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의 닫힌 문을 열다[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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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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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집

집시들의 춤은 한 줄기 바람처럼 가볍고 노래는 오월의 햇살처럼 경쾌하다. 그들의 삶은 자유롭다.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마을에 들어서면서 먼저 마주친 것은 숨듯이 창 너머로 나를 훔쳐보는 눈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몸을 숙이는 여인의 모습에서 집시가 떠 오른 것은 어떤 연유일까.

차에서 내려 기억을 더듬어 마을 입구일 것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마을은 보이지 않고 교회 십자가만 나무 가지 끝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기똥풀 꽃이 가득한 길가를 돌아서 걸어 들어가자 비로소 교회가 모습을 드러내고, 내리막길을 따라 집들이 보였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의 끝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다시 비스듬히 들어가면 유난히 키가 큰 노란 누드베키아 꽃들이 대문을 대신하여 서 있다. 담도 없고, 시골집에는 으레 있는 개 한 마리도 없는 작은 마당에 적막만이 감돈다. 문을 두드리자 두꺼운 안경 너머로 반가움이 먼저 나온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내 발걸음 수만큼 할머니는 뒤로 물러난다. 내가 가까이 다가앉자 역시 내가 다가간 만큼 뒤로 물러나 앉는다.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오늘은 별로 안 덥다.”라는 말로 물을 대신한다.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가 방 가운데에 놓여 있고, 화장대 위에는 몇 개의 약병과 함께 화장품들이 놓여 있다.

“어머니, 제 이름은 김성리예요. 부모님께서 여자는 영리해야 한다고 바탕 성에 영리할 리를 이름으로 주셨죠. 모두들 리야라고 불러요.” “거 좋은 이름이네. 뭐하는 사람이라고 했노?” “시를 공부합니다.” “시 공부하는 사람이 나는 뭐할라꼬 찾노.” 순간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하고 이야기 하려고 왔죠.” “어무이가 있나?” “네, 고향에서 큰 오빠 내외와 계세요.” “나도 딸이 하나 있다. 아니다. 둘이다.”

 

여성의 삶에서 어머니의 자리는 특별하다. 세상의 어머니는 모성이라는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 할머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나이, 아이들, 남편,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을 묻고 또 물었다. 7월의 날씨는 더웠고, 나의 몸은 땀으로 끈적거렸다. 할머니는 엉덩이로 몸을 움직여 손바닥으로 그릇을 받쳐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시고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서 그 그릇에 다시 물을 부어 할머니께 드렸다.

 

침묵의 대화

말은 입을 통하여 나오고 귀로 듣는다. 때로는 묻지 않아도 알고 대답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마음으로 하는 말은 마음으로 듣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께 한하운 시인의 시 <전라도길 – 소록도 가는 길>을 들려주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할머니는 세 번을 반복해서 들으며 뭉툭한 손으로 방바닥만 문질렀다. “누고?” 나는 한하운 시인의 삶을 이야기처럼 전해주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그 사람과 나는 함께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할머니는 한하운 시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노라고 했다. 시를 한 번 읽어보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덧 붙였다. “살았나? 죽었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사이, 할머니와 한하운 시인의 시는 침묵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시간 저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고, 나는 기다렸다. “이 사람은 왜 시를 썼을꼬?” 할머니의 말은 짧고 명료했으며, 간간이 이어졌다. “이 사람도 할 말이 많았겄제?” “처음에는 참 이상한기라.” “꼭 내 끼 아인 것 같고 넘 것 같다가도 내 낀가 싶고”

할머니는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라는 한하운 시인의 말에 “한참 일하다 보몬 칭칭 감고 있는 광목에 흙은 묻고, 집에 와서 풀어 보몬, 참 그런 기라”라며 응답했다. “내가 좀 그랬제. 우리 영감은 안 그랬다.” 소금을 먹어보기 전에는 소금의 짠 맛과 바다의 짠 맛을 구별할 수 없다. 담담하게 하는 할머니의 말을 옆에서 담담하게 들었다.

 

동무가 된다는 것

백 가지를 안다고 해도 한 가지를 모를 때가 있다. 그 한 가지가 사람의 마음이라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경상도 지역에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 중의 하나가 ‘문디’이다. 서정주는 자신의 시에서 이 ‘문디’는 밝은 낮에는 나올 수 없어 ‘달 뜨면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해와 하늘 빛이 서러운’ 존재로 묘사했다.

끝없는 황톳길에서 낯선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문둥이라면 친구가 된다. 그런데, 만약 마음을 털어놓고자 하는 상대가 문둥이가 아니라면 어찌할까. 나는 ‘문디’가 아니므로, 할머니 자체가 될 수 없으므로,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할머니의 삶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머니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나도 쓸 수 있겄나?” “김선생은 많이 배웠제?” 할머니는 일제 말기에 여고를 다녔다. 주말이 되면 부산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울산 집에 가는데, 어머니가 대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다시 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떠날 올 때에는 보따리 가득 밑반찬이 들어 있었고, 어머니는 그 보따리를 들고 기차 안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아 주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마치 강물이 산등성이에서 바다까지 갈 때 햇빛이 함께 가는 것(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처럼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하며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는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할머니의 마음을 보았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혼자 속으로 조용히 우는 것(<갈대>)”이라는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할머니는 60여 년 동안 혼자 말하고 혼자 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아무도 들어 줄 수 없었던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의 내면에 상처를 주고, 그 상처는 더 큰 상처를 주며 할머니의 삶을 기억 저 너머에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TV 프로그램 중 이산가족을 찾는 것은 언제나 본다고 했다.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할머니의 한센병 발병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헤어졌기 때문에 다시 만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남과 다른 몸은 타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타인의 시선은 무차별적으로 그들만의 방법으로 나의 몸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살던 오빠가 오랫동안 수소문하여 할머니를 찾았을 때 오빠는 분노했다. 동생이 한센인이었기 때문에 국가도 사회도 심지어 고향의 지인들까지 동생을 버렸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할머니의 현실에 오빠는 절망하며 이 땅을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떠날 수 없었다. 떠나기에는 상처가 너무 컸다.

어디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한센인 집단촌에서 쫓겨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며 전전하다가 낙동강 하구둑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곳에서도 쫓겨나 용호동에 정착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신암을 거쳐 배를 타고 을숙도로 갔다. 을숙도로 가는 동안에도 인근 주민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나와 감시했다. 을숙도는 세상과 단절된 섬과 같았지만 차라리 그 곳의 생활이 편하고 행복했다.

사라호 태풍이 오자 한센인들은 집채처럼 덮쳐 오는 물기둥을 피해서 죽을 힘을 다 해 을숙도에서 탈출했다. 그들은 동네로 들어오지 못하고 인근 초등학교에 강제 수용됐지만, 그 난리 속에서도 주민들의 위협은 살벌하고 집요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에 그들은 청소차에 실려 지금의 마을에 내던져졌다.

 

소통의 언어

내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고통은 어떤 경우에도 나의 것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할머니의 삶을 떠나지 않고 있는 고통 중의 하나는 소외감과 절망이었다. 한센인들과는 같은 공간에서 숨조차 쉴 수 없다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집착은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 살겠다는 아집은 나에게 고통을 주지만, 너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아집은 타인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표현은 소통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통을 가로 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몸이 병들어 일그러지는 것은 육체가 무너지는 것일 뿐 한 사람이 일그러져 내려앉는 것은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 다른 개개인의 감정들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겉만 볼 뿐 속은 보지 않는 마음에서는 감정들이 교차될 수 없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이러한 소통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할머니는 화장대 위에 놓인 공과금 고지서와는 다른 이름을 말해주었다.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는 “매독 같은(<공간의 시 6>)” 현실의 벽 앞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시인 엄국현은 “이름을 바꾸었으면 한다. 나는 바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공간의 시 6>)”라는 말로 대신했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자유로운 바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시인의 희망처럼 할머니도 이름을 바꿈으로써 영혼을 구속하는 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모를 일이다.

마을 입구에서 마주쳤던 여인의 흔들리던 눈빛이 먼 옛날의 할머니 눈빛은 아니었을까. 그 여인의 눈길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는 바람 같은 집시 여인의 희망을 보았던 게다. 희망은 현실을 추상화처럼 변형시키지만, 그 현실이 자신을 소진시키지는 않는다. 희망이 있으면 언제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81세의 할머니가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또 다른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할머니만의 언어이며 희망일 것이다.

스스로 믿고 희망하는 행위 자체는 하나의 체험일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조각상 토르소를 보며 “너를 바라보지 않는 곳이란 한 군데도 없으니까.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아폴로 고대 토르소>)”라며 토르소의 삶에 희망을 불어 넣는다. 집시들이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듯이 할머니는 60년 간 닫혀 있던 문을 조금씩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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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순서대로 전호근 作 (2004년) 작품으로 작가의 허가를 받아 올린 것임을 밝힙니다.[편집자]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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