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철학의 거울- 형이상학의 근거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철학의 거울-형이상학의 근거에 관해

1)

형이상학이 무엇을 다루는가에 관해 논란이 많다. 누구는 신을 다루는 것이라 하고 누구는 세계의 가장 근본적 원리를 다루는 것이라 하며 또 누구는 실재나 본질, 실체와 같은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arche]을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이 무엇이든, 그것은 형이상학의 근거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형이상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사유의 나래를 펼쳐나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형이상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단순한 공상과 매한가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형이상학이 형이상학이 되려면, 적어도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형이상학이란 말이 어떤 ‘형’을 넘어서는[meta] 것이라는 말인데, 이때 사유를 통해 그 형을 넘어서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형이 전제되는 한에서 넘어서는 것이니, 바로 그 형이 형이상학의 근거가 될 것이다.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넘어가는 대상인 자연학[physics]이다. 그 때문에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에 근거해야 한다는 오해가 지배했다. 하지만, 이 ‘physis’가 꼭 자연과학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형이상학’이란 말에서는 ‘형’은 구체적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구체적 형태라면 어느 것이나 형이상학의 근거로 가능하다.

여기서 근거라는 말이 모호하다. 근거는 형이상학은 사유의 전제가 된다는 말이지 그 근거가 형이상학의 올바름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근거는 넘어서라고 있는 것이지, 형이상학을 규제하고 진리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넘어섬’을 사유에서는 연역적인 사유와 구별되는 귀추법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연역적 사유가 근거에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귀추법은 설명되는 현상에서 거꾸로 설명하는 근거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다.

2)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근거로 가장 널리 이용된 것은 수학이다. 피타고라스학파가 음을 수적 비율로 환원한 이래 수학적 원리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의 근거로 격상되었다.

‘원’은 완전성을 의미하고 ‘삼각형’은 안정성을 의미한다는 일종의 상상적 사유는 제쳐 놓자. 중요한 것은 수의 원리이다. 일자와 공허,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것이 수의 원리나 기하학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가 세계의 근본 원리로 고양되면서, 모든 세계가 이런 기하학적 공간과 같다거나 수적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이상학이 등장한다.

그러나 수의 원리는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원리가 된다 하더라도 이 일반적 형식은 세계의 가장 외면적인 것에 해당할 수는 있으니, 세계 속의 모든 존재가 외면적으로는 이 수의 원리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이 지닌 가장 외면적인 측면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 아닐까? 이런 외면적인 것을 곧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인간의 가장 외면적인 측면은 단순한 공간적 존재나 물질적 질량이다. 공간이나 질량은 수적인 원리에 따라 전개된다. 이 공간이나 물질적 질량 없이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지만, 이것은 가장 외면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형이상학의 근거는 자주 자연과학 특히 물리화학이라고 알려진다. 사실 ‘형이상학’이라는 말 자체가 ‘자연학을 뒤에 또는 넘어서’라는 뜻이니, 자연에 관해 알려진 법칙, 그것도 가장 일반적인 법칙은 자주 형이상학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뉴턴의 법칙은 근대 유물론의 근거가 되었으며, 오늘날 양자 역학이나 파동설은 최근 논의되는 많은 신유물론적 형이상학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자연과학의 세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물의 세계나 인간의 역사도 하나의 세계이니, 자연과학의 영역 즉 물리화학의 세계만을 형이상학의 근거로 보면, 생물의 세계나 인간 정신의 세계는 그로부터 설명되지 못하거나, 이를 자연과학의 세계로 환원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3)

형이상학의 또 한 가지 중요한 근거는 우리의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존재’니 ‘운동’이니, ‘원인’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자주 사용되는 언어는 원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원초적인 의미야말로 형이상학의 세계를 드러내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작업이 자주 형이상학의 모범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가장 잘 알려진 ‘현존재’라는 개념을 보자. 즉 인간은 현존재[Dasein]인데, 이는 ‘Da’에 ‘Sein’이 현현한 것이며, 인간은 존재가 자기를 현현한 존재자이니, 거꾸로 인간의 현존재를 이해하면 마침내 존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원초적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작업이 아닐까 한다. 추상적 개념이 형성될 때는 구체적 감각적 개념을 비유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 의미가 생생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것이 항상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것은 여러 의미가 뒤섞인 것으로 볼 수 있으니, 한편으로 이 감각적 구체적 개념을 매개로 해서 추상적 개념이 지닌 일상적 의미에서 감추어진 다른 의미로 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이런 도약 자체가 비유에 기초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주 철학강의에서 어려운 말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면, 처음에는 아주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뒤에는 도대체 더 모르겠다고 한다. 구체적 예가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또, 철학 용어를 우리말화하려는 시도도 우리말 속에 우리 민족의 원초적 사유가 들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말이 반드시 그런 원초적 사유라고 볼 이유도 없다.

게다가 이런 경우 소위 말장난이 벌어진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가 그렇다. 이를 하이데거처럼 풀이하는 것은 일상적 의미와는 다르다. 일상적 의미에서 현존재는 영어로 ‘There is’라는 의미이니,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것, 즉 거의 모든 사물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헤겔은 현존을 바로 이런 존재자 즉 실재성, 경험적 대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4)

형이상학은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을 찾아 나선다. 지금까지는 주로 밖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면, 이제 자기 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칸트는 이런 형이상학의 길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칸트는 우리가 직관을 통해 경험을 받아들이고 이런 관념을 사유를 통해 추상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즉 우리는 세계를 논리적 범주를 통해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이다.

논리적 범주는 판단의 형식이며, 칸트는 이런 범주에 12가지가 있다고 했다. 세계는 이런 12가지의 범주를 통해 인식된다. 여기서 판단을 보는 중대한 관점의 변화가 출현했다. 그 이전 형식(일반) 논리학에서 판단(또는 명제)은 사유를 구성하는 단위일 뿐이다. 판단은 그 자체로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 판단에 대응하는 것은 사태이며, 판단이 독립적인 불가분적 원자를 이루듯 이 사태 역시 하나의 원자로 세계를 구성한다.

형식 논리학은 판단을 단위로 해서 이 판단이 사유의 공간에 움직이는 법칙을 찾는다. 그 법칙은 곧 동일성이고 모순율이니, 사유 속에서 이런 법칙에 따른 어떤 운동을 통해서도 판단의 내용, 그것의 진위는 변함이 없다. 그 결과 모든 사유는 동어반복이며, 사유의 공간은 마치 유크리트 기하학에서의 공간처럼 추상적이고 단순한 공간이다.

이 사유 공간은 사유의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사유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사유의 핵심은 판단 작용에 있는 형식 논리학은 사유의 내적 구조 즉 판단의 형식에 관해서는 파고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칸트가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고 하면서 판단을 그 자체로 사유의 단위로 보는 관점이 무너졌다. 칸트로부터 판단의 내적 구조, 그 형식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세계의 근본 구조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판단은 가장 단순하게 보면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판단의 형식에 따라서 여러 유형, 방식이 존재한다. 판단의 형식 즉 논리적 범주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세계를 어떤 경우에는 이런 방식의 범주로, 다른 경우에는 다른 방식의 범주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세계가 지닌 다양한 모습이 이런 판단의 유형과 방식에 따라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는 여러 영역 즉 물리학적 세계나 생물학적 세계, 인간 사회의 세계 등은 모두 이런 범주의 차이로 환원될 수 있다.

칸트에서 세계의 모습은 다양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 칸트에서 형이상학은 논리적 범주를 근거로 한다. 칸트의 선험철학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형이상학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그러나 칸트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논리적 범주를 통해 구성된 세계를 현상계로 규정한다. 칸트가 말한 12개 범주로 구성된 세계는 수학이나 자연과학과는 무관하다. 수학이나 자연과학은 칸트의 현상 세계를 근거 지을 수 없다.

칸트는 자기의 형이상학적 세계가 자연과학이나 수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이 자연과학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뉴턴의 법칙을 끌어낸 것이 아니며 수학의 법칙을 설명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논리적 범주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넘어 찾아 들어간 형이상학의 세계다. 칸트는 형이상학 앞에서 그것이 일반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것은 현상계이며 과학의 세계이고, 그 너머 또 다른 어디에 형이상학이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가 이 또 다른 어디에 있는 형이상학을 찾아 나선 것은 자기 자신의 논리적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논리적 범주 넘어서 직접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범주는 12개로 제한되는데, 왜 하필이면 12개인지를 확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논리적 범주라는 개념을 일반 논리학에서 이를 끌어냈지만, 일반 논리학은 경험적인 방식으로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을 4개로 제한했다. 칸트는 질, 양에서 무한 판단 형식을 추가하고 기존에 복합판단으로 여겨지는 관계 판단이나 양상 판단을 판단의 기본 형식으로 끌어들여 12개 판단 형식을 만들기는 했으나, 그 근거는 확립하지 못하고, 이를 기존 논리학에서 그러하듯이 경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 결과 그 자신 12개의 판단 형식이 자의적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12개의 판단 형식 넘어 세계를 가정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물 자체의 세계에 부딪혔으며, 이런 물 자체의 세계는 판단 형식 넘어 세계라고 보았고 이 물 자체의 세계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형이상학이라 했다. 물 자체는 알 수 없는 세계이므로 그 개념상 그런 세계는 알 수 없으니, 형이상학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의 논리상 불가피했다.

6)

칸트의 선험철학은 판단의 형식, 주어와 술어의 다양한 결합 방식이 형이상학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판단 형식, 논리적 범주로부터 형이상학을 끌어낸 가능성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처음으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형이상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주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실체’라 했으며, 술어로 사용되는 것을 ‘속성’이라 했다. 이런 규정은 주어나 술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판단의 형식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는 이런 판단 형식에서 주어이며 술어는 이런 판단 형식에서 술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주어와 술어의 관계 방식 자체를 더는 문제 삼지는 않았다. 실체와 속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는 데 그쳤다. 반면 칸트는 논리적 범주를 통해 주어와 술어의 관계 즉 판단의 다양한 형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칸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단서에 따라서 나가는 형이상학의 길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이런 전환이 가지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이해한 것은 헤겔이었다. 하지만, 칸트가 부딪힌 물 자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논리적 범주가 자의적인 주관의 산물이 아니라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객관적인 범주라는 사실을 확립해야 했다.

헤겔이 했던 일은 칸트에 비하면 오히려 단순하다. 즉 칸트의 12개 범주를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즉 칸트에서 12개 범주는 마치 좌표축처럼 분포되어 있어서 경험이 이 가운데 어느 한 축에 있는 범주에 집어넣은 것과 달리, 헤겔은 12개의 범주를 논리적으로 하나가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물론, 하나의 범주가 그다음 범주로 이행하는 데는 경험에서 부딪히는 모순이 매개 된다. 이 모순은 칸트가 범주를 물 자체에 적용하면 생겨난다고 말한 모순인데, 헤겔은 각각의 범주마다 이런 모순에 부딪힌다고 보았다. 즉 기존의 범주를 통해 경험을 구성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런 범주로서 규정할 수 없는 경험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이율배반이나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험이다. 이 ‘이율배반’이나 ‘자가당착’은 새로운 경험 즉 기존 범주의 한계선상에서 출현한 경험에 기존의 범주를 적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모순적 경험에 부딪히면, 사유는 자기 내로 반성해서 기존의 범주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근원적인 범주로 이행한다. 이 새로운 범주에서는 기존의 범주에서 모순적인 경험이었던 것도 이 새로운 범주의 체계 내에 들어와서 규정된다. 모순은 해소되지만, 이 새로운 범주에 다시 또 한계선상의 경험이 출현하게 되면서 논리적 범주에서 계속된 전진이 일어나게 된다.

헤겔은 이 길을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서술한 바 있으나, 상세한 것은 생략하고, 헤겔에서는 이 의식 경험의 길이 곧 형이상학의 근거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런 의식 경험의 길은 칸트의 선험철학 즉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가 경험을 구성한다는 원리를 전제로 하니, 헤겔은 칸트가 제공한 단서에 따라서 칸트가 완성하지 못했던 길을 앞으로 달려나갔다.

헤겔은 <논리학> 판단론에서 구체적으로 이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분석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존의 형식 논리학은 명제를 하나의 사태에 대응하는 고립된 원자로 보고 판단의 내부 형식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헤겔은 판단론에서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이를 분석하려 했고, 이런 분석이 그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는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판단 형식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 것이니 생략하자. 인간의 사유의 독특함은 명제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침팬지도 언어를 사용하지만, 주어 술어로 분화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원숭이에게 명제는 형식 논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사태에 대응하는 것이다. 반면 인간의 사유를 기초로 하는 언어는 주어 술어로 굴절[articulate]되어 있으니, 이것이 인간 사유의 근본적 특징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문제는 이런 독특한 구조를 가진 세계가 주관의 사유 법칙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거꾸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근거가 되는가이다. 바로 이 형이상학의 근거를 제시한 것이 칸트의 철학이니, 칸트의 철학적 혁명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 하겠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8-개념에서 판단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8-개념에서 판단으로

1)

일반적으로 개별성은 지성이 개념화하기 이전에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직관적 개별자다. 이런 구체적 개별자는 자기 속에 다양한 속성을 품고 있는 무구별된 즉 무규정적인 전체이다. 이런 개별자는 눈에 보이지만, 사실은 모호한 존재다.

지성은 한편으로 이런 구체적 개별자에서 공통성을 추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지성은 개별자의 다양한 속성 가운데 하나를 분리해 이를 정립한다. 그 결과 내포적으로 단순하고 외연적으로 일반적인 개념이 만들어진다.

이런 일반적 개념이 다시 통합되면서 개별자가 나온다. 이 개별자는 여러 규정성이 통일을 이루면서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인 일반성은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이렇게 해서 내포적으로는 복잡하고 외연적으로는 개별적인 개별성이 다시 돌아온다.

이 개별성은 처음에 개념화 이전의 개별성과 구별된다. 처음의 개별성은 무규정적인 일반성이면서 직관에 주어지는 개별자이었다. 다시 돌아온 개별성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개별자이지만, 규정성을 통일적으로 포함하는 체계화된 개별자이다. 이는 내부가 투명하게 보이는 명확한 존재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개별자이다.

2)

일반 논리학에서는 직관적 개별자와 일반성으로서 개념(‘규정된 개념’이라 한다)만이 다루어진다. 헤겔 논리학에서도 존재의 영역에서 개별자는 출발점이었을 뿐, 논리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본질의 영역은 아직 일반적 개념에 머무르면서 개별성의 출현은 다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마침내 개념의 영역에서 개별자는 구체적인 개별자로서 출현한다.

개념의 영역에서 개념의 개별성은 일반성과 특수성을 거쳐 나온다. 개념의 계기로서 일반성은 단순성 즉 자기 관계일 뿐, 그 ‘부정성’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특수성의 계기에서 정립된다. 그러나 특수성은 특정한 것일 뿐, 아직 그것의 자기 부정은 아니다. 즉 이 ‘부정성의 자기 관계’는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마침내 개별성의 계기에 이르러 부정성의 자기 관계, 즉 부정적인 것의 부정이 정립된다.

그러나 일반성이나 특수성은 이미 자체 내에서 총체성을 지닌다. 일반성도 이미 일반성과 규정성의 통일이니 개별성이며 특수성 역시 규정성과 일반성의 통일이므로 개별성이다. 다만 일반성이나 특수성에서 개별성은 아직 정립되지 않는다.

거꾸로 개별성은 규정성의 자기 관계이니, ‘자기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미 일반성이며 그것이 ‘부정성’의 자기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특수성이다. 개별성은 양자의 통일이 마침내 정립된 것이면서 이 매개의 측면은 사라지고 하나의 직접적인 개별자로 등장한다.

“일반성과 특수성은 한편으로는 개별성이 생성하는 계기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미 제시되었듯이 이 양자는 각자 자기 자신에서 총체적인 개념이고 따라서 개별성으로 이행하더라도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개별성 속에서 이 양자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 정립될 뿐이다.”(주관 논리학, GW12, 49)

3)

앞에서 개별성에서 특정한 개념을 거쳐, 개념의 개별성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설명했다. 헤겔은 이 운동을 통해 개별성이 정립되면서 동시에 개념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동시에 개념은 자신을 상실하여 개념의 실재성 즉 판단으로 이행한다.

“개별성은 개념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개념을 상실하는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개념의 일반성은 내포적으로는 단순한 속성이지만, 외연적으로는 하나의 일반자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개념의 일반성 즉 유[Gattung]는 두 가지 대립하는 방향에서 분화된다. 내포적인 차원에서 분화는 두 가지 서로 대립하는 속성으로 분화한다.

한편으로 속성 P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립하는 규정성[-P]이다. 전자는 그 개념의 종[Art]에 속하는 속성이며 후자는 그 개념의 유[Art]에 속하는 속성이다. 이런 대립하는 특수성에 따라서 개념적 실체는 두 대립하는 현존으로 분화된다. 하나는 속성 P를 실현한 현존이며 다른 하나의 현존은 속성 -P를 실현한 현존이다.

이것은 마치 척도 관계가 두 대립하는 속성(산성과 알칼리성)을 지니면서, 이 속성에 따라 두 대립하는 척도(산과 알칼리)로 분화되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어 인간의 개념을 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 할 때 인간에게는 종에 속하는 이성성과 유에 속하는 동물성이라는 대립하는 속성이 존재한다.

이때 인간은 두 대립하는 현존으로 분화되는데, 하나의 인간은 이성적인 인간이며 다른 하나는 비이성적 동물적 인간이다. 전자는 개념의 종차가 실현된 현존이며 후자는 무규정적인 유적 개념이 그대로 현존하는 것이다.

개념의 특수성이 이처럼 이중적으로 분화되므로 이 특수성에서 개별성으로 나가는 반성도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하나는 규정성이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반발하면서 규정성이 독자적으로 자립적인 규정성으로 된다. 이는 곧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질적인 규정성이다. 헤겔은 이를 ‘질적인 일자’[독립적 성질]로 규정한다.

속성이 두 대립하는 속성이므로, 각자 타자로부터 반발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규정성이 나오지만, 이 두 규정성은 이런 상호 반발을 통해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규정성은 서로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규정성이다.

“그러므로 개별자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인 한에서 부정적인 것이 자기와 직접 동일한 것이다. 개별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는 개별자는 추상이지만, 이 추상은 개념을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관념적 계기에 따라서 직접적 존재로 규정하는 추상이다. 그러므로 개별자는 질적인 일자이거나 이것[Dieses]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첫 번째로 이것[Dieses]는 이런 질에 따르자면 자기를 자신으로부터 반발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여러 가지 다른 일자가 정립된다. 두 번째로 이것[Dieses]은 이제 이 전제된 타자에 대립하여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그런 한 개별자는 배타적인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4)

다른 하나의 반성은 규정성이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과 통일하면서 구체적인 개별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부정성의 자기 관계이면서 일반적 개념이 실현된 구체적인 일자가 되니 이것은 개별적인 것이더라도 질적인 개별성이 아니라, 이제 지시하는 대상으로서 반성적 개별자가 된다.

이런 통일은 하나의 개별자만이 아니라 다양한 동일한 개별자를 낳으니, 여러 가지 다른 일자가 출현한다.

“이것[Dieses]은 자기 내로 반성된 일자인 한에서는 독자적이고 반발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는 이런 반성 속에서 반발은 추상과 결합하여 반성하는 매개를 이룬다. 이 반성하는 매개는 이 개별적인 것에 존재하는 데 그 결과 이것[Dieses]은 정립된 직접성 즉 외적인 것에 의해 지시된 직접성이 된다. 이것[Dieses]은 존재하며 직접적이다. 그러나 이것[Dieses]은 지시되는 한에서만 이것[Dieses]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52)

여기서 ‘지시한다는 것[monstrieren]’의 의미를 헤겔은 반성적으로 규정한다. 즉 규정성이 통일되면서 더는 분석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므로, 이는 지시의 대상으로 된다는 것이다.

“지시란 반성하는 운동인데, 자기를 자기 내로 끌어모아서 직접성을 정립하지만, 이를 다만 자기에 외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운동이다.”(주관 논리학, GW12, 52)

특수성은 반성을 통해 이것[Dieses]이 되는데, 이때 나오는 이것[Dieses]은 이상에서 설명한 대로 두 가지 종류다. 하나는 ‘질적인 이것[Dieses]’이며 다른 하나는 ‘반성된 이것[Dieses]’ ‘지시되는 이것[Dieses]’이다. 전자는 질적인 규정성이며 후자는 개별적인 대상이다.

두 가지 개별자는 모두 특수성의 반성을 통해 동시에 나오는 것이므로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계한다. 이 두 이것[Dieses], 질적인 이것[Dieses]과 대상으로서 이것[Dieses]이 관계하면서 판단이 이루어진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지는데, 처음 출발점에서 주어는 지시되는 대상으로서 개별자이고 술어는 질적인 규정성이다.

“나아가서 이 구별된 것은[술어와 주어, 질적인 이것[Dieses]과 반성적 이것[Dieses]] 단순히 서로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이 아니다. 그런 다수성이라면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자기를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하는 이것[Dieses]은 자신을 외적으로 구별된 것으로 정립하지 않으며 개념적으로 구별된 것으로서 정립한다. 그러므로 개별자][주어]는 일반자[술어]를 자기에서 배제하지만, 이 일반자는 개별성 자신의 한 계기이므로 일반자는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이 개별성에 관계한다.” (주관 논리학, GW12, 52)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7-특수성으로서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7-특수성으로서 개념

1)

개념은 세 가지 계기를 갖는다. 앞에서 일반성이라는 계기는 무규정적 단순성 측면을 말한다고 했다. 반면, 특수성의 측면은 개념이 지닌 구별, 규정성의 측면을 말한다. 이런 특수성은 개념의 일반성을 토대로 하니, 그런 점에서 자기 속에 일반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하겠다.

개념은 일반성이므로 그 속에 여러 특수성이 출현한다. 이 특수성은 서로 구별되면서 이 특수성을 외연에서 집합하면 하나의 일반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특수성은 일반성을 실체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일반성과 특수성은 유와 종의 관계를 이룬다. 종의 완전성 즉 전체 집합은 유를 이룬다.

특수성은 외연적으로는 일반성의 한 부분이지만, 내포적으로는 일반성이 지닌 단순성 위에 자기의 구체적인 규정성을 지니니, 일반성보다 더 구체적이며 복잡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목재 책상’은 하나의 특수한 책상이다. 외연적으로는 일반적인 책상보다 작지만, 내포적으로는 ‘책상’의 규정 외에 ‘목재’라는 규정을 덧붙이니 더 구체적이다.

특수성의 집합이 일반성을 이루는 방식, 즉 특수성을 서로 구별하는 내적인 척도나 원리는 다양하다. 그것은 이 특수성이 개념이 운동하는 논리학의 어느 영역에서 출현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2)

규정성은 존재의 영역에서는 실재성이며, 하나의 실재는 자기의 한계에서 다른 실재와 접촉한다. 하나의 실재가 지닌 규정성은 하나의 실재에서 한계이지만, 마치 점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듯이 이 한계도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실재는 그 규정성의 한계에서 다른 실재로 이행한다. 하나의 실재가 지닌 규정성은 다른 실재가 지닌 규정성으로 이행하지만, 두 실재 자신은 단순히 접촉할 뿐, 서로 무차별하다.

반성의 영역에 이르면, 규정성은 서로 외면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미 규정성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이 일반성을 통해 본질이 출현한다. 여기서 개체적 규정성은 본질적 규정성에 자기를 비추며 거꾸로 개체의 규정성에는 이미 본질의 규정성이 비치고 있다.

이와 같은 반성 관계에서는 관계를 끌어내는 것은 규정성에 대해 외적인 반성이다. 반성이 아직 외적이므로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통일적인 관계도 규정성에 외면적이다. 전체와 부분, 원인과 결과 등은 반성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특수성이 지닌 이중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규정된 것은 본질이 비친 것이지만, 서로는 상이하며, 이런 규정성을 끌어모아 이룬 전체는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전체일 뿐, 그것은 필연적으로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떤 원리나 척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종을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으로 구별할 때, 그 구분은 외적인 상이성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이 이루는 전체 집합은 완전하지 않다. 예를 들어 홍인종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개념의 탈자태[Aussersichsein]’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유 속에는 두 가지 종보다 더 많은 것이 발견된다. 이 여러 종은 심지어 제시된 상호 관계를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자연은 무기력하게도 개념의 엄밀성을 고수하고 표현할 수도 없고 개념을 결여한 맹목적 다양성 속에 부대낄 수밖에 없다.”(주관 논리학, GW12, 39)

3)

개념의 영역에 이르면, 규정성은 개념이 스스로 규정한 것이 된다. 이미 개념의 영역에서 일반성을 설명할 때 그것이 규정성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보았다. 여기서는 개념의 특수성의 측면에서 규정성이 일반성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보자.

여기서 하나의 규정[P]은 다른 규정[-P]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립한다. 이런 대립하는 것은 완전한 전체를 이루며, 그것의 원리나 척도는 개념 자신이므로 이 대립하는 규정이 중첩하여 존재하는 것을 배제한다.

개념이 규정된 특수성은 규정성이지만, 그 규정성은 자기에 대립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 한, 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하면서 자기 관계하는 것 즉 일반성이다. 즉 개념의 특수성은 이미 내적으로 그것의 일반성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남자’는 ‘여자’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므로 이미 인간의 일반성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특수성은 개념의 한 계기이면서 동시에 이미 내적으로 일반성의 계기를 포함하는 총체성이다.

일반성과 특수성은 총체성으로서는 서로 통일되어 있다. 일반성은 규정성의 부정을 통해 출현하는 자기 관계이며, 부정성은 자기를 부정하는 타자에 대립하는 규정성이다. 그러므로 일반성은 이미 특수성을 배후에 포함하며 특수성은 일반성을 배후에 이미 포함한다.

“이 다른 규정성은 다만 주관적 견해로만 떠도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 다른 규정[일반성]은 직접 사라지면서 타자로서 자신[일반성]의 타자[즉 특수성을 말한다]이어야 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주관 논리학, GW12, 40)

그러나 일반성과 특수성은 개념의 계기로서는 서로 대립한다. 일반성은 자기 관계하는 측면이며 특수성은 규정성의 측면이다. 일반성에서 특수성은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지만, 아직 정립되지 않았으며, 특수성에서 일반성은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지만,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이런 계기로서 일반성과 특수성은 서로의 밖에 존재한다. 일반성은 “특수성 속에서 자기를 벗어난다. 왜냐하면, 개념은 그 특수성 속에서 탈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특수성은 일반성에 대해 “배타적으로 관계하거나, 자기의 부정성 즉 다른 규정성을 지양한다.”(주관 논리학, GW12, 40)

앞에서 개념의 일반성이 형식과 내용의 모순이라고 했다. 그 내용은 일반적인 것 전체이지만, 형식은 규정적인 것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특수성 역시 모순이다. 특수성의 내용은 규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형식은 자기의 타자에 대립하는 것, 이중 부정 다시 말해 자기 관계하는 일반성이기 때문이다.

4)

헤겔은 지성의 능력은 이런 개념의 특수성을 확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성에서 나온 것이 이런 특수성은 개념이 내포하는 전체가 자기를 분화한 구별된 규정성이므로 일반성에 비해서 보면, 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성에 의해 분화된 규정성은 존재의 영역에서나 본질의 영역에서 가지지 못하는 특성을 지닌다. 즉 지성은 내용상으로는 규정성을 분리하지만, 이 분리된 규정성은 일반성의 형식을 가지므로 이제 이 규정성은 영원하고 부동하고 불멸적인 것이라는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 때문에 철학은 이런 지성을 비난하고 다시 특수성을 떠나 일반성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반성은 직관에 주어진 무구별적인 전체에 머무른다. 이는 풍요하기는 하지만, 모호한 전체일 뿐이다.

그러나 헤겔은 지성이 규정성에 머무르는 것은 지성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 한다. 지성은 본래 직관에 주어진 무구별된 전체를 분리하여 이런 구별된 규정성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진정한 총체성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단계다.

구별된 것을 넘어서 다시 그것에 내재하고 있는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은 이성의 능력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된 것에 머무른다면 지성의 잘못이 아니라 아직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니 그 책임은 오히려 이성의 무능력에 있다.

헤겔은 지성을 비난하면서 직관으로 되돌아가려는 낭만주의적인 철학은 다만 다시 잠속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정신현상학>에서 잠속에서 얻는 것은 다만 꿈일 뿐이라고 하면서 비판한다.

지성을 구체적인 전체를 벼려서 분화된 규정성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하면 이성은 그런 벼림의 정점에서 구별된 규정성을 해소하면서 다시 총체성으로 복귀하게 한다. 이 총체성은 더는 풍요하지만 모호한 감각적 총체성과 달리 명확하면서도 동시에 풍요한 총체성이다. 이런 개념의 명확하면서도 풍요한 총체성이 곧 개별성이다.

“지성은 사실 그런 규정성에 추상적인 일반성의 형식을 통해 소위 경직된 존재를 부여하는데 이 경직성은 질적인 것의 영역이나 반성의 영역에서는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성은 이런 단순화를 통해 동시에 그런 규정성에 정신을 부여하며 이를 날카롭게 벼리니, 이 규정성은 바로 다만 그와 같은 벼림의 정점에서 자기를 해소하고 자기에 대립하는 것으로 이행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이런 최고의 성숙한 단계는 어떤 것의 몰락이 시작하는 단계이다.”(주관 논리학, GW12, 42)

헤겔 논리학 개념운동6-개념의 일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운동6-개념의 일반성

1)

개념의 세 가지 계기 가운데 첫 번째 계기는 일반성이다.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간 지성의 산물이며, 이 지성은 주로 개별적인 규정성을 제거하는 추상화의 작용을 수행한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추상적인 단순한 것이다.

이 추상의 산물은 자기 내에서 다른 세부적인 규정성을 지니지 않는 단순한 추상적인 것이며, 여러 개별자에 공통으로 속하는 것이므로 일반성이라 한다. 즉 내포적으로는 추상적이며 외연적으로는 일반적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 말했듯이 개별성에서 일반성이 생성하는 과정이며 일반성은 개별성의 근거이므로 곧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즉 생성된 것이 오히려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규정성으로서 일반성은 존재의 영역에서 본질의 영역을 거쳐 개념의 영역에 이르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2)

헤겔은 이렇게 추상적인 것으로서 일반성이 지니는 의미를 차례로 서술하는데, 우선 존재의 영역에서 그것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일반성으로 보는 단순한 것 즉 무규정적인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 규정성이 제거된다는 점에서는 무규정적이지만, 제거되고 남은 고유한 규정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단순하다.

예를 들어 책상의 개념이라 하다면, ‘앉은 책상’, ‘사무용 책상’, ‘목재 책상’ 등이 있는데, 이런 개별성 ‘앉은’, ‘사무용’, ‘목재’라는 개별적 규정성을 제거하면 책상의 단순한 개념이 얻어진다. 이 책상은 여러 책상을 자기의 외연으로 갖는 일반적 개념이다.

이 일반적 개념이 지닌 이 고유한 규정성은 이런 개념에 이르는 과정에서 제거된 개별적인 규정성에 대립하며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예를 들어 책상은 반드시 앉는 것일 필요는 없고 사무용일 필요도 없고 목재일 필요도 없다.

존재론 영역에서 출현한 단순한 일반적 개념은 고유한 규정성을 지니고 자기 바깥에 제거된 규정성에 대립하므로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 단순한 일반성을 ‘특정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 ‘특정한 개념’은 앞으로 설명할 ‘특수성’, ‘특수한 개념’과 구별되어 사용된다.

3)

일반성은 본질의 영역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일반성은 개체에 내재하는 본질로서 일반성이다. 개체는 자기를 재생산하면서 자기를 지속하니, 이렇게 지속하는 것이 곧 본질이다.

이런 본질은 추상적인 무규정성을 더는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구체적인 규정성을 지닌 일반성이다. 그러나 이 구체성은 제한적이다. 본질의 규정성과 개체가 지닌 개별적 규정성은 서로 구별되지만, 양자는 서로 따로 떨어져서 있을 수는 없다. 양자는 각자 직접적이고 자립적이면서 서로 비춘다.

이런 비춤[scheinen]의 활동 속에서 본질과 개체는 서로 관계하지만, 동시에 양자는 서로 자립적이거나 직접적이고 여전히 외면적이다. 헤겔은 양자 사이의 이런 이중성을 본질의 반성하는 관계로 앞에서 서술하였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생명체의 종적 본질이 가장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4)

존재의 영역에서 특정한 개념, 본질의 영역에서 반영된 본질은 일반성이 출현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아직 개념론에서 다루는 일반성이 출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일반성이 부분적으로 한정된 방식으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개념론에 이르러 출현한 개념 즉 ‘개념’은 일반적인 것이더라도 규정성의 자기 부정을 매개로 해서 출현하는 일반성이다. 여기서 규정성은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과 모순 즉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 이 두 배타적인 규정성 전체는 일반성을 이룬다. 기호로 이를 표현하자면 ‘p or -p =X’라는 관계에 있다.

“개념 속에는 일반적인 것의 부정태를 이루는 규정은 전적으로 다만 정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며 또는 정립된 것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다만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주관 논리학, GW12, 34)

이런 개념의 일반성은 이중적인 반성 관계에 있다. 하나는 외부로 향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로 향한 반성이다. 전자는 규정성이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과의 관계이다. 즉 p는 -p가 아니다. 후자는 일반성과 규정성의 관계다. 여기서 X는 p로 분화하고 다시 자기로 복귀한다.

“규정성은 개념 속에 있는 것인 한에서는 총체적인 반성이며 이중적인 가상이니 한번은 외부를 향해 비췬 가상이며 즉 타자로의 반성이며 다른 한 번은 내부로 향해 비췬 가상 즉 자기 내 반성이다. 전자 즉 외적인 가상은 타자에 대립하는 구별을 이룬다. 일반자는 이에 따라서 특수성을 가지며 이 특수성은 더 고차적인 일반자 속에서 해소된다.”(주관 논리학, GW12, 35)

그러므로 이 일반성에서 규정성은 더는 외면적이지 않으며, 일반성 자체가 자기를 규정하는 규정성이 된다. “실체 자체에 대해 우연적이었던 것이 여기서는 개념이 자기 자신과 고유하게 매개하여 나온 것이며 개념에 고유하며 내재적인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34-35)

규정성이 일반성에 대해 이런 관계에 있으면, 일반성으로서 개념은 이제 ‘구체적인 것의 영혼’이며 “일반자는 그런 구체적인 것에 내재하고, 그런 구체적인 것 속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그 다양성과 상이성 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된다.”(주관 논리학, GW12, 34)

5)

개념의 영역에서 일반자는 자기를 분화하여 자기를 산출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개념의 일반성은 “자유로운 위력”이다. 왜냐하면, 일반자가 규정성에 관계할 때 그것은 자기에 외적인 것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규정한 것 즉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반자는 “자기의 타자를 장악하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니 오히려 이런 타자는 그런 일반자 속에 고요하게 머무르며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다. 이런 일반자가 자유로운 위력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자는 또한 자유로운 사랑이며 한계 없는 축복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주관 논리학, GW12, 35)

이런 일반성이 ‘절대적 개념’, ‘창조적 위력’으로서 파악되는 일반자이다. 여기서 “정립된 것은 무한한, 투명한 실재성이니, 개념은 그런 실재성 속에서 자신이 창조한 것 즉 자기 자신을 직관한다.”(주관 논리학, GW12, 36) 즉 그것은 “자기 내에서 구별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주관 논리학, GW12, 36)이다.

일반성에 대해 규정성은 내재적이므로 일반성은 단순 일반성에 그치지 않고 규정성을 이미 포함하는 전체 즉 총체성이다. 일반성은 개념의 한 계기이며 개념의 모든 계기의 총체성 즉 전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일반자는 개념의 총체성이며 구체적인 것이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개념을 통해 규정된 내용을 갖는다.”(주관 논리학, GW12, 35)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5-개념이란 무엇인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5-개념이란 무엇인가?

1)

논리학 3부 개념론 1편 주관성은 흔히 ‘논리학’이란 이름으로 내려온 내용을 다룬다. 헤겔은 이 부분을 1장 개념, 2장 판단, 3장 추론으로 구성하는데, 이 가운데 개념에 관해서는 전통적으로는 논리학에서 다루기보다, 인식론이나 존재론에서 다루어 왔다.

존재론에서는 개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다만 이름뿐인 것인 그리고 마음의 재현인지, 대상적인 실체인지 하는 문제가 다루어져 왔으며 인식론에서는 개념이 경험적으로 주어지는지 타고난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가 다루어졌다.

반면, 논리학에서는 개념에 관해 다만, 개념이 판단과 추론에 사용되기 위해서는 모호하거나 불명확해서는 안 된다는 요청이나 어떤 조건 아래서 개념이 분명하고 명확하게 되는지, 정도만 다루어질 뿐이다.

헤겔은 1장 B절 특수성 끝에 달린 주석에서 전통적으로 논리학에서 다룬 개념의 성격 즉 분명함[klart]과 명확함[deutlich], 적합함[adaequat]의 조건이나, 단순 개념과 복합 개념, 반대 개념과 모순 개념, 종속 개념과 상응 개념을 구별하는 방식 등을 다루지만, 지나가는 투로 다룰 뿐이며 개념에 관한 헤겔의 논의 전체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이 주석에서도 개념에 관해 전통적으로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문제 즉 개념이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서는 전혀 논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헤겔이 이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 문제를 다시 논하지 않는 것은 이 문제가 이미 논리학의 앞부분에서 개념의 생성을 통해 다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

헤겔이 개념을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논리학의 개념론 즉 주관 논리학의 한계 내에서인데, 그렇다면 개념론에서 개념은 어떤 논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일까? 개념에 관한 헤겔의 논의는 두 가지 점을 전제로 한다.

우선, 개념은 이미 개별자에 내재하는 것이다. 이 내재하는 개념은 존재론과 본질론을 거쳐 생성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자기를 드러내니, 이렇게 자기를 실현한 개념이 개념론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존재론에서 사물의 고유한 일반성[형상]이 다루어지고 본질론에서는 생명체의 종이 다루어졌다. 이제 개념론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실체 즉 주체가 ‘개념’으로 규정되면서 논의의 주제를 이룬다. 이 ‘개념’에 속하는 대표적인 예가 곧 인간의 선험적 통각, 자기의식이다.

이런 ‘개념’을 다룰 때, 헤겔은 ‘개념’에 이르기까지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이 발전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서술한다. 여기서는 이 범주들이 ‘개념’을 이루는 계기로서 이미 이 ‘개념’에 지반을 두고 마침내 그 ‘개념’을 드러내는 과정으로서 다루어진다. 그 때문에 앞의 존재론과 본질론의 내용이 이 판단론에서 압축해서(그러나 개념적인 방식으로 서술되어) 다시 언급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개념’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논리적 범주는 이 장에서는 그저 개념으로 지칭된다. 헤겔은 1장 개념에서는 지금까지 논리적 범주 즉 개념이 지닌 일반적 의미를 다룬다. 모든 개념이 지닌 일반적 의미는 곧 마지막 범주인 ‘개념’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니, ‘개념’의 본성은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의 일반적 의미가 된다.

3)

1편 주관성 장의 1장 개념 장에서 다루는 것은 이런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의 일반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개념’의 본성이기도 한데, 1장에서는 이 개념의 일반적 의미를 추상적으로 다룬다.

즉 여기서 개념을 이루는 계기는 아직 경험적 실재성을 지니지 않고 개념 속에 머무르는 내적 계기로서 다루어진다. 개념의 계기가 경험적 실재성을 지니게 되면, 개념의 계기는 판단을 형성한다. 이는 2장 판단론의 주제가 된다.

헤겔이 개념의 일반적 의미를 다루면서 우선 개념을 표상과 상징 또는 기호와 구별했다는 것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표상은 아직 일반적인 개념이 되기 이전에 경험에 직접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직접적인 감각은 기억을 통해 내면화하면서 관념화하니, 직접 주어진 구체적 관념이 곧 표상이다. 기억이 이미 일반화, 추상의 과정이므로 이 표상적 관념도 이미 개념화가 시작된 것이지만, 아직 그 정도가 미약할 뿐이다.

논리학에서 개념은 근본 조건이 분명하고 명확하며 적합한 것이어야 하니, 표상은 아직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헤겔은 논리학에서 그런 표상을 통해 사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추상적인 개념을 눈앞에 드러내는 구체적인 개념이 곧 상징이다. 상징은 하나의 기호[Zeichen]이다*. 상징이나 기호는 자기가 지닌 의미와 다른 것을 지시하는 것 즉 알레고리이니, 논리학에서는 이런 상징이나 기호의 사용은 판단과 추론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 헤겔은 <미학 강의>에서 이런 기호를 상징 외에 현상이나 가상을 포괄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쓰지만, 여기서는 상징과 기호가 같은 의미다.

헤겔은 주석에서 흔히 상징은 개념을 예감하게 하고 개념의 여운이 된다고 하지만, 개념이 상징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상징이 개념을 통해 이해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징을 둘러싸고 있는 감각적인 것이 제거되어야 한다.

4)

개념에서 헤겔은 이 개념을 주로 개념을 이루는 세 가지 계기의 측면에서 논의한다. 이 개념의 세 가지 계기란 곧 일반성과 특수성, 개별성이다. 헤겔이 개념을 왜 이 세 가지 계기로 나누었는지가 의문스럽다. 이 세 가지 개념의 연원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이 세 가지 개념 계기의 연원은 앞에서 실체의 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개념’의 관계는 그 이전 실체의 관계가 생성하여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다. 이 실체의 관계는 곧 절대자, 속성, 양상의 관계이다. 실체에서 절대자가 속성이 되고, 속성이 다시 양상으로 되면서 절대자로 복귀하는 운동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일어난다. 즉 자기도 모르는 낯선 힘에 의해 부정되고 다시 부정되는 가운데 이런 절대자의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실체의 운동에서 낯선 외부의 힘이라고 여겼던 이 운동은 ‘개념’에 이르게 되면 주체가 자기를 실현하는 내재적 운동이 된다. 바로 이 내재적 운동이 개념을 통한 추론의 운동이며 이 추론의 운동을 이루는 고리가 곧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인 것이다. 여기서 일반성은 절대자에 상응하고, 특수성은 속성에 상응하며, 개별성은 양상에 상응한다.

그런데도 왜 헤겔이 절대자니, 속성이니, 양상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것은 헤겔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서 핵심적인 것인데, 사실 기존의 철학 전통에서 이런 방식으로 개념을 다루는 경우는 없었다.

이 세 가지 개념의 계기와 가장 가까운 논의를 전통 논리학에서 찾아본다면, 곧 추론을 이루는 세 개념일 것이다. 추론을 대표하는 삼단논법은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대전제의 술어를 대개념이라 하고 대전제의 주어이면서 동시에 소전제의 술어가 되는 것을 매개념이라 한다. 그리고 소전제의 주어를 소개념이라 한다. 결론은 소개념과 대개념으로 이루어진다.

개념의 세 가지 계기가 추론을 구성하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면, 헤겔이 개념의 계기를 다룰 때 헤겔은 이미 개념을 판단과 추론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개념을 고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념과의 연관 속에서 규정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존재론에서 하나의 개념(논리적 범주)은 타자와 이행하는 관계 속에서 파악되며 본질론에서는 개념(논리적 범주)은 본질과 개체의 반영하는 관계 속에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런 관계의 밑바닥에는 개념의 일반적 관계 즉 개념의 세 가지 계기가 지닌 관계 즉 개념의 관계가 있다. 개념론에 이르러 이런 개념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의 주제가 된 것이다.

5)

그런데 개념의 세 가지 계기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전통적으로 대개념, 매개념, 소개념을 다루는 방식과 구별된다. 전통적으로는 이 관계는 외연의 크기에 따라서 구분된다. 외연의 크기에서 대개념은 매개념을 포함하고 매개념은 소개념을 포함한다. 이런 포함관계가 추론의 정당성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헤겔의 세 가지 개념 계기는 한편으로 외연적 크기의 구별을 포함하지만, 이것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또 다른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곧 질적 규정성의 차이이다. 질적 규정성은 단순하고 추상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이고 복합적이기도 하다. 그것에 따라서 추상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개념이 구별된다. 이 단순한 추상적인 것을 헤겔은 개별적이라고도 하며, 복합적인 구체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이라고도 한다.

헤겔에서 개념의 계기는 이런 두 가치 측면에서 이중적으로 규정된다. 즉 내포적인 측면과 외연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측면은 서로 교차하면서 외연적 일반성이 내포적 개별성을 지니기도 하고 내포적 일반성이 외연적 개별성을 지니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개념은 한 측면에서 일반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개별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 개념의 계기는 마치 삼위일체를 다루는 것과 같다. 삼위일체가 성부와 성자, 성령이 각자 총체성이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념의 세 가지 계기는 각자가 총체성이며 동시에 전체를 이루는 한 계기가 된다.

“정립된 것이 개념 속에서는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하니, 개념의 계기 각각은 특정한 개념이며 개념의 한 규정성이자 그에 못지않게 전적인 개념이다.”(주관 논리학, GW12, 32)

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2021) 서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서평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윤구병 선생님(이하 ‘선생님’으로 지칭)의 철학을 소개한 한재경 선생의 책 <윤구병 철학의 이해>(미발간 원고)을 읽고 다시 한번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흥미가 이끌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년 전인가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철학에 관한 심포지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선생님이 2013년 발간한 책 <철학 다시 쓴다>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이 책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관해 논평했다.

이번 읽은 한재경 선생의 책을 통해 그동안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새로 발간한 윤구병 선생의 책을 두 권이나 사서 읽었다. 하나는 <꿈꾸는 형이상학>(보리, 2021)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가 본 우주 역사>(보리, 2024)이다. 그 가운데 전자가 눈에 뜨였다. 이 책에서는 확실히 그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논의, 대표적으로 ‘거품 우주론’이 새로이 등장해서 진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2)

먼저 한재경 선생에게 감사하다. 한 선생은 선생님의 철학을 ‘산뜻하다’(또는 스마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정리했다. 먼저 선생님의 핵심적 저서 세 권(위의 두 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있음과 없음’이다)을 ‘단계’로 요약하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논점을 ‘고리’로 정리했고, 마지막에는 ‘묻고 답하기’를 통해 독자가 드는 의문점을 풀어주었다.

이런 감각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편집할 때 지녔던, 또 출판사 보리를 통해 새로운 감각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낼 때 보여주었던 감각인데, 한 선생이 그런 감각을 빼닮았다는 느낌이 들어, ‘우연이 아니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필자가 잘 정리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생각에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한 선생의 정리 덕분에 선생님의 생각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 선생의 글을 평가하려면, 선생님의 철학을 알고 그것과 비교해야 하는데, 아직 그럴 처지에 이르지 못해 그런 평가는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서문에 선생님 자신이 한 선생의 책이 자신의 철학을 온전하게 담아냈다고 하니, 그에 기초해서 차라리 선생님의 철학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철학 다시 하다’라는 저서도 못지않게 선생님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빠뜨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의 형이상학에는 그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동양철학의 전통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 철학의 전통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전통에 관해서 충분히 부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은 그사이에 그 이전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동앙 철학의 기 철학 전통으로 대대적인 회전 기동을 했다. 그런 가운데, 아직 그런 회전 기동이 완성된 것이 아닌지, 그 이전 플라톤적 이원론적 체계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양극 체제와 기 철학에서 기 일원론적 사유가 혼재하면서 그사이에 균열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동기가 이런 갈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3)

선생님의 철학의 출발점은 여러 책에서 강조되는 것과 같이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빠진 것’으로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한 이래로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있는 것’에 대립하는 ‘없는 것’ 없이는 형이상학이 출발하지 않으니, ‘없는 것’이 부딪히는 난점, 모순을 피하려 ‘빠진 것’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 여러 책에서 선생님이 사용하는 언어를 검토해 보면, 굳이 이런 제안이 의미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부분 글에서 선생님은 ‘빠진 것’이라는 말 대신 ‘없는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빠진 것’이나 ‘없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제안한 것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빠진 것’은 빠진 것 외에 나머지는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빠진 것’은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빠진 것’도 모든 것이 빠진 것으로 되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되니,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필자는 파르메니데스처럼 과연 없는 것은 사유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없는 것’ 없이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빨간색을 보고 거기에 없는 것인데도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선생님은 글에서 ‘없는 것이 없다’는 ‘[모든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만약 ‘없는 것’이 사유할 수 없다면, ‘없다’가 중첩된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서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반성적이다. 우리는 빨간색과 파란색(논의의 필요 상 색에 두 가지만 있다고 하자)을 묶어서 사유한다. 파란색은 빨간색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간색을 보고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하며, 파란색이 없으면 빨간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 전기와 -전기를 보자. – 전기는 ‘없는’ 전기는 아니다. 다만 + 전기에 대립하는 전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유에서 우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대립시켜 사유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있으면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하며 ‘없는 것’이 있으면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사유가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사유가 ‘없는 것’을 통해서 사유하는 반성적 사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3)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든 ‘없는 것’을 ‘빠진 것’의 극단으로 보자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있는 것’ 역시 반대쪽 극단이 될 것이다. 양극단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있는 것인 동시에 없는 것’이며 ‘있지 않은 것이며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곧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아페이론이다.

아페이론’ 개념이야 플라톤 철학 이래로 익숙한 개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서 더 나가서 아페이론에 정도를 설정한다. 즉 ‘있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과 ‘없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그사이에 무한한 수의 아페이론이 출현한다. 제논의 역설이 잘 보여주듯 1과 0 사이에는 무한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페이론에 정도가 있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 아페이론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인데 무규정적인 것에 정도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유한한 것들 사이에는 가깝고 멀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처한 극단은 극단인 한에서 무한한 거리에 있다. 무한한 거리를 측정할 수 없으니, 어느 것이 무한에 더 가까운가는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무한히 선한 하나님 앞에서 교황과 나 가운데 누가 하나님에 가까울까? 아마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이 타락한 죄인일 것이다.

더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짝이 지어진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아페이론은 b, c, d는 있지만, a는 없다고 하자. 이것은 ‘있는 것’이 많으므로 ‘있는 것’에 가까운가? 그러나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히 많은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에는 e, f, g, …d 없으니 차라리 없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4)

일단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아페이론이 있다고 하자. 중요한 것은 이 아페이론은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다.

이 두 가지 운동을 선생님은 ‘함’과 ‘됨’의 운동이라 한다. 이 운동 개념이 사실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각이다. 우선 이 운동은 각기 그 원천이 다르다. ‘함’의 운동은 원천이 ‘있는 것’에서 나온다. 반면 ‘됨’의 운동은 원천이 ‘없는 것’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의 핵심적 문제에 부딪힌다. ‘있는 것’은 있을 뿐이다. 그것이 순전하면 할수록 더욱 ‘있는 것’뿐인데, ‘있는 것’이 어떻게 ‘함’이라는 운동의 원천이 되는가? ‘있는 것’은 하나이니,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없는 것’은 여럿이니, 여기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있기는 있고 그것이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없는 것’은 여럿이더라도 그것을 여럿으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에서 ‘있는 것’, ‘없는 것’과 구별되어서 ‘임’과 ‘아님’이 논의되어 왔다. ‘임’은 그 자체가 긍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고 ‘아님’은 부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니 차라리 ‘임’과 ‘아님’에서 ‘함’과 ‘됨’이라는 운동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은 ‘있는 것’과 ‘임’, ‘없는 것’과 ‘아님’을 이미 동일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과 ‘아님’이 따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임과 아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는 모든 철학자가 논하는 중요 문제인데도 선생님의 글에서는 그런 논의가 없다. 왜냐하면, 양자를 일치하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양자는 언어상으로, 특히 한국어에서는 두 언어쌍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헤겔의 경우도 ‘임’과 ‘아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구분된다. ‘임’과 ‘아님’은 문장의 계사이며 그것은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이루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임’은 어떤 것을 서로 하나로 만드는 힘이며 ‘아님’은 서로 다르게(여럿으로) 만드는 힘이다. 어떤 것은 이런 두 힘 즉 ‘임’과 ‘아님’의 운동 속에 있으며 어떤 것은 이런 운동의 어떤 상태이다. 이 운동이 일정한 평형 상태에서 고정된 듯한 모습을 지니면,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이 지닌 규정 즉 ‘무엇임’이 출현한다.

있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Da] 속에 있는 것 즉 현존[Dasein]이다. 이 관계가 운동하는 힘이 되어 어떤 것을 있게 만든다. 이 관계를 통해 생성되는 규정성은 이 관계가 전개하는 전체 공간 속에 위치하게 된다. 이런 위치함을 통해 어떤 것은 현존한다.

필자는 헤겔의 말대로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라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하려는 것이다.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자체에 있다는 것은 특별하게 논증되어야 할 사실이다.

5)

이제 선생님 형이상학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이 운동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논증 없이 받아들이고 보자.

더 큰 문제가 있다. 운동의 힘은 성격이 다르다. ‘있는 것’의 운동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간다. 그래서 아페이론을 더욱 하나가 되게 만든다. ‘없는 것’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가서 더욱 여럿으로 만든다.

이런 운동은 사실 헤라클레이토스가 촛불의 비유를 통해 생성하는 힘과 소멸하는 힘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이런 운동하는 아페이론을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 운동이 균형 속에서 있을 때 그것은 정지한 것으로 보이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로고스’라 한다.

동양철학에서 기 철학도 마찬가지로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대립하는 힘은 끊임없이 상호 전환하는 운동을 전개하니 이 운동 자체는 무극이며 이 운동이 고유한 균형을 이룬다면 곧 태극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든, 기 철학에서든 두 운동은 서로 대립하지만 대칭적이다.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앞서고 우위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일방의 우위는 기의 일원론적인 철학에서는 논리적으로 배격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나의 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경우, 두 힘의 대립을 제시하면서 이 두 힘은 펼치고 수렴하는 힘이라고 하지만, 펼치는 힘이 펼치는 것은 수렴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수렴하는 힘이 수렴하는 것은 펼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양자 사이에 능동과 수동을 공평하게 부여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두 가지 운동을 ‘함’과 ‘됨’의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이 ‘함’과 ‘됨’은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적인 운동이다. ‘함’, 능동은 작용하고 ‘됨’, 수동은 수용한다. 그러나 ‘됨’이 능동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함’이 수동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5)

이렇게 비대칭적인 운동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이 앞서서 가졌던 유출설적인 흔적이 아닐까 한다. 신플라톤주의자에게서 ‘있는 것’은 ‘없는 것’을 향해 유출한다. ‘있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로 만드는 힘이 떨어지니, 거꾸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강하게 된다. 이런 유출 가운데 자연계의 다양한 층위가 출현한다. ‘철학 다시 하다’에 따르자면, 여기서 정신과 생명, 자연, 질료가 차례로 출현한다.

자연의 위계적 계층성을 설명하는데 이런 유출설이 기여한다. 이 신플라톤주의에서부터 나오는 유출설이야말로 그 이후 자연의 위계성 또는 진보적 진화를 확립하는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2021년 발간된 <꿈꾸는 형이상학>이란 책에 이르면, 이제 ‘함’과 ‘됨’이라는 두 가지 힘이 비대칭적이라는 성격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필자가 선생님이 이 시기 큰 변화를 겪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제 이런 변화의 측면을 더 규명해 보자.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은 두 가지 우주 설화를 제시한다. 한 재경 선생이 요약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다. ① 하나의 설화에서는 ‘한어미’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원래 두 힘은 ‘한어미’ 속에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두 가지 대립하는 힘으로 분열되는데, 이제 두 힘은 ‘밝이’나 ‘검이’와 같은 대립하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거미가 밝이를 푹 감싸고 있어서 .,, 밝이는 검이가 끝없이 옥죄는 바람에 뜨거워지고 또 뜨거워져서 펑 하고 터져 버렸다. … 이때 한 덩어리였던 힘이 둘로 갈라진다. 밝이의 힘은 하미가 되고 검이의 힘은 되미가 된다. 하미가 힘을 쓰면 되미는 그 힘을 받아 하는 대로 된다.”(한재경, 미발간원고)

② 다른 하나의 설화는 ‘까망이’와 ‘하양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런데도 일원론의 흔적은 은폐된 방식으로 출현한다. 즉 두 대립하는 힘의 긴장된 관계를 통해 내적인 통일성을 가정한다.

“하양이와 까망이가 틈새 없이 맞닿아 두 힘이 서로 다른 결을 이루면서 태극도형처럼 하나는 함으로 다른 하나는 됨으로 휘어진 결 무늬를 이루기 시작했다.”(꿈꾸는 형이상학, 28)

여기서 ‘밝이’나 ‘햐양이’, ‘검이’나 ‘까망이’는 동양철학에서 양과 음에 대응하는 용어로 보인다. 이렇게 두 힘이 원래 통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나, 두 힘이 음양으로 구분되면서 양자 사이에 비대칭적인 흔적은 사라진다. 그 점은 두 힘의 관계가 태극도설의 모양으로 제시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6)

이처럼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동양철학의 기 일원론으로의 전환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따지고 보면 그 이전부터 계속된 선생님의 지론인 ‘결’의 개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이 ‘결’의 사상은 일찍부터 지녀왔던 사상이며 매번 강조해 마지않던 사상이다. 그런데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대립하는 힘인 ‘함’과 ‘됨’이 비대칭적이라면 이것들이 만나서 결이 나온다고 보기 어렵다. ‘결’은 두 힘의 균형을 통해 서로 순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비대칭적이라면 이런 균형이 깨어지면서 순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님으로서는 ‘결’이 ‘톨’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현대과학의 이론과 연관되면서, 형이상학이 확정되기도 전에 이미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신념이다. 그런데 유출설의 입장에서 이 결을 설명하기가 곤란했던지, 사실 앞선 책에서는 ‘결’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다.

‘결’의 사상을 끌어내려면 대립하는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에 이르러야 했는데, 이런 대립의 균형은 이미 양자의 통일을 전제로 하기에 기 일원론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덕분인지, ‘꿈꾸는 형이상학’에서는 두 힘이 꼬여서 어떻게 결이 나오는지가 상세하게 그려진다. 이게 소위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이다.

‘거품 우주’론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자. 그게 성공적인지는 필자가 평가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 근거는 함과 됨이라는 비대칭적 구조 없이 기일원론에 근거한 대칭적인 음양의 순환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우주는 주역에서 음양이 중첩되어 사상, 팔괘,  64효 등으로 나가는 세계와 어쩌면 그렇게 신통하게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은 주역에서 음양의 관계를 뫼비우스적 띠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밝이’의 한 가운데 블랙홀이 있고 ‘검이’의 한 가운데 화이트홀이 있으며 이 양자가 다시 월홀과 한 자리에 있다는 주장에서 분명하게 엿보인다.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가 다시 중첩되면서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면, 거품 우주론이 나오지 않을까? 

어떻든 간에 매우 흥미로운 우주였다. 필자는 이규성 선생 덕분에 동양철학, 그 가운데 왕선산의 기 철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하나의 기가 음양 두 기로 분화되어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우주 만물이 생겨난다는 주장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음양의 대립이 어떻게 다양한 만물로 발전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기에 청탁과 유동성과 고정성이 있다는 정도 외에 더 들을 수는 없었다. 또한, 필자는 여러 주역 소개서를 읽었다. 동양철학 그것도 주역에 관해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주역에서 음양의 괘가 중첩되는 과정을 선생님처럼 우주 발생론으로 읽는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은 무척이나 탁월한 설명으로 보인다.  음양을 통해 이루어진 우주생성론, 코스모고니는 선생님이 최초가 아닐까? 여기 선생님이 주역이 제시한 것과 ‘거품 우주론’을 보여주는 한 가지 도해만을 소개하려 한다.(이 도해를 읽을 때 그저 평면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순환이 뫼비우스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읽으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도해로 보인다.)


 

이 거품 우주는 신적 지성의 눈으로(스피노자적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단순한 음양의 순환을 통해 모든 우주가 설명되는 일이관지 하는 우주일 것이다. 그러나 지상적 인간의 지성으로 보면, 아마도 그 인간의 지성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에 따라서 어떤 우주는 맴돌고, 어떤 우주는 휘돌며 어떤 우주는 감돌고 있을 것이다. 인간 지성의 눈으로 보면, 이 우주는 우연 그 자체이지만,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이 무한 기하학의 세계와 같이 아름다운 우주에서 선생님은 우연을 강조한다. 그것에서 자유가 나오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우연은 곧 맹목적 운명이니, 어린아이처럼 또는 선사처럼 이 운명을 즐기는 선생님은 몰라도 우리 같은 무거운 영혼에게는 필연성의 세계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7)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설적 흔적이 여전히 남아, 일원론적 기 철학적인 흔적과 충돌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마치려 한다.

이런 흔적은 ‘밝이’나 ‘검이’ 대신 ‘하미’나 ‘되미’, ‘잇스미’나 ‘업스미’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는 데서 남아 있다. 또한, 한 덩어리인데 그 모습이 ‘밝이’가 ‘검이’를 싸안고 있고 옥죄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싸안더라도 또는 서로 꼭 붙어있더라도 둘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하미’가 하면 ‘되미’는 “하는 대로 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여전히 비대칭적 능동-수동 관계가 등장한다.

함과 됨,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성을 유지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유출설이나 서양철학적 흔적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의문이 많다. 2021년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이 유출설에서 기 일원론으로 도약했듯이 다시 한번 도약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선생님의 철학을 한마디로 하면 곧 ‘결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좀더 오래 사셔서 우리에게 또 “새로운 철학이네!” 하는 경탄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기를 고대해마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

1)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칸트가 선험적 범주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직관의 다양이 선험적 범주에 할당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념은 공허한 형식이고 그 내용은 직관에서 주어지는 다양이라고 했던 것을 비판한다.

헤겔은 선험적 범주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기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범주는 일반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자기 규정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념이다. 실재성은 범주 자신에서 나오므로 범주와 실재성, 개념과 대상은 합일하면서 객관적인 진리로 된다.

“또한, 여기[칸트적 심리적 관념론]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 다시 직관의 다양이 없으면 내용이 없고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개념이 선천적[apriori] 종합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개념이 그와 같이 선천적 종합이므로, 개념은 정말로 말해 규정성과 자기 내 구별을 지닌다. 규정성은 개념의 규정성이고 따라서 절대적 규정성, 개별성이므로 개념은 모든 유한한 규정성과 다양성의 근거이자 원천이다.”(논리학 2부, GW12, 23)

헤겔은 ‘선천적 종합’, 즉 개념에서 그 규정성이 나온다는 주장을 자기의 철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면, 마치 나르시시즘적 원리처럼 보인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이니 그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은 주관적인 산물이며 그 너머에 대상 자체, 물 자체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

헤겔이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 규정성이 자기 넘어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개념이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되고 즉 그 자체 존재[an sich]가 대자 존재[fuer sich]와 대타 존재[Sein fuer andres]로 구별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의식, 대자 존재란 곧 개념에서 나온 실재성, 규정성을 의미하며, 대상 곧 대타 존재는 이런 실재성과 규정성 너머에 등장하는 물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분화와 구별이 의미하는 것은 곧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오는 순간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물 자체를 헤겔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헤겔을 비롯한 모든 당대 철학자들의 근본적 아포리아였던 이 문제를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방법을 통해 풀어나간다.

즉 하나의 의식은 일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한다. 의식은 이 규정성을 자기의 범주에서 끌어내지만, 이 규정성은 그 너머 물 자체에 부딪힌다. 그런데 이때 물 자체란 자기의 전제가 되는 의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본래의 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의식에 대해 그 자체적인 존재[Fuer es an sich Sein]’가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범주와 물 자체는 서로 모순 속에서 빠지고 이로부터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규정성이 출현하며 이 속에는 그 이전 범주에서 물 자체였던 것이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범주에 대해 또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게 되면서 운동이 계속된다.

이런 과정은 의식의 범주가 개별적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대상이 점차 더 구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이 맞물려 나가는 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3)

정신현상학에서 서술된 이 의식 경험의 길은 역사적으로 의식의 형태들이 겪어나갔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발전을 매개하는 것은 의식과 물 자체와의 모순인데, 이런 역사적인 의식 형태가 현재 의식의 평면에 투영되면서 논리적인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에서도 범주는 그 자신에서 규정성과 실재성을 끌어내지만, 이는 곧 그 실재성을 넘어선 것 즉 물 자체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면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범주가 모든 실재성을 포괄하면서 더는 모순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이 범주가 최종적인 절대적 범주이며 곧 진리인 개념 즉 이념이다.

헤겔은 이런 논리적 발전을 통해서 칸트가 좌표축에 할당했던 범주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서 전개한다. 헤겔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과 그 범주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만 칸트와 달리 이를 논리적인 발전에 따라서 배치했다. 헤겔은 의식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논리적 계기의 발전을 통해 개념으로부터 규정성이 나온다는 선천적 종합 개념이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하나의 범주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 즉 범주의 자기 내 반성 과정이 중요하게 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물 자체와의 모순이지만, 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사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 사유의 과정이 추론적 이성이 하는 일이며 이 추론적 이성이 사용하는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이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가 무시했던 반성 개념의 역할을 사유 속에 제대로 위치시킬 수 있었다.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헤겔에서 선험적 통각의 개념을 차이 나게 만든다. 칸트에서 통각과 범주는 서로 구별된다. 통각은 범주를 직관의 다양과 결합하는 기능을 지니지만, 그 자체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범주 밖에 있다. 마치 그것은 플라톤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와 아페이론을 결합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구별하여 출현한 하나의 규정성이며, 통각은 이 규정성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다시 새로운 범주를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의 본래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면서 마침내 선험적 통각은 범주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헤겔에서 범주의 생성 운동을 통해 출현한 ‘개념’이라는 범주에서 마침내 통각은 자기를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니, 그런 점에서 앞에서 개념이 곧 선험적 통각 또는 자기의식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범주의 전개 운동 자체는 결국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드러내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칸트는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에 이르렀으나, 범주를 여전히 형식적인 좌표축으로 보면서, 다시 형식 논리학에서의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헤겔은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를 지키면서 이를 범주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헤겔은 형식 논리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논리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논리학의 핵심은 곧 판단이다. 논리적 범주란 곧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계사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판단의 형식은 12개가 있는데, 이 12개의 범주는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다. 이 범주가 지닌 내용은 이 판단 형식이 구체적인 판단으로 나타날 때 지니는 내용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은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의 형식을 말한다. ‘이것의 빨강임’이라는 특정한 사태는 긍정판단의 구체적 내용이지만, 긍정판단의 판단 형식은 개별자인 주어와 일반적인 성질인 술어 사이의 관계이다. 이 판단형식 자체의 내용은 개별자와 일반자의 관계이다.

이런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정언판단 형식과 구분된다. 이 정언판단의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봄꽃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문법적 형식으로만 보면 질적 긍정판단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를 보면 후자의 경우 주어는 개별자가 아니라 일반자(즉 ‘진달래’)이다. 그리고 술어는 유적 일반자(‘봄꽃’)이다.

이처럼 구체적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 형식 자체가 즉 범주가 다른 범주와 지닌 차이가 곧 판단 형식의 내용이다. 이런 판단 형식은 직접적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이미 자체 내 모순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개별자와 일반자가 대립하니, 이 양자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미 그 자체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런 모순에 부딪혀서 다른 범주 즉 다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 절대적 형식은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내용을 갖거나 실재성을 갖는다. 개념은 진부한 공허한 동일성이 아니므로 자신의 부정성이나 절대적 규정이라는 계기 속에 구별하는 규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말해 논리학의 내용은 절대적 형식의 그런 규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절대적 형식을 통해 스스로 정립한 것이며 따라서 또한 그 자신에 적합한 내용이다.”(논리학 2부, GW12, 25)

어떤 판단 형식 속에 내재하는 모순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에 아직 경험이 제한되어 있을 때 판단 형식은 통일성을 지니고 그 모순은 감추어지지만, 경험의 발전에 따라서 이 판단 형식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경험의 발전을 통해서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달리 논리적 발전은 이런 경험의 발전을 의식 내에서 즉 현재 의식의 평면 위에 투영된 방식으로 겪을 뿐이다.

5)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판단 형식 그 자체의 내용이 판단 형식과 부딪히는 모순이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의 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헤겔은 이점을 진리의 이념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진리는 알다시피 대상과 개념의 일치이다. 논리적 범주는 구체적 내용이 없는 일반적 형식이므로 이 일반적 형식에 관해 진리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 자체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면, 판단 형식과 그 내용 사이의 모순이 성립하고 거꾸로 양자의 일치인 진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논리적 범주도 형식과 내용, 개념과 실재성의 일치인 진리를 향해 나간다. 논리적 범주 역시 진리를 향해 생동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생동적 운동은 모순을 겪어나가는 운동이다.

“논리학은 절대적 형식의 학문이므로 이런 형식성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형식에 적합한 하나의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런 요구는 논리적으로 형식적인 것이 순수한 형식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참된 것은 순수한 진리 자체이어야 하면 할수록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적인 것은 자체 내 규정이나 내용에서 훨씬 풍부한 것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작용력을 지닌 것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27)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

1)

앞에서 헤겔의 ‘개념’이 논리적 범주로서 다른 범주와 구별되는 내용적 의미를 살펴보고 동시에 일반적으로 논리적 범주가 지닌 의미가 형식 논리학에서의 의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살펴보았다.

이제 개념의 일반적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이르렀다. 그것은 곧 개념이 선험적 통각 즉 ‘주체’라는 주장인데, 이를 위해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칸트에서 주체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의 맥락으로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비판이 가진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데 이는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서술했지만, 여기서 되풀이된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그 체계를 그 체계 밖에서 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은 비판하는 철학이 전제하는 근본 규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비판받는 철학은 자기의 근본 규정을 고집하면서 비판하는 철학의 근본 규정을 거부하니, 비판은 마치 적이 없는 곳에서 싸움을 전개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반박은 적의 힘 속으로 들어가서 적의 힘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진을 치는 것이어야 한다. 적을 적 자신 밖에서 공격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권리를 보유하는 것은 분투하는 것이 아니다.”(논리학 2부, GW12, 15)

그러므로 진정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적이 진지를 차린 곳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내부에서 무너뜨려야 한다. 이것은 곧 그 체계 자신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스스로 부정되는 것이며 즉 그 체계 자신이 유래한 특수한 원리에 대한 부정이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특정한 부정성[bestimmte Negation]’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 더 일반적인 체계가 제시되고, 지금까지의 체계는 그 일반적 체계의 한 부분으로 포함된다. 헤겔은 스피노자 체계에 대한 비판도 이런 내적인 부정, 즉 ‘특정한 부정성’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2)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헤겔은 이미 본질론에서 ‘절대자’ 개념을 논하면서 어떻게 스피노자가 한계를 드러내는지 보여주었다. 거기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는 출발점에서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원리로 제시했으나, 곧이어 이런 실체를 모든 규정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으로 순수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지닌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 개념으로 발전했다. 라이프니츠는 자기를 산출하는 표상 개념을 통해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으나, 그로서는 이런 모나드가 개별적이며 따라서 이런 모나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비판을 넘어서 헤겔은 실체는 곧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통해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헤겔은 이런 주체라는 개념이 곧 칸트의 순수 통각 개념으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은 선험철학이며 여기서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범주를 통한 통일이다. 이런 통일을 통해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다양이 통일되면서 객체가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주관 속에 있는 범주와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대상이 통일되면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의식의 주관적 통일]에 대립하여 표상의 객관적 규정이 지닌 원리는 통각의 선험적 통일이라는 근본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규정이라고 할 범주를 통해서 주어진 표상의 다양이 규정되니, 이 다양은 의식의 통일로 이끌려진다.”(논리학 2부, GW12, 18)

“이와 같이 대상이 정립되면서 대상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거나 객관적인 대상으로 된다. 따라서 대상은 개념 속에서 이런 객관성을 가지며 이 개념은 대상이 수용되는 자기의식의 통일이다. 따라서 대상의 객관성 또는 개념은 그 자체 자기의식의 본성일 뿐이며 주관 자체와 다른 계기나 규정을 가지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8)

직관의 다양을 통일하는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그러므로 대상을 정립하는 주체의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에서 비로소 ‘개념’으로서 주체가 출현했다고 보며,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이런 선험적 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며, 그 자신을 선험주의자라고 자처하기에 이른다.

3)

칸트의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곧바로 의문에 부딪힌다. 통각의 통일은 결국 주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현상 세계를 산출하기는 하지만, 물 자체를 인식하는 객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헤겔이 직관의 다양을 선험적 통각이 통일하면서 객체에 이른다고 말한 것은 칸트에 대한 오독이 아닐까?

바로 여기서 칸트와 헤겔의 차이점, 헤겔이 칸트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오히려 칸트가 참다운 철학의 원리 즉 개념과 주체에 이르렀으면서도, 다시 이를 내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칸트가 선험적 통각의 개념 즉 범주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것을 마치 ① 선험적 통각의 범주가 마치 하나의 좌표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직관의 다양을 그 주어지는 모습에 따라(즉 직관의 계기와 동시성 사이의 관계 즉 도식) 이런저런 범주에 할당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여기서 직관의 다양과 범주가 통일되기는 하지만, 이 통일은 다만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음양의 축을 설정해놓고 모든 주어지는 것을 이런 음양의 좌표축에 할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좌표축과 대상이 결합하기는 하지만, 이 결합은 외면적인 것에 그친다.

사실 무엇이든 이 음양의 좌표축에 따라서 할당할 수 있으니, 이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땅은 모두 붉게 칠하고 하늘은 모두 푸르게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나중에는 밤에 모든 소가 까맣게 보이듯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색으로 칠해질 수도 있다.

4)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면, 통각의 선험적 범주는 스스로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 아닌 ② 공허한 형식적 개념으로 다시 떨어진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생각은 칸트 자신이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원리와 모순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헤겔이 보기에 이런 선험적 통각의 원리에 따르면 범주가 자신의 대상을 스스로 산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이런 방식에서는 독자적인 공허한 형식이며 이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앞에서와같이 주어진 내용을 통해 실재성을 얻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런 내용을 추상하여 즉 그 내용을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개념에서 보면 다만 쓸모없는 것으로 제거한다.”(논리학 2부, GW12, 20)

결국, 칸트는 직관의 다양이 일정한 좌표축에 할당된다고 보았으며 선험적 범주가 직관을 규정하는 것은 이런 할당에 한정하면서, 헤겔로 볼 때 칸트가 범한 가장 중요한 실책은 ③ 반성 개념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즉 칸트는 선험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12개의 판단 형식 즉 범주를 제시했다. 이 범주는 지성이 가지고 있는 범주인데, 지성은 판단의 능력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험적 통각 속에는 또 다른 능력이 있으니 곧 추리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런 이성의 능력에 속한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인데,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이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의 역할을 다만, 순수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하는 부록에 잠깐 언급했을 뿐이다.

“칸트는 다만 감정과 직관만 지성 앞에 둔다. 우선 그는 이미 그 자신의 이런 계단화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그 단서는 곧 그가 반성 개념에 관한 하나의 논문을 선험 논리학이나 지성론의 부록으로서 덧붙인다는 데 있다.이 반성 개념의 영역은 직관과 지성 사이에 그리고 존재와 개념 사이에 놓여 있는 영역[즉 본질론의 영역]이다.”(논리학 2부, GW12, 19)

직관의 다양이 범주에 할당된다는 칸트의 입장은 결국 ④ 범주 전체를 대상에 대해 외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범주 전체는 그 어느 것이든 그 너머에 물 자체가 존재하게 되며, 이런 물 자체에 이 범주를 적용할 수는 없다. 만일 물 자체에 이런 범주를 적용하는 순간 여기서 이율배반이 나오게 된다.

“칸트는 이성의 범주에 대한 태도는 다만 변증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사실 이 변증법의 결과를 다만 전적으로 무한한 무인 것으로서 파악하니, 이를 통해 이성의 무한한 통일은 또한 여전히 종합을 잃어버리고 이로써 출발점이었던 사변적이고 진정한 무한한 개념을 잃어 버린다.”(논리학 2부, GW12, 21)

5)

결론적으로 칸트는 출발점에서는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했으나 곧 이를 단순히 범주가 대상에 할당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의 출발점을 부정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한 측면에서] 개념은 인식에서[선험적 인식] 객관적인 것으로서 제시되었으며 따라서 진리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개념과 같은 것은 어떤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실재성은 주관에 대립하는 객관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면서 그와 같은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성을 끌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9)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상호작용과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상호작용과 개념

1)

헤겔은 개념론에 들어가기 전에 ‘개념 일반에 관해’라는 글을 붙인다. 아마 개념론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서문은 약 19쪽에 달하니 1부 객관 논리학 앞에 붙인 부분(‘Vorrede’ 4쪽, ‘Einleitung’ 15쪽, ‘Anfang der Logik’ 8쪽)에 못지않게 길다. 여기서 헤겔이 다루는 핵심적인 주제는 곧 논리학과 관련하여 칸트 선험철학의 의미와 그 한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논의의 출발점은 논리학(헤겔적인 의미에서 주관 논리학을 의미한다)의 출발점인 ‘개념’(개념에 관한 헤겔의 독특한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 앞으로 헤겔적인 개념에 관해서는 ‘개념’를 사용하고자 한다)의 출현이다. 다른 학문의 경우 그 출발점, 원리는 단순히 전제되며, 이 전제는 이웃하는 학문에서 빌어오거나 더 높은 차원의 학문에 의존한다. 그러나 논리학은 자기의 원리를 다른 어디에서도 끌어올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서 끌어내야 하니, 논리학은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리학의 원리는 마치 유클리트 기하학에서 공리처럼 전적으로 직접 주어지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헤겔은 오히려 논리학의 원리는 모든 존재자 속에 자기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이 구체적 존재를 규정하고 정립하니, 논리학의 근거는 거꾸로 모든 존재자로부터 가장 일반적으로 끌어낸 것이라고 한다. 이 도출의 과정이 논리학의 근거가 생성하는 과정이며, 즉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자기를 정립하는 운동, 즉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과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 즉 개별적 존재에서 일반적 원리로 나가는 운동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 순환한다. 이 순환은 이미 정신현상학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직접적인 것은 매개된 것으로 전환하며 거꾸로 매개된 것은 직접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개념의 생성은 이런 직접적인 생성의 운동을 통해 서술된다. 그러나 개념의 생성이 지닌 의미는 모름지기 생성이 항상 그렇듯이 이행하는 것이 자기의 근거로 반성한다는 것이며 우선 앞선 것이 이행해 들어간 나중의 것이 처음에는 타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 처음의 것이 지닌 진리를 이룬다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1-12)

“추상적으로 직접적인 것은 사실 최초의 것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인 한에서 오히려 매개된 것이며 그러므로 이 직접적인 것이 진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면, 그 토대는 이 매개된 것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논리학 2부, GW12, 11)

이런 관점에서 주관 논리학의 원리는 앞에서 객관 논리학에 존재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다시 절대적 관계로, 여기서 실체관계, 인과 관계, 상호작용을 거쳐 생성된다고 한다. 헤겔은 이 과정을 다시 한번 간략하게 서술한다.

2)

헤겔을 따라 이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자면, 이렇다. 즉 실체관계는 서로 무차별한 우발적 존재의 관계였다면, 인과 관계는 개체가 각자 자립적인 동시에 타자와 관계한다. 그 결과 인과 관계의 연쇄가 출현하고 마침내 상호 인과 관계 즉 상호작용이 출현한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원인(능동적 실체)과 결과(수동적 실체)는 상호 교체된다. 원인의 작용에 의해 결과는 자신의 전제된 직접성을 벗어나 정립된 존재가 되면서 원인이 된다. 이 결과를 원인으로 해서 원인도 전제된 직접성을 벗어나 정립된 존재 즉 원인이 된다.

“능동적 실체는 작용을 통해 즉 자기가 자기를 자기 자신의 반대물로 정립하는 가운데 즉 그와 동시에 이런 전제된 타자 존재 즉 수동적 실체를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 원인이나 근원적 실체로서 자기를 계시한다. 거꾸로 이렇게 작용이 가해짐으로써 정립된 것은 정립된 것으로,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되며 따라서 수동적 실체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 계시되고 원인은 자기 자신의 타자 속에서 전적으로 다만 자기와 합일할 뿐이다.”(논리학 2부, GW12, 13)

이 두 가지 상호적 인과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이 관계를 상호작용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원인은 역시 자기를 결과 속에 정립하면서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되니, ‘자기 관계하는 존재자’(일반성)가 된다. 반면 결과는 근원적인 원인에 대립하는 것이니 이미 부정적인 존재인데, 원인에 의해 부정되면서 자기 부정적인 것 즉 가상으로 되니,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개별성)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측면 즉 타자가 자기에 동일하게 관계하는 것이거나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의 반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동일성의 관계와 부정성의 관계는 동일한 것이다. 실체는 이제 자기의 대립물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이것이 두 가지로 정립된 실체의 절대적 동일성을 이룬다.”(논리학 2부, GW12, 13)

이런 상호작용을 매개로 해서 가능성으로서 절대자가 실제성으로 실체가 되며, 이런 매개는 자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기에 항상적으로 일어나니 절대자의 실현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실현된 절대자가 곧 실체다.

이렇게 절대자가 실현된 실체는 필연적 실현인 한에서 무조건적인 것이니 곧 자동적인 것[automatische]으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우연한 것이다. 이런 실체가 곧 ‘개념’으로 규정된다. 이 ‘개념’이 곧 앞으로 전개될 개념론의 출발점 곧 원리가 된다.

3)

앞에서 말했듯이 개념은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매개로 한다. 이 관계를 목적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면, 양자의 통일성으로서 가정된 절대자가 양자로 분화되며, 이런 분화가 다시 통일되어서 양자의 통일적인 관계 즉 ‘실체’가 출현한다.

이런 통일성으로 가정된 절대자 즉 목적으로서 절대자가 곧 개념이니, 개념은 이미 이런 관계 속에 그리고 이 관계를 통해 전개되는 운동 속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여기서 목적으로서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개체로 분화되고(개념이 부정된 것, 정립된 것) 이 분화된 개체의 상호 관계를 통해(부정된 것의 부정, 정립된 것의 정립됨) 실현되니 이는 과정은 하나의 이중 부정 운동으로 서술할 수 있다.

우선 출발점에 있는 개념은 장차 분화될 가능성을 지니지만, 아직은 단순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의 실현은 이중적인 부정성(부정의 부정)을 통해 회복되는 자기 관계(일반자)이다. 거꾸로 매개가 되는 개체는 개념이 부정된 것이지만, 타자와 관계하면서 다시 이것이 부정되는 것이니, 자기 부정성 또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개별자)이다.

그러므로 일반자나 개별자는 각자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 있다. 즉 일반자의 자기 관계 속에는 자기 부정성으로서 개별자가 들어 있으며, 개별자의 자기 부정성 속에는 이미 일반자의 자기 관계가 들어 있다

“개념 규정성의 각각은 총체적인 것이며, 각자는 타자의 규정을 자기 내에 포함하며 그러므로 이 총체적인 것은 전적으로 다만 하나이지만, 동시에 이와 같은 통일성은 자기 자신을 이러한 이원적인 것이라는 자유로운 가상으로 분화한다. 이런 이원화는 개별자와 일반자로 구별되는 가운데 완전한 대립으로 나타나지만, 이 대립은 그에 못지않게 가상이기에 하나가 파악되고 언표되면 그런 가운데 다른 것도 직접 파악되고 언표된다.”(논리학 2부, GW12, 16)

4)

헤겔에서 이 ‘개념’으로 지칭되는 것은 아주 특정한 것이니 그 출발점은 실체이다. 즉 생명체의 집단(암수 결합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개념의 단초, 출발점에 지나지 않으며 본래 개념은 주관이 출현하면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겔은 주관을 흔히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단순히 자기 동일성에 머무르는 것, 데카르트적 에고로 파악하지 않는다. 이 주관은 순수한 자기의식 즉 칸트가 말한 통각에 해당하는 것이니, 이 자기의식은 처음에 순수하게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자기를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하여 대립하는 가운데 다시 양자를 통일하여 자기 관계하는 통일에 이른다. 이런 전개 방식은 개념의 전개와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니, 이 주관이야말로 개념의 구체적인 예가 된다.

“개념은 그 자체 자유로운 현존에 이른 한에서는 주관이나 순수 자기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주관은 사실 개념이며 즉 특정한 개념이다. 그러나 주관은 순수한 개념 자체이며 개념으로서 현존하기에 이른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7)

앞에서 개념의 단초인 실체 즉 암수 관계에서는 아직 상호작용은 불완전하다. 암수 관계에서 개념적 실체는 아직 자동적인 우연성에 머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암수 관계는 각자 개별적인 생명체이면서 성적 관계에서만 상호작용이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실체는 아직 개체에 내면적으로 머무르는 잠재적인 개념이다.

반면, 주관에 이르게 되면, 개체의 사회적 상호작용적 관계가 출현하며 상호작용은 전면적으로 일어나며 그 관계는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호작용으로 성립하는 실체는 개체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사회가 된다. 이런 주관에 이르러서 본격적인 개념이며 동시에 실현된 개념이다.

“주관은 순수한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이며 이것은 직접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주관이 모든 규정과 내용을 제거한 채 한계 없는 자기 동일성의 자유 속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은 일반성이며 통일이어서 다만 추상작용으로 나타나는 그와 같은 부정적 태도를 통해 자기와 통일을 이루고 이를 통해 모든 규정된 것을 자기 내에 해소한 채로 포함하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7)

5)

이와 같은 ‘개념’은 논리적인 범주 가운데 하나이다. 12개 판단 형식은 각기 독자적인 논리적 범주를 이루는데, 헤겔에서 ‘개념’은 이런 논리적 범주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다. 즉 ‘실체’ 범주에서 단초적으로 ‘개념’이 출현하며 본래적인 ‘개념’은 비로소 ‘주체’에 이르러 완성된다.

지금까지 논의한 ‘개념’은 이런 최종적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은 헤겔의 ‘개념’이 그 앞에서 다룬 논리적 범주 ‘질’이나 ‘양’ ‘본질’ 등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논의이다. 즉 ‘개념’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논의다.

그런데 논리적 범주 중의 하나로서 ‘개념’은 헤겔의 다른 논리적 범주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통 규정을 지닌다. 헤겔에서 모든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은 형식상 내용을 자기로부터 규정한다.

그 때문에 헤겔은 앞에서 제기한 ‘개념’에 관한 논의에서 이제 방향을 돌려, 판단 형식으로서 논리적 범주가 지닌 근본적인 특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을 통해 그는 그 자신의 주관 논리학이 기존의 형식적 논리학과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그를 따라 우리도 이제 논리적 범주의 형식적 의미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헤겔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 곧 칸트이므로 칸트의 기여와 한계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지금 다루는 개념에 관한 일반론의 핵심 주제이다.

기존 논리학에서는 논리적 범주와 일반적 개념 사이의 구별에 주목하지 않는다. 소의 개념이나 꽃의 개념은 추상적인 일반성을 의미한다. 이 추상적 일반성이 구체적 내용과 무관하고 외면적인 형식이듯이, 마찬가지로 논리적 형식 즉 판단 형식이란 구체적인 다양한 판단 내용과 무관하다.

기존 논리학에서는 판단의 형식 즉 논리적 범주는 질과 양, 긍정과 부정을 교차한 네 가지 판단 형식밖에 없다. 판단 형식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긍정과 부정, 개별과 일반이며, 판단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여기서 부정이니 양화니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논리적 추론 형식즉 대당관계라는 직접적 추론 형식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확장해서 12개의 판단 형식이나 범주를 제시한다.

칸트가 이렇게 판단 형식을 확장한 것은 단순히 종류를 확장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이른바 선험철학의 원리를 통해 이런 판단 형식이 지닌 의미 자체를 형식 논리학과 근본적으로 구별해 새롭게 부여했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객관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객관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

1)

헤겔 논리학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헤겔 논리학 1부(존재론, 본질론)는 1813년 부활절 직전 발간되었다. 논리학 2부(개념론)이 발간된 것은 1816년 10월 초였다. 2부가 발간되는데 무려 3년 이상 지체된 것이다.

그는 개념론 앞에 ‘일러두기[Vorbericht]’(1816년 7월 21일 작성)에서 지연된 책임이 “그가 맡은 직책이나 다른 개인적 사정으로 산만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다”(논리학 2부, GW12, 6)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뉴른베르크에서 김나지움 교장을 하고 있었으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의 번잡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책임이라면 1부 논리학 작성 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이 일러두기에서 개념론을 작성하는데 1부를 작성하는 데서 부딪힌 것과는 다른 어려움을 호소했는데, 그런 어려움이 그의 길을 더디게 했던 것이 아닐까?

헤겔의 논리학 1부는 여기에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논리학 2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확립된 논리학의 주요 내용(판단론, 추리론)이 들어 있으니, 논리학이라 불러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그는 1부를 쓸 때는 “발판이 되거나 재료를 주고 전개할 길잡이를 보장할 만한”(논리학 2부, GW12, 5) 이전 철학자들의 노력을 발견할 수 없어서 그야말로 황무지에 아무런 설비도 없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어려움에 부딪혔다고 한다. 그러나 아예 아무것도 없는데 새로운 것을 짓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2부 개념론에 이르면, 이전 논리학의 “완전히 완성되고 심지어 석화된 재료가” 마치 장애물처럼 깔려 길을 막고 있어서 게다가 저마다 이전 시대에는 진리라는 영예를 부여받은 것이니 “이를 유동화해서 그와 같은 죽은 소재에 생동적인 개념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고 한다.(논리학 2부, GW12, 5)

2)

헤겔이 부딪힌 어려움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큰 문제는 아니지만, 어떻든 논리학 3부 개념론은 한 사년 뒤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진짜 문제는 이런 논리학이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내용을 담은 부분 다음에 배치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몇 가지 단서를 좇아가 보면, 어느 정도 그 이유가 짐작은 된다. 헤겔은 밤베르크 시절 니트함머로부터 학생들을 위한 논리학 교과서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이게 그가 논리학을 작성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이다. 이에 대해 답장하면서(1808년 5월 20일) 자기의 철학적 견해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이 답장에서 그는 기존 논리학에 관해서 강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그것은 그런 방식으로 지속할 수 없는 것”(논리학 2부, GW12, 323)이라고 평가하며 기존 논리학의 내용이라면 “두 장[오늘날의 A4용지가 아니라 당시 작성의 기준이 된 전지를 의미할 것이다]이면 충분히 서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상의 내용이라면 “심리적으로 느끼는 가련함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논리학 2부, GW12, 324)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미 그는 1801/2 예나 시대에서부터 기존 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개편하려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807년 발간된 그의 예나 시대 체계화 기획 2권을 보면, 이런 시도가 눈에 띈다. 이미 여기서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연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1. 논리학, 2. 형이상학, 3. 자연철학을 다루는데, 그 가운데 논리학은 1) 단순 관계(질, 양, 무한성)와 2) [절대적] 관계로 나누어지며, 그중 [절대적] 관계는 다시 ① 존재[실체] 관계와 ② 사유 관계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존재 관계는 논리학[GW11] 1부 객관 논리학 본질론 마지막 ‘절대적 관계’와 일치하며, 사유 관계가 앞으로 다룰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 1편의 판단, 추리론과 일치한다.

형이상학은 사유 법칙(동일율이나 배중율, 모순율)과 전체로서 세계나 영혼을 다루고 있다. 헤겔은 사유 법칙은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 본질론 1편에서 다루고 전체로서 세계나 영혼은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 2편에서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룬다.

이상의 편제를 보면, 대 논리학에서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에 속하는 부분이 예나 시대에서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걸쳐 흩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이를 통해 한편으로 이미 헤겔이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연결해서 사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아직 나중에 형이상학에 가까운 객관 논리학과 기존 논리학에 가까운 주관 논리학이라는 구별이 확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자기의 철학에 기초한 새로운 논리학을 발간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이미 니트함머의 권고를 받은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시도의 정체는 1813년 논리학 1부가 발간된 이후 등장한 출판사 광고문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광고문에 따르자면, 새로운 논리학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예리함을 끝까지 함께 하며”

② “이를 자기의식으로 성장한 시대 정신에 적합한 형태로 고양하고”

③ “진정하게 해명된 형이상학을 통해 일찍이 너무 성급하게 추방된 신비를 철학에 다시 부여하고”

④ “철학에 본래적인 원리와 고유한 방법을 확신하게 하며”

⑤ “이성에 그 오래된 영원한 권리인 진리에 대한 자립적인 생산자라는 지위를 새로이 바치는 것”(논리학 2부, GW12, 327)

펠릭스마이너 판 논리학(GW12)의 편집자에 따르자면, 이 광고문의 작성자가 누군지는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의 구절을 보면 헤겔 논리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헤겔 논리학을 나오자 말자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헤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한다. 아니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정말 이렇게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위의 광고문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광고문의 구절은 헤겔 논리학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는데, 한 가지가 눈에 뜨인다. 즉 자기의식 시대에 적합한 형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의식 시대란 다름 아닌 칸트가 제시한 선험철학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후진적 독일에 살았던 헤겔로서는 그 시대 원리인 선험철학의 원리가 하나의 시대 정신으로 논리학을 비롯하여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혁명이 달성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정신현상학에서 그는 이 시대를 ‘탄생과 이행의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4)

칸트의 원리에 따르면 사유 범주는 직관의 다양을 구성하여 객관적으로 통일한다. 사유 범주는 곧 존재의 본질을 의미하니 그것이 곧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유 범주를 다루는 논리학은 곧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형이상학이 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읽어보면 판단과 주어, 술어 등의 구조가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서 ‘실체’란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양상’이란 곧 술어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미 나중에 칸트에서 드러나는 “논리학이 곧 형이상학”이라는 주장의 단초가 발견된다고 하겠다.

헤겔은 그런 점에서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함’이라고 보고 위의 광고문에서 보듯이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이 형식화하면서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예리함을 놓치고 있다고 보는 비판적 의식이 담겨 있다.

논리학이 형식화함으로써 논리학은 순수한 필연성의 체계가 되었지만, 대신 공허한 형식적 동어반복에 그치며 그것은 구체적 내용을 상실한 채, 흔히 사유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진리의 인식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마치 공허한 사유의 논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논리학이 다시 진리의 생산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함을 살리는 것이라고 한다. 즉 논리적 구조 속에서 존재의 본질적인 구조를 엿보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그의 시대 철학이 수학에서 방법론을 빌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수는 양적인 것이므로, 양적인 것에서나 적용되지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생명이나 정신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비판하면서 철학은 고유한 방법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철학의 고유한 방법론은 무엇인가, 앞에서 헤겔이 호소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를 생각해 볼 때, 그의 형이상학의 방법론은 바로 논리학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학이 궁극적으로 판단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헤겔의 방법론은 곧 판단 즉 문장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것이니, 어쩌면 헤겔이야말로 언어 철학의 시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5)

논리학이 형이상학 즉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굳이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이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논리학이 전개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헤겔에서 논리학은 추상적 존재가 구체화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가는 생성 또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이다.

논리학에서 처음 출발점인 현존은 가장 개별적인 것이고 가장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적인 근거가 되는 논리적 범주가 아직 등장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존재론이며 이 현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파악하는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그런데 1부 객관 논리학의 마지막에 일반적인 실체가 상호작용을 거쳐 주관적인 개념이 되면서 이제 논리적 범주가 우리 눈앞에 직접 등장한다. 그 결과 여기서부터는 순수한 논리학적 내용이 다루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객관 논리학 대신 주관 논리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생각해 보면 ‘객관 논리학’에서 강조점은 논리학보다는 ‘객관’ 즉 존재론에 있으며, ‘주관 논리학’에서는 강조점이 곧 ‘논리학 자체’에 주어진다.

이상을 통해 헤겔이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으로 구분하고, 주관 논리학에 와서야 비로소 기존의 논리학에서 다룬 내용을 즉 판단과 추론을 다루게 된 이유가 드러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