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4 [내게는 이름이 없다]

Spread the love

베게너는 그의 두 번째 영화 <골렘 Der Golem>(그의 첫 번째 영화와 마찬가지로 1차 대전 후 리메이크됨)을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 헬릭 가렌(Henrik Galeen)과 함께 시나리오, 감독, 배우로 활약하며 만들어냈다. 1915년 초에 처음 개봉되었던 이 영화는 환상적 테마를 원료로 하여 영화적 효과를 뽑아내고자 했던 베게너의 순수한 정열을 새롭게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이 영화는 프라하의 유대인 랍비 뢰브(Loew)가 골렘이라는 진흙상의 가슴에 마법의 인장을 집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한 중세의 사건을 과거의 전설로 삼고 있던 현대가 배경이다. 영화에서 옛 유대교 회당의 우물을 파던 노동자들은 골렘 상을 발굴하고서는 그것을 골동품상에게 넘긴다. 그러다가 이 골동품상은 우연히 몇몇 유대 신비주의적 문헌에서 랍비 뢰브의 마법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서는 이 방법을 따라하여 마침내 [죽어있던 진흙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골렘으로 만들어내는] 기적적인 변신을 이루어낸다. 이제 이야기는 현대적 심리학으로 바뀐다. 골렘이 골동품상의 하인으로 일하는 동안 두 번째 변신이 발생한다. 어리석은 로봇이었던 그가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면서 자기만의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 변화한 것이다. 겁을 집어먹은 소녀는 이 섬뜩한 구혼자로부터 놓여나가고자 하고 그로 인해 골렘은 끔찍한 고립감을 알게 된다. 그는 격분한다. 이 분노한 괴물은 소녀를 맹목적으로 갈구하면서 자기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파괴한다. 결국 그는 높은 탑에서 떨어짐으로써 산산이 부서진 진흙상이 되어 죽어버린다.

<골렘 Der Golem>의 모티프들은 <호문쿨루스 Homunculus(1916)>에서 다시 나타난다. 6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스릴러는 1차 대전 동안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주인공은 덴마크의 인기 배우 올라프 푄스(Olaf Fønss)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낭만적인 옷차림새는 우아한 베를린 패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골렘>과] 이 시리즈는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작품들의 선구자였지만, 베게너의 은막의 전설 <골렘>과는 전혀 상이한 원천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두 영화 사이의 유사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골렘과 마찬가지로 호문쿨루스도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다. 유명한 과학 교수 한센과 조수 로딘이 증류기에서 만들어낸 그는 번득이는 지성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남성으로 자란다. 그러나 그는 곧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골렘과 같은 짓을 저지른다. 호문쿨루스는 골렘이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버림받았다고 느끼고서는 치명적인 고독감을 없애줄 사랑을 갈망한다. 그는 자기의 비밀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만한 곳을 강렬히 욕망하면서 만리타국을 떠돈다. 그러나 진실은 누설되고 만다. 그가 자기 마음을 억누를 때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여 뒷걸음질 치며 말한다. “호문쿨루스다. 영혼 없는 인간, 악마의 종, 괴물!” 그들이 호문쿨루스의 개를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로딘조차도 호문쿨루스를 사람들의 오해와 증오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히틀러를 미리 암시하고 있다. 혐오에 사로잡힌 호문쿨루스는 대국의 독재자가 되어 자기가 겪은 고통에 대한 전대미문의 복수를 감행하기 시작한다. 호문쿨루스는 노동자로 위장해 폭동을 조장함으로써 독재자인 자신에게 대중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기회를 제공한다. 마침내 그는 세계 대전을 촉발시킨다. 이 가공할 존재의 삶은 벼락과 같이 갑작스럽게 끝난다.

호문쿨루스와 골렘의 비정상적 성격은 비정상적 태생의 결과물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비정상적 태생이라는 전제는 사실 외견상 설명 불가능해 보이는 사실, 즉 이들이 주변 사람들과 상이한 존재이며, 그들 자신도 이점을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합리화하려는 시적 공상의 속임수(poetic subterfuge)일 뿐이다. 도대체 어떤 점이 그들을 그토록 유별난 존재로 만들었을까? 골렘이 모호하게 알고 있었던 그 이유를 호문쿨루스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나는 인생에서 마땅히 선사받아야할 최고의 것을 받지 못하는 사기를 당했다!” 그는 자기가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한다는, 그리고 이런 결핍은 그에게 강한 열등감만을 선사할 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호문쿨루스가 상영되던 무렵에 독일 철학자 막스 쉘러(Max Scheller)는 독일이 전 세계에서 자아냈던 증오의 원인에 대해 공개 강연을 하였다. 독일인들은 호문쿨루스와 닮았다. 그들은 중간 계급의 자신감에 해로운 것으로 입증된 [독일] 역사의 전개로 인해 열등감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독일인들은 혁명에 실패했으며 그 결과 진정한 민주 사회를 확립하는 데에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독일 문학은 발자크(Balzac)나 디킨스(Dickens)의 방식을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적 전체가 관통하고 있는 작품을 단 하나도 제공해내지 못하고 있다. 독일에는 그 어떤 사회적 전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간 계급은 투쟁을 두려워하는 정치적 미성숙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처한 불안정한 사회적 조건이 위험해질까봐 두려워했다. 이런 퇴행적 행태는 심리적 침체를 자극하였다. 열등함과 고립감이라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는 그들의 습성은 미래의 꿈에 파묻히고자 하는 유치한 성향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 두 영화적 등장인물들은 좌절감에 대해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호문쿨루스의 경우 그를 행동하도록 자극하는 충동들은 매우 분명하다. 그는 사도마조키스트적인 성향을 파괴에 대한 불타는 욕망과 결합한다. 이 성향은 겸허한 순종과 복수심 가득한 폭력 사이에서 동요하는 가운데 드러나고 있다. 호문쿨루스에 대한 로딘의 과도한 우정은 동성애의 조짐을 더함으로써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근대 정신분석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도착을 호문쿨루스가 특정하게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정당화된다. 이 두 영화는 이런 배출구들을 곱씹어 봄으로써 독일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강한 성향을 폭로하고 있다.

광포해진 골렘과 호문쿨루스는 정상성에서 멀어지다가 결국 죽게 된다. 비록 호문쿨루스는 응보 혹은 정의로운 행동에 의해서 죽게 되지만, 그의 죽음은 엄밀히 말하자면 초자연적이다. 인간과는 확실히 다른 그의 죽음은, <프라하의 대학생>이 그랬듯이, 사회적 교류라는 급선무에 구애받지 않는 그를 찬양하고자 하는 독일 중간 계급의 욕망을 입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고립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볼드윈의 자살이 그러듯이, 두 괴물의 죽음은 음울한 조짐을 무심코 드러낸다.


<Der Golem>(1920 film by Paul Wegener)

 

참고 : 프라하의 대학생(1913) 

3 replies
  1. 평이
    평이 says:

    행길님의 부지런한 발췌번역 잘 보고 있네요. 감솨.. 골렘이라는 영화를 찾아보고 싶지만,, 일단 은 예전에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결론 부분에 원작 소설 언급이 있어서 찾아보다가 영화 링크가 있어서 일단 제 멋대로 하단에 영상 링크해봅니다. 행길님의 지면에 멋대로 추가해서 죄송합니다. 맘에 안들면 삭제하셔도 무방ㅎㅎ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