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29-예술 장르론(2) 예술가의 솜씨[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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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29-예술 장르론(2) 예술가의 솜씨

 

1)

앞에서 정신과 형상 그리고 질료라는 예술의 삼각형에서, 질료가 그 고유한 속성에 따라 예술 장르를 규정한다고 했다. 그런데 질료의 고유한 속성만이 예술 장르의 규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못지 않게 질료를 다루는 예술가의 장인적 솜씨도 중요하다.

물론 장인적 솜씨가 질료의 고유한 속성이 지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어렵다. 장인적 솜씨는 주로 개별 예술 장르의 한계 내에서 기법의 발전을 좌우하기는 하지만, 그 솜씨가 극대화되는 경우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장르를 뛰어넘는 장인적 솜씨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개의 경우 장인의 솜씨는 개별 예술의 발전을 결정하게 된다. 이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개별적 예술의 발전단계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로 규정한다. 헤겔은 주로 조각을 발전과정을 모델로 이런 단계를 설정하는데, 조각이 아닌 다른 예술의 경우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발전 단계라고 생각된다.

 

2)

그 가운데 첫 번째 단계는 거칠고 조야한 상태에 머물러, 아직 예술 이전의 단계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예술가의 솜씨가 서투른 단계인데, 헤겔은 이런 경우 “종종 부수적인 것을 상세하게 다루고 겉치레와 같은 주변적인 것에 대해 세세한 작업에 공을 들이는 인위적이며 난삽한 것으로 나타난다”[1]고 한다.

 

“외적인 것이 복잡하고 잡다할수록, 본래 표현해야 것은 그만큼 미미하며, 곧 정신을 진정으로 자유롭고 생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형식이나 운동에서 볼 때 그만큼 빈약하게 남는다.”[2]

 

이런 서투름은 다른 종류의 서투름과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는 예술적 표현 형식 자체에서 나타나는 서투름이다. 예를 들어 상징적 예술 형식은 고전적 예술 형식에 비해 볼 때 경직되고 비생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자주 상징적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서투름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경직성은 그 표현 형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그 시대의 정신에 의해 규정되는 표현 형식이다.

또 서투름은 자주 고도로 능숙한 예술가에게서 나타나는 아이와 같은 고졸(古拙)성과 혼동된다. 추사 김정희 작품에 나타나는 고절성은 널리 알려진 예가 될 것이다. 헤겔은 이미 그런 고절성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단순한 아름다움으로서 단순성은 즉 이상적인 비례는 다각적인 매개 뒤에나 도달할 수 있는 결과다. … 모든 준비작업과 예비작업이 감추어지고 자유로운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방해 받음이 없이 마치 단번의 주조로 산출된 것처럼 보인다.”[3]

 

3)

거칠고 조야한 단계를 넘어서 질료를 다루는 예술가의 솜씨가 어느 정도 발전하게 되면, 예술적 단계에 진입한다. 그 첫 번째 단계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을 예술적으로 형상화면서 정신적 내용을 우선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헤겔은 이처럼 “사태의 실체적 표현과 만족감을 위해 전적으로 빠져드는” 경우, 예술적 형상은 엄격함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리스 초기의 조각 신상에서 나타나는 엄격함이다.

엄격함은 세부적인 또는 형식적인 손질을 생략하고 정신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려 하기 때문인데, 그 결과 예술 작품의 형상이 이상화된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엄격함을 ‘고요함과 단순성’으로 규정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아름답고 고요한 위대함 속에서 최고의 생동성을 가지니, 그 속에는 무의미하거나 표현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활동적이고 효과적이니, 자유로운 삶의 흥분과 맥박을 보여준다.”[4]

 

이런 예술에서 정신적 내용은 형상의 세부적 형식적 아름다움에 대해 일견 무차별하게 보이니, 마치 예술적 현존[형상]은 “사태[정신]가 베푸는 호의”이며, “사태는 독자적으로는 이런 현존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우리[독자]를 위해 현존으로서 자기를 쏟아 붓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형상은 정신에 대해 잉여일 뿐, 헤겔은 이런 점에서 예술 형상 속에서 들어 있는 ‘내면 그 자체의 고요’는 ‘아름다운 냉담함’, ‘무관심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정신적 내용은 외적 형상의 개별적 세부나 순간적인 운동 속에 사로잡히지 않고, ‘걱정 없이[sorglos]’ ‘자족적[selbststaendig]’으로 머물러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예술은 ‘명랑하며’ ‘생기 넘치는 우미함’, ‘우미[5]의 숨결’을 보여준다.

 

“각 지절은 독자적으로 현상하며,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즐기며 그럼에도 동시에 스스로 겸양하며 오로지 전체의 계기로서 존재한다. 오로지 이것이 개성과 성격의 깊이와 규정성에 넘치는 우미함을 부여한다.” [6]

미의 세 여신-폼페이 유적

 

4)

예술가의 장인적 솜씨가 더 발전하게 되면, 오히려 예술은 퇴보하게 된다. 예술가는 세분적이거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하게 되면서 정신적 내용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을 감상하는 자의 만족감에 우선을 두게 된다.

 

“사람들은 특수성들이 장식, 의도적 삽화로서 추가, 삽입되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태에 대해 우연성들로 머물며, 또한 그 본질적 규정을 관조자나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지니,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것들은 작품을 감상하는 주관성에 아첨한다.”[7]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작품이 미치는 효용성이 강조되면서, “고요하고 자족적이며 명랑하게 표현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며” “관조자를 자신에게 오도록 부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이제 만족감이 아닌 그 반대되는 것도 관심거리가 된다. 즉 “불쾌한 것, 긴장된 것, 거대한 것, 과격한 대비”를 통해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8]

전체적으로 헤겔은 예술작품의 자족성과 효과, 사태 자체와 특수성. “내면의 순수성과 구경꾼에 대한 호소” 사이의 균형을 요구한다.

 

“만일 엄격한 양식의 예술작품이 관조자에게 말을 건넬 뜻이 없이 완전히 자신 안에만 갇혀 있다면 그것은 차갑게 된다. 만일 그것이 지나치게 자신을 벗어나 관조자를 향한다면 그것은 기쁨을 주되 견실함이 없거나, 아니면 그 기쁨은 내용의 견실함, 그 단순한 이해 및 표현에 의한 것이 아니다.”[9]

 

효용성이 강조된 작품에서는 예술가의 솜씨와 감상자의 효과만이 문제가 되고, 예술작품의 바탕이 되는 사태나 정신적 내용은 무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에 주관적 공동체가 형성되니, 감상자는 예술작품의 심판자가 되어, 자신의 허영심이 충족될 뿐이다.

반면 엄격하여 사태만 강조된 경우, 작품은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없으니, 작가가 “예술 작품에 깊이 있는 의미를 집어넣더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경쾌하고 밝게 표출하지 못하니”, 이는 예술가의 “단순한 우울증”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1] 미학강의 2, 264쪽

[2] 미학강의 2, 264쪽

[3] 미학강의 2, 264쪽

[4] 미학강의 2, 266쪽

[5] 헤겔은 여기서 ‘Gratia[독어: Grazie이태리어]’와 ‘Zierlichkeit[독일어]’를 구분한다. 두 단어는 우리 말로 ‘우아’로 번역할 수 있어서 혼란을 준다. Gratia(일상적으로 사용되면 감사라는 의미도 지닌다)는 미의 여신 Charites의 로마적 표현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는 “만족을 주려는 각종 시도와는 철저히 자유로운 것”이며 반면 Zierlich는 만족을 주는 것이며 ‘애교적 즉 귀엽고,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에 가깝다. 그 차이 때문에 Gratia는 ‘우미’로 번역되고, Zierlichkeit는 ‘우아’로 번역되었다. 참고로 Charites는 그리스 민족 이주 전 그리스 반도 거주민들이 지닌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되며, 강이나 샘물과 연관된 풍요로운 정령이라는 뜻을 지닌다. 참고로 미의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 의해 세 여신으로 분화되는데, 환희를 의미하는 에우프로쉬네[Euphrosyne]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탈리아[Talia], 광휘를 의미하는 아글라이아[Aglaia]이며, 세 여신의 모습은 미술사에서 자주 형상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보티첼리의 미의 여신이다.

[6] 미학강의 2, 267쪽

[7] 미학강의 2, 267-268쪽

[8] 미학강의 2, 269쪽

[9] 미학강의 2,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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