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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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5)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3. 고대 그리스인의 동성애 ? 소년사랑(1)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보통 동성애를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동성애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동성애와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동성애는 성인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의 사랑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는 주로 어른 남자와 소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형태의 동성애는 개념적으로 당시에 불려 졌던 그대로 소년사랑(paiderastia)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러한 양태의 동성애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추행에 해당하는 아주 혐오스러운 것으로 비쳐지겠지만 고대 그리스 사회 특히 귀족들의 생활 속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일상적인 현상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소년사랑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도시국가들 전체에서 그리고 전 시대에 걸쳐 하나같이 존재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소년사랑은 그리스의 초기 정착사가 보여주듯이 가장 강력했던 전시 동원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스파르타에서 늘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남성 중심의 집단생활 속에서 남성들 간의 명예를 얻기 위한 경쟁적 욕구, 공동생활을 통해 드러나는 남성들 간의 교감 등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였을 것이고 그 후 점차 아테네 등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은 성인 귀족들의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정과 맞물리면서 특이하게도 발생 당시부터 일단 겉으로는 전시를 대비한 교육적 동성애의 면모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 또한 기본적으로 쌍방 간에 욕정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었다. 나이든 성인 남자가 주도권을 쥐고 교육을 수반한 덕과 사랑을 베풀고 그에 따른 성적 쾌락을 얻으며, 젊은 소년은 나이든 쪽의 경험과 덕을 배우고 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에 따른 ‘호의에 찬 친분’(philia)과 후원을 얻는 것이 통상적인 소년사랑의 양태였다. 그래서 그들을 부를 때 나이든 쪽은 “사랑하는 자, 에라스테스(erast?s)”라고 부르고 소년은 “사랑받는 자, 에로메노스(er?menos) 또는 파이디카(paidika)”라고 불렀다.

서로 입을 맞추고 있는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 (도기그림,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렇게 그들의 관계는 뚜렷한 구별이 있었다. 요컨대 사랑을 하는 건 나이든 성인 남성 쪽이다. 이처럼 “능동적인 성역할과 수동적인 성역할” 간의 구별은 성에 관한 고대 그리스적 사고의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한시적인 것이었으며 이런 한시적인 관계가 끝난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이성애로 진전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가 갖는 이러한 고유한 특징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를 하면서 이성애를 병행하는 것 또한 이상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동성애는 용맹한 전사로서의 항시적인 젊음을 꿈꾸는 에라스테스의 열망과 성인 어른의 경험과 덕망을 배워 훌륭한 전사로서 성장하기를 원하는 어린 에로메노스의 욕구가 결합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메노스의 젊음이 종결되는 시기 즉 수염이 나는 시기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관계는 종결되고, 성인 남자는 이성애로 진행하고 소년은 성장하면서 점차 또 다른 에라스테스가 된다. 소년에 대해 사랑하는 쪽은 30-40세 의 성인어른으로서 여성과 결혼한 기혼자 일 수도 있고 나중에 결혼할 수도 있다. 소년이 수염이 난 후에도 동성애를 지속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에 나오는 파우사니아스와 아가톤 처럼 평생을 두고 동성애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오히려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현대와는 달리 고전기 그리스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혼과 그에 따른 결혼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전시동원체제인 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성들과 엄격하게 분리된 생활을 해왔고 혼기에 이르면 순전히 부모들이 정해준 14세 정도의 어린 여성과 결혼을 했으며, 결혼 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리는 엄격하게 유지되고 활동 공간 또한 나뉘어져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결혼한 부부로서의 행복한 생활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결혼한 여성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출산과 가사,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기본적인 임무였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연유로 고전기 고대 그리스에서 ‘낭만적 사랑’은 자유인 신분의 성인 남자들과 정부(情婦 hetaira)들 간에, 또는 그들의 남자 상대자들 간에(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른바 사랑에 대한 감정은 자유인 신분의 남자들 사이의 동성애, 즉 성인 어른과 소년 사이의 동성애 관계에서 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도 일반인 모두에게 허용된 것은 아니었고 명예로운 전사로서 성장해가길 욕망하는 일부 귀족 계층에 국한된 것으로서 이른바 그들만의 성(性)의 고급 영역이었다. 남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전사로서 성장해야한다는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환경적 조건에 따라 남성들 간의 성애가 더욱 조장되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알몸으로 이루어지는 김나지움에서의 레슬링은 빛나는 젊음들끼리 육체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서로 접촉하는 대표적인 귀족 남성들의 특권적 경기이자 훈련과정이었다. 게다가「향연」에서 보여지듯 남성들만의 심포지온 자리에서 술을 나누며 교유하고 토론하는 것 또한 그러한 훌륭한 전사이자 책임 있는 귀족으로서 커가길 욕구하는 그들만의 상호 교육과정이자 동시에 그들만의 특권적 오락이었다. 요컨대 고전기 아테네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경기, 전투, 정치, 철학, 수사술과 같은 높은 신분의 활동들은 자유인 신분의 남성들의 특권이자 의무로서 오로지 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물론 여성 특유의 활동들이 지니는 가치가 때때로 인정되기는 했지만, ‘덕(aret?)’과 ‘행복(eudaimonia)’에 대한 고대 그리스적인 개념은 남성들의 이러한 고급 활동들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그런 활동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 간의 성적 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나아가 휼륭한 전사가 되기 위한 기본과정으로 합리화되는 기본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향연」에서 일부 연설가들은 소년사랑과 ‘덕’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적인 취향이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 대중일반에게도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나타나듯이 소년사랑의 문란상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었고 그에 대한 비판과 법적인 통제 장치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가 말하는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의 구분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기원전 4세기 마침내 고대 그리스 사회가 종말을 고하게 되면서 이러한 소년사랑의 관습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지만,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에 대한 관심이나 그것을 다루는 글들은 장르에 관계없이 그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내용 또한 도덕적인 분노를 표명한 것으로부터 혹은 비정상인 호기심이나 그 탐미적인 아름다움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는 것까지 천차만별한 양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에 대해 어떤 관심과 시선을 갖든 간에 아래의 두 가지 사실만은 누구나 다 하나같이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소년사랑은 그리스인의 생활, 특히 귀족들의 생활에서 상당한 정도까지 퍼져 있었던 일상적 현상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소년사랑 역시 아주 추악할 정도로 타락한 형태로부터,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소년사랑의 모습을 포함하여 대단히 고상하고 순수한 정신적 관계를 갖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소년사랑에 대한 그와 같은 다양한 양태들 중 일부를 관련 고전들을 통해 간략히 일별해보기로 하자.

우선, 비록 극의 내용이긴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새(Ornithes)」의 한 장면은 아테네 사람들이 소년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상적 의식의 한 단면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에우엘피데스(Euelpides)는 사람들이 안락하게 살고 있고, 소년사랑 또한 매우 번성해 있는 게으름뱅이들의 천국을 몽상하고 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소년을 아들로 둔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이 한 성인 귀족에 의해 사랑의 상대로 선택되지 않은 것에 모욕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비난을 퍼붓는 장면이 나온다.(139-142).

그래? 스틸보니데스, 너 참 잘 났다.
내 아들이 목욕을 하고 나서 김나지온을 나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인사도, 입맞춤도, 어디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고,
한번 안아주지도 않는군. 당신 참 고루한 친구시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플라톤의 「법률」제1권(636C)을 보면 관능적인 소년사랑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플라톤의 비난 섞인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연로한 플라톤은 등장인물 ‘아테네인’의 입을 통해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 사이의 사랑 일체를 ‘자연에 어긋난’(para physin)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미소년 가뉘메데스(Ganym?d?s : 트로이아 트로스왕의 미남 아들인 가뉘메데스는 그 미모 때문에 올륌포스로 납치되어 제우스에게 술을 따르는 작부(酌夫: oinokheus)가 되었다. 호메로스 「일리아스」20. 231-5 참고)를 인용하면서 크레타인들이 동성 간의 성적 쾌락을 공공연하게 비호하기 위해 마치 제우스가 소년 사랑이나 한 것처럼 그를 끌어 들이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하긴 테오그니스(Theognis)가 편찬한 책에 포함되어 있는 짧은 비가(elegeia) (1345-50)를 보면 그것을 쓴 작가 자신 스스로 소년사랑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크레타인들 처럼 자신의 경우를 아름다운 가뉘메데스를 납치한 제우스를 들어 미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전설적인 입법자 뤼크루고스(Lykurgos)가 정한 스파르타 법률에 대한 보고들은 소년사랑과 관련한 아주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스파르타의 법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소년을 육성할 책임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고대의 저작가들은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제도적 성격 때문에 소년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관능적 측면을 어떻게든 배제시키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어 크세노폰(Xenophon)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 사이에서 관능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과 혹은 형제들끼리 서로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고 단언하고 있다(「라케다이몬의 정치체제(de rep. Laced.)」2· 13).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는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소년사랑에 대한 규정을 어기고 잘못을 범한 자는 일생 동안 공적인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뤼크루고스의 생애」17 이하, 「라케다이몬의 정치체제」7). 후대의 소피스트로서 플라톤주의자인 튀로스(Tyros)의 막시모스(Maximos : 기원후 2세기)는 이것을 한층 더 이상화하여 스파르타의 남성은 단지 미소년을 아름다운 조각을 사랑하듯이 사랑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스파르타의 법률이나 그에 대한 견해들이 소년사랑에 대한 실제 행태들과 크게 달랐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소년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규정에 따라 도덕적인 절제를 보여주고 있는 사례들 또한 발견된다. 스파르타왕 아게실라오스(Agesilaos)는 스피트리다테스(Spithridates)의 아름다운 젊은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 소년이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에게 키스 하려고 했을 때 소년을 밀쳐 냈고, 어떻게든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소년과 단둘이 있는 경우를 극력 피했다.(크세노폰 「아게실라오스」5·4) 그런가 하면 자기가 에라스테스로 받아들이지 않은 자가 설사 권력자일지라도 그에 대한 신체적 봉사를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한 어느 미소년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의 생애」24) 용병 대장 데메트리오스(Demetrios)는 아테네에 머물면서 마치 폭군이나 된 것처럼 창녀나 소년들을 강제로 불러들여 무질서한 성적 쾌락에 빠져 있었다. 그는 데모클레스(Demokles)라는 미소년에게도 욕망을 느껴 사랑을 구했지만 데모클레스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몸의 안전을 위해서 몰래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방탕한 데메트리오스는 데모클레스가 어느 사설 목욕탕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곳으로 가서 그를 겁탈하려고 하자, 데모클레스는 달리 도망갈 길이 없다고 여기고 뜨거운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의 뚜껑을 열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밖에 소년들이 김나지움 즉 레슬링 경기장에서 알몸으로 경기를 하게 하는 관습 자체가 소년사랑을 확대시킨 큰 원인 중 하나로 생각하는 글도 플라톤의 「법률(Nomoi)」(1· 636)을 비롯해서 키케로의 「투스쿨룸 대화(Tusc.)」(4·33)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키케로는 앞의 책에서 엔니우스(Ennius)가 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노출 하는 것은 추행의 시작이다”라고 하는 시행을 찬사를 담아 인용하고 있다. 물론 레슬링 훈련이 미소년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어른 남성들의 관음증을 충족시키려고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소년사랑을 비난하고 있는 플라톤은 수호자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하물며 여성들도 옷을 벗고 남성들과 체육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5권 452a, b). 분명 소년사랑의 발생 배경에는 그것과는 다른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소년사랑의 맹아는 일찍이 남성 중심의 전시 동원 체제를 항시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그리스 민족 대이동의 시대에서 부터 구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사회는 여느 고대 사회 못지않게 역사 이래 극히 남성 중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여성도 남성과 성향에 있어 동류의 존재이고 남성과 마찬가지로 능히 수호자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국가」5권 456a, b) 당시로서는 매우 놀랍고 대담한 생각이었지만,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 시대에서도 여전히 여성의 역할은 오로지 가사와 아이들의 양육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고대 그리스의 성인 남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초래한 욕구 불만 때문에 헤타이라나 소년들에게서 성적 욕망을 해소하려고 했던 것일까?

(다음에 소년사랑 (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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