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공자의 제자 중궁을 ‘따’ 시키다! [맹자와의 대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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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 김시천 대담

오늘날의 <맹자> 읽기

김시천: 그럼 이야기를 바꾸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자>나 <장자>, <한비자>나 <묵자>와 같은 고전들과 비교할 때 <맹자>는 다소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백가의 경우 설명이나 해설을 곁들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읽기가 어려운데, <맹자>는 번역만 잘 되어 있으면 잘 읽혀지거든요. 그래서 <맹자>는 연구서보다 원저가 더 많이 읽혀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가장 잘 읽혀지는 책이면서, 실제로 <맹자>가 많이 팔리는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전호근: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맹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안병주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맹자> ‘공손추’편에 보면 “일은 옛 사람의 절반만 하고, 효과는 반드시 옛사람보다 두 배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일컬어 한 말이었습니다. 옛날의 성인들만큼 열심히 하지 않고 적당히만 해도 지금의 두 배로 평가받는 시대라는 뜻이었죠. 그러므로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안병주 선생님은 그것을 <맹자>같은 고전을 읽는 것에 비교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웬만큼 맹자를 읽고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데, 요즘 같으면 맹자를 읽는 사람이 없어서 그 절반만 읽어도 두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요즘도 <맹자>를 읽다보면 안병주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김시천: 구태여 연구서를 보지 않아도 잘 읽힌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맹자>에 대한 연구가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해설이 필요하지 않으니 연구서를 들추어 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서구 학계에서 최근 <맹자> 연구가 활발한 것에 비하면, 이는 맞는 얘기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최근 <맹자>와 관련된 연구 성과 가운데 가장 눈여겨 볼만한 성취가 있다면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전호근: 요즘 맹자의 ‘혁명론’을 떠올릴 때에는 성대출판부에서 나온 <유교의 민본사상>이란 책을 꼽고 싶습니다. 일본과 중국의 맹자 혁명론과 관련된 ‘민본사상’(民本思想)이 충분히 다루어졌고, 그만큼 영향도 끼쳤다고 보기 때문에 꼽고 싶습니다. 또 몇 년전에 김시천 선생이 서평을 썼던 이혜경 선생님의 <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도 꼽고 싶어요. 물론 이혜경 선생님의 책은 저와 <맹자>를 보는 관점은 달라요. 보시다시피 저의 입장에서 <맹자>는 보수주의자로 보이지 않거든요. 비록 견해나 관점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 책이 갖는 가치는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김시천: 그럼 번역서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가장 추천하고 싶은 번역서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전호근: 번역서로는 이을호 선생님의 <한글 맹자>, 박경환 선생님의 <맹자>, 성백효 선생님의 <맹자>를 꼽을 수 있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을호 선생님의 책은 이미 1970년대에 출간된 것이어서 최근에 나온 책들과 똑같은 점수를 주어서는 안 되겠죠. 다산연구자로서의 이을호 선생님의 다산의 <맹자요의>에 관한 견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의미가 있었죠. 성백효 선생님의 책은 전통 한학자로서 한 글자, 한 글자 축자번역을 한 것으로는 오역이 가장 적습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신뢰도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박경환 선생님은 연구자로서의 깊이가 있는 맹자 번역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성악설, <맹자>를 비판하다

김시천: 이제 본격적으로 <맹자>의 사상적인 부분을 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대비하여 맹자의 ‘성선설’을 말합니다. 분명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맹자의 ‘성선설’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논의합니다. 하지만 맹자와 순자가 토론을 벌인 적은 없었지요. 물론 이것은 철학사를 서술하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경우에는 두 사상가가 마치 토론을 한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오히려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맹자> 텍스트를 읽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맹자>는 자기와 동시대이거나 그 앞 세대의 사상과 대결하며 자신의 사상을 펼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자를 서술하면서 맹자와의 차별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맹자를 이야기하면서 순자와 비교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성을 고려하면서 순수하게 <맹자> 주석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호근: <맹자>는 한(漢) 나라 때까지는 유가로서 제자(諸子)에 속합니다. 그러다가 조기가 주석서를 내면서 재평가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순자와의 비교도 중요합니다. 순자가 <비십이자>(非十二子) 편을 통해 공자를 제외한 모든 학자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맹자가 순자와 토론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맹자의 견해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순자의 비판을 염두에 두고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순자의 비판이 맹자 이후의 학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김시천: 그렇군요. 그 지점은 분명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전호근: 중요한 것은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했다는 점입니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했다는 것이 철학사 속에서 확인된 것이 순자의 비판에 의해서였습니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그 이상의 전거가 나와야 뒤집을 수 있는 것이죠. 비록 맹자의 ‘성선설’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100% 입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맹자>에도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죠.

 

김시천: 물론입니다. <맹자>의 언어는 분명 일면 신비주의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그가 말하는 ‘호연지지’(浩然之氣)에 대한 장황한 수사는 신비한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역사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장엄한 이야기를 보면, 그런 것을 꼭 신비주의적이라 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범인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분명, 일종의 ‘호연지기’와 같은 하늘과 땅을 꽤 채울만한 기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전호근: 오늘날 우리가 <논어>, <맹자>, <대학>과 더불어 가장 중시하는 <중용>(中庸)은 대체로 자사(子思)의 저작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자사라는 인물은 <맹자>와 더불어 ‘사맹학파’(思孟學派)라고 합니다. 그런데 순자는 이 둘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1993년 중국의 곽점(郭店) 지역에서 발굴된 초간(楚簡) 즉 대나무 쪽으로 만들어진 문서 가운데 ‘성자명출’(性自命出)과 같은 문헌에도 부분적으로 상당히 일치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없는 얘기를 짜 맞춘 듯한 흔적이 있다고 의심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저는 발굴된 문헌과 순자가 이야기 한 것, 자사와 맹자가 주장한 것들이 상당히 아귀가 맞는다고 봅니다. 자사와 맹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또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고증을 통하면 맹자가 자사에게 직접 배웠다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자사가 죽은 지 60년 후에 맹자가 등장하므로 자사와 맹자가 같은 시대에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사와 맹자의 관련설, <중용>에 나오는 내용이 <맹자>에 그대로 인용된다는 점 등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김시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전호근: <중용>에는 “진실성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가 <맹자>에서는 “진실성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誠者人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지’(誠之)가 ‘사성’(思誠)으로 바뀌어 있지만, 글자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맹학파라는 것은 실제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순자의 맹자 비판이 맹자를 계승한 후학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김시천: 어쩌면 그 지점에 주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함축을 갖는다고 봅니다. 당시의 법가 사상가 가운데 이름을 떨쳤던 한비자(韓非子) 그리고 진(秦)의 재상이 되어 천하를 통일하는데 일조했던 이사(李斯)가 순자의 문하에서 나올 수 있었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엄밀히 보면 한비자와 이사 같은 이들은 순자의 유학(儒學)은 계승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정치의 수단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분명 순자를 잇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유가의 도통론(道統論)과 <맹자>

김시천: 그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분기점은 언제라고 할 수 있나요?

 

전호근: 그 다음으로 당(唐) 나라의 한유(韓愈)가 ‘도통론’을 이야기 합니다. ‘도의 근원을 밝히다’라는 뜻의 유명한 글 <원도>(原道)에 따르면, 맹자는 도통의 핵심 인물입니다.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까지 주욱 ‘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가 맹자가 죽음으로써 도통이 끊어졌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한유는 자신이 그것을 이어받겠다고 얘기합니다. 또한 <사서>(四書)라고 해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들어 맹자 부활의 신호탄을 쏜 것이 바로 한유였습니다. 이러한 한유의 사상을 송대(宋代) 유학자들이 이어갑니다. 순자, 조기, 한유에 이어 범중엄(范仲淹), 사마광(司馬光), 왕안석(王安石)이 등장하죠.

그런데 사마광과 왕안석이 활약했던 북송 시대에도 맹자의 지위가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이천도 맹자를 그냥 성인이라고 하지 않고 ‘아성지아’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성인이고, 아성은 안연이고, 아성지아는 맹자, 즉 대현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맹자의 지위가 확실하지 않았는데 남송 시대에 이르러 주희가 등장하면서 맹자의 지위가 확고부동해 진 것입니다.

 
주희(朱熹)김시천: 동아시아의 유학 전통은 흔히 ‘공맹’(孔孟)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공순’(孔荀)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즉 공자와 맹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공자와 순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의 철학사 서술에서는 맹자와 순자가 비슷한 것처럼 말하지만,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이런 비교는 안 되는 것이었죠. 한나라 후한 때까지는 순자는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다가 삼국시대 이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거의 현실이었습니다. 게다가 문헌으로 보아도 <맹자>는 ‘경’(經)의 지위에까지 올라갔지만, 순자는 여전히 ‘제자’(諸子)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맹자와 순자를 평가하는 후대의 인식의 차이가 어떠한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맹’이 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유지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상적 함축은 무엇인가요?

 

전호근: 그야말로 <맹자>가 만든 구상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는 자기 자랑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은 거의 성인이라고 하자 맹자는 성인은 공자도 감당 못했는데, 내가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답합니다. 그러자 공손추가 그렇다면 공자의 제자 중에 누가 성인에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맹자는 끝까지 대답을 안 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며 대답을 회피하죠. 그리고 맹자는 내 소원은 공자를 바라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공맹’이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공맹’이란 표현이 같은 논조로 거론된 것은 <장자>였습니다. <장자> ‘천하’편은 장자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순자>의 ‘비십이자’ 편만큼이나 천하의 사상가들의 장단을 말한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추로지사’(鄒魯之士)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추나라와 노나라는 바로 맹자와 공자의 고향입니다. 즉 말 그대로 ‘공맹’을 뜻하는 것이죠. 이런 표현도 ‘공맹’이라는 말이 나온 하나의 근거가 됩니다.
한유(韓愈)한유에 이르면 ‘철환천하’(轍環天下) 즉 수레를 타고 천하를 주유한다는 말을 써서 공자를 일컬었는데, 이것도 원래는 맹자를 가리킨 말입니다. 맹자가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녔는데 그로 인해 공자의 덕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천하에 공자를 드러내 밝히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 방식으로 보면 맹자는 스스로 공자와 자신을 잇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논어>에는 공자 문하의 가장 뛰어난 현인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최고라 할 덕행(德行)을 이룬 인물로 <논어>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을 거명합니다. 그런데 <맹자>에서는 이 네 명의 제자 가운데 ‘중궁’을 뺐습니다. 중궁은 바로 ‘순자’의 스승이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은 순자에게, 세 명은 맹자에게 온 셈이죠.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맹자의 정통성은 순자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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