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22-중세 기사도 문학[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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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22-중세 기사도 문학

 

1)기사도 문학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형식을 다루면서, 우선 종교적 예술을 다룬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마리아, 사도 및 신도의 종교적 체험이 주요 주제가 된다. 이어서 그가 다루는 것은 기사도 예술인데, 여기서 주로 논의되는 것은 기사 계급의 명예와 사랑, 충성이라는 심정을 다루는 문학이다.

기사도 문학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는 모호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11세기 말 작품 롤랑의 노래와 같은 무훈시에서도 명예가 다루어지고, 내려가면 14세기 초 작품인 단테의 신곡에서도 사랑이 다루어지니, 헤겔의 기사도 예술 개념에 따르면 모두 기사도 예술에 포괄할 만하다. 헤겔은 기사도 문학을 주제별로 구분하지, 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이 기사도 문학의 핵으로 보고 있는 명예, 사랑, 충성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흔히 궁정 연애시라고 불리는 기사도 예술이 아닐까 한다. 궁정 연애시로서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은 크레티앵 드 트루아[1]의 작품 <죄수 마차를 탄 기사>(181년)이다.

 

2) 트루바두르

궁정 연애시가 등장하는 12-13세기는 앞에서 언급한 고딕 시대와 겹친다. 고딕 시대를 설명할 때 이미 언급했지만 이 시대는 유럽 사회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교역이 발전하고, 도시가 발흥했다. 바로 이 시기 건축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점차 고딕 양식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문학에서는 기사도 문학이 성행하게 되었다.

기사도 문학의 토대가 된 기사 계급은 왕권이나 대 영주의 권력이 신장하면서 출현한다. 과거 왕과 대 영주의 종신이 말과 무구를 하사 받아 기사가 되고 전투에 나서며 대가로 봉토를 받는다. 이들은 받은 봉토를 세습하면서, 그 이전 귀족적 영주 계급과 분화된 새로운 영주 계급이 되니, 이들이 기사 계급이다.

이 시대 왕권의 발달에 못지 않게 교회도 발전했다. 교황권이 확립되고, 교회는 세속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황제와도 대결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교회의 발전은 학문적으로 대학을 성장하게 했으며 정신적으로는 기독교적 정신이 삶 자체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다. 신흥 귀족인 기사 계급의 정신을 지배한 것이 기독교 도덕이다.

기사도 문학을 전개한 시인은 흔히 음유시인(반주에 맞추어 노래 불렀다)이라 불리는데 또는 트루두바르(이야기를 ‘지어내다[trobar]’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라고 하기도 한다.[2]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에 따르면 이들은 원래 궁정 시인이 고대 미무스의 전통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는 음유시인의 형성이 기사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 문화[3]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트루바두르는 음유시인처럼 단순히 노래한 것은 아니며 낭송용 작품을 직접 만들고 나가서 낭송이 아닌 독서를 위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이들의 시는 영웅적 서사시 전통에서 벗어나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가공적인 이야기를 지어냈으며 이 이야기를 기사 계급의 특성에 맞게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로 작성했다. 그 성격은 심정을 표현하는 서정적인 것이었으니, 여기서 다루어진 대표적인 심정이 기사 계급의 도덕과 관련된 명예, 사랑, 충성이라는 심정이 된다. 이런 심정을 노래함으로써 트루바두르는 관대한 선물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정 기사 계급의 교사로 자임했다[4].

 

3) 궁정 연애

기사도 문학은 앞에서 다루었던 종교 예술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종교 예술이 역사적 체험 즉 수난의 실제 역사가 주로 다루어졌다. 종교 예술은 수난의 역사를 통해 신이 현현하는 것을 표현한다. 반면 기사도 문학은 기사의 심정이 주로 다루어진다. 그 심정이 출현하는 사건은 지어낸 가공적 사건이고 심지어 비현실적인 환상에 속한다.

기사도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심정은 연애이지만, 이 속에는 기사도 정신의 다른 요소인 명예와 충성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일반적으로 아놀드 하우저가 서술한 것처럼[5] 기사도 문학 속에 기사도 정신 전체보다는 궁정 연애의 형식만 발견한다. 그러면서 연애의 대상이 주군의 부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사랑은 주군에 대한 봉사의 변형을 의미하든가, 아니면 궁정에 살아가는 중세 기사의 억눌린 성욕에서 나오는 환상으로 설명한다. 아놀드 하우저는 그 근거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귀부인에 대한 묘사가 도식적이고, 그 감정의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서 발견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 전체에 기사도 정신이 곳곳에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기사도 정신이 기독교 덕목에서 나온다는 사실에서 본다면, 위와 같은 해석은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기사도 예술을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이해하려는 헤겔적 해석이 오히려 돋보인다.

 

4) 기독교 문학

기독교 정신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절대적 주관성이다. 이런 절대적 주관성은 초월적으로 내재하는 신의 모습으로 출현하는데 이는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그리스도나 신도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출현했다.

헤겔에 따르면 기독교의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은 두 번째 단계에서 기사들의 정신적 덕목으로 출현한다. 기독교의 정신적 덕목은 기사도[6] 속에 포함된 명예나, 사랑, 충성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기본적 특징은 무한한 심정과 개별적 대상 사이의 직접적인 결합이다. 이때 외적인 현존은 내재하는 심정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나 기호가 된다.

무한한 심정과 개별적 현존 사이의 직접적 결합은 기독교의 절대적 주관성 즉 내재적 초월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앞에서 신적인 표현에서는 그리스도나 사도의 개별적 역사적 현존은 자기 부정성을 통해 절대적 주관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기사도의 문학에서 절대적 주관성은 개별적 현존을 긍정하며 다만 이것을 무한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오직 종교적 심정이 지녔던 인간적인 것 자체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사라지고 정신은 자신을 확산하며, 자신의 현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현실적인 세속적인 심정을 확장한다.”[7]

 

이제 개별자는 자기를 긍정하는 자유로운 주관성으로 된다. 명예나 사랑, 충성과 같은 심정은 그 속에 절대적 주관성이 내재하므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 무한성을 지니게 된다. 즉 명예나, 사랑 그리고 충성의 심정은 끝을 모르는 충만성을 간직한다. 그는 자기를 무한하게 긍정할 뿐만 아니라 타인조차도 이를 무한하게 긍정하기를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그의 개별적 현존 속에는 무한한 주관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사도 문학에서 한편으로 심정은 무한성을 지니며 다른 한편 이 심정이 퍼부어지는 대상은 개별적인 현존이다. 그것은 개별적 현존이니만큼 그 자체로서는 가치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이 점은 궁정 연애시를 대표하는 <죄수 마차를 탄 기사>를 보면 잘 드러난다.[8] 예를 들어 왕비 기네비에르는 랜슬롯이 죄수 마차를 탔다고 하여, 랜슬롯의 명예를 해치고 이는 동시에 자신의 명예를 해치는 일이라 보면서 냉담하게 대한다.

기사도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심정이 개별적 현존과 관련되면서 기사도 문학은 심리 소설에서처럼 리얼리티에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 대표적 장면이 왕비 기네비에르가 기사 랜슬롯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냉담하게 대했던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다. 그 때문에 왕비는 자살하려 하는데, 랜슬롯은 왕비가 죽었다는 소문 때문에 정신을 잃는다. 이 장면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비극적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 자신에게 무한한 주관성이 내재하는 개별적 현존은 타인의 눈에 단순한 개별적인 현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거기에 무한한 주관성은 오직 초월적으로만 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의 요구와 타자의 인정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충돌의 결과 기사도 문학은 몰락하게 된다.

 

5) 명예

기사도 문학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명예에서 사랑으로 마지막으로 충성으로 전개되는데, 그 가운데 명예는 어떤 개별적 대상을 자신의 자아의 무한한 자유를 입증하는 대상으로 간주할 때 나타나는 심정이다.

이 경우 예를 들어 아내의 정조가 의심받는다는 소문 자체와 같이 아주 조그마한 또는 불확실한 것조차 자신의 인격적 자유를 입증하는 대상으로 간주되면서 그것이 해쳐지는 경우 그의 명예가 훼손당한다고 느낀다. 이런 개별적 대상은 내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대상이지만, 타인은 마땅히 이를 인정해야 하므로 여기서 타인과 충돌이 벌어질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충돌은 타인이 내가 선택한 개별적 대상을 침해하기 때문에 벌어지는데, 침해 당한 자는 이런 침해가 자신이 소유한 어떤 대상이 해쳐지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바로 그 자신의 자아의 자유가 침해된 것으로 생각하므로 그는 자신의 침해를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명예의 빛을 받아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모든 특수한 것은 이 빛[Schein] 자체로 인해 이미 무한한 가치로 격상된다”[9]고 말한다.

앞에서 예로든 이야기에서, 왕비를 구하기 위해 죄수가 탄 마차에 올라탄 까닭에 기사는 그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 때문에 그는 그가 구해준 왕비로부터 냉담한 대접을 받게 된다. 랜슬롯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사랑이 명령한 것이라면 설령 죄수 마차를 타는 일일지라도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내겐 영광이었으니까, 그녀는 거기서 사랑의 완벽한 증표를 봤어야만 해.”[10]

 

그러면서도 그는 괴로워한다.

 

“그녀의 애인은 그녀한테 두고두고 모욕과 비난을 받을 만한 짓을 했어. 내가 사람들한테 비난 받아도 싼 도박을 한 거야”[11]

 

그는 그 자신은 사랑 때문에 한 일이지만 타인은 그 행위를 명예를 해친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명예의 이런 충돌은 명예를 규정하는 행위가 그저 관습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기에 생기는 일이다.

 

6) 사랑

헤겔은 명예의 심정과 사랑의 심정은 서로 얽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의 명예를 인정하는 것은 나에 대한 타인의 사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 그의 명예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존중하려면 무의미한 것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마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명예는 타인의 사랑을 전제로 해서 성립할 수 있으므로, 그 결과 명예의 심정은 이제 사랑의 심정으로 발전한다.

명예가 자아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한다면 사랑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타자에 헌신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이런 헌신은 타자가 지닌 어떤 개별적 대상(즉 좋아하게 된 근거) 때문인데, 이런 개별적 대상에 대한 선택은 자의적일 뿐이다. 그에 반해서 타자에 대한 사랑의 헌신은 무한하게 되면서 마치 명예가 불가피하게 내적으로 충돌하듯이 사랑 역시 불가피하게 내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런 사랑의 대상은 한 개인이며, 따라서 중세 낭만주의 문학에서 사랑은 고대적 사랑과 구별된다. 고대적 사랑은 인륜적인 것의 틀 안에서 일어나며, 그것을 벗어나는 사랑 예를 들어 파리스와 헬레나의 사랑은 인륜을 파괴하는 것으로 범법적인 것으로 된다. 또 기사도에서 사랑은 육체적인 것에 기초한 사랑과도 구분되는 것이니, 그것은 욕망이 끝나면서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기사도의 사랑은 비록 육체적인 것을 포함하더라도 어떤 개별적 현존에 대한 무한한 영원히 불변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도적 사랑은 명예만큼이나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이다. 사랑은 타자를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버리는 헌신이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버리며, 오직 일편단심으로 그를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바치는 대상은 아주 사소한 존재이다. 만일 상대방이 가진 탁월한 가치 때문에 그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무한한 기독교적 사랑이 아니다. 상대방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일 때 그것을 사랑하는 경우 비로소 무한한 기독교적 사랑이 된다.

그런데 사랑히 무한하려면 사랑하는 대상의 가치가 무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려면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한 사랑이어야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으니, 여기서 궁정 연애시가 가진 딜레마가 출현한다.

한편으로 연애는 정신적 아름다움 때문에 일어난다. 궁정연애시에서 남자는 항상 뛰어난 기사이고 여자는 항상 아름다운 여인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가치는 육체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앞의 소설에서 랜슬롯의 왕비에 대한 사랑은 그가 벌이는 목숨을 건 결투에서보다는 오히려 다른 여인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그의 일편단심에서 입증된다. 그러나 궁중 연애시는 기독교적 사랑을 다루기 때문에 이 사랑은 사소한 대상에 쏟아질 수밖에 없고 그 결론은 항상 단순한 육체적 사랑으로 나가게 된다. 아래와 같은 왕비 기네비에르의 한탄을 들어보라.

 

“아아, 그가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껴안아 주었더라면 내가 덜 서운하고 미안할 텐데! 그랬으면 어쨌다고? 아니, 둘 다 발가벗고 알몸을 맞대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마당에 내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은 비굴할 뿐이야!”[12]

 

궁중 연애시에서 베르베르와 크레티엥이 벌인 논쟁도 이런 기사도적 사랑이 지닌 모순을 잘 보여주며, 죄수 마차를 탄 기사에서는 손가락이 다쳐서 침대에 피가 묻었다는 주장으로 모호하게 처리하고 만다.

 

7) 충성

사랑이 타인의 인격에 대한 헌신이지만 이 경우 개별적 개인에 한정된 것이라 한다면, 충성은 좀더 발전된 낭만적 심정이다. 왜냐하면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역시 타인의 인격이지만, 이런 타인은 주인이나 귀부인에 대한 것으로서 이들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실체를 대변하는 일반적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충성의 대상이 되는 주인이나 귀부인은 자의적으로 선택된 대상이므로 그가 명예라는 대가를 받는 한에서 충성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그는 주관적으로 자신의 명예가 해쳐진다고 판단하면 충성을 멈출 수도 있고, 충성의 대상을 바꿀 수도 있다. 더구나 중세 충성의 대상이 되는 주인과 귀부인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반적 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우연적인 힘의 강제에 따른 것이므로 이런 충성은 아직 제한적이다.

<죄수 마차를 탄 기사>라는 소설에서 이런 이중성이 잘 나타난다. 한편으로 왕비를 구하는 랜슬롯의 결정은 주군인 왕, 또는 그 주군의 부인에 대한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크레티엥은 그것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에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조국의 백성들이 적국에 사로잡혀 있고 왕비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 백성을 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더구나 왕비를 둘러싼 랜슬롯과 멜리아건트의 대립은 두 나라 백성의 대립으로 전개된다.

크레티엥은 왕에 대한 충성이 단순히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충성임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 전체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랜슬롯은 아더 왕와 왕비에 대한 충성으로 간주된다.


[1] 크레티앵 드 트루아(1135-1190) 그는 성당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173년 하급 사제가 되었으며, 마리 드 상파뉴의 궁정에서 활동한 음유시인이며, 궁정 연애시에 해당하는 여러 작품을 작성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에레크와 에니드>(1169), <마크왕과 이졸데>(1170), <죄수 마차를 탄 기사>(1176), <그라알의 이야기>(1181) 등을 작성했다.

[2] 이들은 사랑을 주로 노래한다 해서 민네쟁어[Minnesänger]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 궁중에 전속된다고 해서 메내스트렐[ménestrel]이라고도 불리운다.

[3] 트루바두르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던 곳은 타키텐의 수도 프와티에에 있는 엘레노어의 궁정이다. 엘레노어는 다키텐의 상속녀로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혼했다가 이혼하면서 자신의 궁정으로 돌아왔는데, 이 시기 (1150-1173)그녀의 궁정에서 여러 트루바두르가 활동했다. 대표적인 트루바두르는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와 베누아 드 생트모르이다. 그녀가 1173이후 노르망디 출신인 정복왕 윌리엄스의 아들 헨리 2세의 왕비로서 영국으로 떠난 후에는, 그녀의 딸인 마리 드 상파뉴가 거주하던 상파뉴 백작의 상파뉴 궁정이 트루바두르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여기서 활동했던 대표적 트루바두르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이다. <죄수 마차를 탄 기사>의 국내 번역자 유희수에 따르면, 1170-1174년 사이에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와 크레티엥 드 트루아 사이에 연인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논쟁했다고 한다. 베르나르는 육체적 환희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보았으나 크레티엥은 정신적인 환희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레티엥, 죄수 마차를 탄 기사, 유희수 역, 문학과 지성사, 2016, 172쪽

[4] 트루바두르에 관한 이런 사실은 아놀드 하우저,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 1권, 365-372쪽 서술을 참조하라.

[5]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권, 351-369쪽 참조

[6] 역사가 Léon Gautier는 그의 책  La Chevalerie (1884)에서, 기사도의 덕목을 아래와 같이 10개 정도로 요약한다. 크게 보자면, 신앙과 봉건적 의무를 제외하면, 약자 보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덕목만으로는 궁정연애시에 담긴 명예, 충성, 사랑의 정신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대는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믿고, 그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그대는 교회를 옹호해야 한다.

-그대는 모든 약자를 존중해야 하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대는 태어난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적 앞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대는 불경한 자에 대해 그침 없이 자비 없이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대는 봉건적 의무를 그것이 신의 법에 반대되지 않는 한 신중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대는 거짓말 해서는 안되며, 맹세에 충실해야 한다.

-그대는 관대해야 하며 누구에게나 후하게 베풀어야 한다.

-그대는 어디서나 항상 부정의와 악에 대립하여 정의와 선을 쟁취해야 한다.

[7] 미학강의 2권, 182쪽 번역은 필자가 수정

[8]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사인 주인공 랜슬롯은 아더 왕의 기사이다. 그는 아더 왕의 부인인 왕비 귀네비에르를 사랑한다. 적국인 고르 왕국의 왕자 멜리아건트는 아더왕의 궁정을 찾아와 결투를 통해 왕비를 얻어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간다.

랜슬롯은 왕비를 구하기 위해 한편으로 기사로서 명예를 버리고 죄수마차를 타며, 기꺼이 목숨을 걸고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칼 다리를 건너간다. 흥미로운 것은 그 가운데 어떤 고귀한 아가씨가 랜슬롯을 유혹하지만 랜슬롯의 왕비에 대한 사랑을 보고 그를 떠난다는 에피소드이다. 랜슬롯은 마침내 적국에 이르러, 멜리아컨트와 결투를 벌여 승리하면서, 왕비를 구하게 된다. 동시에 랜슬롯은 적국에 포로가 되어 있는 조국의 백성을 함께 구한다. 결투의 마지막 순간 고르 왕의 중재로 왕비를 풀어주는 대신 1년 뒤 아더왕의 궁정에서 다시 결투하기로 한다.

왕비 기네비에르는 랜슬롯이 죄수 마차를 타면서 기사로서 명예를 저버린 것 때문에 처음에 냉담하다. 하지만 포로를 빼앗긴 고르 왕국 백성이 랜슬롯을 포로로 사로잡는다. 그러자 랜슬롯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왕비는 자신의 냉담한 것을 후회하면서 사랑의 마음을 회복한다. 마침내 고르 왕의 도움으로 풀려난 랜슬롯은 왕비를 만나 마음을 통한 사랑의 합일에 이르게 된다. 이때 왕비의 침실에 들어가는 중 랜슬롯은 손가락을 다치며, 그 피가 침대의 이불에 묻어 왕비가 불륜을 범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랜슬롯은 다시 한번 결투를 통해 왕비의 결백을 입증한다.

왕비와 백성을 데리고 고국으로 떠나기 전 랜슬롯은 멜리아건트의 흉계에 빠져 아무도 알지 못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탑에 갇힌다. 1년 뒤 멜리아건트는 랜슬롯과의 약속대로 아더 왕의 궁정에 다시 나타나, 랜슬롯과 대결을 요구하며, 이기면 왕비를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 1년 동안 갇혀 있던 랜슬롯은 모험의 도중에서 구해준 어느 아가씨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여 조국으로 돌아와 이미 돌아와 있는 왕비가 보는 앞에서 멜리아건트와 두 번째 결투를 벌여 그를 죽여 승리를 차지한다.

[9] 미학 강의 2, 189쪽

[10] 크레티엥 드 트루아, 죄수 마차를 탄 기사, 유희수 역, 문학과 지성사, 2016. 110쪽

[11] 위의 책, 110쪽

[12] 위의 책,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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