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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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7. 분노와 절제

 
욕망은 어떤 때는 충동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욕망의 특성을 충동적 욕망 혹은 중독성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절제란 그런 욕망의 마음을 행동으로 쉽게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행동의 습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절제의 뜻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먹기를 자제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대화할 때 욕설이 습관처럼 배어서 욕이 아니면 대화를 못할 지경에 사람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는 욕심은 나의 배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욕을 하는 습관은 나의 혀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포르노 동영상을 보려는 욕구은 나의 눈이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더 진한 화장을 하려는 욕구는 나의 얼굴이 아니라 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나의 배, 나의 혀, 나의 눈, 나의 얼굴이 요구하는 욕구는 채워질 수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우리는 절제라고 합니다. 절제된 마음에서 비로소 행동 습관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의 무절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자기감정을 다스리는 절제력이 부족하다고 많이 느낍니다. 느끼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분노에 대한 절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노는 일종의 심리적 고통으로서 몸의 고통이 있으면 이를 진통제 등으로 치료해야 하듯이 심리적 고통인 분노도 치료의 대상입니다. 분노를 치료하는 방법은 분노를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그 원인을 피해가기는 실제로 쉽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술먹고 들어와 가족들을 못살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한 번 실수한 것 때문에 일 년 내내 나를 무시하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분노, 집에 가는 밤길에 내 돈을 뺐어간 깡패들에게 대한 분노, 나를 왕따시키는 학우들에 대한 분노 등등, 이 모든 분노의 원인들을 헤아릴 수도 없고 적절히 대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나 자신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절제하는 나 자신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지나가는 나와 모르는 자전거에 우연히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지각하고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화를 풀어야 할까요? 이처럼 의도가 없는 행동에 의해 피해를 보고 짜증내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내 마음만 상처받고 풀리지 않은 채 나의 화만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 손해일까요? 어느 누구도 나의 화, 나의 짜증냄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조차도 겉으로만 위안이 될 뿐 나의 화낸 나의 짜증냄을 풀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절제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를 무작정 참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표출하는 감정조절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를 일시에 폭발시킬 경우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분노의 적절한 표출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어떤 때는 화가 나서 혼자서 교실 뒤에 걸린 거울을 부수기도 합니다. 유리에 다쳐서 피가 나는 그런 몸서리쳐지는 뻔한 결과가 예상되지만, 그런 예후를 고려하지 않고 분노를 표출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청소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한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데, 이런 끔찍한 소식을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접하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서 분노를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히 화를 풀고 짜증을 내지 않는 마음의 윤리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은 고통의 감정에 해당합니다. 분노의 마음은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고통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분노는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하여 자식, 선생님에 대하여 학생, 기업주에 대하여 고용인, 독재자에 대하여 국민들, 이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권력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를 풀 행동의 탈출구가 약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분노가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노를 적절한 곳 적절한 때에 풀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터트린 분노의 책임은 그 공동체 즉 가족이나 학교 아니면 지역공동체나 국가가 대신 지지 않으며 고스란히 개인에게 되돌아옵니다. 청소년도 사회적 약자입니다. 부모에 대하여 약자이며 학교 선생님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입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생긴 분노는 그 공동체에서 책임을 공유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바로 청소년인 나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러한 뼈아픈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기 성장의 과정입니다. 결국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을 청소년기에 터득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청소년은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나쁜 것이니 스스로 잘 통제해야 한다’는 명령적 윤리만 있었고, 왜 내가 분노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찾기 어렵습니다.

나의 분노는 곧 내 마음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절제가 안 되면 방탕이 됩니다. 물질적 방탕이 방탕의 전부가 아닙니다. 정신적 방탕은 우리 청소년에게 다가온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정신적 방탕, 심리적 무절제를 스스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인생의 선배가 형식적으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무절제함을 절제심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묘수는 없습니다. 단지 꾸준한 일상생활의 연습을 통해 행동습관을 바꾸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 연습의 하나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한 순간씩 늦추는 방법이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표출을 하되 표출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또한 제삼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마음의 절제로 찾아가는 뾰족한 정답은 없지만, 자신의 무절제함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일상적인 연습만이 가장 가까운 정답인 것입니다.
 
 

8. 욕망과 주체적 윤리학

 
청소년 시기는 자기존재감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항적 감정을 쉽게 폭발하기도 하고 혹은 나쁜 감정에 휘말리어 평생 눌려서 살 수도 있습니다. 한편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의 동기를 세워서 끝내는 무엇이든지 이뤄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청소년의 징표입니다.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생물학적 보편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안에 욕망의 감정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결단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과정에서 나의 행복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나의 감정을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감정들 특히 욕망의 감정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잘 통제해야 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이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니만큼 그런 욕망을 싹둑 잘라버려야 한다는 강요된 윤리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은 나쁜 것이고 영어공부는 좋은 것이니,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라는 식의 획일적인 윤리학은 찐정한 윤리적 실천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윤리학은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욕망은 감정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그리고 밥을 먹으려는 준비행동을 준비합니다. 추우면 옷을 입고 따듯한 방에 들어가고 싶으며 또한 그런 행동을 옮기려 합니다. 이런 행동이 지나쳐서 남의 밥을 훔치고 남의 집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부당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나의 행동을 증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욕망은 세상을 다른 색깔로 칠하는 예술과 과학을 탄생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해봅시다. 욕망이 감정으로 나타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어떤 적절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감정의 조절입니다. 그런 감정의 조절을 규범화한 것이 바로 기존의 윤리학입니다. 감정의 조절은 개인의 책무이기도 하지만 법이나 문화 같은 사회적 관습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났다고 칩시다. 나의 화를 조절하기 위하여 나의 개인적인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수양말고도 화를 나게 만든 이 사회의 관습이 과연 옳은 것인지도 관찰해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윤리가 필요한 만큼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마음의 윤리도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의 윤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침팬지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해 합니다. 15개월 이전의 아이들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보고 빗질도 여드름도 짜며 옷매무새를 잡아봅니다. 거울을 통해 머리모양만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바로 반성인 것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명령받아 억지로 쓰는 반성문의 그런 반성이라는 말을 이제부터 싹 잊도록 합시다. 그런 반성이 아니라 내 마음을 되돌아보는 반성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성찰이라고도 하는데, 자기 성찰이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그저 반성이라는 소박한 말이 더 좋습니다. 반성을 억지로 할 필요 없습니다. 단지 일기를 쓰거나 블로그에 나를 표현하는 글을 올리거나 깊이 숨을 들이 쉬면서 잠시라도 어제 일을 회상하는 등등, 이런 차분한 시간을 갖는 일이 곧 반성의 시간입니다. 그런 반성으로부터 이미 마음의 윤리학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반성을 할 수 있을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의 윤리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윤리학, 좀 더 쉽게 말해서 감정조절의 윤리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침팬지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조절이란 뜻은 욕망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욕망을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습니다. 욕망은 오히려 나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마음의 힘입니다. 기존의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욕망은 무조건 나쁜 것이어서, 욕망은 제거되어야 할 나쁜 감정이었습니다. “이거 해라, 저거는 하면 안 된다”라는 식의 금지의 윤리학에서 욕망의 창조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청소년의 가장 큰 장점은 미래를 나름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그 미래는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이지만 바로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나는 나의 미래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의 욕망을 나의 친구삼아 배려하고 귀기울이며 공감하며 협조하면서 공존하는 연습이 소중합니다. 그런 일상생활 속의 연습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기초이며 이를 앞에서 자유의 윤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욕망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을 연습하는 일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조건입니다. 타인의 규제가 작용되는 금지의 윤리학과 달리 자유의 윤리학은 나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윤리적 자율성을 제시합니다. 그런 자율성은 법적이거나 통제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감정 조절을 학습하는 마음의 원리들입니다. 자율성의 조건은 행동에 대한 결과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먼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동습관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행동습관이 구체적인 마음의 준칙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앞서 말한 긍지의 마음, 겸양의 마음, 정의로운 마음, 관심을 두는 마음, 분노를 조절하는 마음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추게 된다면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주체의 윤리학’ 그리고 ‘자유의 윤리학’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욕망의 유혹이라는 큰 장벽이 있지만, ‘자유와 주체의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감정은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스스로 끄집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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