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 23-리얼리즘에 대해: 개체적 특수성[리얼리즘]의 미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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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 23-리얼리즘에 대해ㅣ 개체적 특수성[리얼리즘]의 미학

 

1)

낭만적 미학형식의 세 번째 형식을 헤겔은 ‘형식적으로 자립적인 개체적 특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었다. 헤겔은 이 세 번째 형식을 추가로 설명하면서 “현실 자체에 대한 갈증, 현존하는 것에서 얻는 자족[Sichbegnuegen], … 유한한 것, 특칭적인 것, 초상화적인 일반에 만족하는 것[Zufriedenheit]” 이라고 했다.[1]

 

또 헤겔은 여기에 “현재에서 현재적인 것 자체”를 “눈 앞의 생동성 속에서 … 재창조”[2]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니,  ‘개체적 특수성’은 곧 ‘현재적인 것’으로, ‘형식적으로 자립적인 것’은 ‘눈 앞의 생동성’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설명은 낭만주의의 세 번째 권역이 리얼리즘적인 예술 형식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첫 번째 종교적 예술의 권역, 두 번째 기사도 문학의 권역에 이어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세 번째 권역으로 소개되는 것이 흔히 낭만주의 예술과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리얼리즘적인 예술 형식이라니, 좀 의아한 생각을 갖게 된다.

 

헤겔이 이 세 번째 권역에 속하는 예술로 들고 있는 구체적 예들은 르네상스 시기 이후 바로크를 거쳐서 근대 초기 시민 예술과 고전주의, 그리고 자기 시대의 낭만주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괄하는 광범위한 작품들이다. 흔히 이 작품들은 근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중세 예술과 구분해서 독자적으로 다루어지며 그런 가운데 리얼리즘적인 예술에 속하는 것(르네상스 예술이나 시민 예술)과 낭만적 예술에 속하는 것(바로크 예술과 낭만주의 예술)으로 구별되어 다루어진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 작품들을 중세부터 시작된 낭만주의 예술형식 속에 그것도 마지막 최후의 형식으로 포괄하면서 낭만주의(넓은 의미에서)의 마지막 권역에 흔히 구별되는 리얼리즘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18세기 낭만주의 즉 좁은 의미에서 낭만주의)을 구별하지 않은 채 리얼리즘적인 예술로 규정하는 그 까닭은 무엇일까?

 

2)

근대 예술, 그 가운데서도 리얼리즘적인 예술을 리얼리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다루는 소재나 방법에 따른 것이다. 헤겔 말 대로 ‘현재적인 것’을 ‘눈 앞에 생동적인 대로’ 서술하는 것인데, 이런 리얼리즘적 예술은 어떤 의미나 목표를 가지는 것일까?

 

미리 말하자면 여기서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을 눈앞에 나타나는 생동성 속에서 다룬다는 뜻이 현실 자체를 그대로 모방하는 예술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실적인 것을 모더니즘적으로 생산할 수도 즉 ‘재창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리얼리즘적인 것은 독자에게 예술이 창조한 실제 사건이 수반하는 동일한 감정이나 행동을 환기하는 심리적 효과(연상, 또는 감정 이입의 효과)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참한 현실을 그린 예술 작품을 통해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이에 저항하는 행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예술보다는 저널이나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아주 사실적인 기록이나 영상이 더 강하고 풍부한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굳이 예술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리얼리즘적 경향을 지닌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는 리얼리즘적 예술은 피지배 계층의 생동하는 저항 정신을 표현하며, 반면 지배 계층은 양식적인 예술을 지향하는데 이를 통해 억압을 정당화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지배와 예술이 어느 시대나 반복되므로, 그때 마다 리얼리즘적 예술과 양식적 예술이 교차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그 시대적 차이를 간과하고 만다. 즉 아놀드 하우저에게서 고전적 리얼리즘 예술과 근대 리얼리즘적 예술의 차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리얼리즘 예술을 옹호하는 많은 이론가는 결국 주술적 효과에 기대고 있다. 곧 현실과 닮은 것은 현실이 일으키는 결과와 동일한 결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이 예술을 낳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대표적으로 루카치나 아도르노와 같은 미학자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을 지극히 편협한 영역으로 제한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이런 주장은 근대 이전의 예술이나 근대 예술 가운데 리얼리즘적 예술에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인 낭만주의 예술을 예술로부터 배제하고 만다.     

 

이런 생각을 통해서 볼 때, 헤겔이 근대의 독특한 예술 현상인 리얼리즘 예술을 중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은 미학적으로 무척이나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  여기서 근대 예술의 역사를 보는 헤겔의 독특한 관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시 한 번 묻게 되지만, 헤겔은 왜 낭만주의 세 번째 권역을 이런 리얼리즘적인 예술로 규정하고 심지어 낭만주의 예술조차 이런 리얼리즘적 권역 속에 포함한 것일까?

 

3)

앞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중세와 근대는 역사적으로 연속되며, 이 시대는 시장 관계가 점차 일반화되는 과정이다. 이런 시장 관계를 토대로 새로운 정신이 출현했으니, 헤겔은 이를 절대적 주관성 또는 내재적 초월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시대, 정신은 종교에서는 내재적 신이라는 개신교적 신의 개념으로 출현했으며, 예술에서는 가상이라는 형식으로 출현했다. 그 가상은 곧 예술적 형상이 자기 부정이라는 운동을 통해 그 본질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 가상은 구체적 첫 번째 종교적 권역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수난의 역사를 통해 즉 시간적 운동을 통해 제시되며, 두 번째 기사도 문학의 권역에서는 기사도적 정신이 지니는 이중적 측면 즉 우연한 현실적인 것에 부여되는 무한한 정신이라는 모순으로 출현했다. 

 

이미 살펴본 두 가지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 가상이라는 개념에서 이미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런 현실적인 것은 단순히 현실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정신적인 것이 드러나는 가상이지만, 이런 가상은 결코 환상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는 아니 되며, 오직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만 가상으로서 자격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처음부터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이런 현실적인 것이 가상으로서 그 본질적 의미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니, 여기서 종교적 권역에서는 수난의 역사가, 그리고 기사도 문학은 자기 모순이 문제되는 것이다.

 

근대 예술이 그 이전 종교적 예술이나 기사도 예술과 마찬가지로 시장 관계를 토대로 하는 정신에서 나온 것인 한, 근대 예술 역시 이중성이 불가피할 것이다. 시장 속에서 개인은 자신에게 주관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이것이 마치 절대성을 지닌 것처럼 오만하지만, 이 시장 속에서 개인에 되돌아오는 현실은 곧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된 객관적 가치이니, 이를 알지 못하는 개인에게 이런 객관적 가치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운명이며, 보이지 않는 힘의 지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시장적 사회 관계 속에서 개인은 주관적 오만과 운명의 지배 아래 개인의 삶은 찢겨져 있으니, 근대 예술은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오만 속에서 자신의 무한한 내면(욕망과 목적)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지니며, 다른 한편 그를 엄습하는 운명을 파악하려는 가운데 있는 그대로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 두 가지 측면 한편으로 자기 내면에 대한 관심 즉 내재하는 것과 또 다른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 즉 초월하는 것은 종교 예술이나 기사도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니, 여기서 근대 예술은 이중적으로 분화하면서도 상호 뒤얽혀 있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은 근대 예술이 지닌 이중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발견하는 것은 현상의 익숙한 세속적 고유성이 본래부터 관념적인 것의 한 계기로서 즉각 취택된다는 사실이며, 심정은 미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고 일상적이며 우연적인 외적인 것에서 만족을 구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만 가능성의 면에서 즉 일단 즉자적으로는 신과 화해되어 있을 뿐이다. 만인은 비록 지복을 향한 소명을 받았으되, 선택된 자는 극히 드누니, 하늘나라뿐만 아니라 현세의 나라마저도 하나의 저편으로 남아 있는 심정에는 세속성과 자기 위주의 현재성을 정신성 속에서 포기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3]

무리요의 거지 소년이라는 작품이다. 리얼하게 그려져 있지만, 헤겔은 이 소년이 지닌 정신적 맑음과 자유로움에 주목하고 있다.

4)

헤겔은 근대 예술이 지닌 이런 이중성 때문에 근대 예술의 근본적 경향성을 리얼리즘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속에 근대 리얼리즘 예술과 근대 낭만주의 예술을 포괄적으로 다루게 된다.

 

헤겔은 근대 예술을 이미 설명한 대로 두 단계로 구분하여 서술한다. 근대예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립적인 개인적 성격’을 다루는 예술이니, 이는 이미 단테의 신곡에서부터 시작하여 특히 셰익스피어의 성격문학, 심지어 괴테와 실러의 시민 문학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런 첫 번째 단계는 성격 예술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는데, 그 핵심은 개인이 지닌 주관적 내면 즉 그 욕망과 목적, 성격 등에 대해 관심을 지닌 예술을 말한다. 성격 예술은 단순히 그의 내면을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내면적 성격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 파악하려 한다.

 

근대 예술의 두 번째 단계에서 등장하는 예술을 헤겔은 모험 예술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에 속하는 예술의 효시는 곧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며, 이후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소설적인 것[Romanhafte] 로 발전한다.  

 

여기서 예술은 전전 반측하는 현실 자체를 사실적으로 파악해 나가는데, 단순히 이런 우연의 유희를 그려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런 모험적 예술은 궁극적으로 우연적 현실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자각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 즉 성격 예술이 내면적 성격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사도 정신을 다루는 기사도 문학을 닮았다고 한다면, 후자 즉 모험 예술은 현실의 운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다루는 종교 예술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격 예술과 기사도 문학, 종교적 예술과 모험 소설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으니 이런 차이점은 앞으로 근대 예술의 구체적 형태를 다루는 경우에 상술하기로 하자.

 

미리부터 말하자면, 낭만주의 예술의 세 번째 마지막 권역이 리얼리즘 예술이며, 리얼리즘 예술의 두 단계가 곧 성격 예술과 모험 예술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파국과 자각이라는 운동성이 사라지고, 현실이 그 자체로서 긍정되는 단계에 이른다.

 

이런 단계에 이른 예술로서 헤겔이 드는 예가 곧 디드로의 소설이나 독일 낭만주의의 아이러니 예술이다. 이 단계를 지나면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기를 그치고 예술을 넘어서게 되니, 여기서 예술은 해체되고 종언을 고하게 된다.

[1] 미학강의 2, 210쪽

[2] 미학강의 2, 210쪽

[3] 미학강의 2권,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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