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46-회화와 음악 그리고 시문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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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6-회화와 음악 그리고 시문학

 

1)

헤겔에서 예술 장르는 발전적이다. 조각은 부조가 출현하면서 회화로 넘어간다 회화는 색채의 마법을 통해 음악을 소환한다. 음악은 악극이 출현하면서 시문학[1]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시문학은 예술적 장르에서 최종적 형식이 된다.

시문학을 예술 장르의 최종적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시문학 이외에 다른 예술을 즐기거나 제작하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 것이다. 필자는 음악을 잘 모르는데, 시인인 필자의 한 친구는 음악을 모르는 필자를 약간 경멸적으로(?) 바라본다. 인간이 아니라 무슨 동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그 친구는 음악이 예술의 최고 형식이다. 아마 그는 자신의 시가 음악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친구에게 헤겔 말을 전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만날지 모른다.

헤겔처럼 예술 장르가 발전적이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시문학이 다른 예술에 비해 탁월한 어떤 점을 지닌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동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소개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화가 좀 식상해지기 시작했다.

영화는 음악과 회화, 드라마까지 포함하는 종합예술이지만, 핵심은 역시 눈에 보이는, 환상처럼 생생한 영화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눈에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힘드니, 그 세계는 아무리 풍성하게 만들어도 곧 진부해지고 만다.

이때부터 어릴 때 좋아했던 시가 다시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인의 그 무한히 약동하는 상상력이 전율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에서 본다면 시문학의 탁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시문학처럼 아름다운 예술은 없지만, 거꾸로 시문학에서 한계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헤겔을 통해서 장르의 측면에서 본 시문학의 장단점을 논해 보기로 하자.

 

2)

시문학의 질료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호로서 언어 즉 문자나 음소가 아니라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로서 관념이 시문학의 질료가 된다. 기호로서 언어는 시문학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2].

헤겔은 시문학의 질료는 다른 예술의 질료와 구분되는 독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시문학 이전의 다른 예술들은 모두 물질적인 자체를 질료로 사용한다. 회화에서 색이나 음악에서 소리를 헤겔은 이미 관념화된 물질[즉 빛이나 시간적인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물질성을 떠난 것은 아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그 자체가 물질성을 벗어난 관념적인 것이다.

헤겔은 회화와 음악을 다루면서, 질료의 관념화가 일어나면서, 낭만적 예술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낭만적 예술은 내밀한[innig: 자기 복귀하는] 주관성을 표현하는 예술인데, 주관성은 물질적인 질료(건축적 덩어리나 조각적 물질성)를 통해서는 표현되기 어렵지만, 관념적 질료는 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관념적 질료는 추상적 원소(음, 색)로 구분되면서 이 원소의 상호 관계를 통해 주관적 내면을 표현한다. 헤겔은 그 방식을 색채의 원근법이나 음악에서 화성을 통해 충분하게 보여주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 역시 그 자체로 분화되어 있다. 그것은 문장 속에서는 주어와 술어로, 형용사와 목적어로 관계하고, 다양한 문장형식에 따라서 고유하게 결합한다. 관념은 이런 복잡한 결합을 통해 거의 무한한 정신의 세계를 그려낸다.

회화에서 주관성은 사물을 보는 개별적 주관의 시공간적 위치, 입각 점에 머무른다. 회화에서 그려진 내용은 정신의 현상을 주관이 위치한 한 지점에서 일순간 보여줄 뿐이다. 음악에서 주관성은 심정적 수준인데 이는 상당히 일반적 수준(관습화된 감정)이지만, 감정에 한정된 수준이다. 회화나 음악에서 주관성은 감정을 통해 정신을 다만 간접적(상징적으로)으로 표현한다.

반면 시문학에서 모든 발화는 개인적 자아의 발화이지만, 이 자아는 이미 자기의식적이므로 자기를 넘어선 일반적 자아이다. 이 일반적 자아는 발화하는 자아를 규정하면서 발화하는 자아를 반성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언어적 발화에서는 발화 주체와 동시에 언표 주체로 이중화한다.

시문학에서 이중적 자아는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 속에서 정신의 세계를 전개한다. 그것은 감정의 수준에서 일반적 사유의 수준에 이르는 포괄적인 정신의 세계를 표현핟다. 그런 점에서 시문학은 주관적 정신을 표현하는 가장 낭만적 예술이 될 수 있다.

 

3) 음악과 회화의 종합

회화는 색채를 통해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는데, 이런 형상은 정신이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현상이다. 회화는 이를 통해 정신을 명확하게 규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회화는 공간적 평면에 제약된다. 회화는 주관적 정신을 표현하더라도 공간적 평면에 나타나는 순간적인 모습일 뿐이다. 회화가 표현하는 순간적인 모습은 비록 내밀성[Innigkeit]을 지니더라도, 자기를 지양하는 운동을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회화는 한계가 있다. 회화가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벌이는 고투(예를 들어 몽타주 기법)를 생각하면 회화의 한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시문학은 관념을 매개로 하고 이 관념은 그 자체에서 운동성을 지닌 것이므로 자기를 지양하는 정신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문학은 그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그 속에서 전개되는 드라마를 표현하니, 이런 점에서 회화보다 탁월하다.

 

“시 예술[Dichtkunst]은 회화처럼 어떤 특정한 공간에 제한되거나 어떤 상황이나 특정한 계기의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내적으로 심원한 대상과 그것의 폭넓은 시간적 전개가 표현될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3]

 

시문학의 탁월성은 음악과 비교해서도 드러난다. 음악은 음의 조합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지만 이런 감정적 표현은 정신을 다만 간접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건축물이 신상을 다만 둘러싸고 있을 뿐이듯이, 음악에서 감정적 운동을 통해 표현되는 정신은 모호하고 무규정적이다. 음악은 정신을 암시할 뿐이지 직접 표현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음악은 가사와 문학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려 한다. 음악의 출발점에서 가요로 시작했다. 고전 음악이라는 완성 단계에서 다시 악극으로 넘어간 것도 그런 감정의 모호성 때문이다.

시문학은 정신을 관념을 통해 직접 표현할 수 있으며, 정신이 내면 세계 속에 그려놓은 환상의 세계는 눈 앞에 있는 현실 세계보다 더 생생하고 명확하니, 그것은 자주 내면의 회화에 비유되곤 한다. 이 점은 시문학이 음악에 대해 갖는 탁월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정신은 [시문학을 통해] …감정에 그치는 내면성을 떠나되 그것을 여전히 판타지 자체의 내면에서 전개된 객관적 현실의 세계로 다듬는다.”[4]

 

회화와 음악과 비교해 볼 때 시문학은 한편으로는 내면의 회화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처럼 시간적 운동을 표현하니, 시문학은 회화와 음악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시문학은 ‟조형예술과 음악이라는 양극단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즉 정신적 내면성 자체의 영역에서 내적으로 통일하는 총체성이다”[5]라고 말한다.

 

4) 시문학의 한계

이상에서 시문학이 같은 낭만주의 예술 장르인 회화나 음악에 비해 갖는 탁월성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시문학은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니, 이 점에서 회화나 음악에 미치지 못하며 항상 회화나 음악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우선 시문학의 특징은 관념이 시간적인 계열을 이룬다는 데 있다. 조형예술의 경우 정신은 공간 속에서 동시에 표현되는 반면, 동일한 정신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시문학의 경우에서 그 표현은 시간적으로 계열화되어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시문학은 조형예술에 비해 한계를 지닌다. 조형예술은 공존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으므로, 여기서 무한히 세부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시문학의 경우는 관념은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만 표현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 관념은 아무리 구체적인 이미지의 수준으로 내려가더라도 일반성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문학이 아무리 시간을 들여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하더라도 공간적인 세부를 조형 예술처럼 세부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문학은 공간적으로 병존하는 것 가운데 필요한 요소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음악은 소리의 강도[强度: Intensity]를 통해 내적 감정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니, 감정을 산출하는 데서 가장 직접적이며 더구나 시대와 민족의 제약을 벗어나 보편성을 지닌다.

반면 시문학의 매체인 관념은 아무리 구체적인 이미지더라도, 감정을 직접 타격하지 못하는 관념적인 것에 머무른다. 그것이 울리는 것은 감정의 관념 또는 감정의 이미지이지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다. 만일 감정을 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시문학은 음악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고 하겠다.

시문학은 앞에서 말했듯이 회화나 음악에 비해 탁월성을 지니지만 반대로 한계도 지니고 있으니 시문학은 자주 회화나 음악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그림 책이 등장하는 이유나 시가 가요화하는 지점을 생각해 보면, 시문학의 이런 한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보편 문학의 개념

시문학의 매체가 이처럼 정신을 정신 속에서 표현하는 관념이므로, 시문학은 모든 시대 모든 예술 형식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시문학은 정신을 수수께끼와 같은 암시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정신이 현현하는 모습을 언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고전적 현상으로도 표현할 수 있고, 또한 현상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자체를 가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은 시문학을 보편적 예술이라 하는데, 그의 보편 문학 개념은 그와 동시대 예술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보편 문학 개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의미는 상이하다. 슐레겔은 자기 스스로를 넘어서는 아이러니 개념에 따라 문학은 문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문학은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우선 문학은 소설과 시, 극이 뒤섞일 수 있으며, 산문인 철학과 역사 자기 비평까지 포함한다.[6]

반면 헤겔에서 문학의 보편성이란 다양한 형식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문학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출현했다는 의미이다.

시문학이 이처럼 예술에서 정점에 이른 보편적 예술이므로 시문학은 동시에 정신의 표현이 예술을 떠나는 지점이기도 한다. 예술의 특수성은 곧 감각적 질료를 통해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이 자기를 지양한다는 것은 곧 특수한 감각적 질료를 넘어선다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회화와 음악을 통해 질료가 관념화되면서 시작했다. 마침내 문학에 이르러 감각적 질료의 관념화는 완성된다. 하지만 여전히 감각적 관념이 예술의 질료가 된다. 시문학은 예술의 특수성을 지양하는 가운데 보편적으로 된다.

이제 문학을 넘어서면서 정신은 감각적 관념의 지반을 떠나 일반적 사유의 지반에 이르게 된다. 정신은 사유의 지반에서 자기를 표현하니, 그것이 곧 철학이다. 예술은 자기를 넘어서 철학으로 넘어 들어가게 된다.   정신의 표현은 처음 종교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런 다음 예술로 넘어갔고 이제 마지막으로 정신에 대한 철학적 표현이 등장한다.


[1] 헤겔은 문학[Literature]이라 하지 않고 시[Poesie]라 말한다. 전자는 문자로 된 것을 다룬다는 의미이니 매우 포괄적이다. 역사 철학, 웅변 등 산문도 하나의 문학으로서 포함할 수 있다. 반면 시문학이라 하면, 그리스어 제작[Poesie]에서 나온 것이며, 이미 현실을 넘어서 어떤 형상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니, 여기서는 산문이 예술에서 제거되면서 시문학은 상당히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시라고 하면 문학의 한 특수 분야를 말하나 헤겔은 극시나 서사시까지 포함하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번역상 시가 아니라 시문학이라 번역한다.

[2] 기호와 관념 사이의 관계는 언어 이론의 핵심 문제인데, 여기에 다양한 이론이 제시된다. 이 자리에서 이런 언어 이론을 충분하게 논의할 수는 없으나, 주를 통해 간단하게 헤겔의 입장을 소개하기로 하자. 기호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는 본질론자가 오랫동안 언어이론을 지배해왔다. 19세기 비교 역사 언어학자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벤야민 등의 이론이 그러하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훗셀 등 현상학자를 통해 의미가 의식의 지향작용에 내재하면서도 초월하는 존재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의식의 지향작용에 내재하는 측면을 언어의 언사[言辭]의 측면이라 하며 초월적 의미는 그런 언사측면을 둘러싸여 있다고 보면서 언어의 언사적 측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20세기 중반에 언어혁명을 일으킨 구조주의자는 언어의 의미가 구조적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는 측면을 강조했으며, 이런 구조적 관계는 언어의 사용되는 삶의 공간을 통해 규정된다고 본다.

헤겔의 경우, 의미론은 여러 논의에서 분산적으로 설명되었다. 그의 논의는 아래 네 가지 측면으로 종합할 수 있겠다.

①그는 본질론적 언어 이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호와 언어의 의미는 상징적 관계이며, 의미는 관념 내에서 객관적인 것 즉 객관적 관념[reell]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며, 문화와 사회의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동시에 ②그의 언어 이론에서 단어의 의미가 주어 술어라는 문장의 구조 속에서 결정된다. 같은 단어라도 주어로 사용되는 경우와 술어로 사용되는 경우 그 의미는 다르며, 어떤 단어가 어떤 판단 구조 속에 들어 있는가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진다. ③세 번째로 헤겔에서 언사나 표현의 문제를 절대정신을 다루면서 설명했다. 절대정신 즉 종교와 예술, 철학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④헤겔은 발화주체와 언표 주체의 구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문장을 발화하는 자아는 자기의식이어서 스스로 자기 내 반성하므로 여기서 발화 주체와 언표 주체가 분열된다. 이런 분열 때문에 판단은 다른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

[3] 미학강의 3권, 232쪽

[4] 미학강의 3권, 233쪽

[5] 미학강의 3권, 231쪽

[6] 필자는 언젠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쿠의 ‘방랑자’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소설과 철학, 에세이, 논문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작품이니, 슐레겔의 보편문학에 가장 접근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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