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7)

Spread the love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7)

글: 이정호 교수(방송통신대)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1)

플라톤고대 그리스에서 소년 사랑이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에로스가 개인들의 사적 영역을 넘어서 정치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소년 사랑은 분명 전사 공동체로서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엘리트 그룹들의 내적 연대와 자기 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공동체의 보존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소년 사랑을 구성하는 관능적 요소들과 정신적인 요소들 사이의 긴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 귀족사회가 붕괴되면서 서서히 와해되었고 아테네 민주정하에서 더욱 통속화되었다.

플라톤(기원전 429-347)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은 이러한 시대적 국면에서 소년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에로스의 관능적 측면을 비판하고 에로스를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즉 철학으로 승화시키려는 플라톤의 고뇌어린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늘 그러하듯이 자기 생각을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에로스에 대한 논의들을 먼저 제시하게 한 후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펼치는 형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간다. 다만 「향연」은 형식면에서는 다소 특이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약간의 도입부 대화를 거쳐 바로 해당 주제에 대해 다른 대화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유독 이 대화편에서는 옛날에 대화를 들었던 사람이 훗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 다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다소 복잡한 이야기 전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 영화에서 창틀을 끼어 과거 시점을 현재와 병존시키는 기법과 유사한데, 플라톤이 도입부를 왜 그와 같이 복잡하게 설정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향연」에서 종국적으로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에로스의 비의적(秘儀的)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포석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죽은 후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와의 관계에 대해 세간에 퍼져있는 오해를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켜 그의 입을 통해 불식시키고,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진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작품 구성상의 기법이라고도 해석한다.

플라톤의 「향연」파퓌로스 필사본 일부

「향연」은 플라톤의 첫 번째 시켈리아 여행(기원전 390년)과 두 번째 여행(기원전 366년경)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향연」의 작품상 설정 연대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이다.「향연」은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아가톤(Agath?n)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참석자들이 벌인 에로스에 관한 연설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경연이 있었던 레나이아(l?naia) 축제가 기록상 기원전 416년에 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향연 즉 심포지온은 우리나라 옛날 양반들이 모여 술을 나누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귀족남성들이 모여 경연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놀았던 일종의 특권층의 오락모임이자 술자리였다. 그런데 이날은 모두가 전날의 축제에서 이미 통음을 하였던 까닭에 술자리 보다는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하자고 모두 동의하고 통상 자리를 같이 하던 피리 부는 소녀들과 여인들까지 물리친다. 이처럼 「향연」에서의 향연(symposion : ‘drinking together’의 의미)은 처음부터 ‘술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말(logos)을 나누는 자리’로 규정되고 각자가 펼칠 연설의 주제 또한 에뤽시마코스(Eryximachos)의 제안에 따라 에로스에 대한 찬미로 정해지고, 연설의 순서 또한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른쪽 순으로 펼치기로 합의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은 에로스에 관한 일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을 한다.(177d) 이 부분도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知)’를 늘 강조해 왔는데 이 부분에서는 에로스에 대해서만은 잘 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도입부에서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에 관한 이야기의 최종 청취자로서 일반대중을 상정하였듯이, 사랑에 대해서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함께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소크라테스의 에로스가 어떤 지식 내지 결론적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열망자체’라는 점에서 그렇게 발언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도기 그림)

이렇게 해서 에로스에 대한 찬미 연설이 시작되고 파이드로스(Phaidros)가 그 첫 번째 주자로 나선다. 그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탄생(Theogonia)」을 인용하여 에로스를 태초의 신들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신으로 내세우면서, 에로스가 가장 좋은 것들의 원인이므로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소년 사랑이다. 그러면 소년사랑이 가장 좋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추한 것을 멀리하고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치심에 대한 민감함과 명예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없이는 국가든 개인이든 크고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없다. 요컨대 소년 사랑은 추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덕과 명예를 추구하게 하여 나라를 위해 전투에 나가서도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우게 만든다. 파이드로스는 여기서 소년 사랑이 결국 나라를 잘 운영하는 방법 및 전투수행능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178e)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파이드로스는 이 부분에서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를 인용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앞에서 살핀 테바이 신성부대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실제로 테바이 신성부대의 창설은 이 향연의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파이드로스의 에로스에 대한 연설은 전사 공동체 사회에서 소년 사랑에 대해 기존에 확립된 교육적 동성애의 전통을 그대로 대변한다.

그러나 파이드로스의 연설은 다소 상투적이고 소년 사랑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사례들도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한 알케스티스(Aik?stis)의 경우는 이성애 관계이고, 아킬레우스의 경우(아이스퀼로스에서는 아킬레우스가 에라스테스로 나온다)도 에로메노스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비록 신이 마음에 들어 할 정도로 더 소중한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에로스를 품는 자, 즉 에라스테스의 경우는 아니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일반적인 견해와 동떨어져 있다. 이처럼 파이드로스의 에로스론은 기성의 상식을 대변하지만 대부분의 상식이 그러하듯 근거가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늘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무턱대고 끌어들인다.

그 다음 연설자로 나오는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소년 사랑의 이중성을 간과한 채 기성의 관점에서 단순히 찬사만 늘어놓는 파이드로스의 연설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에로스에는 범속의 에로스(pand?mos eros)와 천상의 에로스(ouranios eros)가 있는데 이 중 전자는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고 영혼(psych?)보다 몸(s?ma)을 사랑하며 그저 ‘일을 치러내는 것'(exergazesthai : 이 문맥(181b)에서는 성행위를 뜻함)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출생이 제우스와 디오네(Di?n?)의 딸인지라 저급한 이성애도 추구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소년 사랑이 종래의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전통에서 벗어나 성적 충동이 이끄는 대로 이성애건 동성애건 닥치는 대로 애정행각을 벌이는 타락한 현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역시 교육적 동성애로서 소년 사랑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천상의 에로스란 단순히 소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nous)을 갖기 시작할 때의 소년을 사랑하며 늘 덕(aret?)으로 이끄는 사랑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천상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에라스테스에게 소년이 살갑게 대하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에라스테스가 아름다운 소년 애인을 취하려고 벌이는 그 어떤 행위도 그것이 설령 노예노릇처럼 비쳐질지라도 결코 추한 것이 아니며, 소년이 최대한 훌륭한 에라스테스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끌며 그들을 시험하고 경쟁시키는 것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오히려 무능한 나라 또는 참주정(tyrannis) 치하에 있는 나라일수록 이러한 일들을 추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년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기게 될 대단한 생각(pronemata megala : 높은 사리분별력)과 강력한 친애 및 연대감을 참주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는 이곳에서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사례를 인용한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이러한 천상의 에로스가 아닌 범속의 에로스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돈이나 권력으로 소년 사랑을 구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소년들의 부모들도 아이들을 감독할 보호자를 두어 어른들과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급기야 소년 사랑이 공공연히 추한 일로 비난받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러므로 소년 사랑의 전통이 제자리를 잡아 소년 애인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살갑게 대하는 일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게 하려면 이제 소년 사랑에 관한 법(nomos)과 지혜 사랑(phiosophia) 및 다른 덕에 관한 법이 같은 곳에서 함께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184d) 그렇게 될 때에만 에라스테스는 에로메노스를 위해 사리분별 및 기타의 덕을 가르칠 수가 있고, 에로메노스는 에라스테스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통해 지혜를 습득할 수 있으며 동시에 에로메노스가 에라스테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charizesthai : 신체적 애무를 포함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파우사니아스의 연설에는 파이드로스가 간과하고 있는 아테네 사회에서의 소년 사랑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천상의 에로스에 대한 찬미를 통해 소년 사랑의 정신적 측면을 현실적으로 되살려 보려는 각고의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역시 파이드로스와 마찬가지로 소년 사랑에 수반하는 육체적 관계를 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살갑게 대하는 것은 이상적인 여러 가지 동기들과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으로 찬양하고 있다.

세 번째 연설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s) 차례지만 그가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에뤽시마코스가 대신 나선다. 에뤽시마코스 역시 파우사니아스처럼 에로스를 둘로 구분한다. 그러나 앞의 연설자들처럼 에로스가 사람들의 영혼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에로스는 모든 동물과 땅에서 자라는 것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다 있는 것이다.(186a) 이처럼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를 우주적 에로스로 확장시킨다. 인간이건 우주 자연이건 어디에나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가 있으며, 그에 따라 좋은 에로스가 사랑하는 것과 나쁜 에로스가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다. 좋은 에로스가 하는 일은 적대적인 것들을 조화시키는 것이고 나쁜 에로스는 그것들을 부조화시켜 더욱 적대적으로 만든다. 좋은 에로스가 하는 일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마치 활(toxon:현악기를 켜는 활)과 뤼라가 서로 부딪치면서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의술은 몸의 조화를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epist?m?)이고, 시가술(mousik?)은 음의 조화와 리듬을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고 천문학은 계절의 조화를 이끄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다. 그리고 예언술(mantik?)은 신들과 인간들의 친애를 만들어 내는 에로스에 대한 앎이다.(186c-188d) 이처럼 에뤽시마코스에게서 에로스는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내적인 조화를 관장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기술(techn?)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습득해야할 자연학적 원리의 성격을 갖는 에로스이다. 에뤽시마코스는 이러한 에로스야 말로 ‘절제와 정의’(앞뒤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생뚱맞게 인용되어 있다)로써 일을 이루어내는 에로스이고 우리에게 신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일체의 행복을 마련해주는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188d)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의 에로스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 사이에 강한 친애(philia)와 연대(koinonia)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명예(tim?)와 덕에로 이끄는 정서적 성격의 힘이라고 한다면,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는 마치 동양 유가의 도(道)와 성(誠)을 연상시키듯 우주 자연으로까지 확장된 우주론적 에로스로서 대립된 힘들로 구성된 일체의 것들을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로 이끄는 원리적 성격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들 모두의 주장은 향연의 전체내용을 이끌고 가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창작된 것으로서, 당대 지식인들의 에로스론에 대한 플라톤 나름의 평가를 반영하면서 장차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통해 표명될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구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상의 세 사람의 연설이 끝난 후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이어진다. 그런데 플라톤이 아리스토파네스를 「향연」의 등장인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그는 기원전 423년에 상연된 「구름(nephel?)」이라는 희극에서 소크라테스를 우스꽝스러운 사기꾼으로 조롱했던 사람이다.(218-226) 그래서 플라톤은「변명(Apologia)」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의 그러한 짓이야말로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19c)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아리스토파네스를 「향연」의 연설자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일단 겉으로 보면 플라톤은 마치 역사적 아리스토파네스를 그대로 옮겨 놓기라도 하듯이 우화를 인용하며 이끌어가는 아리스토파네스 고유의 익살과 페이소스를 실감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들어가면 그의 연설은 에로스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 안티테제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아마도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을 비판의 표적이자 반동의 디딤판으로 삼아「향연」의 절정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연설을 통해, 다시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넘보거나 능멸하지 못할 정도로, 에로스를 저 빛나는 정신의 세계로 하늘 높이 도약시키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에로스란 무엇이었을까?

(다음에 “플라톤의 에로스(2)” 계속)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