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이름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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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유년의 이름, 그 따뜻함

내가 배우처럼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고 즐길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때 이름은 묘한 힘을 지닌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름에 쓰이는 문자의 뜻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도 하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에 의해 이름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믿음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다. 더러는 이름을 바꾸면 미래가 변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리야”라고 불렀다. 정말 나는 내 이름이 ‘리야’라고 믿었으므로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선생님께서 “김성리”를 부를 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꿋꿋하게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출석부가 접히고 ‘탁’ 소리를 내며 교탁 위에 내려지는 순간, 놀랍게도 한 남자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리야 이름 안 불렀는데예”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특이한 병 치례와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나는 꽤 알려진 아이였기 때문에 처음 만난 선생님과 많은 아이들은 남자 아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의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나는 당황했고, 내가 호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마른 몸집을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천천히 나에게로 와서 “네 이름은 김성리다. 잘 기억해라”하시며 머리를 만져 주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아이들은 비실비실 웃었고, 용감했던 그 남자 아이는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었고, 대문 앞에서 할머니가 “리야”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거제도 내의 다른 지역에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오셨다. 나는 심각하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지만, 모든 가족들은 큰 소리로 웃기만 하고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은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 같은 착각에 내 머릿속은 더 어지러웠다.

어둑해지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뒷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슬프고 외롭고 뭔가 분하고 억울했다. 아버지가 내 앞에 앉아 막대기를 집어 흙 위에 글자 세 개를 적어서 내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었다. “김, 성, 리, 네 이름이다. 리야는 우리가 너를 이뻐해서 부르는 이름이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리야”라는 이름은 나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이 되었다. 나를 “리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나의 성격이 어떠했으며 어떤 병을 앓았는지 안다. 심지어 내가 한글을 언제 읽고 쓰게 되었는지까지 안다. ‘리야’라는 이름 속에는 내 유년의 시간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놓아버릴 수 없는 유년의 기억

‘이숙자’라는 이름에는 할머니의 유년이 들어 있다. 할머니에게는 언니가 두 명,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할머니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향에 남겨졌던 여동생을 수소문하여 연락이 닿았음을 볼 때, 할머니는 부모형제의 사랑을 받은 막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빠와 언니들은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에서의 터전을 미처 정리하지 못해 귀국을 미루는 사이 국교는 단절되어 어린 동생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현실적으로 형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잊다시피 살았지만, 오빠와 언니들은 막내를 포기하지 않고 할머니를 찾았다.

“오빠는 안 만날라쿠데. 언니가….둘이 나한테 편지가 왔데….”

“오빠가 실망이 컸다 아이가. 언니도 실망하고….”

“실망 안 하겄나. 실망했제. 마이 실망했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오빠는 병든 여동생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때로는 끼니 잇기가 힘에 겨운 생활이었기에 오빠가 정기적으로 보내 주는 돈은 유용했다. 언니들은 간헐적인 도움을 주는 대신 잦은 전화로 동생의 안부를 챙겼다. 오빠는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여동생을 내버려둔 세월과 고향 사람들과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다.

“몇 해 전에 올케라는 사람이 왔다갔다. 오빠가 죽었다카더라. 일본 여자데. 오빠가 너무 마음 아파했다고….보고 싶어 했다고….”

“그래서 자기가 왔다고 하더라. 올케가 오빠 대신 나 보고 가서 말해 주겠다고. 흐응…. 내가 어찌 살고 있는지, 내가 어떤 모습인지 말해 주몬 죽은 오빠가 아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마치 고요한 마당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주위의 사람이 죽어서 가마니에 둘둘 싸여 갈 때도 할머니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은 다르게 다가왔다. 자기의 유년의 한 켠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쁘고 어리게만 여겼던 막내 여동생의 고단한 삶은 뒤늦게 오빠의 한이 되었고, 그런 오빠에게서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느꼈다. 끝까지 여동생을 만나지 않은 것은 오빠의 가슴 아픈 배려가 아니었을까. 매달 오던 돈은 오빠 사후에도 한 동안 보내져 왔다. 올케의 말에 의하면 오빠의 부탁이 있었다고 한다.

“인자 돈이 안 온다. 올케도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있는지. 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돈 보낸다고 하데. 오빠가 죽기 전에 신신당부하고 부탁했다 카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어 현재까지 지속된다.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유년기의 행?불행을 떠나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내가 ‘리야’라는 이름만으로도 외롭지 않듯이 ‘숙자’라는 이름에는 이제는 할머니만이 알 수 있는 관심의 시간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내려놓을 수 없기에 고통이 되어버린 과거의 이름

숙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집에서 놀았다. 조신하게 살림살이를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나누는 생활에 싫증이 나면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마침 집안에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여고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은 더 간절했다. 일찍 객지에 나가 자기 앞가림을 하는 오빠와 언니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집안이 좀 괜찮았다. 그래도 울산에는 학교가 없는 기라.”

집안 살림살이가 괜찮은 덕에 숙자의 여고 진학은 쉽게 결정이 났고, 숙자는 시험을 쳐서 부산공여에 진학했다. 부산에 하숙집을 정해 놓고 토요일이 되면 울산 집에서 지내다 일요일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었지만, 숙자의 자긍심은 나날이 높아갔다. 일제 강점기에 여고를 다니는 여성이 많지 않았기에 교복을 입고 기차를 타면 한복을 입은 또래 여성들의 부러운 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숙자는 할머니의 기억 속에 교복 입은 여고생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40년대의 여고생, 단발머리를 하고 책가방을 든 얌전한 여고생의 이미지는 어쩌면 할머니의 영혼에 남아있는 또 다른 상처일지 모른다. 할머니는 ‘단발머리’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그때는 전부 단발이라. 단발머리하고 있으모 공여생인기라.”

“하모. 단발머리하고 교복입고 기차 타 봐라.”

한 때는 단발머리가 억압과 획일화된 교육의 실체로 지목되어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도 할머니 기억 속의 단발머리는 꿈 많던 공여생인 숙자와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숙자는 이제는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기억 너머의 지층 깊숙한 곳에 홀로 남겨져 있다.

숙자로부터 60년도 더 되는 시간이 흘러갔고 많은 사건들이 지나갔다. 한 여인의 곁으로 셀 수 없는 바람과 흙이 마치 먼지처럼 날아갔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또 피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도 태어나고 죽기를 수없이 반복했던가. 그러한 시간 동안 숙자는 할머니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할머니가 숙자를 기억 속에 묻어 놓고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은 유년의 기억이 현재는 고통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숙자가 꾸었던 그 많던 꿈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소멸되었고, 숙자는 바로 할머니의 유년기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숙자는 할머니의 타자였던 것이다.

 

저 푸른 하늘 밑에는

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집옆에서는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활짝 핀 살구꽃이 피었겠지

마당 뒤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꽃이 떨어지면

바가지로 주워담아

실로 꿰어서 목에 걸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구나

– <고향> 부분 –

숙자가 살던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었다. 숙자는 하얀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었다. 어린 적 우리 집 뒷마당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크지 않아 감꽃이 많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이웃집 마당에 떨어져 있는 하얀 감꽃을 주워 목걸이로 만들었다. 감꽃은 금방 시들었지만, 그 향기는 오랫동안 코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병든 몸으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고향>)”고 있다. 병은 숙자와 할머니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고, 숙자는 기억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

 

과거를 말해주는 흔적, ‘숙자’.

숙자라는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할머니는 숙자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대신 풀어 나갔다.

 

삽짝거리로 나와서

돌다리를 건너

사랑하는 모교에 가고 싶구나

칠계단을 올라가면

우편에는 벚꽃나무와

좌편에도 벚꽃나무가

엉겨 붙어서 봄이 되면

벚꽃이 장관이더라.

(……)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언제나 가보리

언제나 보고 싶어

먼 산만 바라보네.

– <고향> 부분 –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숙자는 결코 지워진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리웠고 언제나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가 숙자’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먼 산만 바라보’듯이 그렇게 숙자를 가슴 깊이 묻었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그 과거의 과거가 함께 있지만, 누군가는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 깊숙이 묻어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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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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