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6-라이프니츠의 표상에 관한 헤겔의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6-라이프니츠의 표상에 관한 헤겔의 비판
1)
앞에서 설명했듯이 본질과 가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존재론에서 질 즉 현존[Dasein]은 직접적 존재지만, 가상은 직접적 존재더라도 본질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가상에서 본질에 대립하는 규정성이 갖는 직접적 존재는 본질의 고유한 직접성일 뿐이다. 이 본질의 직접성은 존재하는 직접성이 아니라 단적으로 매개되거나 반성된 직접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7-248)
“가상은 존재의 규정성 속에 있는 본질 자체이다. 본질이 가상을 갖는 방식은 곧 본질이 자기 내에서 규정되고 이를 통해 그 자신의 절대적 통일로부터 구별되는 방식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8)
가상은 그 자신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상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니,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이 곧 본질이다. 이를 통해 가상은 자기 내로 복귀하여 본질이 된다.
본질은 부정성이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이런 자기 관계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가상이 된다. 그런 가상은 앞에서 말했듯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여 본질로 복귀한다.
“부정성은 부정성 그 자체이니, 이 부정성은 자기가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성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 부정성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자기 자신을 반발시키는 부정이다.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직접성은 직접성에 대립하는 부정적인 것이거나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성 자체는 절대적 부정성이며 규정 작용이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규정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며 자기 내로 되돌아옴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48)
마치 자기 관계로서 가상과 부정의 부정으로서 본질은 서로의 이면이며 마치 순환하는 듯하다. 그런 가운데 가상이나 본질은 모두 이중화된다. 가상은 직접적이면서도 자기 부정적인 것이며, 본질은 부정의 부정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2)
헤겔은 이런 가상을 회의주의에서 판단중지와 비교한다. 회의주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이 그 자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회의주의는 이런 부정조차도 다시 부정하니,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세계에는 풍요한 내용이 있다.
어떤 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도 그것의 부정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니, 여기서는 어떤 판단도 내려질 수 없으며 그 결과 판단중지 상태에 빠지는데, 헤겔은 가상이란 개념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정은 곧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니 그것은 존재한다.
이런 이중적 상태는 근대 관념론에서 현상 개념도 마찬가지다. 칸트의 경우 현상은 물 자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부정된다. 하지만 현상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선험적 감성 형식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물 자체만이 모순이 아니다. 칸트에서 현상 자체도 이미 모순이다. 그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으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회의주의에서 판단중지, 관념론에서 현상은 그것은 다양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것이 실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뿌리도 없이 다만 풍요한 내용만 나타나는 것은 마치 허공에 뜬 물거품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과 같다.
“이런[회의주의나 관념론] 내용에는 사실 어떤 존재나 어떤 사물 또는 물 자체가 밑바닥에 놓여 있을 수 없으며 내용은 독자적으로 내용이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머무른다. 다만 내용은 존재에서 가상으로 옮겨졌을 뿐이니 가상이더라도 자기 자신 내에서 직접 존재하고 상호 대립하는 다양한 규정성을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47)
3)
가상과 본질의 이런 관계는 자주 거울과 사물 사이의 빛의 유희에 비추어진다. 사물은 거울에 비추어어서 자기를 보며 거꾸로 거울 역시 사물에 비추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거울과 사물 사이의 빛의 유희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빛의 유희는 그야말로 사물이나 거울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거울과 사물에서 빛의 반사는 표면 배후에 마치 이와 무관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겔에서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차라리 종과 개체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종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은 개체가 자기를 복제하는 과정 중에서만 즉 그런 운동을 통해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개체는 직접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런 종의 자기 재생산을 매개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일시적인 존재다. 개체는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만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서만 직접 존재할 뿐이다.
본질 역시 마찬가지다. 본질은 현존과 구별되는 현존을 피안에서 갖지 않는다. 본질은 오직 자기를 재생산하는 개체의 운동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 가운데 본질은 시간상 지속해서 존재한다.
4)
이런 맥락에서 헤겔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에서 표상 개념을 소환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표상을 전개한다. 그러나 모나드는 생산하고 결합하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표상은 모나드 속에서 거품처럼 떠오른다. 표상은 무차별하며 직접 존재하니 서로에 대해 대립할 뿐만 아니라 모나드 자신에 대해서도 대립한다.”(헤겔 논리학, GW11, 247)
이 짤막한 구절은 곧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헤겔의 긍정과 부정을 통시에 포함하는 말이다. 그 말의 구체적 의미는 헤겔이 철학사 강의에서 라이프니츠에 관해 설명한 것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표상을 본질의 가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단순 실체인 모나드는 어떤 질이나 규정을 지니고 있다. 이 질이 곧 모나드의 표상 또는 지각이다. 모나드가 질이나 표상을 지니지 않으면 이 세계의 다양성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나돌로기, 명제8 참조)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질이나 표상을 스피노자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본 것과 달리 자기 내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내부에서 주어지는 질과 표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헤겔이 말한 본질의 가상이 된다.
모나드는 단순한 실체이므로 이미 내부에 모든 질과 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모나드가 지닌 하나의 질은 다른 질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모나드는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없으므로 이런 이행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내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모나드의 질적인 이행을 일으키는 힘이 곧 모나드가 지닌 욕망이다. 이처럼 모나드가 욕망하는 힘을 지닌다는 점에서 모나드는 원자론자의 원자와 다르다.
“변화를 일으키는 내적 원리의 작용(즉 하나의 지각으로부터 다른 지각으로의 전이)이 욕망이라 불리는 것이다. 욕망은 그것이 목표로 하는 전체 지각에 항상 완전하게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은 항상 어떤 지각을 획득하며 새로운 지각에 도달한다.”(모나돌로기, 명제 15)
5)
그런데 여기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욕망은 자주 자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나드는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여기에는 필연적 법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욕망과 필연 사이에 대립이 생기지 않을까?
이런 문제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욕망과 필연성을 화해시키려 한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자침의 비유를 든다. 자침은 필연적으로 북쪽을 향한다. 그러나 자침이 만일 의식이 있다면 자유롭게 북쪽을 욕망하지 않을까? 즉 법칙을 따르는 것이 자유라는 스피노자적인 개념이 여기서 되살아난다.
이런 이행은 단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연속적, 점진적으로 일어나니, 여기서 모나드는 다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갖게 된다. 모나드는 통일성 안에 다중성을 지닌다. (모나돌로기, 명제 13 참조)
헤겔은 모나드가 욕망을 지니고, 자기를 표상하며, 다수성 속에서 통일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아나 정신과 같다고 한다. 즉 모나드는 정신적 원리이며 관념적인 것이라 한다. 여기서 물체적 모나드는 아직 자각되지 않은 미소의 상태에 있는 의식적 모나드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여기까지는 헤겔이 라이프니츠에 찬탄하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보다 탁월한 지점이 이렇게 본질의 가상이라는 개념에 라이프니츠가 이미 이르렀다는 데 있다. 그러나 헤겔은 곧바로 라이프니츠는 본질의 가상이라는 개념을 아직 충분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6)
여기서 우선 헤겔은 의문을 표시한다. 모나드의 질 즉 표상이 이행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에 헤겔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의 질 즉 표상은 마치 “거품과 같다”고 한다. 이는 가상 개념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개별적 질이 거품과 같다면, 이는 욕망이 이를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은 자기가 정립한 질을 왜 다시 부정하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헤겔은 모나드는 각자 “자기 자신과 대립한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는 부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긍정적인 것일 뿐이니 하나의 질이 다른 질로 이행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더구나 질의 이행과 관련해서 라이프니츠는 신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이렇다. 즉 모나드는 개별적인 모나드인데 서로 다른 질을 가지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외적인 영향을 주거나 받을 수 없으니 이들은 각자 자립적으로 다른 모나드와 무차별하게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와 전혀 무관하지만, 라이프니츠로서는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모나드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인데, 그런 필연성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면, 우주는 곧바로 무질서한 세계가 되어 맹목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통해 난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가 난파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나드의 질적인 변화가 각자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나드는 자립적이고 타자와 무차별하니 이런 모나드들 사이에 질적 변화를 서로 조절하여 통일하게 하는 힘은 모든 모나드를 넘어서서 모나드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 즉 신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라이프니츠에 따른다면 이 세계가 난파하지 않는 것은 신이 예정조화를 통해 모나드들 사이의 조화를 우주에 부여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라이프니츠에서 신을 상정하는 것은 마치 연극에서 기계 신을 도입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한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본질과 현존 사이의 수직적인 매개 관계를 생각해냈으나 아직 본질을 매개로 현존과 현존이 수평적으로 매개된다는 원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본다. 수직적 매개와 수평적 매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헤겔에서 본질의 반성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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