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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변증법 반성 논리4-본질에 이르는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논리4-본질에 이르는 길

1)

본질론을 시작하며, 헤겔은 그 서론 격으로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라는 주장을 전개한다. 이 주장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존재가 지양되어서 본질로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양된 것이기에 존재한다[sein]의 과거 분사 ‘gewesen’에서 본질[Wesen]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본질에 관한 인식은 직접 일어나지 않으며, 직접 인식된 존재를 지양해서 얻어진 매개적 인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양된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하다. 헤겔은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서술하는데 우선 그것은 개별자인 존재자에서 일반자인 본질로 이행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일반자가 근거이고 개별자는 그 근거로부터 나온 산물이므로 이는 결과에서 근거로 되돌아가는 것 즉 ‘근거로의 복귀’라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추상적 개념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구체적 과정과 다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갑자기 당혹하게 된다. 흔히 논리학은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즉 추상이 구체화되는 하강하는 연역적 과정으로 생각된다. 반면 정신현상학은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일반적 개념에 이르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으로 상승하는 귀납적 과정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논리학에서 존재론의 운동을 거쳐 마침내 도달한 결과인 본질은 헤겔 자신의 말대로 개별 현존의 근거가 되는 일반적인 본질이니, 논리학의 전개 과정이 상승하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이었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해서 논리학의 길이 정신현상학의 길과 같아진 것인가?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는 여러 번 강조해서 설명했다. 정신현상학은 표면적으로는 상승하는 귀납적 과정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념의 자기실현이 매개되어 있다. 거꾸로 논리학은 표면적으로는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경험이 상승하여 자기 내로 복귀하는 과정을 매개로 한다.

이런 설명을 전제로 한다면, 헤겔이 여기서 본질에 이르는 길은 존재가 지양되어 근거로 복귀한 길이라고 한 주장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헤겔은 여기서 논리학에서 본질이 출현하는 매개적 길을 설명한 것이다. 실제 논리학에서 존재는 추상적인 질로부터 시작하여 더 구체화한 양으로 발전하고 이 양이 더욱 구체화하면서 척도를 거쳐 본질에 이르렀다. 이런 구체화하는 과정이 논리학의 표면적 길이다.

2)

헤겔은 자기 내 복귀 과정으로서 지양을 또 다른 측면에서 파악하는데, 사실 헤겔이 이 서론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에서 강조하려는 측면은 바로 이런 측면에 있다.

존재의 지양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나의 방식은 곧 그 지양이 외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지양은 자의적인 추상 작용인데, 만일 본질이 주관이 자의적으로 추상하여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개별 존재자의 본성에 무관한 것이 될 것이다.

흔히 경험적 사실을 추상하여 일반적 본질을 얻는다는 과학적 작업은 자칫 이런 주관적인 추상에 머물러 주관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본질을 얻을 뿐이다. 이것은 자주 경험 과학이 빠져드는 오류인데, 헤겔은 이런 주관적 본질을 규정된 존재에 대립하는 본질이며, 비록 순수한 존재이며 무규정적인 단순 존재라고 하더라도, 이는 내적으로 죽어 있는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주관적 자의적 추상을 비판하면서 헤겔은 존재에서 본질에 이르는 과정은 “존재 자체가 스스로 거쳐나가는 길”이며, 이는 자기 부정을 통해 나가는 ‘무한한 운동’이어서 ‘내면화의 길’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내면화를 통해 얻은 본질은 주관적 본질처럼 존재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관계가 절대적으로 소멸해서, 존재를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 내에 들어 있는 본질이다. 이런 본질은 존재에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에 내면적으로 관계하므로 이는 주관적인 본질이 아닌 객관적 본질이다.

3)

주관적 본질 또는 ‘단순한 그 자체 존재’와 대립하는 객관적 본질 또는 ‘절대적 그 자체 존재’가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사물의 객관적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철학의 이념이며 모든 철학이 이를 목표로 했으나 결국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길은 자주 본질 직관을 끌어들여 해결되지만, 헤겔은 이런 본질 직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식은 개념을 통한 인식이지만, 이런 개념적 인식은 칸트가 말하듯이 물 자체에 부딪히지 않는가? 그런데도 헤겔은 이런 객관적 본질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니, 과연 어떻게 그와 같은 길이 가능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이 길은 논리학에서는 서술되지 않는다. 이 길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발전하는 길을 통해 설명되었다. 헤겔은 여기서 그런 길을 전제로 하고 그런 길이 매개되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존재에서 본질에 이르는 길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길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서술된 의식 경험의 길을 여기서 다시 정리하자면, 그 길은 주관적 개념이 자기모순을 통해 나가는 길이다. 이 개념은 자기를 규정하여 대상화하지만, 여기서 현상을 넘어선 물 자체 즉 자기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이 개념은 개별적 개념임이 드러나며, 이제 개별적 개념을 넘어서 모순적 경험까지 포괄하는 일반적 개념이 출현한다.

이 일반적 개념은 사물 자체에 더 적합한 내재적 개념 즉 객관적 개념이 되며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대상화가 일어난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자기모순을 겪는 가운데 마침내 개별적 개념은 주관적인 개념을 벗어나 사물 자체에 객관적인 일반적 개념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등장한 개념은 대상에 대해 외면적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의식 경험의 길이 반복해서 일어남으로써 대상에 대해 내재적인 객관적 개념이 출현한다. 즉 이런 내재성과 객관성은 의식 경험의 길이 반복하면서 점차 증가해 왔다.

4)

이런 의식 경험의 길을 매개로 하면, 주관적 본질이 어떻게 객관적 본질로 발전하는지가 이해된다.

정신현상학에서 본질은 감각적 확신의 대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지성을 거쳐 지성 장 끝에서 자기의식에 이르기 직전에 도달한다. 이때 헤겔은 물체의 본질로서 법칙이 마침내 생명의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 생명의 개념이 곧 논리학에서는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정신현상학의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 논리학에서는 존재론으로 전개된다. 이 존재론의 처음 출발점은 감각적 질인데, 이는 아직 주관적 본질인 존재 범주[단순한 An sich]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처음 등장한 주관적 본질은 존재론의 운동을 통해 생명 개념에 이르는데 이 생명 개념이 곧 객관적 본질이다.

논리학에서는 이렇게 도달한 본질이 처음 추상적으로 출현했다가 이를 구체화하면서 마침내 실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처음 추상적 본질을 헤겔은 무규정적 본질이라 하며, 구체적으로 실현된 본질은 무한한 대자 존재로서 본질이라 한다.

“이렇듯 존재가 완전히 자기 내로 되돌아옴을 의미하는 본질은 처음에는 무규정적인 본질이다. 존재가 지닌 규정성은 그 속에 지양되어 있으니 본질은 자기 내에 이들 규정성을 포함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본질에서 정립된 방식으로 포함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자기와 통일되어 단순성 속에 있는 절대적 본질은 어떤 현존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현존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헤겔 논리학, GW11, 242)

“왜냐하면, 절대적 본질이란 곧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인 존재이니 즉 그 자신이 그 자체로 내포하는 규정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본질은 그 자신을 자기로부터 반발하게 하거나 자기를 무차별하게 대하여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자기를 자기에 대립하게 한다. 또한, 절대적 본질은 자기로부터 자기를 구별하는 가운데 자기와 통일을 이루는 한에서 오직 무한한 대자 존재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2)

4)

헤겔은 이 서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질의 운동을 존재론에서 등장한 질이나 양에서의 운동과 비교한다. 존재론에서 하나의 질은 그 자체에서 다른 질로 이행한다. 이는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는 부정의 길이다. 양에서 이행은 자기를 넘어서 자기에 도달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양은 연속적이며 그것들의 차이는 이런 연속성에 외면적인 크기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질이나 양에서의 운동은 수평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하나의 양에서 다른 양으로 이행이 일어난다. 이 길은 한 마리 개미가 무한한 평면을 지나가는 길처럼 보인다.

반면 이제 본질의 운동은 앞에서 말했듯이 존재론에서의 운동과 전혀 다르다. 이 운동에서 개체는 바로 다른 개체로 직접 이행하지 않는다. 마치 양자 사이에는 무한한 심연이 놓여있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체와 개체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개체와 개체를 연결해 주는 것은 곧 본질이다. 개체는 자기의 배후에 있는 본질로 이행하고 이 본질이 다시 개체를 생산하면서 이 개체들의 연관은 배후에 있는 본질을 매개로 일어나는 연관이다. 그러므로 이런 운동은 마치 수직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처럼 보인다.

“본질의 운동은 그 자신에서 부정과 규정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자기를 현존하게 하고 그것이 지닌 잠재적인 것을 무한한 대자 존재로 생성하게 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본질은 잠재적인 존재에 그의 잠재적 존재와 동일한 현존을 부여하면서 개념으로 된다.”(헤겔 논리학, GW11, 243)

개별적 본질은 단순한 종이다. 단순한 종에서 현존 즉 개체는 우연적이다. 종은 개체에 내재할 뿐이다. 그러나 개념에 이르면 이 본질은 일반적인 본질로 되며 이는 자기 의식적 개인이 이루는 사회다. 이 사회는 개인에 필연적이며 개인과 독립해서 실존한다. 이 독립적 실존이 자립적으로 되면 그것이 곧 개념이며 구체적으로는 국가이다.

본질이 개념에 이르는 길은 역시 의식 경험, 즉 자기모순을 통해 발전하면서 이를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논리학에서 전형적인 방식인 회고적 방식으로 서술한다면, 이는 본질 속에 이미 내재하는 추상적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여 구체적 개념이 되는 길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논리3-칸트의 미적 판단과 반성 운동[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논리3-칸트의 미적 판단과 반성 운동

1)

위에서 비교라는 개념이 반성 개념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말했다. 칸트는 이처럼 비교를 통해 나오는 반성 개념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반성 개념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이미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할 때 선험적 반성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가 성질과 현존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오류에 빠졌는데 그는 이를 구별하면서 이런 구별을 대상 자체에서 차이가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 능력에서의 차이를 통해 제시한다.

칸트는 성질은 지성의 개념에 귀속되는 것이며 반면 현존은 감성의 형식에 귀속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을 그것의 근거인 인식 능력에 귀속하는 작업을 선험적 반성이라 했다. 여기서 반성은 어떤 것의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반성 즉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성 개념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한 것은 판단력 비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두 가지 판단을 구분한다. 하나는 규정적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반성적 판단이다.

2)

규정적 판단은 일반적 개념 아래에 개별적인 대상에 포섭하는 것이고 모든 인식 판단은 이런 규정적 판단이다. 칸트는 도덕적 실천 판단 역시 이런 포섭 판단 속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와 다른 또 하나의 판단이 있는데, 그것은 개별자가 주어지면 이 개별자에 적합한 어던 일반적 개념을 찾아내는 판단이다.

칸트는 이런 판단을 반성 판단이라 하면서 심미적 판단은 인식이나 실천 판단과 달리 이런 반성 판단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규정적 판단은 지성의 작용이라면 반성 판단은 상상력의 작용으로 보니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인식의 근원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

여기서 제시된 반성 개념은 앞에서 논의된 비교를 통해 나오는 반성 개념과 거리가 있다. 칸트 자신은 양자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양자를 구별해서 용어를 구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칸트가 반성 개념을 이렇게 이중적으로 사용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칸트의 이런 시도는 곧 반박에 부딪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칸트가 제시한 규정적 판단과 반성 판단의 구별은 분명하지 않다.

규정적 판단은 일반적 개념을 개별 대상에 적용하는 것인데, 이런 적용은 직접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도식을 매개로 해서 적용된다. 그런데 이 도식은 상상력(칸트는 구상력이라 했지만, 본래 상상력과 같은 것이다)의 작용이다. 상상력이 미리 개별 대상에 적합한 일반적 개념을 찾아놓지 않았다면, 이런 구성 작용도 불가능할 것이다.

거꾸로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을 통해 개별자에 적합한 일반적 개념에 귀속하는 것도 지성의 매개를 통해서 가능하다. 상상력은 개별자를 임의로 일반 개념에 귀속시키니, 이는 그 자체로 보면 자의적 작용이다. 하지만 미적 판단이 자의적이지 않고 일반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 개별자에 가장 적합한 일반적 개념이어야 한다. 이는 그 개별자를 필연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이니, 이런 필연적 관계는 지성의 개념 구성 작용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3)

이제 헤겔은 칸트가 구별한 두 판단 형식 즉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을 판단 자체에 내재하는 두 가지 과정으로 통합한다.

하나의 판단은 술어가 주어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의 관계라 한다. 예를 들어 이 꽃은 빨간색이라는 판단은 이 꽃이 지닌 여러 성질 가운데 하나인 색깔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 내재 관계는 곧 주어인 일반 개념에 속하는 구체적 술어를 끌어내는 측면에서 개념의 구체화하는 운동을 보여준다.

반면 주어인 어떤 개별자들이 술어인 일반적 유에 속하는 관계를 포섭의 관계라고 한다. 이런 빨간 꽃들은 장미다라고 할 때와 같다. 이런 개별자로부터 일반적 유를 찾아 들어가는 운동 과정을 헤겔은 근거로의 복귀라고 한다.

헤겔이 개념 논리학 판단론에서 전개한 판단의 두 가지 의미는 본질론에서는 반성 운동의 두 가지 형식으로 규정된다. 개념이 구체화하는 과정은 정립하는 반성에 속하게 되며, 반면 근거에로 복귀하는 과정은 전제하는 반성에 속하게 된다.

헤겔은 칸트가 두 가지 과정을 두 가지 독자적인 판단으로 구분하여 하나는 인식과 도덕의 판단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미적 판단으로 보았던 것과 달리, 양자를 하나의 판단이 지닌 두 가지 대립된 계기로 이해한다.

즉 그에게서 A는 B다라는 판단은, 한편으로는 A의 개념을 구체화하여 술어 B를 정립하는 과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자 A를 추상화하여 일반적 유인 B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에게게서 주어와 술어는 각기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A는 한편으로는 추상적 개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자다. 개별자는 내적으로는 추상적 개념을 담지하고 있으니 구체적으로 꽃은 개별 장미인 동시에 장미의 일반 개념을 담고 있다. 이런 개별자인 동시에 내적인 일반 개념을 헤겔은 그 자체 존재라고 규정한다.

반면, 술어 B는 한편으로는 구체화된 개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 유이니, 예를 들어 빨간색은 장미 개념의 구체화이면서 장미의 일반적 유에 해당하니, 헤겔은 이를 개념이 그 자체적으로 동시에 대자적으로 실현된 존재라고 한다.

4)

헤겔의 반성 개념은 칸트가 벌여놓았던 철학적 논의를 종합하는 가운데 출현한다. 그는 앞에서 칸트가 구성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을 구별한 것을 반성의 두 가지 개념 즉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으로 구분한다.

헤겔은 양자를 하나의 판단이 지닌 두 가지 계기로 통합한다. 즉 정립하는 반성은 전제하는 반성을 매개로 하며 거꾸로 전제하는 반성 역시 정립하는 반성을 매개로 한다.

이런 통합된 반성 개념을 헤겔은 다시 공간적 현존과 연관시킨다. 사물이 관계하여 공간을 이룰 때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 동일성과 차이와 같은 반성 개념이다. 이런 반성 개념은 사물이 관계하는 공간에서만 적용할 수 있으며 그 관계가 없다면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헤겔에서 모든 성질은 관계 속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일정한 공간적 현존을 지니고 여기서 반성 개념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에서 이 공간적 관계는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서 달라진다.

앞에서 질의 범주를 다룰 때 하나의 질은 이미 그 자체에서[an ihm]에서 다른 질과 관계한다. 여기서 하나의 질은 다른 질로 단적으로 이행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단적 이행의 관계도 하나의 공간이지만, 사실 양자가 동일한지 차이 있는지를 비교할 수는 있더라도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이행은 순간적으로 이행하는 명멸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양적인 범주를 보자. 양적인 범주는 자기를 넘어서 간다. 여기서는 연속성의 관계가 존재하며 그 차이는 양적인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범주를 적용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양은 그 물체에 외면적이기 때문이다. 3과 3은 같고 3과 4는 같지 않지만, 세 개의 바퀴를 지닌 자전거와 세 개의 다리를 지닌 솥이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관계가 이미 존재론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여기서 반성 개념을 다루지 않는다. 헤겔은 반성 개념을 비로소 본질 개념이 출현한 이후인 본질론에서 다룬다. 본질은 앞에서 생명의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생명체의 종과 개체 사이의 관계가 전개된다.

이때 개체는 다른 개체에 대해 같은 종이지만, 서로 다른 개체가 되면서 여기서는 같다와 다르다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나와 타자는 하나의 개체로서 지속한다. 이런 지속성이 있으므로 비교될 수 있으니 동일한지 다른지가 문제 된다. 여기서 개체는 종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작용한다. 암수의 구별은 종의 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5)

이처럼 본질과 개체 사이의 관계에서 비로소 반성 개념이 적용될 수 있다. 반성 개념 자체는 어떤 공간에 현존하는 사물들 사이에 적용된다. 그러나 그런 사물들이 비교되는 공간 자체를 만들어내는 본질과 현존, 종과 개체의 관계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며 이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반성 운동 즉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이다.

반면 같은 공간 속에서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는 개체들은 직접적 연관이 없다. 그것들은 심연을 통해 단절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종의 개체들 사이의 관계는 질의 관계나 양의 관계와 구분된다. 질과 양에서 서로 관계하는 것들은 직접 서로 관계한다.

개체들의 직접 관계를 수평적 관계라 한다면, 종의 개체들은 그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심연을 통해 관계하니 즉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본질을 통해 재생산 된 현존이므로 이런 점에서 본질을 통해 매개적으로 관계한다. 이를 우리는 수직적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수평적 관계와 수직적 관계를 구분할 때, 헤겔은 반성 개념 즉 동일성과 차이 등의 개념은 수평적 관계에 적용되며, 규정하는 반성이나 전제하는 반성과 같은 반성하는 운동은 수직적으로 관계한다. 수평적 관계는 이런 수직적 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거꾸로 수직적 관계는 수평적 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논리2-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물방울 논쟁[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논리2-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물방울 논쟁

1)

앞에서 형식적으로 본질론의 운동이 반성 운동이라는 점을 서술했다. 이제 본질론에서 다루는 개념들이 내용적으로 반성 개념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서는 반성 개념에 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반성 개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반성 개념으로 ‘아버지와 아들’, ‘학교와 공장’, ‘민중과 지도자’, ‘왼손과 오른손’, ‘아래와 위’ 등과 같은 개념들을 들고 있다. 이런 개념들은 흔히 짝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라 하는데, 여기서 짝을 이룬다는 것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서로 대립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개념들은 그중 하나를 규정하기 위해 반드시 이와 짝을 이루는 다른 것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왼쪽은 오른쪽이 아닌 것이며 오른쪽은 왼쪽이 아닌 것이다. 지도자는 민중의 지도자이고 민중은 지도자의 민중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아버지며,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반성적인 규정성은 사물을 고립적으로 본다면, 발견될 수 없는 규정성이다. 왼쪽에 있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살펴보아도 거기에 왼쪽이라는 성질을 발견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왼쪽에 있지만, 또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는 오른쪽에 있다. 아들이 없이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아버지 없이 아들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반성적 규정성은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관계해서 볼 때만 비로소 생겨나는 규정성이다.

어떻게 본다면 모든 성질은 관계 속에 있다. 관계 속에 나타나지 않은 성질은 없다는 점에서,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반성 규정이 직접 발견되는 성질에 우선하고 그 근거가 된다. 심지어 본질주의적 인식론에서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직관적으로 인식된다고 보는 많은 개념조차 따져보면 이런 대립적 관계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은 없다.

자주 가장 구체적인 감각적 질로 여겨지는 빨간색을 보더라도, 이는 이미 파란색이나 노란색에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감각적 성질들조차 지시를 통해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분석철학자 콰인이 지시의 불확정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2)

논리학에서는 이런 반성 개념 가운데 판단 형식에 속하는 범주적인 것만을 다룬다. 그런 범주의 구체적인 예로서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네 가지를 거론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형식과 내용, 내면과 외면 등과 같은 개념인데 이런 반성 개념은 칸트가 다루면서 비로소 철학적인 논의의 영역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칸트 이전 로크가 반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를 외적 경험과 구별되는 내적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할 뿐이었다. 즉 감정이나 어떤 지각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을 로크는 반성이라 했는데 이는 외적 지각과 마찬가지로 직관적인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이기에 외적 경험과 개념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나 로크는 이미 반성 개념에 관한 그와 다른 유래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유래는 외적 지각이든 내적 반성이든 일정한 관념들을 서로 비교할 때다. 이런 비교는 마음의 능동적 활동에 속하며 이런 비교를 통해 우리는 관념들이 서로 동일하다든가 차이가 있다라고 말한다.

로크는 이를 ‘논리적 반성 개념’이라고 했는데, 이 논리적 반성 개념은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유명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그의 선험주의를 옹호하려 했다. 논란의 출발점은 라이프니츠가 제시한 동일성의 원리 때문이다.

이 동일성의 원리는 마음의 능동적인 활동 즉 비교를 통해서 사물에 적용된다. 즉 이런 비교를 통해서 비교된 대상이 서로 동일한지 차이가 있는지가 규정된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두 사물의 모든 성질이 동일할 경우 두 사물은 하나일 뿐이라는 원리를 제시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두 물방울이나 두 나뭇잎을 예로 들면서 성질이 동일하더라도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존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은 ‘현존’이라는 개념이다. 라이프니츠는 현존[Dasein]을-이는 곧 공간적 존재[Da-Sein]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성질로 간주하였으므로, 이조차 같으면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반면 칸트는 현존은 경험을 통해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이는 사물의 성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성질에서 배제했으니, 다른 성질이 다 동일하더라도 공간적 존재가 다를 수 있으니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틀렸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사물의 성질과 공간적 현존은 주어지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성질은 지성의 범주에 귀속하는 것이며, 공간적 현존은 감성의 형식에 귀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을 성질에 적용하는 경우와 공간적 현존에 적용하는 것은 구별된다. 즉 성질은 동일하더라도 현존은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공간이 선험적 수용 형식이라고 보았으니, 공간을 주관화하게 된다. 그러면 사물 자체에는 공간적 현존이 있는가 없는가? 사물 자체는 공간적 현존이 없는데 주관의 공간적 형식 속에 수용하면서 공간적 현존이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사물 자체는 공간적 현존성을 지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주관의 감성인가?

칸트로서는 주관의 형식 이전의 사물 자체는 알 수 없으므로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어느 입장에 서든가 칸트는 라이프니츠에 대해 불리한 처지에 빠진다. 즉 자가당착에 빠진다는 말이다.

사물에는 공간성이 없다면, 공간적 현존은 사물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을 지나가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 칸트가 말한 두 물방울의 현존이나 두 나뭇잎의 현존은 주관적 차이에 불과하니, 사물 자체는 라이프니츠의 주장과 같이 성질이 동일하다면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사물에 공간적 현존이 있고 그것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 그 역시 다시 라이프니츠의 주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공간적 현존이 사물의 성질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질이 동일하다 할 때는 공간적 현존조차 동일하게 되니, 여기서도 역시 오직 하나의 사물만이 있게 된다.

4)

그런데 칸트의 논의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옳은지, 칸트가 옳은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칸트의 라이프니츠 비판을 통해 헤겔에서 반성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칸트의 라이프니츠 비판의 전제가 된 것은 성질과 현존의 구별이다. 전자는 지성에 속하고 후자는 감성에 속한다. 그러나 공간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공간의 개념이 문제가 된다.

공간이란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것처럼 사물의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성질처럼 범주 개념이 구성하는 판단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공간의 질과 공간의 양을 논할 수 없다. 모든 공간은 규정성이 없는 것 즉 빈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공간 개념을 주관화하여 공간을 다만 감성의 형식이 만들어내는 산물로 보면, 사물 자체는 공간적 차이가 없으니 이 사물들은 마치 꿈속 부유하는 것이고 서로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헤겔은 공간을 사물이 맺는 비교의 관계로 본다. 사물은 여러 성질을 지니고 이런 성질에 따라 다른 사물과 비교된다. 이렇게 다른 사물과 어떤 성질의 측면에서 비교될 때 이 비교 관계가 공간을 이룬다. 즉 어떤 사물은 이 공간에 어떤 위치에 현존한다. 그 위치란 곧 그 공간 속의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의 사물은 여러 성질을 지니므로 그 성질에 따라 ① 여러 공간 속에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소금은 맛의 공간에 들어 있거나 색깔의 공간에 들어 있다. 각 공간은 사물의 어떤 색깔이나 소리와 같은 성질이 이루는 것이므로 고유하게 어떤 질을 지니지만, 이 공간을 사물이 비교되는 측면에서 본다면 동질적이고 ② 그 동질성 외 다른 측면에서는 아무 차이도 없는 무규정성을 지닌다.

이 관계하는 공간 밖에서 사물은 공간의 질적 성격과 구분되는 ③ 다른 독자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으니 이를 공간적 현존과 구별되는 성질이라 한다. 이 성질은 그 공간에 들어 있는 사물마다 다른 성질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간은 구체적이다. 즉 공간은 사물의 특정한 성질에서 서로 맺는 관계이니, 독자적인 질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들어가는 사물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 공간은 개별적이다. 화학의 공간이 있다면 생물의 공간이 있고 사회적 공간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물이 모두 하나의 물체로서 속하는 아주 추상적이며 포괄적인 공간 흔히 자연 과학의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공간을 이처럼 관계로 본다면, 사물의 성질에 적용되는 지성의 범주와 구별되는 공간적 현존에 적용되는 범주를 생각할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반성 개념이다.

라이프니츠와 칸트는 사물의 현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성질에 대해서도 반성 개념을 사용했다. 즉 성질이 동일하거나 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색깔이 동일하고 두 소리가 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질에 대해 반성 개념을 사용할 때 이는 이미 성질을 통해 형성되는 공간을 전제로 한다. 색깔의 공간이 있다. 사과의 색깔과 석류의 색깔은 이 공간에서 현존하는 위치에 따라서 동일한 현존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소리의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서 C음과 G음은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구별된다.

이와 같은 서로 관계 맺는 공간이 없다면, 두 물체는 서로 동일한지 차이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빨간색과 G음은 같은가 다른가? 코끼리와 수3은 같은가 다른가?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있으므로 거기서 반성 개념이 적용된다.

나아가서 서로 관계 맺는 공간이 달라진다면, 동일한 물체의 동일성과 차이도 달라진다. 신호등의 체계에서 주황색은 빨간색과 같고 녹색은 파란색과 같다. 그러나 무지개색의 체계에서 주황색과 빨간색, 녹색과 파란색은 서로 다른 색깔이다.

여기서 반성 개념의 한 특징이 드러난다. 칸트가 말하는 지성의 개념은 사물의 성질과 관계한다. 그것과 달리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용과 형식, 외면과 내면 등과 같은 논리학에서 다루는 반성 개념은 사물이 공간 속에 가지는 위치 즉 공간적 현존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논리1-헤겔 논리학에서 본질론의 지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논리1-헤겔 논리학에서 본질론의 지위

1)

이제 헤겔의 논리학 가운데 1부 객관 논리학 1권 존재론에 관한 소개를 마치고 2권 본질론에 관한 대결로 들어가게 되었다. 헤겔 논리학 또는 변증법에서 독특하지 않은 부분은 없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독특해서 아마도 헤겔의 논리학의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이 있다면 곧 존재론과 개념론을 매개하는 본질론이 될 것이다.

앞에서 헤겔 논리학의 1부 객관 논리학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이 차례로 전개된 것이라 했다. 그 가운데 본질론은 관계의 범주와 양상 범주가 전개된다. 관계의 범주란 곧 정언, 가언, 선언 판단 형식을 말하며 양상 범주란 가능, 우연, 필연적 판단 형식을 말한다.

형식 논리학에서는 관계 범주나 양상 범주는 독립적인 판단 형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 범주들은 복합적인 판단 형식이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12 범주표를 따라서 관계나 양상의 범주도 독립적인 하나의 판단 형식으로 파악한다.

칸트는 이런 판단 형식이 형식 논리학적으로 본다면 복합 판단 형식(예를 들어‘ P이면 Q이다’라든가, ‘명제 p는 필연적이라’는 판단 형식을 보라)을 취하지만, 그의 선험적 인식론으로 본다면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인식 범주라 보았기에 이를 12 범주표 안에 집어넣어 다루었다.

헤겔에서 논리학 역시 단순한 형식적인 학문은 아니다. 그의 논리학은 그 배후에 인식의 운동이 깔려있으며, 논리적 범주의 전개는 이런 인식 운동을 매개로 해서 전개되는 것이다. 논리의 전개는 회고적인데, 인식의 결과로 얻어지는 개념을 그 개념이 실현된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와 마찬가지로 관계 범주나 양상 범주가 인식적으로 독립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서 이를 판단 형식 즉 범주로 다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이런 본질론은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이 본질론은 자연 철학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앞에서 존재론은 자연에서 마침내 생명 개념이 탄생하는 과정으로 설명되었다. 그것에 비추어 보면, 본질론은 이 생명 개념이 발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생명 개념은 마침내 인간에 이르러 자기의식적 존재로 전환한다. 이런 전환과 더불어 그 이전 개체적 현존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종적 본질은 자기의식적 개체가 자각적으로 구성하는 사회적 실체로 발전한다.

종적 본질이 일반성이지만, 개별자를 벗어나지 못한 내적인 일반성이고 그 자체로는 독립적으로 현존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 사회적 실체는 개체 밖에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일반자이다. 생명의 본질 즉 종은 단순히 지속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실체는 이처럼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사회적 실체이기에 실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본질론 마지막에 등장하는 실체가 다시 주체화하면서 마침내 개념에 도달하고 여기서부터는 주관 논리학 즉 개념론이 전개된다.

3)

본질론은 또 다른 관점에서 주목받는다. 이 부분은 존재론에서 개념론으로 나가도록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하므로, 논리학의 중추를 차지하는데 존재론이 본질이라는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이라면, 개념론은 개념이 자기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운동이다. 두 운동은 표면적으로 보면 서로 대립하니, 전자가 상승하는 길이라면 후자가 하강하는 길이다.

이런 존재에서 개념으로, 상승에서 하강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이 두 운동을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그사이에 있는 본질론에서 전개된 반성 운동이다. 이 반성 개념은 지금까지 철학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으나 헤겔은 본질론에서 반성 개념을 논의의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 때문에 헤겔의 본질론은 반성 논리라고도 하는데, 필자의 생각으로 헤겔 논리학의 핵심은 존재론에서 나오는 생성 개념도, 개념론에 나오는 개념의 자기실현 운동도 아니고, 본질론에서 전개된 이 반성 운동이 아닐까 한다. 이 반성 운동이 있으므로 생성 운동이 자기실현 운동으로 나갈 수 있으니 이 반성 운동이야말로 헤겔 논리학 전체의 명운이 달린 핵심 문제다.

여기서 헤겔의 반성 개념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헤겔의 논리학 본질론에서 다루는 대상이 이런 반성 운동이라는 사실조차 의심스럽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은 본질론 1편 1장에서 반성 운동을 설명할 뿐이며, 곧이어 전개되는 개념들은 근거와 조건, 현존과 현상, 원인과 결과, 우연과 필연과 같은 개념들인데 과연 이런 개념들의 상호 관계를 반성 운동 속에 포괄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선 헤겔 논리학의 형식적 체계의 측면이 그런 논의에 대한 답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논리학 존재론을 다룰 때(헤겔 형이상학 산책) 이미 언급한 사실이지만, 다시 언급하자면, 헤겔의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은 전체적으로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 즉 범주의 체계에 따라 전개되었다.

1부 존재론은 질의 범주와 양의 범주가 다루어졌다. 1부 본질론에서는 관계 범주와 양상 범주가 다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존재론과 본질론에서 이렇게 판단 형식이나 범주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처음 들어가면서 전체를 개괄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존재론에서는 서문 격으로 ‘학문은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는가’가 논의되고 이어서 1편 1장에서 존재와 무, 생성이 다루어진다. 1편 2장이 현존인데 여기서 개별적 감각적 질의 범주가 다루어지니, 실질적으로 시작은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본질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본질론은 서문 격으로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가 나오고 1편 1장에서 본질과 가상 그리고 반성 운동이 다루어진다. 그런 다음 1편 2장에서 반성 규정으로서 동일성, 차이, 모순이 논의된다. 그런 다음 1편 3장에 이르러 비로소 근거와 조건이라는 관계가 다루어지는데 이 부분이 실질적으로 본질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존재론의 서문과 1편 1장이 존재론 전체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서술한 부분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여기 본질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본질론에서 서문, 1편 1장 그리고 2장까지 본질이 전개하는 운동의 가장 근본적 개념이 다루어진다. 그 개념의 핵심은 모두 반성 운동이라는 개념(1장 C)에 수렴된다. 본질과 가상의 개념(1장 A, B)이나 동일성과 차이 모순의 개념(2장)은 이 반성 운동의 한 측면을 이룰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반성 운동 개념은 존재론에서 생성 운동과 마찬가지로 본질론 전체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첨언하자면, 2부 주관 논리학에서 개념론의 앞부분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일반적 서술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선 서론 격으로 ‘개념 일반에 관해서’가 나온다. 여기서 개념 운동이 일반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다만 개념론은 1편 1장에서 개념을 다루고 2장에서 판단을 3장에서 추론을 다루는데 이는 이미 개념 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9-자본의 탄생과 본질의 탄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9-자본의 탄생과 본질의 탄생

1)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상품, 화폐, 자본에 이르는 과정은 그 치밀함과 대담함 때문에 감탄을 자아낸다. 마르크스가 이런 전개 과정을 어떻게 발상했을까 늘 궁금했다. 아마도 헤겔의 논리학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헤겔 논리학 어느 부분일까?

헤겔 논리학 어디에서도 똑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으니, 이는 분명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발견이고 마르크스의 유물 변증법 논리를 대변하는 혁명적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적어도 헤겔의 변증법이 마르크스에게 일정한 정도 영감을 준 것은 아닐까 하는데, 그 영감을 받은 부분을 알고 싶었다.

필자는 헤겔이 존재론 마지막 부분에 전개한 척도 관계, 기체 그리고 본질에 이르는 과정을 읽어나가는 중 아마도 이 부분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상품, 화폐, 자본의 과정과 가장 닮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마르크스가 전개한 이런 전환 과정은 그저 경제학적인 사실로만 이해되었고 그 논리적 전개 과정은 대체로 주목받지 못했다. 헤겔의 논리학과 연결되는 접점을 찾는다면, 마르크스의 상품, 화폐, 자본의 개념이 좀 더 개념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한다.

거꾸로 헤겔의 척도 관계, 기체, 본질의 전개 과정은 너무 사변적이어서 이해하기 난감했다. 필자가 현대에 발전한 유기화학과 단백질 합성을 이용해 헤겔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려 했지만, 헤겔이 그런 과학적 사실을 알 리는 없었으니, 이런 식의 이해는 너무 억지로 가져다 붙인 것에 가깝다.

그런데 헤겔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헤겔의 숨결이 살아 숨 쉬던 시대 1840년대 학습했던 마르크스를 통해서 본다면, 더 설득력 있게 헤겔의 논리가 이해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여기서 필자는 헤겔의 논리와 마르크스의 논리의 유사성을 최대한 밝혀 보려 한다. 이는 필자가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언젠가 해야 하겠다고 한 부분인데, 이제야 비로소 전개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는 부분이다.

2)

간단하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상품, 화폐, 자본이 전개되는 과정을 그려보자. 마르크스는 먼저 상품을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라는 두 척도의 결합물 즉 척도 관계로 이해한다. 교환 가치의 개념이나 사용 가치의 개념은 여기서 굳이 전개하지 않겠다.

이제 두 상품의 교환은 두 척도 관계 사이에 일어나는 이행에 비교할 수 있다. 이런 교환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용 가치 때문이다. 내가 생산한 상품이 다른 사람에게 사용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상호적이다. 상대방의 상품 역시 내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교환이 일어나는 비율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량을 의미하는 교환 가치에 따른다. 두 상품은 그것의 교환 가치에 비례하여 교환된다.

이런 교환은 헤겔이 척도 관계의 계열을 설명하는 방식과 같다. 예를 들어 산소 화합물의 계열을 보자. H2O, SO2, NO2 등 계열에서 각 화합물은 O의 일정 비율을 지닌다. 즉 O를 중심으로 놓는다면, 각기 1, 2, 2의 비율을 지닌다.

이런 비율은 H2O가 SO2로 전환할 때 두 화합물이 지니는 비율과 동일하다. 즉 H2O가 SO2나 NO2로 전환하려면 어느 경우나 2단위의 H2O가 필요하다. 여기서 O를 중심으로 이루는 물질의 구성 비율이 마치 상품의 교환 가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화합물은 고유한 질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화학적 구성이 변화함으로써 질적인 성격 자체도 변화하게 된다. 이는 곧 상품의 사용 가치의 전환을 의미하게 된다. H2O가 SO2로 전환할 때, 여기서 H2O에서 H와 O가 분리되어 O가 S와 결합하며 H는 상호 결합하면서(기체 분자가 되어 날아간다) 이런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는 마치 상품의 교환을 일으키는 사용 가치의 측면과 비교된다.

상품의 경우 사용 가치는 상품 밖에 있는 인간이 개입하지만, 척도 관계에서는 그 구성 요소 사이의 분리와 결합 관계를 통해서 일어난다. 여기서 이런 분리와 결합의 관계 자체는 각 척도 관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특성에 달려 있다는 차이점이 눈에 띈다.

3)

상품의 일대일 단순한 교환은 서로의 상품이 상대에게 사용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만남은 여러 현실적 제약을 지니고 있으므로 상품의 일대일 교환은 우연하고 개별적인 관계다. 상품의 교환 관계는 연속적인 계열을 이룰 수도 있다. 즉 A가 B로 교환되고, B가 C로 교환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연속적 계열은 일대일 단순 교환의 복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은 척도 관계의 이행을 과도한 것[Masslos]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즉 A에서 B로 이행하는 것은 직접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것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 과도한 것이라는 개념인 곧 상품의 일대일 교환에서처럼 양자 사이에 내적인 연결 없이 외적인 조건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헤겔은 척도 관계의 이행 과정 역시 연속적인 계열을 이룬다고 한다. A는 B로, 다시 B에서 C로 .. 이런 식으로 연속적인 계열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이행 계열은 마디 선을 이룬다. 헤겔은 이런 마디 선과 같은 이행 계열을 척도 관계의 무한 진행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행의 각 단계는 마찬가지로 과도한 것을 통해 일어나며 이는 외적이고 우연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런 무한 진행은 앞에서 말한 마르크스의 일대일 상품 교환의 연속적 계열과 닮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더 하나의 상품이 중심이 되어 A가 B와 교환되거나 A가 C로 교환되는 것이 일어난다. 이런 중심되는 상품이 생겨나면, 이 중심되는 상품은 화폐로 발전하게 된다.

화폐는 본래는 상품이며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를 모두 갖지만, 이제 화폐가 되면 그것이 지닌 사용 가치는 의미가 없어진다. 다만 그것은 교환 가치가 되며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되면서 일반적 교환을 담당하는 매체가 된다.

이처럼 화폐가 등장하면서 교환의 우연성이 사라진다. 이제 화폐는 모든 상품과 교환 가능하며 거꾸로 이 화폐는 모든 상품을 구매 가능하므로, 이를 통해 교환은 내적이며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헤겔에서 화합물 이행 관계에서 이런 화폐에 해당하는 것이 ‘차이 없는 존재[Indifferenz]’ 즉 ‘기체[Substrat]’다. 이 기체가 있으므로 두 화합물의 교환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화폐가 교환 작용을 매개하고 여기서 빠져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헤겔에서 기체 역시 화합물의 이행을 매개한 이후 이 반응에서 빠져나오며, 외적인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기체는 그 자체로 갖는 고유한 질을 가지지만, 화학적 반응에서 이 질이 문제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지닌 양적 비율만이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이 기체를 차이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화폐가 고유한 질이 문제 되지 않는 일반적 교환 가치인 것과 마찬가지다.

5)

마르크스에서 화폐는 다시 자본으로 발전한다. 이때 단순한 화폐만 가지고 자본이 될 수는 없다. 화폐는 교환에서 역할을 담당할 뿐, 그 자신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폐가 자본이 되면 이 자본은 자기를 증식한다. 오직 이처럼 증식할 수 있는 것만이 자본이다.

화폐가 자본이 되기 위해서는 두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불변 자본 즉 생산 수단이나 원료이며 다른 하나는 가변 자본 즉 노동력이다. 자본은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을 통해 자본이 된다.

불변 자본은 생산물에 가치를 이전할 뿐이며 가변 자본만이 새로운 가치를 추가로 생산한다. 그러므로 자본을 자본으로 만드는 핵심 즉 자본이 증식되는 힘 자체는 가변 자본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가변 자본은 불변 자본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 속에 담지될 수 있다. 만일 불변 자본이 없다면 가변 자본은 자기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자본이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헤겔에서 ‘잠재적인 차이 없는 존재[an sich Indifferenz]’가 ‘대자적인 차이 없는 존재’fuer sich Indifferenz]’로 즉 ‘기체’가 ‘본질’로 발전하는 과정과 같다.

이런 본질은 자기를 재생산한다. 그 결과 생겨난 현존은 본질과 동일하며 본질은 이런 현존의 끊임없는 재생산 속에서 자기를 유지한다. 본질이 자기를 현존으로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자연물이 재료로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본질의 현존은 본질과 외적 재로의 결합물이다.

자기 증식적 자본이 자기 증식하는 가변 자본과 가치의 담지자가 되는 불변 자본으로 이루어지듯, 생명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본질도 자기를 재생산하는 데 여기서 자연적 재료가 불변 자본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생명이 자기를 재생산하는 구조는 곧 가변 자본에 해당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자본은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증식하지만, 생명은 다만 자기를 재생산할 뿐이라는 데 있다.

6)

기체가 본질에 이르는 과정에서 헤겔은 두 단계를 설정했다. 하나는 역 비례 관계인데, 각 항이 두 질을 모두 포함하면서 그중 자기의 질은 증가하고 그만큼 상대방에서는 감소하며 이에 대립하는 항 역시 자기의 질이 증가함에 따라 상대가 가지고 있는 질은 감소하는 경우다.

그런데 이런 역 비례를 넘어서 제곱 비례에 이르게 되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여 타자가 되면서 동시에 자기 내로 복귀하여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이중적으로 형성되는 관계가 등장한다. 이 관계는 끊임없는 자기 재생산을 통해 일어나는 동적 상태이니 헤겔은 이를 생명 개념으로 규정했다.

전자가 유기 화합물에서 두 결합기 사이에 매개물이 증감하는 경우에 해당하고 후자는 두 결합기가 서로 상반적인 관계로 결합하면서 연쇄물을 형성하는(이중 나선의 펩타이드 결합체) 경우다.

이런 단계의 구분과 유사하게 자본의 경우도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일단 화폐가 상업 자본이 되었을 때, 이는 화폐가 교환을 매개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출발점과 목적이 다르다. 화폐 교환의 경우 상품이 화폐로 다시 상품으로 교환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구매를 위한 판매로 규정한다. 반면 상업 자본의 경우는 판매를 위한 구매다. 그 출발점에 화폐가 있으며 매개물이 상품이고 그 결과는 다시 화폐다.

이런 판매를 위한 구매는 이런 매매를 통해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헤겔에서는 역 비례 관계와 같다. 역 비례 관계는 유기 화학물로 설명하자면, 매개물 또는 촉매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는 경우다. 이때 촉매는 화합물을 매개한 이후 빠져나가지 않고 화합물 내부에 머무른다.

이는 마치 상업 자본에서 양 측면에 화폐가 있는데 가운데 상품이 변화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상품 교환에서 매개체인 화폐는 빠져나가지만, 상업 자본에서는 화폐가 남고 상품이 빠져나간다.

두 번째 단계인 생산 자본의 경우는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진 생산물의 가치가 증가하면서 자본이 증식하는 경우다. 자본은 자기를 재생산한다. 이 재생산은 자기를 분할하여 한편에는 불변 자본과 다른 한편에는 가변 자본으로 분할된다. 불변 자본은 기계나 원료로 이루어지며 이는 생산물 속에 자기를 연속한다.

이런 생산 자본은 헤겔의 개념에서는 본질에 해당한다. 여기서 본질은 자연 재료를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니 이런 자기 재생산이 곧 노동을 통한 자본의 증식과 닮았다.

7)

이상에서 헤겔의 척도 관계-기체-본질의 이행 과정을 마르크스의 상품-화폐-자본의 이행과정과 비교해서 설명했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논리학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으나 두 과정의 유사성을 통해서 볼 때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양자의 유사성은 설혹 직접 연관성은 없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준거점으로 삼을 여지를 마련해 준다. 마르크스를 헤겔을 통해 이해하고 헤겔을 마르크스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각자의 이해를 더욱 풍요하게 만들 것이다.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8-생명의 탄생(3)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8-유기화학에서 단백질 합성으로,  생명의 탄생

1)

앞에서 헤겔이 화합물 사이에서도 일종의 역 비례 관계가 출현한다고 했다. 이때 화합물의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가 화합물 내부의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으며 이행하는 화합물 속에 공통적이고 연속적인 부분을 이룬다. 각 화합물은 이 촉매 부분과 결합하여 화합물의 고유한 질적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을 지니며 이 부분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

이때 이행하는 부분이 한쪽이 증가하면 다른 쪽이 감소하는 식의 관계를 지니게 되면 역 비례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역 비례 관계를 지닌 것의 구체적 예를 헤겔은 제시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유기 화합물의 동족 계열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은 더 나가보자. 헤겔은 이런 화합물 사이의 관계에서 위와 같은 정 비례나, 역 비례를 넘어서 제곱의 비례도 가능한 것으로 본다. 헤겔은 정량의 비례를 다룰 때 제곱(제곱근)의 비례에서는 미분적 차이가 들어 있다고 본다. 이 미분적 차이는 두 정량의 비율이며 이 관계의 비율 자체가 점차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관계다. 이런 비율 자체의 증가나 감소에 따라서 두 정량은 누적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이런 제곱하는 관계가 더 발전되면, 마치 두 천체 사이의 타원형 궤도와 같은 방식(3/2제곱 비례)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미분적 차이를 이루는 비율 자체가 근일점과 원일점에서 증가하는 비율이 달라지는 경우다. 원일점에서는 증가 비율이 느려지며 그 결과 회전 속도도 느려진다. 반면 근일점에서는 증가 비율이 빨라지기에 그 결과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이처럼 회전 속도를 규정하는 미분적 차이의 비율 자체가 유동적인 경우다.

헤겔은 정량에서 제곱 비례를 통해 기존의 것과 다른 차원의 것이 출현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직선을 제곱하면 면적이 되고 면적을 제곱하면 부피가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러하다면, 화합물의 작용에서 이런 제곱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통해 단순한 화학적 화합물이 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질을 가진 화합물이 만들어 지지 않을까?

2)

우선 이런 제곱 비례를 이루는 화합물이 이행 관계를 헤겔은 개념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자. 헤겔은 지금 다루어지는 ‘본질의 생성Werden’ 장 마지막 C절(본질로의 이행Uebergehen)에서 마침내 특정한 자립적 존재로부터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로의 이행을 설명한다.

여기서 특정한 자립적 존재란 척도 관계를 말하며 예를 들자면 하나의 화합물이다. 이런 척도 관계를 매개하는 촉매는 외적이고 이행을 매개한 후에는 화합물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나 이제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는 역 비례에서처럼 촉매가 화합물 내에 머무르면서 연속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것이 외면적인 차이 없는 존재[외적 촉매]가 현존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동시에 차이 없는 존재가 처해 있다고 발견되는 대립은 곧 다만 잠재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그런 현존에 대립적으로 규정되고 대자 존재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는 대립이다. 또는 그런 현존은 외적인 반성이어서 그 반성은 특정화한 것들이 본래 또는 절대자 속에서 동일하고 하나며 그 구별은 다만 무차별적인 구별이며 본래적인 구별이 아닌 구별이라는 사실에 머물러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81)

그런데 역 비례에서 이 촉매 부분과 결합하는 부분은 즉 화합물의 이행에서 변화하는 부분은 촉매가 되는 부분과 외적으로 결합하는 부분이었다. 이 결합은 우연적이어서 이것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조건 즉 열이나 전기 에너지가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제곱 비례에 이르면, 남아 있는 촉매 부분과 결합하는 부분이 이 촉매 부분에 내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다시 말하자면 촉매 부분 자체가 생성하는 부분이 된다. 이런 내적 관계를 지닌 것은 필연적이어서 외적 조건의 변화가 없더라도 가능하게 된다. 물론 외부에서 주어지는 재료가 있어야 하지만, 이 재료가 주어지는 즉시 촉매 부분과 내적 연관 때문에 자동적으로 결합이 일어난다.

“여기서[잠재적인 차이 없는 존재]에서 여전히 결여된 것은 곧 이 반성이 사유하는 주관적 의식의 외면적 반성이 아니어야 하고 그런 통일이 전개하는 구별이 자기를 지양한다는 고유한 규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런 통일은 절대적 부정성을 드러내니, 이 절대적 부정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차별하고 그 고유한 무차별성에 대해 무차별할 뿐만 아니라 타자 존재에 대해서도 무차별하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82)

3)

이런 점에 이 관계는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이중적 부정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한편으로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이행하고 다시 타자를 부정하여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니, 이는 자기를 매개하여 자기와 통일을 이루는 관계이다.

이런 통일은 고요한 통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 대해 자기가 반발하면서 자기를 타자화하는 것이니, 오직 이런 자기와 대립 또는 모순 속에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차이 없는 존재는 자기 자신과 그것이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에 또는 그것의 본래 존재하는 규정과 그것이 정립된 규정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므로 부정적 총체성이며 그 규정성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한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자신의 근본적 일면성 즉 그 잠재적 존재를 지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차이 없는 존재는 사실상의 모습으로서 정립되면서 자기에 대해 단순하고 무한하게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자기가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것, 자기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반발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382)

동시에 이 타자는 자립적인 것이거나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적인 통일, 고유한 자기 관계 속에서 다만 계기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거꾸로 그것을 통일하는 전체도 단순히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타자로부터 복귀하는 것을 통해 성립하는 자기 매개적 존재일 뿐이다.

“그 계기는 최초에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통일에 속하고 그런 통일을 떠나지 않고 기체로서 그런 통일에 의해 지탱되고 다만 그런 통일에 의해 충족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82)

“따라서 그 존재 일반이나 구별된 규정성이 지닌 존재나 직접성은 마찬가지로 본래적 존재로서 사라지며 그 통일은 존재이며 직접적으로 전제된 총체성이서 단순한 자기 관계이며 이런 전제를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그것이 전제되어 있다거나 직접적 존재라는 사실은 그것이 반발하는 운동의 계기일 뿐이니 근원적인 자립성과 자기 동일성은 다만 결과적으로 출현하는 무한한 자기와의 합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재판, GW21, 382-383)

이런 자기 매개하는 존재가 곧 본질이다. 이 본질은 곧 정량의 제곱 비례에서 등장한 미분적 차이이며, 이 미분적 차이가 이루는 누적적 결과는 마치 선이 면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새로운 질을 그 이전에 개별적 정량에서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질이 출현하게 된다. 그 새로운 질이 곧 생명의 자기 재생산성이다.

4)

이상에서 헤겔은 제곱 관계로부터 유추를 통해 화합물의 결합을 통해 생명이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론 이는 유추이며 그가 실증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헤겔이 자연을 자연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전은 유기화학에서 단백질의 합성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너머 생명의 화학적 합성 가능성을 암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 그런 합성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단백질을 발견하고 DNA 사실을 발견한 것은 그런 가능성을 암시하는 데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예를 들어 하나의 단백질 구조를 살펴보면서 헤겔의 개념적 설명과 비교해 보자. 필자의 무지 때문에 확고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필자의 추측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단백질은 펩타이드 결합이 반복된 방식으로 출현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펩타이드 결합인데 이 결합은 다음 도표를 통해 잘 보여진다.

아미노산은 중심 축을 중심으로 두 상반된 결합기를(카르복실기COOH와 아미노기NH2)가 있어 이 두 결합기가 교차적으로 결합하면서 긴 아미노산 연쇄 사슬이 만들어진다. 이 결합 방식을 펩타이드 결합이라 한다. 이 아미노산의 펩타이드 결합체가 복잡하게 발전하면서 생명체의 원천이 되는 단백질이 되고 이 단백질의 자기 복제를 통해 생명이 유지된다.

앞에서 유기 화합물의 경우 동일한 기체가 이중 부분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에 새로운 화합물이 결합하면서 연쇄를 이루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런 펩타이드의 결합이 지닌 차이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중심축을 이루는 곁사슬이 자기의 좌우로 상반된 결합기를 지니고 결합한다. 상이한 아미노산의 연결은 상반된 결합기가 맡는다.

반면, 이 곁사슬(중심축)이 지닌 다양한 구조(H-C-R]는 또 다른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결합기의 좌우 수평적 연쇄에 수직적으로 평행하는 곁사슬의 연쇄가 만들어져 이중 나선 형태의 단백질이 출현한다. 이중 나선의 아미노산 펩타이드 결합의 자기 복제를 가능하게 한다.

얼핏 보기에 유기 화합물의 결합과는 정반대 모양을 보여주는 이 펩타이드 결합은 헤겔적 언어로 보자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상반된 결합기로 연결된 아미노산 연쇄가 헤겔 말로 하자면, 대자적으로 자립적인 차이 없는 존재다. 중심축을 통한 상반된 결합은 그것이 생산하는 타자이다. 아미노산 연쇄가 이런 타자를 통해 복제되는 것은 자기 매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용하게도 헤겔의 개념적 언어가 실제로 발견된 단백질 복사 과정을 개념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