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는 마음이다. 로이 부캐넌 [악(樂)인열전]②

기타는 마음이다. 로이 부캐넌

 

이 현(건국대 철학과)

만약 블루스가 당신의 플레이리스트에 없다면 그건 둘 중의 하나이다. 블루스가 필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거나, 블루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다.1)

이번에는 블루스 음악에 대해서 좀 다뤄보고자 한다. 블루스는 들으면 들을수록 어려운 음악이다. 그런데도 블루스는 사람을 당기는 힘이 있다.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계속 듣게 되는 음악이다. 그 힘은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블루스라는 음악이 좀 그렇다. 마치 평양냉면과 같아서 처음 접하면 그 매력을 느끼기 힘들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처음 듣자마자 블루스가 맞았다면, 그만큼 당신의 속이 쓰라렸다는 것이다. 그 쓰라림을 씻어 내려줄 음악이 블루스이다.

오늘의 동행자는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이다. 그는 1939년 미국 아칸소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흑인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스틸 기타의 재능을 보였고, 15살 때부터 직업적인 기타리스트 생활을 했다. 그는 19살에 나이에 〈Suzie Q〉로 잘 알려진 데일 호킨스 밑에서 세션 활동을 했고, 그 후에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하면서 경력을 쌓아 갔다.

 

그는 1971년 미국의 한 공영방송에서 방영한 “세계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기타리스트(The Best Unknown Guitarist In The World)”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킴으로써, 존 레논을 비롯하여 저명한 컨트리 뮤지션 멀 해가드(Merle Haggard)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72년 블루스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그의 데뷔 앨범 [Roy Buchanan]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앨범에는 명곡 이 실려있다.

“나는 나의 연주에 대해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충분했다.”

“기타는 마음이고 성격이다. 기분이 울적할 땐 기타도 울적하고 기쁠 땐 기타도 노래를 한다. 자기의 마음 기분을 잘 반영할 줄 아는 연주인이 결국은 끝까지 남는 법이다.”

– 로이 부캐넌

 

부캐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블루스는 감정의 격정을 연주하는 장르이다. 인간의 감정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하다. 우리가 흔히 감정을 ‘희로애락’이라고 구분하고 있지만, 그것들 사이의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 우리의 분노는 한편으로 슬픔이 섞여 있고, 우리의 슬픔 역시 분노가 섞여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이 아니라, 수많은 겹침으로 얽혀 있는 아날로그이다.

블루스는 음악적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다. 왜냐하면 블루스의 세계에서 훌륭한 연주자는 자신의 감정을 잘 연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블루스에서는 싱어(singer)는 없고 오직 연주자(player) 밖에 없다. 블루스는 오직 삶과 고통으로부터 빚어지는 연주(play the blues)만이 있을 뿐이다. 부캐넌의 재능도 그의 음악을 완성시키는 요소는 맞지만, 부캐넌의 삶 그 자체가 그의 음악을 완성시킨다. 삶의 깊이를 얼마나 끌어 올릴 수 있는가. 그 과정은 심히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연주자로서 그가 선택한 기타는 무엇인가. 그가 연주했던 기타는 펜더의 텔레케스터 2324모델(Fender Telecaster SN 2324), 일명 낸시(Nancy)다. 그는 텔레케스터의 선구자이다. 텔레케스터는 상당히 다루기 까다로운 기타이다. 특유의 비음 소리와 깽깽거리는 음색은 매력적이지만, 개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곡의 조화를 맞추기 어렵고, 펜더사 역시 블루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낸시는 부캐넌의 특유의 심플하면서 그루지한 치킨피킹 주법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는 연주 시 볼륨 패드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러한 연주 방식은 음향을 통일시킴으로써 텔레케스터 특유의 음색을 잘 살리면서 곡 전체를 조화롭게 만들었다. 텔레케스터의 음색은 부캐넌 특유의 담백함을 살려주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의 레코드사 Polygram은 그에게 상업적 성공을 강요했다. Polygram은 그가 좀 더 대중적인 음악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원치 않았고, 이러한 의견 차이 때문에 레코드사와 다툼이 심했다. 그는 점차 술과 약물에 빠져들었고, 1988년 8월 14일 아내와 크게 다투다가 경찰서로 연행됐고, 유치장에서 셔츠로 목매달아 생을 마감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음악가로서는 참으로 비극적인 최후였다. 블루스 아티스트들 중에서는 삶의 고독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제니스 조플린, 스티브 레이 본이 그러했고, 로이 부캐넌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루스는 고통스러운 자기 삶의 깊이를 끌어올려 드러난 그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다. 블루스에서 부르고 응답하기(Call and Response)가 음악적 핵심이다. 여기서 부르고 응답하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인 코드를 주고받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응답이다. 나는 블루스라는 장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삶의 고독을 소리로 조각하는 것.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끊임없이 불러 세우고 그 감정에 응답하는 것. 그래서 아티스트의 고독이 깊어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빛난다. 그는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지미 페이지 등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찬사와 인정을 받았음에도, 대중들로부터는 소외당했다. 그는 늘 외로웠고, 그에게는 누구보다 블루스가 필요했다. 자신의 고독을 위해서. 그의 고독을 연주함으로써 찬란한 고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https://youtu.be/v4e2VgycfSw

Roy Buchanan – Live from Austin TX, 1976

 

위의 1976년 텍사스 오스틴 라이브는 블루스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중 하나로 꼽힌다.

라이브의 시작을 알리는 <Roy’s Bluz>는 등장부터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로커빌리2)적 요소가 가미된 이 곡은 상당히 경쾌하면서 간명하다. 로커빌리적 요소는 백인 블루스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백인 블루스의 매력은 흑인 음악의 특징인 그루브함 위에 컨트리 특유의 간명함과 통통 튀는 감성이다.

<Roy’s Bluz>는 1972년 앨범 [That’s What I Am Here For]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에는 라이브의 4번째 곡인 <Hey Joe>가 실려있다. <Hey Joe>는 원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곡으로서 부캐넌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헌정곡이다. 둘이 비교하면서 들어도 좋은 청음 포인트다.

 

https://youtu.be/8mr9I7g1A7o

Roy Buchanan – Roy’s Bluz

 

https://youtu.be/fe82eYRjiBU

Jimi Hendrix – Hey Joe, 1967 Monterey Pop Festival

(상당한 명연이다. 기회가 되면 꼭 지미 헨드릭스도 꼭 다뤄보고 싶다.)

 

두번째 <Soul dressing>은 Malcolm Lukens과의 협주가 인상적이다. 블루스의 Call and Response를 잘 보여주고 있다.

 

https://youtu.be/ClRHx5FJ9yA

Roy Buchanan – Sweet Dreams

 

나머지 두 곡 와 은 그의 데뷔 앨범인 [Roy Buchanan]에 실려 있는 곡들이다. 는 그의 부드러운 기타 연주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블루스곡이지만 상당히 컨트리적인 따뜻함이 담겨 있는 곡이다. 애절한 벤딩은 분명 엄청나게 화려한 스킬은 아니지만, 마음을 녹인다. 기타는 손이 아닌 마음으로 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곡.

 

https://youtu.be/XgOLDAWu6OY

Roy Buchanan – The Messiah Will Come Again

 

누가 뭐라 그래도 그의 대표곡은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다. 환상적인 트레몰로와 처절한 벤딩은 사람들을 진한 감성 속으로 녹여버린다. 부캐넌의 연주 특징이라고 하면 충실함에 있다.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의 연주에는 빈틈이 없다. 그의 연주는 촘촘히 직조된 직물과 같아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움을 자아낸다.

The messiah will come again

– Roy Buchanan

 

Just a smile

Just a glance

The Prince of Darkness

he just walked past

 

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

 

There was a town

It was a strange little town they called the world

It was a lonely, lonely little town

 

Till one day a stranger appeared

Their hearts rejoiced

and this sad little town was happy again

 

But there were some that doubted

They disbelieved, so they mocked Him

And the stranged He went away

and the said little town that was sad yesterday

It’s a lot sadder today

 

I walked in a lot of places I never should have been

But I know that the Messiah,

He will come again…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 저마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이번엔 내가 내 방식대로 얘기해보겠다(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는 부캐넌이 자신의 방식(my way)으로 ‘세계라는 작은 마을(little town they called the world)’에 다녀간 ‘이방인(stranger)’, 예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부캐넌이 말하는 세계, 즉 작은 마을은 ‘외로운 작은 마을(lonely little town)’이다. 그러나 홀로 찾아온 이방인이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rejoiced), 그 작은 마을은 아주 행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방인을 의심하고(doubted) 불신하며(disbelieved) 조롱했다(mocked). 그런데 그가 떠나자 그 마을은 점점 슬픔에 잠겼다. 외로운 세계의 찾아온 이방인 덕분에 사람들은 행복했고, 그런 이방인을 떠나 보낸 것은 그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메시아, 예수는 인간의 죄를 사하고 떠나버린 존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들이 떠나보낸 것에 가깝다. 그래서 누구는 그가 영원히 떠났다고 말한다. 어둠의 왕자(The Prince of Darkness). 그는 어두운 과거로 떠나가 버렸다고(he just walked past) 말이다. 이 가사의 내용을 종교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메시아라는 매개를 통해서 결국 부캐넌은 인간의 실존적 상태, 고독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고독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부캐넌은 무엇 때문에 과거로 떠나버린 이방인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일까?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늘 현재를 살아간다고 믿지만,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매 순간 ‘지금’을 잃어가는 고독의 순간에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늘 곁에 있는 것은 사실 없을 수도 있다. 마치 바람처럼 말이다. 우리가 맞고 있는 바람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며, 잡을 수 없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 속에서 마주하는 바람은 ‘현재의 나’와 마찬가지로 예전에 다른 누군가를 스치고 지나갔던 바람이다. 즉,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바람은 ‘누군가의 과거’였다.

파울 클레 :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 1920

그렇기에 과거와 지금에는 ‘은밀한 약속’이 놓여 있으며, ‘지금시간Jetztzeit’에는 앞서 간 모든 과거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깃들어 있다. 벤야민이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로 여겼던 것처럼, 부캐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부캐넌에게 있어서 고독은 오히려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준비, 즉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닐까? 그리고 그 구원은 과거로부터 온 것, ‘파울 클레의 천사’ 발 앞에 쌓여있는 잔햇더미 속에서 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잔햇더미는 우리의 마음에 쌓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안타깝게 떠나버린 이들을 가슴 속에 묻어 두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떠나 보냈다고 생각하는 메시아, 즉 구원은 어쩌면 나의 마음속에 묻어 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부캐넌은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부캐넌의 메아리가 깃들어 있다. 마음을 울리는 힘은 기억이고, 우리가 느끼는 향수병은 마음 한편에 쌓여있는 추억의 내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외롭고 힘들 때, 단 한 명이라도 그의 소리를 기억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늘 과거로부터 우리와 함께 있다. 그의 텔레케스터 소리와 함께.


1) 정성일 평론가의 <영웅본색> 평론의 패러디이다.

 

2) 1960년대 등장한 로큰롤과 힐빌리(hillbilly:컨트리송의 다른 명칭)가 결합된 형태의 음악장르이다. 로큰롤이 태동하던 초기에는 많은 컨트리가수들이 로큰롤로 진출했다. 그러면서 로큰롤에 컨트리적 요소가 많이 섞이게 되는데, 나중에 이러한 특징이 하나의 음악장르로 정립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