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위선[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영화 [거래(Arbitrage)]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영화는 종종 철학 수업이나 사유의 좋은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강의 시간에 좋은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름 깊은 메시지가 있는 영화는 생각하기를 자극한다. 요즘은 대학 강의실에서 영화를 이용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나도 강의를 할 때 1-2번 정도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고 학생들도 좋아한다. 좋은 영화는 웬만한 텍스트 이상으로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켜 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며칠 전에 우연히 본 리차드 기어 주연의 <Arbitrage>라는 영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감독의 연출 의도 이상으로 곳곳에 해석의 여지가 많은 텍스트다. 문제의 정답을 이야기하려는 것보다는 그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http://evelin-hvezdy.blog.c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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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헤지 펀드(Hedge Fund)를 운영하는 로버트 밀러는 화목한 가정의 가장 역할도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의 60회 생일 축하 자리에는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두루 모여 즐거움을 함께 한다. 성공한 가장이 이룩한 화목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의 부인도 그를 사랑한다고 한다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 오래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인의 인정과 사랑만큼 한 남자의 성취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한 것은 모두가 가정을 위한 것이고 가정의 행복에서 가장 커다란 의미를 느낀다고 말을 한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데는 무엇보다 가정의 행복이 밑바탕이 되었고, 가정의 행복이야말로 성취의 궁극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와 개인이 분열된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래로 핵가족 사회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일지 모른다. 공동체의 인정보다 가족의 인정이 더 일차적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취했다 하더라도 가정적으로 불행하다면 부르주아 사회의 행복의 기준에서 그는 결코 행복했거나 성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밀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행복한 가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그의 핸드폰에는 정부 (情夫) 줄리의 문자가 들어 있고, 그의 욕망은 업무 핑계를 대고 줄리를 만나러 간다. 완벽한 가정 속에 감추어진 커다란 구멍. 젊은 여성 줄리는 그가 투자한 갤러리의 대표이자 밀러의 숨겨둔 정부이다. 자신의 생일 축하를 받아주지 못하는 밀러에 대해 투정하는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잠시 그들은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3. 이어서 장면은 밀러가 처한 회사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는 회사를 매각하려 하지만 상대방은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밀러의 불안감을 더해 준다. 그는 이미 러시아의 동광에 투자한 많은 돈을 날린 상태다. 어려워진 자기 회사의 재정 상태를 감추기 위해 친구에게 4천억을 빌려 잠시 예치해 놓은 상태로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약속 기간이 길어지자 불안해진 친구가 그 돈을 돌려놓을 것을 재촉한다. 친구와의 채무 관계, 회사 매각의 지연 등으로 진퇴양난에 빠진 격이다. 사업상 통상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겠지만 이번의 경우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공든 탑을 하루 아침에 날릴 수 있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안정과 불안정의 차이에 있을까, 혹은 그것 너머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인가? 모든 투자는 투기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자 그는 집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에 줄리에게 간다. 줄리는 사람들과 파티를 하다가 밀러의 강압으로 친구들을 돌려보낸다.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줄리의 안타까운 갈망은 밀러에게 투정과 비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밀러는 자신의 가정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양립이 불가능한 유부남의 불륜이자 일탈적 사랑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런 사랑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안정적 가정이 투자라면, 일탈적이며 위험이 크지만 매혹적인 불륜은 투기인가?

 

4. 그 때 밀러는 줄리에게 어디 먼 곳으로 도망가자는 제안을 한다. 그날 밤 둘은 차를 몰고 떠난다. 떠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잠시 머리를 식히려는 것인가, 아니면 총체적 난국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완전히 증발하려는 것일까? 물론 사업가의 스마트한 두뇌가 후자를 선택할 가망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졸음운전을 하던 밀러에게 차량 전복 사고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은 물론 예외적 상황이리라. 하지만 모든 정상은 이런 예외와 비정상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차에서 간신히 깬 밀러가 옆 자리의 줄리를 보니 이미 죽은 상태다. 만약 그 사고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 밀러는 불륜의 당사자로 그가 쌓아 놓은 모든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되고, 회사 매각과 관련된 비즈니스도 중단되고 마침내는 사기 횡령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계산을 한 밀러는 줄리를 남겨두고 차에서 나오는데, 그 순간 차량은 화염에 휩싸인다. 이 때 밀러는 일전에 죽은 자신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구한다. 물론 핸드폰이 아니라 흔적이 남지 않도록 용의주도하게 공중전화를 이용한다. 미심쩍어 하는 지미에게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톨게이트를 통과하지 말도록 당부한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투자와 관련된 합리적 판단으로 단련된 머리가 치밀하게 돌아가고 있다. 투기꾼의 합리적 사고는 어떤 상황에서도 계산을 멈추지 않고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을 지향하는 것이다. 지미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몰래 귀가한 밀러는 상처의 흔적을 지우고 조용히 아내의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밀러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서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차가운 이성을 통해 합리적 계산을 하는 냉정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고대의 윤리학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분명 밀러는 탁월함(Virtue)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이런 탁월함조차 그 밑바탕에 선의지(Good Will)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얼마든지 더 큰 악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탁월함이 큰 악덕(Bad Virtue)으로 전도될 수 있다는 의미다.

 

5. 이 사건을 담당한 형사 로스는 사고 당사자, 현장 주변과 통화 기록 등의 조사를 통해 부자 밀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직감한다. 해서 밀러를 기소하기 위해 압박해 들어가는데 밀러는 여러 가지 증거 인멸과 알리바이를 통해 로스의 수사망을 빠져 나가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현재 구속될 경우 회사 매각이 결렬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는, 일견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를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한다. 그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회계 부정까지 일삼는다. 목적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런 태도를 우리는 도처에서 본다. 하지만 그가 처한 난처한 재정 상황은 이미 딸에게도 드러나 충분히 사기 횡령이 될 수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 문제를 가지고 딸과 언쟁을 벌인다. 회사의 회계 담당 이사인 딸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비리를 묵인할 경우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고, 앞날이 막혀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바로 친아버지가 아닌가? 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육친의 정과 도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딜레마이다. 밀러는 딸을 설득하려하기 보다는 딸에게 판단을 맡긴다.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강제하려는 우리의 정서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유일하게 거래를 넘어서는 부분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일까?

 

6. 그가 구속되느냐 아니면 빠져나가느냐의 열쇠는 이제 지미에게 달려 있다. 밀러는 지미에게 20억의 신탁 자산을 가지고 입을 막으려 한다. 반면 형사 로스는 지미의 차량 기록을 가지고 전과가 있는 지미의 협조를 압박한다. 상대는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부자이고, 최고로 실력있는 변호사를 동원할 수 있다. 일개 수사관이 상대하기에는 벅찰 수도 있다. 무리수는 종종 이런 지점에서 유혹한다. 유죄에 대한 심증이 앞선 수사관은 증거 조작이라는 위법적 절차를 밟게 된다. 이런 증거로 인해 검사 역시 로스를 지원한다. 이제 지미가 진실을 털어 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반전의 묘미가 재밌다. 동일한 증거자료가 똑같이 반증자료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텍스트는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닌가? 지미가 톨게이트를 통과한 적이 없다고 한 말에 주목한 밀러는 변호사를 동원해 차량 기록이 조작되었음을 밝힌다. 결국 영화는 위법적 절차이기는 하지만 진실을 찾으려는 형사 대신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양심을 속이고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밀러의 손을 들어준다. 이 대목에서도 많은 생각을 일으킨다. 불법을 밝히기 위해 똑같이 불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혹은 합법의 형태로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피의자를 멀뚱히 쳐다만 볼 것인가? 이런 형사 사건의 경우에서도 재벌을 상대로 하는 소송이 힘든데 일 개인이나 집단이 거대 로펌을 앞세운 재벌이나 행정당국과 어떻게 법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까? 삼성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 태안의 기름 유출 피해자들, 쌍용의 해고 노동자들, 혹은 노동 현장의 파업으로 인해 손해배상소송에 걸린 노동자와 노조들 등, 법적 쌍방 간의 불평등과 불균형을 생각하다보니 끝이 없다.

 

7. 밀러의 부인은 밀러의 부도덕한 현실을 빌미로 재단을 딸에게 넘기도록 강요하지만 밀러는 그것도 거부한다. 마지막 부부간의 대화는 그동안 화목하고 행복했던 부부로 믿었던 것이 얼마나 위선이었고 다른 방식의 거래일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부르주아의 행복이란 것의 허구! 결혼은 성기의 배타적 점유를 위한 계약이라는 칸트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그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계약이 깨졌을 때 부부관계는 새로운 형태의 거래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한편 밀러는 회계장부까지 조작한 회사도 강하게 배팅해서 성공적으로 매각한다. 결국 모든 상황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은 성공적인 비즈니스 맨의 모습이다. 거래(Arbitrage)는 쌍방 간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최상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장사꾼들의 합리적 행동을 지향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밀러의 행동은 성공적인 거래의 전형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불륜 상대인 줄리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자신을 추적하는 형사와 위증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지미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성공적으로 회사를 매각하는 배팅에서도 그렇다. 위험천만하지만 그러나 성공적인 이런 거래의 이면에는 끊임없이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합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부도덕한 현실, 그리고 왜곡된 진실의 모습…과연 진실이 무슨 의미이고, 돈과 권력의 역할을 무엇인가? 영화의 마지막은 그가 이런 모습의 전형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수상 장면이다. 수상을 발표하는 자리는 자신의 딸이 사회를 맡고, 딸은 밀러에게 더 할 수 없는 찬사를 바친다. 밀러는 부인에게 행복한 키스를 보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박수를 친다. 하지만 마이크를 건네주는 딸의 모습은 냉랭할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람의 모습과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의 허구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준다. 성공한 이미지 정치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양면을 한 인격 속에서 무리 없이 잘 표현해준 배우 리처드 기어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