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1)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1:?고대 그리스인의 사랑’에 이어 예고한 대로?19세기 저명한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대작?[그리스 문화사](Griechische Kulturgeschichte)를 토대로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부르크하르트의?[그리스 문화사]는 고대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독보적인 수준이라 할 정도의 풍부하고도 세세한 정보와 탁월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오늘날까지도 그리스 문화 연구자라면 반드시 딛고 넘어가야할 걸출한 연구 성과이자 토론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그러나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고 난삽하여 이곳에서는 중요 주제를 골라 웹진 연재물로서 적합한 분량만큼 발췌 축약해가면서 그 내용을 토론하고 음미하는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우리가 다룰 첫째 주제는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이다.?텍스트는 ‘Die Demokratie und ihre Ausgestaltung in Athen’,?Griechische Kulturgeschichte, Erste Band. Seite 202-239)?Jacob Burckhardt Gesammelte Werke, Band V. Darmstadt 1956

주제?2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1. 정치적 반성의 귀결로서 민주정

폴리스 체제 내부에서 반성이 지배하게 되면 머지않아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 시민들은 평등에 대한 욕구에 강하게 이끌린다. 이러한 평등 욕구가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얼마나 퍼져 나갈 지는 주변 사정에 달려 있다. 비교적 초기의 폴리스 정체들 중에서 고대 왕정과 귀족정은 원천적으로 정복과 자명한 권위를 기반으로 구축되고 참주정은 사실상의 찬탈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이러한 정체들 속에는 이미 소수계층에 대항하여 만인의 이익을 옹호해야한다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폴리스로서 그 출발부터 이미 위와 같은 반성이 작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반성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사례가 있다.

그것이 곧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지였다. 식민지에서 비로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천성에 따른 여러 가지 요소와 힘을 고려하고 의식적으로 폴리스를 새롭게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조직적인 능력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힘이나 단순한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아주 다양한 형태의 구성요소는 법률상의 배려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곳이 곧 “입법자(Gesetzgeber)”의 직무가 새로운 의미를 갖는 지점이다. 테세우스나?뤼쿠르고스(Lykourgos)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신화적인 인물이었지만,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주민들(Groβgriechen) 사이에서 카론다스(Charondas)와 잘레우코스(Zaleukos)가 나타난 것처럼 자신들의 폴리스로부터 그 일을 위탁받은 국제와 법률의 편찬자가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입법(nomothesia)은 그때마다 하나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 물론 외국에서 올바르다고 인정되고 있는 것을 자발적으로 채용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지만 – 어딘가 다른 곳의 양식을 단지 그대로 베껴 놓은 것은 아니다. 고대 아테네인들의 입법을 위한 그와 같은 시도들은 모두 매우 주목할 만한,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그 때 아테네인들이 식민지 건설의 기초로서 내건 기치가 곧 “정의(to dikaion)” 내지 “정의의 지배(dikaiarchia)”였다.

<그리스문화사> 5판본 표지 (1898-1902)

그런데 본토에서도 이 같은 힘과 의욕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개혁의 의미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고, 이러한 힘과 의욕은 불가피하게도 귀족정(aristokratia)과 참주정(tyrannis)에 대한 거역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경계선 위에 아테네가 솔론(Solon)과 함께 서있다. 솔론은 전체 민중(Volk, Demos)을 위해서 평의원을 위한 선거권을 확보하였고, 대부분 귀족들인 토지 소유자에게는 독점적 피선거권을 부여하였다.(기원전 594년 이래). 그 대신 동산의 소유에 대해서는 당분간 평등의 권리로부터 제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안에 대한 최고의 결정권을 어디까지나 민회에 부여하였다. 과도기의 아테네의 명예는 이와 같은 솔론의 등장과 그에 대한 신뢰와 복종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 어떤 것을 전제로 했을 경우에만 설명할 수 있다. 즉 그와 같은 일들이 고대 아테네의 세습 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 등장한 문벌 계층(Eupatriden)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은 분명 고대 아테네인들의 내면적 성숙(die innerliche Ausreifung)을 보여준다. 물론 솔론에 이어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와 그의 아들(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들에 의해 참주정이 등장하긴 했지만(기원전 561년 이후) 그 후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이래 일련의 급속한 개혁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아테네는 완전한 민주정에 이르게 된다.

솔론(Solon 기원전 638경-558경)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민주정에서 최초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시민 대중(die Masse der B?rger)을 폴리스의 지배자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민 대중이 실제로 개입할 생각이 있든 없든 국사를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점에 대한 명확한 통찰이다. 시민 사이에서의 당파 싸움이 있을 때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시민권 박탈의 제재를 각오해야 한다고 하는 솔론의 법률은 쓸데없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건 간에 후기위정자들은 시민 대중들로 하여금 최대한 정치활동을 강화하도록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매년 500명의 평의원(그 때의 10의 부족으로부터 각 50명씩을)과 5000명(아리스토텔레스 24장에서는 6000명으로 나타나 있다)으로 이루어진 민중 법정의 심판원을 선출해야 했다. 그리고 시민들 모두는 어떤 일이든 이 법정에 소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500명의 평의원들은 50명씩 돌아가며 35일간 집무했다. 이와 동시에 거류외인(metoikos)을 포함하여 시민의 수도 증가하고 또 에우보이아(Euboia)섬 정복으로 새로운 영토가 획득되어 토지 전체를 4000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시민에게 분배할 수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와 그 후계자들이 이런 일을 수행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적극적이었는지 혹은 한 번 자각된 아테네의 정신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일을 수행했던 것인지는 일단 논외로 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아테네 사람이 명실공히 실제로 아테네 시민인 한, 그 시민은 누구라도 어떠한 관공서의 업무에도 적합한 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서 특히 500명의 평의원을 선출할 때 선거가 아닌 추첨(Los, kl?ros)의 방법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인력의 안전성이나 실무상의 특수한 전통의 형성은 완전히 단절되었고 그로부터 생길 수 있는 모든 장점과 단점도 함께 제거되었다. 그러나 벌써 외국인이나 거류외인들이 현저하게 시민으로 유입되어 있었던 터라 결국 필요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식이 아마 작동했는지, 추첨된 사람들은 물론 선거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절충적인 조정책으로서 자격 심사(dokimasia)가 실시되었다. 추첨 혹은 선거에 의해서 직무에 종사하게 된 사람들 모두는 이미 자격 심사에 합격한 평의원들 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품행이나 성격, 가족이나 타인들에 대한 태도, 전투 경험의 유무, 재판상 소송을 당했는지 여부 등등에 대해 질문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식이나 특수 능력은 전혀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만약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누군가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평의회는 바로 재판소에 판정을 회부하였고 그러한 경우를 빼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렸다.

추방대상 이름이 적힌 도자기 조각(陶片)

투퀴디데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피난처를 위해서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을 제어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 민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시민적 평등은 결코 정치적 불평등과 결부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투표에 참가하였고 또 재판관이자 시 당국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폴리스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과 관련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히 비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이러한 일에 관여하는 것을 그 만큼 더 절실하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전에는 왕이나 귀족 혹은 참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권력이 시민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훨씬 넓은 범위에서 특정 개인의 심신을 훨씬 강하게 압박하는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시민 대중은 지배권을 잡았을 경우 불안과 질투의 감정을 한층 더 강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아테네 민주정에서 시민대중은 무엇보다도 우선 재능이 풍부한 특정 개인의 영향력을 압박하기 위한 대책을 찾아냈다. 그것이 곧 최고 지휘관을 선택할 때의 절차와 도편 추방(陶片追放 ostrakismos)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특정 개인의 힘이 우세해지지 않도록 아테네인들은 매년 열 명의 장군을 뽑아 그들 각각이 자신의 부족의 부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그 모두를 지휘하는 최고의 지휘권 또한 장군들끼리 돌아가며 맡게 하였다. 운 좋게도 마라톤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밀티아데스(Miltiades) 한 명에게만 최고 지휘권을 부여하여 승리를 얻었지만 그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기원전 405년 아에고스 포타모이(Aegos Potamoi) 전투에서는 “스파르타는 한 명의 지휘 하에 있는데”라는 알키비아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테네는 패배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은 참주정을 영원히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구실 아래 도편 추방제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매년 겨울 평의회가 민중에게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그를 추방해야 할 이유가 있는 지 없는지를 묻는 제도였다. 6000표 이상이 추방에 찬성할 경우 그 사람은 10년간, 적어도 5년간, 국외 추방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출신 도시 이외의 지역에 체재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었으므로 추방은 당시 사형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기원전 5세기 남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들은 모두 한 번은 이러한 도편추방의 위협에 휩싸였다. 개중에는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가까이에서 압박해오고 있는 이러한 형벌을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로 저 페리클레스마저도 아주 오랜 시간 겁쟁이로 만들 정도로 당대 실력자들에게는 걱정거리로 여겨졌다. 여기에는 영원한 미움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층민(P?bel)의 미움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야심가(Groβstreber)의 경우 대중(die Volksmasse)은 인위적으로 선동되지 않는 한, 오히려 그를 자기편으로 생각하거나 그에게 공감 내지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탁월하고 능력 있는 소수의 야심가들에 대한 무능하면서 그저 허세를 좇는 자들(Eitelkeiten)의 미움인 것이다. 즉 도편 추방은 군소 야심가들이 고안해낸 것이다. 당시 아테네 대중들은 아주 어리석게도(t?richt) 이런 군소 무리들의 선동이 낳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 짚어 쓰게 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 제도를 추켜세워 이것은 실력 있는 야심가들에 대한 질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실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이 제도에 너무 지나치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가 존재하고 나서 평범한 무리(die Mediokrit?t)들이 그와 같이 빼어난 착상을 가진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이 무리들은 문자 그대로 민중의 감정(Volksgef?hl)을 요새로 삼아 그 배후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인물에게 공공연하게 신뢰가 집중되기 시작하면 곧바로 도편 추방이 행해졌다. 특정 인물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신뢰는 아테네에서 조직적으로 배제되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시민들은 선동 정치가들의 손에 이 방법을 맹목적으로 맡기는 뼈아픈 경험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민중들은 (마라톤 전투의) 승리에 우쭐대 자기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수준을 넘어선 명예와 명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화를 냈다. 도편 추방은 악행을 범했던 것에 대한 징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단지 기고만장함과 중요한 영향력을 지나치게 가진 것에 대한 처벌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분히 아전인수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에 의해 선동된 ‘아리스티데스에 대한 도편 추방은 사실상 배려를 구실로 대중의 질투심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은 매우 지당한 말이다. 이처럼 도편추방제는 미움을 받은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특정 개인들에 대한 폴리스의 실제적 보복의 수단으로 또는 신속하게 어느 시민을 쫓아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서 이 제도가 정쟁의 도구화로 전락하고 있다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487년에 시작된 이 권력의 도구는 마침내 그 세기 이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48)은 아테네 민주정의 측면에서 보면 그 등장과 발전을 위한 아주 절묘한 배경을 제공해주었다. 마라톤에서 중장보병이, 살라미스에서 해군이 페르시아군에 승리를 거둠에 따라, 게다가 이 승리 이후 다른 폴리스들에 대한 패권이 확보되기에 이르렀을 때, 아테네 민주정은 그 위력을 드러내면서 영원불멸의 존엄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해상 세력은 민주정과 실질적으로 자매와 같이 밀접하게 결부된 것처럼 보였다. 특히 항구 페이라이에우스 사람들은 도시지역에서보다 한층 더 시민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도토스 역시 (historiai)에서 “시민의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위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전하면서 “아테네 사람들이 참주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는 근처 어느 나라보다도 전력상 뛰어날 게 없었지만, 참주들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그들은 단연 다른 나라들을 눌러 제일인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5권 78)

그렇지만 스스로의 힘을 자랑하는 훌륭한 감정을 손에 넣은 것은 시민만이 아니었다. 아테네인의 풍부한 천성과 이 비정상인 시대는 중상모략을 가능케 하는 모든 제도에도 불구하고 세력 있는 개인을 대두 하게 했다.

“민주제 공화국은 과두제 공화국에 못지않게 우두머리(Oberhaupt)를 필요로 하지만, 마찬가지로 또 우두머리를 감내하지도 못한다.”(Ranke, Weltgeschichte I. s.251)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이었던 밀티아데스는 옥사 했다. 테미스토클레스 역시 오늘날 그의 역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은 연극을 아테네인을 상대로 상연한 후, 마침내 도편추방되어 페르시아 대왕의 손님으로서 생애를 마감했다. 하지만 패권의 확장과 강화, 페르시아에 반항한 이집트에까지 향한 대담무쌍한, 수차에 걸친 함대 원정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모든 사업은 2만명 내지 기껏해야 3만명 정도의 시민들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더 공공 생활에 헌신할 수 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은 (30만 내지는 40만명의) 거류외인과 노예들의 의무로 여겨졌다. 전시 수당제도는 이 때문에 생겼다. 왜냐하면 어쨌든 육군과 해군은 단지 패권하의 폴리스들(이들은 자신의 할당액수를 금으로 지불하고 있었다)를 원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서의 아테네를 어느 곳에서든 어떤 경우에든 대표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정 수당제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즉 대중들은 부유한 자들이 재판관으로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아테네는 동맹 폴리스들의 법률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법정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민들은 며칠에 걸쳐 법정에 출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회 수당도 마찬가지였다. 즉 이 강대 폴리스의 모든 내정 활동 및 대외 정책은 공적 심의에 종사하는 민중이 완수해야 할 책무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철면피에 가까운 수당은 관람 수당이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이 수당 중 일부는 축전이나 경기를 축하하기 위해서, 일부는 극장 입장료로, 일부는 제사용 제물이나 공적 회식을 위해서 시민들에게 지급되었다. 이러한 낭비는 호사가 극에 달한 궁정의 그것과 비교해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자금 경색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전쟁도 패배한 경우 또한 부지기수였다. 왜냐하면 이(모든 수당이라고 하는) 성역은 절대 침범해서는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민중은 일종의 참주이며, 관람 수당 금고는 민중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항상 가득 차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민중의 사적 재산이었다. 그 밖에 수천의 아테네 시민을 위해서(혹은 패권 하에 있는 다른 폴리스의 시민을 위해서) 새로운 토지 배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에우보이아섬에서, 지금은 그 외의 다수의 클레루키아(Klerukia), 즉 아테네에 지배 권력을 위탁한 외곽 전진기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게다가 아테네는 대규모 업무의 중심지로서 극히 화려한 건축물과 예술 작품으로 치장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일의 대부분의 책임을 걸머지고 있는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최초의 희생자들에게 바친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추도연설에서 아테네의 현재의 모습을 서술하고, 아테네의 권력과 삶의 아름다움을 꽃과 같이 스스로 자란 것인 양,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가사적 인간들에게 고난을 지우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낙천주의는 특히 20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면 페리클레스가 현명하고 분별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이상의 훨씬 더 정도가 심한 기만(T?uschung)이다. 수십년에 걸친 아테네의 충실한 영광의 시간들은 그 이후의 세상의 모든 시대를 위해서 아무래도 한 번은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가장 고귀한 것이 이 시기에 창조될 필요가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것에 가세하여, 그리스적인 정신을 가지고 완수할 수 있는 것의 대략의 기준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태가 더 훨씬 긴 동안 존속하면 좋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소원은 완전히 허무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일반적 상황은 어쩔 도리가 없는 곳까지 이르렀고 어떻게 바뀌어도 귀착점은 여전히 멸망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테네의 사람들은 극히 현실적인 성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못된 정열(b?sen Leidenschaften)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그 나름의 교육을 하는 한편 그들의 끝없는 탐욕을 – 가라앉히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향락을 제공함으로써 어떻게든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키몬(Kimon)과 같은 부자였다면, 자신의 재산을 사용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 자금을 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에 가세해 아테네 사람들의 무서울 만큼 높아진 명예심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교사들 자신에게도 반항하게 만들어 교사들을 앞지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 자신 그 말년에는 사방팔방으로부터 공격받았고, 급기야 그리스 전체에 걸쳐 전쟁이 터지는 편이 차라리 바람직할 정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쭐해하던 기분을 끌어내리고 그들의 겸양을 고양시키는 것이 가능한”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민들은 밑도 끝도 없이 열리는 민회나 법정 집회(ekkl?siazein kai diakazein)때문에 분명히 신경질적이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의 노동에서 얻을 수 있었던 ‘마음을 완화시키는 힘’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족 해 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케르퀴라(Kerkyra)와 코린토스의 사절들이 아테네 시민 앞에 나타났을 때) 케르퀴라 사람의 이익을 앞세워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려 결국 전쟁을 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 민회의 결의는 조정이 훨씬 용이하고 그것이야말로 영광일 수 있었던 순간에 그 초조함이 빚어낸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테네가 민주정을 표방하면서 다른 폴리스들을 패권적으로 지배하려고 한 것은 일종의 모순이었으나, 자칫 거역했다가는 항상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폴리스들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스스로가 예속되고 착취 받는다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아테네가 자기들의 돈으로 강대해지는 것을 감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테네가 화려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질릴 정도로 소란을 피우고 있어도 다른 폴리스들은 그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페리클레스 자신의 다음과 같은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실로 우리들은 일찍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기획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로부터 기피당하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 시기당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의 지배체제는 사실상 참주정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배체제를 취하는 것이 부정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해도 이제 와서 절대로 이것을 마음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여러분들은 반드시 보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어떻게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는지를 아테네에 관한 저작들은 몸서리칠 정도로 분명하게 보고하고 있다. 그의 연설은 패권의 문제에 대해서도 아테네의 활동 전체에서 드러나는 것과 완전히 궤를 같이 하면서 일체의 것을 허락하고 있다. 게다가 아테네 대중들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도록 교육되었다. 그리하여 아테네인들은 마침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지에 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패권적 지배하에 있는 폴리스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하면 페리클레스의 범그리스적 구상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평화와 협력을 목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그리스 폴리스들이 아테네에서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은 듣기에도 좋고, 그러한 사태를 그려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을 테지만 이 회의가 헛된 바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초의 예상대로 스파르타가 이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0)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0)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4)

플라톤의 에로스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몇 가지 궁금한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를 이해할 때에 늘 따라다니는 의문들이다. 가장 먼저 플라톤의 에로스와 몸의 아름다움과의 관계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흥미롭게도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을 정신적인 것으로 올라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또 한사람의 제자 스펫토스(Sphettos) 출신 아이스키네스(Aischines)도 <아스파시아(Aspasia)>라는 대화편에서 플라톤에 앞서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기곤(Olof Gigon)은 “플라톤이 아이스키네스의 아스파시아를 넘는 대항 인물로 디오티마를 구상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에게 아름다운 몸에 대한 황홀한 응시로부터 이데아의 관조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적 행로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의 배경에는 일정부분 몸과 영혼의 유사성이 깔려 있다. 왜냐하면 에로스의 진정한 본질을 계시 하는 부분(206B)에서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몸에 있어서 그리고 영혼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 안에서 출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은 그렇게 했을 지라도 에로스의 오름길에서 몸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바로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최고 관조 단계에서 디오티마는 “아름다움(kalon)”과 “좋음(agath?n)”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있는데 이 경우 좋음과 일치하는 아름다움 또한 영혼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디오티마가 오름길의 출발선에 몸의 아름다움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은 없지만, <향연>의 그 부분만으로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모두 몸의 아름다움에 대해 결벽스러울 정도의 거부감을 가졌다는 일반의 오해를 풀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몸의 아름다움은 비록 영혼의 아름다움보다는 하위의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과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것이자 좋은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아름다움과 좋음을 동일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동일시는 아름다움과 좋음을 하나로 묶은 kalokagathia라는 개념으로 그리스인들의 사유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피치노(Marsilo Ficino)는 <에로스에 대해서 혹은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름다운 몸에서 반사되는 신성(Gottheit)의 빛! 그 빛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신의 모습인양 찬미하고 외경심을 가득 품은 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뫼리케(M?rike)의 말도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그러나 몸의 아름다움이건 영혼의 아름다움이건 플라톤적인 에로스와 아름다움의 결합, 아름다움과 좋음의 결합이 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키케로(「투스쿨룸 대화」4.70)는, “우애로 위장을 한 그런 사랑(소년사랑을 말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iste amor amicitate)”라고 불쾌한 듯 되묻는다. 그것은 보기 흉한 젊음이나 아름다운 늙음이 좋은 조합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후에도 취급하게 되지만 로마 제정기의 작가 루키아노스(Lukianos)의 <사랑에 대해(Erotes)>(23,33)라는 책에서도 저자는 에로스와 좋음,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가치를 동일시하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키케로(기원전 106-43)

사실 플라톤이 아름다움과 좋음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최고의 단계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여전히 연속적이고도 경계가 불분명한 무규정적인 현실의 위계에서는, 설령 가장 뛰어난 몸의 아름다움을 가졌다 해도 미미하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일 수 없다. <향연> 210b의 언급은 그 결정적인 부분이다. 그곳에서 디오티마는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로부터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고 가는 길을 화제로 삼으면서 설사 누군가 몸의 아름다움을 아주 미미하게만 가지고 있어도(smikron anthos)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혼의 아름다움의 절대적 우위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플라톤은 <향연> 끝부분에서도 일상의 생각을 독특한 방식으로 역전시켜 빛나도록 아름다운 알키비아데스로 하여금 실레노스와 같이 보기 흉한 소크라테스에게 숨 막힐 정도의 사랑의 고백을 토해내게 함으로써 그 우위성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파이드로스>의 결론 부분도 상기해야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땅의 신들에게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플라톤적인 에로스가 어디까지나 남성의 아름다움에만 주목하는 남성중심의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의 에로스론은 어쩌면 원천적인 한계를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디오티마가 비의의 단계적 오름길에서 가장 낮은 단계를 묘사할 때마다 무차별적으로 그저 아름다운 몸(soma)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 몸이 소년사랑의 당사자들인 남성들의 몸을 가리키는 것임을 감안한다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플라톤 스스로 이미 여성의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예 논외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혐오나 기피의 대상까지는 아니긴 하지만 플라톤이 이성에 대해 무관심했음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빌라모비츠(Wilamowitz)도 그의 플라톤에 관한 책을 통해 “여러 측면에서 플라톤이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여성은 전 생애동안 어색한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가장 중대한 결함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향연>에서 가장 최고의 인식단계로 이끄는 사람이 물론 예언가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한 명의 여성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리고 <국가>에서 보듯이 여성을 이상국가의 수호자 그룹에 포함시킨 것은 그리스 로마 사상가를 통틀어 플라톤 밖에 없었을 만큼 매우 특별한 점이라 할 것이다. 하기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한 여성이 오랫동안 제자로 생활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다가 남장을 하고 몰래 들어와 있었던 것이라 하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에로스론에서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고려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흥미로운 관심사이긴 하지만, 에로스의 해석과 관련한 그리스 논쟁사의 핵심은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에로스가 육체적인 아름다움의 영역으로부터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관조와 헌신의 영역으로 고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오름길의 단계에서 일상의 활동(epit?deumata)속에서 일상인의 눈에 비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적인 인식을 그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에로스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살아 숨 쉬는 에로스이되, 종국에 가서는 그 일상을 뛰어넘어 다시 일상을 고양된 정신적 가치와 의미로 승화, 견인해내는 에로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법에 걸려 죽어가던 프쉬케를 에로스(=큐피드)가 구출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The Abduction of Psyche, 1895 / Bouguereau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플라톤 자신도 몸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출발점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에로스가 포함하는 필요 불가결한 부분으로서 그의 단계적 오름길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대체로 성적인 것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대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했던 소년사랑과 그 관능적인 측면에 대한 그의 혐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의 논의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정신에 대한 플라톤의 경도가 몸에 대한 무조건적이고도 엄숙주의적 혐오와 거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는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데 방점이 있는 것이지 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고대의 저작가 중 유독 부부간의 사랑에 새로운 광채를 부여했던 플루타르코스(Plutarchos)가 다름 아닌 아주 열렬한 플라톤주의자였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도 단순히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향연>을 통해 드러나는 플라톤의 에로스론은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에로스는 인간을 어떤 종류의 불멸에로 인도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소크라테스를 그런 에로스의 구현체로 보여줌과 동시에 알키비아데스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진면모를 드러냄으로써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 배경에는 어떠한 삶이 살만한 삶인가하는 문제와 삶과 앎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플라톤 철학의 근본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에로스론은 ‘지혜사랑 즉 철학(philosophia)으로 이끌기 위한 권유(protr?ptikos)’에 그 근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 고통에 찬 인간상 – 작가 미상

어쨌거나 고대 그리스의 에로스는 플라톤에 이르러 관능의 옷을 벗고 정신적인 가치로 고양된다. 플라톤이 이룩한 이 에로스의 정신에로의 고양은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이룩한 “성의 해방”에 역행하는 고루하고도 반동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서양지성사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른바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헬레니즘 시대의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몸은 이미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전란의 시대에 몸이 부딪친 이러한 극한의 고통과 절망은 영육 분리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고, 파괴될 대로 파괴된 공동체에서 파편화된 개인은 부지불식간에 영혼과 정신에서나마 자기를 보존하거나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초월의 시대, 종교의 시대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인의 사랑은 헬레니즘 로마시대의 에로스를 거쳐 은총으로서의 사랑과 그 구원의 은총을 베푼 기독교적 초월신에 대한 사랑으로 넘어간다.

라게르보르크(Lagerborg)가 플라토닉 러브에 관한 그의 저작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요엘(Karl Joel)의 말을 끝으로 플라톤의 에로스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마무리하기로 하자. “플라톤은 하나의 힘, 영혼을 견인하는 힘이자 하나의 방향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유의 방향일 뿐만 아니라, 심정의 방향(Gem?tsrichtung)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도저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늘 새롭게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끝)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9)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9)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3)

횔더린의 디오티마 슈세테 곤타르트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연설 사이에는 아가톤의 연설이 놓여 있다. 아가톤은 고르기아스의 수사학적 기법을 이용하여 에로스를 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선한 신으로, 게다가 정의와 절도, 용기와 지혜까지 겸비한 신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비아냥조의 몇 마디 형식적인 칭찬을 던진 후 곧바로 그의 연설을 논파해버린다. 아가톤이 향연을 주관한 당사자이고 향연 또한 그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것을 감안하면 아가톤의 연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무시에 가까운 비판은 매우 도발적이다. 실재와 상관없이 미사여구로만 가득한 아가톤의 찬양은 이미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방식이 바로 아가톤이 그토록 따랐던 소피스트들의 방법이었다는 점은 그 모멸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연설할 차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 당혹스런 장면이 벌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연설하는 형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 그것도 디오티마(Diotima)라는 어떤 이방인 여성의 발언을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티네이아의 디오티마가 역사상의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완전히 플라톤의 창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디오티마는 이미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의 유명한 서정시인 횔더린( Friedrich H?lderlin)은 자신의 애인 슈세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t)를 디오티마라고 부르고 휘페리온(같은 이름의 소설의 주인공)의 애인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지금 에로스에 대한 지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한 명의 여성이 남성들만의 향연에 그것도 좌장격인 소크라테스를 이끄는 사람으로 등장한다는 기묘함에 직면해있다.

디오티마 상 Victor Wager 작

보통은 소크라테스가 대화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가며 대화를 이끌지만, 이곳에서는 소크라테스가 경외에 찬 눈으로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참된 인식에로 이끌린다.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의 주장을 비판한 것과 똑같이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욕구하는 이상 결코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일 수 없으며, 나아가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신과 달리 완전함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오티마는 에로스를 신적인 것과 가사적인 것 사이의 중간적 존재, 즉 위대한 신령으로 말한다. 초기 그리스어에서 신(theos)과 신령(Daim?n)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입을 통해 다이몬을 신과 인간들 사이를 이어주는 힘이자 서로 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힘으로서 아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차츰 밝혀지겠지만 디오티마가 말하는 에로스는 중간에서 결핍에 시달리며 어정쩡하게 고민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마치 연어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강을 차고 오르듯이 무지의 저항을 뚫고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향해 치열하게 스스로의 본질을 구현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존재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에로스는 존재와 무(無) 사이의 무규정적(apeiron) 현실에서 무로부터 연원하는 궤멸과 허무를 부정하고 끝없이 존재로 치닫는 치열한 자기보존적 운동성 즉 생명력인 것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정지의 형이상학으로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로스의 이러한 중간자적 성격은 <향연>에서 신화적인 우화로 표현된다. 신들이 아프로디테의 생일잔치에 모였을 때 그곳에는 늘 풍족함에 이르게 하는 계책을 가진 메티스의 아들 포로스(Poros:방도)도 있었다. 그런데 페니아(Penia:곤궁)가 그 잔치에 구걸을 하러 왔다가 넥타르를 많이 마셔 취해 있는 포로스를 발견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아가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포로스의 아이를 가지려고 그를 유혹하여 동침한다. 이 어울리지 않는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에로스이다. 자식의 됨됨이는 부모의 됨됨이를 닮는다. 곤궁의 자식인 에로스는 늘 가난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섬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피부도 거칠고 맨발에 집도 없고 늘 땅바닥에서 문가와 길섶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잔다. 그러나 이 에로스는 또 아버지를 닮아서 늘 계책을 가지고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추구하는 담차고 맹렬한 자이고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자, 사리분별을 욕망하고 전 생애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는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여기서는 말뜻 그대로 ‘지혜로운 자’의 뜻)이다.(203d) 이러한 에로스의 묘사에서 우리는 금방 아테네의 거친 현실에서 치열하게 구도자적인 삶을 산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떠올린다.

플라톤은 이제 앎을 향한 에로스의 마지막 오름길에 앞서 중간 단계를 두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그리스인의 전통적 행복관이 생식의 비유를 통해 제시된다. 행복이란 좋은 것이 잠시가 아니라 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이와 같이 좋은 것들이 늘 자신에게 있기를 욕망한다. 그러나 가사적인 인간에게 좋은 것이 늘 함께 있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에로스는 생식(genesis)을 통해 자신과 같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불사적인 것이 되기를 욕망한다. 출산이야말로 가사자인 생물 안에 들어있는 불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아름답고 좋은 것을 출산하려고 하는 한, 생식은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사이에서의 생식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육체적인 생식은 인간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생식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자신 속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자와 접촉하여 그와 사귐으로써 자기가 오랫동안 임신(남녀 불문 좋은 생각을 품은 것을 임신으로 표현하고 있다)해 온 것들을 낳아(전수 또는 교육을 의미) 그의 영혼 가운데 아름다운 생각이 잉태하게 만든다. 이러한 임신(ky?sis)과 출산(tokos)의 지고의 성취는 바로 영적인 정신적인 에로스로부터 생긴다. 예술 영역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뤼쿠르고스와 솔론은 불후의 이름을 남길 정도의 위대한 출산의 산 증인들이다.

이런 연후 디오티마는 엘레우시스의 종교적 입문과 상승을 연상시키는 비의적(秘儀的) 표현을 빌려 에로스가 추구하는 최고 목표(telos)에 이르는 단계적인 행로를 이야기한다.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듯 입문(myein)에서 최고비의(epoptika)에 이르는 이러한 에로스의 단계적 상승은 종종 <국가> 제7권의 동굴의 비유에서 혼의 등정(anodos)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적인 상승은 흥미롭게도 한 개인이 어떤 하나의 몸(soma)에 속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처럼 개인적으로 파악된 아름다움이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과 하나이자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모든 아름다운 몸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몸에 대한 열정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른다. 이에 따라 그는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귀중하다고 여기게 되어 누군가 미미한 아름다움의 꽃을 갖고 있더라도 영혼이 훌륭하다면 그러한 젊은이들을 사랑하게 되고 나아가 몸보다는 사람들의 행실과 법들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되며 다음으로 앎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오름길은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끝점에 도달하게 되면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된다. 그것이 곧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로서 단일한 앎(epist?m?)이자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다. 바로 이어지는 단일한 앎에 대한 플라톤의 부연설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이데아에 대한 가장 간명한 설명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것은 “늘 있는 것이고,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고,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아름다운데 다른 면에서 추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는 아름다운 것인데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는 추한 것도 아니며, 어떤 자들에게는 아름다운데 다른 자들에게는 추한 것이어서 여기서는 아름다운데 저기서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또한 그 아름다운 것은 그에게 어떤 얼굴이나 손이나 그 밖에 몸이 관여하는 그 어떤 것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어떤 이야기나 어떤 앎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며, 어디엔가 어떤 다른 것 안에, 이를테면 동물 안에 혹은 땅에 혹은 하늘에 혹은 다른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 자체가 그것 자체로 그것 자체만으로 늘 단일 형상으로 있는 것(monoeides aei on)이며,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다음과 같은 어떤 방식 즉 다른 것들이 생성하거나 소멸할 때 바로 저것은 조금도 많아지거나 적어지지 않으며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방식으로 바로 저것에 관여한다.”(211a-b)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이른바 플라톤이 말하는 그 절대적인 영역 이데아의 세계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끊임없는 생동력으로 무지와 타성의 저항을 뚫고 목표를 인지하고 그곳을 향해 무시무시한 힘으로 돌진해가는 에로스가 그 길을 이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곧 철학은 모름지기 에로스일 수밖에 없다. 에로스는 무지를 뚫고 모든 사물과 사태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앎을 향해 스스로를 고양시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완성하는 가장 치열하고도 진지한 열정이자 모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간 에로스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를 위해 에로스에 관한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파이드로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층구조로 이루어진 이 대화편의 상당 부분은 올바른 수사법에 관한 논의에 할애되어 있지만 그곳에는 비록 모티브는 상이하면서도 <향연>과 같이 에로스를 다루고 있는 우화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곳에서는 에로스가 무엇인가 신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어 <향연>에서의 언급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플라톤 자신 신화의 전승을 자유자재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곳에는 두 개의 모티브가 그 우화를 결정하고 있다. 즉, 그 두 개의 모티브란 하나는 종류가 다른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이며 또 하나는 날개이다. 영혼은 이전에는 어떤 신을 수행하여 천체를 왕래하면서 이 천구 주위를 영원히 돌아가는 천체의 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몸에 영혼이 들어섰음은 이미 영혼의 전락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오르페우스교 사상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영혼이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어떤 길을 취하느냐에 따라 윤회 전생하는 영혼의 운명이 결정된다. <파이드로스>에서 영혼의 형태를 비유한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 말은 이른바 ‘욕망(epithymia)’과 ‘튀모스’(thymos)이다. 튀모스는 여기서 “의지, 노력”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충동적 욕망으로서 에피튀미아는 큰 동력이지만 혼자 내버려두면 스스로나 모두에게 위험이자 장해이다. 이 난폭하게 구는 말을 길들여 궤도를 걷게 하고 마차가 이 말에 이끌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마부의 사명이다.(마부와 두 말은 <국가>편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혼의 세부분 즉 이성(to logistikon), 기개(to thymoeides), 욕구(to epithymetikon)에 각각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에 따라 마부가 영원의 것에 대한 관조(the?rein)에 이르는 정도가 결정된다. 그런데 높은 곳으로 부양시키는 날개를 생겨나게 하고 그 힘을 좌우하는 것이 곧 에로스이고 그러한 에로스의 본질이 theia mania 즉 ‘신적인 광기’이다. ( <파이드로스> 256b)인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이 신적인 광기의 형태는 다종다양하다. 예언가나 비의적인 정화의식의 집행자도, 뮤즈 여신들의 총애를 받는 시인이나 가수도 이 신적인 광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신적인 광기 중에서도 최고의 광기는 그 무엇보다도 영혼을 신적인 것에 대한 관조로 이끄는 힘, 영혼에 날개를 생겨나게 하는 광기 바로 에로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크세노폰도 한편의 <향연(symposion)>을 썼고 그 역시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에 관한 연설을 하게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향연>은 플라톤의 <향연>보다 훨씬 뒤에 쓰여 졌음이 거의 확실하다. 소크라테스와 관련한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견해 차이는 끊임없이 반복 되는 학문적 논쟁거리 중 하나이지만, 일반적으로 플라톤에 비해 크세노폰의 견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런데 하르트무트 에릅세(Hartmut Erbse)가 발표한 연구는 우리가 그처럼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크세노폰의 <향연>에 나타나는 소크라테스는 결연히 남성끼리의 육체관계를 비난하면서 에로스의 시종들(thias?tai) 중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니케라토스(Nikeratos)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 책의 끝부분의 이야기는 더욱 시사적이다. 크세노폰은 어떤 향연에서 판토마임의 배우가 디오뉘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사랑을 매우 매력적이고도 선정적으로 연기하자 그 향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향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공연에 자극받아 기혼자는 조금이라도 빨리 아내를 안고 싶어 했고 미혼의 젊은이들도 결혼하고픈 욕망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동성 간의 소년사랑을 중심으로 정신적인 에로스가 강조되고 있는 플라톤의 <향연>이나 <파이드로스>와 매우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소시민의 수준으로 까지 격하시켜 그를 소년사랑의 열광적인 비판자로 내세워 그로 하여금 부부사이 또는 이성간의 사랑을 칭송하게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위의 두 대화편이 담고 있는 ‘영혼을 이데아로 이끄는 에로스’는 플라톤이라는 대철학자의 완전히 독자적인 창조물일 뿐이고 크세노폰이 <향연>에서 그리는 소크라테스상이야말로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따라서 에릅세가 추측하듯이 크세노폰이 “플라톤에 의해서 왜곡된 스승 소크라테스의 상을 여기서 수정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해야 할 것 인가? 이러한 물음에 확실하게 답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에릅세의 견해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둘러싼 두 개의 대화편에서 정신적으로 고양된 에로스를 곧바로 소크라테스의 견해로 생각하는 것이나, 플라톤을 마치 소크라테스의 분신 같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만 묘사하는 단순 전달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나 모두 무리가 따른다. 물론 기계적인 소거법(Subtraktionsverfahren)으로 모든 것이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플라톤적인 에로스를 모두 플라톤에게 돌린다고 하면 에릅세가 추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상도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건 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모두 비록 이성애와 동성애에 상관없이 정신적 사랑을 침이 마를 정도로 강조한 것은 진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까지 기피했거나 혐오했다는 증거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스파시아 집에서 알키비아데스를 끌어내는 소크라테스 Jean-L?on G?r?me 작 (1861)

우리는 앞서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을 논의하면서 서로 모순되는 양극의 견해까지 확대하여 살핀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플라톤이 견지한 소년사랑에 대한 태도를 최대한 균형 있게 살펴 평가해보기로 하자. 관건이 되는 사항은 플라톤이 동성간의 정신적인 성격의 에로스로부터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로의 일탈을 어느 정도 관용을 가지고 보았는가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노년의 플라톤은 <법률>(636c. 835c, 842a)에서 동성 간의 성행위를 자연에 반하는 음란한 행위로 아주 명백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향연>에서는 비록 그 자신이 아닌 소크라테스와 관련한 언급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특히 마지막 부분에 가면 어느 정도 플라톤 나름의 견해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향연>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술에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향연 자리에 나타난다. 처음에 그는 소크라테스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사이에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이내 소크라테스를 발견하고 움츠려 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알키비아데스가 사랑하고 있는 동시에 영원한 스승이자 마음속의 가시처럼 두려워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연설에서는 그에 대한 사랑과 경탄이 가득 뿜어져 나온다. 이 연설은 에로스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설에 이어지는 것으로 스승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적 특징을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보기 흉한 실레노스 조각상과의 놀랄만한 비교 – 실레노스 조각상의 겉은 볼품없지만 그 안쪽에는 황금 신상이 들어 있다-가 나타나 있는 곳도 이곳이다. 게다가 그곳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그에게 온몸으로 육체적인 사랑을 구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말하길 그 밤에 이 “참으로 신령스럽고 놀라운 이분에게 두 팔을 둘렀고 그렇게 온밤을 누워 있었네….그런데 이분은 내 꽃다운 청춘을 그토록 능가했고 무시했고 비웃었으며, 그것에 관한 한은 내가 뭔가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것에 대해서조차 이분은 방자함을 부렸네…신들에게 맹세코 여신들에게 맹세코 나는 아버지나 형과 함께 잤던 때에 비해 전혀 별스럽지 않은 밤을 소크라테스 선생님과 더불어 보낸 상태에서 아침에 일어나게 되었다네”(219c,d) 이것은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남자끼리의 육체적인 사랑을 단호히 비난한 그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결코 다른 모습이 아니다. 이와 같은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은 플라톤적인 에로스의 영적 정신적인 성격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가 있다. 물론 플라톤은 소년사랑과 관련하여 비록 전체 대화편을 통해 노년기의 작품 <법률>에서 보이는 정도까지의 엄격함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파이드로스> 가운데 한 부분(256b,c)을 보면 소년사랑의 관능적 측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그곳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절도를 지켜 육체적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올림피아 레슬링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 이상의 훌륭한 승리로 칭송하고 있다.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눈에는 사회적으로 육체적 관계가 용인된 소년사랑에서 조차도 사랑하는 남자(erast?s)와 사랑받는 소년(er?menos)의 순수한 정신적인 관계만이 철학에 의해서 규정되는 생활에 어울리는 것이다.

라파엘이 그린부분화 .군복을 한 사람(왼쪽) 또는 소크라테스(오른쪽) 옆에 있는 젊은이(가운데)가 알키비아데스라고 하지만 이설도 많다.

 

(플라톤의 에로스(4)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8)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8)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2)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5-385?) 상

플라톤이 「향연」에서 그리고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한마디로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치유(iasis)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치유 받아야 할 근원적 고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들의 심판과 그에 따른 본래 모습의 상실이다. 에로스는 그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신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펼쳐지는 인류의 본래 모습에 관한 우화적 기원을 들여다보면 내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일단 아리스토파네스 특유의 희화적인 파토스(페이소스, pathos)가 – 비록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창작인지 불확실하더라도 – 흘러넘친다. 그 우화의 개요는 이렇다.

“인간들은 원래 성(性)이 셋이었다. 지금처럼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함께 가진 셋째 성이 더 있었다. 형태 또한 지금과 달리 등과 옆구리가 원형을 이룬 구형의 몸체에다 위로는 얼굴이 양쪽에 붙은 원통형 머리가, 옆으로는 두 쌍의 팔이, 아래로는 두 쌍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마치 지금의 모습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꼭 안고 하나의 몸이 된 것 같은 모습이되, 얼굴과 팔다리가 각각 반대쪽을 향해 있고 생식기가 엉덩이 쪽에 붙은 형상이었다. 이 태초의 인간들은 행동도 민첩하여 어느 쪽으로든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힘이나 활력 또한 엄청나 늘 자신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였고(phron?mata megala) 급기야 그 오만함이 도를 넘어 신들에게까지 대들게 되었다. 이에 신들이 노하여 이들을 없애 버리려고 하였으나 신들 또한 이들로부터 숭배와 제사가 필요한 만큼 아주 없앨 수도 없어, 결국 제우스의 제안에 따라 그들을 모두 반쪽으로 잘라 힘을 약하게 만들어 방종치 못하게 하되, 숫자는 늘려 신들에게 더 쓸모 있게 만들기로 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이들을 각기 둘로 나누고 자른 면을 마치 돈주머니를 졸라매듯 배 한가운데로 묶어 배꼽을 만들고 서로의 자른 면들을 보면서 더 질서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얼굴을 비틀어 돌려놓았고 팔다리도 반대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잘라진 이 반쪽 인간들은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해 서로 부둥켜안고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채 아무 것도 하려 들지 않아 급기야 굶어 죽는 일도 생기면서 서서히 멸망해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우화 속 인간의 본래 모습

그러자 제우스는 이를 가엾이 여겨 그들의 생식기를 안쪽으로 옮겨놓아 남성과 여성이 만나 한데 뒤엉킴이 일어 날 때 임신을 하게 하여 그 종족이 계속 생겨나게 하였고, 동시에 남성이 같은 남성을 만날 때도 어쨌거나 함께 함에서 오는 포만감을 느끼게 하여 막간에 한숨을 돌리고 다시 일로 돌아가 여타의 삶을 돌보게 만들었다. 이때 반쪽으로 잘라지기 이전의 남성은 해의 자손이고 여성은 땅의 자손, 두 가지 성을 모두 가진 사람은 달의 자손인 까닭에, 순수 남성반쪽이 다른 순수 남성반쪽을 그리워하는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사랑이자 그들이야말로 나중에 국가의 일에 종사할 만한 사람들로 여겨졌다(189d-192b)”

인간의 본래 모습과 지금의 인간들이 생겨난 근원에 대한 이와 같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는 지금의 인간자체가 상실과 결핍의 존재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상실과 결핍이 가져다 준 가장 심대한 고통은 자신이 반쪽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다른 나머지 반쪽과 하나로 함께 있지 못하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그래서 지금의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큰 소망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 온전함을 회복하는 것이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치유이자 가장 큰 행복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바로 이와 같은 상실과 결핍을 치유하는 능력이자 그 태생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욕망 그 자체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인간이 신들에게 경건함을 보여 줄 때 인간을 옛 본성으로 되돌려 주고 치유하여 복 받고 행복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희망이 된다.(193a, d)

다소 우스꽝스러운 우화로 시작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내용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겉으로 드러난 희화적인 측면과 달리 인간 실존에 대한 비참성과 심각성은 물론 에로스를 통해 그것을 이겨내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이야기 서두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로스를 인간에게 가장 우호적인 신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 이후의 이야기 어디에서도 에로스가 신처럼 여겨지거나 신으로 표현되는 문맥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에로스는 신들의 편에 서 있기 보다는 인간의 실존 한 가운데 자리하면서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시키는 힘이자 능력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인간의 내적 욕망자체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본래적인 것에로의 회복은 맹목적이다. 물론 반쪽의 인간은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원래의 상태는 앞에서 보았듯이 신에게 대들 정도의 오만의 상태이고 자기 보존의 효율만 있을 뿐 그 어떤 가치지향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나머지 반쪽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은 그들 모두에게 실재하는 욕망이고 제한적이고 일시적이지만 행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단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영위되는 사회공동체 생활 속에서 그들은 늘 서로의 보존을 위해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려할 것이고 그들의 그러한 열망은 사회공동체 자체의 보존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해의 자손이 남성 반쪽들의 다른 반쪽 남성에 대한 열망은 서로가 하나가 되려는 열망 중에서 가장 강한 열망이어서 사회공동체의 측면에서 가장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한 사랑으로 여겨진다. 남성반쪽과 여성반쪽의 사랑 또한 본래적인 모습을 향한 열망이기는 하나 상대적으로 저급한 사랑이며 다만 그러한 사랑의 가치는 출산을 통한 자손의 번식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반쪽끼리 결합하는 경우의 수는 여성반쪽과 다른 여성반쪽의 경우도 있으므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에는 남성 동성애와 이성애는 물론 여성들 간의 동성애도 인간의 본래적인 욕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고대 문헌에서 여성 동성애의 본래성을 인정하는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요컨대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본래 상태에서 훼손된 자신의 반쪽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pothein)이다. 밤이고 낮이고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최대한 함께 같은 곳에 있으려는 열망이자 욕망(epithymia)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헤파이스토스가 그 둘을 융합 용접시켜준다면 누구도 그것들 원하지 않을 자가 없다고 말한다. 즉 자기가 사랑하는 자와 한데 모여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인간 삶의 최대 목표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 온전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그 온전함에 대한 욕망과 추구에 붙여진 이름(tou holou oun t? epithymia kai di?ksei er?s onoma)”이다.(193a)

그러나 헤파이스토스가 그 둘을 융합 용접시킨다 해도 이미 신이 갈라놓은 그 반쪽의 상태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심판은 있지만 다시 하나가 되는 구원의 길은 없다. 굳이 구원이 있다면 에로스의 능력을 통해 둘이 부둥켜안고 하나가 된 것 같은 감정을 가지고 서로를 위로하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완전한 회복의 능력이 아니라 일시적인 치유의 능력일 뿐이다. 완전하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을 갈라놓은 신들에게만 있다.

물론 신들에게 경건한 자들의 경우 에로스의 능력을 통해 온전한 옛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실현되는 이야기는 그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은 희망은커녕 신들에게 잘못 보일 경우 다시 또 반쪽의 반쪽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두려움(phobos)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에로스는 다만 그러한 숙명적인 제약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안고 있는 원초적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고, 그러한 에로스를 통한 치유가 인간이 누려야 할 최고의 만족감이자 행복이다. 그것도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을 잘 받들고 섬기는 소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소년 사랑을 누릴 수 없는 까닭도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 역시 일정하게 고대 그리스인 특유의 비장한 운명애(amor fati)를 포함하고 있다. 심판은 있지만 구원의 길은 두절되어 있고 오히려 인간은 상존하는 공포 속에서 다만 끝없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운명적인 몸부림 그 자체를 행복으로 간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이전의 사람들의 에로스에 대한 견해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에뤽시마코스나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의 에로스처럼 우주에 편만해 있지도 않고 인간성 바깥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에로스는 오로지 원래 하나였던 나머지 반쪽에 대한 사랑이자 인간성 내부에 자리한 본원적인 열망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주에 대한 사랑도 인간일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한 인간, 구체적인 나머지 반쪽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원천적으로 덕과 윤리와 무관하다.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좋은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리고 파우사니아스나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처럼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로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오로지 그것이 잘났건 못났건, 성품이 좋건 나쁘건, 소양을 갖추었건 갖추지 않았건 자신의 나머지 반쪽에 대한 열렬한 그리움이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 1

이렇듯 에로스는 동성애이건 이성애이건 모든 형태의 반쪽에 대한 열렬한 사랑 모두에 관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에서 이성애건 동성애건 간에 성적 결합 또는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부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저 남성반쪽과 여성반쪽이 하나가 되려는 욕망에 한데 뒤엉키면서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생식이고 성적 결합이다. 그 조차도 부둥켜안고 떨어져 있지 않아 종의 보존이 어렵게 되자 신들이 생식기를 안쪽으로 돌려놓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적 결합자체는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의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남성 동성애 즉 소년 사랑의 우월성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관계가 반드시 성적 열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견해는 소년 사랑이 가지고 있는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어떠한 가치지향과도 상관없이 무조건 처음의 온전한 본성에 따라 끊임없이 함께 같이 있으려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이드로스나 파우사니아스처럼 에로스가 덕과 좋은 것의 원인이어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다른 반쪽을 찾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온전한 본성을 찾는 것이자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과 차이를 예고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이 좋은 이유는 본래의 자기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본래의 자기상태가 나쁜 것이라면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나쁜 것이라고 여긴다. 본래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끝난 후 뭔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알키비아데스가 들어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211c) 아마도 아리스토파네스는 본래의 자기이기 때문에 돌아갈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온전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좋다고 말한 그 온전한 상태란 반쪽이 되기 이전의 상태로서 이미 앞에서도 살폈듯이 신에 대해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 온전하지도 좋은 상태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역시 결코 행복한 상태일 수 없다. 그것은 또다시 반쪽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애초 상태로의 복귀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가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과거 회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예전의 반쪽을 찾아서 같은 자리에 머물려는 열망, 다시 말해 본래의 태생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생물학적 본능일 뿐이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감각적 충동을 이겨내고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늘 단일형상인 것”(monoeides aei on, 211b) 그 자체를 향해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열망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가 에로스를 목표를 향한 격렬한 욕구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소크라테스와 일맥상통한다. 사실 파우사니아스와 파이드로스,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에는 격렬함 보다는 덕과 조화가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비록 처음에는 신으로 나오지만, 인간적 욕구의 형태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본래적인 온전함에로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부여하려는 열망이라는 점에서 실제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점 역시 에로스를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 ‘신령’(daimon, 202e)으로 상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에는 앞에서 연설한 사람들의 에로스에 대한 견해가 비판적으로 일정부분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 2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와 비교해서는 결정적으로 그 격렬한 욕구가 지향하는 목표가 정반대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러한 유사점은 그들의 에로스론이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음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대칭축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마치 거울상이 언뜻 실상과 모든 면에서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대칭면을 통해 모든 것이 정반대인 것과 같다.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은 비록 로고스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질서와 조화, 신에 대한 경건함, 단일형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폴론(Apoll?n)적이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오로지 본래적인 모습을 향한 본능적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몸부림이 덕과 진리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만의 고유하고도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다른 반쪽을 향한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디오뉘소스(Dionysos)적인 성격을 갖는다. 고대 그리스 고전학에 밝았던 니체(F. Nietzsche)가 「향연」을 탐독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니체 또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을 음미하면서 분명 인간의 태생적인 운명애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마치 유전자처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살아있다. 불같은 욕정에 휩싸인 청춘기의 관능적 사랑에서부터 따사로운 동반의 정을 나누는 노년기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공통으로 흐르고 있는 에로스는 여전히 “할 수 있는 한 많이 서로와 같은 곳에 있기”(192d)를 바라거나 그러한 짝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다. 마치 그것이 최선의 구원이자 행복인 양 여기면서.

(다음에 “플라톤의 에로스(3)”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7)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7)

글: 이정호 교수(방송통신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1)

플라톤고대 그리스에서 소년 사랑이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에로스가 개인들의 사적 영역을 넘어서 정치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소년 사랑은 분명 전사 공동체로서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엘리트 그룹들의 내적 연대와 자기 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공동체의 보존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소년 사랑을 구성하는 관능적 요소들과 정신적인 요소들 사이의 긴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 귀족사회가 붕괴되면서 서서히 와해되었고 아테네 민주정하에서 더욱 통속화되었다.

플라톤(기원전 429-347)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은 이러한 시대적 국면에서 소년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에로스의 관능적 측면을 비판하고 에로스를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즉 철학으로 승화시키려는 플라톤의 고뇌어린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늘 그러하듯이 자기 생각을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에로스에 대한 논의들을 먼저 제시하게 한 후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펼치는 형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간다. 다만 「향연」은 형식면에서는 다소 특이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약간의 도입부 대화를 거쳐 바로 해당 주제에 대해 다른 대화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유독 이 대화편에서는 옛날에 대화를 들었던 사람이 훗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다소 복잡한 이야기 전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 영화에서 창틀을 끼어 과거 시점을 현재와 병존시키는 기법과 유사한데, 플라톤이 도입부를 왜 그와 같이 복잡하게 설정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향연」에서 종국적으로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에로스의 비의적(秘儀的)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포석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죽은 후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와의 관계에 대해 세간에 퍼져있는 오해를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켜 그의 입을 통해 불식시키고,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진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작품 구성상의 기법이라고도 해석한다.

플라톤의 「향연」파퓌로스 필사본 일부

「향연」은 플라톤의 첫 번째 시켈리아 여행(기원전 390년)과 두 번째 여행(기원전 366년경)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향연」의 작품상 설정 연대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이다.「향연」은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아가톤(Agath?n)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참석자들이 벌인 에로스에 관한 연설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경연이 있었던 레나이아(l?naia) 축제가 기록상 기원전 416년에 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향연 즉 심포지온은 우리나라 옛날 양반들이 모여 술을 나누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귀족남성들이 모여 경연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놀았던 일종의 특권층의 오락모임이자 술자리였다. 그런데 이날은 모두가 전날의 축제에서 이미 통음을 하였던 까닭에 술자리 보다는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하자고 모두 동의하고 통상 자리를 같이 하던 피리 부는 소녀들과 여인들까지 물리친다. 이처럼 「향연」에서의 향연(symposion : ‘drinking together’의 의미)은 처음부터 ‘술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말(logos)을 나누는 자리’로 규정되고 각자가 펼칠 연설의 주제 또한 에뤽시마코스(Eryximachos)의 제안에 따라 에로스에 대한 찬미로 정해지고, 연설의 순서 또한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른쪽 순으로 펼치기로 합의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은 에로스에 관한 일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을 한다.(177d) 이 부분도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知)’를 늘 강조해 왔는데 이 부분에서는 에로스에 대해서만은 잘 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도입부에서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에 관한 이야기의 최종 청취자로서 일반대중을 상정하였듯이, 사랑에 대해서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함께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에로스가 어떤 지식 내지 결론적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열망자체’라는 점에서 그렇게 발언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도기 그림)

이렇게 해서 에로스에 대한 찬미 연설이 시작되고 파이드로스(Phaidros)가 그 첫 번째 주자로 나선다. 그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탄생(Theogonia)」을 인용하여 에로스를 태초의 신들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신으로 내세우면서, 에로스가 가장 좋은 것들의 원인이므로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소년 사랑이다. 그러면 소년사랑이 가장 좋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추한 것을 멀리하고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치심에 대한 민감함과 명예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없이는 국가든 개인이든 크고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없다. 요컨대 소년 사랑은 추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덕과 명예를 추구하게 하여 나라를 위해 전투에 나가서도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우게 만든다. 파이드로스는 여기서 소년 사랑이 결국 나라를 잘 운영하는 방법 및 전투수행능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178e)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파이드로스는 이 부분에서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를 인용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앞에서 살핀 테바이 신성부대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실제로 테바이 신성부대의 창설은 이 향연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파이드로스의 에로스에 대한 연설은 전사 공동체 사회에서 소년 사랑에 대해 기존에 확립된 교육적 동성애의 전통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러나 파이드로스의 연설은 다소 상투적이고 소년 사랑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사례들도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한 알케스티스(Aik?stis)의 경우는 이성애 관계이고, 아킬레우스의 경우(아이스퀼로스에서는 아킬레우스가 에라스테스로 나온다)도 에로메노스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비록 신이 마음에 들어 할 정도로 더 소중한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에로스를 품는 자, 즉 에라스테스의 경우는 아니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일반적인 견해와 동떨어져 있다. 이처럼 파이드로스의 에로스론은 기성의 상식을 대변하지만 대부분의 상식이 그러하듯 근거가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늘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무턱대고 끌어들인다.

그 다음 연설자로 나오는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소년 사랑의 이중성을 간과한 채 기성의 관점에서 단순히 찬사만 늘어놓는 파이드로스의 연설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에로스에는 범속의 에로스(pand?mos eros)와 천상의 에로스(ouranios eros)가 있는데 이 중 전자는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고 영혼(psych?)보다 몸(s?ma)을 사랑하며 그저 ‘일을 치러내는 것'(exergazesthai : 이 문맥(181b)에서는 성행위를 뜻함)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출생이 제우스와 디오네(Di?n?)의 딸인지라 저급한 이성애도 추구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소년 사랑이 종래의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전통에서 벗어나 성적 충동이 이끄는 대로 이성애건 동성애건 닥치는 대로 애정행각을 벌이는 타락한 현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역시 교육적 동성애로서 소년 사랑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천상의 에로스란 단순히 소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nous)을 갖기 시작할 때의 소년을 사랑하며 늘 덕(aret?)으로 이끄는 사랑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천상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에라스테스에게 소년이 살갑게 대하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에라스테스가 아름다운 소년 애인을 취하려고 벌이는 그 어떤 행위도 그것이 설령 노예노릇처럼 비쳐질지라도 결코 추한 것이 아니며, 소년이 최대한 훌륭한 에라스테스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끌며 그들을 시험하고 경쟁시키는 것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오히려 무능한 나라 또는 참주정(tyrannis) 치하에 있는 나라일수록 이러한 일들을 추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년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기게 될 대단한 생각(pronemata megala : 높은 사리분별력)과 강력한 친애 및 연대감을 참주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이곳에서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사례를 인용한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이러한 천상의 에로스가 아닌 범속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돈이나 권력으로 소년 사랑을 구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소년들의 부모들도 아이들을 감독할 보호자를 두어 어른들과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급기야 소년 사랑이 공공연히 추한 일로 비난받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므로 소년 사랑의 전통이 제자리를 잡아 소년 애인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살갑게 대하는 일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게 하려면 이제 소년 사랑에 관한 법(nomos)과 지혜 사랑(phiosophia) 및 다른 덕에 관한 법이 같은 곳에서 함께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184d) 그렇게 될 때에만 에라스테스는 에로메노스를 위해 사리분별 및 기타의 덕을 가르칠 수가 있고, 에로메노스는 에라스테스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통해 지혜를 습득할 수 있으며 동시에 에로메노스가 에라스테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charizesthai : 신체적 애무를 포함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파우사니아스의 연설에는 파이드로스가 간과하고 있는 아테네 사회에서의 소년 사랑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천상의 에로스에 대한 찬미를 통해 소년 사랑의 정신적 측면을 현실적으로 되살려 보려는 각고의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역시 파이드로스와 마찬가지로 소년 사랑에 수반하는 육체적 관계를 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살갑게 대하는 것은 이상적인 여러 가지 동기들과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으로 찬양하고 있다.

세 번째 연설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s) 차례지만 그가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에뤽시마코스가 대신 나선다. 에뤽시마코스 역시 파우사니아스처럼 에로스를 둘로 구분한다. 그러나 앞의 연설자들처럼 에로스가 사람들의 영혼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에로스는 모든 동물과 땅에서 자라는 것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다 있는 것이다.(186a) 이처럼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를 우주적 에로스로 확장시킨다. 인간이건 우주 자연이건 어디에나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가 있으며, 그에 따라 좋은 에로스가 사랑하는 것과 나쁜 에로스가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다. 좋은 에로스가 하는 일은 적대적인 것들을 조화시키는 것이고 나쁜 에로스는 그것들을 부조화시켜 더욱 적대적으로 만든다. 좋은 에로스가 하는 일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마치 활(toxon:현악기를 켜는 활)과 뤼라가 서로 부딪치면서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의술은 몸의 조화를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epist?m?)이고, 시가술(mousik?)은 음의 조화와 리듬을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고 천문학은 계절의 조화를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다. 그리고 예언술(mantik?)은 신들과 인간들의 친애를 만들어 내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다.(186c-188d) 이처럼 에뤽시마코스에게서 에로스는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내적인 조화를 관장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기술(techn?)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습득해야할 자연학적 원리의 성격을 갖는 에로스이다. 에뤽시마코스는 이러한 에로스야 말로 ‘절제와 정의’(앞뒤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생뚱맞게 인용되어 있다)로써 일을 이루어내는 에로스이고 우리에게 신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일체의 행복을 마련해주는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188d)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의 에로스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 사이에 강한 친애(philia)와 연대(koinonia)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명예(tim?)와 덕에로 이끄는 정서적 성격의 힘이라고 한다면,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는 마치 동양 유가의 도(道)와 성(誠)을 연상시키듯 우주 자연으로까지 확장된 우주론적 에로스로서 대립된 힘들로 구성된 일체의 것들을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로 이끄는 원리적 성격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들 모두의 주장은 향연의 전체내용을 이끌고 가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창작된 것으로서, 당대 지식인들의 에로스론에 대한 플라톤 나름의 평가를 반영하면서 장차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통해 표명될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구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상의 세 사람의 연설이 끝난 후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이어진다. 그런데 플라톤이 아리스토파네스를 「향연」의 등장인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그는 기원전 423년에 상연된 「구름(nephel?)」이라는 희극에서 소크라테스를 우스꽝스러운 사기꾼으로 조롱했던 사람이다.(218-226) 그래서 플라톤은「변명(Apologia)」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의 그러한 짓이야말로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19c)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아리스토파네스를 「향연」의 연설자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일단 겉으로 보면 플라톤은 마치 역사적 아리스토파네스를 그대로 옮겨 놓기라도 하듯이 우화를 인용하며 이끌어가는 아리스토파네스 고유의 익살과 페이소스를 실감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들어가면 그의 연설은 에로스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 안티테제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아마도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을 비판의 표적이자 반동의 디딤판으로 삼아「향연」의 절정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연설을 통해, 다시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넘보거나 능멸하지 못할 정도로, 에로스를 저 빛나는 정신의 세계로 하늘 높이 도약시키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에로스란 무엇이었을까?

(다음에 “플라톤의 에로스(2)”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6)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6)

글: 이정호 교수(방송통신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3. 고대 그리스인의 동성애 – 소년 사랑(2)

부상을 당한 파트로클로스(수염이 난 사람)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아킬레우스. 여기서는 플라톤의「향연」에서 파이드로스가 지적한 것처럼 파트로클로스가 에라스테스로 그려지고 있다.(트로이아 지방에서 발굴된 도기 그림)

기묘하게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소년사랑을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이 소년사랑으로 비쳐지는 것도 후대 작가들이 그렇게 다시 그렸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작품에 소년사랑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든다. 호메로스 시대에는 소년사랑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럴 경우 우리는 소년사랑이 호메로스 이후에 아주 폭발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당시의 생활상을 다 그리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표현기법의 측면에서도 두리 뭉실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그 최종적인 형태를 드러낸 것이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인 것을 고려한다면 소년사랑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플라톤의 「향연」(182D)을 보면 연설에 참여한 파우사니아스가 엘리스 지방과 보이오티아 지방에서는 소년사랑에 대해 너그럽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이오니아 지방에서는 그것을 추한 일로 받아들여졌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제도상으로는 스파르타가 지배하고 있었던 펠로폰네소스의 도리스 지방에서 소년사랑이 유래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조각상(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한편, 소년사랑으로 고양된 뜨거운 열정이 참주를 타도하는 영웅적인 기개로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 「사랑에 관해서(Erotikos)」라는 책을 쓴 폰토스의 헤라클레이데스(Herakleides ; 기원전 4세기의 플라톤-피타고라스학파 철학자)는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 가장 유명한 사람들로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가문 출신 참주 힙파르코스(Hippparchos)를 살해한 하르모디오스(Harmodios)와 아리스토게이톤(Aristogeiton)을 들고 있다.(헤로도토스「역사(Historiae)」5·55 이하를 참조).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기념해 조각상도 만들었고 향연이 베풀어질 때면 종종 그들의 행위가 정치적 해방을 가져다 준 영웅적 행위로 찬미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투퀴디데스 -그는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통치에 대해 일부 호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는 그것을 순전히 사사로운 연애사건으로만(dia er?tik?n xyntychian) 적고 있다. 아리스토게이톤은 연하의 하르모디오스의 에라스테스 즉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참주 힙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를 열렬히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리스토게이톤은 결국 그가 권세를 이용해 자기의 애인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여겨 힙파르코스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6·54)

또, 헤라클레이데스는 앞서 말한 책에서 위와 같은 영웅적인 태도의 예를 하나 더 들고 있다. 카리톤(Chariton)은 참주 팔라리스(Phalaris)가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 멜라닙포스(Melanippos)에게 가한 모욕에 분노하여 보복을 시도 한다. 그러나 보복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카리톤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의연하게 연인 멜라닙포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멜라닙포스는 카리톤을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자신이 그의 에로메노스임을 털어놓는다. 참주는 이러한 멜라닙포스의 행동에 크게 감동하여 두 사람 모두를 사면해준다. 에로스에 의해 고양된 사랑과 우정의 연대감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은 이 밖에도 부지기수이다. 그야말로 어느 시대이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amor vincit omnia).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의 계보를 더듬어 가면, 영웅적인 것뿐만 아니라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리스 안내기(Peri?g?sis t?s Hellados)」를 쓴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의 입구에 세워진 에로스의 제단 비석글 하나를 전해주고 있다.(1·30·1). 아테네의 거류외인(metoikos)이었던 티마고라스(Timagoras)는 멜레스(Meles)라는 소년을 너무 사랑했지만, 티마고라스는 멜레스에게 사랑을 얻지 못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었을 때, 멜레스는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절벽에 뛰어내릴 수도 있어요?”라고 물었다. 티마고라스는 그 말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멜레스는 그것에 몹시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워 있다가 얼마 후 자신도 그 절벽으로 가 몸을 던졌다.

물론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양태들 속에는 부드러운 울림도 있다. 우선 기원전 5세기경에 앗티카 지방에서는 디오뉘소스 축제의 행렬에서 미소년들에게 바쳐질 상아로 된 하프가 되고 싶다고 하는 어떤 한 남자의 노래가 향연자리에서 많이 불려 졌다고 한다. 물론 이 노래의 둘째 절에서는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여인이 몸에 걸치는 순금의 액세서리가 되고 싶다는 내용도 이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팔라틴 선집(Athologia Phalatina)」에는 플라톤의 시 몇 편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거의 위작임이 분명하고, 다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3, 29-32)가 아리스팁포스(Aristippos)의 저작에서 인용하고 있는 8편의 시는 진위여부를 두고 문헌학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어 왔다. 그 가운데에는 플라톤이 친구 디온(Dion)을 추억하며 “아, 나의 마음을 사랑으로 미치게 만든(ekm?nas) 디온이여”라고 노래한 구절이 들어 있다. 물론 플라톤이 동성애를 비난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디온의 관계를 억측할 필요는 없겠지만 당시 유명 인물들을 비방하기로 이름 난 아리스팁포스(철학자 아리스팁포스는 아니다)로서는 아마 우리의 생각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인용한 시들 가운데에는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내용을 담은 6편이 포함되어 있고 그곳에는 소크라테스 주변 사람들의 이름도 눈에 띤다. 이 시들은 많은 논쟁 끝에 문헌학적인 측면에서 발터 루드비히(Walther Ludwig)의 주장이 제기된 이후 위작 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연구 결과 때문에 그 시들을 읽는 기쁨까지 손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상냥함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별을 쳐다보는 너야말로 나의 별

아, 넓은 밤하늘이라도

되고 싶구나. 그 수많은 눈으로

너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앞에서 말한 「팔라틴 선집」에 실린 이른바 플라톤의 시들에도 비록 여인을 향해 경박하게 쓰인 것이긴 하지만 위와 비슷한 구도를 담은 시가 실려 있다.(5·83과 84)

 

아, 산들바람이라도 되었으면.

그대가 햇살을 받으며 걸을 때

그대는 바람이 되어 날리는 나를

부드럽게 가슴에 맞아 줄 테니까

아, 진홍색 장미라도 되었으면.

그대의 손이 나를 꺾어

그대의 눈 같은 젖가슴에

소중한 보석처럼 끼어 놓을 테니까

 

또, 장난스런 사랑을 노래하는 「아나크레온풍 시선집(Anacreonteen)」 가운데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끊임없이 자기에게 눈길을 주도록 그녀의 거울이 되고 싶다고 노래하는 한 남자의 시도 실려 있다.(22·5).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도기 그림)

지금까지 우리는 소년사랑에 대해 소년사랑이 드러내는 다양한 양태들 중에서 다소 대비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수많은 양태를 가진 소년사랑들 각각에 대해 도덕적 가치를 논한다거나 어디까지가 육체적인 탐닉이고 어디까지가 정신적인 사랑인지를 구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군사 공동체 내에서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헌신과 교육의 측면은 그 구별 자체를 더욱 애매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 크레타섬은 소년사랑의 풍속의 발상지로서의 명성을 엘리스 지방과 분담하고 있었는데 스트라본(Strabon)은 다음과 같은 기묘한 크레타의 풍습을 전하고 있다(「지리지(Geographica)」10·483). 사랑하는 사람, 즉 에라스테스는 주변 사람들의 승인을 얻어 젊은 소년 에로메노스를 유괴한 다음 서로 2개월간의 집단생활을 보낸 후, 소년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갑옷 한 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소년 사랑이 주로 군사교육의 수단이었음을 명시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스파르타와는 달리 크레타의 소년사랑에 관해서는 별 증거가 없어 추측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풍속의 기원이 군사·전쟁 지향의 사회에서 있었던 것임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때 크레타 섬에서 동성애가 인구과잉 억제책으로 법제화된 적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정치학」2·1272a).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들 끼리 긴밀하게 묶여진 이른바 “테바이의 신성 부대”(hieros Lochos t?n Th?b?n)는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 점을 증언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무장한 한 쌍의 테바이 신성부대 병사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 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에게 운명적인 패배를 당했을 때도, 펠로피다스(Pelopidas)가 인솔하는 이 “신성 부대”가 전투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338년 그리스가 존망을 걸고 싸운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도 그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전투가 끝난 다음에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2세가 전장을 시찰하면서 신성부대 150쌍의 병사 300명 모두가 서로 꼭 안고 죽어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해 하는 장면을 전하고 있다. (「펠로피다스」183) 마케도니아왕은 그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들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다거나 혹은 당했다고 잘못 추측하는 자들은 반드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플루타르코스는 이들에 대한 보고를 통해 테바이 신성부대의 순결성을 부각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생존 중에도 아무런 수치스러운 일 없이 순결한 사랑만을 나누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이외의 고대의 저작가들이 보이오티아 지방에 도착해서 전하고 있는 다른 증언들을 보면 그들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관능적 쾌락이 넘실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 동성애 부대에 붙여진 “신성한(hieros)”이라는 형용사는 그 자체로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애매하고도 복잡한 특성을 보여주는 매우 함축적인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사이에 어떠한 성적인 색조도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관계를 육체적 사랑까지 수반하는 연인 사이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 역시 신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스퀼로스가 쓴 「뮈르미돈 사람(Myrmidones)」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열렬한 에라스테스로 등장한다. 플라톤의 「향연」(180A)에서 파이드로스는 아이스퀼로스가 그들의 진짜 관계 (즉, 파트로클로스가 에라스테스, 아킬레우스가 소년 에로메노스)를 뒤바꾸어 놓았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아이스퀼로스는 그 작품 가운데 한 장면에서 아킬레우스가 쓰러진 파트로클로스를 끌어안고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한탄하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그리고 잇다.(135 f. N. 228 f. M.)

 

그대는 허벅지의 맑고 깨끗한 성역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구나.

수천 번 입맞춤을 했거늘 아무런 은혜도 모르는 너.

 

또,

여기서 함께 숙영한 것이랑

나와 하나가 된 그 경건한 허벅지를

 

보다시피 아이스퀼로스는 호메로스와 달리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사랑을 아주 농밀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아이스퀼로스는 흥미롭게도 그 농밀한 사랑을 표현하는 문맥에서 마치 훗날 신성부대에 붙여질 수식어를 미리 준비라도 해주듯이 매우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어휘를 끌어 들이고 있다. 이를테면 우선 첫 번째 인용 단편에서는 허벅지를 설명하는 sebas hagnon이 눈에 띤다. sebas는 외경의 대상을 가리키지만, 이 명사는 자주 종교적인 영역에서 hieros와 함께 바야흐로 “외경스러움”, “신성함“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순수한, 맑고 깨끗한, 성스러운“을 의미하는 hagnon이라는 형용사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동시대의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Hippolytos)」(1003)에서도 그런 용례가 나온다. 그곳에서 힙폴뤼토스는 더럽혀지지 않은 자신의 몸(demas)을 사랑(관능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난 hagnon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또, 둘째 단편에서도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허벅지와 하나된 것(homilia)을 경건하다(eusebes)고 표현하고 있다. 이때 eusebes라는 말의 의미는 sebas라는 명사와 친족 관계에 있는 말로서 신성한 것에 대한 외경심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면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나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406)는 왜 육체적 관계를 동반하는 동성 사이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 해답을 바로 그들의 뒷시대를 살았던 플라톤(기원전 428-348)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향연」을 읽다보면 초반에는 소년 사랑을 중심으로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이내 에로스가 성적 열망을 넘어서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점차 진리를 추구하는 고양된 정신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스퀼로스는 당대의 소년 사랑을 노래하면서 이미 소년사랑 속에 들어 있는 그러한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한편으로 그것을 훨씬 넘어선 플라톤적인 에로스에로의 승화를 꿈꾸었던 것일까? 아무려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이제 플라톤의 에로스론,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에 다가서게 된다.

(다음에 “4. 플라톤의 에로스”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5)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5)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3. 고대 그리스인의 동성애 ? 소년사랑(1)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보통 동성애를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동성애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동성애와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동성애는 성인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의 사랑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는 주로 어른 남자와 소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형태의 동성애는 개념적으로 당시에 불려 졌던 그대로 소년사랑(paiderastia)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러한 양태의 동성애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추행에 해당하는 아주 혐오스러운 것으로 비쳐지겠지만 고대 그리스 사회 특히 귀족들의 생활 속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일상적인 현상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소년사랑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도시국가들 전체에서 그리고 전 시대에 걸쳐 하나같이 존재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소년사랑은 그리스의 초기 정착사가 보여주듯이 가장 강력했던 전시 동원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스파르타에서 늘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남성 중심의 집단생활 속에서 남성들 간의 명예를 얻기 위한 경쟁적 욕구, 공동생활을 통해 드러나는 남성들 간의 교감 등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였을 것이고 그 후 점차 아테네 등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은 성인 귀족들의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정과 맞물리면서 특이하게도 발생 당시부터 일단 겉으로는 전시를 대비한 교육적 동성애의 면모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 또한 기본적으로 쌍방 간에 욕정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었다. 나이든 성인 남자가 주도권을 쥐고 교육을 수반한 덕과 사랑을 베풀고 그에 따른 성적 쾌락을 얻으며, 젊은 소년은 나이든 쪽의 경험과 덕을 배우고 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에 따른 ‘호의에 찬 친분’(philia)과 후원을 얻는 것이 통상적인 소년사랑의 양태였다. 그래서 그들을 부를 때 나이든 쪽은 “사랑하는 자, 에라스테스(erast?s)”라고 부르고 소년은 “사랑받는 자, 에로메노스(er?menos) 또는 파이디카(paidika)”라고 불렀다.

서로 입을 맞추고 있는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 (도기그림,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렇게 그들의 관계는 뚜렷한 구별이 있었다. 요컨대 사랑을 하는 건 나이든 성인 남성 쪽이다. 이처럼 “능동적인 성역할과 수동적인 성역할” 간의 구별은 성에 관한 고대 그리스적 사고의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한시적인 것이었으며 이런 한시적인 관계가 끝난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이성애로 진전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가 갖는 이러한 고유한 특징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를 하면서 이성애를 병행하는 것 또한 이상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동성애는 용맹한 전사로서의 항시적인 젊음을 꿈꾸는 에라스테스의 열망과 성인 어른의 경험과 덕망을 배워 훌륭한 전사로서 성장하기를 원하는 어린 에로메노스의 욕구가 결합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메노스의 젊음이 종결되는 시기 즉 수염이 나는 시기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관계는 종결되고, 성인 남자는 이성애로 진행하고 소년은 성장하면서 점차 또 다른 에라스테스가 된다. 소년에 대해 사랑하는 쪽은 30-40세 의 성인어른으로서 여성과 결혼한 기혼자 일 수도 있고 나중에 결혼할 수도 있다. 소년이 수염이 난 후에도 동성애를 지속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에 나오는 파우사니아스와 아가톤 처럼 평생을 두고 동성애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오히려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현대와는 달리 고전기 그리스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혼과 그에 따른 결혼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전시동원체제인 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성들과 엄격하게 분리된 생활을 해왔고 혼기에 이르면 순전히 부모들이 정해준 14세 정도의 어린 여성과 결혼을 했으며, 결혼 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리는 엄격하게 유지되고 활동 공간 또한 나뉘어져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결혼한 부부로서의 행복한 생활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결혼한 여성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출산과 가사,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기본적인 임무였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연유로 고전기 고대 그리스에서 ‘낭만적 사랑’은 자유인 신분의 성인 남자들과 정부(情婦 hetaira)들 간에, 또는 그들의 남자 상대자들 간에(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른바 사랑에 대한 감정은 자유인 신분의 남자들 사이의 동성애, 즉 성인 어른과 소년 사이의 동성애 관계에서 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도 일반인 모두에게 허용된 것은 아니었고 명예로운 전사로서 성장해가길 욕망하는 일부 귀족 계층에 국한된 것으로서 이른바 그들만의 성(性)의 고급 영역이었다. 남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전사로서 성장해야한다는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환경적 조건에 따라 남성들 간의 성애가 더욱 조장되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알몸으로 이루어지는 김나지움에서의 레슬링은 빛나는 젊음들끼리 육체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서로 접촉하는 대표적인 귀족 남성들의 특권적 경기이자 훈련과정이었다. 게다가「향연」에서 보여지듯 남성들만의 심포지온 자리에서 술을 나누며 교유하고 토론하는 것 또한 그러한 훌륭한 전사이자 책임 있는 귀족으로서 커가길 욕구하는 그들만의 상호 교육과정이자 동시에 그들만의 특권적 오락이었다. 요컨대 고전기 아테네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경기, 전투, 정치, 철학, 수사술과 같은 높은 신분의 활동들은 자유인 신분의 남성들의 특권이자 의무로서 오로지 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물론 여성 특유의 활동들이 지니는 가치가 때때로 인정되기는 했지만, ‘덕(aret?)’과 ‘행복(eudaimonia)’에 대한 고대 그리스적인 개념은 남성들의 이러한 고급 활동들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그런 활동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 간의 성적 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나아가 휼륭한 전사가 되기 위한 기본과정으로 합리화되는 기본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향연」에서 일부 연설가들은 소년사랑과 ‘덕’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적인 취향이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 대중일반에게도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나타나듯이 소년사랑의 문란상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었고 그에 대한 비판과 법적인 통제 장치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가 말하는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의 구분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기원전 4세기 마침내 고대 그리스 사회가 종말을 고하게 되면서 이러한 소년사랑의 관습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지만,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에 대한 관심이나 그것을 다루는 글들은 장르에 관계없이 그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내용 또한 도덕적인 분노를 표명한 것으로부터 혹은 비정상인 호기심이나 그 탐미적인 아름다움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는 것까지 천차만별한 양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에 대해 어떤 관심과 시선을 갖든 간에 아래의 두 가지 사실만은 누구나 다 하나같이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소년사랑은 그리스인의 생활, 특히 귀족들의 생활에서 상당한 정도까지 퍼져 있었던 일상적 현상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소년사랑 역시 아주 추악할 정도로 타락한 형태로부터,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소년사랑의 모습을 포함하여 대단히 고상하고 순수한 정신적 관계를 갖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소년사랑에 대한 그와 같은 다양한 양태들 중 일부를 관련 고전들을 통해 간략히 일별해보기로 하자.

우선, 비록 극의 내용이긴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새(Ornithes)」의 한 장면은 아테네 사람들이 소년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상적 의식의 한 단면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에우엘피데스(Euelpides)는 사람들이 안락하게 살고 있고, 소년사랑 또한 매우 번성해 있는 게으름뱅이들의 천국을 몽상하고 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소년을 아들로 둔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이 한 성인 귀족에 의해 사랑의 상대로 선택되지 않은 것에 모욕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비난을 퍼붓는 장면이 나온다.(139-142).

그래? 스틸보니데스, 너 참 잘 났다.
내 아들이 목욕을 하고 나서 김나지온을 나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인사도, 입맞춤도, 어디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고,
한번 안아주지도 않는군. 당신 참 고루한 친구시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플라톤의 「법률」제1권(636C)을 보면 관능적인 소년사랑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플라톤의 비난 섞인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연로한 플라톤은 등장인물 ‘아테네인’의 입을 통해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 사이의 사랑 일체를 ‘자연에 어긋난’(para physin)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미소년 가뉘메데스(Ganym?d?s : 트로이아 트로스왕의 미남 아들인 가뉘메데스는 그 미모 때문에 올륌포스로 납치되어 제우스에게 술을 따르는 작부(酌夫: oinokheus)가 되었다. 호메로스 「일리아스」20. 231-5 참고)를 인용하면서 크레타인들이 동성 간의 성적 쾌락을 공공연하게 비호하기 위해 마치 제우스가 소년 사랑이나 한 것처럼 그를 끌어 들이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하긴 테오그니스(Theognis)가 편찬한 책에 포함되어 있는 짧은 비가(elegeia) (1345-50)를 보면 그것을 쓴 작가 자신 스스로 소년사랑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크레타인들 처럼 자신의 경우를 아름다운 가뉘메데스를 납치한 제우스를 들어 미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전설적인 입법자 뤼크루고스(Lykurgos)가 정한 스파르타 법률에 대한 보고들은 소년사랑과 관련한 아주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스파르타의 법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소년을 육성할 책임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고대의 저작가들은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제도적 성격 때문에 소년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관능적 측면을 어떻게든 배제시키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어 크세노폰(Xenophon)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 사이에서 관능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과 혹은 형제들끼리 서로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고 단언하고 있다(「라케다이몬의 정치체제(de rep. Laced.)」2· 13).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는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소년사랑에 대한 규정을 어기고 잘못을 범한 자는 일생 동안 공적인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뤼크루고스의 생애」17 이하, 「라케다이몬의 정치체제」7). 후대의 소피스트로서 플라톤주의자인 튀로스(Tyros)의 막시모스(Maximos : 기원후 2세기)는 이것을 한층 더 이상화하여 스파르타의 남성은 단지 미소년을 아름다운 조각을 사랑하듯이 사랑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스파르타의 법률이나 그에 대한 견해들이 소년사랑에 대한 실제 행태들과 크게 달랐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소년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규정에 따라 도덕적인 절제를 보여주고 있는 사례들 또한 발견된다. 스파르타왕 아게실라오스(Agesilaos)는 스피트리다테스(Spithridates)의 아름다운 젊은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 소년이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에게 키스 하려고 했을 때 소년을 밀쳐 냈고, 어떻게든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소년과 단둘이 있는 경우를 극력 피했다.(크세노폰 「아게실라오스」5·4) 그런가 하면 자기가 에라스테스로 받아들이지 않은 자가 설사 권력자일지라도 그에 대한 신체적 봉사를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한 어느 미소년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의 생애」24) 용병 대장 데메트리오스(Demetrios)는 아테네에 머물면서 마치 폭군이나 된 것처럼 창녀나 소년들을 강제로 불러들여 무질서한 성적 쾌락에 빠져 있었다. 그는 데모클레스(Demokles)라는 미소년에게도 욕망을 느껴 사랑을 구했지만 데모클레스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몸의 안전을 위해서 몰래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방탕한 데메트리오스는 데모클레스가 어느 사설 목욕탕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곳으로 가서 그를 겁탈하려고 하자, 데모클레스는 달리 도망갈 길이 없다고 여기고 뜨거운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의 뚜껑을 열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밖에 소년들이 김나지움 즉 레슬링 경기장에서 알몸으로 경기를 하게 하는 관습 자체가 소년사랑을 확대시킨 큰 원인 중 하나로 생각하는 글도 플라톤의 「법률(Nomoi)」(1· 636)을 비롯해서 키케로의 「투스쿨룸 대화(Tusc.)」(4·33)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키케로는 앞의 책에서 엔니우스(Ennius)가 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노출 하는 것은 추행의 시작이다”라고 하는 시행을 찬사를 담아 인용하고 있다. 물론 레슬링 훈련이 미소년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어른 남성들의 관음증을 충족시키려고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소년사랑을 비난하고 있는 플라톤은 수호자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하물며 여성들도 옷을 벗고 남성들과 체육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5권 452a, b). 분명 소년사랑의 발생 배경에는 그것과는 다른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소년사랑의 맹아는 일찍이 남성 중심의 전시 동원 체제를 항시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그리스 민족 대이동의 시대에서 부터 구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사회는 여느 고대 사회 못지않게 역사 이래 극히 남성 중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여성도 남성과 성향에 있어 동류의 존재이고 남성과 마찬가지로 능히 수호자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국가」5권 456a, b) 당시로서는 매우 놀랍고 대담한 생각이었지만,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 시대에서도 여전히 여성의 역할은 오로지 가사와 아이들의 양육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고대 그리스의 성인 남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초래한 욕구 불만 때문에 헤타이라나 소년들에게서 성적 욕망을 해소하려고 했던 것일까?

(다음에 소년사랑 (2)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4)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4)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2. 아프로디테(2)

아프로디테의 힘이 erga gamoio 즉 성적인 결합과 관련한 일에서 분명하고도 위력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호메로스 찬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는 아프로디테를 찬양하는 노래가 2편 실려 있는데, 그 중 긴 쪽은 가장 오래된 작품군에 속하는 것으로서 일찍이 기원전 7세기 이오니아 지방에서 불렸다.

아무려나 제우스는 제멋대로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는 아프로디테에게 진절머리가 나 버렸다. 그래서 제우스는 감당하기 힘든 그러한 사랑의 불길을 아프로디테 스스로도 한번 겪어 보도록 그 자신, 이 여신이 하는 일에 손을 댄다. 제우스는 우선 이다(Ida)산에서 소를 방목하고 있는 안키세스(Anchises)에 대해 격렬한 연정을 품도록 그녀의 마음속에 사랑을 이식했다. 그래서 파포스에 있었던 아프로디테는 우아한 여신들로 하여금 자신을 목욕시키고 향유를 발라 아름답게 몸치장하게 한 후, 스스로 이다산으로 달려가 안키세스를 뇌쇄시켜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아이네이아스를 낳는다. 그런데 아프로디테의 이다산행은 동물의 발정과 관련한 중요한 모티브와 묶여져 있다. 그녀가 이다산을 향해갈 때 늑대와 사자, 곰, 표범 등 산속에 있는 온갖 짐승들이 여신을 수행했는데, 여신은 그것을 아주 기뻐하여 그 짐승들에게 생식에의 충동을 불러 일으켰고 짐승들은 크게 발정하여 모두들 그늘 깊은 곳에 들어가 교미를 했다. 이런 연고로 아프로디테는 이다산의 대모신으로서 모든 동물들의 강대한 여주인(potnia t?r?n)이 된 것이다.

이 여신의 위세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뻗어 있는지는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탄원하는 여인들(Hiketides)」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아직 아르카익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토대로 성장한 시인이었던 만큼 그의 증언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가 3부작으로 계획한 작품 중 첫 편(나머지 두 편은 소실)에 해당하는 그 작품은 아이귑토스(Aigyptos)의 아들들의 난폭한 구혼을 피해 달아나는 다나오스(Danaos)의 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작중에서 시인은 여인들이 도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극의 전반부에서는 그 주된 이유가 구혼자들에 대한 딸들의 혐오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아예 결혼 자체를 피하려는 것이 그 이유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상은 위대한 생명력으로서의 아프로디테에 관한 사람들의 의견이 두 개로 나누어지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나오스의 딸들이 아르고스에 도착하자 시녀들이 마을 입구에서 그녀들을 맞이하고 다나오스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듯 퀴프리스(Kypris 아프로디테의 다른 이름)의 힘을 언급하고 있다.

 

과일도 다 익은 것은 자신을 지키기가 결코 쉽지 않다.

짐승들과 사람들이 건드리니까. 왜 안 그렇겠니?

즙이 많은 과일을 먹어 보라고 온갖 길짐승들과

날짐승들을 퀴프리스가 초청하여, 과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하도록 식욕을 돋우니 말이다.

(997-1002)

 

아이귑토스 구혼자들을 피해 도망가는 다나오스의 딸들(Danaiden, Jan Frans Deboever 작)

다나오스의 딸들은 강제로 결혼하게 되는 것을 변함없이 거부하고 있지만, 처녀신인 아르테미스에게 비호를 청하는 아래의 탄원 속에는 분명 결혼 자체에 대한 혐오가 포함되어 있다.

 

정결하신 아르테미스여, 굽어 살피소서

이 일행을 가련히 여기시어 퀴테레이아(Kythereia 아프로디테의 별칭)가

우리를 결혼침상에 들도록 강요하지 않게 해 주소서

차라리 이 고통이 죽음으로 끝나기를

(1030-33)

그러자 시녀들의 제2의 코러스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이것에 대답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퀴프리스를 생각하는 것이

즐거워요. 그녀는 헤라와 권세가 같고

제우스에 가장 가까워요. 변덕스런

여신이지만 그녀는 진지한 의식에 의해

경배를 받고 있어요. 동경,

무슨 요구를 하든 거절할 수 없는 설득이

사랑스런 어머니인 그녀와 함께 하지요.

아프로디테는 화합에게도, 사랑의 신들의

속삭임에도 역할을 주었지요

(1034-1042 이상 천병희 역 참고)

 

아프로디테가 건넨 마법의 띠를 두르고 제우스를 유혹하는 헤라 (작가 미상)

다나오스의 탄식과 달리 시녀들의 코러스는 반대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시녀들의 코러스는 남자와의 성적 결합을 여인의 궁극적 성취로 이끄는 아프로디테의 위세를 재현하는 것으로 결혼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아프로디테를 무시하는 휘브리스(Hybris)임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스퀼로스가 3부작을 어떻게 끝맺음할 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3부작의 나머지 두 작품인「아이귑토스의 아들들」과 「다나오스의 딸들」은 전해지고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는 알 수는 없지만, 일부 남아있는 몇 가지 단편들을 보면 최소한 그 결말의 윤곽정도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즉, 두 번째 작품인 「아이귑토스의 아들들」에서는 딸들을 지키는 아르고스인과 그들을 추적하는 아이귑토스의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다나오스의 딸들은 그들과 마지못해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신혼 첫날밤 딸들은 다나오스의 명령에 따라 가증스러운 남편들을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결혼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행로가 이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작품인 「다나오스의 딸들」에 이르면 이후 다나오스의 딸들은 모두 살인의 죄로 재판에 회부되는데 이 때 아프로디테가 나타나 그녀들을 도와주어 그녀들은 살인죄에서 벗어나지만, 그 후 그녀들은 결국 아프로디테에 의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결혼으로 다시 이끌리고 만다. 물론 남편을 죽인 다나오스의 딸들이 저승에 가서 독에 물을 채우는 벌을 받는다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결국 그녀들의 새로운 결혼이 이 3부작의 결말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이 작품에서도 딸들의 하나같은 탄원에 아랑곳함이 없이 아프로디테의 위세가 전혀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이스퀼로스의 다른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desmotes)」를 보면(865) 다나오스의 딸 중 휘페르메스트라(Hypermestra)만은 다른 딸과 달리 다나오스의 명령을 거역하여 남편을 살해하지 않은 죄로 별도의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때에도 사랑(himeros)을 위해 살해를 거부한 휘페르메스트라를 적극 비호하는 과정에서 아프로디테의 위세가 드러난다. 현재 남아 있는 단편(fr. 44 N)을 보고 있노라면 아마도 아프로디테 여신은 휘페르메스트라의 행동을 하늘과 대지의 결합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우주적 사랑(Eros)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아프로디테는 그 자리에서 휘페르메스트라를 비호하며 만물을 정복하는 사랑의 힘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성한 하늘은 대지와 가까이 사랑하기를 갈망하여

결혼의 서약을 맺고 대지를 취할 수 있었다.

가로 놓인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져,

대지는 만물을 잉태하여 인간들을 위해

양이 먹는 풀과 데메테르가 지배하는 풍부한 곡물을 낳는다.

또 과일나무 열매들도 구름과 비가 인연을 맺어

영근 것들.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나 파라이티아(paraitia)가 있다

(단편 44 N)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아프로디테가 자신을 paraitia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paratia는 ‘원인이되 한 쪽을 맡고 있는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녀에게 결코 ‘전적으로 독자적인 원인’을 의미하는 panaitia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는 없다. 그 말은 제우스에게 사용될 수 있는 말이고(「아가멤논」1486행), 굳이 사랑과 관련한 경우라면 에로스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아프로디테의 위세가 비록 드높긴 해도 전적으로 주도적일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아프로디테는 위대한 생성을 이끄는 에로스의 공동 참가자로서 그녀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성적 결합을 통해 쾌락과 희열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들의 “신성한 결혼”(hieros gamos)에 담겨 있는 아프로디테적 의미를 간단히 음미해보기로 하자. 하늘과 대지의 신성한 결혼은 오랜 역사에 걸쳐 널리 알려진 신화이다. 에우리피데스가 그 없어진 비극 「크뤼십포스(Chrysippos)」에서 성스러운 결혼의 관념을 채택할 때, 그것은 꽤 독단적이긴 하지만 교훈적으로 들린다.

 

위대한 힘을 가진 대지(Gaia)와 제우스의 하늘(Ait?r)

하늘은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

대지는 부슬부슬 방울져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들여 가사적인 것들을 낳는다,

목장의 풀들과 여러 종의 짐승들을.

(단편839N)

 

이러한 “신성한 결혼”의 관념은 로마의 시인 웨르길리우스(Vergilius)의 「농경시(Georgica)」에서도 보여진다.

 

그 때,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은 열매를 맺게 하는 비와 함께

기쁨을 가득 채운 아내인 대지의 품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커다란 하늘은 광대한 대지의 몸과 결합하여 모든 생물을 낳아 길렀다.

이후 길이 없을 정도로 초목이 번성하고, 새들의 노랫소리 울려 퍼져

번식기에는 소 떼가 짝 짖기에 여념이 없고

밭에서는 곡식이 영근다.

(2.325-31)

 

또 아이헨도르프(Eichendorff)의 시에서도 신성한 결혼에 대한 태고적 신앙의 시적 여운이 가득 담겨 있다.

 

마치 하늘이 대지에

살짝 입맞춤을 하듯이

대지 또한 꽃그늘 옅은 햇살 속에서

마냥 하늘을 꿈꾸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호메로스의 시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이오니아풍으로 쓰여져 있다. 그의 시 가운데 지금까지 언급해온 종류의 관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비록 “신성한 결혼”은 아닐지라도 가장 위대한 신들이 나눈 사랑의 한 때를 그린 장면이 몇 개 남아 있다. 헤라가 아프로디테에게 부탁하여 마법의 띠(kestos himas)를 받은 후, 헤라가 벌이고 있는 「일리아스」제14권의 장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곳에서 헤라는 자신의 계략대로 침대에 누워 제우스의 팔에 안겨 있는데, 그 때 대지와 하늘이 두 위대한 신의 성적 결합에 참가하여 마치 그들의 신성한 결혼을 보여 주는듯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자 그들 밑에서 신성한 대지가 이슬을 머금은 클로버며

크로커스며 히야신스 같은 싱그러운 새 풀들을 두껍고 부드럽게

돋아나게 하니 이것이 그들을 땅 위로 높이 들어 올려주었다

그 속에 그들이 누워 아름다운 황금 구름을 두르니

그 구름에서 반짝이는 이슬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347-51. 천병희 역 참고)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크로노스 ( Palazzo vecchio ? Florence 소장 )

시인은 하늘과 대지의 결합이라고 하는 오래된 관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신들의 목가적인 사랑의 한 때를 위와 같이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주 생성에 관한 신화를 잠간 언급했는데 그 때 가이아(Gaia, 대지)와 우라노스(Ouranos, 하늘)의 결합은 우주 생성 이래 최초의 ‘신성한 결혼’답게 그에 상응하는 극렬한 성적 결합의 면모를 보여준다. 우라노스는 에로스의 힘을 얻어 너무도 열렬하게 가이아 온 몸을 한 치도 남김없이 꼭 맞게 덮치듯 끌어안고 있어서, 가이아는 우라노스에 가려 햇살 한 가닥조차 접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 또한 지상에 나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채 모두 가이아 속에 묻혀 지내야했다. 그래서 누군가 그들을 떼어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피조물이 성장할 수 있도록 빛과 공간을 되돌려 주는 것이 필요했다. 결국 가이아는 숨 막힐 듯한 괴로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스스로 회색의 쇳물을 내서 그것으로 갈고리형 둥근 낫(harp?)을 만들어 자식인 크로노스(Kronos 시간)로 하여금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절단하게 만든다. 이로써 하늘과 땅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이른바 최초의 세상이 열린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아버지를 위해한 자신에게 미칠 후환이 두려워 자식들을 모두 삼켜버렸고 그 바람에 빛과 공간은 다시 열렸으나 아직 신들의 삶의 터전과 세상의 질서는 생겨날 수 가 없었다. 그러자 마침내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어머니 레아의 도움을 받아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형제들을 구해 비로소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 최초의 질서를 창조해낸다.

그런데 대지가 하늘에서 풀려나고 올륌포스 주신들에 의해 최초의 세상, 최초의 질서가 확립되어 가는 그 시간, 잘려진 우라노스의 생식기는 바다를 떠돌다가 퀴프로스섬에 이르러 그 불사의 살점에서 거품이 생기면서 아프로디테를 탄생시킨다. 우라노스의 거세를 통해 열린 세상에 아프로디테가 우라노스의 분신이자 자식으로 태어나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그 이후에 태어난 신들의 자손 모두에게 떨쳐버릴 수 없는 관능의 씨앗을 심어 놓는 순간이다. 인간의 관능적 사랑이 갖는 희열과 멍에, 생식과 파멸의 뿌리 깊은 이중성은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인의 사랑 중 “소년사랑”을 주제로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3)

이정호(방송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2. 아프로디테(1)

우리는 지금까지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이제 사랑과 관련한 두 번째 위대한 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 대해 살펴보자. 이 여신의 영역은 「일리아스」제5권에(428행 이하)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제우스는 분수도 모르고 지상의 전투에 간여했다가 손에 상처를 입은 귀여운 딸 아프로디테를 위로하며 이렇게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내 딸아 전쟁에 관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란다. 너는

욕정 가득한(himeroenta) erga gamoio나 맡아 보아라, 전쟁에 관한

모든 일은 아레스와 아테네가 염려할 테니.

 

1.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케스토스 히마스를 걸치고 있다. 폼페이 벽화 AD 1세기경. 나폴리 고고학박물관 소장

여기서 erga gamoio를 “혼사(婚事)”라고 번역할 경우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결혼의 신이 아니다. 보통 gamos(gamoio는 gamos의 소유격)는 ‘결혼’의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전적으로 아프로디테 여신의 영역 즉 “성적 결합(die geschlechtiche Vereinigu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딧세이아」의 한 구절은 그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2. 444 이하). 오뒷세우스는 그 부분에서 구혼자(mn?st?r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강요한 이타케의 불한당들)들과 음란한 짓을 저지른 부정한 하녀들을 끌고 가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게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날이 긴 칼로 한 명도 남김없이 그들을 찔러 죽여라. 구혼자들이 하자는 대로 은밀하게 몸을 섞으면서 느꼈던 ‘아프로디테’를 그들이 잊을 때까지” 여기에서 여신의 이름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성적인 쾌락이고 그것이야말로 사실 이 여신의 고유한 관심 영역이다. 그리고 “아프로티데의 일”의 의미를 갖는 아프로디시아(aphrodisia)라는 말 역시 오직 양성간의 성적인 결합에 한정하여 쓰이는 말이다.

여신의 세력범위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는 예는 「일리아스」의 또 다른 한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4. 214 이하) 헤라(Hera)는 제우스를 잠자리로 끌어들여 트로이아 성벽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로부터 제우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려 하지만 이 결혼의 여신은 사랑을 유혹하는 데는 별로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아프로디테에게 남성을 욕정에 빠트리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청하고 아프로디테는 그것을 받아들여 이른바 “아프로디테의 띠”라고 불리우는 케스토스 히마스(kestos himas)를 헤라에게 건네준다. 이러한 끈을 걸친 예로서는, 바빌로니아의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의 도시 키슈(Kish)와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Susa)에서 출토된 기원전 3000년경의 풍요의 여신의 나체상과, 폼페이의 벽화에 정부 아레스(Ares)와 함께 그려진 유명한 아프로디테의 그림이 있다. 이 끈에는 영험이 확실한 마법의 무늬가 자수(刺繡)되어 있었다(kestos라는 형용사는 그것을 가리킨다). “그 안에는 애정(philot?s)과 욕정(himeros) 그리고 아무리 사려 깊은 자일지라도 그 마음을 호리는 사랑의 밀어(oaristus)와 유혹(parphasis)이 깃들어 있었다”(14. 216-7) 헤시오도스도 아프로디테의 몫으로 정해진 명예로 처녀의 밀어(partheniou oaros), 미소(meid?ma), 속임수(exapat?), 달콤한 희열(glykeros terpsis), 애정, 상냥함(meilichios)을 들고 있다.(「신들의 계보」205)

이처럼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비록 중첩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에로스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된 갈망이라면, 아프로디테는 그 갈망의 한 구현으로서 욕정에 불타는 erga gamoio 즉 ‘성적 결합’을 의미한다. 에로스는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에서처럼 정신적인 것에로의 상승을 이끄는 힘으로 승화되기도 하지만, 아프로디테를 사랑의 정신화와 연계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곧 살펴보겠지만 이 두 개의 신격이 가리키는 영역은 상당부분 실질적으로 중첩이 되어 나타난다. 아프로디테 역시 활동하는 영역으로 보자면 따로 제한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2. 아프로디테(비너스)의 탄생, 퀴프로스섬에 닿은 아프로디테. 보티첼리 1485년,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소장

많은 신들이 그렇듯이 아프로디테도 처음부터 그리스의 신은 아니었다. 그녀는 소아시아 남쪽 퀴프로스섬의 신으로서 퀴프리스(Kypri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그녀는 퀴프리스 신앙의 중심지였던 파포스(Paphos)에서 우상으로서 숭배되고 있었고 원추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역사(Historiae)」2·12) 이와 비슷한 예는 페니키아의 화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 화폐에 원추형의 모습으로 새겨진 뷔블로스의 아스타르테(Astarte)신 역시 고대 셈족의 풍요와 생식의 여신이었다. 이것 또한 아프로디테가 오리엔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물론 그리스 원주민들이 대모신(Große Mutter)으로 섬기던 여신들 중 한 명이 아프로디테의 원형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아프로디테의 숭배에 오리엔트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의 주요 신들이 여명기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지역의 문화들이 융합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에 충분히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아무튼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개념상 서로 매우 가깝고 중첩되는 부분도 많아서 양자는 차츰 밀접하게 관계를 갖게 되었다. 호메로스는 아프로디테를 제우스와 디오네(Dione)의 딸로 그리고 있지만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에서 그녀의 탄생을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거세하는 왕위 계승 신화와 연결 짓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힛타이트 신화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들의 계보」에서 아프로디테는 크로노스에 의해 낫으로 잘려진 우라노스의 생식기가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니다 불사의 살점 때문에 생긴 거품으로부터 태어났다고 그려지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 부분에서 아프로디테가 남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아프로티테를 ‘남근을 좋아하는 신'(philommedea)이라고도 불렀다. 탄생 후 아프로디테는 퀴프로스섬에 닿아 아리따운 여신의 모습으로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녀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모든 것들의 생식욕구를 지배하는 여신답게 여신의 날씬한 발밑에는 사방으로 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신들의 종족에게 갈 때까지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신들이 곧 에로스와 애욕의 신 히메로스(Himeros)이다. (「신들의 계보」187-202).

에로스와 아프로디테는 제사에서도 종종 일체화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북쪽에서 기원전 5세기 때의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신전에 새겨진 증언에 의하면 이 신전은 그들 두 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에로스와 아프로디테의 동행은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프리즈(Ostfries)에 조각된 신들의 모임에서도 나타난다. 그곳에서는 발랄한 아름다움에 빛나는 알몸 소년의 모습을 한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무릎위에 앉아 있다.

시인들이 뮈케나이의 여러 가지 호사스런 궁정 생활의 특색을 도입하여 올륌포스 신들을 시가로 그려냈을 때, 아프로디테 역시 확고한 지위를 갖는 신으로 그려졌다. 이 여신을 포함해서 올륌포스신들은 인간들처럼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모도 풍기면서 제멋대로 행동하곤 하지만 그 신들 모두는 자주 상궤를 넘어서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위대하다. 아프로디테는 이다(Ida)산상에서 벌어진 미모경연(Sch?nheitswettstreit)에서 파리스(Paris)가 자신에게 황금 사과를 건네 준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그 보답으로 파리스에게 헬레네(Hel?ne)를 안겨 주고 그 후로도 줄곧 파리스를 돌봐 주고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제3권에서는 연적사이인 메넬라오스(Menelaos)와 파리스의 결투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만약 아프로디테가 수세에 몰린 파리스를 노골적으로 가로채 짙은 안개로 감싸 향기로 가득 찬 그의 방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그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로디테의 호의는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양모를 빗질 하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마치 중매쟁이처럼 향기로운 옷자락을 흔들며 헬레네를 파리스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유혹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에 담겨진 이 장면은 고뇌에 찬 한 여인의 정신적 깊이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헬레네는 이미 자신이 남편 메넬라오스와 조국에 저지른 잘못을 알고 그것을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노파가 다름 아닌 아프로디테인 것을 알아차리자 이내 정부인 파리스의 잠자리로 이끌고 가려는 그녀의 제의를 야멸차게 거절한다.

3. 아프로디테와 아레스(비너스와 마르스) 보티첼리 1483, 런던국립미술관 소장

“아프로디테님! 당신이나 그를 위하여 애태우며 지켜주세요. 그러시면 언젠가는 그가 당신을 아내나 노예로 삼을 날이 올 거에요. 아무튼 나는 그리 가서 그의 시중을 들지 않겠어요. 그랬다간 모든 트로이아 여인들이 나를 욕할 거에요. 그렇잖아도 나는 마음이 한없이 괴로워요”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크게 격분하여 그녀를 거칠게 몰아 부친다. “나를 자극하지 마라, 무모한 여인이여! 내가 성내는 날에는 너를 버릴 것이며, 지금 내가 너를 격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그 만큼 너를 미워하게 될 것이고, 너는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오이족 양쪽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일리아스」408-417) 올륌포스신들의 전횡은 요컨대 협박(Drohung)에 있다. 이 무서운 협박에 헬레네는 이내 겁을 먹고 어쩔 수 없이 하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트로이아 여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여신의 뒤를 따라 파리스에게 간다. 이 장면에서 만큼 협박이 극적이고도 효과적으로 표현된 예는 그리스 문학 전체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음울하고 무서운 장면 뒤에는 그로테스크하게 펼쳐지는 또 하나의 상황을 보며 환호하는 이오니아 정신이 가득 넘쳐난다. 방안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의도대로 파리스와 헬레네가 호사로운 침대에 누워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고, 밖에서는 메넬라오스가 불구대천의 적인 파리스의 빈 투구만을 손에 쥔 채, 파리스를 찾기 위해 야수처럼 무리들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오뒷세이아」 제4권에는 텔레마코스(Telemachos)가 아버지 오뒷세우스를 찾아 가는 길에 스파르타 궁정에 들렀다가 다시 메넬라오스에게 돌아와 그의 아내이자 정숙한 주부로서 살아가고 있는 헬레네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흥미롭게도 그리스 서사시의 등장인물들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언제라도 신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헬레네도 그 장면에서 트로이아에 몰래 잠입한 오뒷세우스를 자기가 숨겨주고 뒷바라지까지 했노라고 변명조 섞인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뒷세우스 그분이 트로이아 사람들을 죽이자….나는 마음이 흐뭇했어요. 내 마음은 벌써 오래전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돌아서 있었고, 아프로디테님이 그 때 나에게 불어넣은 미혹(at?), 그러니까 내 딸과 우리 부부의 침실과 그리고 지혜로나 외모로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내 남편을 버리고,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한 채 저 땅으로 달려가면서 가졌던 그 미혹들을 지금은 후회하고 있거든요”(260-264). 이에 메넬라오스는 언제 헬레네가 파리스와 놀아났던가 싶은 말투로 “부인, 그대가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kata moiran) 말이오”라고 말하면서 흐뭇해하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그녀 자신이 결코 결혼의 신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오뒷세이아」의 제8권에서 음유시인 데모도코스(Demodokos)가 노래하고 있는 것은 이 여신의 부정한 행동이다. 그녀는 헤파이스토스(Hephaistos)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는 쇠를 다루는 기술에서는 따를 자가 없는 대가이지만 신체적으로는 절름발이 장애자였다. 그런데 그가 집을 떠나 있던 어느 날 당당한 체구의 전쟁의 신 아레스가 아프로디테를 찾아와 갖은 선물을 주며 그녀를 유혹하고 마침내 잠자리를 같이 한다. 헬리오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헤파이스토스는 화가 나서 침대 기둥 주위와 위로 도망칠 수 없는 올가미를 거미줄처럼 둘러쳐 놓았고 결국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몰래 잠자리를 같이 하려다 그 올가미에 걸려든다. 이 소식을 들은 헤파이스토스는 노여움으로 가득하여 집으로 돌아와 그 가소로운 광경을 보라고 신들을 모두 불러 모은다. 그러자 부끄러워 집에 남은 여신들을 빼고 많은 신들이 그곳에 몰려와 그 광경을 보고서는 모두 웃음을 금치 못한다. 이 기묘한 장면을 읽어가면서 어떤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신들의 노래에서 그 추잡함을 거두어 내고 읽을 것인가를 고민할지도 모르지만 이어지는 신들의 대화를 듣고 나면 고민 자체가 금새 무색해진다. 우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폴론(Apollon)은 남동생인 헤르메스(Hermes)에게 너는 이와 같이 강력한 사슬에 묶여 꼼짝 못한다 하더라도 침대위에서 황금의 아프로디테와 함께 자고 싶으냐고 묻는다. 그러자 헤르메스는 지체 없이 “그랬으면 오죽 좋겠소!”라고 말하면서 “설사 이 보다 3배 이상의 많은 사슬들이 나를 감고있다 해도 그리고 신들과 모든 여신들이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나는 황금의 아프로디테 옆에 눕고 싶소이다”라고 대답한다. (266-342). 그러자 많은 신들이 다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그러한 광경 앞에서 유독 포세이돈만은 웃지 않고 헤파이스토스에게 아레스가 신들 앞에서 합당한 벌금을 낼 것이고 자기가 그것을 보증할테니 아레스를 풀어주도록 간청한다. 결국 헤파이스토스는 포세이돈의 간청을 받아 들여 그들을 풀어주고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군말 없이 반대방향으로 헤어져 자기들이 살던 곳, 즉 아레스는 트라키아로, 아프로디테는 그녀의 성역인 퀴프로스섬 파포스로 돌아간다. 퀴프로스섬의 우아의 여신들인 카리테스(Charites)들은 돌아온 아프로디테를 정성껏 목욕 시키고 영생하는 신들의 살갗을 뒤덮고 있는 불멸의 기름(elaion)을 발라주고 휘황찬란하고 사랑스런 옷을 입힌다. 이와 같이 데모도코스의 노래는 신들의 속내는 물론 관능의 신 아프로디테 여신 또한 그 황홀한 광채를 털끝만큼이라도 손상하지 않은 채 온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다시금 드러내면서 끝이 난다.

신화 속에 나타난 신들과 인간들의 이러한 모습들 모두 고대인들의 삶의 반영으로서 신화가 표상하고 있는 뿌리 깊은 인간 본성의 중층적 층위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 아프로티데(2)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2)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2)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

 

1. 우주론적 에로스(2)

우주를 생성하는 힘으로서의 에로스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오르페우스교에서도 발견된다. 빌라모비츠(Wilamowitz-Moellendorff)처럼 신비주의 일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오르페우스교가 그리스인들의 생활에 미친 의의마저도 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물론 오르페우스(Orpheus)는 변방 트라키아의 신이고 또 그와 관련한 문헌들에는 후대에 자의적으로 덧붙여진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는 오르페우스교 역시 구제 신앙과 정화의 방법을 공유하고 있는 당대의 여러 유사 교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교는 그러한 오르페우스 관련 여러 교파들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그것이 갖고 있는 몇 개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멀리 아르카익기(die archaische Zeit)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르페우스교 관련 문헌으로서 세계의 생성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는「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Rhapsodia Theogonia)」라는 시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물론 로마 제정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거의 헬레니즘기에 쓰여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 속에는 그 시기 훨씬 이전에 쓰여진 것들을 수록하고 있고 그것을 입증하는 주목할 만한 증거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아리스토파네스 (출처:www.historyforkids.org)

 

기원전 414년 즉, 오르페우스교가 민간의세속적인 기복제사로 변질되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던 시대에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희극 「새(Ornithes)」를 상연했다. 이 작품의 파라바시스(parabasis: 코러스가 작가의 이름으로 관객을 향해 말하는 부분)에는 흥미롭게도 새로이 세계의 지배자가 된 새들의 코러스가 인간들에게 새의 기원을 가르치면서 새가 신들 보다도 오래된 존재라고 노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게다가 코러스는 인간을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만든 한갓 작은 인형이나 그림자와도 같은 무상한 족속으로 그리고 있다. 그 작품의 693-99행을 보자.(천병희 역 참고)

태초에 카오스와 밤과 검은 에레보스와

넓은 타르타로스가 있었고, 대지도 하늘도 없었소. 에레보스의

끝없이 넓은 품속에서 검은 날개의 밤(Nyx)이 최초의 무정란을 낳자

거기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움을 일깨우는(potheinos) 에로스가 나오니

등은 황금날개로 빛나고 빠르기가 회오리바람처럼 빨랐지요

에로스가 날개달린 카오스와 밤에 동침해 넓은 타르타로스에서

우리들 새 종족을 부화하여 처음으로 햇빛 속으로 데리고

올라왔지요. 에로스가 모든 것을 섞기 전에는 불사신의 종족은

없었소. 상이한 것들이 서로 섞이자 하늘과 오케아노스와

대지와 온갖 축복받은 신들의 종족이 생겨났지요. 이렇듯

우리는 모든 불사신들보다 훨씬 연장자들이라오. 우리가

에로스의 자손이라는 것은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오(693-704)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오르페우스교의 「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에 실린 신들의 계보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 점은 「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에 실린 신들의 계보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살던 시기보다 훨씬 이전의 것임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속에 얼버무려지듯 포함된 오르페우스교의 시는 헤시오도스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의 알에서부터 생겨났다고 하는 오래된 오르페우스교의 관념은 헤시오도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또 바로 그 알에서 에로스가 나왔고 그 에로스가 세계 생성의 주된 원천으로서 카오스와 만나 이 후의 모든 생식을 이끄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극 중에서 새들이 이 신들의 계보를 왜곡해서 자기들의 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대담한 착상이다. 그러나 새들이 세련된 방식으로 에로스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매우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새는 에로스와 같이 하늘을 날아 에로스가 그러하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기를 좋아한다. 사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성인 남성들이 매력적인 소년을 손에 넣기 위해 프로포즈를 하면서 작은 새를 선물로 주었다. 그 시절의 도자기 그림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많이 발견된다. 결국 형태가 없는 카오스조차 새들의 어머니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로부터 훨씬 뒷시대인 기원전 3세기 어쩌면 그 이후의 시대에 쓰여진 오르페우스교 관련 문헌으로 「오르페우스 찬가(Orphei hymni)」가 있다. 이것은 소아시아의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이 예배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 중 여섯 번째 노래는 오르페우스교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프로토고노스(Protogonos: 최초에 태어난 사람)에게 바쳐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또 세계의 기원으로서 알이 나오고 프로토고노스도 그 알에서 부화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프로토고노스는)…

황금의 날개를 자랑하며

숫소의 소리를 갖고 태어났다

신들과 인간들의 기원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은 이 프로토고노스에게 다양한 신격을 부여했는데 위의 싯귀 몇 줄 뒤에는 프로토고노스가 다름 아닌 에로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한 에로스의 우주론적 지위를 더듬어 보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에로스를 노래하고 있는 그 책의 58번째 찬가를 보면 이미 우리의 귀에 익숙한 울림이 들려오고, 그 속에서도 에로스신의 우주론적 성격이 쉽게 발견된다.

이른바 신화적 사유를 넘어 자연학과 철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만물의 아르케로 떠오를 지수화풍이 이미 그 에로스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불멸의 신들도 사멸하는 인간들도 갖고 노는 자….

세계 생성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

하늘의, 바다의, 땅의,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낳는 바람의

(3 이하)

이와 같은 에로스의 우주론적인 관념은 신화의 시대에서 자연학의 시대를 거쳐 이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오랜 기간 남아 있었다. 기원전 2세기 루키아노스(Lukianos)는 무용을 예찬하는 「춤에 대해서(Peri och?se?s)」라는 책에서 별들의 윤무(Reigen)에 작용하는 춤의 여신을 이야기하면서 그 여신이 태초의 우주 생성기에 태고의 에로스와 동시에 태어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9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에로스에 대한 헤시오도스적인 관념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여러 종류의 그리스·이집트의 마술관련 문서(Zauberpapyri)들에서도 시대도 출처도 다양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뒤섞여 있긴 하지만 그곳 역시 여기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성격의 에로스가 등장하고 있다.(Preisendanz 교정본, IV 1748) 그곳에서도 에로스는 “세상 모든 것의 생식을 주관하는 자”, “우주를 만들어내는 자”, “빛을 가져오는 자”로 그려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바다로부터 오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Pelagios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모든 사물이나 신들이 바다로부터 발생했다고 하는 관념이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에로스의 우주론적 성격에 관한 우리의 짧은 논의를 괴테의 「파우스트(Faust)」 제2부 “고대 발푸르기스의 밤(klassischen Walpurgisnacht)” 끝부분에 나오는 세이렌(Seir?nes)의 노래 한 구절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그리스 신화에서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키는 여자의 얼굴을 한 새로 나온다.

세상 모든 것들의 시작 에로스, 그 에로스가 지배하도록

– So herrsche denn Eros, der alles begonnen.

 

(2. 아프로디테.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