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1)

Spread the love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1)

?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
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3. 연설기술(1)

연설기술(Rh?torike : Redekunst)은 소피스트 사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철학자들을 살피기 전에 연설기술이 나타나게 된 이 현상부터 간단히 정리 고찰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리스 말이 가지고 있었던 비상한 힘과 유연성이다. 그리스어는 상대에게 말하고 전해야 할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이 점은 예를 들어 헤브라이어와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것은 일상생활이건 전시에서건 간에 기회 있을 때마다 연설이 가져다 준 큰 기여이다.

연설기술의 경우 우리는 고대 포이니키아(페니키아)나 카르타고, 고대 게르만 등 어느 곳에서도 그것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에 반해 호메로스의 작품은 현재 우리의 손 안에 있다. 호메로스의 신들이나 인간들의 연설은 최고의 자연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고 게다가 그러한 연설은 폴리스가 앞서 이룩한 큰 성취에 바탕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에서는 이미 모든 사안이 토론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것을 위한 성대한 경기도 열려 말하는 일이 일의 성취와 목표 달성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후 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민회와 민중 법정이 여러 가지 주요사안을 결정하게 되면서 연설은 갑자기 체계적인 학문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이 연설기술을 그리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하고도 중심적인 요소로서 육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대의 신문, 잡지와 달리 그리스의 말하는 행위는 특정 장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그 시점에만 결부되어 있어, 연설하는 사람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장 직접적이고도 실감 있게 설득할 수 있어야했고 그 반대자 역시 제대로 된 반론을 펴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리스인의 경우 현재의 신문 잡지의 힘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연설의 힘과 비교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고대의 아테네인이 연설을 듣는 대신에 단지 열심히 신문 밖에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하면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연설기술은 의심할 나위 없이 아테네인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색이나 지식, 학적 탐구의 경쟁 상대가 되었다. 연설기술은 이후 이 시민들의 전체 에너지의 실로 방대한 부분을 빼앗았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적인 탐구는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처지가 되었을 정도이다. 사실 연설기술에 동원된 막대한 노고 이를테면, 수사학을 위해서 작성된 대량의 안내서의 종류만 비교해보더라도 학적 탐구의 실적은 그저 어중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철학자들도 처음부터 연설기술을 철학의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 경우 가장 현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것처럼 그들 자신 이것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생애의 상당 부분을 수사학에게 바쳐 그 최대의 탐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실제 사변으로서의 철학은 연설기술에 대한 엄밀한 탐구를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술과 시가의 손실은 돌이킬 수 것이었고 학적 탐구 또한 한참 뒤에 가서야 그 보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놀랄 만한 현상을 고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무엇보다도 보존되고 있는 연설 그 자체이다. 연설의 발달사적 측면에서 그 가장 중요한 증인은 『브루투스(Brutus)』와 『연설가(Orator)』를 쓴 키케로(기원전 106-43)이다. 키케로는 양질의 자료와 그 자신 그리스에서 거둔 학업을 통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수사학 내지 연설의 기술관련 지도서는 철학자 대부분이 하나 정도는 썼던 까닭에 그 수는 몇 백 권에 달하지만 이러한 기술 지도서 중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것으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Rh?torike)』과 『알렉산드로스에게 주는 연설기술(Rhetorica ad Alexandrum』이고, 그 이후의 저작으로서는 람프사코스의 아낙시메네스를 들 수 있고 조금 작은 기술 지도서로서는 할리카르낫소스의 디오뉘시오스의 저작 『고대연설가론(de oratoribus antiquis)』등도 중요하다. 그 밖의 것은 발츠(Walz)와 슈펜겔(Spengel)에 의해서 출판된 『그리스 연설가들(Rhetores Graeci)』를 참조했으면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 전부가 다루어지고 있는 근대의 저술로는 브라스(F. Blaβ)의 『아테네의 연설(die attische Beredsamkeit)』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적으로 연마된 연설의 목표는, 아직 독서 습관은 없었지만 민회나 법정 일에 길들여져 무엇이든 듣고 싶어 하는 민중들로 하여금 연설 내용이 ‘그럴 듯하다'(eikos)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듯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듣는 사람들을 승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순진할 정도로 귀가 얇은 그리스인들로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 자기가 부정하는 견해이고 또 듣는 쪽에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여겨질지라도 내 몸을 구하고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끌어다 댔고 게다가 그 연설이 소피스트들이 가르친 그대로 상대를 매료시킬 정도의 고상함을 갖추었을 경우에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다. 섬세한 귀를 가지고 능숙하게 펼쳐지는 연설을 귀담아 듣는 것을 소중한 기회로 여기고 있었던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미 그 연설을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도 『새(Ornithes)』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말은 정신에 날개를 돋게 하여 인간을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이러한 말의 힘을 가장 풍부하게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으로 안티폰(기원전 480-411)의 생애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안티폰이 망명자 신분으로 코린토스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는 위자료를 벌기 위해 노점을 열고 다음과 같이 방을 써 붙였다고 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말로 치료해드립니다”(1447) 이윽고 사람들이 찾아오자 그는 그 사람들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들의 불행을 쫓아내 주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데 말이 얼마나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과연 말로 슬픔을 치유할 정도의 사람이 있을지는 새삼 되물어 볼 일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연설은 그리스인에게서 이미 오랜 동안 다른 여러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것보다도 훨씬 중시되고 있었다. 나랏일에서나 법정에서나 사실 옛 부터 가장 큰 효과를 갖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은 늘 감탄의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규칙과 체계를 가진 연설기술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말을 잘 하려는 어떤 대단한 의식적인 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개개의 사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서 그것과 함께 그러한 화법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것을 기록해두는 것은 아직 사람들의 염두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주의적 재판 제도가 발달하고 이 재판 제도가 연설의 기회를 습관적으로 제공하게 됨에 따라 마침내 그 노력들에 이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연설 기술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최초로 행해진 것은 시칠리아에서였다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기원전 466년 시칠리아에서 참주들이 추방된 뒤 민주주의가 발흥 하여 “오랜 동안 권력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었던 다수의 사법상의 요구가 크게 증대되었던 것”이다.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0?-430?)가 이 새로운 연설기술의 창시자로서 어느 정도 문제가 되는지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즈음 이미 시칠리아 땅 쉬라쿠사이의 코락스(Korax)가 민중 연설가로서 또 법정 변론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가장 초기의 『연설기술 안내서』혹은 단순히 『안내서』라고 불리는 책은 이 코락스가 지은 것인데 이 책은 적어도 연설의 형식과 구분에 대한 규범, 서두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등에 관한 지침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와 똑같이 연설 안내서를 쓰고 있었던 제자이자 경쟁자였던 티시아스(Tisias)의 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럴듯함”(eikos)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연설 내지 연설기술은 이 티시아스와 소피스트인 레온티노이의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에 의해, 기원전 427년 그 자신도 동행했던 시칠리아 사절단의 아테네 파견을 계기로 유입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연설과 더불어 예비지식으로서 철학, 그것도 앞서 본 것처럼 진리 인식을 부정하는 부정적 성격의 철학도 함께 유입되었다. 아테네에서는 프로타고라스(기원전 485?-414?)가 고르기아스에 앞서 연설기술의 기초는 만들어 주었던 터라 고르기아스 때부터 이미 연설기술은 소피스트들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또 고르기아스 자신 이미 연설기술의 교사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소피스트들 모두가 그랬듯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그곳 실정에 맞추어 체계적인 연설기술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연설 교사라는 게 하나의 직업으로 여겨졌다. 또 그들에게서 배우면 무엇인가 얻는 바가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연설 교사는 고액의 사례를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떠올랐다.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


 
고르기아스는 재능이 남달라 아무리 내용이 진부해도 시적인 표현과 새로운 언어로 그 내용에 맞추어 훌륭하게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가 이룬 진전은 의심할 바 없이 시의 운율을 도입하여 연설문에 균형 잡힌 구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연설의 각 부분은 서로 대응해서 어울리는 문장들로 구성되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말의 울림이 매우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방식은 기술된 사안을 보다 명료하게 해주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연설 각 부분들을 서로 대비하면서 생각들의 대립을 부각시키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같은 길이의 문장(isok?la), 형식상 서로 대응하는 문장(parisa), 그리고 특히 똑같은 말로 끝나는 문장(homoioteleuta), 그리고 같은 소리의 말, 서로 운율이 맞는 말(paronomasiai, par?ch?seis)을 활용하여 연설가로 하여금 한층 더 활기 있는 열변과 화려한 몸짓을 더하게 만들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고르기아스 이래 아테네에서 연설의 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향상은 아테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오랜 동안 아테네의 정치가들에 의해서 기반이 잘 마련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페르시아 전쟁 이래 그리스의 위대한 정책과 제국의 패권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현실이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미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8-462)부터 그 자신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연설가로서도 위대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할 때까지만 해도 실제로는 고르기아스가 이룬 연설 기술의 수준에는 크게 못 미쳐 있었다. 물론 고대 사료들은 여러 곳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보여준 마술과 같은 효과(ep?dai)를 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연설이 올림포스의 위대한 신 제우스처럼 천둥과도 같이 전광을 발하며 그리스 전 국토를 뒤흔들었고, 그의 입술 위에는 연설의 여신이 머물러 있었으며 그의 연설은 청중의 마음속에 가시를 남겨두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설은 투퀴디데스(기원전 460?-400?)의 저작을 통해 그의 입으로 전해지는 것일 뿐 실제 그 자신이 쓴 것으로는 민회의 결의문 이외에 어떤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사실 플라톤도 말했듯이(『파이드로스』257d) 당시만 해도 나라에서 대단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후세의 평판이 두려워 자신의 이야기들을 쓰거나 저술을 남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투퀴디데스의 저작에 실린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분명 그의 정신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의 연설의 특수한 부분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시적 형상을 이용하고 있었고 그 일부가 훗날 유명하게 되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그가 연설하는 모습 자체는 나중 세대인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가 가지고 있던 것 같은 정열적인 면모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 페리클레스는 망토로 몸을 둘러 싸맨 채 가만히 서서 연설을 하였고 목소리도 항상 같은 높낮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당시는 정치가는 물론 법정 변론가도 연설을 할 때 아직 단순한 말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고르기아스가 아테네에 도착한 이후 30년 남짓의 세월의 사이에 연설 기술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3. 연설기술(2) 다음에 계속)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