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투스트라 비키니를 만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비키니 씨, 저 알겠어요?

아, 자거라투스트라 씨, 안 그래도 소위 서자 철학자라는 자거라 씨한테 가보려 했어요. 지금 저한테 걸린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그런데 한국의 그 세계적인 철학자들께서는 어째 한 말씀도 없나요?

안 그래도 이 자거라투스트라가 나서 볼까 했지만, 원래 이 문제가 ….

자거라 씨도 겁먹었나요? 60만 ‘삼국카페’에서 들고 일어나니 그럴 만도 하겠네요.

왜 겁이 없겠소. 비키니 씨, 하지만 우리끼리 싸운다는 게 맘이 안 들어서, 그냥 넘어가기만 바랬어요.

아니 솔직히 한국의 철학자들이 언제나 그렇게 뒤꽁무니 뺐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요? 정치적인 문제야 철학자니까 몰라서, 아니 관심의 영역이 아니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윤리적인 또는 문화적인 문제가 나올 때도 항상 점잖은 척 뒷짐을 지고 있었던 거, 맞지요? 진중권 씨 혼자 일당백으로 싸우는데 미안하지도 않나요?

하긴 그래요. 우리 철학자들도 요새는 연구기금을 안 주면 연구 안하거든요. 그런데 보아하니 비키니 씨나 심지어 나꼼수 씨조차 큰돈은 없는 것 같은데, 무얼 하러 이 고상한 몸을 더럽히겠소.

더럽히다니요? 저 비키니는 정말 이 아름다운 가슴조차 더럽히면서 이 나라를 위해 나섰는데, 대체 이 나라 철학자들은 뭐가 그렇게 고상한 체 하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그래도 철학자 하면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사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우리나라 철학자들은 모두 시멘트 통속에 사는 것 같아요. 디오게네스의 통보다 시멘트 통이 더 고상한가요?

아니, 하여튼 미안하오. 하지만 이 문제는 철학자들도 별무 소용이요.

왜 그래요? 저 비키니, 차라리 확 벗을까요? 그러면 철학자들이 한마디 하겠어요?

누드 퍼포먼스의 역사야 길지요. 그때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곤 했고요. 그러면 이왕 만난 김에 한번 따져 봅시다. 여성의 누드, 또는 벗은 몸은 본래의 역할 즉 사랑의 매체라는 것 외에 사실 여러 가지로 이용되어 왔어요.

자거라 씨, 그런데 사랑이라면 사적이며 또 비밀스러운 관계가 아닌가요? 여성의 몸을, 아니 뭐 남성의 몸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런 공간에만 제한해야 하나요? 푸코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게 몸을 사적인 공간에 밀어 넣은 것은 근대 기독교의 권력 행사였다고 하잖아요.

하긴 여성의 몸을 사적인 공간을 벗어나 공적인 공간에 등장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하죠. 이런 영역이 워낙 다양하니까 일일이 검토하기에는 시간이 없겠죠. 대표적으로 두 경우를 들어보도록 하죠. 몸이 특히 여성의 몸이 가장 많이 쓰인 것이 아마 상업적인 광고의 매체가 아닐까요? 그에 못지않게 예술의 매체가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예술의 매체일 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상업적인 광고의 경우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요.

왜 예술은 되는데, 광고는 안 되었던가요?

비키니 씨, 그것은 예술이 아마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더구나 예술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벗은 몸을 매체로 썼으니, 그렇지 않을까요? 이 경우는 모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본래적인 가치를 고양시키는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여성의 몸을 광고로 이용했을 경우는 비난을 항상 받아왔지요. 예를 들어 자동차를 여성의 몸에 비유하면, 여성의 몸이 뭔가 쇠 덩어리가 되는 것 같아, 평가절하를 받는 것 같지 않나요?

글쎄요. 자거라 씨. 잘 모르겠어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딸은 자기의 누드를 매체로 해서 환경파괴와 인간의 욕심을 비판하는데 그것도 보면 그건 광고인가요 아니면 예술인가요?

비키니 씨, 그 분이 그 때문에 돈 받은 적은 없다니, 예술에 속하겠지요?

그러면 저도 돈 한 푼 누구한테 받은 일이 없으니, 광고를 한 것은 아니지 않아요. 더구나 저는 몸을 통해 정치적 주장을 펼쳤고, 더구나 저의 정치적인 주장이 독재나 착취를 촉구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반대로 민주화나 사회평등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 했으니, 더 높은 가치에 기여하는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럼요. 비키니 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잘했어요. 당신은 공지영 씨에 못지않는 예술가입니다.

물론 저야, 공지영 씨처럼 탁월한 예술적 표현을 하기에는 부족하죠. 하지만 표현이야 부족했더라도 그 표현하려는 내용이야, 가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서투른 예술가도 많지 않아요. 요새 지하철 다니다 보면 저보다 못한 시를 쓰는 시인도 많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공지영 씨한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니 저는 모르겠어요. 제 몸이 그렇게 보기 싫었던 건가요? 아니면 제가 표현하려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가요?

아니 표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저는 감탄했어요. 그냥 말로 ‘가슴이 터지도록’ 이라고 하면 자주 쓰는 진부한 표현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가슴을 눈으로 보여주니, 이 표현 자체가 생생한 아름다움을 얻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철학에서 개념(Concept)은 원래 임신(Conceive)이라는 의미인데, 제가 언젠가 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자, 철학의 ‘개념’의 의미가 정말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그때처럼 저는 표현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자거라 씨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가치라니, 좀 억압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우선 가치 평가만을 가지고 본다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사람이야 높은 가치를 받겠지만 저같이 생물학적인 완성도에서 그렇게 높지는 않는 경우는 별 가치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 가치 없는 몸은 아무렇게나 이용되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비키니 씨, 당신이야 딴지 총수조차 완성도에 감탄한다 했으니, 뭐 걱정이요. 하지만 사실 듣고 보니 가치 비교만으로는 안 될 것 같네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어떤 완성도와 상관없이 항상 가치로 평가되기 이전의 신성성을 가진다고 보아도 되니까요? 몸이 이용되려면 적어도 그런 신성성에 걸 맞는 영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거라 씨, 몸이 신성하다 하니까 정말 더 거부감이 드네요. 솔직히 이런 신성한 몸이라면 사랑을 위해서도 사용한다는 것조차 죄스럽게 여겨지고요. 그런 생각은 결국 너무 억압적인 것이 아닌가요? 무슨 이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도 아니고, 또 솔직한 것 같지도 않고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이용해서 먹고 사는데 그들은 그러면 이 신성한 몸을 더럽히는 건가요?

아, 할 말이 없군요. 비키니 씨

자거라 씨, 만일 몸이 신성한 것이라면 어떤 다른 더 고위한 가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몸에 스스로의 권리가 있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보면 몸은 쾌감을 원하는 것 같아요. 자기에게나 남에게 서로 쾌감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누가 강제를 이용해서 예를 들어 물리적인, 심리적인, 심지어 화폐적인 강제를 이용해서 쾌감을 강요한다면 그건 안 되겠죠. 그것은 일방만의 쾌감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유로운 자신의 결정이라고 한다면 이런 몸을 통한 쾌감은 어떤 방식으로 야기되든 그게 정치적인 매체든 예술적인 매체이든 문제없는 것 아닐까요? 상업적인 광고의 경우는 좀 문제가 있겠네요. 돈의 노예라서 억지로 불쾌하지만 몸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돈 받더라도 즐겁게 한다면 문제없지 않을까요?

공지영 씨도 비키니 씨야 잘못이 없다 했던 것 같아요. 아니 불쾌하지만 비난할 거리는 아니다 보고, 다만 비키니 씨와 같은 누드(아니 비키니) 퍼포먼스를 장려한다는 점에서 나꼼수 씨를 비난한 거겠죠.

정말, 그래서 제가 자거라 씨를 찾아가려 했던 거죠. 나꼼수 씨가 저의 벗은 몸을 보고 마초적으로 즐겼다는 것이 공지영 씨의 판단인데, 저는 그건 타인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한 것으로 봅니다. 물론 나꼼수 씨가 ‘대박’이라든가, ‘생물학적 완성도’라든가 ‘코피’라든가 말을 썼더라도 그것은 저의 벗은 몸을 보고 그저 욕망에 불타올랐다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저는 선의로 생각합니다.

선의라니?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표현방식의 생생함이라는 거죠. 저는 ‘가슴이 터지도록’이라는 표현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단을 찾았던 것이었어요. 아마도 나꼼수 씨가 말한 ‘생물학적인 완성도’란 ‘표현의 완성도라는 말을 찾지 못해서 나온 잘못된 언어 선택이라 봐요. 정말 나꼼수 씨가 내 몸을 생물학적으로 감상하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거든요. 더구나 제 몸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결코 완성도가 높지 않고요.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그런 의미겠죠.

그래도 비키니 씨, ‘코피’라는 표현은 사실 이미 그런 마초적인 감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 씨, 손가락으로 달을 지시하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바라보니, 잘못이라고 하기는 하겠죠.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에는 늘 이중성이 있지 않나요. 예술에서도 누드 퍼포먼스란 그런 이중성을 노리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손가락만 바라 본 사람이 제 뜻을 이해못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겠죠. 물론 그것이 그의 인간성이 아직 부족하다는 정도는 드러내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비키니 씨, 몸이 쾌감을 위한 것으로 충분하다면, 쾌감을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일까요? 그럼 돈 받고 즐겁게 몸을 파는 것도 마찬가지인가요?

자거라 씨, 너무 극단화시키는 것 같아요. 매춘 속에서 쾌감을 느꼈다는 여성은 실제로 거의 없지 않아요. 사실 쾌감이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결합으로 만들어지지, 그저 순수한 육체적인 접촉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 정신적인 것을 너무 무겁게 잡으면 육체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만일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 몸이 매체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엄격한 도덕적인 입장이겠는데, 이 세상에 정말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는 사랑을 상당히 가볍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저 호감이 가고, 매력을 느낀다는 정도로. 물론 이런 가벼움이야 시대나 사회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지겠죠. 저는 우리나라에서 사랑은 너무 무거워서, 저 같은 사람은 감당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사실 저는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사랑을 너무 무겁게 보니, 좀 지겨워요. 그러고 그런 사랑이란 것도 실제는 없고요.

가벼운 사랑이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비키니 씨,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노출도 있다 하지 않아요? 왜 ‘바바리 맨’에 관한 얘기 들어보았잖아요? 솔직히 저는 부산에서 오래 살았는데 여름에 해운대 나가는 게 제일 싫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몸매란 찾아보기 힘들고 거의 대부분 불쾌감을 주더군요. 살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오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의 지론은 해수욕장에서는 비키니를 금지하자는 거예요. 모두 옷 입고 바다에 들어가라 이런 말이죠. 불쾌한 몸은 샤워할 때 혼자만 보면 된다는 거죠.

자거라 씨, 논점 이탈이 아니에요. 뭐 철학자가 그래요.

비키니 씨, 논점 이탈이라니요?

지금 문제는 여성의 몸을 (뭐 남성의 몸이라 해도 좋겠지요) 사랑이라는 관계 외에, 특히 정치적인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이잖아요.

그거야 이제 정리된 것 아닌가요? 상업적인 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위해서 몸을 매체로 이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사회적인 가치를 위한 투쟁도 마땅하지 않을까요? 물론 예술의 경우는 직접적인 몸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기호화된 몸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퍼포먼스 같은 경우는 인간의 몸을 직접 사용하기도 하니까, 뭐가 다르겠어요.

맞아요. 그런데 자거라 씨는 아름다운 몸매 타령만 하니, 그게 논점 이탈이 아니에요?

아니, 비키니 씨가 몸이란 쾌감의 수단이라 하니까. 꼭 쾌감만 주는 것은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거죠.

육체란 쾌감을 주는 건데, 어떻거나 쾌감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육체는 그 자체로서 존중받더라도,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아요. 정말 답답해, 정말 가슴을 풀어 헤쳐야 하겠네요. ‘가슴이, 아니 복장이 터지겠다, 철학자여’ 이거 내일 나꼼수에 오를 거예요. 내 복장 누드 사진하고 같이 오를 겁니다.

아니 참아요. 비키니 씨. 제가 먼저 벗고 싶지만,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체형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