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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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

1)

앞에서 본질과 가상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부정적인 것의 자기 부정 운동이 곧 본질이며, 이 부정의 부정이 자기 관계하면서 직접적인 가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 양자의 관계를 종과 개체의 관계에 비추어 이해했다.

본질과 가상은 서로 순환하는데, 이런 순환하는 운동의 양극단이 본질과 가상이라면 양극단을 매개하는 운동이 곧 반성이다. 헤겔은 반성하는 운동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우선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의 짝이 있다. 다음으로는 외적인 반성과 내적 반성 또는 규정하는 반성의 짝이 있다.

먼저 정립하는 반성[앞으로 정립으로 축약]과 전제하는 반성[앞으로 전제로 축약]을 살펴보자. 헤겔은 양자는 상호 작용적으로 보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했던 두 가지 판단 작용의 구분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설명한 적이 있지만, “이 장미는 빨갛다”라는 판단에서 한편으로 이 판단은 주어인 꽃이 지닌 여러 성질(빨갛고, 향기로운 것 등) 가운데 하나인 빨간색을 끌어내는 것이다. 빨간색은 개별 장미에 내재한다. 칸트는 이런 판단 작용을 구성적이라 했다. 이는 지성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 판단은 장미라는 개별 대상을 빨간 것들이라는 일반적 유에 포섭하는 판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개별자를 일반자에 포섭하는 판단은 전제하는 판단이며 이는 상상력의 작업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판단력 일반은 특수를 일반 아래에 포함된 것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일반이 주어져 있는 경우에는 특수를 이 일반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은 규정적이다. 그러나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특수에 대하여 일반을 찾아내야 할 경우에는 판단력은 단지 반성적이다.”(칸트 판단력 비파], 서언, S. 27)

2)

칸트는 판단을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해서 서로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인식에서 구성적 판단도 구상력을 통한 도식을 매개로 하며 거꾸로 미적 판단도 필연적이려면 지성의 개입이 필요하다. 지성은 개별 대상을 가장 적절하게[필연적으로] 일반적 유에 포섭한다. 결국, 칸트 자신은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모든 판단은 구성과 포섭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헤겔은 논리학 3부 주관 논리학 판단론에서 판단을 내재와 포섭이라는 이중적 작용으로 파악한다. 이 가운데 내재란 칸트가 구성이라고 했던 판단 작용이다. 반면 포섭이란 칸트가 반성이라고 했던 판단 작용이다.

“그러나 이제 주어는 자립적인 것인 한 그런 동일성[계사로서 이다]은 술어가 그 스스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고 그 존립을 다만 주체 속에서 갖는다는 관계를 가진다. 술어는 주어에 내재한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술어 역시 자립적인 일반성이고 주어는 거꾸로 그 술어의 한 규정일 뿐이다. 그런 한 술어는 주어를 포섭한다.“(헤겔 논리학 2부, GW12, 57)

하나의 판단에서 이 두 가지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주어는 내포 상으로는 다양한 규정을 잠재적으로 포함하는 것이고 외연 상으로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술어는 이런 내포적 규정 가운데 하나가 실현된 것이고 동시에 개별자를 포괄하는 일반자가 된다.

위에서 말한 판단의 주어 술어 관계는 모든 판단 일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루어지는 것은 질적 판단, 양적 판단을 넘어서 출현하는 반성 판단 또는 관계 판단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는 개체이며 술어는 종적 규정성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사유하고 있다”와 같은 판단이다. 이런 판단에서 여기서 주어가 곧 가상이며 술어가 곧 본질이다.

3)

반성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 가상과 본질은 판단하는 운동의 양극단이며 양자를 매개하는 운동이 곧 반성 운동이다. 이 반성 운동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립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전제하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은 판단을 구성하는 두 측면으로 보아도 좋지만, 헤겔의 반성 운동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를 하나의 운동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발견할 때 그것은 이미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직접 현존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것을 나름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눈앞의 현존에 관한 이런 규정을 마치 자연적인 것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규정은 아직 어떤 판단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선술어적인 규정이다. 이것을 헤겔은 직접적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곧 이것을 판단으로 구성한다. 즉 예를 들어 ‘이것은 개다’라고 판단한다. 선술어적 판단이 판단으로 이행한다. 이런 선술어적 판단에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규정이 판단에 이르게 되면, 주어 술어로 분화된다. 즉 판단이 성립한 것이다.

“가상은 반성과 본성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가상은 직접적인 것으로서 반성이다. 자기 내로 복귀한 가상, 따라서 그 직접성으로부터 소원화한 가상을 우리는 반성이라는 외국어로 표현한다.”(헤겔 논리학, GW11, 249)

“본질은 반성한다. 이 생성이나 이행이 자기 내에 머무르기에 여기서 구별된 것은 단적으로 다만 그 자체에서 부정적인 것[규정된 것] 즉 가상으로 규정된다.”(헤겔 논리학, GW11, 249)

가상은 최초에는 직접적인 것인데 이 가상이 직접성을 벗어나서[소원화하면서] 반성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반성하면서 가상은 정립된 것으로 된다. 이 과정이 곧 정립하는 반성이다.

4)

이렇게 판단 속에서 규정된 것이기에 이 직접적 현존은 더는 “출발점으로 되면서 그 자신의 부정으로 이행하는 최초의 직접적인 것[선술어적 직접성]이 아니며” 그렇다고 “반성을 통해서 운동해서 지나가는 존재하는”(GW11, 249-250) 불변하는 기체[Substrat]도 아니다.

“이것은 정립된 것이다. 즉 직접성이 순수하게 다만 규정성으로서 또는 자기 반성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이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본질]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직접성은 가상의 규정성을 이루는 직접성이며 이로부터 반성 운동이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헤겔 논리학, GW11,251 )

이와 같은 정립하는 반성에서는 이미 그런 근거 즉 개의 본질적 규정이나 종적 규정이 판단하는 자에게 알려져 있었고 그는 그런 근거를 통해 그것을 개라고 판단했다. 그는 예전에 그런 물음을 제기했고 나름대로 그 답을 알거나 배웠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져서 그 근거는 이렇게 판단할 때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마치 자전거나 수영하는 기술을 그가 알고 있으나 명확하게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 대부분은 이런 명확하게 의식하지는 않으나 이미 알고 있는 근거를 통해 내려진 판단이다.

5)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왜 그게 개야?”라고 물으면 그가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개의 본질, 즉 판단 근거로 간주했던 것을 제시할 것이다. 즉 저것은 개 머리를 지니고 있는데 개 머리는 개에게만 나타나는 것(개의 종적 규정성)이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런 근거를 제시하기를 요구받지도 않았고 그 근거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는다. 개 머리를 보는 순간 곧바로 “저건 개야”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판단하면서 그것은 이제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정립된 것이 된다. 이게 헤겔이 말하는 반성 운동의 첫 번째 과정인 정립하는 반성이었다.

그런데 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왠지 종종거리고 걷는 것이 꼭 고양이 같아서 저게 개인가 하고 의문스러워지는 때(또는 “그게 왜 개야?”하고 누가 묻을 때), 우리는 개라고 하는 판단의 근거를 묻게 된다. 이렇게 물음은 개에 관한 관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 물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를 알게 된다. 그는 개가 어떻게 걷든 간에 개 머리를 하고 있으면 모두 개야라는 생각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제 어떤 판단의 근거 즉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헤겔은 전제하는 반성이라 한다.

“반성은 부정적인 것[가상]을 지양하는 것이니 곧 반성의 타자[가상]를 지양하는 것이며 직접성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되돌아온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 자기와 합일하는 것으로서[자기 부정으로서 본질] 직접성이므로 이 반성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가상]을 부정적인 것으로서 보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반성은 전제다.”(헤겔 논리학, GW11, 251)

“또는 직접성은 되돌아온 것인 한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며 직접성이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반성은 반성 자신을 부정하는 것[직접성의 정립]을 지양하는 것이다. 반성은 자기와 합일이니 반성은 그 자신의 정립을 지양한다. 반성이 자신을 정립하는 가운데 이런 정립을 지양하니 이런 반성이 곧 전제다.” (헤겔 논리학, GW11, 251)

이때 전제된 것은 현존에서 관찰된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개 머리의 모습이다. 그는 이 개 머리를 전제로 그러면 그것은 개라는 종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때 판단의 전제가 된 것은 개별적 현존에서 관찰된 현상이다. 이 현상을 전제로 해서 그 근거로 되돌아갔으니 왜냐하면 이 현상은 곧 본질의 종적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자기가 넘어나가고 그로부터 복귀한 직접적인 것을 자기 앞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런 되돌아옴은 이런 발견된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전제된 것은 생성되는 동시에 다만 버려진다. 그 직접성은 지양된 직접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거꾸로 지양된 직접성은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본질이 자기에 이르는 것이며 단순하게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본질]이다. 이를 통해 자기에 이르는 것은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직접적인 것] 자신을 반발하는 것이며 [직접적인 것을] 전제하는 반성이다. 반성의 자기 반발은 자기 자신[본질]에 이르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7)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현존을 개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현존의 본질 규정성 때문이다. 최종적인 판단이 내려지는 과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런 정립하는 반성을 논리적으로 규정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개의 본질 규정성은 곧 개 머리를 지닌 것이다.

이것은 개 머리를 지니고 있다.

——————-

그러므로 이것은 개다.

반면, 전제하는 반성을 도해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개다.

———————

왜냐하면, 개 머리를 지닌 것은 개의 본질 규정성이고

이 개는 개 머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정립하는 반성이나, 전제하는 반성은 동일한 것이다. 다만 그 방향만 전도되어 있다. 정립하는 반성은 ‘그러므로’를 통해서 근거로부터 규정된 것이며, 전제하는 반성은 ‘왜냐하면’을 통해서 근거를 찾아 나선 것이다.

결국, 정립하는 반성은 습관적으로 일어난 판단이며, 전제하는 반성이란 판단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각적으로 그 근거 즉 본질을 밝히는 작용이다.

“따라서 반성하는 운동은 고찰된 것에 따라서 볼 때 자기 내에서 절대적으로 받아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자기 내로 되돌아옴[본질]이 전제하는 것[가상]은 본질이 그것에서 나와서 비로소 되돌아감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인데 이런 되돌아옴 그 자체 속에서[정립하는 반성]만 가능하다.”(헤겔 논리학, GW11, 252)

“반성이 출발한 지점인 직접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은 오히려 비로소 이런 넘어감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직접적인 것을 넘어가는 것은 그런 직접적인 것에 이르는 것이다. 운동은 앞으로 나가는 가운데 직접 자기 자신 내로 전환하여 다만 그런 방식으로 자기 운동한다. 정립하는 반성이 전제하는 반성인 한에서 자기에서 나온 이런 운동은 전제하는 반성인 한에서 단적으로 정립하는 반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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