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5-내부와 외부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5-내부와 외부의 관계

1)

본질적 관계는 세 단계로 전개된다. 전체와 부분, 힘과 드러냄, 내부와 외부의 관계다. 이 관계는 모두 개체 사이의 관계를 매개로 두 세계 즉 본질(요소의 관계)의 세계와 현상(관계를 이루는 요소)의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 본질이 현상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파고드는가(현상의 반성 또는 본질의 정립)에 따라서 세 단계가 구분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전체는 부분에 대해 외면적이며 다만 형식적인 관계에 머무를 뿐이다. 힘과 드러냄의 관계에서 힘은 물체와 외면적으로 관계하지만, 독립적으로 실존한다. 힘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이르면, 상호작용의 양면으로서 내부와 외부가 출현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나 힘과 외화의 관계는 역학적 자연에 존재하는 관계다.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유기체적 조직이 다시 출현한다. 실존에서 현상을 거쳐 관계에 이르기까지 존재론에서 이미 전개되었던 생성의 운동이 다시 반복되었다. 마침내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본질론의 출발점이라고 할 유기체적 조직이 다시 출현한 것이다.

2)

현상 편은 실존 장, 현상 장, 관계 장으로 전개된다. 이는 판단 형식에 상응하는데, 실존이 정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면, 현상에서 출현하는 법칙은 가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관계 장에서 마침내 출현한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곧 선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법칙이 가언판단 형식이란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선언판단 형식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여기서 헤겔이 선언판단 형식이라 한 것은 배타적인 선언판단 형식을 말한다. 즉 두 선택지 p와 q가 서로 모순 관계에 있을 때 판단이 A= p or q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 (배타적) 선언판단이 된다.

이런 배타적 선언판단에서 p, q는 종적 본질이 실현되어 나타나는 개체의 집합을 이룬다. 이 배타적 선언판단에서 주어인 A는 p, q라는 개체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종적 본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배타적 선언판단은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말한다.

개체의 집합은 이런 배타적 관계에 있을 때 전체 집합이 된다. 만일 개체를 다른 방식으로 나누면 전체 집합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생물체를 암수로 구분하면, 배타적 관계가 되고 여기서 암수의 개체는 종의 완결된 전체 집합을 이룬다. 그러나 생물체를 영양 기능에 따라서 분류하게 되면, 영양을 얻는 방식에 식물과 동물로 대체로 구분되더라도 그 사이에 다양한 중간 집단이 있고 그 중간 집단은 무한히 세분되므로 완결된 전체 집합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헤겔은 배타적 전체 집합을 이루는 것과 종적 본질과 필연적으로 상관한다고 본다. 즉 배타적인 전체 집합이 그 집합을 구성하는 원리가 종적 본질인가를 결정해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꾸로 종적 본질은 자기를 배타적인 집합으로 출현하게 한다.

그러므로 생물체를 암수로 나누면 배타적 집합이 되는데, 그러니 암수로 나누는 기준 즉 재생산 기능이 생물체의 종적 본질이 된다. 반면 그것은 영양 기능을 기준으로 나누었을 때 배타적 집합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종적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게 된다. 배타적 집합과 본질 사이의 이런 연관을 표현하는 원리가 곧 내부와 외부의 합일이라는 원리이다.

3)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립적인 실존이 동시에 가상이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지양하면서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로 되며, 타자로 반성하는 것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며, 타자를 정립하는 것을 통해 자기가 존립한다.

여기서 자기 관계한다는 점에서 자립적인 실존이지만, 이것이 자기 부정을 통해 또는 대립하는 타자를 매개로 해서 나온다는 점에서는 가상이다.

“이제[힘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허하고 투명한 구별만이 즉 가상만이 현전한다. 그러나 이 가상은 매개이어서 이것은 자립적인 존립 자체이다. 대립된 규정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하며 그들의 운동은 이행일 뿐만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그 출발점이 되어 타자로 이행되었던 직접적인 것은 다만 정립된 것으로서만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이를 통해 규정의 각각은 그 직접성 속에서 이미 자기의 타자와 통일을 이루며 이를 통해 이행은 전적으로 그에 못지 않게 자기를 정립하면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64-365)

이런 힘의 상호작용은 이미 이 힘들의 내적인 통일을 전제로 한다. 상호작용은 이런 내적인 통일이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이 내적 통일을 헤겔은 내부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물체의 종적 본질인 재생산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힘이 상호작용하므로 여기서 자립적인 개체는 대립하면서도 상호작용하는 개체적 실존으로 분화된다. 이런 개체가 이루는 집합이 곧 외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결합을 통해서 재생산하는 암수 두 개체의 집합이다. 이 집합은 종적 본질이 실현된 실존의 집합이다.

여기서 내부 즉 내적 본질과 외부 즉 개체의 집합은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을 토대로 한다. 그것의 양면이 곧 내부와 외부이다. 그러므로 내용으로 보면,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형식상으로 보면, 양자는 내부와 외부로 구분된다.

4)

여기서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을 토대로 한다. 헤겔은 이 유기체적 조직을 ‘절대적 사태’[실체]라고 하는데, 내부와 외부는 이 유기체적 조직의 동전의 양면이며 다만 형식적인 구별이므로 내부와 외부는 상호 직접 이행한다.

“내부는 반성된 직접성 또는 본질의 형식이니 외부 즉 존재의 형식에 대립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양자는 다만 동일한 것이다. 이 동일성은 우선 양자가 충만한 내용을 지닌 토대로서 또는 절대적 사태로서 갖는 순전한 통일이며 그런 통일에서 두 가지 규정은 서로 무차별하고 외적인 계기이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는 이처럼 동일한 사태가 지닌 양 측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직접 자기의 타자로 이행한다. 즉 그것이 외부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내부이며 거꾸로 그것이 내부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외부이다. 예를 들어, 유기체 재생산의 기능은 오직 암수 개체로 분화되는 것을 통해서만 수행되며, 암수 개체의 분화는 곧 유기체의 본질이 재생산 기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왜 유기체의 재생산 기능은 암수라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개체로 분화되는가? 이는 암수 중간적인 또는 암수 양면적인 개체의 출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거꾸로 예를 들어 영양을 획득하는 기능으로 분류하면 식물과 동물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간에 다양한 집단이 있는데, 기생 식물이라든가 이동하는 식물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개체가 배타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그 기능은 생물체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헤겔은 이에 대해 대답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부가 본질로, 외부가 존재로 규정된다면, 하나의 사태는 다만 그 본질 속에 있는 한에서 바로 그 때문에 다만 직접적 존재이며 하나의 사태는 다만 존재하므로 다만 비로소 여전히 그 본질 속에 있다.”(논리학, GW11, 366)

즉 내부와 외부는 개념적으로 “각각이 다른 규정을 전제로 하며, 그 자신의 진리인 이 다른 규정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부는 “그의 타자 즉 외부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며”, 외부는 “본질 즉 내부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6)

일반적으로는 유기체가 대립된 개체로 분화되는 경우,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그 종적인 재생산을 더 강화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된다. 헤겔은 이런 설명보다도 개념적으로 내부와 외부는 유기체적 조직의 동전의 양면이라는 설명으로 대체한다.

이를 고려해 볼 때, 헤겔은 유기체적 조직은 그 본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개체로 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개념적 진리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5)

헤겔은 예를 들어 생물체의 종이 암수로 구분되는 것과 같은 것을 내부와 외부가 직접적으로 통일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양자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태가 내용이 되고, 내부와 외부란 다만 사태가 지닌 동전의 양면이며 형식적 차이에 불과하다.

여기서 외부와 내부의 통일은 유기체적 상호작용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 유기체적 상호작용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므로, 이를 매개로 한 외부와 내부의 통일 역시 우연하다. 예를 들어 종의 재생산은 암수의 결합을 통해 일어나는데, 암수의 만남 자체가 우연적이므로 이런 재생산은 우연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그 때문에 종의 재생산은 지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외부와 내부의 필연적인 통일이 요구된다. 이런 필연적 통일은 상호작용하는 개체의 필연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를 통해 내부는 외부를 통해 자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를 보자.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자연에 대해 노동하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는 개체의 작용을 통해 자기를 지속하게 한다. 헤겔은 내부와 외부의 이런 필연적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내부는 단순한 자기 내로 반성된 동일성인 한 직접적인 것이며 따라서 본질인 동시에 존재이며 외부적인 것이다. 외부는 다양한 규정된 존재인 한에서 다만 외부이니 즉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정립되면서 근거로 복귀하니 곧 내부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에서 내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작용하는 개체 내에 머무른다. 반면, 내부와 외부의 필연적인 통일에서 내부는 이제 외부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실존을 가지게 된다. 거꾸로 외부는 자체 내에서 내부를 지니게 된다. 그 결과 외부와 내부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유적 본질은 사회로서 개체들의 집합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실존을 가지게 된다.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체는 각자의 자기의식이라는 고유한 내면을 지닌다.

그 결과 인간은 본질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사회를 구성한다. 여기서 유적 본질을 사회로 실존하게 하는 것은 개인이 내적 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매개한다. 내부와 외부는 매개적으로 통일하게 된다.

“즉 각자는 바로 그것이 본래 그러한 것인 자신의 타자를 통해 관계의 총체성이 된다. 또는 거꾸로 말하자면 각각의 측면이 지닌 규정성은 이 규정성이 그 자체에서 총체성이라는 사실을 통해 다른 규정성과 매개된다. 그러므로 총체성은 형식이나 규정성을 통해 자기 자신과 매개하고 규정성은 단순한 자기 동일성을 통해 매개된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은 이제 막 완성되었다. 앞으로 3편 실제성에 들어가면 직접적이고 우연적인 통일이 필연적이고 매개되는 통일로 발전하게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4-힘과 드러냄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4-힘과 드러냄의 관계

1)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각자 자립적이면서도 관계의 한 계기로서 부정적인 것이다. 처음에는 그 자립성 때문에 전체와 부분은 대립했다. 그러나 각자 타자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이행하면서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가운데 모순에 부딪히고 이를 통해 힘과 드러냄[외화: Aeusserung]의 관계로 이행한다.

힘과 그 드러냄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보다 발전된 것이다. 여기서 전체와 부분이 갖던 자립성이 양자의 관계에 의해 침투되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전체와 부분의 내적인 모순이 극복되면서 이런 발전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이행은 단순히 개념적인 이행만은 아니다.

논리적 범주의 이행은 이처럼 내재적으로 이행하지만, 항상 그 밑에 경험의 발전이 매개하고 있듯이 여기서도 경험의 발전이 매개한다. 처음 자연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통해 파악되었다. 그런 가운데 자연 속에 힘의 관계가 발견되면서 자연을 이해하는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2)

그런데 처음에 힘은 물체에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뉴톤의 힘의 법칙이 물질에 외면적인 것과 같다. 그 힘은 “외적 강제에 의해 사물에 밀어 넣어진 것이다.”(논리학, GW11, 360) 힘은 독자적으로 출현할 수 없으니, 이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체를 토대로 한다. 그러면서도 물체는 힘의 운동을 방해할 수 없다. 힘은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며 물체에 다만 부착되어 있을 뿐이다.

물체와 무관하게 힘은 실존하기에 힘은 하나의 물질[Materie]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기력이나 전기력 등 대신 자기 물질 또는 전기 물질 등의 말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 힘은 특정한 물질은 아니다. 힘은 자기를 드러내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하는 직접성’으로서 실존이 아니라 ‘반성된 직접성’에 속하는 실존이다.

‘반성된 직접성’에 속하는 ‘전체’와 ‘힘’은 구별된다. ‘전체’는 자립적이더라도 부분을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분을 통해 실존한다. 그러나 ‘힘’은 독자적인 자립성을 물체의 외면에 갖는다.

하나의 물체에서 힘은 그대로 머무르지 않는다. 힘은 반드시 전달되는 것이니, 힘을 통해 하나의 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반발하게 하는 모순적인 것이 된다. 힘은 이렇게 전달되면서 직접 존재하는 물체를 힘으로 전환하게 하니, 직접적 물체는 부정되면서 이 힘의 관계 속의 한 계기가 된다.

3)

힘과 그 드러냄의 관계는 어떤 물체에서 힘이 다른 물체에 자기를 전달하는 관계다. 이는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로 이행하는 관계가 아니며 타자를 무엇으로 규정하고 정립하는 근거도 아니다. 힘이 드러난다는 것은 물체가 지닌 하나의 힘이 다른 물체에 이동하는 것이다.

그 힘은 처음 그대로 유지되므로 헤겔은 드러냄의 관계를 “옮김[Uebersetzen]”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힘과 드러낸 힘 사이의 관계는 다만 동일성이 유지되는 통일이다. 동시에 이 힘은 움직이지 않던 타자를 움직이게 하면서 부정하는 것이니 곧 부정하는 통일이다.

“힘의 운동은 이행이 아니다. 차라리 힘은 자기 자신을 옮겨놓는 것이며 힘 자신에 의해 정립된 변화 속에서 힘의 있는 그대로가 유지된다.”(논리학, GW11, 360)

힘의 전달을 통해 힘과 물체 사이에 즉 반성된 직접성과 존재하는 직접성 사이에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 통일은 힘이 다른 물체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므로 ‘전체’에서처럼 형식적인 통일에 머무르지 않고 실재적으로 통일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전달은 하나의 힘이 어떤 물체에 있다가 다른 물체로 이동한 것이므로 하나에서 존재할 때는 타자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에서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로소 타자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두 물체 사이의 힘이 동일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반성’인 동시에 전자에서 사라지고 후자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부정적 반성’이라고 한다.

“힘은 반성된 존립과 직접적 존립의 통일이거나 형식적 통일성과 외적 자립성의 통일이다. 힘은 양자를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힘은 양자의 접촉인데 그 중 하나는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존재하는 것이니, 이런 힘은 자기와 동일한 긍정적 반성이며 동시에 부정적인 반성이다.”(논리학, GW11, 361)

4)

힘이 이렇게 외면적이므로 물체에서 이 힘은 물체가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힘이 외면적이므로 필연적으로 이 힘은 자발성을 지니지 못하고 그 힘을 촉발하도록 하는 것이 외부에서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일정한 계열이 수립된다. A는 B에 힘을 전달하고 B가 힘을 드러내도록 촉발하며, B는 C에 힘을 전달하고 다시 촉발한다. 이런 관계가 발전하게 되면, 마침내 순환이 등장한다. 즉 A가 힘을 B에 전달했을 때, 이 A가 힘을 드러내게 촉발하는 것은 바로 B인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물체 사이에는 서로 힘을 전달하는 관계 즉 힘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처음에 물체와 힘은 외면적 관계에 있었다. 이 경우 물체와 힘은 외면적이며 긍정적인 통일 속에 있었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관계에 이르게 되면, 힘과 물체는 단순히 외면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힘을 전달받은 물체가 동시에 거꾸로 힘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 속에 힘에 대립하는 물체는 부정되고, 다만 두 가지 서로 대립적으로 작용하는 힘만이 남게 된다. 이제 물체란 두 대립하는 힘을 부정적으로 통일하는 것일 뿐이다.

5)

이 두 물체는 자신의 직접적 존재를 지양하고 상호 작용하는 힘으로 규정되면서 서로 촉발하고 타자에 의해 제약되는 관계를 이룬다. 이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힘을 개념적으로 보면, 힘은 자기를 드러내서 타자를 정립한다. 그러나 이런 힘은 타자를 전제로 하니, 이 타자로부터 힘을 전달받아 자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타자가 힘을 전달하는 이유는 곧 힘 자신이 이 타자에 자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타자를 정립하는 활동은 곧 타자를 전제로 하는 활동이다.

개념상 힘은 정립하는 활동이지만, 실재적으로는 다른 힘이 그 힘을 활동하도록 촉발한다. 여기서 어느 것이 먼저인가는 문제 되지 않는다. 두 가지는 모두 타자를 촉발하며 타자로부터 촉발되니, 양자는 동일한 것이다. 즉 촉발하는 것은 동시에 촉발되는 것이다.

“힘은 개념상 처음에는 자기를 지양하는 동일성으로서 규정되며, 그 실재상으로는 두 힘 가운데 하나는 촉발하는 힘으로서 다른 하나는 촉발되는 힘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나 힘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의 동일성이며, 또는 반성된 통일과 직접적인 통일의 동일성이다. 이런 규정 각각은 다만 계기이고 통일 속에 있으며 따라서 타자를 통해 매개된 것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2)

이렇게 보면 힘은 외부에서 촉발되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외부에서 촉발하는 힘은 사실 자기가 그렇게 하도록 촉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힘은 외적인 작용이 아니라 내적인 자발적인 작용이다.

이런 두 대립하는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볼 때, 힘은 본래 통일된 것이다. 이 통일된 힘이 실재적으로는 두 대립하는 힘으로 나타나며, 이 대립하는 힘은 상호작용을 통해 다시 통일된다.

“이 힘이 촉발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활동이다. 또는 다른 힘이라고 즉 일반적으로 말해 다른 힘이며 촉발하는 힘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촉발하는 힘은 자기의 타자에 부정적으로 관계함으로써 이 힘은 타자의 외면성을 지양한다. 그런 한 촉발하는 힘은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촉발하는 힘이 자신을 다른 것에 대립하게 하는 것은 다만 전제를 통해서이다. 즉 그것은 자기에서 외면성을 얻어서 이를 통해 촉발되는 한에서만 촉발하는 것 자체가 된다.”(논리학, GW11, 363)

6)

최초에 힘은 유한한 힘이었다. 그것은 물체에 의해 제약된 힘이었다. 그러나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물체는 지양되며, 힘은 자기 매개하는 것이며 무한하다. 이런 힘은 더는 외적인 충격에 의해 자기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힘의 상호작용을 매개로 하여 본래적 통일과 반성된 통일이 구별된다. 전자는 내면적인 통일이며 후자는 외면적인 통일이다. 여기서 내면과 외면의 관계가 출현한다.

“힘을 활동하게 촉발하는 충격은 그 자신이 고유하게 촉발하는 것이다. 그런 힘에 다가온 외면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그 힘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의 본질적인 자기 동일성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을 통해 매개된 것과 같다. 달리 말하자면 힘은 그 외면성이 자신의 내면성과 동일하게 만든다는 것을 표현한다.”(논리학, GW11, 364)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3-전체와 부분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3-전체와 부분의 관계

1)

먼저 간단하게 전체의 흐름을 잡아보자. 본질론 2편 현상편은 실존-현상-관계로 나간다. 실존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현상은 부정적인 실존이며, 관계는 상호 부정적인 것 또는 자기 부정적인 것이다. 이런 이행에서 실존이 종적 개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현상은 법칙을 통해 종적 본질이 처음 등장한 것이며, 관계는 종적 본질이 외면적으로 실현된 것이니, 종의 집단 즉 무리로서 유를 의미한다. 헤겔은 이런 종의 무리를 실체라고 이름 붙인다.

관계 장은 이런 유적 실체가 처음 감추어져 있다가 마침내 자기를 외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 장에서 종적 본질이 개체 속에서 출현할 때, 개체들은 아직 단순한 집합으로서 무리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런 종적 본질이 실현되면, 무리는 단순한 집합에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 상호작용적인 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관계는 처음에는 동물 종에서는 단순한 암, 수의 관계이다. 이런 상호작용적 관계는 최종적으로 인간이란 종에 이르면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사회 즉 유적 실체는 오직 인간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적 본질이라 하면서 생물체의 종적 본질과 구분한다.

2)

이런 전체 맥락에 따라서 이제 관계 장으로 이행해 보자. 현상이 법칙 관계로 이행하면서 구체적 법칙 즉 현상 세계와 일반적 법칙 즉 법칙 세계가 대립했고, 이는 일반적 법칙은 추상적인 것으로서 피안에 성립한다. 피안에 성립한 추상적 법칙이 현상 속에서 실현되면서, 법칙 세계와 현상 세계가 통일을 이루니, 여기서 관계가 출현했다.

이제 ‘관계’ 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자와 개별자의 관계를 매개로 일반적인 본질과 개별적인 현상 사이의 관계가 전개된다. 개별자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본질이 현상 속에 더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본질이 더 구체적으로 실현되면 그럴수록 개별자의 관계도 더 필연적인 동일성을 지니게 된다.

이 관계는 우선 이중성을 지닌 관계이다. 여기서 본질도 현상을 지니며 현상도 본질적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각자는 자립적이면서도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자기는 타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기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전제되어야 하며, 타자를 부정(정립)하는 것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 타자로 이행하는 것은 곧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타자로의 반성은 자기 자신으로의 반성이다. 이 관계는 두 측면을 갖는데 왜냐하면, 이 관계는 타자로의 반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는 자신에서 자기 자신의 구별을 갖는다. 관계의 측면들은 자립적으로 존립한다. 왜냐하면, 이 측면들은 서로에 대해 무차별적인 상이성을 갖는 가운데 자기 자신 내에서 부서져 있으므로 각자의 존립은 그에 못지않게 다만 타자에 관계하고 서로 부정적으로 통일되는 가운데서만 의미를 지닌다.”(논리학, GW11, 353)

이런 관계는 반성운동에서 개념적으로는 이미 제시되었던 것인데, 이제 물체들의 관계를 통해 마침내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즉 반성운동은 종적 개체가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본질을 지속하게 한다. 여기서 본질은 개체를 통해 자기로 되돌아오며, 개체는 본질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한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타자로 반성하는 것이 곧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며, 양자의 부정적인 통일이라 했다. 그런데 이런 반성운동은 생물체가 전개하는 일반적인 운동을 추상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이제 등장한 본질적 관계에서도 동일한 반성운동이 일어나지만, 이 운동은 자립적인 것들이 전개하니 실재하는 구체적인 운동이다. 여기서 개체는 자립적인 것이어서 서로 무차별하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반성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일은 무차별성과 대립한다.

본질적 관계에서 각 요소는 자립성과 반성운동이 동시에 성립하므로 이런 관계는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것이다. 이런 모순의 극복되어 자립적인 요소들이 동시에 완전한 반성을 통해 통일을 이루게 되면, ‘실제성’이라는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본질적 관계를 이루는 측면들은 총체성이지만, 이 총체성은 자기의 피안을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서 갖는다. 이 피안은 현상이다. 그 실존은 오히려 자신의 실존이 아니라 자신의 타자가 지닌 실존이다. 따라서 본질적 관계는 자기 내에서 부서진 것이지만, 이렇게 그 자신이 지양된다는 사실이 성립하는 근거는 그것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타자를 통일한 것 그러므로 전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므로 이 관계는 자립적 실존을 가지며 동시에 본질적으로 자기 내로 반성한다.”(논리학, GW11, 353)

3)

관계 장은 이런 법칙 세계와 현상 세계의 통일이 발전해 나가는데 추상적 법칙이 그 자체로 구체적 현상을 지니게 되지만, 아직은 법칙을 내재하고 있는 자립적인 현상과 상호 공존하는 관계에 머무를 때,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양 측면은 자립적인 것이지만, 그 결과 각자는 다른 것을 자기 속에 비치게 하며[scheinen] 동시에 다만 이 양자의 통일성으로서만 존재한다. 이제 본질적 관계는 다만 최초의 직접적인 관계이므로 부정적인 통일과 긍정적인 자립성은 공존을 통해 결합한다.”(논리학, GW11, 355)

전체와 부분은 각자 이중적이다. 부분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립적인 것이지만, 전체 속에서 한 부분을 이룬다. 전체는 부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관계는 자립적인 부분에 외면적이다.

반대로 전체는 한편으로는 부분의 전체이다. 즉 전체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관계로서 전체는 부분으로부터 반성되어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독자적으로 자립하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은 이중적이고 각기 타자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각 측면이 지닌 지위는 구별된다. 전체에서 전체가 토대이며, 그것을 이루는 부분은 전체 속게 할당되면서 정립된 것이다. 반면 부분에서는 각 요소의 실존이 토대이며, 전체는 다만 외적인 관계일 뿐이다.

각자는 자립성 속에서 타자에 관계하며 직접 모순적인 것이어서 자기를 지양하게 된다. 자립적 전체에서 부분은 전체가 자기를 분할하여, 즉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여 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부분의 통일이므로 부분에 의존하고 있어서 전체는 부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체는 부분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자립적인 부분은 직접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은 스스로 부서지니 전체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부분은 그 자신이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와 부분은 각자 자립적이지만, 상호 제약하고 있어서 조건과 제약된 것이라는 관계를 맺는다. 이런 상호 제약 속에서 각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니, 각자는 무제약적인 자립적인 것이다.

“이런 관계의 두 측면은 각기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자립성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타자 속에서 자립성을 가지므로 다만 양자의 동일성만이 현존한다. 양자는 그런 동일성 속에서 다만 계기일 뿐이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에서 자립적이므로 양자는 두 가지 자립적인 실존이면서 서로 무차별하다.”(논리학, GW11, 356)

4)

전체와 부분은 각기 자립적이면서도 상호 부정적이니 서로 순환하게 된다. 이런 순환의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동일성과 구별이 교체된다.

우선 첫째 단계에서 전체는 부분과 동일하다. 자립적인 전체는 부분으로 해체된다. 전체는 이런 해체된 다양한 부분의 통일이다. 전체는 이런 부분의 반성된 통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전체는 부분과 같지 않다. 전체는 해체된 부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런 다양한 부분들의 집합과 같은 것이니, 이 집합이 곧 전체라면 전체는 다만 전체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 전체를 이루는 부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이다. 그러므로 부분과 전체는 동일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네 번째 단계에서 부분은 전체와 같지 않다. 부분은 다만 전체가 분할된 다양한 부분과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체와 부분은 상호 무차별하며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 자기 내에서 스스로 부서지면서 타자로 이행한다. 전체는 추상적 동일성이니, “이런 동일성인 전체는 동시에 자기 내에서 구별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체는 “자신의 타자로 반성한다.” 부분은 관계없는 다양한 상이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니 “그 자체로서 자기 자신의 타자이며 자신을 다만 지양하는 것이라고 할 자기 내에서 타자이다.”(논리학, GW11, 357)

이런 순환 속에서 본질적인 관계의 진리는 매개이다. 즉 양자는 각기 모순적이며 서로 모순적이다. 자기 부정은 자기 긍정이며 타자로 이행하는 것은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직접성은 정립된 것이며 자립성은 매개된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의 진리는 매개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 관계의 본질은 반성된 직접성과 존재하는 직접성이 모두 지양되는 부정적인 통일이다. 이런 관계가 모순적인 것이니, 자신의 근거로 돌아간다.”(논리학, GW11, 357)

이런 순환 속에서 처음 서로 독자적인 것으로 세워지고 외적으로만 관계하던 전체와 부분은 상호 이행하면서 순환하는 것으로서 밝혀지니, 이것이 곧 힘과 외화의 관계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

1)

개별적 현상에 내재하는 동일성이 곧 법칙이다. 이 법칙은 상대적이므로, 여기서 현상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가 구별된다. 전자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법칙의 세계이며 후자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의 세계이다.

이런 추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을 넘어 가장 완전한 추상적인 일반 법칙이 출현한다. 가장 추상적인 일반 법칙에서 법칙의 두 요소는 완전한 동일성을 이루며, 지금까지 그 요소를 지배했던 개별적 내용은 제거되고 오직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형식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 법칙은 주관적으로 추상된 것이니, 현상에 대해 외면적으로만 관계한다.

이런 추상적인 일반적 법칙과 구체적인 개별적 현상이 통일을 이루면서 처음 출현하는 것이 곧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다. 이는 현상의 측면과 법칙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는 총체성이다.

그런데 상대적인 현상의 법칙은 자기 내에 법칙의 동일성과 상호 무차별적 개별적 현상이 공존한다. 헤겔은 현상의 법칙 내에 들어있는 현상의 내용을 비본질적 현상이라 한다. 반면,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는 나타나는 현상은 ‘본질적 현상’이다.

법칙 세계의 본질적 현상은 현상 세계의 비본질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고 각자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완전하게 통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법칙을 이루는 양자의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즉 자기를 타자로 삼아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즉 “각자는 자신의 타자를 자기 자신에서 포함하는 동시에 자립적인 것이 되어 이 타자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으로”(논리학, GW11, 348) 규정된다.

이전의 현상적 법칙은 내용이 무차별적이므로 그 내용은 법칙 관계 속에서 다만 형식적 자기 내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정립된 존재는 자기 자신에서 내적으로 반성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경우 동일성은 형식적 동일성이 아니라 실질적 또는 ‘실재하는 동일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타자는 동일한 것이며 현상하는 것은 그런 가운데 사실상 타자 속으로 반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으로 반성된다. 정립된 존재가 자기로 이처럼 반성하는 것이 바로 법칙이다. 그러나 정립된 존재는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비존재로 반성되거나 그 자신의 동일성은 그 자체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정성이며 자신의 타자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자기 내 반성인 법칙은 현상의 동일적인 토대일 뿐만 아니라 현상은 그 법칙에서 자신의 대립물을 가지며 그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다.”(논리학, GW11, 347)

2)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가장 추상적인 일반성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개별성을 동시에 갖는다.

여기서 근거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이전에 추상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양자는 외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자기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며 개별적 현상이 되고 현상은 자기를 지양하여 법칙이 되니, 양자는 본질과 가상 사이의 매개 관계가 되며 이런 점에서 앞에서 설명한 근거 관계가 회복된다.

본질과 종적 개체 사이의 반성 관계가 여기서 다시 출현한 것이다. 여기서 법칙이 형식으로서 근거가 되고 현상이 토대가 되면서 현상은 자기 부정을 통해 근거로 복귀하고 근거는 자기를 정립하면서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제 법칙은 현상 세계의 총체적 반성이므로 또한 현상 세계의 본질을 결여한 다양성도 포함한다. 가변적이고 변화하는 계기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본질적인 계기로 되면서 그것은 절대적 부정성이거나 일반적으로 말해 형식 자체가 되지만, 그 계기는 그 자체적인 동시에 대자적인 세계 속에서 자립적이지만 반성된 실존이라는 실재성을 갖는다. 거꾸로 이 반성될 자립성은 이제부터 자기 자신에서 형식을 갖고 이를 통해 내용은 단순히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와 합일하는 내용인 것과 같다.”(논리학, GW11, 348)

“나아가서 또한 본질 세계는 현상 세계를 정립하는 근거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형식을 자신의 본질 규정 속에 포함하는 가운데 이 세계의 자기 동일성이 지양되며, 자신을 정립된 것으로 만들어 정립된 직접성으로서 현상 세계로 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49)

3)

그러나 이런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아직은 피안에 머무른다. 그것이 지닌 본질적 현상은 구체적인 자립성을 가지지만, 아직은 현실이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서 가진다. 그러므로 현상의 세계를 감각적 세계라고 한다면, 이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의 초감각적 세계이다.

이 초감각적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감각을 넘어서서 순수하게 동일한 법칙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이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와 같다.

이와 같은 피안의 법칙은 현상에 내재하는 법칙과 마찬가지 내용을 지니지만, 그 내용은 전도되어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추어진 상처럼 현상 세계와 반대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피안의 법칙에 관해서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지성 장에서 자기의식 장으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제시한 바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된 전도의 내용은 여기 논리학에서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즉 현상에서 남극은 피안에서는 북극이 되고 현상에서 -전기는 피안에서는 +전기가 되며, 현상에서 범죄는 피안에서는 타자에게 베푸는 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세계는 서로 관계하면서 현상 세계에서 긍정적인 것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인 세계에서는 부정적이고 거꾸로 전자에서 부정적인 것은 후자에서 긍정적이다. 현상 세계에서 북극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으로는 남극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양전기는 그 자체로는 음전기이다. 현상 세계에서 악이고 불행 등은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으로는 선이고 행복이다.”(논리학, GW11, 351)

헤겔이 이런 설명을 어디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기독교에서 피안에 관한 서술에서 끌어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유사한 설명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그것의 피안이라고 할 화폐에서는 전도된다고 한다. 상품에서 사용가치가 지배적이라면, 화폐는 교환가치가 지배한다. 이런 전도는 상품이 화폐로, 화폐가 다시 자본으로 발전하면서 계속해서 전도된 물신의 세계로 등장하는 데 헤겔의 피안 법칙,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라는 개념이 지닌 전도와 유사하다.

또는, 현대 물리학에서 쌍생성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하나의 에너지(감마선)는 서로 대립하는 두 물질로 분열된다. 전자와 양전자가 나오니, 만일 현실에서 전자가 나온다면, 그 이면의 세계에서는 양전자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현상의 법칙과 피안의 법칙 사이의 관계와 서로 닮았다.

 

4)

현상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는 둘 다 현상과 법칙으로 이루어진 총체성이지만, 여기서 법칙의 측면은 서로 동일하고 현상의 측면은 서로 전도되어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으니, 이 모순을 통해 현상의 세계와 피안 세계의 대립은 해소된다.

“이제부터 법칙은 실재화하며, 법칙의 내적 동일성은 동시에 현존하는 동일성으로 되고, 거꾸로 법칙의 내용은 관념성[자기 동일성] 속으로 고양된다. 왜냐하면, 각 측면은 자기에서 다른 측면을 가지고 따라서 진정으로 다른 측면과 동일하며 그 결과 자기와도 동일하기에 이 내용은 자기 자신에서 지양된 내용이며, 자기 내로 반성된 내용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52)

양자의 대립이 해소되면서 법칙의 동일성이 이제 피안이 아니라 현상 속에서 출현하게 된다. 즉 피안의 세계가 현실에 실현되는 것이다. 이제 법칙은 반성된 총체성이고 현상은 직접적인 총체성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법칙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는 각자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대립하니, 여기서 자기를 넘어서서 자신의 타자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출현하는 것은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하여 두 가지 총체성으로 되는 총체성이다. 하나는 반성된 총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총체성이다. 양자는 처음에는 자립적인 것이지만, 다만 총체성으로서만 그런 것이다. 양자는 그런 한 각자 본질적으로 자기에서 타자의 계기를 갖는 것이다. 각자는 직접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동시에 반성된 것으로 규정되므로, 각자의 자립성은 이제부터 다만 타자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면서 자신의 자립성을 이런 양자의 통일 속에서 갖는 것으로서만 정립된다.”(논리학, GW11, 352)

법칙과 현상의 이런 관계가 앞으로 2편 3장 관계 장에서 전개될 전체와 부분, 힘과 외화,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 양자의 통일성은 내재하다가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러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진다.

“세계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다양성의 형식 없는 총체이다. 이 세계는 본질적인 세계든, 현상하는 세계든 몰락한다. 왜냐하면, 다양성이 단순하게 상이한 것이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총체성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며 본질적으로 관계로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52)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

1)

앞에서 실존에서 현상 즉 정립된 것으로 이행하면서 여기서 법칙 관계가 등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현상 세계는 실존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내적으로 관계를 맺는 세계다. 이 세계에 내재하는 관계가 곧 법칙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법칙의 독일어 표현인 ‘Gesetz’가 ’정립된 것[Gesetztsein]‘에서 나왔다고 본다. 법칙은 곧 정립된 것이므로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한다. 이런 전제가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하나의 정립된 것은 다른 정립된 것과 관계하게 된다고 본다. 그것이 곧 법칙이다.

여기서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현상은 두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은 직접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며 다른 측면은 부정되고 정립된 측면이다. 현상 세계에서 자립적인 것들은 서로 무차별하며 반면 법칙의 세계에서 부정적인 것의 상호 관계를 통해 자기 동일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법칙은 현상의 반성을 통해 출현한 것이다. 현상의 무차별적 관계는 무실한 관계이고 이 반성을 통해 자기 동일성의 관계로 된다. 이런 반성은 아직 외적 반성이며 경험적인 추상화이며 일반화에 속한다. 이런 법칙은 아직 독립된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현상에 내재할 뿐이다.

2)

현상과 내재하는 법칙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 우선 자립적인 현상의 자기 매개를 통해 대립이 해소되며 긍정적인 동일성이 출현한다.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여기서 현상은 법칙을 내용으로 갖는다. 이 내용은 상호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본질적 내용이다. 동시에 현상은 그것 외에 직접적인 내용을 지닌다. 그러므로 법칙은 일반적이지만, 그것이 출현하는 현상 세계는 다양한 개별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낙하 법칙은 지구에서와 달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Grundlage]가 된다. 왜냐하면, 일반적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다만 외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현상이 지닌 개별적 내용은 그 법칙이 지닌 본질적 내용에 내적인 관련을 지니지 않는다. 이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적용되는 추상적인 공통성일 뿐이다.

“법칙은 토대 자체이며 현상은 동일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에 더해서 그 직접적인 존재가 지닌 비본질적 내용도 포함한다. 현상 자체가 법칙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현상이라는 형식 규정조차도 하나의 내용이며 더욱이 법칙의 내용으로부터 구별되는 내용이다.”(논리학, GW111, 345)

이런 법칙은 현상의 피안에 독립된 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내재하며 “현상에 직접적으로 현현한다.” 그것은 “실존하는 또는 현상하는 세계의 고요한 모사”(논리학, GW111, 345)이다.

3)

그러나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보면, 법칙의 일반성은 사실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런 상대성 때문에 좀 더 일반적인 법칙과 좀 더 현상적인 법칙의 차별이 발생한다.

이제 현상적 법칙 세계를 헤겔은 간단히 현상 세계라 하고 일반적 법칙 세계를 간단히 법칙 세계라고 한다. 그러면 현상 세계에 이미 일반성으로서 법칙이 내재하며 거꾸로 법칙 세계도 완전한 동일성이 아니라 우연성과 개별성이라는 현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현상 세계 속에도 이미 법칙이 들어있다. 여기서 법칙의 관계는 개별적 요소에 대해 더욱 외면적이며 이 법칙은 제한적으로 적용되며 동일한 법칙을 내용으로 하는 개별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법칙들이 출현한다. 법칙의 개별적 내용이 곧 현상 세계를 현상 세계로 만드는 형식 규정이 된다.

일반적 법칙의 세계는 현상 세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이 출현하지만, 완전히 개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법칙의 세계 자체가 나름대로 개별적인 현상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현상과 법칙은 각기 이중적으로 된다. 현상 내에서 일반법칙이 들어있으며 법칙도 개별적 현상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현상과 법칙은 모두 총체적이다.

“양자는 오히려 하나의 총체성을 이룬다. 실존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법칙의 왕국이며 이 법칙의 왕국은 단순한 동일한 것이지만,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 속에서나 실존의 자기 자립성을 스스로 지양하는 가운데서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논리학, GW111, 345)

4)

이런 법칙의 일반화의 과정에서 순수한 추상적인 법칙이 출현하게 된다. 순수한 법칙에 이르면,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더는 자립적 무차별한 내용을 상실하고 법칙 관계를 이루는 한 요소로만 규정된다.

그럴 때 헤겔은 법칙은 긍정적 통일이 아니라 ‘부정적 통일’을 이루며, 즉 두 요소는 더는 구별되지 않고 개별 자립적 요소의 ‘내용’이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형식’으로 되었다고 한다.

“[상대적] 법칙은 현상의 긍정적인 본질 규정일 뿐이며 그것의 부정적인 본질 규정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내용 규정이 형식의 계기가 되어서 그 자체로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며 자기 자신에서 자신이 아니라 타자가 될 것이다.”(논리학, GW111, 346-7)

예를 들어 전기에 관한 과학의 발전에서 처음에 전기는 유리 전기와 섬유 전기로 출현했다. 과학이 발전하여 추상화가 일반적으로 되면서 이런 물질 전기는 사라지고 + 전기와 – 전기로 규정되는데, 유리나 섬유는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전기는 그것에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지만, + 전기나 – 전기는 더는 구체적 내용이 없고, 여기서 +. -는 서로 상대적인 규정 즉 형식적 규정만을 지닐 뿐이다.

이런 순수한 추상적 법칙의 세계는 사유를 통해 가정되지만, 과연 이런 법칙이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유가 추상한 것은 주관이 개입하여 외면적인 것일 뿐이고, 현상의 객관적 본질이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칙은 현상의 토대가 되기는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라고 볼 수는 없게 된다.

“법칙은 현상의 자기와의 단순한 동일성이다. 따라서 현상의 근거가 아니라 그 토대이다. 왜냐하면,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 아니라 현상의 단순한 동일성으로서 직접적인 통일 즉 추상적 통일이다. 따라서 이 추상적 통일 옆에는 현상의 다른 내용이 발견된다.”(논리학, GW111, 347)

결과적으로 이런 추상적인 법칙을 현상 속에 집어넣는 또 제삼자 예를 들자면 플라톤적인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0-현상의 개념과 법칙의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0-현상의 개념과 법칙의 개념

1)

본질론 2편 1장이 실존 장이고 이것에 이어서 2장에서 헤겔은 현상을 다룬다. 2편에서는 전체적으로 종적 개체들 사이의 실재하는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관계는 점차 가능성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다루어지는데, 최종적으로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서 그런 실재하는 관계가 완성된다.

그 가운데 처음 나타난 실존 장에서 실존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실존은 오직 심연 위에 떠돌고 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관계는 아직 내면에 즉 가능성[an sich]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실존은 서로 상이한 것일 뿐이다. 판단 형식으로 본다면 이는 정언 판단 형식에 속한다. 여기서 실존은 주어에 해당하고 술어는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는 단순한 이름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진달래다”라는 판단이다. 여기서 술어 ‘진달래’는 단순히 어떤 실존하는 것을 지칭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 장에 이르면 종적 개체는 서로 상이한 것을 넘어서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이르게 되고, 판단 형식으로 보자면 그 관계는 곧 가언 판단의 형식으로 된다. 가언 판단은 법칙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p이면 q이다’라는 형식이다. 여기서 p, q에 해당하는 것이 현상이고, 양자의 관계를 이루는 전체가 법칙이다.

실존 장에서 나왔던 ‘성질’과 ‘질료’ 개념이 존재론에서 ‘질’과 ‘실재성, 규정성’(긍정 판단 형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현상 장에서 전개되는 ‘현상’ 개념은 존재론에서 전개된 ‘부정성’라는 개념(부정 판단 형식)에 상응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현상을 ‘반성된[즉 부정된] 실존’이라고 한다.

2)

우선 실존이라는 범주에서 어떻게 현상이라는 범주가 출현하는가를 보자. 현상은 실존이 물질로 해체되고 이 물질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나온다.

즉 현상 장에 끝에 여러 가지 물질이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다. 이 물질은 규정적[bestimmt]이면서도, 독립적이기에 서로 대립적이다. 이런 대립적인 물질이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으니, 이 물질은 서로 침투한다고 생각된다.

즉 어떤 물질은 다른 물질이 비어 있는 곳[poros]에 들어가 있고 거꾸로 다른 물질은 이 물질이 비어 있는 곳에 들어있다. 이런 물질은 자기가 존립하는 가운데 이미 자기의 비 존립 즉 구멍이 존재한다.

“사물 속에 포함된 구별된 것이 자립적인 물질이다. 이 물질은 모순적인 것이니, 왜냐하면 이 물질은 직접적으로 존립하면서 동시에 다만 낯선 것이 자립성 속에 그러므로 그 자신의 존립이 부정당하는 것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며 다시 말하자면 바로 그러하므로 또한, 다만 자기에게 낯선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또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가운데서만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GW11, 342)

이런 상호 침투를 통해 물질과 물질 사이의 관계가 출현한다. 이 관계가 곧 법칙이다. 실존은 자립적인 것인데, 이것이 이런 관계 속에 하나의 계기가 되면 자신의 자립성을 부정당하게 된다. 여기서 법칙 속의 계기는 한편으로는 전체 속에 존재하므로 타자에 의해 정립된 즉 부정된 계기(-p)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직접 존재하는 것[존립하는 것:ㅔ]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중성을 지닌 것 즉 존립하는 것이 동시에 부정적일 경우 헤겔은 이를 ‘현상’이라고 한다.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했던 실존에서 이런 관계가 출현한다는 것이 실존이 감추고 있는 근거인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아직 현상에서 본질로의 복귀는 중간에 머무른다. 왜냐하면, 여전히 실존이 가지고 있는 무차별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은 우선 본질이 그 실존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본질은 직접 실존에 현현한다. 실존이 직접적인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된 실존으로서 존재하게 되면서 이 사실이 실존에 나타나는 본질의 계기를 이룬다. 달리 말하자면 실존이 본질적 실존일 때 현상이다.”(논리학, GW11, 341)

3)

헤겔에서 현상은 자립적인 존재[긍정성]과 정립된 존재[부정성]이라는 이중적 계기를 동시에 가진 것이다. 반면 가상은 부정적인 현상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면서[이중 부정성, 정립된 존재로서 정립된 존재]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본질론의 순서로는 가상이 먼저 나온다. 1편 본질의 반성 운동을 설명할 때 헤겔은 개념적으로 가상을 제시했다. 즉 종적 개체를 매개하는 것이 본질인 종인데, 본질은 종적 개체를 정립하고 이 개체의 부정을 통해 다시 본질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종적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종적 개체는 자기 부정적인 것, 정립된 것이 다시 정립되는 것 즉 가상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앞에서 설명한 본질과 가상[Schein]의 관계였다.

1편에서 다루어진 본질과 가상은 본질론 전체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본질론에서 생성하는 운동 과정의 진정한 출발점은 ‘실존’인데, 이 직접적이고 자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이런 실존이 해체되어 물질의 법칙 관계로 되면서 이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현상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현상은 직접적인 실존에서 본질이 처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현상에서 법칙은 자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한 물질들의 관계이므로, 외적인 관계이다. 여기서 반성은 아직 “낯선 외적인 반성”에 머무른다. 이 관계가 관계하는 요소들에 내재하게 될 때 이 현상은 마침내 자립성과 무차별성을 잃어버리고, 가상으로 되면서 본질이 본래대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헤겔은 이런 본질의 본래적 모습을 즉 가상을 3장인 관계 장에서 다룰 것이다.

“이런 의미[부정성]가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이룬다. 그것은 곧 현상이 실존 자체에서 반성의 부정성 즉 본질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본질의 본성은 본질이 속했으며, 본질과 실존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이 실존을 현상으로 선언했던 낯선 외적 반성은 아니다.”(논리학, GW11, 342)

가상이 발전하여 드러내는 진정한 내적 관계를 통해 개체들을 전체로 묶는 일반적 본질이 출현한다. 이런 일반적 본질을 개체에 내재하는 종적인 본질과 구분된다. 이 일반적 본질은 개체들의 상호 관계를 통해 종적 본질이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헤겔은 이런 일반적 본질을 개체에 내재하는 본질 개념과 구별하여 개체들 전체를 의미하는 ‘사태’[Sache]라고 규정한다. 현상 장의 흐름은 이런 외적 관계가 내적 관계로 발전하면서 내적 본질이 외적인 관계, 즉 사태로 출현하는 과정이다.

4)

헤겔은 일단 위와 같이 실존과 현상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다음 다시 현상과 법칙을 구별한다. 현상은 한편으로 실존이며 여기에 속하는 내용은 자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다른 한편 현상 속에는 이미 본질이 출현하니, 이때 현상은 본질적 내용을 지닌다.

이 본질적 내용은 실존의 부정성이며, 이는 다른 실존과의 관계 속에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실존의 부정성, 즉 관계 속의 계기가 곧 현상의 본질적 측면인 법칙을 이룬다.

이 현상의 본질적 내용은 이중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이 본질적 내용은 비본질적 측면이 지닌 다양한 개별성,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연성에 비교해 보면, 그것은 자기와 동일하게 고요하게 불변적으로 머무르는 것이다.

현상의 비본질적 측면을 헤겔은 현상 세계라고 규정한다. 반면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법칙의 세계로 규정한다. 처음에 이런 법칙의 세계는 아직 현상 세계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현상 세계에 내재하고 있다.

이 법칙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본질적 내용은 현상의 비본질적 측면이 지닌 상호 무차별성과 달리 다른 본질적 내용과 맺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계기가 되니, 그것은 이 다른 내용에 대립하는 특정한 것이며 오직 이런 다른 내용과의 관계 즉 법칙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법칙 관계에서 한편으로 하나의 자립적인 것(존립하는 것)은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부정되면서) 관계 속에 계기로(즉 정립된 것)으로 된다. 이런 관계는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한편으로는 자립적인 것과 자립적인 것이 서로 우연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의 존립은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서로가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 그 관계는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이제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하나가 존립하는 것이 타자를 존립하게 만든다. 거꾸로 하나가 정립된다는 것은 동시에 타자가 정립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에 관계하는 것이며, 가상이 다만 가상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5)

이 가운데 다만 관계 맺는 측면만 보면, 하나는 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하며 자기는 타자가 존립하는 매개가 될 뿐이다. 이 두 측면이 법칙적 관계에서는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현상하는 하나는 타자로 반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다. 이런 매개를 통해 각자는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실존하는 것은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타자로 반성되는 것이며 이 타자를 자기의 근거로 삼지만, 이 타자는 그 자체 다만 [다시] 타자로 반성되는 것일 뿐이다. 현상하는 것으로서 실존하는 것에 본질적인 자립성은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그 계기가 지닌 부정성 때문에 무가 무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실존하는 것의 자립성은 다만 본질이 빛 나는 것[Schein: 가상]이다.”(논리학, GW11, 343)

그러나 현상의 법칙 관계는 이렇게 순수하게 관계 맺는 측면만 가진 것은 아니다. 이 관계는 현상의 무차별한 관계 속에 들어있는 것일 뿐이다. 헤겔이 생각하는 이런 법칙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낙하 법칙과 같은 것일 것이다.

낙하 법칙은 흘러간 시간과 경과한 거리가 관계 맺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과 거리는 서로 무차별한 것이므로 이 낙하 법칙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경험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낙하 법칙은 더 근본적인 본질적 관계 즉 힘의 관계가 지구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본질적 관계는 아직 감추어져 있고 낙하 법칙에 내재할 뿐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

1)

앞에서 물 자체의 외면적 규정이 일반적 규정 즉 성질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성질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물 자체의 내재적인 것의 표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타자[주관]에 반사하여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외면성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서 이를 통해 진정으로 자기 내로 반성된 근거”이며, “근거가 자신의 반발과 규정 속에서, 그 자신의 외적인 직접성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외적인 직접성인 동시에 본래적인 존재”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성질은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 모호하다.

이제 경험의 발전은 이런 성질을 하나의 독립적인 물질로 규정하게 한다. 그 과정은 주어 술어 관계의 전도를 통해 일어난다.

한편으로 사물은 이제 여러 성질을 지니면서 다른 여러 성질을 지닌 사물과 구별된다. (헤겔은 물 자체가 성질을 지니면서 표현을 바꾸어 ‘사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성질은 규정성을 지니고 서로 대립하지만,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므로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질은 이런 여러 사물에 공통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제 성질은 그 자체가 자립적인 존재로 된다.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면서 여러 사물을 자신에 귀속하는 성질을 헤겔은 물질이라 한다.

이제 성질은 사물에 속해 있는 속성이나 술어가 아니라 사물이 성질의 외연에 속하는 것이 된다. 여러 사물은 주어인 일반적 성질의 한 예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성질은 이제부터 사물의 일자를 이루는 무규정적이고 힘이 없는 결합에서 해방된다. 성질은 사물을 존립하게 하는 것인 자립적 물질이다. 성질은 단순하게 자기와 연속하는 것이므로 우선 그 자신에서 상이성이라는 형식을 갖는다. 따라서 그와 같은 자립적인 물질이 다양하게 성립하며, 사물은 이런 물질로 이루어진다.”(논리학, GW11, 334)

2)

헤겔은 성질로부터 물질로 이행하는 이 과정에 관한 예로 화학의 발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화학은 색깔이나 냄새, 맛 등의 성질을 물질적 원소로 규정해 색깔은 색소로, 냄새는 후각소로, 맛은 미소로 규정한다. 그 외 이런 물질로 열소나 전자기 물질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온도나 전자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성질을 자립적 물질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물질은 한편으로 성질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물질은 사물처럼 자립적으로 존재하니, 때로 물질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물질은 양극을 이루는 성질과 사물을 결합하며 양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이다.

“성질이 물질로 이행하는 필연성 또는 성질이 진정으로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은 곧 이 성질이 본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진정으로 자립적인 사물이라는 사실이다.”(논리학, GW11, 334)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이제 물 자체의 규정도 변화한다. 성질은 서로 대립하지만, 사실 이는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순을 회피하게 된다.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면서 그 밑바닥에 사물은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으로서 개별자로 다만 그 자체로는 아무 규정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질이 물질로 되면 물질이 자립적인 것으로 되면서, 하나의 사물을 벗어나 다른 사물 속에 연속되는 것이니, 이제 사물이 여러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물질이 존립하는 텅 빈 그릇과 같은 우연적인 존재이고, 그것의 물질로서의 규정 외 다른 규정들은 그 물질에 외면적이며 그것과는 무관한 개별적인 우연성으로 된다.

이 사물은 그 속에서 일반적 물질이 실현된 하나의 예로서 개별적인 사물로 된다. 예를 들어 열소라는 물질은 이런저런 사물 속에 있는 온도로 실현한다. 이때 온도를 지닌 개별적 사물이 지닌 다른 성질들은 모두 무의미한 우연적인 성질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단일한 물질로 이루어진 사물은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규정성을 지니는 한, 혼자서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규정성을 지닌 것은 다른 규정성과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물질은 항상 다른 물질에 대립하게 된다. 이런 대립은 부정성을 낳으니 서로 배척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물질의 대립적 관계가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성질은 한편으로 동일적으로 자기에 관계하는 단순한 자립성으로서 규정이니, 그 속에서 부정적 통일, 사물의 일자는 지양된다. 또한, 이런 성질은 다른 한편으로 타자에 대립하는 규정이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내로 반성된, 본래 규정된 일자인 한에서 그러하다.”(논리학, GW11, 335)

3)

물질은 자립적이면서 다른 물질에 대립하는 규정적인 것이다. 물질들은 서로 밀쳐 내면서 자립적이니, 하나의 사물 속에는 여러 물질이 서로 물질들이 있다고 할 때,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공존한다고 설명된다. 이 경우 사물은 하나의 텅 빈 그릇에 불과하게 된다. 사물은 이런 물질들을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어서,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물질들이 어떤 것이고 어느 만큼 들어있는지에 의해 구별될 뿐이다.

하지만 사물은 지속하는 개별자이므로 이 속에서 물질들은 단순하게 공존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부정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개별자를 이루어야 한다. 어떻게 여러 물질이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런 통일 가능성을 위해 우선[주로 고대철학에서] 제시되는 이론이 곧 구멍 나 있음[poros]이라는 개념이다. 하나의 물질은 자기 속에 구멍을 지니고 있어서 그 속에 다른 물질이 끼어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물질은 다른 물질의 구멍 속에 들어있다. 이와 같은 것을 상호 침투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서로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멍 나 있음의 개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질이 구멍 나 있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기의 비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물질은 자신의 절대적 타자 속에 자기의 존립을 가지며 자신의 비존재를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물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반대를 통해 즉 자신의 부정을 통해 자신과 자기 모순적으로 매개하는 것이 되며 또는 자립적인 물질이 다른 물질의 존립과 비존립을 통해 자기 모순적으로 자기와 매개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37)

이런 자기 모순적인 물질은 자기를 유지할 수 없으니 물질은 이제 자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물질이 자립성을 상실하면서 현상으로 된다.

“실존은 이제 사물 속에서 자신의 완전성에 도달한다. 즉 본래 존재하는 존재 또는 자립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본질 실존이 하나의 존재 속에 있다. 따라서 실존의 진리는 그 비본질성 속에 그 본래적 존재를 가지거나 타자의 존립 그것도 절대적인 타자의 존립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거나 자신의 무실함을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은 현상이다.”(논리학, GW11, 337)

4)

헤겔은 주에서 표상이 이런 모순을 피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 방법은 무한소라는 개념이다.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모순은 여기서 존재를 무한소로 나누면서 이 무한소에서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무한소는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한소가 있다면, 모순은 회피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표상 작용은 이 안개 같은 대상 즉 구멍이나 작은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런 것들 속에 어떤 물질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물질의 부정을 인식하니, 여기 물질이 있고 그 옆에 그 부정 즉 구멍이 존재하며 그 옆에 다시 물질이 발견될 것이라는 말이다.”(논리학, GW11, 339)

“뿐만 아니라 그런 표상 작용은 이런 사물 속에 첫째 자립적인 물질과 둘째 그 부정 즉 구멍 나 있음을 지니면서 동일한 지점에서 다른 물질을 지니니, 이 구멍 나 있음과 물질의 자립적 존립은 서로 넘어 들어가 있어서 서로 부정하면서 침투를 침투한다.”(논리학, GW11, 339)

이런 주장은 수증기가 일정한 가스 속에 확산하더라도, 그 부피가 변함이 없다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임시방편은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않는 방식인데, 이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뒤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오히려 모순을 모순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운동을 찾아내려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8-실존의 발전, 성질에서 물질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8-실존의 발전, 성질에서 물질로

1)

근거 관계는 주로 생물체의 분류에서 기준이 되지만, 이 기준은 주로 종적 개체의 기능 즉 형식을 통해 규정된다. 그러나 이런 형식은 분류를 위해 주관적인 것으로 선택된 것이며, 따라서 종적 개체의 실재적인 관계는 아니다.

이제 실존에서 하나의 개체와 다른 개체 사이에는 실재하는 관계가 발생한다. 실존은 그 개념 상 존재론에서 실재성,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타자와의 관계 속에 이미 들어서 있다. 왜냐하면, 마치 실재성이 여러 성질의 배타적 통일체이듯, 실존도 다양한 형식의 배타적인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헤겔에서 내적인 통일체란 곧 외적으로 통일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잠시 실존[Existenz]이란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현존은 ‘Da + Sein’이며 일정한 곳[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의미다. 반면 실존 ‘Ex+Sistenz’에서 ‘Sistenz’는 라틴어 ‘Sisto’에서 나온 말로, 이 말은 ‘멈춰 서다’라는 의미니 “무언가의 바깥[Ex]으로 나와서 멈춰 서 있다”는 의미다. 이때 ‘멈춰 서다’라는 점에서 ‘현존’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지만, ‘무언가 밖에’라는 점에서 ‘무언가’와 연관되어 있다.

이 ‘무언가’는 ‘서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 즉 ‘운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니 헤겔은 이런 의미에서 현존은 존재론에서 다루고, 반면 실존은 본질이 운동을 통해 성립한 것으로 규정한다. 실존에 관한 헤겔의 정의는 실존에 관한 하이데거의 정의와 대비된다. 하이데거는 ‘실존’을 ‘현존’과 같은 의미로 보고, 이때 존재를 ‘있는 것’과 구별되는 ‘인 것’으로 해석하는데, 하이데거의 존재는 헤겔에서 본질과 가까운 의미다. 헤겔에서 실존이란 의미는 하이데거와 일치하지만, 현존은 하이데거와 다르게 해석된다.

여기서 하나의 실존은 이런 실재하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타자를 통해서 규정한다. 이 규정은 타자에 부딪혀서 외적인 반성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이므로(헤겔은 ‘반사된 가상’이라고 말한다.) 실존 자체에 외면적으로 머무른다.

실존 자체가 어떤 타자에 부딪히는가에 따라서 다양한 외면적 규정이 출현한다. 이 규정성은 다양하고 서로 무차별적으로 존재하는 규정이다. 실존 자체는 자기 관계 속에서 이런 외면적 규정 너머에 있는 것이니, 물 자체와 같이 무규정적인 것이다.

여기서 실존에서 최초의 관계가 등장한다. 즉 무규정적인 물 자체와 그것에 대해 외면적인 규정 사이의 관계이다. 헤겔은 이 관계를 ‘물 자체’와 ‘실존’의 관계로 규정한다. (이 관계 속에서 거론된 실존은 타자를 통해 반성된 외면적 규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헤겔은 이 관계를 실존의 두 측면으로 보아서, ‘본질적 실존’ 또는 ‘비본질적 실존’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2)

물 자체와 외적 규정, 양자는 우선 무차별적이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타자에 부딪혀서 반성된 것이므로 자기에게 본래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 외면적일 뿐이며 물 자체와 외적 규정 각자는 그런 관계에서 서로 반발하여 서로 부정적이다. 물 자체는 외면적 규정이 아니며 외면적 규정은 물 자체가 아닌, 이미 타자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반발과 부정을 통해 서로는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각자 고립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는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하여 규정된다. 물 자체는 외면적 규정을 넘어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외면적 규정을 전제로 하며 거꾸로 외면적 규정은 자기 관계하는 물 자체가 타자 관계에 들어간 것이니, 자기 관계하는 물 자체를 전제로 한다.

이런 상호 전제하는 가운데 반사된 규정성은 “중단 없이 자신을 자기 자신 속에서 반발하여” 자기를 부정하면서 물 자체가 되며, 거꾸로 물 자체는 “자기 관계하며” “그런 한 자기 내 반성의 부정성을 포함하는 한에서 자기동일성”이니, 외적 실존은 그 자신 속에 있는 한 계기다.”(논리학, GW11, 328)

3)

물 자체의 외면적 규정은 한편으로는 타자에 의해 규정된 것이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외면적 규정성은 물 자체의 자기 관계를 포함한다. 외면적 규정은 타자 관계 속에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처음에 물 자체는 자기에 대해 낯선 물 자체라는 타자에 부딪혀서 외적 규정을 낳았다. 그러나 이제 이 외적 규정이 다만 하나의 물 자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 자체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 결과 다양한 물체에 공통된 규정이 추상되니, 이를 통해 성질이 출현한다. 성질은 곧 지각적으로 일반화된 규정을 말한다. 이런 지각적 일반성은 일반적인 것이므로 외적 반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물 자체 자체에 속하는 규정이다. 그러므로 이는 사물의 속성이 된다.*

주*) 이런 일반적 지각의 추상화를 헤겔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① 하나의 물 자체가 다른 물 자체에 부딪혀 외적 반성이 출현했다. ② 여기서 다른 물 자체는 자기와 동일한 물 자체이다. 왜냐하면, 물 자체란 무규정적인 것이니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③ 그러므로 여기서 반성된 규정은 타자를 통해 반성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타자로 삼아서 반성된 것이니 곧 자기반성을 통해 나온 것이 된다. ④ 이런 자기반성을 통한 규정이 성질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는 다른 물 자체[타자]에 대한, 그에게는 외적인 관계 속에 그리고 다른 물 자체가 자기에 대해 외적으로 관계하는 것 속에 이런 자기 규정성을 가지지 않는다. 규정성은 물 자체에 피상적으로 속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가 자신의 타자로서 자신과 매개하는 것이다. 관계의 양극을 이룬다고 가정된 두 가지 물 자체는 사실상 하나로 합일한다.” (논리학, GW11, 329)

“물 자체는 다른 물 자체로서 다른 극단에 관계하므로 자기와 구별되지 않는 것에 관계한다. 두 극단 사이에 매개하는 관계를 이룬다고 가정되었던 외적 반성은 물 자체의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 되거나 본질적으로 자기 내 반성이다. 따라서 이 외적 반성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이거나 물 자체의 규정이 된다.”(논리학, GW11, 329)

4)

지각적 성질은 “반성의 부정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여기서 반성은 추상을 의미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제 규정성으로서 실존은 “일반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무규정적 물 자체는 “자기 동일한 것” 즉 여러 가지 성질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 하나인 존재자 즉 개별자가 될 것이다. (논리학, GW11, 330)

그런데 이 성질은 물 자체에 고유한 것으로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된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질은 여전히 ①타자(주관)를 통해 반사된 것이다. 다만 여러 물 자체에 공통된 일반적인 것이기에 성질이다.

이런 타자(주관)에 의해 반사된 것이므로 타자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물 자체의 성질은 변화하게 되며, 다시 말하자면 이런 성질은 규정된 것이어서 다른 규정성을 지닌 성질과 대립한다. 그 때문에 다양한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성질이 하나의 물 자체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성질들은 타자를 통해 규정된 것이므로 서로는 무차별하다. 하나의 사물 속에 대립적인 성질은 무차별하게 속해 있다.

하지만, 이 성질이 일반적인 것은 물 자체에 ② 내재하는 것과 관계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런 물 자체에 일반적으로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성질은 이제 물 자체의 속성이 된다. 즉 성질은 내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타자(주관)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무규정적 물 자체라는 표현 대신 자기규정을 지닌 어떤 것으로서 사물이라는 표면이 등장한다.

“하나의 사물은 성질을 갖는다. 첫째로 이 성질은 ① 타자에 대해 규정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성질은 상호 관계의 방식으로서만 현존한다. 따라서 성질은 외적인 반성이며 사물의 정립된 존재라는 측면에 해당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사물은 이렇게 정립되는 가운데서 그 자체적이다. ② 사물은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를 유지한다. 물론, 이런 정립된 존재는 다만 피상적인 것일 뿐이어서, 이를 통해 실존은 ① 존재의 생성에 즉 변화에 맡겨져 있다. 성질은 그런 가운데 ② 자기를 잃지 않는다. 사물은 이런저런 것을 타자 속에 성취하며 독득한 방식으로 자기를 이 관계 속에 표현한다는 성질을 갖는다.”(논리학, GW11, 330)

5)

물 자체는 이런 성질을 통해 타자에 대해 단순히 형식적인 근거 관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형식을 통한 근거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이때 근거는 타자 속에서 자기를 정립한다. 여기서 사물의 성질을 통한 관계는 ③ 실재적인 근거 관계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실재적 근거는 “외면적인 것으로 이행하여 들어가는 것”이니, 즉 자기를 그대로 타자 속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성질은 독자적인 것으로 되면서 “진정으로 자기 내로 반성된 근거”이다. (논리학, GW11, 331)

“실존의 규정성은 근거가 자기에 외적으로 반성한 것이다. 전체는 근거가 자기로부터 반발하고 규정하는 가운데 자기를 외면적인 직접성으로 만들면서 그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는 본질적으로 실존한다. 즉 물 자체가 실존한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자면 실존이 외면적 직접성인 동시에 그 자체 존재라는 것이다.” (논리학, GW11, 331)

실재적 근거에서 성질이 이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성질이 다른 것의 성질로 옮겨간다는 말로 생각된다. 형식적 근거가 주관적 분류의 기준이라면,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제 물 자체의 성질이 다른 물 자체에 대해 미치는 일반적 영향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규정한다.

그러나 아직 물 자체의 성질로서, 이 성질은 아직 그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지닌 것일 뿐이며, 아직 실제로 그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원인은 아니다.

“사물은 그것이 지닌 성질을 통해 원인이며 원인이란 결과로서 자신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물은 다만 처음에는 여러 성질을 지닌 고요하게 머무르는 사물일 뿐이며 아직 실제의 원인으로서 규정되지 않는다. 사물은 다만 처음에는 본래[an sich: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반성이며 아직 그 자체로 자기의 규정을 정립하는 반성은 아니다.”(논리학, GW11, 330)

여기서 성질이 이제 “외면적 직접성인 동시에 그 자체 존재”로 되면 그것이 곧 물질을 말한다. 하나의 여러 사물에 공통으로 속하는 것이니, 개별 사물의 속성이기를 넘어서서 ④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된다. 이것이 곧 소재[Stoff]로서 물질[Materie]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27-실존의 이중성과 신의 현존 증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27-실존의 이중성과 신의 현존 증명

1)

실존은 본질인 형식과 관계하여 두 가지 운동을 전개한다. 한편으로 실존은 본래 근거가 되는 형식이 자기를 구체화해서 내용 그리고 현존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은 제약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존은 전제된 직접적인 것이며 여기서 자신을 내용으로 나가서 본질인 형식으로 즉 자기의 근거로 되돌아간다. 이 운동은 생성하는 운동이며 여기서 실존은 무제약적인 것이다.

실존의 제약성과 무제약성, 매개성과 직접성이라는 이중성 때문에 신 존재 증명에 관해 이중적인 증명이 출현한다. (존재론에서 현존과 본질론에서 실존은 헤겔의 논리학에서는 구별되지만, 일반적인 형이상학에서는 그 차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한편으로 존재론적 증명인데 이는 신의 현존이 제약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나온다. 다른 현존은 무제약적인 것 즉 우연적인 것인데, 여기서 우주론적 증명이 나온다.

헤겔은 우선 신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의 한계를 지적한다. 알다시피, 안셀무스에 이어서 데카르트가 근대에 신의 현존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했다. 안셀무스는 신의 위대성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했지만, 데카르트는 신의 완전성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했다.

즉 신은 완전한 존재이고 완전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 모든 실재성이 들어 있어야 하므로 현존 역시 하나의 실재성이니, 신 속에 그 개념상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실재성이 신이 창조한 신에 의해 제약된 것이듯이 실존 역시 신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칸트는 신의 현존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을 비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현존과 실재성의 개념을 구별했다. 실재성은 어떤 존재자의 술어에 해당하는 것인데, 현존은 존재자의 술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 유명한 백 탈러 예를 든다. 백 탈러가 현존하든 하지 않든, 백 탈러라는 실재적 내용은 아무 변함이 없다고 했다.

헤겔은 칸트가 신적 존재를 일반적인 사물과 혼동했다고 한다. 일반적 사물에서 그 현존은 실재성과 구별된다. 사물에 있어서 실재성은 규정성이므로 타자와 관계 속에 있는 것, 타자를 통해 매개되는 것이지만, 그것의 현존 즉 실존은 직접적인 것, 즉 매개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신적 존재는 그 자신이 무제약적 존재이고 직접적인 것이니, 그런 점에서 실존한다고 할 수 있다. 신적 존재 속에는 없는 것은 오히려 타자를 통해 매개된 것인 실재적인 규정성이다. 신은 질적이거나 양적인 규정성을 갖지 않는다. 신은 실존하지만, 무엇이라 규정되지는 않는다.

2)

다른 한편 신의 현존 즉 실존을 무제약적인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부터 우주론적인 신 존재 증명이 나온다. 우주론적 증명은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우연성을 통한 증명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증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세계는 우연적인 존재이다. 만약 세계에 오직 우연적인 것만 존재한다면,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연한 존재로 이루어진 세계가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이 증명에는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그 근거가 필요하다는 충분 이유율이 전제된다. 이런 우연성을 통한 우주론적 증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우연한 것은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에 근거를 인정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러셀이 그렇게 비판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비판에서 우연적인 것이 근거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우연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존재하게 된 것이니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게 된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연한 무제약적 실존은 또한 제약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3)

실존의 이중성, 직접적인 것이며 동시에 정립된 것 즉 무제약적인 것이면서 제약된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이상과 같이 헤겔은 신 존재 증명이 성립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는 모순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신 존재 증명이 모순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직접적인 실존이 동시에 제약된 것이라는 이중성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역설적인데, 이런 역설은 대표적으로 자유의지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무엇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은 한편으로는 결정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적인 것 즉 자유롭게(즉 자의적, 우연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다가오는 선택 앞에 서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나 선택된 결과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나의 선택을 결정하게 만든 어떤 근거가 존재한다. 내가 선택의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선택을 보면, 항상 결정된 것 즉 제약된 것이다.

헤겔은 이점과 관련해 실존에서 매개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실존에서 그 실존을 생성시킨 매개 즉 본질의 정립하는 운동은 실존이 출현하는 동시에 사라진다. 실존은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실존을 사유하게 되면 그런 매개하는 것 즉 본질이 다시 출현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증명하는 반성은 이 매개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 그런 반성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단순히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신 자체로부터 매개를 떼어놓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반성은 그 때문에 매개하는 운동을 즉 본질 자체 속에 매개가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논리학, GW11, 325)

“근거를 통한 매개는 자기를 지양하지만, 근거를 밑에 두고 이 근거로부터 나온 것이 정립된 것으로 되게 하고 그 본질을 다른 곳에 즉 근거에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근거는 심연으로서 매가가 사라진 것이다. 거꾸로 동시에 근거는 다만 매개로서 사라지는 것이니 이런 부정을 통해서만 근거는 자기 동일적인 것 직접적인 것[실존]으로 된다.”(논리학, GW11, 326)

그러므로 헤겔은 근거라는 말은 몰락[Untergang] 또는 심연[Zugrunde]과 근거[Grund]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고 한다. (논리학, GW11, 326 참조)

4)

이 점과 연관하여 실존이 먼저냐 본질이 먼저냐 하는 실존주의 논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한편으로 결정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의적이듯 실존 역시 한편으로는 제약된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존재다.

전자의 측면에서는 실존을 제약하는 본질이 전제된다. 후자의 측면에서는 실존이 전제되고 이로부터 본질이 생성된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논쟁은 실존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실존의한 측면만 가지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 것이 된다.

실존과 신의 대립도 실존의 이중성을 망각한 것이다. 실존이 무제약적이라는 점에서 실존은 근거 없는 심연 위에 떠 있는 존재다. 그러나 실존이 제약적이라는 측면에서 실존은 궁극적 근거로서 신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심연이 곧 신이다. 여기서 신을 심연으로 규정한 뵈메의 신 개념이 다시금 상기된다.

실존은 이중적인데, 모든 개별자가 이렇게 이중적인 것은 아니다. 헤겔이 존재론에서 다룬 물체적 개별자는 이런 이중성을 지니지 않는다. 본질과 개체 사이에서 반성 관계가 존재하는 생물체에서 비로소 이런 이중성이 나타난다. 생명체 개체는 본질을 매개한다. 본질은 개체의 재생산을 통해 지속하지만, 그 스스로는 개체에 내재하며, 외적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개체는 본질을 통해 매개된 것이지만, 근거 없이 존재하는 직접적인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본질과 실존의 관계에서 본질이 주어이고, 실존이 본질의 술어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주어가 되는 것이 오히려 실존이다. 술어가 되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므로 본질이 실존으로 나가는 운동은 술어에서 주어로 반성하는 운동이다. 즉 본질인 술어의 자기 부정성을 매개로 해서 실존은 자신을 지속하는 것 즉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실존은 근거의 자기 내 반성이다. 즉 근거가 자신을 부정하는 가운데 성립하게 된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이런 매개는 자기와 동일하게 자신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26)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6-본질론 2편 실존 장의 위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6-본질론 2편 실존 장의 위치

1)

지금까지 본질론 1편 3장 근거 장에서 헤겔은 종적 개체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관계는 단순한 유기체에서 복합적인 유기체 즉 생물체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복합적 생물체에서 각 부분인 마디는 고유한 유기체적 조직을 이루면서 자신의 고유한 형식 즉 그 기능을 재생산한다. 그러면서 각 부분은 전체적으로 통일된 개체적 조직을 형성하며 그것에 따라서 형식적 기능도 통일된다.

예를 들어 꽃나무는 그 부분인 꽃과 줄기, 잎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적 통일체이며 여기서 꽃의 형식인 재생산 기능, 줄기의 형식은 유통의 기능, 잎의 형식은 광합성의 기능도 통일을 이룬다.

그 구성 요소는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데 형식에서 출발하여 내용으로 그리고 현존으로 이행했다. 형식은 개별적 기능이며, 내용은 그런 형식의 통일이 일어나는 토대인 유기체 전체이며, 현존은 이 유기체적 개별 현존이 지닌 개별성, 즉 질적, 양적인 규정이다. 헤겔은 이런 형식과 내용, 현존 사이의 관계를 근거(A절)와 토대(B절), 조건(C절)의 관계로 다루었다.

2)

논리학에서 존재론이든, 본질론이든, 개념론에서 1편은 대체로 운동의 전체적 모습을 그리며, 본격적인 내용은 2편, 3편에서 다루어진다. 그것은 본질론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1편의 끝에서 실존이 등장하면서 본질론의 2편이 시작된다. 이 2편은 판단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관계 범주가 다루어진다. 관계 범주(정언, 가언, 선언 판단형식)에서 발전은 생물의 종적 본질이 실체 즉 사회적 유적 본질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생물에서 종적 본질은 개체적 현존에 내재하며, 개체적 현존이 재생산하는 운동을 매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 즉 사회적 유적 본질은 인간이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는 사회이며 이는 개체적 개인을 벗어나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하는 관계로서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내재하는 종적 본질이 밖으로 드러나서 독립적인 유적 본질로 이행하는 것이 관계 범주에서의 운동이다.

이 세 가지 단계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헤겔이 존재론에서 1편 2장 현존 장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본질론 2편 현상 편에서 전개되는 범주들은 존재론 1편 2장 현존 장과 3장 대자 존재 장에서 나오는 범주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헤겔은 개념론에서 판단형식을 다루면서 질적 판단 범주와 관계 판단 범주, 그리고 양적 판단 범주와 양상(개념) 판단 범주 사이의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질적 판단형식과 관계 판단형식은 주어를 전제하면서 술어에서 발전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반면 양적 판단형식과 양상 판단형식은 발전이 주어에서 일어난다.)

3)

존재론 1편 2, 3장과 본질론에서 현상 편에서 유사한 관계가 펼쳐지지만, 물론 차이가 있다. 존재론에서 주어 술어의 의미와 본질론에서 주어 술어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존재론에서 질은 물체적 개별자를 주어로 하고 그것의 술어인 성질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붉다’와 같은 판단에 성질 ‘붉다’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본질론에서 근거와 토대 역시 주어 술어 관계를 지니는데, 본질론에서 주어가 되는 것은 유기체적 개체 즉 생물체이다. 헤겔은 이를 ‘실존’이라 이름 붙였다.

존재론에서 술어는 질적 규정이나 양적 규정과 같은 것인데, 생물적 개체는 그와 같은 질적, 양적 규정으로 규정될 수 없다. (물론, 그런 생물적 개체도 하나의 물체적 개별자라는 점에서는 그런 질적, 양적 규정을 파악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물체로서가 아니라 생물적 개체의 현존에 속하는 것이다.)

생물적 개체에서 그것의 술어라고 한다면, 그것이 지닌 고유한 기능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기능은 개체의 본질적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 꽃은 진달래다’와 같은 판단이다. 여기서 주어 ‘이 꽃’은 어떤 종적 개체를 지시한다. 술어는 ‘진달래’는 단순히 어떤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진달래’란 술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곧 이 개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결과 즉 재생산되는 종적 본질을 의미한다. 다만 이 종적 본질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4)

본질론 1편 3장에서 다루어진 근거 관계는 형식적 관계다. 반면 2편에서 다루어지는 실존에서 종적 개체들 사이의 관계는 실재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이 2편에서 생물체는 하나의 생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하는 물체로서 다루어진다. 그렇기에 헤겔은 이 부분을 실존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즉 이 관계는 실존의 관계다. 이 실존하는 실재의 관계는 아직 완전한 객관적 관계는 아니며, 마치 성질처럼 주관적이면서도 일반성을 지닌 지각적 단계의 관계다. 2편 마지막 부분에서 내외의 관계가 나오면서 비로소 다시 종적 개체로서 생물체의 본래적 관계가 다루어진다.

이런 전개 과정은 마치 정신현상학에서 전개 과정과 유사하다. 정신현상학에서도 어떤 의식의 형태에서 새로운 의식의 형태로 시간적인 발전이 일어나면, 이 새로운 의식의 형태에서는 그 이전의 형태가 다시 하나의 논리적 계기가 되어 새로이 서술되면서 마침내 그 마지막에 이르로 새로운 의식 형태에 고유한 계기가 서술된다.

논리학의 실존 장에서도 근거 장 마지막에 생물적 개체가 출현했다. 그런데 실존 장에 이르러 다시 그 이전 존재론에서 물체의 계기로 제시된 범주들이 다시 출현하는데 이런 전개 방식도 정신현상학과 마찬가지다.

본질론에서 1편 3장에 이어지는 2편 현상 편의 출발점이 곧 1장에서 다루어지는 ‘실존’이다. 실존 장에서는 종적 개체를 한의 현존으로 보면서 전개해 나가니, 이 현존이 발전해서 마침내 본질의 개체적 현존으로 규정되면서, 종적 개체가 다시 되돌아온다. 종적 개체가 다시 출현하는 곳은 본질론 2편의 마지막 부분인 3장 본질적 관계 장이다.

이 상응 관계를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은 표로 그려보았다

긍정판단

<현존, 질>

정언판단

<실존>

그 자체 존재와 타자 존재

물 자체와 실존

<실재성, 어떤 것>

물 자체와 성질

규정과 상태

물 자체와 질료

부정판단

<유한성>

가언판단

<현상>

제한성과 무한성

현상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

무한판단

<대자 존재>

선언판단

<관계>

견인과 반발

촉발하는 힘과 촉발되는 힘

5)

이제 실존 장에서는 하나의 종적 개체가 다른 종적 개체와 사이에 전개하는 실재적인 법칙 관계가 제시된다. 이 실재적인 법칙 관계의 출발점이 곧 실존이다. 이 실존은 존재론에서 ‘실재성’ 또는 ‘어떤 것’ 개념에 상응한다.

존재론에서 실재성은 다양한 성질의 통일체다. 여기서 이미 각기 다른 성질을 지닌 개별자[‘어떤 것’] 사이의 관계가 문제 된다. 마찬가지로 본질론에서 실존은 다양한 형식의 통일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각기 다른 형식을 지닌 종적 개체[‘실존’]들 사이의 관계가 대두된다.

여기서 헤겔의 사유에서 구성 요소의 내적인 관계와 사물 사이의 외적인 관계가 상호 동전의 이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헤겔은 관계를 통해서 사유하기에 이 관계를 통해 생겨나는 결과를 출발점에서 선취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곧 이 출발점에 있는 이중성이 외면화하는 것으로 된다.

이제 실존이 출현하는 과정을 다시 되새겨 보자. 형식에서 현존으로 이행하는 운동은 본질인 형식이 자기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는 운동이다. 반면 현존에서 형식으로 가는 운동은 전제된 현존에서 점차 본질이 생성하는 운동이다.

이 전체의 운동을 매개하는 중심은 곧 내용이다. 이 내용은 종적 개체의 유기체적 조직을 말한다. 이 조직을 토대로 유기체적 기능이 출현하니, 그것이 곧 형식이고, 이 조직은 개별 요소를 통해서 자기를 재생산한다. 이 개별 요소가 곧 현존이다.

한편에서 현존을 매개하는 운동이 사라지고 그것이 직접적인 것으로 전제되면 그것이 바로 실존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은 아무런 근거 없이 출현하는 무제약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존은 이미 자기 속에 자기를 매개하는 운동을 지니니, 이런 점에서 실존은 제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