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론 대 공간론 :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천 하룻밤 이야기]

지속론 대 공간론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 자연배후학으로서 자연론 대 문명론

– 2026 04 20. 우수(雨水)

*

– 선생님하늘에 나는 새와 저 산의 짐승들을 누가 만들었어요? + 하나님이 만들었지

–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과해와 달은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지,

– 선생님과 아버지 오마니는 누가 만들었나요? + 물론 하느님이 만들었지

–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요? + 그게 하나님이지.

–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드네요, + 학문적으로 동어 반복이라 하지.

벩송은 이것을 악순환이라고 하고논리상으로 선전제미해결의 오류라고 부른답니다.

*

생각한다는 기원에는 무엇이 있는가생각한다는 인간의 사고 또는 사유를 우선 뒤로 젖혀두자우주든 상상작용의 대상이든원리든 기원이든 하나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를 통일성 또는 단위라고 부르자(A)가 있다가 이외의 것을 하(Z)라 하자그런데 논리적 사고에서는 A가 있고 A아닌 것(non-A)가 있다고 한다이것을 누가 어떻게 나누느냐논리주의자들은 가와 하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아리스토텔레스든 하이덱거든 진리를 발견한다고 할 때, A 아닌 것이 아니라 A이라는 동일성의 논법에 있다.

(존재진리긍정단위), A 

:: (non- A, 나눌 수 없는 것)

[동일성이라는 원리를 먼저 있고, A는 non-A아닌 것이라는 모순율그리고 A와 non-A사이에 둘중의 하나 A는 맞고 non-A는 맞지 않는다는 배중율을 조작해 낼 것이다.]

동양에서는 가와 하를 음과 양이라 부르고 꼭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밤과 낮하루한해 등처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이라 한다다른 한편여와 남처럼 나누어지는 것은 둘 사이의 조화와 교감이 있다고 하지만 하나의 생명에서 나왔다고 한다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인데도 나누는 것에 문제가 생기니 불이(不二)라 한다.

*

유시민은 사회적 견해들에서 A와 B도 있고 AB교집합 C도 있다고 한다. A는 가치(공공)를 B는 탐욕(이익)에 선후 중경을 두고사람들은 한편으로 공공에 다른 한편으로 사적 이익에 관심으로 양명성을 지닌 쪽을 AB가 있다고 한다이런 견해를 철학사적으로 19세기에 공시태에서 본 사실을 평면적으로 구별하는 차이의 설명이다그 19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탐문하는 수학논리학자들은 존재의 근거가 A에 있다고 보았으며사고의 대상이라 하고논리의 상위(류개념신개념)를 버릴 수 없었다는 점에서 스콜라적이라 한다.

이런 수학논리를 확장하면서 벤 다이아그램을 2차원(평면)의 4경우, 3차원(공간)의 8경우, 4차원(무슨 위상?)의 16경우 등에서 항상 순열을 나열해보면이상하게도 각 조합들에서 공집합(여집합)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물론 4차원 이상을 경험과 구체성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지성의 추론작업에서 상상작용은 무한히 나갈 수 있다그럼에도 4차원이상의 경계(한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인간의 지성의 역량의 한 방편으로 정의(규정한정)한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고대 사유에서 유한과 무한의 논리적 차이가 있고근대에서 한계와 비한계의 미분화 또는 세분화에서 차히가 있으며이 차이와 차히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대수학과 알고리즘이 분리된다전자에서 우주의 기계적인 정적 통일성을 주장하고 후자에서 파동역학열역학전자기학 등의 동역학에서 지속의 통일성(정체성)의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19세기 말에 프왕까레는 공간의 차원이든추론의 차수의 등급이든세분화의 과정에서 중첩적 기억의 위상이든인간의 지적 역량의 협약(합의)이지진리의 기준이 아니라고 했다.

18세기의 유산으로 자연수의 무한(infini), 19세기 후반의 집합론으로 01사이의 소수들의 비한계(illimit, 무한계), 푸앙카레의 협약에 의한 비결정(indéterminé사이에서 인간이 맞다 틀리다는 진위 규정에 대해 또는 도덕적으로 선악 규정에 대해 반성 한다앵글로색슨에서는푸앙카레의 수학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앵글로색슨 수학논리학들이 설정하는 진위선악정부(정의 불의)라고 정의(la définition)를 기준으로 삼아서모든 단위들이 한정(définit)와 무한정(indéfini)로 구별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논리주의의 착각은 그들도 악순환파라독사불합리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래서 조건 안에서라고 하는데그 조건이 논리의 요청이며원리와 공리의 선인정즉 선전제미해결이다이런 사고가 펼쳐진 것도 언어학에서 공시태가 우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자연배후학에서 우주론이 우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통일성의 우선을 선가정하면서이런 방법에 따르지 않는 통시태 사유우주발생론 사유그리고 인간에서도 자연생성론을 배제 또는 악의 축처럼 다루었다. 21세기까지도.

*

이분법에서 자르기와 나누기의 문제가 올바로 제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왜냐하면 대상을 자를 수 있는지 또는 나누기한다는 데 참여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플라톤의 인식에서 선분의 비유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플라톤의 분할의 선분분할의 설명은 자르기가 아니라 나누기(참여하기)에 있을 것이다.

 이데아들  Ideas 에피스테메
 수학적대상들  Objets mathe
 사물들  Etres vivants 독사 (견해)
 그림자들  Images Ombre

플라톤의 이런 도식에 대해 후대에 여러 다른 방식으로 변환을 거치면서 설명의 도구로 삼았다우리는 간단히 3가지 정도만 보자하나는 지식의 대상은 상위 둘(에피스테메)에 있고하위 둘(독사)은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다루지도 않았다둘째는 경험적으로 보아 그림자를 보고 피라밑(사물)의 높이를 알 수 있듯이이런 유비로 추상적인 수학의 도형들을 보고 도형의 원형이 이데아를 안다고 해서 탐구의 단계로 보는 방식도 있다셋째는 상위의 인식은 지성(오성)의 대상이고 하위의 인식은 감성(미학)의 대상으로 여기며인식론적 구별을 인간의 역량에 대한 차이를 영혼과 신체에 대입시키는 방식이었다둘째의 계속성에서는 자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첫째와 셋째는 잘라서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는 쪽이다문제는 자르다와 공간의 계속(시간의 연속)의 구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엉뚱하게 대상을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차이를 찾으려 했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이데아를 볼 수 없는 직관의 것이지만수학적 대상들은 땅위의 측량에서처럼 도형을 그릴 수 있다인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차이는 대상의 추상화에 있고 공간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 여겼다이에 비해 사물들로서 신체는 볼 수 있는데이를 움직이는 동력(심성)은 볼 수 없는 것임에도 얼 또는 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이로서 상층의 이원성과 심층의 이원성이 전도된 사고방식이 아닌지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린 19세기 후반에 유기적 조직화로서 사회학과 심리학이 도래했다고 한다.

*

수학 논리주의자들이 진위선악미추의 상위로서 진선비의 선전제로 인정하는 것은 선분의 분할(자르기)의 인정 위에 선의 이데아를 올려놓았다물론 신학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의 하늘나라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천국(에테르)를 만들었던을 것을 유추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선의 이데아(아름다움)
이데아들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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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한 계열인 퀴니코스스토아 전통의 유물론자들은 선의 이데아를 상징기고 기호(추상)일 뿐이며진실로서 얼과 혼의 움직임이 먼저이고 기원(아르케)이라고 보았다상층의 최고 지위(위상토포스)를 사고 알 수 있듯이깊이(심층)에도 마그마와 같은 불덩어리로 되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생한 활동을 제시할 수 있었다순수유물론자들은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돌아다니는 원인노마드 원인)가 있다는 것이 실재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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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무관의 제왕)

<위의 도표와 이 도표 사이에서 어느쪽을 실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위의 것은 관념론으로 이것은 자연론 또는 순수 유물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로서 상위에서 직관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추상적 대상이 있고심층에서도 나눌 수는 없지만 실재성이 있다원의 아름다움과 기하학적 도형의 아름다움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후자의 발생하는 아름다움은 흔들리는 아름다움이며 회화에서 터너의 그림과 인상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의 이데아(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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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무관의 제왕)

<무관의 제왕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9)”에서 능동적 의미에 아나르키(무권위주의)에 대한 명칭이다. – 우리나라에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비하된 표현일 것이다. >

이로써 선분의 비유에서 자르기인지아니면 양면으로 나눌수 없는 이중성의 등장인지를 생각해보면인간의 사유는 양면으로 겹치기에 닮은 것은 같다들뢰즈가 파라노이아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스키조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영과 육은 동전의 앞뒤처럼 나눌 수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오랜 플라톤주의자아리스토텔레스의자유일신앙자스콜라주의자관념론자는 선의 이데아의 위계 도식에 열광하면서도자연에서 생명의 발생과 노마드의 발현의 발생론적 흐름을 악마 취급하였다그들이 미쳤으니푸꼬가 광기라고 부르는 것그것이 파라노이아그르려니 하지.

*

유시민이 A, AB, B의 도식은 사회라는 평면에서 공익과 사익에 대한 관점정도 인데이에 대해 반응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앵글로색슨 철학의 계보에 익숙하였기 때문이다이제 우리나라가 우리 입말로 우리 사유를 발현하고 창안하고 창발하는 시기가 되었다그것도 코로나 이후로 누리소통 덕분이다알파고 시나씨가 말하듯이 우리 젊은이들 세계와 소통하고 프앙까레 같은 협약을 탐색하고프란체스코 학파처럼 평결론으로 계약과 합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전지구적 활동의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유일신앙 (원리악순환)
A  C(AB) B
조화중항  역량 원자 비례중항
공산사회 노력 탐욕사회
자연 발산 (원인자발성)

[* 점들(points)과 얼들(Ames)을 같은 계열로 놓았던 철학자는 문헌적으로 라이프니츠였다참조브륑슈비크(1869-1944)의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p. 221] – [이 관점의 시초는 박홍규의 탁월한 견해대로 플라톤이었을 것이다참조: <류종렬: 20세기 철학자박홍규와 들뢰즈https://cafe.daum.net/milletune/REMI/14>;]

[* 노력(코나투스)의 이중계열이 있다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상층에서 표면으로 전개에 노력하였고심층에서 표면으로 노력(conatus)을 보았던 이는 홉스와 라이프니츠였다. –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10장 라이프니츠의 수학 철학, pp. 197-229]

[* 조화중항 대 비례중항의 기원은 퓌타고라스학파에 있으며이를 실질적으로 다룬 철학자는 플라톤이라 한다이런 의미에서 박홍규는 플라톤이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두고 다룬 첫째 철학자라고 평했다. – 참조 <마실에서 천사흘밤에서우수(雨水): 비례중항 대 조화중항https://cafe.daum.net/milletune/REM0/148>;]

*

지구는 둥글다고 하고지구가 스스로 자전하고 그리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으며태양계가 은하계 안에서 소용돌이 속의 일부로서 기나긴 시간 지속 속에서 활동(생성중이다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초기에는 태양계의 회오리의 조성하는 경과에 따라 수많은 지구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가다음으로 은하계 안에서 아마도 회오리의 조성의 정 반대편에 우리와 사유방향은 다르지만 비슷한 조건에서 우리 같은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그러다가 그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민을 하면서아마도 우주 안에는 저 먼 성단에서도수학적 우발성(포앙카레의 협약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과 같아서우주의 기나긴 지속 발생에서 45억년을 거쳐 온 지구와 같은 행성은 우주 안에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지구 생명체도 유일한 것이라는 추론이다.

공시태우주론공간론으로 인식은 상식에서 중요하게 쓰이지만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시기는 지나갔다인간의 생각하는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이제는 통시태우주발생론시간지속론으로 아름다운 지구그 생태계를 역량이 높아진 인간이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이런 역량의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신학에서 자연이 묶여 있다가 브루노에 의해 우주가 무한히 열리고, ‘빛들세기에 프랑스의 소박한 유물론자들이 자연의 자치성과 자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19세기 후반에서야 자연의 자발성을 생각했다는 것을 생각하면인류가 제 나름대로 사유하기 시작하여 공동체를 만든 빙하기 이후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1만 2천년 정도이다.

생명체 상으로 이런 짧은 시기에 볼 수 없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을 구별하면서현자의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돌이켜 보건데 고대 철학 이래로 볼 수 없는 것은 수원자얼 등등이 있었다수와 원자는 자르기를 기준으로 하는 상층론자의 견해로 계속 이어가고점과 얼()은 자르기가 잘 안되기에 다루는 방식을 고민하던 심층론자들(내재적 참여론)은 과정과 연속에 자기 동일성(정체성)을 갖는 기억의 지속으로 설명하려 한다.

수학사에서도 철학사에서도 선전제의 정의(한정과 비한정)를 문제로 삼았지만 여전히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논리산술적인 이들이수학적 논리에서도 무한(유한의 대비)과 비한계(한계의 대비)가 정의(한정과 비한정규정괴 비규정)에 연관 없이도 자기 충족이유를 갖는다는 생각을 하였고급기야 수와 원자의 소박한 유물론에 대해 점과 얼의 진솔한 유물론(자연론우주발생론사이에 차히를 갖는다고 설명하게 된다.

지구의 발생과 운동이 플라노메네아이티아라고 하였듯이인간의 삶과 사유도 노마드의 발현이다인간의 자각이맞는니 틀리느니라는 기준으로 지구상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달리이제는 기나긴 우주의 변역과정과 인간 삶의 역정의 기억에 적합하게 협약을 찾으며평결을 이루면서나갈 수 있을 것이다.

(4:27, 59OLI) (5:28, 59O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3) – 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3)-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1)

기가 운동하는 두 양태는 물체의 형성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그 가운데 양의 운동은 전진적이며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발산하는 운동이다. 반면 음의 운동은 후퇴하면서 자기를 보존한다. 이것은 수렴하는 운동이다. 이런 과정은 더 구체적으로 사계절의 흐름처럼 네 단계로 전개된다. 그것이 곧 생산, 성장, 성숙, 저장의 단계다.

발산하는 운동은 변화시켜 유행을 낳으며 수렴하는 운동은 보존하니 이를 통해 물체가 생겨난다. 발산은 생겨난 물체를 변화하고 수렴은 다시 물체를 회복하게 하면서 이 운동은 거듭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다. 마치 계절이 오가고 해와 달이 교체하는 것과 같다. 이런 시간적 질서가 곧 이법이다.

이 이법은 자연의 운동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니 이를 곧 자연에 내재하는 질서 즉 ‘천’이라 한다. 질서가 운동에 의해 생겨나지만, 일정한 질서를 자연적으로 따른다는 점에서는 기는 이 운동을 주재한다. 그렇다고 이 기의 질서가 초월적인 것은 아니며, 자연의 운동에 맡겨졌다고 해서 다만 무질서한 것만도 아니다.

“춥고 더움은 자신의 법칙을 잃지 않고 만물은 각기 자신의 질서를 가진다. 평화와 혼란, 가득참과 텅빔, 사라짐과 생겨남, 흥성과 쇠망은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다. 일월성신은 번갈아 운행하면서 그 법도를 상실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어떤 인위적인 흔적을 보지 못하며 다만 자연에 따라 형상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속의 깊고 깊은 곳에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른바 천이란 주재를 말한다.”(황종희, 70)

“유행 가운데 반드시 주재가 있으므로 주재는 유행의 밖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유행에 조리가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관점에서 유행이라 하고 불변의 관점에서 주재라고 한다.”(황종희, 70)

기가 전개하는 운동을 통해 물체가 생성하고 운동의 이법이 성립한다. 이법은 자연 전체의 반복된 흐름일 뿐이므로, 이법은 기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을 내재의 철학이라 한다.

 

2)

기의 이런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여러 가지 자연의 원리를 끌어낸다.

① 이런 기의 운동은 발산과 수렴의 운동을 통해 자연의 다양한 물체를 낳는다. 여기서 다양한 물체는 서로 고립된 단절된 개체는 아니다. 개체를 개체로 유지하는 본질은 없다. 하나의 물체는 운동 속에 있는 한 국면, 양태이며, 개체란 여러 운동이 교차하는 매듭일 뿐이다.

“본체로서 기는 스스로를 확산 전개시키면서 다양의 세계를 생산한다. 다양의 세계는 기의 자기 변양태들이기 때문에 기에 근본하며 독자적 세계로 분리될 수 없다. 본체는 하나이다. 형체와 색깔은 본체의 변양된 사물들의 속성이지 본체가 될 수 없다.”(황종희, 100)

개체의 운동은 전체적으로는 더 큰 운동의 한 양태이며, 이 운동은 인과적 필연성에 따르는 것이 아닌 기 자체의 자발적 운동에 따르니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다. 전체 우주는 하나의 통일된 기의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우주적 기가 물체를 서로 연결하는 운동의 실체다. 그러므로 만유는 서로 개방되어 있고 서로 소통한다.

“이 형질 때문에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막혀 있지만, 본질의 차원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 있어서 전체적으로 하나이다.”(황종희, 101)

이와 같은 우주의 전체 모습은 베르그송이 전개한 우주와 닮았다. 우주의 본체인 엘랑 비탈은 비약적인 도약을 통해 다양한 우주를 전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서로 공감한다. 이 본체가 없는 물체의 우연한 전체 연관의 체계가 우주적 진화의 모습이다.

“모든 물체나 우리의 신체도 무한성에 그 자체로 관여하고 있다. 신체는 그 형태적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무한성에 의해 이미 그리고 본성상 비호되고 있다.”(황종희, 80)

② 이런 변화와 보존은 모두 자연의 이법이며 선과 악이라는 판단은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악이 실체적인 것도 아니고 무가 영원한 것도 아니며 거꾸로 물체도 언젠가는 무너지니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신체와 물체를 억압하고 이법의 도덕을 강조하는 주희의 입장에 비해본다면, 신체와 물체를 인정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현실세계에는 본래적으로 초월적인 선의 결여라는 의미에서의 악의 실체는 없으며, 허무로 부서질 무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황종희, 80)

“그의 생성과 생의의 철학에는 우리의 신체성과 현상적 물체들과의 본래적 적극성과 긍정성을 강조하는 의의가 충분히 있다.”(황종희, 92)

 

3)

하나의 기가 전개하는 운동, 그것의 다양한 운동 양태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황종희의 형이상학에서 자연 물체와 생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응결과 유통이라는 양태가 다시 개입한다. 우주적 기 전체가 응결하여 무겁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자연 사물이 된다. 우주적 기가 약동하여 가볍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관념이 된다.

“천은 기의 변화 유행을 통해 사람과 사물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한 덩어리의 조화로운 기이다. 사람과 사물은 그것을 품수받으니 곧 인식하고 깨닫는다. 인식하고 깨닫는 능력 가운데 정수가 되는 것은 영민하고 밝아서 사람이 되고 인식하고 깨닫는 것 가운데 거친 것은 혼탁해서 사물이 된다.”(황종희, 99, 재인용)

그러나 황종희에서 이 양태는 하나의 기가 지닌 운동에 불과하니, 기의 운동 상태를 넘어선 기의 실체적 본질은 무엇인가? 마치 베르그송의 엘랑비탈이 관념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고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이미지이듯, 황종희에게서도 기의 본질은 마음인데 이 마음은 단순한 관념이 아닌 심적인 것 즉 관념적인 동시에 신체적인 것이다.

 

4)

마음이 지닌 이런 본체로부터 인식과 도덕에 관한 주장이 도출된다.

① 마음은 가볍고 유동적이므로 관통하는 성질을 지니니 이를 통해 마음은 우주와 합일에 이른다. 이런 합일은 정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일어나는 합일이며(천인합일) 이 합일은 곧 실천적 행동으로 출현한다. 이런 합일을 위해서는 마음의 가볍고 유동적인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지행합일) 즉 마음을 응결시켜 욕정화하는 물질적 운동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도덕적 실천이다(체인).

“왕양명과 황종희에게서도 마음은 실재를 능동적으로 비추는 비춤의 작용을 하는 광명의 존재이다. 그것은 항상 비추고 있는 존재다. 그것은 일종의 지의 힘인데 능동적으로 운동하지 않은 적이 없는 존재 즉 다른 존재에 의해 움직여진 적이 없는 존재로서 비추는 마음이다.”(황종희, 97)

② 이런 마음이 다시 다양한 운동 상태에 있으니 마음이 응결하면 욕정이 되고 마음이 유동하면 사단이 된다. 황종희는 마음의 운동 단계를 생기와 장기, 수기, 장기의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에서 출현하는 마음을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넘어 따로 인간의 본연지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본연지성에 속한다고 말해지는 인의예지는 다만 마음을 오랫동안 지킴으로써 얻은 덕에 해당한다.

“측은한 마음은 운동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생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기쁨에 속하며 슬픈 감상이 아니다. 사양하는 마음은 질서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성징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에 속하고 엄숙이 아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극복의 양태인데 본질의 거두어들이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분노에 속하며 분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비의 마음은 안정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숨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속하며 분별이 아니다.”(황종희, 158)

“그렇다면, 인의예지는 본질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중용은 성의 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덕이라고 하면 괜찮지만, 성이라고 하면 안 된다. 문자적 의미에서도 낳음과 마음이 합해서 성이 된다. 성이 선하기 때문에 마음이 선하다.”(황종희, 160 재인용)

“우리의 의지가 마음의 본질상에서 투명하게 꿰뚫어 안정 상태가 되면 천기가 욕망을 발하므로 욕망이 다름아닌 천기이다.”(황종희, 177 재인용)

③ 욕정과 사단이 마음의 운동 양태이므로, 욕정조차 버릴 수 없다. 마치 음양이 자연의 기의 운동 양태이어서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황종희는 마음이 응결된 상태에서 활발한 유동적 상태로 이행하기를 기대하지만, 응결된 상태 역시 마음의 운동 과정에서 없을 수 없다.

 

5)

이상에서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을 통해 소통성의 근거를 발견하려 했다. 만유가 기의 작용 속에 들어 있으므로 서로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황종희는 이런 기의 일원론 위에서 마음을 통해 우주와 합일하며 이를 통해 실천적 행동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마음이 우주와 합일에 이를 때, 이 상태는 평등하다. 우주적 기의 운동은 두 양태로 전개되며, 마음 역시 네 자기 운동 양태 속에 있다. 각 운동 양태는 운동의 과정상 불가피한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기의 우주적 생명의 리듬에 속한다.

더구나 황종희에서 양의 운동 양태는 전통 유가적 지배 질서를 의미하며, 반면 음의 운동 양태는 이런 이 질서가 무너지고, 내적으로는 이욕이 지배하며 외적으로는 반란이 일어나는 상태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황종희가 자신이 부딪혔던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그가 처했던 현실은 이민족의 지배이며, 지배층으로서 사족이 몰락하던 시기였다. 그는 이런 현실은 기의 운동 상 불가피하게 도래한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그는 지배층의 사족으로서 이런 단계를 지나가면 기의 운동에서 다시 긍정적 현실의 단계가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 희망은 그가 부딪힌 현실을 인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유행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 황종희의 생각이다. 유행은 천리로서의 구심점에로 회귀하는 수렴 운동에 의해 고정된 안정성을 찾아야 한다.”(황종희, 185)

“황종희는 철학사 연구와 대규모 반란에 대한 체험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인지하였다. 그는 유행과 발산의 힘에 대해 다시 주렴계의 주정론에 의거해서 그 힘을 주재와 수렴 쪽으로 휘려고 하였다. 그는 유행의 역동성을 받아들여, 그것을 타고서 그것을 순화지도하는 방향을 선택했다.”(황종희, 186)

그러나 양의 양태가 운동의 한 양태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곧 그 양의 양태의 정당성을 의문시하게 만든다. 모든 양태가 기의 측에서 보면 불가피한 것이니 양의 양태나 음의 양태는 무차별하게 된다.

더구나 황종희에서 양의 양태는 전통적인 유가의 지배 질서를 의미한다. 왜, 유가의 지배 질서가 양의 양태가 되어야 하는가? 오히려 서로 평등한 상태가 또는 욕망이 지배하고 피지배 계급과 이민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 양의 양태가 아닐까? 양의 양태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가 소위 양명 좌파로서 현성파의 지반이 된다.

황종희는 양명 우파로서 앞에서 보았듯이 명의 멸망이 현성파의 무차별성에 기초한다고 보면서 전통적 지배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대했으나, 이상에서 제기된 것과 같이 양의 양태란 상대적인 단계일 뿐이며 더구나 그 양의 양태가 전통적 지배 질서가 아닐 수도 있다. 이규성은 이제 차라리 평등한 세상을 양의 양태로 규정하는 현성파의 논리를 다시 음미하게 된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2) – 주자학과 황종희의 내재철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2)-주자학과 황종희의 내재철학

 

1)

이규성은 서구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려는 형이상학적 혁명에 착수한다. 그는 서구 철학 가운데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의 철학에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이들의 철학이 실재의 본질을 생명의 약동하는 의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서구 철학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거기서 어떤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인데, 그 한계는 앞으로 논증돼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그는 이제 차라리 동양철학의 전통 형이상학에서 무언가 대안을 찾으려 한다. 그가 여기서 특별하게 주목했던 것은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은 그가 쓴 논문을 일별해 볼 때 90년대 걸쳐 여러 송명 이학자들에게 관심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그가 특별하게 주목했던 철학자는 두 사람이니 곧 황종희과 왕선산이다. 그는 이 두 사람에 관해 각기 하나의 책을 헌정했으니, 1994년 쓴 『내재의 철학: 황종희』이며, 2001년 쓴 『생성의 철학: 왕선산』이다.

황종희와 왕선산은 명말 청초의 이학자인데, 양자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차이는 단번에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그런데 이규성은 전자에게는 ‘내재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후자에게는 ‘생성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책을 직접 읽어보면, 어느 책에서나 이규성이 형이상학을 통해 찾으려 했던 자주성과 소통성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보면, 그는 두 책에 걸쳐 그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발견하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전반적으로 보면, 94년 쓰인 황종희의 철학에 대해서는 천인합일, 혼연일체의 소통성이 전체를 지배한다. 반면 2001년 쓰인 왕선산의 철학에서는 물론 자주성과 소통적 연대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한다. 이런 변화는 이규성이 살았던 그 시대의 시대 정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본다.

90년대 초반까지는 시대 정신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때 연대가 주로 논의되었다. 반면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발성이 강조되니, 개인적 자발성과 소통적 연대가 이규성의 철학 속에서 동시에 추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성은 두 철학자의 철학을 규정하는 말로 황종희는 ‘내재의 철학’, 왕선산은 ‘생성의 철학’으로 규정했는데 그 개념이 곧 위의 문제의식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한다. 우선 거슬러 올라가 그가 왜 송명 이학의 창시자라고 할 주자의 철학에 머무르지 못했는가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2)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의 근본 축은 곧 이와 기의 관계다. 기는 음양으로 이루어지며, 음양은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한다. 그런 가운데 만물의 이법이 출현하는데, 이때 음양의 동정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기와 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이규성이 보기에 주희에서 음양의 동정은 무질서하고 부단히 운동하는 것이다. 그 자체 속에는 지속성과 통일을 지닌 이법을 발견할 수는 없으므로 외부에서 이법이 주어져야 한다. 이 이법의 원천은 음양 이전에 실재하는 태극에 있다.

주희의 이런 이원론적 관점은 서양철학적으로 본다면, 플라톤의 철학과 흡사한데, 이에 관해서 이규성은 나정암의 주희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기초해서 이규성은 약간 주저하기1는 하지만,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주희는 궁극적으로는 이가 먼저 있은 후에 기가 있다.고 단언하였다. 이가 존재한 후에 기를 생산한다는 이생기[의 입장으로 귀결된다.”(황종희, 75)

“자연의 존재는 이에 의해서 부여된 것으로서 이의 존재 부여 능력이 없이는 소멸되고 말 본래부터 불완전한 존재이다.”(황종희, 77)

이와 같은 주희의 형이상학에서는 비록 주희에서 이미 천인합일의 개념이 나온다고는 하더라도 그 결과는 개방적 소통성의 윤리는 아니다. 주희의 형이상학에서 초월적 이의 지배는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위계적 질서가 나오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운명적으로 불완전성과 악에의 가능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황종희, 78)

 

3)

이규성은 주자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양명학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양명학파 가운데 좌파라고 할 태주 학파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결국 그는 양명학을 계승하면서도 태주학파를 비판하는 황종희의 철학에 이르게 된다.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적 의도나 배경에 관해 왕양명의 제자인 호한의 말을 빌어 온다.

“송의 유학은 분별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주석과 그 해설에 노력하였다. 명의 유학은 총괄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종지를 세웠다. 그러나 명유는 훈고의 지리멸멸을 싫어하여 반드시 종지를 표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그 폐단은 훈고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도라는 것은 천하의 보편적인 도이고 학이란 천하의 보편적인 학이다. 어찌 따로이 종지를 표방할 필요가 있겠는가?”(황종희, 49)

호한의 말을 통해 황종희가 주희나 양명학을 동시에 넘어서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황종희에서 이는 기의 운동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기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데, 우선 그에게서 기는 하나의 기이며, 이 기의 양태가 곧 운동과 정지이며 이때 운동하는 상태를 양이라 하고 정지한 상태가 음이 된다.

“하늘과 땅을 관통하고 고금을 꿰뚫어 하나의 기가 아닌 것이 없다. 기는 본래 하나이다. 그러나 가고 오며 닫으며 열고 오르고 내리는 차이가 있기에 나누어져 운동과 정지가 된다. 운동과 정지가 있어서 나누어져 음과 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음양의 운동과 정지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변화하고 어지러이 얽히고 설키지만, 결국 혼란스럽게 되지 않는다. 영원히 이렇게 추웠다고 더워지며 영원히 이렇게 생산하고 성장하며 거두고 저장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변화한다. 이것이 곧 이른바 이이며 이른바 태극이다. 그것이 문란하지 않은 측면에서라 하고 그 궁극성의 측면에서 태극이라 한다.”(황종희 64, 재인용)

황종희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규성은 음양이 일기의 양태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음양이 독자적인 실체인 기가 아니라, 하나의 기가 운동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이를 ‘기의 변양태’(황종희, 66)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기를 황종희는 정명도의 말을 빌어 ‘생의’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약동하는 생명으로서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을 닮은 개념이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1) –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 철학과 생성의 철학(1)-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1)

이규성 선생(이하 이규성) 철학의 본령이 어디 있을까? 이규성이 지은 여러 저서를 읽는 가운데 항상 느꼈던 의문이 바로 이런 질문이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는 단순한 철학 연구자는 아니다. 그는 무언가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기 위해 고투했으니, 그의 글을 읽으면 누구나 이규성 철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철학은 기존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일종의 논평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그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의 철학적 주장은 그가 쓴 글의 맥락에 따라서 제시되었기에 여러 차례 중복되는 발언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겹칠 뿐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그의 철학은 그런 논평 가운데 흩어서 말해졌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을 읽는 가운데 필자에게 든 의문이 그런 주장들 가운데 이규성 철학의 핵심, 본령이라고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2)

일단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시대 상황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여러 글 가운데 아마도 자신의 철학을 위해 체계화를 시도했던 유일한 글이 있다면,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이라는 책 3부 현실과 전망>이라는 글일 것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철학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도래하는 시대의 철학을 제시했는데, 다만 자기의 철학의 출발점과 극복해야 할 철학, 그리고 앞으로 기대하는 철학의 지향점만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최종적 결론 즉 그가 형성하려는 형이상학 자체는 이 글에서 빠져 있다는 점에서 미완성의 글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통해서 그의 철학적 의식만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 글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 그가 처했던 그의 시대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은 그가 철학을 개인적인 선호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대한 극복이라는 과제에 복무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하겠다.

이 글의 목적상 그런 비판을 상세하게 다루는 것은 생략하려 한다. 다만 그는 자기 시대를 외적으로는 서구의 지배 아래 종속되어 있으며, 내적으로는 억압과 불평등으로 가득한 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그가 70년대 이후 종속적 발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는 사정을 안다면, 누구나 시인할 만한 시대 의식일 것이다.

그는 이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실천적 운동에 뛰어든 흔적은 찾기 어렵다. 몇몇 에피소드적 사건1을 제외하면 그는 시대 극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근원적인 실천에 종사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서 이 더 근원적 실천이 바로 철학함이다.

 

3)

이 글은 그의 철학 가운데 그가 형성하려고 했던 형이상학을 찾아보려는 시도인데, 이런 형이상학이 어떤 맥락에서 제시되었는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을 읽어 볼 때 대체로 그의 철학적 정신은 다음과 같이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①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종속적 발전, 억압과 불평등의 근원은 자본의 탐욕과 서구 과학 기술의 지배에 있다고 보며, 이런 자본의 탐욕과 서구 과학 기술은 그 밑바닥에 서구의 전통을 이루는 형이상학 즉 초월적 실재론 또는 객관적 관념론이 존재한다고 본다.

② 그는 이런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 서구 철학 내부에서 일어난 비판적 철학에 주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이다. 하지만, 그는 쇼펜하우어나 베르그송에서도 어떤 한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③ 그가 쓴 논문의 순서만 가지고 보면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 80년대 초기에는 주로 맹자나 주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초월적 실재론이나 객관적 관념론의 전통에 부딪히면서 실망한다. 그는 이 시기 대진(1982)이나 유기(1990),  이대조(1990), 정자(1999), 강유위(2003)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④ 80년대 말에서 2000년까지 그는 두 권의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곧 황종희의 내재 철학(1994)이고 왕선산의 생성 철학(2001)이다. 여기서 그는 생성의 세계와 합일(천인합일)하는 가운데 자주성과 소통성에 도달한다는 원리에 이른다. 그에게서 실재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생성하는 세계이며 이는 단순히 실재를 인식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재를 온몸으로 채특하는 실천적 혁명이다.  그는 두 철학자에게서 자신이 발견하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어느 정도 찾은 것으로 보인다.

⑤ 그에게서 실재는 단순한 이론적 세계가 아니라 윤리적 세계이므로 형이상학적 혁명은 곧 윤리적 혁명이 된다. 그는 이런 내적 혁명을 통해 개방성과 소통성을 갖춘 위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실천적 혁명이 가능하다고 본다.(내성외왕의 정신) 그러나 그는 두 철학자가 제시한 윤리는 여전히 봉건적 윤리에 머무른다는 한계 때문에 고민한다.

⑥ 2011년 발표된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에서 그는 생성의 형이상학에서 발굴할 수 있는 저항정신, 시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신적 혁명,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그는 그의 철학적 고투의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주성과 소통성을 토대로 해서 건설되는 새로운 사회는 공화주의(공화적 소유)에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는 자유 민주주의와 구별되며 그렇다고 사회주의 혁명이나 무정부주의적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⑦ 그 이후 그는 쇼펜하우어에 관한 연구서(2016), 한국현대철학자(2012)이나 중국의 현대철학자(2020)에 대한 논평에 몰두하는데 이는 자신이 발전시킨 철학을 완성하기 위한 선배 철학자를 비판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 그의 철학의 핵심은 형이상학적 혁명에 있다. 그는 이 형이상학적 혁명을 존재가 아닌 생성의 철학에서 발견하며 이 생성의 철학을 통해 자주성과 소통성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지는 사실 앞으로 논증되어야 할 테제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가운데 특히 하나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는데 바로 그가 몰두했던 생성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의 철학의 주춧돌이라고 할 주장 즉 생성의 철학을 통해 내적 개방성과 소통의 연대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성공적이었을까?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바로 그가 제시한 생성의 철학이 어떤 점에서 자주성과 소통성의 근거가 되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에 있다.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세계는 ‘빅테크 과두정’이라는 새로운 유령의 위협 앞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월가를 대신해 거대 IT 플랫폼 기업들이 경제를 넘어 정치 권력까지 장악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조차 “우리는 빅테크 억만장자들의 과두정으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했듯이, 이는 디스토피아 소설 속 시나리오가 아닌 우리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사악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은밀함’을 속성으로 한다. 공론장이 파괴되고 정보가 소수 권력에 독점될 때 사회는 어둠의 시대로 진입한다. 오늘날 알고리즘 권력은 겉으로는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이면에는 데이터 독점과 여론 조작을 통해 공공성(Publicity)의 기초를 잠식하며 공동선(Common Good)을 파괴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류에게 ‘재앙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낳고 있다. 사생활 침해, 차별적 알고리즘, 법적 책 임의 불명확성 등 인공지능이 야기하는 사회 문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AI가 학습한 편향된 데이터는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고착화하고, 딥페이크와 위치 추적 기술은 개인의 기본권을 상시적으로 위협한다. 확증 편향을 강화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필터 버블’ 현상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위기의 핵심에는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빅테크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구글, 메타, 아마존과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사용자 데이터를 독점하고, 객관성과 중립성으로 포장된 알고리즘을 통해 여론과 정치적 선호까지 조작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이 폭로했듯, 이윤 극대화를 위해 설계된 알고리즘은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불투명한 통제 체제로 변모시키고 있다. AI 기술의 상업적 권한이 빅테크 과두정에 집중되면서, AI는 인류의 번영이 아닌 소수의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그런데 가장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위협은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한 ‘노동의 종말’은 AI의 비약적 발달과 함께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정보통신기술의 진보로 세계 경제 규모와 생산성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고용 시장은 얼어붙고 실업의 공포는 전방 위로 확산 중이다. 이는 기술 혁신이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과거 자본주의가 가졌던 ‘기술 진보에 따른 고용 창출’이라는 선순환 기제를 완전히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간을 배제한 효율적 기술을 채택하지만, 그 결과로 해고된 노동자들은 구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즉, 생산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었으나 정작 그 생산물을 소비할 주체는 사라지는 ‘수요의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술 혁신의 파급 범위다. 과거의 자동화가 육체적 반복 노동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AI와 로봇이 의사, 변호사 등 고도의 지적 전문직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다. 숙련된 경력자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청년층을 위한 신규 고용의 문은 아예 폐쇄되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고착화될 전망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의 결실은 플랫폼을 장악한 소수 빅테크 과두 세력에만 집중될 뿐, 대다수 시민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풍요에서 소외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정점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용 절벽과 수요 부족의 악순환이 심화되면, 과거 대공황과 같은 전 지구적 경제 참사가 재현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파국을 막고 자본주의의 자정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복지를 강조 하는 케인스의 복지경제학 아니었던가.

출처: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300


 

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한길석(중부대 학생성장교양학부)

 

개강을 맞아 울적한 기분으로 수업 준비 겸 책장을 뒤지다가 못 보던 찻잔 하나를 발견했다. 개강을 피하고 싶은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사과 한 알 크기의 포동한 녀석으로, 달항아리 같은 살결에 알록달록한 점과 별을 붙이고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고놈 참 이쁘네’ 하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뭔가 수상쩍어서 살짝 돌려 보니 고양이는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커다란 갈색 얼룩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뒷면은 페인트 총에 맞은 우윳빛 벽화처럼 흉측한 얼룩으로 가득했다. 세상에는 돌려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내 말로는 조카가 준 거라 했다. 친구와 함께 도자기 공방에 놀러 갔다가 처음 빚어보고 선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얼룩은 어찌된 거냐 물으니 “원래 고양이였는데 망친 거래”라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 봤다. 흙을 빚어 무늬를 넣고, 유약을 발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마 앞에서 기다리는 조카. 그런데, 백사장을 총총 걷던 고양이는 간데 없고, 정체불명의 갈색 얼룩이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이다. 가마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조카는 끔찍한 사고 현장이 담긴 이 오브제를 이모에게 넘기고 재빨리 사라졌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이 찻잔은 두 개의 얼굴을 한 녀석이다. 한 쪽은 귀엽고 상큼하지만, 다른 한 쪽은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일그러져 있다. 인생도 비슷하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자기를 빚어내 제 나름의 무늬와 빛깔을 뽐내며 세상에 나오지만, 터져버린 고양이 신세를 면치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머리를 쥐어짜고 갖은 애를 써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봤자, 생각대로 착착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다. 마이크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타이슨은 탁월한 철학자임이 틀림없다. 다만 그 밑에서 배우는 건 조금 겁난다.

조카는 이십대 청춘이다.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길을 조마조마해 하며,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텨낸다. 맵고 신 나날을 살다가 도자기를 빚으며 모처럼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열에 터진 고양이와 만났다. 가히 ‘미지와 근접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라 할 수 있다. 인생은 잠깐의 위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의 유머다. 웃기진 않지만. 그 나이에 나는 어땠나 생각해 봤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 다만 도자기 공방은 없었다.

우리는 보통 얼룩을 감춰 놓는다. 눈에 띄지 않게 치워두면 삶은 다시 쾌적하고 매끄러워진다. 실패한 기억은 장 속 깊숙이 넣어두거나, 잘 안 보이는 곳에 쳐 박아 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얼룩을 감추다 보면 고양이를 빚던 그 오후도, 가마 앞에서 느꼈던 설렘도 함께 지워진다. 결과만 기억하고 과정은 잊는 것. 실패의 흔적을 지우면서 그 안에 담긴 노력과 애정까지 지워버리는 것. 우리가 너무 자주 저지르는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갈색 얼룩이 보이도록 찻잔을 비스듬히 놓아두었다. 귀엽기보다는 아름다운 찻잔이 되었다. 얼룩과 점들이 찻잔을 완성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삶이란 영광과 얼룩을 함께 응시하는 것일 테다. 잘 구워진 면만 드러내려 하지 않고, 터져버린 면도 슬쩍 내보이는 것. 그렇게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 적어도 이 찻잔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삶의 얼룩이 늘어날 때마다 이 찻잔을 쳐다봐야겠다. 조카야 선물 고맙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8352


 

헤겔 형이상학 산책63- 헤겔과 베르질리우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3- 헤겔과 베르질리우스

1)

베르질리우스(1779-1848)는 헤겔과 동시대에 살았던 스웨덴 화학자이다. 그의 업적은 많다. 그는 달톤, 라부와지에의 원자가설을 옹호했으며, 엄격한 실험을 통해 많은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 특히 그는 동위원소[isomorphe]나 동소체[isomerische]의 발견으로 유명하다. 그는 오늘날 스웨덴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헤겔은 선택적 친화성을 논하는 실재하는 척도 A절 c항의 주석에서 이 탁월한 화학자 베르질리우스를 맹공하고 있다. 헤겔이 근대 과학자에 대한 비판은 유명하다. 앞에서 미적분을 논하면서 헤겔이 뉴턴을 어떻게 비판했는가를 소개했다. 헤겔에 따르면 뉴턴이 미적분에서 무한 개념이 비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지키지 못하고 다시 무한소 개념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비판했다.

후일, 미적분의 토대를 확립했다고 알려지는 바이어스트라스는 헤겔의 무한 비율 개념이 무한 수학의 토대가 된다고 말했으니, 헤겔이 논리학을 통한 과학의 이해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웨덴의 국가적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베르질리우스를 헤겔이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화학적 결합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베르질리우스는 당대에 볼타가 발견한 전지에 주목했다. 그는 볼타의 방식대로 구리판과 아연판을 쌓아서 전지를 만들어 화학적 실험에 도입했다.

이런 실험 끝에 그는 모든 화학적 결합이 전기력에 의한 것 즉 +전기와 -전기 사이에 작용하는 힘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산과 알칼리의 결합은 예를 들어 H+와 OH-의 결합에서 보듯이 전기력에 의한 견인으로 보이므로 베르질리우스의 주장은 광범위하게 옹호되었다.

그러나 헤겔은 화학적 결합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하려는 베르질리우스의 주장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원자론에 대한 헤겔의 비판과 연결되며 이를 통해 헤겔은 상호 침투라는 개념을 확립하는데, 그는 이를 주석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이제 주석에서 헤겔이 전개하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헤겔의 주장을 이해해보자.

2)

헤겔 당시에 라부와지에의 원자 가설이 확립되었다. 이는 원자량이 일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어서 리터와 피셔는 실험을 통해 물질의 결합에서 원자량은 일정한 비율로 결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예를 들어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물을 만드는 비율은 1:8이다. 여기서 수소의 원자량이 1이고 산소의 원자량은 8인데, 물은 수소와 산소가 2:1의 비율로 결합하니, 그 질량의 비율은 1:8이 될 수밖에 없다. 일반화하면, 원자량 a와 b의 결합은 결합비율 x:y의 비율이 곱해져야 한다. 그러면 결합비율은 a:(b*y/x)가 된다.

베르톨레는 실험적으로 같은 결합에서 질량 비율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소위 동소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결합에서 질량 비율의 차이는 외적인 상황에 의존한다고 생각했지 이를 결합 이율의 일정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보지는 않았다.

“결국 그[베르톨레]는 이런 배제 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사정 예컨대 응집의 강도나 고형화된 염산의 물속에서의 비용해성은 작용 인자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정은 그밖에 또 다른 사정 예컨대 온도를 통해서도 그 작용이 지양될 수 있음을 밝혀 놓았다.”(논리학 재판, GW21, S. 356)

그러므로 이런 외적 상황을 제거한다면, 리터나 피셔가 주장한 대로 물질의 결합에서 질량은 일정한 비율에 따른다고 보았다.

3)

헤겔은 베르톨레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갑자기 베르젤리우스를 끌어들인다. 베르젤리우스는 베르톨레*가 일정 비율의 법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주장했는데, 이는 베르젤리우스가 베르톨래를 곡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 베르질리우스는 1818년 파리에 들러 베르톨레의 실험실을 방문하여 그와 교류했다. 그러나 베르질리우스는 베르톨레의 견해를 비판한 결과 둘 사이는 서먹해졌다.

문제는 화학적 결합에서 일정 비율의 법칙이 아니다. 헤겔이 베르질리우스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화학적 결합에서 일정 비율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원리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화학적 결합은 결합된 원자가 결합하는 다른 원자에 의해 둘러싸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둘러싸인다는 것은 결합하는 원자가 결합된 원자가 지닌 원자 사이의 공간에 끼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사이의 공간에 있다는 것은 결합하는 원자가 결합한 원자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결합은 외면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한다고 본다.

“이 말은 곧 용해된 것이 용해 매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는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용해 매체의 사이 공간은 용해 매체가 비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해된 실에는 용해 매체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비록 그 용해 매체가 그것을 둘러싸고 에워싸고 있든가 아니면 그것에 의해 둘러싸이고 에워싸여 있든 간에 용해 매체 밖에 그러므로 확실히 그 용해 매체에 의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357)

헤겔은 이런 주장을 통해 베르질리우스가 외면적 관계에 머무르는 입자론 철학을 옹호하면서 역동론적 철학을 부정했다고 한다. 역동론적 철학은 화학적 결합을 상호 침투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인데, 이런 역동론은 물체의 결합에서 적어도 일정 부분적으로는 단순히 외면적 결합에 그치지 않고 내적인 통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베르질리우스는 상호 침투에 기초한 역동론적 결합 개념을 받아들이면, 물질의 결합에서 원자량이 보존되고, 그 결합이 항상 일정한 비율에 따른다는 비율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 원자량 보존이나 결합 이율의 법칙은 이런 불면의 원자를 가정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화학적 결합에서 역동론적 개념은 사물의 부분에의 합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사물의 모든 면에서 합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화학적 결합에서 원자량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다만 부피에서 변화가 생겨남으로써 비중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4)

화학적 결합을 이처럼 외면적 결합으로 보면, 이제 화학적 결합을 유지하는 힘이 문제가 된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결합하는 힘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미 앞서 말했지만, 산은 + 전기를 띄고 알칼리는 -전기를 띠니, 양자의 결합은 마치 전기적 힘에 의한 결합처럼 보인다. 이를 일반화하면 모든 화학적 결합은 전기력에 의한 결합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전기적 힘은 물질의 질량과는 무관한 것이며, 따라서 화학적 결합에서 일어나는 외면적 결합을 설명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더구나 그는 이 화학적 결합이 “다수간의 거리에서 작용하는 것이며 결합 직전의 견인과 결합을 통해 발생하는 연소의 현상을 잘 설명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360)고 본다.

그러나 알다시피 화학적 결합에서 전자가 매개 역할을 하지만, 그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더라도 그 힘이 전기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전자가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궤도로 넘어가는 것에는 다양한 힘이 작용한다. 어떤 에너지라도 전자를 원자로부터 이탈해서 다른 원자의 궤도로 옮겨가게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전기의 힘도 작용할 수 있지만, 자주 화학적 반응에서 열을 가하거나 빛을 비추어서, 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헤겔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화학적 결합으로서 전자 공유를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기적 힘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았는데, 그는 이를 여러 가지 논증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이제 그가 제시한 논증을 열거해 보자.

① 전기적인 결합력은 중화되면 사라지는데 화학적 결합은 지속한다. 그것은 결합 후에도 지속적으로 결합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는 더는 전기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② 전기가 결합의 원인이더라도, 화학적 작용은 결합에 의거하는 것이다. 화학은 물질의 결합 때문에 변화하는 성질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전기력 외에 다른 결합을 일으키는 원인(열에너지나 빛 에너지, 심지어 운동 에너지 등)이 있을 수 있다.

③ 전기는 물체의 외면적 결합(일종의 혼합)을 이루지만, 화학은 질적 변화를 다루는데 그 질적 변화는 외면적 결합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질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내적 연관성이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전제다.

④ 실험적으로 전기력에서는 같은 전기를 지닌 물질이 결합하는 경우가 대립하는 전기를 지닌 물질의 결합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황과 산소의 결합이 산소와 구리의 결합보다 더 강한 예를 들고 있다.

5)

이상 설명했듯이 화학적 결합은 여러 힘으로 일어날 수 있다. 전기나 열, 운동 에너지, 빛 등도 화학적 결합을 일으킨다. 이런 결합을 통해 물질의 상호 침투가 일어나게 되며 그 결과 물질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헤겔은 라브와지에, 리터, 피셔 등이 원자량이 보존되고, 물질의 결합에서 일정 비율의 법칙이 있다는 주장은 올바른 경험 과학의 길이라 한다. 그런데 베르질리우스가 이를 원자론적 철학과 결합하고 다시 전기력을 결합 원인으로 끌어들인 것은 입자론적 철학에 사로잡힌 결과로 주장한다.

“올바른 이상에 이르는 실험적 길이 그런 비율에 그리고 리터 이래로 전면적으로 획득된 확장에 있었다면 그런 짓[베르질리우스의 전기화]을 통해서 이 위대한 발견이 경험의 길 밖에 놓여 있는 소위 입자론의 송가와 뒤섞이는 일이 그 자체로 더 확인된다. 그 출발점에서 경험의 원리를 내던지는 것만이 동기가 되어서 이전에 리터가 특별하게 시작한 착상을 받아들여서 전기적 양의 물체와 전기적 음의 물체의 확고한 질서를 제시해서 화학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가정하게 되었다.”(논리학 재판, GW21, S. 361)

헤겔 형이상학 산책62-선택적 친화성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2-선택적 친화성

1)

앞의 글에서 척도 관계[또는 비례]를 다루었다. 그 대표적 예가 곧 음조다. 도미솔, 레파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외운 음조 즉 장조와 단조다. 도레미파… 각 음이 이미 하나의 척도 즉 두 정량의 비율이다. 이런 척도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관계가 이루어지니, 그것이 곧 장조와 단조다. 헤겔은 이를 척도 관계 또는 비례라고 한다.

척도 관계에서 음조와 구별되는 새로운 관계가 출현한다. 이제 예를 들어 화학적 결합을 보자. 예를 들어 산[H+]와 알칼리[OH-]은 서로 결합하며 물[H₂O]이 된다. 이 결합은 알다시피 전자 공유에 따른 결합이다. 수소와 산소는 그와 동시에 원자가를 지닌다. 그런 원자가는 결합에서는 무관하다.

산소와 수소의 화학적 결합에서 산소와 수소는 원자가에서 일정한 척도를 지닌다. 산소가 16이라면 수소는 1이다. 이제 원자가에서 두 척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데, 물론 이 관계는 전자를 매개로 하는 관계다. 이 관계는 앞에서 말한 음조의 관계와 다른 특징을 지닌다.

2)

예를 들어 장조 즉 도미솔의 관계에서 그 관계는 다만 외적인 관계다. 그것은 그저 동일한 주파수의 배음 관계일 뿐이다. 관계하는 음들은 그 고유성을 잃지 않으며, 다만 같은 주파수의 음이 도미솔 사이에서 배가 된 채로 반복된다는 것 때문에 조화로운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나 화학적 결합은 다르다. 일단 여기서는 이중적 관계가 출현한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에서 그 원자가는 단순한 더하기로 끝난다. 물의 원자가는 결합한 수소와 산소의 무게의 단순한 합산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두 물체는 자신의 척도인 무게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보존된다.

그러나 결합한 물에서 산과 알칼리의 전자 값은 서로 상쇄되어 사라진다. 그것은 양자가 서로 전자들을 공유하면서 자기에게 부족한 전자를 상대방의 전자를 통해 채우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유를 통해 두 결합하는 물체는 자신의 전자 값(즉 이온 상태)을 잃어버리고 중화된다.

산과 알칼리와 같은 결합을 이제 일반화해서 화학적 결합으로 나가보자. 화학적 결합 역시 전자가 공유됨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결합은 일정한 비율로 이루어진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은 2:1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반면 황과 산소의 결합은 1:2의 관계다.

더구나 이런 관계는 단순한 비율 이상으로 배타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수소는 산소와 결합하지만, 황과 결합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런 화학적 결합은 일정한 배타성을 지닌다. 어떤 것끼리는 결합하지만, 다른 것끼리는 결합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화학적 결합은 배타적인 통일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런 배타적 통일은 물체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물체의 다른 측면 즉 원자가의 측면에서 두 물체의 결합은 없다. 그것은 다만 공존할 뿐이다. 이런 물체에서 일어나는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헤겔이 말하는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다. 그러나 선택적 친화성의 결합에서 결합은 물체의 전면에 걸쳐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결합은 물체의 원자와는 무관하게 다만 전자의 측면에서만 일어나는 부분적인 결합이다.

3)

우리는 오늘은 구체적으로 산과 알칼리의 결합, 일반화해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는 이유를 위와 같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것은 원자의 구조가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관계는 전자 공유를 통해 일어난다.

각 원자는 핵 주변에 전자 궤도를 가지고 있고 각 궤도는 일정한 수의 전자가 채우고 있다. 각 궤도에 들어가는 전자의 수는 일정한 데 특히 마지막 궤도에서 전자는 넘치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다른 원자 사이에 서로 전자를 공유하면서 안정된 궤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화학적 결합이다.

그러나 헤겔 당시에는 아직 이런 원자 구조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다만 일정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화학적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당시 과학의 지식에서 원자 구조니, 전자 공유니 하는 개념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소들이 서로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합에는 일정한 비중의 비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졌다. 헤겔은 이 절의 주에서 이 비율 법칙에 관한 리히터와 베르톨레의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헤겔은 이런 화학적 결합을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설명에서 헤겔은 비중을 가지고 설명하는데 비중은 곧 무게와 부피의 비례다. 각 사물은 이런 비중에서 고유한 척도를 지닌다. 이제 두 사물이 결합하게 되면 이 결합 관계를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비중을 무게A/부피B로 표현하자. 하나의 물체(예를 들어 수소)가 지닌 비중을 a/b 라고 하고 다른 물체(예를 들어 산소)가 지닌 비중을 c/d 라고 한다면, 결합한 물체의 비중은 a+c /b+d 가 된다.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지만, 이때 결합한(물)에서 분자를 이루는 두 물체의 무게는 결합 전과 결합 후가 동일하다. 그러나 비중은 서로 달라진다. 이런 비중의 차이는 곧 부피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결과다.

4)

이런 사실을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비중에서 무게와 같은 것을 내재 존재[Insichsein]라고 한다. 타자와 결합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내재 존재는 플라톤적 이데아 개념에 가깝다. 물체의 무게가 물체의 고유성이라는 생각은 그리스 원자론자로부터 유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받아들인 견해다.

“그러나 다만 무게는 결합 이전에 출현했던 무게의 합으로서 발견된다. 무게에 더해지는 측면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측면으로서 고정된 현존으로 되며 이를 통해 지속하는 직접적 정량을 지니게 되는 측면이다.”(논리학 재판, GW21, 348)

반면 부피와 같은 것은 외면적인 것이자 관념성[Ideelle] 즉 타자와 결합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다.

“두 특정화된 상이한 물질의 혼합에 따라서 더해진 부피에서 변화가 -통상적으로는 축소인데- 제시된다는 사실은 감각적 지각에서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공간 자체는 병존하는 등장하는 물질의 존립을 이룬다. 그러나 대자 존재가 자체 내에 포함하는 부정성에 대립하여 존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가변적인 것이다. 공간은 이런 방식으로 진정한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서 관념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 (논리학 재판, GW21, 348)

여기서 헤겔은 일반적 공간과 비중 속에 있는 공간[부피]을 구분한다. 전자는 병존하는 공간이며 서로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이 경우 두 공간을 합하면, 단순히 더해진 공간만이 나온다. 그러나 후자는 결합하면 가변적으로 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를 관념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비중의 부피는 공간인데 이처럼 가변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여기서 부피는 “대자 존재가 포함하는 부정성에 지배되는[gegen]” 것이기 때문이다. 즉 두 물체의 부피가 대자 존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대자 존재라는 것은 통일하는 힘이다.

헤겔은 비록 아직 이 부피의 변화가 전자 공유의 결과인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상호 침투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상호 침투란 곧 두 물체의 결합에서 각자의 한 부분이 서로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호 침투를 통해 두 물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이 결합하게 된다. 이런 두 물체를 결합하는 관계이므로 이 관계를 헤겔은 대자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화학적 결합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이를 대자 존재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즉 이 결합이 ① 사물의 내재 존재[사물의 이데아]와는 무관한 외면적 측면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 ② 또한 상호 침투의 결과라는 것만은 헤겔이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겠다.

4)

헤겔은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두 물체 사이의 관계에 상호 침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이를 오늘날 전자 공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호 침투가 원자 핵이 아닌 전자 사이의 공유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런 전자 공유를 일으키는 힘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화학적 결합 가운데 산과 알칼리는 +전기와 -전기 힘을 보여주니, 이 결합은 전기적 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 당시에 스웨덴 화학자 베르질리우스가 이로부터 모든 화학적 결합은 전기적 결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에 대해 의문을 표명하며, 이 관계는 설명하기 위해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은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괴테가 문학적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1809년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에서 결혼한 부부가 서로의 친구를 초대함으로써 서로 교차적으로 재결합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그 재결합은 부부였던 남녀가 헤어지고, 이성적이지만 부드러운 여성과 이성적이며 힘이 있는 남자가 서로 결합하고 감성적이지만 열정적 남자와 감성적이지만 우아한 여성이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이런 자연적으로 출현하는 선택적 친화의 관계가 있어서 아무리 제도적 강제를 통해서도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설을 통해 주장했다.

우리는 앞에서 두 대립하는 성질[Eigenschaft]의 상호 작용을 통해 양[Quantiaet]이 생성되는 것을 보았다.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비례 관계인 척도[Mass]가 출현한다. 이제 두 척도의 결합 관계를 통해 상호 침투가 작용하게 된다. 이 상호 침투를 통해 일어나는 결합 관계가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다.

질에서 양으로 이행할 때 두 성질의 통일적 관계를 대자 존재라고 했다. 이제 두 척도 사이의 통일적 결합 관계에서 대자 존재가 다시 출현한다. 물론 아직은 척도의 일면에서 일어나는 통일이며 부분적인 대자 존재가 되겠다. 이것이 선택적 친화성이다. 그러나 마침내 척도의 전면에서 이런 대자 존재적인 통일이 일어나게 되면 본질로 이행하게 된다.

5)

앞에서 헤겔은 화학적인 결합을 두 척도 사이의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이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을 통해 두 물체는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게 된다.

헤겔은 이런 계열이 물체의 한 측면이 대자적인 존재에 의해 결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음정에서 장조와 단조는 동일한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화학적 결합은 상호 침투에 의한 결합이다.

헤겔은 이런 배타적인 통일의 관계를 중화[neutralisieren]라고 한다. 이 중화는 한 측면에서는 단순한 혼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 다른 측면에서는 대자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비중을 지닌 두 물체의 화학적 결합에서 무게는 단순한 혼합이었으나 부피는 대자적인 통일이었다.

이런 중화하는 배타적 통일에 의해 척도의 계열이 성립한다. 예를 들어 산소는 수소와는 2:1의 관계로 결합하고 황과는 1:2의 관계로 결합한다. 수소는 탄소와 1: 3의 관계로 결합한다. 이런 결합 관계는 수소를 단위로 본다면, 산소와 탄소가 각기 1/2, 1/3이라는 비율로 관계한다. 이제 산소를 단위로 본다면, 2개의 수소와 1/2의 황과 결합한다. 이런 비율을 헤겔은 비례 수라고 하며 이런 비례 수는 일련의 계열을 형성한다. 이것이 곧 척도 계열이다.

6)

이런 척도 계열은 특정한 계열이며, 다른 계열에 대해 고유성을 지닌다. 척도 계열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것은 곧 이 척도 계열이 타자 즉 중화를 위해 결합하는 항과의 관계를 통한 것이다. 즉 이 중립화의 관계가 전개된 것이 이 척도 계열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비례 수 계열의 전체 속에 척도의 대자적으로 규정된 존재가 놓여 있다”라고 한다.

이제 척도 계열에서 항들의 관계를 보자. 앞에서 내포량을 규정할 때 그 정도는 비교되는 양을 지닌 다른 타자와 비교되면서 성립했다. 그것은 그저 크고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크고 작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동일한 양적인 측면에서 크고 작은 것이다.

반면 척도 계열에서 항들의 관계는 내포량의 관계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다르다. 내포량이 그 계열에 속하는 항들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 것이라면, 척도 계열에서는 자기 계열과 중화하는 계열에 있는 어떤 것과 관계하여 규정된다.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 산소와 황의 관계에서 척도 계열을 이루는 각 항의 비례 수는 산소를 단위로 해서 수소와 황은 1/2: 2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이런 척도 계열에서 각 항은 서로 독립적이다. 여기서 수소의 비례 지수가 1/2이고 황의 지수가 2라고 하더라도 황이 수소에 비해 더 크거나 작다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비례 수의 크고 작음은 다만 비교되는 단위를 통해서 규정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례 수는 다만 중화의 특정한 규정성을 의미할 뿐이다. 이 점은 수소와 황이 산소를 단위로 하지 않고 다른 원소를 단위로 한다면, 그 비율 즉 비례 지수가 달라진다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가 중화라고 불렀던 결합은 내포성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그 지수는 본질적으로 척도 규정이며 이를 통해 배타적이다. 수들은 이런 배타적 태도의 측면에서 그 연속성과 상호 융통 가능성을 상실했다. 부정적 성격을 유지하는 것은 크다거나 작다는 것인데, 하나ㄱ의 지수가 다른 지수에 대해갖는 우월성은 이런 크기 규정성에서는 머무르지 않는다.”(논리학 재판, GW21, 353)

7)

양적인 것은 자기를 벗어나 타자 속으로 연속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척도 계열에서 등장하는 양적인 것에서는 이런 이행이 사라진다. 각 항은 다른 항으로 넘어가지 않으며, 자기 고립적인 것이니, 이런 측면에서 각 항은 다른 항에 대한 부정의 부정이다.

각 항은 양적인 것이면서도 이제 양성을 벗어나 질적인 차이를 가지게 된다. 헤겔 논리학은 질에서 시작하여 양적인 것으로 이행했다. 이제 양적인 것은 오랜 여정을 끝내고 척도 계열에 이르러 다시 질적인 것으로 이행하게 됐다.

“이 관계 속에 두 가지 특정화하는 것이 어떤 것 즉 제삼자인 지수에 대해 자기를 특정화하는데, 나아가서 이 관계가 함축하는 것은 일자가 그 속에서 타자로 이행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부정 일반일 뿐만 아니라 양자가 그 속에서 부정적으로 정립된다는 것이며 각자가 그 속에서 서로 무차별하므로 그 부정은 다시 부정된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51)

헤겔 형이상학 산책 61-척도 관계로서 음의 장조와 단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61-척도 관계로서 음의 장조와 단조

1)

헤겔 논리학 존재론 3편 척도 2장의 제목은 ‘실재하는 척도’(초판의 경우 ‘자립적 척도’)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존재론의 경우 헤겔은 재판을 작성하면서 초판의 많은 부분을 뜯어고쳤으나 그래도 대체로 2/3 정도는 초판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초판과 재판을 대응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양자를 비교해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존재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실재하는 척도’ 부분에서 초판과 재판은 너무나 달라서 초판의 다만 몇몇 구절만이 재판에 이용되고 있어서, 양자를 축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행히 초판과 재판의 절 제목은 유사하고 내용도 읽고 또 읽으면 비록 말은 다르지만, 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서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초판과 재판의 비교보다는 헤겔이 사용하는 예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초판과 재판의 내용상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재판

자립적 척도

실재하는 척도

A 자립적 척도의 관계

A 자립적 척도의 관계

1 중화

a 두 척도의 결합

2 중화의 특정화

b 척도 비례의 계열로서 척도

3 선택적 친화성

c 선택적 친화성

B 매듭 선

B 대듭 선

C 무-척도

C 무- 척도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면 ‘자립적 척도’가 ‘실재하는 척도’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A 절에서 중심인 2항에서 초판은 화학적인 ‘중화’가 다루어지며 재판에서는 ‘척도 비례’가 다루어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장의 핵심은 ‘척도 비례’의 개념이며, 그것이 ‘화학적 중화’와 상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학적 중화는 산과 알칼리의 결합을 말한다. 더 넓게 말하자면 대부분 화학적 결합을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헤겔은 이런 화학적 결합의 개념을 척도 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화학적 중화와 연관된다는 사실만을 힌트로 삼아서 이제 척도 관계의 개념부터 이해해 보자.

2)

척도 관계(척도 비례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척도란 앞에서 규정했듯이 두 정량의 비례 관계다. 이 척도의 대표적 예가 비중이다. 사물마다 고유한 척도가 있는데, 어떤 사물의 척도가 다른 사물의 척도를 재는 단위로 사용될 때, 그것이 잣대[Regel]이다.

이런 잣대는 아직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이런 잣대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실재하는 사물 밖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잣대는 구체적 사물이다. 즉 고유한 척도를 지닌 하나의 임의로 선택된 사물이 그런 잣대로 사용된다. 이런 구체적 사물로서 잣대가 특정화하는 척도[spezifische Mass]이다.

이 특정화하는 척도는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온도계는 수은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은의 팽창 정도가 다른 사물의 온도를 재는 척도다. 그런데 이것은 수은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자신의 척도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서 다른 사물의 척도를 특정화한다. 예를 들어 비중병을 사용하여 사물의 비중을 잰다면, 물의 비중은 1이며 철의 비중은 10이며 나무의 비중은 0.1이다(이 숫자는 이해를 위해 상정한 임의적인 수치다) 이런 척도는 정량의 관계를 통해 나름대로 하나의 질을 이루니, 곧 무게/부피는 곧 비중이라는 철이나, 나무의 질을 낳는다.

3)

앞에서 이런 특정화하는 척도가 실재하는 척도로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비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물마다 고유하지만, 모든 사물에서 고정적이다. 철은 부피를 아무리 늘리더라도 그 비중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10이다.

그런데 사물의 온도의 경우 사물마다 고유한 온도 비례를 지니지만, 각 사물의 온도는 비례적으로 증감한다. 철[Fe]의 온도는 급격하게 상승하며 구리[Cu]의 온도는 천천히 상승한다. 이처럼 어떤 척도가 일정한 비례를 통해 증감할 때, 헤겔은 ‘실재하는 척도’ 또는 ‘자립적인 척도’라고 한다. 여기서 척도 비율의 증감은 직선적이라기보다 제곱 함수나 제곱근 함수처럼 곡선적이다.

사실 특정화하는 척도 개념과 실재하는 척도 개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 사물이 척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척도로 다른 사물이 규정될 때 사물마다 고유한 특정화가 이루어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특정화하는 척도에서 두 정량 사이의 비율이 고정되어 있다면(직선 함수), 실재하는 척도에서 그 비율은 가변적(곡선 함수)이다.

“이제부터 다루어지는 실재하는 척도는 우선 어떤 물체의 자립적 척도다. 그것은 다른 물체에 관계하여 이런 관계 속에서 동일한 물체를 특정화하며, 그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립적 물질을 특정화한다. 이런 특정화는 많은 다른 물체 일반에 외면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므로 다른 관계들을 즉 척도에서 다른 관계들을 산출하는 것이며 특정화한 자립성은 직접 비례 속에 머무르지 않으며 오히려 척도의 계열이라고 할 특정화한 규정성으로 이행한다.”

(논리학, 재판, 345-346)

4)

특정화하는 척도에서 실재하는 척도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런 발전을 통해서 출현하는 것이 척도 관계인데, 이제 이 척도 관계가 어떻게 출현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장 끝에서 온도를 통해 실재하는 척도가 설명되었는데, 헤겔은 2장에 들어오면서 실재하는 척도의 예로 흥미로운 예를 소개한다. 그것은 곧 음정이다. 음정은 알다시피 진동하는 현의 길이의 비례로 이루어진다. 도가 어떤 현의 길이라면, 미는 그 현의 1/2에 해당하는 길이며, 솔은 다시 1/4에 해당하는 길이다.(여기서도 숫자는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 때문에 임의적으로 설정했다. 그저 예라고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온도에서 외부 열에너지가 주어지면, 그것에 비례하여 물체의 온도가 증가한다. 온도의 증가는 비례(곡선 함수)에 따른다. 음정에서 도, 미, 솔도 온도처럼 비례하여 상승한다. 이 비례도 함수적으로는 곡선적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실재하는 척도로서 온도와 음정의 차이가 나타난다.

철의 온도가 상승하는 비례와 구리의 온도가 상승하는 비례는 서로 무관하다. 양자의 온도 상승이 그리는 곡선은 중첩되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질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음정의 경우는 다르다. 한편으로 모든 음정은 일정한 현의 길이 비율이다. 이 비율은 비례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비례를 지닌 음정들 사이에는 어떤 특정한 관계가 존재한다.

도, 미, 솔과 같은 음의 결합은 레, 파, 라와 같은 음의 결합과 구분되는 특정한 관계를 이룬다. 이 특정한 관계는 고유한 질적 차이를 낳는다. 전자는 장조이며 후자는 단조이다. 이처럼 장조와 단조로 구분되는 특정한 관계가 곧 척도의 관계이다. 간단히 말해서 척도 관계는 여러 사물을 일정한 척도로 비교했을 때 그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관계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5)

두 정량의 관계가 척도다. 다시 이런 척도들 사이의 관계가 바로 척도 관계다. 이제 두 척도가 어떤 특정한 관계를 이룰 때 그 관계를 구성하는 요인들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두 척도의 관계를 다루면서 헤겔은 비유의 무대를 화학의 관계 즉 산과 알칼리의 결합이나 화학적 결합과 같은 관계로 변경한다.

이런 척도들 사이의 일정한 관계는 화학적인 결합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음정에서는 그저 장조와 단조의 관계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화학적 결합은 더욱 특정한 관계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수소는 산소 2:1의 관계로 결합한다. 수소와 탄소는 1:3의 관계로 결합한다. 황과 산소는 1:2의 관계다. 반면, 철과 구리는 매개 없이는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척도 사이에서 화학적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

헤겔 형이상학 산책60-실재하는 척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0-실재하는 척도

1)

잣대는 어떤 정량을 측정하는 단위다. 어떤 사물의 정량은 그 잣대로 측정된 특정화된 정량 즉 개수이다. 잣대나 사물은 양적 관계 외에 각기 고유한 질적인 측면을 가진다.

“정량은 그 이중적 존재 속에서 외적인 것이며, 동시에 특정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며, 구별된 양적인 것 각각은 이런 이중적 규정을 그 자신에서 갖고 동시에 단적으로 타자와 교차되어 있다. 질적인 것들은 오직 그 속에서만 규정된다. 이 질적인 것들은 서로에 대해 존재하는 현존 일반일 뿐만 아니라 분리될 수 없이 정립되어 있고 그런 질적인 것에 묶여 있는 크기 규정은 질적인 총수[Einheit]다. 즉 이런 질적인 것들이 개념상 본래 연관되어 있는 척도 규정이다. 따라서 척도는 두 질적인 것의 내재적 양적 상호 관계다.”

잣대와 사물의 정량 사이의 양적 관계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제 헤겔은 잣대나 사물이 양적 측면 외에 질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이 양적인 관계의 측면과 질적인 측면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앞에서 두 잣대를 비교했다. 하나는 비중(무게/부피)과 같은 잣대이고 다른 하나는 온도(열에너지/물체의 부피)와 같은 잣대다. 둘 다 두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잣대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각 잣대는 두 정량의 비례이지만, 비중의 경우, 어느 사물에서나 두 정량은 동일한 비례 관계에 있다. 어느 사물에서나 부피가 늘면 일정하게 무게도 증가한다.

그러나 온도의 경우, 두 정량의 관계는 비례하지만, 그 비례지수는 사물마다 각기 다른데, 예를 들어 동일한 열에너지에 대해 철 온도가 돌 온도보다 몇 배 빨리 증감한다. 철은 빨리 뜨거워졌다가 빨리 식는다면, 돌은 천천히 뜨거워지며 천천히 식는다. 헤겔은 온도와 같은 잣대가 지닌 이런 특징을 일러서 “특정화하는 척도”라고 한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단순한 척도 즉 잣대와 달리 사물마다 다르게 작동한다. 단순한 잣대 예를 들어 비중은 물체에 대해 외적, 무차별이지만, 특정화하는 척도 즉 온도는 물체에 내적인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2)

내적인 연관은 발전한다. 온도만 해도 두 정량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직접 비례 또는 정비례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이런 직접 비례가 반비례를 거쳐 제곱에 이르게 되면, 그 관계는 더욱 밀접해진다.

기체의 압력과 부피는 서로 반비례한다. 그것은 압력과 부피가 동일한 분자 운동 에너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압력과 부피는 밀접한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제 제곱 비례하는 경우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전기에너지는 전류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렇게 제곱의 관계나 비례에 있을 때, 헤겔은 그 관계를 통약할 수 없는 비례라고 한다. 제곱 관계는 앞에서 개별 정량을 다룰 때 이미 등장했다. 그때 거리의 제곱은 곧 면적이라는 명제가 다루어졌는데, 여기서 보듯이 하나의 질은 자기를 양적으로 제곱함으로써 새로운 질이 출현한다.

그러나 거리로부터 면적으로 새로운 질이 생성한다 할 때, 거리나 면적은 모두 공간의 일부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질적 생성은 아니었다. 그것은 같은 정량이 좌표상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척도에서도 양적인 제곱의 관계가 다시 출현한다. 그러나 지금 다루어지는 관계에서 예를 들어 속도가 제곱해서 운동에너지를 낳는다고 할 때 양적인 제곱 관계에서는 서로 다른 새로운 질이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서로 무관한 독자적인 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질’의 생성이라는 측면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질적 존재가 관계한다. 그 관계는 양적인 제곱 관계이다. 예를 들어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이다. 그중 하나[속도]는 그 자체로 규정된 양이며 단위다. 다른 것[운동에너지]은 그 단위에 의해 특정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정량이며 그 개수이다.

이런 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각각은 이런 양적 관계 바깥에 독자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운동에너지이며 다른 하나는 속도다. 여기서 운동에너지의 질적인 측면과 속도의 질적인 측면은 서로 무관하다. 어떤 현존(속도든, 운동에너지든) 양적 측면은 질적인 측면과 무차별하다. 양적 측면에서 서로 관계한다. 그런 점에서 양자에는 동일성이 존재한다. 반면 질적인 측면은 서로 무관계하다. 양자는 전적으로 다른 질적 성격을 지닌다. 서로 관계하는 양적인 측면은 무차별한 질적인 측면에 대해 외적이며 양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관계를 맺는 현존 즉 질과 그 현존의 상호 양적 관계가 서로 무관하니, 이 관계를 통해 새로운 질이 생성되었다고 말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곱 관계가 새로운 질을 생성한다고 할 때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제곱 관계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만, 한계가 있다. 길이가 면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 차원을 확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속도가 운동에너지로 확장한다고 할 때 그 질적 생성은 사실, 그 질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마치 동일한 것이 모양만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속도는 운동에너지의 미분적인 힘이다. 어떤 한순간 지닌 운동에너지가 속도이며 이 운동에너지를 일정 시간에 걸쳐 적분하면 운동에너지가 나온다. 이런 점에서 운동에너지와 속도는 서로 동일한 것이다. 서로 동일한 것이 다만 한순간이냐 그것이 쌓여서 나타나느냐 하는 차이가 질적인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3)

비중은 물체와 무관하다. 그리고 온도의 전달은 물체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상당히 외면적이다. 나아가 운동에너지는 속도뿐만 아니라 물체의 무게와도 관계하므로 물체에 더욱 내면적이다. 양적 관계가 물체의 질적 현존에 대해 내면화되는 과정을 헤겔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설명한다.

헤겔은 두 질적 존재 사이의 양적 관계가 점차 고도화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속도는 시간에 직접 비례한다[V=aT). 여기서는 두 정량은 단순 비례의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낙하 법칙에서 거리는 시간에 대해 제곱 비례한다[S=1/2gT²]. 좀 더 발전하면 천체 운동에서 공전 속도의 제곱은 장 직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T² ⍶ a³ ]

헤겔은 속도와 같은 등속도 운동을 부자유 운동, 낙하 법칙과 같은 가속도 운동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라 하며, 마지막으로 천체 운동과 같은 것을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라 하는데, 그 까닭은 직접 비례에서 제곱 비례로, 나아가서 삼 제곱 비례로 발전하면서 운동이 물체 자체에 내재하는 운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침내 천체 운동에 이르면 이는 이제 개념 운동에 개념이 자기 자신을 구별하여 다시 복귀하는 운동에 다가간다. 이제 천체 운동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개념’은 곧 양자의 관계를 이루는 비례지수다. 즉 a³/T²이다. 이 지수가 자기를 분화하며 다시 통일한다. 그런 가운데 천체 운동 궤적 위에 모든 점이 형성된다. 그 점들은 비례지수라는 ‘개념’의 특정한 ‘현존’에 지나지 않는다.

천체 운동을 위에서 개념의 현존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직 천체 운동을 개념과 현존의 관계로 규정할 수 없다. 개념과 현존의 관계는 논리학 개념론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그 이전에 본질론에서는 유사한 관계가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지금 이 관계는 아직 본질과 현상의 관계라고도 할 수 없다. 이 관계는 다만 대자 존재와 일자의 관계다. 질적 범주에서 이미 대자 존재와 일자가 출현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자 존재는 질적 대자 존재와는 구별된 양적 대자 존재라고 보아야 한다.

4)

이미 설명했듯이 헤겔은 이 관계에서 양적 관계는 처음에는 두 질적 존재에 대해 무차별했다. 구체적으로 비중은 물체의 질적 측면에 대해 무차별하다. 그러나 양적 측면과 질적 측면 사이에서 연관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열에너지는 사물마다 다르게 전달된다. 각 사물에는 열이 전달되는 고유한 척도가 있다. 이렇게 사물마다 달라지는 척도가 곧 특정화된 척도다.

직접적 척도는 다만 어떤 정량이며, 사실 질적인 것을 자기에 부착하고 있는 하나의 개별적 정량 일반이다. 선행하는 규정인 척도는 단순한 외면적인 정량을 질적인 것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특정화하는 척도 속에서는 두 가지 크기 규정성의 구별이 정립되며 이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외적 정량에서 다수의 척도가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337)

마침내 두 질적 존재 사이의 양적 관계가 직접 비례, 반비례, 제곱 비례로 발전하면서, 두 질적 존재의 양적 관계의 측면은 각각의 질적 측면과 더 긴밀하게 통일을 이루게 된다. 마침내 두 질적 현존 사이에 천체 운동의 법칙과 같은 관계가 출현한다. 이 천체 운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듯이 두 질적 현존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두 현존의 양적 관계는 두 질적 현존에 내재하게 되며, 이를 통해 자유로운 관계가 출현하게 된다.

이 자유로운 관계에서 두 현존의 양적 비례지수가 개념이 된다. 이 개념을 헤겔은 부정적 통일성이라 하며, 관계를 맺는 두 측면은 즉 질적 현존은 이 개념의 자기 구별에 해당한다. 이 개념은 이제 완전한 자립성을 획득하며, 자기를 이중화하면서 두 현존이 된다.

처음에 직접 비례적인 양적 관계는 질적 현존에 대해 무차별한 관계다. 이때 질적 현존은 그 양적 관계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운동에 이르면, 양적 관계는 질적 현존에 내재화하면서 이제 더는 양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것은 이미 통약 불가능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질적 현존의 양적 관계를 넘어서 질적인 것 자체의 관계가 출현한다. 순전히 질적인 것들 사이에 어떤 상호 연관을 헤겔은 실재화된 척도라고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화성의 관계다.

“그러나 좀 더 발전된 규정을 이루는 것은 척도가 이제 이런 방식으로 실재화된다는 사실이며, 그 두 측면이 하나는 직접적이며 외면적인 척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내에서 특정화된 척도라는 점에서 구별되는 척도라는 사실이다. 이런 통일로서 척도가 이루는 관계 속에서 크기는 질적인 것의 본성을 통해 규정되고 상이하게 정립되며, 따라서 그 관계 규정성은 전적으로 내재하며 자립적이고 동시에 직접적 양을 구성하는 대자 존재 속으로, 직접 비례를 구성하는 지수 속으로 몰락하고 만다.”(논리학 재판, GW21, 462)

“부정적 통일성이 곧 실재적인 대자 존재이며 어떤 것의 범주 즉 척도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질의 통일로서 존재한다. 이는 완전한 자립성이다. 두 가지 상이한 비례로 발생한 이 두 가지 질은 직접적으로는 이중화된 현존을 제공한다.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그와 같은 자립적 전체는 대자 존재하는 것 일반으로서 구별된 자립적인 것으로 반발하는 것이며 그것의 질적 본성과 존립(물질성)은 척도의 규정성 속에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