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2)[대안도덕교과서]-3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2)[대안도덕교과서]-3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5. 정의

현실사회에서 우리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 평등하지 못한 상황, 거짓이 판을 치는 상황 등에 대하여 부당하다는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자주 접합니다. 같은 학급 안에서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편애하는 선생님, 몰래 커닝하는 친구들, 왕따당하고 집단폭행당하는 친구를 뻔히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나 자신, 등등 부당하다고 느끼는 상황을 극복하고 개선해야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런 마음 상태를 우리는 정의로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로움이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거짓된 상황을 고쳐보려는 감정 상태입니다. 물론 정의로운 마음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는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거짓의 현실이 많기 때문에 개인이 혼자서 그런 불공정과 불평등 및 거짓된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한 사회, 즉 가족, 학교, 지역공동체, 나아가 국가와 세계 속에서 내가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거짓됨의 많은 상황에 대하여 나는 그냥 눈감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눈을 뜨고 그런 사회적 오류를 지적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구석진 곳에서 내가 아는 학우가 폭력으로 돈을 빼앗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칩시다. 나는 그런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습닏. 일제고사 기간에 남들이 몰래 부정행위를 하니까 나도 그냥 따라 하는 것이 별 문제없다는 자기 위안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의로운 마음을 누구나 다 갖고 있으면서도 부정의한 사태를 고치려는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사람들 내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거나 동조하는 것도 부정의한 것입니다. 문제는 불의를 고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면 그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해지지만, 그런 불의와 부정에 대하여 눈감고 있는 사람이 많으면 결국 그 사회는 병들고 불행해질 뿐더러 나 개인의 삶도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길거리 보행자 보도에 화분이 있고 그 화분에는 담배꽁초가 이미 열대여섯 개 정도 버려져 있었다고 칩시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내가 꽁초를 버리려고 쓰레기를 찾던 중인데 마땅한 쓰레기통을 찾지 못하다가 그 길거리 화분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 화분이 쓰레기통이 아닌 줄은 알고 있지만, 이미 그 화분은 남들이 버린 꽁초가 쌓였으므로 나도 하나 더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담배꽁초 하나 더 보탠다고 큰 일이 날 것도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나도 불의와 부정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소위 ‘무임승차’라고 부릅니다. 무임승차는 정의로움을 파괴하는 사회적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임승차를 자주 반복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행동이 나쁘다는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에 화분이 깨끗한 상태였다면 나도 담배공초를 거기에 버리지 않게 됩니다. 결국 나의 행동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임승차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기하급수적으로 더 부정의한 사회가 됩니다. 반면 이를 고치려는 사람이 한둘 모이면 이 사회는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로움의 마음은 다른 겸양이나 긍지의 마음과 달리 사회적인 윤리감정에 해당합니다.
 

 

6. 관심

청소년 시기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듯이, 나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리고 설계한 대로 ‘자아’라는 미래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인생의 재료를 많이 확보하는 시기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것저것 눈에 뜨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따라하고 싶은 연예인 스타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사회탐구 영역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서 방학 내내 부모님 몰래 사회과학 책만 읽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인터넷 게임에 확 빠져서 공부고 뭐고 오로지 게임 캐릭터만 머릿속에 꽉 차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정열이 있다는 것은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나아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게임에 중독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중독증을 좀 더 포괄적인 정열로 바꿀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것이 바로 청소년의 특징입니다. 게임을 하고 싶은 정열이 있었기에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정열에 불이 붙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열의 마음은 무엇을 행동하고 실현하느냐 하는 대상에 무관합니다. 정열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마음의 샘을 파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샘물을 파기 위하여 어디에 물기가 스며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달리 말해서 정열을 키우려면 우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요청됩니다.

관심은 일종의 호기심이기도 합니다. 호기심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즉 관심이 있어야만 사물이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부터 정열이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상생활의 논리입니다. 어떤 사람을 나의 진정한 친구로 삼고 싶다면,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옷색깔까지 맞춰 주고 싶은 마음이 자동적으로 생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그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도 나를 따라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친이 됩니다. 친구들끼리 몰려다니기는 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그 친구관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인터넷 게임조차도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관심이라는 마음의 힘은 인터넷 게임이나 아이돌 연예인에 대한 열광을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청년 벤처기업을 용기있게 기획하는 관심, 사회복지 분야로 미래의 꿈을 두는 관심, 영어공부도 할 겸 당장 미드에 빠져보는 관심, 이 모두 세상을 창조하는 마음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심을 내 마음 속에 잘 키우는 일이 소중합니다. 특히 청소년은 무엇에든지 관심을 둘 수 있는 잠재적 창조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관심이 이것저것에 너무 많아서,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진다고 불평을 호소합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이 일도 해보다가 아니면 저 일도 해보면서,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자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런 산만함조차도 아무 것도 안 하는 무관심보다 좋은 것이니 자신을 질책할 필요 없습니다. 청소년기의 중요한 발달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방황이라는 사실이다. 방황은 관심이 너무 많아서 그 어느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장기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나의 방황은 성장기 뇌가 안정화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 방황은 진정한 관심을 찾아가는 삶의 시도입니다. 관심은 방황을 거쳐야만 비로소 ‘집중함’으로 정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긴 인생에서 따져볼 경우 방황이 없는 정착은 자칫 인생의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원래 영어표현으로서 시행착오Trial and Error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실수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시도를 했기 때문에 실수가 생긴 것이고, 그 실수를 거울삼아 새로운 시도로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도하고 실수하지만 또 다시 시도하는 용기를 일으키는 방아쇠는 바로 청소년기의 관심입니다. 방황은 일시적으로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청소년기에 그런 방황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성장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어른에게 있어서 방황은 인생의 실패일 수 있으나, 청소년에게 있어서 방황은 성공하는 인생의 단계입니다. 청소년은 철학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유전적으로 결정된 생물학적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청소년은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통일된 존재입니다. 이러한 엄연한 인간본성의 모습을 어른과 청소년이 함께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청소년 윤리 교과서는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행복

“게임을 더 하고 싶은데 엄마가 못하게 해요.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하고 그만둔다고 엄마에게 말했지만, 실제로 인터넷 게임을 그만두고 싶지 않는 것이 저의 솔직한 욕심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게임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거든요. 게임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은 생각대로 따로 놀고 몸은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단 말이죠.”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은 욕망을 실현하려는 대로만 움직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과 욕망을 누그러지게 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런 갈등이 바로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입니다. 게임을 무작정 못하게 막으면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게임 아이템을 많이 잃어서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한편 댄스 동아리에서 춤을 추면서 희열을 느낄 때도 있으니, 항상 화만 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또래들과 어울려 놀 때 마음이 편해지지만 집에 들어와 부모로부터 간섭과 핀잔을 받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행복해지지만,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면 고통에 버금갑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고통보다 행복을 원합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은 어른들도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행복이 무엇일까요? 더 쉽게 말해서 어떤 감정이 행복을 일으킬까요? 아니면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불행히도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감정이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든지 그 감정을 걸러내고 아우르고 다스려서 표현하는 방법 안에 행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복의 실체를 직접 찾으려는 것도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인 것입니다. 동물원 침팬지에게 바나나를 주면 바나나 껍질을 잘 까서 먹습니다.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침팬지에게 양파를 던져주면 껍질을 가서 먹으려고 합니다. 껍질을 깠더니 그 속에 다시 껍질이 있어서 껍질을 또 벗깁니다. 그 안에 껍질을 계속 벗기면서 결국은 나무 것도 먹지를 못하게 됩니다. 침팬지의 영리함은 바나나에 통했지만 양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모른 것입니다. 행복도 양파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양파의 행복을 모르고, 어떤 감정을 벗겨내어야만 그 안에 진짜 행복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오해를 하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행복이란 감정 저 깊이 숨겨진 부동의 실체가 아닙니다. 겉에 드러난 감정을 풀어가는 표현과 방법 그 자체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생각이 고정된 어른보다 약간의 착오는 있을지언정 생각이 유연한 청소년에서 더 많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을 과감하게 멈추고 혼자 힘으로 몇 달 동안 방치되었던 내 책상을 정리한다고 칩시다. 책상 정리를 내 손으로 끝내고 나면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 대견한 생각이 듭니다.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이 바로 행복의 시작점입니다. 물론 그런 감정도 계속 이어가지 않으면 다시 게을러지거나 인터넷게임으로 또 빠질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 보기로 하죠. 인터넷 게임에 빠지게 되더라도 잠시라도 행복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에서 이외의 상황에서 아이템을 획득했을 때, 작년 겨울에 입었다가 보관해 둔 내 잠바 안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나왔을 때, 어제 밤 당일치기로 찍어서 공부한 문제들이 오늘 시험문제에 그대로 나왔을 때, 나는 매우 기쁨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일시적 즐거움입니다. 일시적으로 즐거운 감정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감정을 갖게 되는 행동을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하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한 성인군자라도 결국 게을러지고 순간 감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청소년이 어른들보다 자기 충동에 빠지게 될 우려가 더 크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언뜻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은 가족, 교사, 또래 등에서부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매체 등에 이르기까지 주변 환경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현상은 성장과 발달의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그래서 자기충동이라기보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힘이 더 크다고 해야 옳은 말입니다. 자기충동이 더 크다는 말을 달리 표현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을 크게 성장시킬 가능성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청소년들의 장점은 행복으로 가는 행동을 연습할 시간이 어른들보다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가능한지 더 말해 봅시다.
 

 

2. 책임과 자유

나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행복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나의 욕망과 행복은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감정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앞서도 말했지만 행복의 상태가 계속 죽 이어져서 욕망의 감정에 너무 흔들리지 않는 내가 바로 행복한 나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망의 감정은 평생 나와 함께 하며, 욕망의 감정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 본능을 넘어서는 윤리감정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윤리적 감정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따지는 이론들이 대학교 윤리학 교재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복잡한 이론들을 여기서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간단히 제목만이라도 아는 것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윤리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윤리학으로서 서구에서는 근대 나아가 현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편 윤리의 법칙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여, 우리는 그것을 쫒으면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론으로서 그 유명한 칸트의 윤리학입니다. 이런 이론들을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만 기존 윤리학의 공통점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책임을 묻기 위하여 나의 자유의지에 다라서 행동을 했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갓난아기 내 동생이 밥그릇을 엎어도 혼나지 않는데, 나는 밥알을 조금 흘려도 아빠에게 혼줄이 나는 것입니다. 나는 갓난아기 내 동생보다 책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나는 갓난아기 동생보다 자유의지를 담은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윤리학은 책임과 자유의 문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갓난아기 내 동생은 나만큼 책임질 일이 없지만 한편 내 동생은 나보다 자유롭지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내가 아끼는 잠바를 물어뜯어서 나는 속상합니다. 나는 화난 김에 강아지 콧등을 한 대 쥐어박을 수는 있지만 손해배상하라고 강아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집 강아지는 그만큼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동물원에서 키우던 호랑이가 사육사를 물어서, 사육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많았습니다. 냉정하게 분석하여 말한다면 호랑이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했다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서 법정에 세워야겠지만, 호랑이에게는 그런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호랑이는 자유가 없으며 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를 원합니까 아니면 철망에 갇힌 노예나 동물원의 노리개가 되기를 원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스울 정도입니다. 강아지도 목줄을 메어서 줄을 억지로 끌면 깨갱거리면서 싫어합니다. 그런 강아지 목줄을 풀어주면 좋아라하며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하물며 사람은 더 큰 자유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책임의 얽힘이 바로 윤리학의 기본틀입니다. 윤리학의 고전들은 거의 이런 식으로 윤리이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칸트의 윤리학을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만, 바로 그 칸트가 자유와 책임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책임과 자유의 문제를 동기부여라는 관점에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복잡하지 않게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됩니다. 나의 행동이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했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잔소리나 무서운 선생님의 명령에 의해서 혹은 학교 선배의 강압에 의해서 내가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은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도 않고 별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일 때 그 나의 행동은 즐겁고 효과도 크다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청소년이 그렇게 하도록 어른들이 놔두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청소년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한국 교육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를 개선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고 즐겁고 큰 효과가 나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안에서 행동의 동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원하는 행동을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할 수 있어야만 바로 앞서 말한 나의 행복한 상태를 갖게 되며 비로소 행복해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발적인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쯤이야 누구나 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구태의연하게 다시 반복하는 것 같아 필자도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해 봅시다. “타인의 압박과 관습 그리고 명령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나요? 물론 쉽지 않지만 그런 용기를 항상 연습하는 모습이 바로 청소년의 본능입니다.
 

 

3. 긍지와 인정욕구

용기의 감정은 청소년의 특징이며 장점입니다. 어른들은 직장, 동창, 혈연 등 사회적 관계들을 이미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변화시킬 용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청소년은 아직 사회적 연관관계를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변화와 가능성에서 무한합니다. 친구들이나 대중매체의 아이돌 스타로부터 어떤 때는 문학소설이나 영화로부터 간혹 짜릿한 감성적 메시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감성메시지는 나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와 닿는 동기부여가 생기면 우리들은 어서 빨리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듯이 행동은 신중함이 필요하고 신중하지 않으며 행동의 용기가 자칫 무모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자꾸 머뭇거리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친 무모함도 문제가 생깁니다. 머뭇거리는 주저함과 일시적인 자극에 의해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을 합니다. 실은 그런 갈등의 현실은 바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갈등이 없는 그런 인간상이 아니라 갈등을 풀어가려는 마음의 과정에서 윤리적 인간을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판단을 위하여 중용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중용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중용이라는 뜻은 이것저것을 섞어 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이란 일차적으로 내가 왜 이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과정을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그런 나의 반성을 거쳐서 판단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바로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마음이 커가는 징표입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부여를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을 먼저 필요로 합니다. 자기가 갖는 생각을 자기가 믿지 못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절대 옮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자부심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자기도취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취보다는 자부심이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동기부여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이 남과의 관계망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행동하는 양상입니다. 자기도취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없이 제멋대로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독선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믿음은 반성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 자기도취에 빠진 생각에서 시작된 행동은 실효성도 없으며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결국 반성이 없는 믿음은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은 남의 믿음과 충돌되는지를 세심하게 둘러봐야 합니다. 반성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한 생각이 자부심입니다. 자부심을 통해서 이룬 행동은 그만큼 실효성도 높고 남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해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만족도도 높아집니다. 결국 더 높고 뜻있는은 자부심을 더 쌓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높이고 타인에게도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자부심을 우리는 긍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긍지를 갖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일상의 연습은 자아를 형성하는 청소년기의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자부심이 지나치면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듯이, 긍지가 너무 지나치게 넘치면 오만이 됩니다. 한편 자부심이 없으면 자기불신이 되듯이, 긍지가 부족하면 비굴함이 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비굴함을 느낄 때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 비굴함을 갖게 되면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 즉 자부심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느낄만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서, 자신을 의심하는 청소년이 의외로 많습니다. 학교성적 등과 같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획일적인 기준 때문에 생긴 사회적 문제들입니다. 기성세대 혹은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정말 깊이 있게 되돌아본다면, 나는 내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학교성적은 떨어지지만 만화를 잘 그리는 자부심이 나만의 긍지입니다. 키는 작지만 나의 다부진 성격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도전정신을 남들보다 더 키울 수 있는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룹에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게임프로그램 제작에 일찍 발을 들여놓은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믿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나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를 믿음의 주체성이라고 합니다.

물론 긍지가 넘쳐서 오만해진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말 나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나는 오만함도 비굴함도 갖지 않고 적절한 자부심인 긍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청소년은 그런 감정의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비굴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오만한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긍지를 찾아가는 변화의 모습이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비굴함과 오만함의 시소를 타면서 나는 긍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청소년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고나면서 긍지를 갖는 사람, 타고나면서 오만하거나 비굴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긍지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과 연관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바로 남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이를 도덕철학에서는 인정요구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뻔히 속보이고 얄팍한 방식으로 자신을 잘 낫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려고 하는 지나친 태도를 간혹 우리는 접합니다. 그런 지나친 태도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려 합니다.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상대방의 인정요구를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정요구는 오만하거나 비굴한 욕망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인정욕구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긍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 스스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남들은 나를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그 어느 누가 나를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긍지와 용기, 믿음과 인정, 이 모두 통일된 인격체로 향한 도덕감정의 기초입니다.
 

 

4. 겸양

청소년은 수줍음이 많습니다. 수줍음이란 원래 미지의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양식에서 나왔습니다. 청소년의 수줍음은 어른으로 되는 아주 중요한 감정단계입니다. 부모 밑에서만 자라다가 사회로 나가면서 미지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려는 정신적 면역제인 것입니다. 수줍음이란 일종의 사회화 과정입니다. 즉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감정의 단계이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감정의 성장입니다. ‘만약 내가 이러 저러하게 행동을 할 경우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우려심이 지속되는 감정형태로 나타납니다. 거꾸로 말해서 수줍음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소중한 감정입니다. 수줍음은 잘못된 일에 대하여 수치심을 갖는 마음의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줍음을 탄다고 해서 나 자신을 나쁘게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수줍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서 남에게 양보하며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키우는 겸양의 시작입니다. 2,500년전 고대중국의 철학자 맹자의 사단설을 들어 보셨나요?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마음을 4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4 가지입니다. 측은지심이란 남의 불행을 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수오지심이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사양지심이란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줍음이란 결국 수오지심과 사양지심을 다 합친 마음의 씨앗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수줍어하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수줍음을 전혀 타지 않는다는 말은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행동습관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파렴치하다고 부릅니다. 염치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파렴치하거나 염치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합니다. 물론 수줍음의 감정 상태가 너무 지나치면 아무 행동도 못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고려하여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부작용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감정이 습관적으로 되면 나의 생각을 내 안에만 가두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이 세상에 표현할 기회를 잃는다는 뜻이다. 그런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자칫 나 자신을 스스로 자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학에서 벗어나 나의 수줍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습관을 들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믿고 자부심을 스스로 만들면 우리 모두 수줍음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자동적으로(선천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수줍음과 파렴치의 양단에서 겸양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주인은 오로지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장점입니다.

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금지의 윤리학에서 자유의 윤리학으로[대안도덕교과서]-1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가 아니다

청소년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발전적 과정이다. 청소년은 어른이 아니지만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이 어렵지만 쉽게 말한다면 “나로서의 나다움을 갖고 나는 태어났다”는 뜻이다. 성숙함에서 볼 때 청소년은 어른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다운 정체성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청소년 윤리학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만약 어른이 청소년을 결핍된 존재로서만 일방적으로 다루려만 한다면, 그에 따르는 청소년 윤리학은 타이르고 훈계하고 지시하거나 못 하게하고 칭찬하거나 벌주는 등의 일방적인 규범윤리학이 될 것이다. 일방적 규범윤리학은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이기보다 어른을 위한 윤리학이 될 수 있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어른이 청소년을 주체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은 청소년 스스로 미래를 찾아가도록 하는 범례를 제시하거나 청소년 스스로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게 하는 동반적 생활윤리학이다.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인지 아니면 자기정체성을 지닌 존재인지는 어른이 청소년을 보는 관점이며, 이런 관점은 청소년 윤리학의 방향을 잡는 핵심이기도 하다.

 

2. 좋음, 착함, 선함

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행동으로 이끄는 삶의 준칙이다. 이것이 윤리를 설명하는 언어적 정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착하다는 것이 무엇이고 행동을 이끈다는 것에 대해서도 더 설명이 필요하고 그리고 삶의 준칙이라는 용어도 혹시 지나친 강령이 아닌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행동을 자아내기 위하여 그런 착한 행동은 반드시 좋은 행동이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착하다는 것은 좋다는 것과 같은 뜻에서 나왔다. 영어로 말할 때는 다 같이 ‘굳’good이어서 별 문제없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말로 착한 것과 좋은 것을 말할 때 혹시 그 두 표현이 다른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선과 악이라는 대비된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선이라는 표현은 추상적이어서 마치 저 높은 하늘에 존재하여 절대적인 도덕의 완성체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선도 역시 ‘굳’의 명사goodness로 쓰인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다 하나거늘 우리말로 하면 ‘좋은’ ‘착한’ 그리고 ‘선善한’ 것처럼 다른 뜻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 답을 말하자면 영어에서 ‘굳’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같이 적용하여 사용하지만, 우리 국어에서는 ‘착한’이라는 표현은 사람에게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이라는 수식어는 사람에게나 사물에게나 다 쓰고 있다. 윤리학은 사람의 행동을 문제삼는 것이지 물건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체계가 아니다.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좋음이란 결국 착함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멋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공부 잘 하는 사람, 건강한 사람, 인간관계에 능한 사람, 스포츠를 잘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여기서 어떤 학생이 질문할 수 있다. 어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착취되고 나쁜 일에 늘 이용당한다면, 그 착한 사람을 과연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그러난 이런 질문은 사물에 적용되는 좋음의 기준을 사람에 적용했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다. 이렇게 좋음을 해석한다면 인간을 위한 윤리학이 아니라 사물을 위한 윤리학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을 위한 윤리학을 원하며, 여기서는 특히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을 모색한다. 사람을 위한 윤리학에는 좋음이 바람직함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평소에 생각해 본 착한 사람은 나쁜 일에 자신을 이용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으로 자신을 이끌어야한다는 점에서 착하거나 좋거나 선이라는 말은 다 같은 뜻이다.

 

3. 바람직함

바람직한 행동은 또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들 일반이 바라는 것과 같을 경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행동이 된다. 여기서 사람들 일반이란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같은 경우 이를 바람직하다고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경험적 설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람직함에는 대부분의 사람들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바라는 그런 바람직함이 있다고 한다. 그런 바람직함은 구체적인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형이상학 세계에 존재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형이상학적 설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험적 설명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경험적 의미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행동을 한 나 자신 말고 행동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이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도 하고 혹은 나의 행동양식을 따라하기도 하는 그런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바람직함이란 나의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남의 일반적 관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바람직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엄마와 갈등이 생겨서 한 동안 대화가 뜸할 때 엄마와의 화해의 표시로 엄마가 좋아할 듯한 행동을 시도한다. 평소 하지 않았던 방청소를 한다든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엄마가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고 칭찬하다면 그런 나의 행동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바람직한 행동, 바람직스러움이라는 것은 내가 속한 가족, 학교, 지역, 사회, 국가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에 맞춰져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했지만 내 가족이나 학교 선생님은 의외로 나의 행동을 싫어할 수 있다. 이 경우 내가 좋아하는 행동유형과 집단이 원하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적인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함에 대하여 자기의 행동유형을 조절해가는 탁월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조절의 연습기간이 바로 청소년기이다.

 

4. 모방하는 사회적 자아

청소년기는 바람직한 행동유형을 찾아가는 시기이다. 결국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라는 뜻이다.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바람직한 과정은 자기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판단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어른이 젖먹이 아이를 키우듯 벌과 상이라는 제도를 통한 일방적인 훈육의 윤리학이라면, 청소년 스스로의 자율적 판단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능력은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어른을 바라보고 따라하면서 성장한다. 이미 교육은 학교 입학 이전부터 거울에 반사된 어른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고슴도치인데 토끼처럼 행동하라는 어른들의 강요된 윤리 책이라면 그런 윤리 책이 만 권이 된들, 우리들은 강요된 토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고슴도치를 자동적으로 따라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 동물원에서 어느 정도 훈련된 침팬지 정도라면 모를까, 동물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자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울을 향해 흥분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한다. 거울에 나타난 모습이 나임을 안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기본이다. 그래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타인에 대한 의식은 윤리학의 출발이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가 다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첫째 나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한다. 둘째 나는 남을 따라하면서 내가 성장한다. 즉 나는 남을 모방하면서 나의 자기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만큼 남을 모방하는 행위는 아주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어른을 모방한다. 우리 모두는 타인을 모방하면서 타인과 함께 하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특히 우리 청소년은 어린이와 달리 또래와 어울리기를 시작한다. 또래 어울림은 이제 부모의 그늘아래서 벗어나서 스스로 정체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성장단계이다. 또래집단의 특징은 내가 또래들의 친구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남의 모방을 서로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또래 모임의 출발은 나도 어엿하게 남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데 있다. 나는 이제 남의 거울이 되어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 지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나를 잘 가꾸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남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도 따라하게 되는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나의 사회화 과정이며 나의 나다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나 또래와 어울리는 시간은 시행착오를 포함한다. 사회적 거울을 통해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아을 잘 닦는 시절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울 자체를 부정하고 거울보기를 거부한다. 거울보기를 거부하는 시기에, 부모가 자기를 남과 비교하면 가장 싫고 가장 힘들어진다. 어찌보면 거울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다. 거울을 통해 자기가 남에게 비교당하는 그런 모습이 싫기 때문에 거울도 싫어진 것이다. 또래와의 시간은 이렇게 거울과 함께 하지만 어떤 때는 거울이 싫어지기도 하는 그런 기간이다. 즉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혼자서 만들어가는 나만의 자아를 추구한다. 모방을 통한 사회적 화해를 배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만의 성곽을 쌓는 개성을 만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조절과 타협을 배우며 나아가 주체와 개성을 키워가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뜻이다. 개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은 창의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화해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도덕을 위하여 정말 중요하다. 사회적 자아와 창의적 자아를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다. 모방하기와 개성쌓기의 행동양식을 배워가는 통로가 바로 청소년 윤리학이다.

 

5. 규범은 절대적인가

그런데 윤리가 딱딱하면 윤리는 사람 행동을 바꿀 수 없다. 윤리적 규범, 윤리 행동강령이 윤리적 강요로 된다면 너무 무서워 겉으로는 응하겠지만 속으로는 상황을 피할 궁리만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응대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윤리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한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같은 유명한 철학자는 윤리적인 마음이 원래부터 사람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어서 자발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이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양의 맹자 역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누구나 다 자동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강요된 윤리가 아니라 상황을 잘 맞추어준다면 자동적으로 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은 그런 마음이 속에 깊이 감춰져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평소부터 생활 속에서 윤리적 행동규범의 연습이 필요하다. 윤리적인 마음 혹은 측은한 마음이 곧 올바른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 나의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생활의 연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름과 선함이 같은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올바름 역시 바람직함처럼 나 자신만의 문제이기보다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많은 여러 윤리학자들은 말한다. 철학적으로 반성한다면, 한 특정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정치지도자들이 올바른 행동의 규범을 지나치게 많이 가르치려 든다면 그 올바름이란 반드시 좋은 윤리가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올바른 행동 혹은 올바름이란 좋음이나 선한 행동에서 자동적으로 유발되기 때문에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문명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양식은 상호간 다양한 약속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약속을 존중한다는 행동규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길거리 신호등 지키기, 껌밷지 말기에서부터 인터넷 에티켓이나 공공장소에서의 금연, 전철안의 사회적 예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행동규범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십년 전에는 식당에서 흡연이 부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 공공장소 흡연은 옳지 않은 행동의 표본이다.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올바름의 기준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착함이나 좋음의 기준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이에 대한 생각은 윤리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 책 본문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6. 즐거운 윤리 : 자유 윤리학

결국 외부에서 강요된 딱딱한 윤리보다 내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외부로부터 강요된 윤리를 종속윤리학이라면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윤리를 자유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자유윤리학을 내 삶의 토대로 만들어야 한다. 자유윤리학을 위하여 윤리규범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즐거워야 한다. 규범에 따라서 행동하기는 하지만 나의 행동이 억지스러워 짜증나기만 한다면 그런 윤리는 진정한 윤리행동이 아닐 것이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고통일 뿐이며, 이런 종류의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인간의 성향이다. 짜증나지 않는 윤리는 결국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결정한 행동을 하는데서 만들어질 것이다. 짜증나는 윤리보다 즐거운 윤리를 추구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상식적인 성향이다. 즐거운 윤리를 인생에서 구현하는 것이 곧 행복의 열쇠이다.

즐거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즐거운 상태란 고통이 적거나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아픔과 즐거움 사이에는 칼로 베듯 선명한 구획이 없다. 즐거움을 갖기 위하여 그 전에 아픔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에서 청년에 이르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고민을 한다. 방황과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정체성을 조금씩 확보해간다. 그런 아픔을 뚫고 새로운 즐거움이 잉태될 수 있다. 현재의 아픔이 아프더라도 미래의 즐거움이 예상되고 이 아픔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이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변신한다. 반면에 혀에 달콤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충치와 당뇨 그리고 비만의 원인이 된다면 그 달콤함의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이 될 것이다. 즉 즐거움과 아픔의 차이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나의 자율적 행동에 달려있다. 다시 말한다면 나의 짜증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의 감정이지, 그 행동을 유발한 대상에 짜증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속 윤리학에 따르는 나의 행동은 아무리 선하고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보여도 즐겁지 않으며, 결국 나의 미래를 행복하게 설계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이 약간은 힘들고 어렵고 아파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대로 행동하는 그런 자유윤리학에 수반하는 행동은 결국 즐거움을 자아내게 한다.

무어(G. E. Moore 1873-1958)

무어(G. E. Moore 1873-1958)

올바름과 바람직함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동규범이라면 좋음과 착함 그리고 즐거움 등은 나의 주체적 자유를 유발하는 심적 동기와 맞닿아있다. 무어(G. E. Moore 1873-1958)라는 20세기 초 유명한 윤리학자가 있었다. 그는 윤리학의 많은 기준들이 자연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좋은 사과라고 말할 때 ‘좋음’이라는 것이 마치 사과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음, 착함, 선함은 곧 자연적인 대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 안에 있는 심리적 판단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미적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이란 어디에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실제로 나의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이런 입장은 상대주의 윤리학의 극단적 경우이다. 이런 상대적 입장도 있지만, 최근에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대체로 일반적인 기준이 우리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과학적 주장들도 많다. 문화양식이나 역사적 변화에 따라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입장을 상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 문화나 관습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기준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입장을 절대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준은 윤리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좋음의 기준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른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윤리학 이론이 있으며, 인간사회와 무관하게 좋음의 절대적인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절대주의 윤리이론도 있다. 좋음이라는 것이 나만의 느낌 혹은 공유된 느낌이라면 그런 좋음의 기준은 주관적이거나 상대적인 나의 마음에 소속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나아가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느낌에 의존한 것이라면 그런 윤리는 간주관적 혹은 공리주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절대주의 윤리학은 느낌이나 정서 등의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윤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며, 형이상학적 윤리학이 여기에 속한다.

윤리학의 이론들은 이렇게 복잡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나 자신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는 실질적인 윤리가 필요하다. 나 자신으로부터 형성된 동기에 의한 행동 준칙이어야 한다. 나로부터의 동기만이 지속적인 자발적 행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런 행동을 자발적 행동이라고 부른다. 자발성에 의한 행동준칙들이 바로 자유윤리학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윤리학에 기초한 청소년 윤리학은 크게 두 가지 삶의 안내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욕망에 대한 안내서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에 대한 안내서이다. 먼저 욕망에 대한 삶의 안내서를 살펴보자.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모든 욕망적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규범만이 있다. “신발을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껌을 씹어서는 안 된다”, “떠들어서는 안 된다”, “10등 안에 들도록 공부를 해야 한다”, 등의 행동제약 규범은 많은데 내가 자율적으로 하는 행동안내는 없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윤리학 전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는 일과 욕망을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일은 다르다. 욕망이 누구에 의해서 금지되는 그런 금지의 윤리학은 권력의 종속된 윤리학일 수 있다. “너는 오늘부터 날마다 매점에서 우유를 사다가 책상위에 놓아야 해” 라는 명령의 윤리학은 명령자의 욕망의 권력을 채우기 위하여 나의 욕망을 금지하는 일과 같다. 욕망은 나쁜 것이어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식으로 윤리학이 구성되었지만 그런 윤리학은 진정으로 삶의 행복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망은 한편으로 문화적 창의성을 생산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힘이기 때문이다. 금지의 윤리학으로 욕망을 금지시킬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금지된 욕망 속에 창의성을 낳는 욕망도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이 아닌 자유의 윤리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