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일 지음,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EBS 오늘 읽는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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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이게 나라냐’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과 그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된 말이다. 지금은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상반된 의도를 담은 정치 공세의 구호로 쓰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나라(폴리스)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바탕이며 그 목적이기도 하다. “시민의 삶을 살거나 시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살며, 공적인 삶과 관련해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동물”(18쪽)이 인간답게 사는 사람을 뜻한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칭하는 ‘나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의로운 공동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일의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2022)은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 국가와 시민의 관계, 사회와 국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서두에도 자세히 밝히고 있듯이 플라톤 『국가』의 원제는 ‘Politeia’로 ‘폴리스의 정치체제’라는 뜻이 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윤리관이 담긴 『국가』는 플라톤의 유토피아인 ‘정의가 살아 있는 이상적인 국가’의 조건을 제시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 또 어떻게 타락해 변해갈 수 있는지를 다중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플라톤의 스승이자 불의한 죽음을 맞았던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여러 사람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주제로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에서는 총 10권 분량의 『국가』 서설에 해당하는 1권의 대화 내용을 주로 다룬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파하며 정의의 실체를 논하는 내용을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작은 제목으로 체계적으로 나누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강자의 세계관을 들고 논의에 난입”한 트라쉬마코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시종 “정의(正義)의 정의(定意)를 묻”고 논박한다.

“자신의 이익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부정의(不正義)를 통치자의 기술로 둔갑시킨”(100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지금 부정의한 통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지금 우리의 통치자들은 어떤가? “정의가 남 좋은 것이라 위장해 피통치자들을 속이고, 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게 하고 위법한 자는 부정의한 자라고 하여 처벌한다.”(100~101쪽) 이런 모습이 통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피치자는 위정자의 모순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감히 부정의를 저지르지 못하고 비난하며, 정의를 지키는 시늉을 한다. 치자와 피치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가 이 모순을 견디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101~102쪽) “우리 사회가 겪었던 최악의 통치 권력 중 하나였던 제5공화국이 내세웠던 국정지표가 ‘정의사회구현’이었던 것을 보면”(102쪽), 정의라는 이름 아래 모순의 사회가 유지된 역사는 가까운 과거사에서도 목도된다. 현대 사회에서 정의로운 자의 타율적 결핍은 심해지는 데 반해 부정의한 자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현상을 두고 부정의한 자의 ‘능력’이란 말로 칭송될 때 2,500년 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비극적으로 현실화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후반부에는 플라톤이 주장한 정의로운 이상적인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 철학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종합적 견해를 다룬다. 사회 구성원 중 사적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수호자 계층을 지목하여 그들이 함양할 덕목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 제도권 안에서 공적인 삶의 태도 등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자들이 통치하는 철인정치의 가능성을 다채롭게 짚으며 정치체제뿐 아니라 이에 관계하는 인간의 영혼 및 이데아 개념, 문학 등도 거론하는 대목은 플라톤의 『국가』를 다시 읽어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오늘날 『국가』를 읽는 것은 ‘정의에 이르는 길’을 찾는 지적 여정의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정의에 이르는 길, 즉 정의로운 나라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플라톤의 국가』 논의의 연장으로 한철연 웹진 〈ⓔ 시대와 철학〉에 연재하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의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의 한 대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러운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1


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1.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 시대와 철학〉, 2019.06.20., <http://ephilosophy.kr/han/52662/>, (접속일: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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