성을 상징하는 행위를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요구한다.”(여기서 ‘원용한 흐름’ ‘서로 융통하는 우호성’은 현성파의 무차별성과 평등성을 의미한다.

③ “명대 이지의 급진주의도 분명 이러한 방향을 어렴풋이 암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④ “그러나 이러한 실마리 적 암시도 육상산과 왕양명 및 현성파의 예비적 전개가 있어야 했다.”

⑤ “황종희 철학의 외재적 근거는 저들에게 있는 것이 될 것이다.”(황종희는 현성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통해 자기의 보수적 논리를 확립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2)

현성파의 근본 입장은 무차별성이나 평등성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기가 운동한 상태라고 한다면, 각 사물은 발산하면서 수렴하고 다시 발산하니 어떤 고정된 본체를 지니지 못하고 서로 연결되며, 그런 가운데 만유는 이 기의 운동이 전개하는 하나의 매듭에 지나지 않으니 서로 무차별하며 평등하다.

이런 우주 개념에 따르자면, 인간에게서 성과 욕정도 하나의 운동 단계일 뿐이며 성을 대변하는 지배 계급과 욕을 대변하는 피지배 계급도 평등한 무차별적 존재일 뿐이다. 이미 세계는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은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존재하고 또 일정한 시기가 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각자는 우주적 기의 운동 속에 참여하여 자신의 현존 자체에서 만족하니 “현재의 마음이 곧 올바른 생각이며”(황종희, 197, 왕심재 재인용), 현재에 만족한다. 이것이 곧 현성 즉 ‘현재 이루어져 있다’라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욕망과 현재, 민중, 쾌락을 긍정하는 입장이 되며, 그런 만큼 지배 질서와 도덕을 거부하는 저항적 의식이 된다. 왕심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라.

“그러므로 도란 본질이며, 천덕인 양지여서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양지를 따라서 즐겨 타인과 같아지게 되면 마음이 충만하게 퍼져 열리게 되어 천지는 변화하고 초목은 번성한다.”(황종희, 197, 재인용)

이런 입장에 서면 도덕 질서라는 명분으로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입장은 거부된다.

“작위적으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을 최상의 진리로 삼는다. 새가 울고 꽃은 지며 산은 치솟고 냇물은 흐른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여름에는 시원한 갈옷을 입고 겨울에는 모피옷을 입는다. 지극한 도는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황종희, 198, 왕심재 재인용)

이규성에 따르면 황종희는 이런 현성파의 논리에 대해 비판했다고 한다. 현성파를 따르면, 자칫 “광기와 방탕이라는 하나의 길로 들어간다”라는 것이다. 황종희는 그 때문에 유행에 머무르지 않고 주재를 다시 회복하려 했으나, 이규성에 따르면 “현성론에 대한 황종희의 우려와 대항은 사대부 계급의 헤게모니 장악과 관련된 정치적 성격의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규성의 판단에서 이규성이 황종희보다는 차라리 현성론에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어떻게 보면 현성파는 기존 질서나 도덕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 이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나갈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기의 운동에는 이런 양태도 있고 저런 양태도 있으니, 우주적 기와 합일하는 인간으로서는 기의 움직임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항한다는 행동 자체가 기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현성파는 내적 망명이나 현실 도피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활동을 전개한 철학자가 이지다. 그는 물론 이론적 활동에 그쳤지만, 적어도 그런 비판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특출하다. 이규성 역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이지의 비판은 곧 도리를 가르치는 것은 거짓된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는 입장에서다. 이는 사회의 지배적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오히려 동심 즉 자연적 마음을 그대로 두면, 기의 운동에 합일하여 살아가면서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독서인들은 겉으로는 도학을 하고 속으로는 부귀를 추구한다. 유자의 우아한 옷을 입었으나 행동은 개돼지와 같다. … 재주와 학식이 없는데도 성인 도학을 강학한다는 이름으로 부귀를 요구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빈곤하고 천할 것이기 때문이다.”(황종희, 226, 이지 재인용)

“도덕적 인격은 특권 집단의 비특권 집단에 대한 거리와 부정에 기초한 고립된 인격이라면, 동심은 인격의 자기 위세가 없는 ‘자기도 없고 타인도 없는’ 마음이다.”(황종희, 236)

 

4)

이지 자신은 도덕을 비판하면서 사회적 질서도 부정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동류이고 동체”라는 의식을 지녔으며, 제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부정한 대동 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런 비판적이며 동시에 평등한 의식은 아무런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지가 기존의 도학을 비판한 것은 그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소위 회의주의의 역설에 붙들리게 된다. 회의주의는 어떤 주장도 진리가 될 수 없다고 회의하지만, 회의 자신은 스스로 진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회의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주장이며 회의주의 자신의 논리에 따라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회의주의의 역설은 기존의 도학을 비판하는 이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기존의 도학이 우주적 기에 대한 하나의 강요라면 이지의 비판 역시 하나의 개입이니, 그 역시 하나의 강요가 아닌가?

회의주의가 결국 판단중지에 이르러 현실을 방임하고 말았듯이 이지 역시 마찬가지로 방임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현성파의 근거는 곧 우주와 합일한다는 것에 있는데, 이는 결국 우주적 기의 운동이 되는 대로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수동적 태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이지는 결국 현실을 벗어나 중이 되고 말았다.

이규성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현성파가 주장하는 무차별성과 평등성은 이규성이 철학적으로 추구하던 개방성과 소통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성파에 따르면 그저 우주적 기의 운동이 흘러가는 대로 그것이 발산하고 수렴하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이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거꾸로 현실을 옹호하는 이론이 되어 버린다. 이규성으로서는 이런 현실 방임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규성은 현성파에 대립하는 황종희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없다. 황종희는 현성파와 동일한 형이상학적 전제 즉 기 일원론에 기초해서 전통 질서를 옹호하고자 했는데, 일단 여기서 질서는 하나의 양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주희와 같은 주리론자에게서 보이는 것과 같은 강력함을 발휘할 수 없다. 더구나 이규성 자신이 90년대 초반에 가졌던 평등주의적 성향은 황종희에게서 나타나는 억압적 질서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현성파나 황종희나 모두 양명학적 형이상학에 기초한다. 그것은 하나의 기가 운동하여 전체를 관통한다는 형이상학인데 이런 입장은 황종희처럼 정통 질서를 한정적인 방식으로 옹호하던가 아니면 현성파처럼 비판적이지만, 방임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기 일원론은 이규성이 바라는 대로 소통성의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회를 지향해 나가는 적극적인 힘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개방성과 소통성을 옹호하는 형이상학을 발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90년 중반 그가 기울어졌던 양명학을 떠나게 된다.1 그 후 그는 왕선산의 기 철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규성이 빠졌던 딜레마는 어쩌면 90년대 중반 지식인이 부딪혔던 딜레마와 닮았다. 평등한 사회주의에 관한 관심은 고조되었으나 정작 사회주의 진영은 무너지고 만 그 황당함 앞에 지식인은 당혹에 빠졌는데 이규성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지속론 대 공간론 :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천 하룻밤 이야기]

지속론 대 공간론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 자연배후학으로서 자연론 대 문명론

– 2026 04 20. 우수(雨水)

*

– 선생님하늘에 나는 새와 저 산의 짐승들을 누가 만들었어요? + 하나님이 만들었지

–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과해와 달은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지,

– 선생님과 아버지 오마니는 누가 만들었나요? + 물론 하느님이 만들었지

–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요? + 그게 하나님이지.

–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드네요, + 학문적으로 동어 반복이라 하지.

벩송은 이것을 악순환이라고 하고논리상으로 선전제미해결의 오류라고 부른답니다.

*

생각한다는 기원에는 무엇이 있는가생각한다는 인간의 사고 또는 사유를 우선 뒤로 젖혀두자우주든 상상작용의 대상이든원리든 기원이든 하나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를 통일성 또는 단위라고 부르자(A)가 있다가 이외의 것을 하(Z)라 하자그런데 논리적 사고에서는 A가 있고 A아닌 것(non-A)가 있다고 한다이것을 누가 어떻게 나누느냐논리주의자들은 가와 하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아리스토텔레스든 하이덱거든 진리를 발견한다고 할 때, A 아닌 것이 아니라 A이라는 동일성의 논법에 있다.

(존재진리긍정단위), A 

:: (non- A, 나눌 수 없는 것)

[동일성이라는 원리를 먼저 있고, A는 non-A아닌 것이라는 모순율그리고 A와 non-A사이에 둘중의 하나 A는 맞고 non-A는 맞지 않는다는 배중율을 조작해 낼 것이다.]

동양에서는 가와 하를 음과 양이라 부르고 꼭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밤과 낮하루한해 등처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이라 한다다른 한편여와 남처럼 나누어지는 것은 둘 사이의 조화와 교감이 있다고 하지만 하나의 생명에서 나왔다고 한다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인데도 나누는 것에 문제가 생기니 불이(不二)라 한다.

*

유시민은 사회적 견해들에서 A와 B도 있고 AB교집합 C도 있다고 한다. A는 가치(공공)를 B는 탐욕(이익)에 선후 중경을 두고사람들은 한편으로 공공에 다른 한편으로 사적 이익에 관심으로 양명성을 지닌 쪽을 AB가 있다고 한다이런 견해를 철학사적으로 19세기에 공시태에서 본 사실을 평면적으로 구별하는 차이의 설명이다그 19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탐문하는 수학논리학자들은 존재의 근거가 A에 있다고 보았으며사고의 대상이라 하고논리의 상위(류개념신개념)를 버릴 수 없었다는 점에서 스콜라적이라 한다.

이런 수학논리를 확장하면서 벤 다이아그램을 2차원(평면)의 4경우, 3차원(공간)의 8경우, 4차원(무슨 위상?)의 16경우 등에서 항상 순열을 나열해보면이상하게도 각 조합들에서 공집합(여집합)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물론 4차원 이상을 경험과 구체성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지성의 추론작업에서 상상작용은 무한히 나갈 수 있다그럼에도 4차원이상의 경계(한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인간의 지성의 역량의 한 방편으로 정의(규정한정)한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고대 사유에서 유한과 무한의 논리적 차이가 있고근대에서 한계와 비한계의 미분화 또는 세분화에서 차히가 있으며이 차이와 차히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대수학과 알고리즘이 분리된다전자에서 우주의 기계적인 정적 통일성을 주장하고 후자에서 파동역학열역학전자기학 등의 동역학에서 지속의 통일성(정체성)의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19세기 말에 프왕까레는 공간의 차원이든추론의 차수의 등급이든세분화의 과정에서 중첩적 기억의 위상이든인간의 지적 역량의 협약(합의)이지진리의 기준이 아니라고 했다.

18세기의 유산으로 자연수의 무한(infini), 19세기 후반의 집합론으로 01사이의 소수들의 비한계(illimit, 무한계), 푸앙카레의 협약에 의한 비결정(indéterminé사이에서 인간이 맞다 틀리다는 진위 규정에 대해 또는 도덕적으로 선악 규정에 대해 반성 한다앵글로색슨에서는푸앙카레의 수학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앵글로색슨 수학논리학들이 설정하는 진위선악정부(정의 불의)라고 정의(la définition)를 기준으로 삼아서모든 단위들이 한정(définit)와 무한정(indéfini)로 구별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논리주의의 착각은 그들도 악순환파라독사불합리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래서 조건 안에서라고 하는데그 조건이 논리의 요청이며원리와 공리의 선인정즉 선전제미해결이다이런 사고가 펼쳐진 것도 언어학에서 공시태가 우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자연배후학에서 우주론이 우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통일성의 우선을 선가정하면서이런 방법에 따르지 않는 통시태 사유우주발생론 사유그리고 인간에서도 자연생성론을 배제 또는 악의 축처럼 다루었다. 21세기까지도.

*

이분법에서 자르기와 나누기의 문제가 올바로 제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왜냐하면 대상을 자를 수 있는지 또는 나누기한다는 데 참여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플라톤의 인식에서 선분의 비유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플라톤의 분할의 선분분할의 설명은 자르기가 아니라 나누기(참여하기)에 있을 것이다.

 이데아들  Ideas 에피스테메
 수학적대상들  Objets mathe
 사물들  Etres vivants 독사 (견해)
 그림자들  Images Ombre

플라톤의 이런 도식에 대해 후대에 여러 다른 방식으로 변환을 거치면서 설명의 도구로 삼았다우리는 간단히 3가지 정도만 보자하나는 지식의 대상은 상위 둘(에피스테메)에 있고하위 둘(독사)은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다루지도 않았다둘째는 경험적으로 보아 그림자를 보고 피라밑(사물)의 높이를 알 수 있듯이이런 유비로 추상적인 수학의 도형들을 보고 도형의 원형이 이데아를 안다고 해서 탐구의 단계로 보는 방식도 있다셋째는 상위의 인식은 지성(오성)의 대상이고 하위의 인식은 감성(미학)의 대상으로 여기며인식론적 구별을 인간의 역량에 대한 차이를 영혼과 신체에 대입시키는 방식이었다둘째의 계속성에서는 자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첫째와 셋째는 잘라서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는 쪽이다문제는 자르다와 공간의 계속(시간의 연속)의 구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엉뚱하게 대상을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차이를 찾으려 했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이데아를 볼 수 없는 직관의 것이지만수학적 대상들은 땅위의 측량에서처럼 도형을 그릴 수 있다인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차이는 대상의 추상화에 있고 공간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 여겼다이에 비해 사물들로서 신체는 볼 수 있는데이를 움직이는 동력(심성)은 볼 수 없는 것임에도 얼 또는 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이로서 상층의 이원성과 심층의 이원성이 전도된 사고방식이 아닌지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린 19세기 후반에 유기적 조직화로서 사회학과 심리학이 도래했다고 한다.

*

수학 논리주의자들이 진위선악미추의 상위로서 진선비의 선전제로 인정하는 것은 선분의 분할(자르기)의 인정 위에 선의 이데아를 올려놓았다물론 신학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의 하늘나라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천국(에테르)를 만들었던을 것을 유추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선의 이데아(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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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한 계열인 퀴니코스스토아 전통의 유물론자들은 선의 이데아를 상징기고 기호(추상)일 뿐이며진실로서 얼과 혼의 움직임이 먼저이고 기원(아르케)이라고 보았다상층의 최고 지위(위상토포스)를 사고 알 수 있듯이깊이(심층)에도 마그마와 같은 불덩어리로 되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생한 활동을 제시할 수 있었다순수유물론자들은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돌아다니는 원인노마드 원인)가 있다는 것이 실재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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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무관의 제왕)

<위의 도표와 이 도표 사이에서 어느쪽을 실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위의 것은 관념론으로 이것은 자연론 또는 순수 유물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로서 상위에서 직관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추상적 대상이 있고심층에서도 나눌 수는 없지만 실재성이 있다원의 아름다움과 기하학적 도형의 아름다움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후자의 발생하는 아름다움은 흔들리는 아름다움이며 회화에서 터너의 그림과 인상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의 이데아(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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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무관의 제왕)

<무관의 제왕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9)”에서 능동적 의미에 아나르키(무권위주의)에 대한 명칭이다. – 우리나라에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비하된 표현일 것이다. >

이로써 선분의 비유에서 자르기인지아니면 양면으로 나눌수 없는 이중성의 등장인지를 생각해보면인간의 사유는 양면으로 겹치기에 닮은 것은 같다들뢰즈가 파라노이아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스키조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영과 육은 동전의 앞뒤처럼 나눌 수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오랜 플라톤주의자아리스토텔레스의자유일신앙자스콜라주의자관념론자는 선의 이데아의 위계 도식에 열광하면서도자연에서 생명의 발생과 노마드의 발현의 발생론적 흐름을 악마 취급하였다그들이 미쳤으니푸꼬가 광기라고 부르는 것그것이 파라노이아그르려니 하지.

*

유시민이 A, AB, B의 도식은 사회라는 평면에서 공익과 사익에 대한 관점정도 인데이에 대해 반응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앵글로색슨 철학의 계보에 익숙하였기 때문이다이제 우리나라가 우리 입말로 우리 사유를 발현하고 창안하고 창발하는 시기가 되었다그것도 코로나 이후로 누리소통 덕분이다알파고 시나씨가 말하듯이 우리 젊은이들 세계와 소통하고 프앙까레 같은 협약을 탐색하고프란체스코 학파처럼 평결론으로 계약과 합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전지구적 활동의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유일신앙 (원리악순환)
A  C(AB) B
조화중항  역량 원자 비례중항
공산사회 노력 탐욕사회
자연 발산 (원인자발성)

[* 점들(points)과 얼들(Ames)을 같은 계열로 놓았던 철학자는 문헌적으로 라이프니츠였다참조브륑슈비크(1869-1944)의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p. 221] – [이 관점의 시초는 박홍규의 탁월한 견해대로 플라톤이었을 것이다참조: <류종렬: 20세기 철학자박홍규와 들뢰즈https://cafe.daum.net/milletune/REMI/14>;]

[* 노력(코나투스)의 이중계열이 있다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상층에서 표면으로 전개에 노력하였고심층에서 표면으로 노력(conatus)을 보았던 이는 홉스와 라이프니츠였다. –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10장 라이프니츠의 수학 철학, pp. 197-229]

[* 조화중항 대 비례중항의 기원은 퓌타고라스학파에 있으며이를 실질적으로 다룬 철학자는 플라톤이라 한다이런 의미에서 박홍규는 플라톤이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두고 다룬 첫째 철학자라고 평했다. – 참조 <마실에서 천사흘밤에서우수(雨水): 비례중항 대 조화중항https://cafe.daum.net/milletune/REM0/148>;]

*

지구는 둥글다고 하고지구가 스스로 자전하고 그리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으며태양계가 은하계 안에서 소용돌이 속의 일부로서 기나긴 시간 지속 속에서 활동(생성중이다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초기에는 태양계의 회오리의 조성하는 경과에 따라 수많은 지구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가다음으로 은하계 안에서 아마도 회오리의 조성의 정 반대편에 우리와 사유방향은 다르지만 비슷한 조건에서 우리 같은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그러다가 그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민을 하면서아마도 우주 안에는 저 먼 성단에서도수학적 우발성(포앙카레의 협약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과 같아서우주의 기나긴 지속 발생에서 45억년을 거쳐 온 지구와 같은 행성은 우주 안에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지구 생명체도 유일한 것이라는 추론이다.

공시태우주론공간론으로 인식은 상식에서 중요하게 쓰이지만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시기는 지나갔다인간의 생각하는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이제는 통시태우주발생론시간지속론으로 아름다운 지구그 생태계를 역량이 높아진 인간이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이런 역량의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신학에서 자연이 묶여 있다가 브루노에 의해 우주가 무한히 열리고, ‘빛들세기에 프랑스의 소박한 유물론자들이 자연의 자치성과 자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19세기 후반에서야 자연의 자발성을 생각했다는 것을 생각하면인류가 제 나름대로 사유하기 시작하여 공동체를 만든 빙하기 이후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1만 2천년 정도이다.

생명체 상으로 이런 짧은 시기에 볼 수 없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을 구별하면서현자의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돌이켜 보건데 고대 철학 이래로 볼 수 없는 것은 수원자얼 등등이 있었다수와 원자는 자르기를 기준으로 하는 상층론자의 견해로 계속 이어가고점과 얼()은 자르기가 잘 안되기에 다루는 방식을 고민하던 심층론자들(내재적 참여론)은 과정과 연속에 자기 동일성(정체성)을 갖는 기억의 지속으로 설명하려 한다.

수학사에서도 철학사에서도 선전제의 정의(한정과 비한정)를 문제로 삼았지만 여전히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논리산술적인 이들이수학적 논리에서도 무한(유한의 대비)과 비한계(한계의 대비)가 정의(한정과 비한정규정괴 비규정)에 연관 없이도 자기 충족이유를 갖는다는 생각을 하였고급기야 수와 원자의 소박한 유물론에 대해 점과 얼의 진솔한 유물론(자연론우주발생론사이에 차히를 갖는다고 설명하게 된다.

지구의 발생과 운동이 플라노메네아이티아라고 하였듯이인간의 삶과 사유도 노마드의 발현이다인간의 자각이맞는니 틀리느니라는 기준으로 지구상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달리이제는 기나긴 우주의 변역과정과 인간 삶의 역정의 기억에 적합하게 협약을 찾으며평결을 이루면서나갈 수 있을 것이다.

(4:27, 59OLI) (5:28, 59O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3) – 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3)-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1)

기가 운동하는 두 양태는 물체의 형성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그 가운데 양의 운동은 전진적이며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발산하는 운동이다. 반면 음의 운동은 후퇴하면서 자기를 보존한다. 이것은 수렴하는 운동이다. 이런 과정은 더 구체적으로 사계절의 흐름처럼 네 단계로 전개된다. 그것이 곧 생산, 성장, 성숙, 저장의 단계다.

발산하는 운동은 변화시켜 유행을 낳으며 수렴하는 운동은 보존하니 이를 통해 물체가 생겨난다. 발산은 생겨난 물체를 변화하고 수렴은 다시 물체를 회복하게 하면서 이 운동은 거듭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다. 마치 계절이 오가고 해와 달이 교체하는 것과 같다. 이런 시간적 질서가 곧 이법이다.

이 이법은 자연의 운동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니 이를 곧 자연에 내재하는 질서 즉 ‘천’이라 한다. 질서가 운동에 의해 생겨나지만, 일정한 질서를 자연적으로 따른다는 점에서는 기는 이 운동을 주재한다. 그렇다고 이 기의 질서가 초월적인 것은 아니며, 자연의 운동에 맡겨졌다고 해서 다만 무질서한 것만도 아니다.

“춥고 더움은 자신의 법칙을 잃지 않고 만물은 각기 자신의 질서를 가진다. 평화와 혼란, 가득참과 텅빔, 사라짐과 생겨남, 흥성과 쇠망은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다. 일월성신은 번갈아 운행하면서 그 법도를 상실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어떤 인위적인 흔적을 보지 못하며 다만 자연에 따라 형상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속의 깊고 깊은 곳에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른바 천이란 주재를 말한다.”(황종희, 70)

“유행 가운데 반드시 주재가 있으므로 주재는 유행의 밖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유행에 조리가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관점에서 유행이라 하고 불변의 관점에서 주재라고 한다.”(황종희, 70)

기가 전개하는 운동을 통해 물체가 생성하고 운동의 이법이 성립한다. 이법은 자연 전체의 반복된 흐름일 뿐이므로, 이법은 기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을 내재의 철학이라 한다.

 

2)

기의 이런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여러 가지 자연의 원리를 끌어낸다.

① 이런 기의 운동은 발산과 수렴의 운동을 통해 자연의 다양한 물체를 낳는다. 여기서 다양한 물체는 서로 고립된 단절된 개체는 아니다. 개체를 개체로 유지하는 본질은 없다. 하나의 물체는 운동 속에 있는 한 국면, 양태이며, 개체란 여러 운동이 교차하는 매듭일 뿐이다.

“본체로서 기는 스스로를 확산 전개시키면서 다양의 세계를 생산한다. 다양의 세계는 기의 자기 변양태들이기 때문에 기에 근본하며 독자적 세계로 분리될 수 없다. 본체는 하나이다. 형체와 색깔은 본체의 변양된 사물들의 속성이지 본체가 될 수 없다.”(황종희, 100)

개체의 운동은 전체적으로는 더 큰 운동의 한 양태이며, 이 운동은 인과적 필연성에 따르는 것이 아닌 기 자체의 자발적 운동에 따르니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다. 전체 우주는 하나의 통일된 기의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우주적 기가 물체를 서로 연결하는 운동의 실체다. 그러므로 만유는 서로 개방되어 있고 서로 소통한다.

“이 형질 때문에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막혀 있지만, 본질의 차원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 있어서 전체적으로 하나이다.”(황종희, 101)

이와 같은 우주의 전체 모습은 베르그송이 전개한 우주와 닮았다. 우주의 본체인 엘랑 비탈은 비약적인 도약을 통해 다양한 우주를 전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서로 공감한다. 이 본체가 없는 물체의 우연한 전체 연관의 체계가 우주적 진화의 모습이다.

“모든 물체나 우리의 신체도 무한성에 그 자체로 관여하고 있다. 신체는 그 형태적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무한성에 의해 이미 그리고 본성상 비호되고 있다.”(황종희, 80)

② 이런 변화와 보존은 모두 자연의 이법이며 선과 악이라는 판단은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악이 실체적인 것도 아니고 무가 영원한 것도 아니며 거꾸로 물체도 언젠가는 무너지니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신체와 물체를 억압하고 이법의 도덕을 강조하는 주희의 입장에 비해본다면, 신체와 물체를 인정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현실세계에는 본래적으로 초월적인 선의 결여라는 의미에서의 악의 실체는 없으며, 허무로 부서질 무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황종희, 80)

“그의 생성과 생의의 철학에는 우리의 신체성과 현상적 물체들과의 본래적 적극성과 긍정성을 강조하는 의의가 충분히 있다.”(황종희, 92)

 

3)

하나의 기가 전개하는 운동, 그것의 다양한 운동 양태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황종희의 형이상학에서 자연 물체와 생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응결과 유통이라는 양태가 다시 개입한다. 우주적 기 전체가 응결하여 무겁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자연 사물이 된다. 우주적 기가 약동하여 가볍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관념이 된다.

“천은 기의 변화 유행을 통해 사람과 사물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한 덩어리의 조화로운 기이다. 사람과 사물은 그것을 품수받으니 곧 인식하고 깨닫는다. 인식하고 깨닫는 능력 가운데 정수가 되는 것은 영민하고 밝아서 사람이 되고 인식하고 깨닫는 것 가운데 거친 것은 혼탁해서 사물이 된다.”(황종희, 99, 재인용)

그러나 황종희에서 이 양태는 하나의 기가 지닌 운동에 불과하니, 기의 운동 상태를 넘어선 기의 실체적 본질은 무엇인가? 마치 베르그송의 엘랑비탈이 관념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고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이미지이듯, 황종희에게서도 기의 본질은 마음인데 이 마음은 단순한 관념이 아닌 심적인 것 즉 관념적인 동시에 신체적인 것이다.

 

4)

마음이 지닌 이런 본체로부터 인식과 도덕에 관한 주장이 도출된다.

① 마음은 가볍고 유동적이므로 관통하는 성질을 지니니 이를 통해 마음은 우주와 합일에 이른다. 이런 합일은 정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일어나는 합일이며(천인합일) 이 합일은 곧 실천적 행동으로 출현한다. 이런 합일을 위해서는 마음의 가볍고 유동적인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지행합일) 즉 마음을 응결시켜 욕정화하는 물질적 운동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도덕적 실천이다(체인).

“왕양명과 황종희에게서도 마음은 실재를 능동적으로 비추는 비춤의 작용을 하는 광명의 존재이다. 그것은 항상 비추고 있는 존재다. 그것은 일종의 지의 힘인데 능동적으로 운동하지 않은 적이 없는 존재 즉 다른 존재에 의해 움직여진 적이 없는 존재로서 비추는 마음이다.”(황종희, 97)

② 이런 마음이 다시 다양한 운동 상태에 있으니 마음이 응결하면 욕정이 되고 마음이 유동하면 사단이 된다. 황종희는 마음의 운동 단계를 생기와 장기, 수기, 장기의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에서 출현하는 마음을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넘어 따로 인간의 본연지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본연지성에 속한다고 말해지는 인의예지는 다만 마음을 오랫동안 지킴으로써 얻은 덕에 해당한다.

“측은한 마음은 운동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생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기쁨에 속하며 슬픈 감상이 아니다. 사양하는 마음은 질서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성징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에 속하고 엄숙이 아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극복의 양태인데 본질의 거두어들이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분노에 속하며 분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비의 마음은 안정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숨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속하며 분별이 아니다.”(황종희, 158)

“그렇다면, 인의예지는 본질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중용은 성의 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덕이라고 하면 괜찮지만, 성이라고 하면 안 된다. 문자적 의미에서도 낳음과 마음이 합해서 성이 된다. 성이 선하기 때문에 마음이 선하다.”(황종희, 160 재인용)

“우리의 의지가 마음의 본질상에서 투명하게 꿰뚫어 안정 상태가 되면 천기가 욕망을 발하므로 욕망이 다름아닌 천기이다.”(황종희, 177 재인용)

③ 욕정과 사단이 마음의 운동 양태이므로, 욕정조차 버릴 수 없다. 마치 음양이 자연의 기의 운동 양태이어서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황종희는 마음이 응결된 상태에서 활발한 유동적 상태로 이행하기를 기대하지만, 응결된 상태 역시 마음의 운동 과정에서 없을 수 없다.

 

5)

이상에서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을 통해 소통성의 근거를 발견하려 했다. 만유가 기의 작용 속에 들어 있으므로 서로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황종희는 이런 기의 일원론 위에서 마음을 통해 우주와 합일하며 이를 통해 실천적 행동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마음이 우주와 합일에 이를 때, 이 상태는 평등하다. 우주적 기의 운동은 두 양태로 전개되며, 마음 역시 네 자기 운동 양태 속에 있다. 각 운동 양태는 운동의 과정상 불가피한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기의 우주적 생명의 리듬에 속한다.

더구나 황종희에서 양의 운동 양태는 전통 유가적 지배 질서를 의미하며, 반면 음의 운동 양태는 이런 이 질서가 무너지고, 내적으로는 이욕이 지배하며 외적으로는 반란이 일어나는 상태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황종희가 자신이 부딪혔던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그가 처했던 현실은 이민족의 지배이며, 지배층으로서 사족이 몰락하던 시기였다. 그는 이런 현실은 기의 운동 상 불가피하게 도래한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그는 지배층의 사족으로서 이런 단계를 지나가면 기의 운동에서 다시 긍정적 현실의 단계가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 희망은 그가 부딪힌 현실을 인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유행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 황종희의 생각이다. 유행은 천리로서의 구심점에로 회귀하는 수렴 운동에 의해 고정된 안정성을 찾아야 한다.”(황종희, 185)

“황종희는 철학사 연구와 대규모 반란에 대한 체험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인지하였다. 그는 유행과 발산의 힘에 대해 다시 주렴계의 주정론에 의거해서 그 힘을 주재와 수렴 쪽으로 휘려고 하였다. 그는 유행의 역동성을 받아들여, 그것을 타고서 그것을 순화지도하는 방향을 선택했다.”(황종희, 186)

그러나 양의 양태가 운동의 한 양태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곧 그 양의 양태의 정당성을 의문시하게 만든다. 모든 양태가 기의 측에서 보면 불가피한 것이니 양의 양태나 음의 양태는 무차별하게 된다.

더구나 황종희에서 양의 양태는 전통적인 유가의 지배 질서를 의미한다. 왜, 유가의 지배 질서가 양의 양태가 되어야 하는가? 오히려 서로 평등한 상태가 또는 욕망이 지배하고 피지배 계급과 이민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 양의 양태가 아닐까? 양의 양태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가 소위 양명 좌파로서 현성파의 지반이 된다.

황종희는 양명 우파로서 앞에서 보았듯이 명의 멸망이 현성파의 무차별성에 기초한다고 보면서 전통적 지배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대했으나, 이상에서 제기된 것과 같이 양의 양태란 상대적인 단계일 뿐이며 더구나 그 양의 양태가 전통적 지배 질서가 아닐 수도 있다. 이규성은 이제 차라리 평등한 세상을 양의 양태로 규정하는 현성파의 논리를 다시 음미하게 된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2) – 주자학과 황종희의 내재철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2)-주자학과 황종희의 내재철학

 

1)

이규성은 서구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려는 형이상학적 혁명에 착수한다. 그는 서구 철학 가운데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의 철학에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이들의 철학이 실재의 본질을 생명의 약동하는 의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서구 철학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거기서 어떤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인데, 그 한계는 앞으로 논증돼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그는 이제 차라리 동양철학의 전통 형이상학에서 무언가 대안을 찾으려 한다. 그가 여기서 특별하게 주목했던 것은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은 그가 쓴 논문을 일별해 볼 때 90년대 걸쳐 여러 송명 이학자들에게 관심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그가 특별하게 주목했던 철학자는 두 사람이니 곧 황종희과 왕선산이다. 그는 이 두 사람에 관해 각기 하나의 책을 헌정했으니, 1994년 쓴 『내재의 철학: 황종희』이며, 2001년 쓴 『생성의 철학: 왕선산』이다.

황종희와 왕선산은 명말 청초의 이학자인데, 양자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차이는 단번에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그런데 이규성은 전자에게는 ‘내재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후자에게는 ‘생성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책을 직접 읽어보면, 어느 책에서나 이규성이 형이상학을 통해 찾으려 했던 자주성과 소통성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보면, 그는 두 책에 걸쳐 그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발견하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전반적으로 보면, 94년 쓰인 황종희의 철학에 대해서는 천인합일, 혼연일체의 소통성이 전체를 지배한다. 반면 2001년 쓰인 왕선산의 철학에서는 물론 자주성과 소통적 연대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한다. 이런 변화는 이규성이 살았던 그 시대의 시대 정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본다.

90년대 초반까지는 시대 정신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때 연대가 주로 논의되었다. 반면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발성이 강조되니, 개인적 자발성과 소통적 연대가 이규성의 철학 속에서 동시에 추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성은 두 철학자의 철학을 규정하는 말로 황종희는 ‘내재의 철학’, 왕선산은 ‘생성의 철학’으로 규정했는데 그 개념이 곧 위의 문제의식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한다. 우선 거슬러 올라가 그가 왜 송명 이학의 창시자라고 할 주자의 철학에 머무르지 못했는가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2)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의 근본 축은 곧 이와 기의 관계다. 기는 음양으로 이루어지며, 음양은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한다. 그런 가운데 만물의 이법이 출현하는데, 이때 음양의 동정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기와 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이규성이 보기에 주희에서 음양의 동정은 무질서하고 부단히 운동하는 것이다. 그 자체 속에는 지속성과 통일을 지닌 이법을 발견할 수는 없으므로 외부에서 이법이 주어져야 한다. 이 이법의 원천은 음양 이전에 실재하는 태극에 있다.

주희의 이런 이원론적 관점은 서양철학적으로 본다면, 플라톤의 철학과 흡사한데, 이에 관해서 이규성은 나정암의 주희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기초해서 이규성은 약간 주저하기1는 하지만,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주희는 궁극적으로는 이가 먼저 있은 후에 기가 있다.고 단언하였다. 이가 존재한 후에 기를 생산한다는 이생기[의 입장으로 귀결된다.”(황종희, 75)

“자연의 존재는 이에 의해서 부여된 것으로서 이의 존재 부여 능력이 없이는 소멸되고 말 본래부터 불완전한 존재이다.”(황종희, 77)

이와 같은 주희의 형이상학에서는 비록 주희에서 이미 천인합일의 개념이 나온다고는 하더라도 그 결과는 개방적 소통성의 윤리는 아니다. 주희의 형이상학에서 초월적 이의 지배는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위계적 질서가 나오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운명적으로 불완전성과 악에의 가능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황종희, 78)

 

3)

이규성은 주자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양명학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양명학파 가운데 좌파라고 할 태주 학파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결국 그는 양명학을 계승하면서도 태주학파를 비판하는 황종희의 철학에 이르게 된다.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적 의도나 배경에 관해 왕양명의 제자인 호한의 말을 빌어 온다.

“송의 유학은 분별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주석과 그 해설에 노력하였다. 명의 유학은 총괄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종지를 세웠다. 그러나 명유는 훈고의 지리멸멸을 싫어하여 반드시 종지를 표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그 폐단은 훈고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도라는 것은 천하의 보편적인 도이고 학이란 천하의 보편적인 학이다. 어찌 따로이 종지를 표방할 필요가 있겠는가?”(황종희, 49)

호한의 말을 통해 황종희가 주희나 양명학을 동시에 넘어서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황종희에서 이는 기의 운동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기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데, 우선 그에게서 기는 하나의 기이며, 이 기의 양태가 곧 운동과 정지이며 이때 운동하는 상태를 양이라 하고 정지한 상태가 음이 된다.

“하늘과 땅을 관통하고 고금을 꿰뚫어 하나의 기가 아닌 것이 없다. 기는 본래 하나이다. 그러나 가고 오며 닫으며 열고 오르고 내리는 차이가 있기에 나누어져 운동과 정지가 된다. 운동과 정지가 있어서 나누어져 음과 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음양의 운동과 정지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변화하고 어지러이 얽히고 설키지만, 결국 혼란스럽게 되지 않는다. 영원히 이렇게 추웠다고 더워지며 영원히 이렇게 생산하고 성장하며 거두고 저장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변화한다. 이것이 곧 이른바 이이며 이른바 태극이다. 그것이 문란하지 않은 측면에서라 하고 그 궁극성의 측면에서 태극이라 한다.”(황종희 64, 재인용)

황종희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규성은 음양이 일기의 양태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음양이 독자적인 실체인 기가 아니라, 하나의 기가 운동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이를 ‘기의 변양태’(황종희, 66)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기를 황종희는 정명도의 말을 빌어 ‘생의’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약동하는 생명으로서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을 닮은 개념이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1) –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 철학과 생성의 철학(1)-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1)

이규성 선생(이하 이규성) 철학의 본령이 어디 있을까? 이규성이 지은 여러 저서를 읽는 가운데 항상 느꼈던 의문이 바로 이런 질문이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는 단순한 철학 연구자는 아니다. 그는 무언가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기 위해 고투했으니, 그의 글을 읽으면 누구나 이규성 철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철학은 기존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일종의 논평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그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의 철학적 주장은 그가 쓴 글의 맥락에 따라서 제시되었기에 여러 차례 중복되는 발언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겹칠 뿐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그의 철학은 그런 논평 가운데 흩어서 말해졌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을 읽는 가운데 필자에게 든 의문이 그런 주장들 가운데 이규성 철학의 핵심, 본령이라고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2)

일단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시대 상황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여러 글 가운데 아마도 자신의 철학을 위해 체계화를 시도했던 유일한 글이 있다면,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이라는 책 3부 현실과 전망>이라는 글일 것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철학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도래하는 시대의 철학을 제시했는데, 다만 자기의 철학의 출발점과 극복해야 할 철학, 그리고 앞으로 기대하는 철학의 지향점만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최종적 결론 즉 그가 형성하려는 형이상학 자체는 이 글에서 빠져 있다는 점에서 미완성의 글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통해서 그의 철학적 의식만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 글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 그가 처했던 그의 시대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은 그가 철학을 개인적인 선호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대한 극복이라는 과제에 복무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하겠다.

이 글의 목적상 그런 비판을 상세하게 다루는 것은 생략하려 한다. 다만 그는 자기 시대를 외적으로는 서구의 지배 아래 종속되어 있으며, 내적으로는 억압과 불평등으로 가득한 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그가 70년대 이후 종속적 발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는 사정을 안다면, 누구나 시인할 만한 시대 의식일 것이다.

그는 이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실천적 운동에 뛰어든 흔적은 찾기 어렵다. 몇몇 에피소드적 사건1을 제외하면 그는 시대 극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근원적인 실천에 종사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서 이 더 근원적 실천이 바로 철학함이다.

 

3)

이 글은 그의 철학 가운데 그가 형성하려고 했던 형이상학을 찾아보려는 시도인데, 이런 형이상학이 어떤 맥락에서 제시되었는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을 읽어 볼 때 대체로 그의 철학적 정신은 다음과 같이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①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종속적 발전, 억압과 불평등의 근원은 자본의 탐욕과 서구 과학 기술의 지배에 있다고 보며, 이런 자본의 탐욕과 서구 과학 기술은 그 밑바닥에 서구의 전통을 이루는 형이상학 즉 초월적 실재론 또는 객관적 관념론이 존재한다고 본다.

② 그는 이런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 서구 철학 내부에서 일어난 비판적 철학에 주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이다. 하지만, 그는 쇼펜하우어나 베르그송에서도 어떤 한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③ 그가 쓴 논문의 순서만 가지고 보면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 80년대 초기에는 주로 맹자나 주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초월적 실재론이나 객관적 관념론의 전통에 부딪히면서 실망한다. 그는 이 시기 대진(1982)이나 유기(1990),  이대조(1990), 정자(1999), 강유위(2003)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④ 80년대 말에서 2000년까지 그는 두 권의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곧 황종희의 내재 철학(1994)이고 왕선산의 생성 철학(2001)이다. 여기서 그는 생성의 세계와 합일(천인합일)하는 가운데 자주성과 소통성에 도달한다는 원리에 이른다. 그에게서 실재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생성하는 세계이며 이는 단순히 실재를 인식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재를 온몸으로 채특하는 실천적 혁명이다.  그는 두 철학자에게서 자신이 발견하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어느 정도 찾은 것으로 보인다.

⑤ 그에게서 실재는 단순한 이론적 세계가 아니라 윤리적 세계이므로 형이상학적 혁명은 곧 윤리적 혁명이 된다. 그는 이런 내적 혁명을 통해 개방성과 소통성을 갖춘 위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실천적 혁명이 가능하다고 본다.(내성외왕의 정신) 그러나 그는 두 철학자가 제시한 윤리는 여전히 봉건적 윤리에 머무른다는 한계 때문에 고민한다.

⑥ 2011년 발표된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에서 그는 생성의 형이상학에서 발굴할 수 있는 저항정신, 시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신적 혁명,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그는 그의 철학적 고투의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주성과 소통성을 토대로 해서 건설되는 새로운 사회는 공화주의(공화적 소유)에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는 자유 민주주의와 구별되며 그렇다고 사회주의 혁명이나 무정부주의적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⑦ 그 이후 그는 쇼펜하우어에 관한 연구서(2016), 한국현대철학자(2012)이나 중국의 현대철학자(2020)에 대한 논평에 몰두하는데 이는 자신이 발전시킨 철학을 완성하기 위한 선배 철학자를 비판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 그의 철학의 핵심은 형이상학적 혁명에 있다. 그는 이 형이상학적 혁명을 존재가 아닌 생성의 철학에서 발견하며 이 생성의 철학을 통해 자주성과 소통성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지는 사실 앞으로 논증되어야 할 테제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가운데 특히 하나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는데 바로 그가 몰두했던 생성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의 철학의 주춧돌이라고 할 주장 즉 생성의 철학을 통해 내적 개방성과 소통의 연대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성공적이었을까?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바로 그가 제시한 생성의 철학이 어떤 점에서 자주성과 소통성의 근거가 되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에 있다.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세계는 ‘빅테크 과두정’이라는 새로운 유령의 위협 앞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월가를 대신해 거대 IT 플랫폼 기업들이 경제를 넘어 정치 권력까지 장악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조차 “우리는 빅테크 억만장자들의 과두정으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했듯이, 이는 디스토피아 소설 속 시나리오가 아닌 우리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사악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은밀함’을 속성으로 한다. 공론장이 파괴되고 정보가 소수 권력에 독점될 때 사회는 어둠의 시대로 진입한다. 오늘날 알고리즘 권력은 겉으로는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이면에는 데이터 독점과 여론 조작을 통해 공공성(Publicity)의 기초를 잠식하며 공동선(Common Good)을 파괴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류에게 ‘재앙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낳고 있다. 사생활 침해, 차별적 알고리즘, 법적 책 임의 불명확성 등 인공지능이 야기하는 사회 문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AI가 학습한 편향된 데이터는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고착화하고, 딥페이크와 위치 추적 기술은 개인의 기본권을 상시적으로 위협한다. 확증 편향을 강화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필터 버블’ 현상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위기의 핵심에는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빅테크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구글, 메타, 아마존과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사용자 데이터를 독점하고, 객관성과 중립성으로 포장된 알고리즘을 통해 여론과 정치적 선호까지 조작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이 폭로했듯, 이윤 극대화를 위해 설계된 알고리즘은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불투명한 통제 체제로 변모시키고 있다. AI 기술의 상업적 권한이 빅테크 과두정에 집중되면서, AI는 인류의 번영이 아닌 소수의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그런데 가장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위협은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한 ‘노동의 종말’은 AI의 비약적 발달과 함께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정보통신기술의 진보로 세계 경제 규모와 생산성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고용 시장은 얼어붙고 실업의 공포는 전방 위로 확산 중이다. 이는 기술 혁신이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과거 자본주의가 가졌던 ‘기술 진보에 따른 고용 창출’이라는 선순환 기제를 완전히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간을 배제한 효율적 기술을 채택하지만, 그 결과로 해고된 노동자들은 구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즉, 생산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었으나 정작 그 생산물을 소비할 주체는 사라지는 ‘수요의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술 혁신의 파급 범위다. 과거의 자동화가 육체적 반복 노동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AI와 로봇이 의사, 변호사 등 고도의 지적 전문직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다. 숙련된 경력자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청년층을 위한 신규 고용의 문은 아예 폐쇄되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고착화될 전망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의 결실은 플랫폼을 장악한 소수 빅테크 과두 세력에만 집중될 뿐, 대다수 시민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풍요에서 소외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정점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용 절벽과 수요 부족의 악순환이 심화되면, 과거 대공황과 같은 전 지구적 경제 참사가 재현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파국을 막고 자본주의의 자정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복지를 강조 하는 케인스의 복지경제학 아니었던가.

출처: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