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25-근대 모험 소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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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25-근대 모험 소설

 

1)

헤겔이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두 번째 유형으로 소개하는 것은 근대 모험 소설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다. 그 초기 형태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런 형태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나, 타소의 <해방된 예루살렘>과 같은 서사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마지막으로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작품까지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성격 예술이 내면적인 성격의 탐구를 지향했다면, 지금 거론된 작품은 사건이 중심이 된다. 사건은 끝없이 전전반측하니, 한마디로 우연성의 유희라고나 할 것이다. 사건이나 현실은 상징주의 시대나 고전주의 시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성을 상실하고 탈신격화되니, 그것은 우연적이며, 그 자체로서는 개별적인 사건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사건과 현실은 상호 복잡하게 얽혀서 상호작용하면서 전체의 유희를 이루어낸다.

 

성격 예술에서 탐구되는 성격이 한편으로 무한성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성을 지니면서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두 측면을 잘 보여주었다면, 모험을 다루는 작품 역시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한편으로 사건의 우연적 개별성을 남김없이 그려내는 가운데 리얼리즘적 측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에서 우연성의 유희를 통해 그 배후에서 이를 지배하고 있는 힘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현실의 유희가 배후의 힘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낭만적 성격을 지닌다.

 

2)

성격 예술이 기사도 문학과 비교되었듯이, 모험 소설(또는 서사시) 은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그리는 종교 예술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모험 소설이나 그리스도 수난사는 모두 사건이 운동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본질인 정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차이를 무시할 수 없으니, 우선 그리스도 수난사의 경우에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면서 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모험소설의 경우는 부정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일어난다. 즉 사건이 서로 충돌하면서 상호 부정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런 부정적 운동 과정을 통해 드러내는 것에서도 차이가 있다. 종교 예술의 경우는 곧 전능한 창조주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우연적 사건의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세속적인 사회적 힘일 뿐이다. 그 힘은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의미할 것이다.

 

3)

헤겔은 이런 모험 소설을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류는 특정한 목적을 지닌 운동을 전개하지만 이런 목적은 현실 앞에서 좌절되고 만다. 예를 들어 십자군 원정을 다루거나, 성배를 찾거나, 사랑과 명예나 정의를 추구하는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정신의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어떤 개인의 우연적 심정에서 맹목적으로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우연적인 현실에 부딪혀,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결과를 자아내고 만다. 여기서 작가는 주인공의 모험을 진지한 심정으로 응원하며 그 허망함에 관해서 자각하지 못한다.

 

두 번째 부류는 이와 같은 우연성의 충돌을 작가가 높은 곳에서 초연하게 바라보면서 그 희극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작품이니, 대표적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들 수 있다. 돈키호테 자신은 자신의 기사도적 사명을 진정으로 믿으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돈키호테의 모험을 소설해 나가는 작가는 그의 주인공을 초연하게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애정을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롱하면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풍자적 작품에서도 현실을 지배하는 진정한 힘을 발견할 능력은 작자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다.

세 번째 부류로 헤겔은 ‘소설적인 것[Romanhafte]’을 드는데, 개인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세속적 이상(예를 들어 자유로운 국가나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지만 이런 이상은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자체가 하나의 우연적인 것이니 마찬가지로 우연적인 현실과 충돌하면서 난파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소설적인 것은 성배를 찾거나 사랑을 찾는 첫 번째 모험 소설과 유사하다.

 

하지만 첫 번째 모험 소설에서 작가를 대변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목표를 진지하게 믿음으로써 현실 앞에서 좌절되었을 때, 이를 비극적으로 파악할 뿐이다. 반면 세 번째 모험 소설에서 주인공은 우연적 유희 속에서 현실과 충돌하면서 난파하지만 이런 난파 속에서 마침내 그의 시대를 지배하는 진정한 정신적 힘에 대해 자각에 이르니,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은 일종의 수업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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