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2)[대안도덕교과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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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2)[대안도덕교과서]-3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5. 정의

현실사회에서 우리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 평등하지 못한 상황, 거짓이 판을 치는 상황 등에 대하여 부당하다는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자주 접합니다. 같은 학급 안에서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편애하는 선생님, 몰래 커닝하는 친구들, 왕따당하고 집단폭행당하는 친구를 뻔히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나 자신, 등등 부당하다고 느끼는 상황을 극복하고 개선해야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런 마음 상태를 우리는 정의로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로움이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거짓된 상황을 고쳐보려는 감정 상태입니다. 물론 정의로운 마음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는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거짓의 현실이 많기 때문에 개인이 혼자서 그런 불공정과 불평등 및 거짓된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한 사회, 즉 가족, 학교, 지역공동체, 나아가 국가와 세계 속에서 내가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거짓됨의 많은 상황에 대하여 나는 그냥 눈감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눈을 뜨고 그런 사회적 오류를 지적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구석진 곳에서 내가 아는 학우가 폭력으로 돈을 빼앗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칩시다. 나는 그런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습닏. 일제고사 기간에 남들이 몰래 부정행위를 하니까 나도 그냥 따라 하는 것이 별 문제없다는 자기 위안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의로운 마음을 누구나 다 갖고 있으면서도 부정의한 사태를 고치려는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사람들 내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거나 동조하는 것도 부정의한 것입니다. 문제는 불의를 고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면 그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해지지만, 그런 불의와 부정에 대하여 눈감고 있는 사람이 많으면 결국 그 사회는 병들고 불행해질 뿐더러 나 개인의 삶도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길거리 보행자 보도에 화분이 있고 그 화분에는 담배꽁초가 이미 열대여섯 개 정도 버려져 있었다고 칩시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내가 꽁초를 버리려고 쓰레기를 찾던 중인데 마땅한 쓰레기통을 찾지 못하다가 그 길거리 화분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 화분이 쓰레기통이 아닌 줄은 알고 있지만, 이미 그 화분은 남들이 버린 꽁초가 쌓였으므로 나도 하나 더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담배꽁초 하나 더 보탠다고 큰 일이 날 것도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나도 불의와 부정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소위 ‘무임승차’라고 부릅니다. 무임승차는 정의로움을 파괴하는 사회적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임승차를 자주 반복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행동이 나쁘다는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에 화분이 깨끗한 상태였다면 나도 담배공초를 거기에 버리지 않게 됩니다. 결국 나의 행동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임승차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기하급수적으로 더 부정의한 사회가 됩니다. 반면 이를 고치려는 사람이 한둘 모이면 이 사회는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로움의 마음은 다른 겸양이나 긍지의 마음과 달리 사회적인 윤리감정에 해당합니다.
 

 

6. 관심

청소년 시기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듯이, 나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리고 설계한 대로 ‘자아’라는 미래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인생의 재료를 많이 확보하는 시기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것저것 눈에 뜨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따라하고 싶은 연예인 스타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사회탐구 영역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서 방학 내내 부모님 몰래 사회과학 책만 읽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인터넷 게임에 확 빠져서 공부고 뭐고 오로지 게임 캐릭터만 머릿속에 꽉 차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정열이 있다는 것은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나아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게임에 중독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중독증을 좀 더 포괄적인 정열로 바꿀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것이 바로 청소년의 특징입니다. 게임을 하고 싶은 정열이 있었기에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정열에 불이 붙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열의 마음은 무엇을 행동하고 실현하느냐 하는 대상에 무관합니다. 정열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마음의 샘을 파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샘물을 파기 위하여 어디에 물기가 스며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달리 말해서 정열을 키우려면 우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요청됩니다.

관심은 일종의 호기심이기도 합니다. 호기심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즉 관심이 있어야만 사물이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부터 정열이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상생활의 논리입니다. 어떤 사람을 나의 진정한 친구로 삼고 싶다면,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옷색깔까지 맞춰 주고 싶은 마음이 자동적으로 생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그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도 나를 따라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친이 됩니다. 친구들끼리 몰려다니기는 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그 친구관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인터넷 게임조차도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관심이라는 마음의 힘은 인터넷 게임이나 아이돌 연예인에 대한 열광을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청년 벤처기업을 용기있게 기획하는 관심, 사회복지 분야로 미래의 꿈을 두는 관심, 영어공부도 할 겸 당장 미드에 빠져보는 관심, 이 모두 세상을 창조하는 마음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심을 내 마음 속에 잘 키우는 일이 소중합니다. 특히 청소년은 무엇에든지 관심을 둘 수 있는 잠재적 창조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관심이 이것저것에 너무 많아서,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진다고 불평을 호소합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이 일도 해보다가 아니면 저 일도 해보면서,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자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런 산만함조차도 아무 것도 안 하는 무관심보다 좋은 것이니 자신을 질책할 필요 없습니다. 청소년기의 중요한 발달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방황이라는 사실이다. 방황은 관심이 너무 많아서 그 어느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장기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나의 방황은 성장기 뇌가 안정화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 방황은 진정한 관심을 찾아가는 삶의 시도입니다. 관심은 방황을 거쳐야만 비로소 ‘집중함’으로 정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긴 인생에서 따져볼 경우 방황이 없는 정착은 자칫 인생의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원래 영어표현으로서 시행착오Trial and Error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실수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시도를 했기 때문에 실수가 생긴 것이고, 그 실수를 거울삼아 새로운 시도로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도하고 실수하지만 또 다시 시도하는 용기를 일으키는 방아쇠는 바로 청소년기의 관심입니다. 방황은 일시적으로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청소년기에 그런 방황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성장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어른에게 있어서 방황은 인생의 실패일 수 있으나, 청소년에게 있어서 방황은 성공하는 인생의 단계입니다. 청소년은 철학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유전적으로 결정된 생물학적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청소년은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통일된 존재입니다. 이러한 엄연한 인간본성의 모습을 어른과 청소년이 함께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청소년 윤리 교과서는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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