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를 수 없었던 내 아들의 이름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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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어머니가 되다

가을이 지나갈 때쯤 할머니는 퇴원했다. 기력은 눈에 띠게 약해졌고, 갈비뼈의 통증이 남아 있어 숨을 얕게 쉬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병원에 있는 동안 울산에 살고 있는 큰딸은 애만 태울 뿐 오지 못했다. 김해 근교에 있는 작은 딸과 사위는 수시로 할머니를 찾아 돌봐 주었다. 할머니는 아들 한 명과 딸 둘을 두었다. 그 중 작은 딸은 큰딸을 큰댁으로 떠나보내고 허허로움에 젖어 있을 때 지금 살고 있는 마을로 온 작은 여자 아이를 입양한 인연이다.

19살의 할머니는 아들을 낳았다.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 젖배도 많이 곯았지만, 아이는 잘 자랐다. 아들이 6개월에 접어들 무렵부터 젊은 어머니는 입양을 결심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 젊고 병든 어머니의 몸은 변화가 빨라지고 있었고, 두 모자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은 쉬이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가서 동냥하듯이 얻어 오는 식량으로는 아이의 밥물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젖은 점점 말라가고 아이는 언제나 춥고 배가 고파 찡얼거렸다. 절대로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모르는 사람도 어쩌다 마주치면 다시 돌아볼 정도로 병은 몸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 집은 경주에 있었다. 보기에도 잘 사는 것 같더라. 아들인가 아인가 먼저 보더니, 아 들이라고 그리 좋아하대. 아이 옷부터 먼저 갈아입히고 안고 좋아하더라. 나는 그냥, 그냥 보고만 있다가 돌아왔다. 그 집에서 사람이 뒤따라와서 돈을 쬐끔 주더라. 안 받았다. 받 으모 안 되제. 와 그리 눈물이 나더노. 길이 안 보이더라.”

젖을 채 떼지 못한 아이를 울산에 있는 먼 친척의 소개로 모르는 집에 주고 올 때 귓가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아이가 엄마를 찾아 우는 소리로 들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살아 있는 게 사는 게 아이다. 그냥 지옥인기라. 우리 어무이도 나보고 안 묵는다고 뭐 라 하면서도 아무 것도 못 묵는 기라.”

일주일 만에 아이를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젖 대신 쌀을 갈아 밥물을 만들어 먹였다. 아이는 그 동안 몰라보게 살이 올라 있었고, 입고 있는 옷도 깔끔하고 좋아보였지만, 그 아이를 떼어 놓고 살 수는 없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아이를 찾아 온 젊은 어미의 몰골을 본 사람들은 말없이 아이를 등에 업혀 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의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간혹 들러 안부를 묻던 사람들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다시 입양을 권했다. 마쓰시타는 아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일본으로 떠났다. 문 앞까지 왔다 갔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아비도 없이 병든 어미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는 말만 들려왔다. 연락처도 없이 떠나 간 마쓰시타에 대한 원망의 소리도 들려왔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경주에서 데리고 올 때 통통했던 볼 살은 다 빠져 성장이 멈추는 듯이 보였다.

 

아이를 떠나보내다

봄이 왔지만,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불안감이 매일 밀려왔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이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는 기어 다니며 무엇이든지 빨고 움켜쥐었다. 그러다 상처라도 나면, 어미를 보고 좋다고 기어오는 아이에게 어미의 병이 옮는다면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지만,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뿐이었다.

“일본으로 보내기로 했제.”

“왜 하필 일본이었어요? 경주에 있던 그 집으로 다시 보내면 어쩌다 볼 수도 있는데, 그 렇게 멀리 보내셨어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손을 빼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손은 부드러웠지만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을 깨트린 건 할머니였다.

“아들이 있는 건 알고 갔제. 같은 하늘 아래 있으모 언젠가는 안 만나겄나. 혹시라도 지 나가다 마주치면 닮았다 싶어 서로 쳐다는 보겄지. 평생에 한 번은 보겄지.”

“우리 어무이가 가까이 보내면 또 가서 찾아온다고….. 나도 못 살고 아도 못 산다고 며칠 을 나를 달랬제.”

아이를 일본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다. 여러 손을 거쳐 일본에 살고 있는 김해 사람을 소개받았다. 아이가 없던 그들은 소식을 듣자 인편으로 약간의 돈과 타고 갈 수 있는 배편을 알려왔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잠든 아이를 안고 밤을 꼬박 새웠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안겨 잠든 아이를 밤새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그런 할머니를 어머니는 옆에서 밤새 지키고 있었다.

“아이 이름을 기억하세요?”

“하모. 승팔이, 승팔이다. 일본에 이긴 팔월에 태어났다꼬 승팔이라고 지었다.”

할머니는 6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던 아들의 이름을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의 아들은 1945년 8월에 태어났다. 어머니 품에서 8개월 동안 자라다가 다른 사람의 품에서 자라 이제는 회갑을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마쓰시타, 어머니는 요시코이다. 할머니는 60여 년 전 자신이 아이를 업고 찾아갔던 일본의 지역명과 그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 대판에 있는 김해 사람 집에 데려다 줬다. 아 이름을 지어놨더라. 야스다 가스하찌. 그기 승팔이 이름이다. 경주보다는 잘 사는 것 같지 않더라. 아가 귀한 집이라 좋아하대. 한참 동안 사진하고 편지가 왔다. 아는 잘 크는 것 같더라. 말해 주겠다고 했다. 아가 크 모 에미 이름은 말해 주겠다고 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듯이 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울었다. 온몸으로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들려왔다. 골목 끝에서 넋을 놓고 있는 할머니를 선원이 와서 데리고 갔다. 그 선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고 왔던 배로 할머니를 데리고 가 밥을 주었지만,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바다에 나를 버리다

뱃머리에 꼼짝 하지도 않고 앉아서 바닷물만 바라보았다. 물보라를 일으키는 바다는 할머니를 유혹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배의 난간 위로 몸을 올렸다. 바닷물이 할머니의 얼굴과 맞닿았다고 느낀 순간 할머니의 몸은 사정없이 들어올려졌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마디 굵은 손이 할머니의 허리춤을 잡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죽는 거는 순간이요. 살아야 아이 얼굴도 볼 수 있는 기요.”

살아 있어야 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그 말이 할머니의 가슴을 후벼 파며 깊이 들어앉았다.

 

아가야 보고 싶구나

 

핏덩이 너를 등에 업고

현해탄을 건너 이국만리에 가서

너를 버리고 뒤돌아 설 때

돌아보고 또 돌아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눈물자죽만 남았단다.

 

연락선을 붙잡고 한 없이

울었단다

연락선은 가자고 고동을 불고

성난 파도 이리저리 흔드니

파도소리에 몸을 띄우려고

몇 번이나 맹세하였건만

끝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네.

 

오늘날까지 이것이

내 가슴에 응어리 맺혀

쇠못이 박힌 아픔을 느끼네.

– <아가야> 부분 –

 

“그때 죽지 못한 기 한이다.”

할머니는 60여 년의 시간을 그리움과 고통 속에서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살다 보면 잊혀질 것이라 여겼다. 잊기 위해 안간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돌아와 보내는 나날은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몸은 살아 움직이나 마음은 죽어 있었다. 생각나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었다. 아이가 누워 자던 자리, 꼼지락거리던 작은 손, 품에 안겨 웃던 모습들만 보였다. 그리고 울음소리만 끝없이 들렸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봐라, 김선생. 니는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했제? 내 이야기를 소설로 써 주라. 내가 살아 생전에 우리 승팔이를 우찌 만나겄노. 나 죽고 난 뒤에 승팔이가 혹시라도 나를 찾으면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이라도 내 아들을 만나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마이 생각해 봤는지 모른다. 키는 얼매나 될꼬, 목소리는 어떨꼬, 뭐를 좋아할꼬 온갖 생각 다 해봤다. 휴유, 내가 아는 기 하나도 없더라. 그래도 내가 지를 얼매나 사랑했는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는지 말해주고 싶다. 나를 마이 원망하겄제. 그 사람들이 지 어미에 대해 말을 해 주겄나? 말해준다고 했는데 말해줬을까? 우짜모 나를 모를지도 모르지. 그기 낫겄제? 그 사람들을 지 친부모로 알고 사는 게 낫겄제? 그래도 모른다. 혹시 아나? 갸가 나를 찾아 올지. 마쓰시타는 만났을까? 아이고, 우찌 만났겄노? 만나도 우찌 알겄노? 아이다. 내가 말해줬다. 혹시나 만날까 봐서 내 이름도 말해주고 내 살던 데도 말해줬다. 그라고 마쓰시타 이름도 말해줬다. 알았으모 지 아버지를 안 찾았겄나? 내가 지금 만나모 뭐하노 싶다가도 그래도 보고 싶다. 지는 나를 안 봐도 나는 꼭 한 번은 보고 싶다. 김선생, 니가 소설을 써서 잘 팔리면 그 사람도 안 보겄나? 요새는 그 뭐라카노, 일본 소설도 마이 나온다 카대. 우리나라 소설도 일본으로 안 가겄나. 그라고 살아 있으모 마쓰시타도 지 아들이 일본에 있는 거를 안 알겄나.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기다. 내가 살아서는 말 못하겄다. 먼저 간 영감, 그 사람이 알면 섭섭해할까봐,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처음부터 말을 안 하다 보께 그만 아무 말도 못했다. 그라고 영감을 보냈다. 나도 미안한 거는 안다. 우리 딸? 섭섭하겄제. 그래도 우짜겄노. 그래도 손가락질은 안 할 끼다. 지도 자식 낳고 사는데 우찌 그리 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나를 욕하겄노. 나는 우리 승팔이한테 꼭 말하고 싶은 기 있다. 나는 니를 안 버렸다. 니를 살리라꼬 그랬다. 이말 꼭 하고 싶다. 내가 병만 안 들어도 몇 번은 찾아갔을 끼다. 우리 승팔이도 찾아오고 마쓰시타도 찾아 갔을 끼다. 내가 병만 안 들었어도…”

승팔이는 60여 년을 할머니의 마음속에서만 살다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승팔이는 할머니에게 여전히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울던 아기로만 남아 있다.

언젠가

승팔이도 이 일기장을

볼 때가 있겠지

이 모든 것이 허공에

꿈이 되었으면 싶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이것이 나와 승팔이의

맺힌 열매이다.

 

승팔아

이 어리석은 에미

바보 같은 에미

병든 나를 용서해 다오.

– <아가야> 부분 –

 

할머니는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이야기를 끝내고 팔을 휘이 저었다. 한참 후에 말을 이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약속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할머니는 아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비록 아들은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할지라도, 아니면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모를지라도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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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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