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 24-근대 성격 예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Spread the love

헤겔미학산책 24-근대 성격 예술

 

1)

헤겔은 낭만주의적 예술의 세 번째 권역을 리얼리즘적 예술로 규정하면서, 여기에서 등장한 첫 번째 유형을 성격, 정확하게는 ‘자립적인 개인의 성격’을 다루는 예술로 규정한다. 성격 예술은 개인의 성격을 다루는데, 그 성격은 내용상 특수하다. 여기서 한 개인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개인과 성격은 직접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개인의 성격은 불변하며, 굳건하며, 현실에 구애되지 않고 확고하게 실행되니, 헤겔은 이를 ‘자립적’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자립적 성격을 헤겔은 ‘생동적 개성’, 또는 ‘주관적 무한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자립적이고 확고한 즉 무한한 성격이 우연적 개인과 그가 처한 우연적 현실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곧 성격 예술의 비극성을 결정하게 된다.

 

이런 성격 예술이 기사도 문학에서 바로 이어진다는 것은 성격 예술의 효시라고 할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가 지옥에 들어가 만나는 첫 번째 인물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바로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인데 그들은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이면서 불륜을 저질러 지옥에 들어왔다. 단테가 그들에게 어찌하여 사랑을 허락하게 되었는가를 묻자 프란체스카는 대표적인 기사도 문학에 속하는 랜슬롯과 기네비에르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들이 입맞춤하는 장면에서 서로 입맞추게 되면서 그런 결과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2)

성격 예술이 기사도 문학과 유사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위의 사실이 아니더라도 명확하다. 왜냐하면 둘 다 인간의 내면성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무한한 내면성이 개별적인 것과 직접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기사도 문학에서 무한한 사랑이 어떤 우연적 개인을 향하고 있듯이 성격 예술에서도 자립적인 성격이 어떤 우연적 한 개인과 결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기사도 문학과 성격 예술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기사도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내면성은 명예와 사랑, 충성과 같은 도덕적 내면성에 한정되고 있으며, 그런 내면성이 지향하는 대상은 아직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서술되지 않고 상당히 추상적으로 서술되어서 누구라도 대체될 수 있을 정도이어서, 그저 귀부인고 그저 고귀한 기사일 뿐이다.

 

그러나 성격 예술의 경우는 우선 다루어지는 성격이 이제 도덕적 내면성을 벗어나서 현실화된다. 예를 들어 오델로의 질투와 맥베스의 야심, 리어 왕의 어리석음이 다루어지니, 이제 성격은 아주 풍부하고 매우 다양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성격을 지닌 인물과 그가 처한 현실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과 현실을 닮은 모습을 지니게 되면서 리얼리즘적인 서술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성격이라는 표현을 예컨대 이탈리아인들이 가면을 쓰고 표현했던 그러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가면들도 특정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관적 개성이 빠진 이러한 규정성의 추상과 일반성을 보여 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현 단계의 성격들은 각각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고유한 성격, 하나의 독자적인 전체, 하나의 개별적 주관이다.”[1]

 

기사도 문학에서 무한한 내면성과 우연적 개별성 사이에 충돌 역시 불가피하지만, 여기서 그 충돌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고 모호하게 그려지고 결국 도덕성의 승리라는 상투적 귀결에 이르고 만다. 그에 반해 성격 예술에서도 자립적이고 확고한 성격이 그것과 직접 결합되어 있는 우연한 개인과 현실적 처지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으니 충돌은 명확하게 인식되고 그것의 결과는 도덕성의 승리가 아닌 현실을 지배하는 필연적 힘의 승리일 뿐이다.

 

“그러한 성격의 세계가 한편으로는 제한적이며 이로써 추상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우연한 것으로 현상한다는 사실과 관계할 뿐이다.”[2]

 

3)

헤겔은 근대 성격 예술이 그려내는 성격에 세 가지 성격이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특칭적 성격이다. 구체적으로는 특수한 성격인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델로의 질투와 맥베스의 야심, 리어 왕의 어리석음이다. 이런 성격은 특칭적인 것이기에 현실 속에서 이런 성격이 관철될 경우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으니, 여기서 비극적 운명이 출현한다.

 

이런 비극적 운명은 그리스 고전 비극에서처럼 자신에 대립하는 실체적인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고전적 영웅은 자신의 실체적 힘을 위해 자기에 대립하는 실체적 힘에 기꺼이 대항하다가 몰락한다. 반면 근대적 인물에서 운명은 무한한 주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니, 자기 자신의 내면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그를 덮치는 운명은 그 자신이 초래한 것이지만 그 자신은 아직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니 헤겔은 이런 자각되지 못한 운명을 ‘팍툼[Factum]’이라고 규정한다.

 

4)

성격 예술에서 헤겔이 두 번째로 다루는 성격은 아직 무규정적인 총체적인 성격이다. 구체적으로는 햄릿이나 줄리엣과 같은 성격인데, 그들은 아직 어떤 특수한 성격으로 규정되기 이전의 상태 즉 무규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후일 특수한 성격으로 발전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행위가 이리 불쑥 저리 불쑥 솟구치면서 이런 다양한 성격의 가능성 속에서 모호한 채로 흔들리고 있다.

 

마침내 어떤 순간, 그들의 총체적 성격은 어떤 특수한 성격으로 굳어지면서 그 성격은 단호하고 불꽃같은 방식으로 폭발하니, 그 순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들의 단호한 행위는 그때까지 유동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결정지으면서 기존의 상태를 완전하게 몰락시키고 만다. 헤겔은 총체적 성격의 두 측면을 예를 들어 햄릿과 줄리엣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며 아름답고 올곧은 심정으로 객관적인 확실성을 찾지만 그러한 확실성을 얻은 뒤에도 그는 굳은 결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정황들에 끌려다닌다.”[3]

 

“이 일체의 것은 겹겹의 꽃잎들이 단숨에 펼쳐지는 장미의 온전한 첫 개화인 듯 내적으로 지극히 건실한 영혼 근거의 무한 유출인 듯 현상한다.”[4]

 

5)

헤겔이 성격 예술의 마지막 유형으로 들고 있는 것은 헤겔의 말대로 하면 ‘실체적 관심을 지닌’ 성격이니, 이는 예를 들어 실러의 희극에 나오는 시민적 덕성을 지닌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사도적 덕성과 마찬가지로 시민적 덕성조차도 비록 일반적 덕성에 속하더라도 하나의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인 한에서 또 하나의 특수한 성격에 불과하니,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비애극에서 지고지상의 인물이 알고 보면 아주 흔히 자신을 궤변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생각밖에 없는 사악한 떠버리 야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5]

 

헤겔의 비판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곧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에서 나오는 포사 후작이다. 포사 후작은 왕세자 돈 카를로스와 영원한 우정을 맺은 친구이다. 포사 후작은 네델란드의 자유를 위해 위해 투쟁하는 시민적 덕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갑자기 포악한 왕인 펠레페 2세의 총신이 되며, 처음에는 오해에서 카를로스를 체포하며, 나중에는 카를로스를 구하기 위해 펠레페에게 거짓말하면서 덕분에 왕에 의해 살해된다.

 

포사 후작의 변덕은 결국 카를로스와 왕비까지 몰락시킨다. 포사의 죽음이 과연 숭고한 비극일까? 시민적 덕성을 지닌 인물이 현실 속에서 범하는 변덕은 시민적 덕성이 또 하나의 특수한 성격이라는 헤겔의 말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6)

일반적 덕성을 지녔지만 특수한 성격에 반해서 헤겔은 근대 성격 문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인물을 모범으로 들고 있다. 헤겔은 특수한 성격을 지닌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심지어 폴스태프와 같은 비속한 인물조차도 내적으로 보편성을 지닌다고 한다.

폴스태프는 셰익스피어의 <윈저 성의 명랑한 부인들>(1602년)이라는 소극의 주인공이다. 간단하게 그 줄거리를 소개한다. 전쟁이 끝나고 윈저로 돌아온 존 폴스태프 경은 배 나오고 뚱뚱하고 비겁하고 변명 잘하고 떠벌리기 좋아하고 낭비벽 심하고 무일푼인 술주정꾼이다. 그는 남편 있고 재력 있는 두 여자, 포드 부인과 페이지 부인을 유혹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오히려 두 부인과 그들의 남편의 계략에 빠져 모욕당하고 만다. 그는 광주리에 실려 더러운 강물에 던져지기도 하고, 하녀의 모습으로 변장해 간신히 빠져나가기도 하며, 숲에서는 장난꾸러기 요정들의 습격을 받는다. 폴스태프는 자신의 사악한 성격을 따라서 좌충우돌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스스로 자신을 우스꽝스럽고 가련한 존재로 여기는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윈저성의 짓궂은 아낙네의 주인공인 팔스파프

셰익스피어의 인물은 현실적 처지가 촉발하는 대로 자신의 특수한 성격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내적으로 자기를 반성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면서 ”그들을 그들 자신 안에서 고양하여” 자신의 특수성에 대해 초연하게 있으니, 이런 점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고결한 성격을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필연적 운명을 긍정하면서 그 운명의 관점에 서서 “그 자신이 침몰하는 것을 마치 그 외부에서 바라보는 듯 바라본다”[6].  

[1] 미학강의 2, 213쪽

[2] 미학강의 2, 213쪽

[3] 미학강의 2, 222쪽

[4] 미학강의 2, 220쪽

[5] 미학강의 2, 225쪽

[6] 미학강의 2, 225쪽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