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㊳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㊳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392c-d]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λόγος와 관련한 논의 즉 시가의 내용에 대한 고찰을 마치고 이어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에 대해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시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ἅ λεκτέον와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지ὡς λεκτέον의 문제가 완전하게 마무리된다는 것이다.(392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에 대한 고찰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설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나 시인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가에 대한 고찰이라고 답한 후 그 ‘이야기 진행방식(서술방식)’διήγησις을 단순 서술 방식ἁπλός διήγησις과 모방μίμησις을 통한 서술 방식 또는 그 양쪽 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서술 방식으로 나누어 고찰하기 시작한다.(392d)
[392e-393c]
* 소크라테스는 단순 서술 방식이란 이야기를 진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꾀하고 있지 않은 방식 즉 시인 자신이 직접 서술하는 방식을 말하며,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이란 시인 자신이 마치 시가의 등장인물이 직접 발언하는 것처럼 여겨지도록 최대한 그를 모방하여 서술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가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듣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마치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설명해주겠다고 말한 후, 그 두 가지 방식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아가멤논에 대한 크뤼세스Χρύσης의 간청을 다루고 있는 <일리아스>의 첫 부분에서 각각 인용하여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호메로스는 어떤 곳에서는 크뤼세스에 대해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말하는 자신이 호메로스가 아니라 늙은 제관인 크뤼세스로 생각하게끔 최대한 크뤼세스를 모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393d-394b]
*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인이 자기 자신을 어디에서고 숨기지 않고 호메로스로서만 이야기를 했더라면 모방은 없고 단순한 서술 방식만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후, 그러한 단순한 서술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흥미롭게도 앞서 인용한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모방이 없는 단순 서술 방식으로 형식을 바꿔 길게 들려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발언과 발언 사이에 있는 시인의 말(단순 서술 부분)을 제거해버리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들만 남겨 놓을 경우 이야기 진행은 앞의 것과 정반대 즉 모방만 있는 서술 방식이 되고 만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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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의 방식이 따로 구분되어 다루어지는 이유는 시가 자체가 설화 내용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구전되어오면서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 형식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된다. 하나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과 관련한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야기에 붙는 곡조와 리듬과 관련한 논의이다. 우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는 이중 전자의 것으로서 세부적으로 1)설화를 서술하되 설화에서 설명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해설조로 서술하는 방식 즉 ‘단순 서술 방식’과 2) 등장인물이 말하는 부분을 마치 그가 직접 말하듯 서술하는 방식 즉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구분된다.
* 1)의 방식은 쉽게 요즘의 소설이나 연극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간접화법의 방식 즉 내용에서 일반서술이나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저자나 음송인이 단순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고, 2)의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 즉 설화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부분 즉 대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것인 양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다. 이 가운데 2)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이 마치 해당인물이나 신이 말하듯 음송 서술해야 하므로 최대한 해당인물이나 신 또는 영웅을 잘 흉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1)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에 의한 단순 서술 방식으로 부르고 2)의 방식을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부른다.
* 플라톤의 시인 비판이나 예술 비판을 주제로 <국가>를 고찰할 때 꼭 제기되는 개념이 ‘모방’mimesis개념이다. 오늘날 예술과 관련하여 ‘모방’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흔히들 ‘창조’에 대비되는 의미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오늘날 예술의 본질을 창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종종 플라톤이 예술을 모방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예술 폄하론자로 몰아세우곤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에서 사용하는 ‘모방’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모방의 의미보다 훨씬 넓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모방에 관한 논의가 처음 나타나는 이곳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 개념의 근본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미리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에서 창조라는 말의 반대말 즉 어떤 원상을 외형적으로 흉내 내는 것, 복제하는 것, 베끼는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표절하는 것을 우선 연상해낸다. 그리고 모방 또한 뭔가에 대한 일종의 묘사이자 표현이긴 할지라도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을 표현이나 묘사라는 말과 결코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묘사나 표현에는 모방적인 묘사나 표현뿐만 아니라 이른바 창조적인 묘사나 표현까지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플라톤의 모방 개념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묘사와 표현의 뜻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모방의 일차적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원상을 단순히 베끼거나 모사했느냐 아니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창조이건 아니건 그 모두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이자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객관적인 원상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묘사나 표현 또는 그 결과물 일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동사적 표현이나마 모방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는 <국가> 388b에서도 이미 직접적으로 그 말을 ‘묘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근본적으로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라는 점에서 모방의 결과는 실재성의 심급에 있어 원천적으로 원상에 못 미치는 일정 부분 결핍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성의 한계일 뿐 그 밖에 원상에 대한 표현과 묘사로서 모방 자체가 갖는 가치와 효용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본질적으로 원상의 모사인 만큼 실재성에 있어 원상에는 못 미친다는 점만 괄호에 넣고 보면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있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모방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방하는 대상이 좋은 것인가 나쁜가와 그 모방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예술은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감각적 묘사의 산물로서 예술 작품이 갖는 실재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일 수는 있어도 예술이 갖는 가치나 기능 내지 효용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오해되어선 안 된다.( <국가> 10권에서의 예술과 시인 비판은 여기에서와 달리 기본적으로 실재성의 심급과 관련하여 모방이 갖는 이러한 한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컨대 예술의 가치와 기능과 관련하여 예술이 비판 받는다면 그것은 모방 때문이 아니라 그 모방의 대상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모방의 대상과 모방 수준에 따라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훌륭한 예술도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예술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를 토대로 모방이 이루어지는 각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표 된다. 이를테면 이곳에서처럼 시가의 이야기 영역에서의 모방은 신과 영웅을 대상으로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흉내 내어 서술하는 것(emulation)을 의미하고, 미술과 조각, 음악 등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모양이건 소리이건 원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최대한 똑같이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사(copy)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수호자 교육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좋은 것을 추구하고, 좋은 사람의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본받고(modelling) 배우는 것(learning)을 뜻하고, 넓게는 기술 영역에서도 장인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의 기술을 본받아 사람들에게 선하고 이로운 것을 만들거나 제공한다는 점에서 모든 전문 기술 또한 모방인 것이다. 요컨대 그 모방의 좋고 나쁨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모방 그 자체 때문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어떤 수준으로 모방했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이를테면 신이건 영웅이건 모양이건 소리이건 게다가 기술에서건 교육에서건 원상들의 선성과 아름다움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모상 속에 재현해내느냐에 의해 얼마든지 좋은 모방이 될 수 있고 그만큼 훌륭한 예술가들의 존재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리고 모방의 과정에서 남과 다르게 원상의 아름다움을 보다 잘 드러내면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는 사람의 탁월성이자 훌륭한 능력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드러난 남다른 차이는 모방자만의 고유 능력에 의해 새롭게 산출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성격 또한 갖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누군가가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고 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만큼 숨겨진 원상 본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재현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 영역에서의 창조와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이 전적으로 상호 배척되거나 모순되는 것만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예술이 창조행위를 통해 도모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시대를 불문하고 인류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지고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구현해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예술적 창조성이란 원상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예술가 자신에 의해 작품 속에 구현된 새로운 미적 가치와 의미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듯 원상을 전제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일지라도 그 현실적인 과정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는 탐구와 모색을 통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이를 찾아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모방 또한 새로운 의미 생산으로서 예술적 창조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플라톤적 예술 내지 미학에서 유독 객관적인 균형과 질서, 조화미가 강조되는 까닭은 모방의 대상으로서 플라톤적 원상의 극대점에 다름 아닌 영원히 선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자리하고 있고 그 우주적 선성의 본질이 곧 ‘서로 다른 것들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으로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우주는 이미 우주 영혼을 통해 그 자체로 시간적 영원성과 공간적 질서와 조화를 확고하게 관철하고 있는 신적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영역에서 모방은 말할 것도 없이 배움과 철학의 영역에서도 그 우주 영혼을 모방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나라에서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 또한 당연히 수호자들이 추구해야할 모방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수호자 교육의 궁극의 단계에서 요구되는 변증법을 통한 형상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 또한 본을 보고 우주를 만든 원상으로서 데미우르고스적 사유에 대한 모방인 것이다. 다만 그러한 철학 영역에서의 모방과 예술 영역에서의 모방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유는 후자의 모방이 시각과 청각 등 감각을 통해 표현되고 기본적으로 감정에 작용하는 것임에 비해, 전자는 감각 너머의 지성적 사유와 관조를 통해 표현되고 이성과 정신에 작용한다는데 있다 할 것이다.
* 우리는 이상에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을 여러 영역에 걸쳐 아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지금 읽은 이 부분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모방 개념에만 주목한다면 일단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은 다만 위에서 말한 여러 모방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시가 영역에서 사용되는 좁은 의미에서의 모방일 뿐이다. 즉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이 다름 아닌 시가 영역에서 신과 영웅을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직접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읽을 때 모방 개념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의미로 한정해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394c-d]
*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그러한 모방만 있는 이야기 진행은 비극의 경우라고 말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을 아래 3가지로, 즉 전적으로 모방에 의해διὰ μιμήσεως ὅλη 이루어지는 것, 단순 서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 양쪽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하고 희극κωμῳδία과 비극τραγῳδία, 디튀람보스διθύραμβος 시가, 서사시ἐπή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다.(394c)
* 그제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말하려 했던 것이 시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의 문제 즉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아래의 선택지들 가운데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지를 고찰하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즉 전적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전혀 모방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어떤 것을 모방의 방식으로, 어떤 것을 모방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할 지도 합의해야 한다χρείη διομολογήσασθαι고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πλείω ἔτι τούτων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392d)
[394e-395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이 모방에 능한μιμητικός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도 앞서 말한 바에 따르게 되는지를 묻고 ‘동일한 사람이 여러 가지 것을 모방할 때는 한 가지 것을 모방할 때처럼 훌륭하게 할 수 없다는 것ὅτι πολλὰ ὁ αὐτὸς μιμεῖσθαι εὖ ὥσπερ ἓν οὐ δυνατός을 확인한다. 그런 일을 시도할 경우 많은 것을 붙잡으려다 모든 것을 놓치는 격이 되어 결국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394e) 그러므로 희극과 비극을 짓는데 있어 양쪽 모두에 능할 수는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음송인ῥαψῳδός이자 배우ὑποκριτής가 되는 일도 불가능하고 같은 사람이 희극 배우κωμῳδός이자 비극 배우τραγῳδός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들 모두가 모방물μιμήματ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95a)
[395b-396b]
*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성향은 그런 종류의 것들 보다 한층 더 세분되는σμικρότερα 것이어서 우리의 처음 주장대로 수호자들은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δημιουργία을 포기하고 ‘이 나라의 엄밀한 뜻의 자유의 일꾼들’δημιουργοὺς ἐλευθερίας τῆς πόλεως πάνυ ἀκριβεῖς이어야만 하므로 그것에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것에도 종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 한다면 그 밖에 어떤 것에도 매달려서도, 그 어떤 것도 모방해서는 아니 되고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경건하며ὅσιος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방이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계속되면 몸가짐과 목소리 또는 사고διάνοια에 있어 습관ἔθος이나 성향φύσις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비굴하거나 창피스런 짓을 모방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395c-d) 그러므로 훌륭한 남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이들이 이러 저러한 못난 일을 하는 여인들은 물론 노예들과 못되고 비겁한 자들, 비속한 말을 해대는 자들, 그 밖에 언행을 통해 자신과 남들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5d-396a) 그리고 수호자들이 대장일 등 다른 전문적인 일을 하는 장인들이나 삼단노 전함τριήρης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 등에 마음을 쓰거나 모방을 하게 해서는 안 되며 말ἵππος과 황소ταῦρος가 우는 소리, 시끄러운 강물ποταμός 소리나 굉음을 내는κτυποῦσαν 바다θάλασσα나 천둥소리 같은 것을 모방해서도 안 되고 미친 짓을 하거나 그것을 닮은 짓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396b)
[396c-397b]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이야기 진행(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에 있어서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한 사람ὁ τῷ ὄντι καλὸς κἀγαθός이 따라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 있다고 언급한 후 그 각각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즉 절도 있는μέτριος 사람은 시가를 이야기하다가 훌륭한 사람의 말투나 행동에서 꿋꿋하고 슬기로운 모습이 나오는 대목에 이르면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말하며 모방하고 싶어 할 것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지만,(396c) 그 사람이 못난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열의를 갖고 모방하려들지 않을 것이고 그런 모방을 창피스러워하고αἰσχυνεῖσθαι 내심으로 경멸할ἀτιμάζων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d) 따라서 조금 전에 호메로스의 시구와 관련해서 언급했던 두 가지 이야기 방식 즉 단순 서술을 통한 방식과 모방을 통한 방식 모두가 이야기 진행에 관여가 되어 있지만, 결국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방식과 관련해서는 위와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모방이 허용되는 한, 시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e)
* 그러나 이와 달리 훌륭하지 않은 자들의 경우는 그가 비천할수록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온갖 것들, 이를테면 천둥소리나 우박 또는 도르래 따위의 굉음 또는 나팔이나 아울로스 등 악기 소리, 개와 양, 새소리 등 갖가지의 소리와 몸짓을 모방하려든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야기 방식과 서술 방식에 있어서는 그 만큼 단순 서술 방식은 조금 뿐이고 대부분이 모방을 통한 방식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을 거론한 배경이 다름 아닌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비로소 확인된다.(39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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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서술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 방식 중 소크라테스가 지지하고 있는 방법은 단순 서술 방식이고 가장 멀리하는 방식은 모방의 방식 즉 자기가 등장인물인 듯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단순 서술방식으로 몸소 바꾸어 서술하는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서술방식들을 굳이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단순 서술 방식은 간접화법의 방식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언뜻 우리 생각에는 직접화법이 간접화법보다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이고 실감나게 전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전달 방식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간접화법 즉 단순 서술 방식이 더 우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야기 진행 방식과 관련한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방식 간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그 방식들과 희극과 비극, 디튀람보스 시가, 서사시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
*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일단 모방보다는 단순서술 방식에 더 우위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시가는 옛날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이 직접 목도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판단되는 이야기를 허구의 형식을 빌려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단순 서술 방식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그러한 허구 외에 마치 시인 자신이 그 모방의 대상인 양 여겨지게 만드는 허구 즉 흉내라는 허구를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흉내를 내는 대상들이 각기 다른 여럿이라는 점에서 그 대상의 숫자만큼 허구의 가짓수 또한 늘어나는 것이다.
*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 이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가 단순히 단순서술 방식과 모방의 방식을 구분하고 비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님이 서서히 드러난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앞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하자고 말한 것처럼 그 이후 이어지는 논의를 들여다보면 앞서 말한 이야기의 진행 즉 서술 방식간의 비교 우위와 그에 합당한 극형식의 선택이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오히려 논의는 그 가운데 모방의 방식과 관련하여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이 모방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앞서 살폈듯이 시가에서 단순 서술방식은 최소한 이야기 서술에 있어 시인이나 음송인 한 사람의 허구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등장하는 각기 다른 여러 대상들을 다 흉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온갖 종류의 허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이 저마다 한 가지 일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지 많은 일을 그렇게 할 수 없다(394e)는 일인일기의 원칙 즉 한 사람이 하나의 전문 기술을 가진다는 원칙에 비추어보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을 다 똑같은 수준으로 다 잘 흉내 낼 수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좋은 것 나쁜 것 가리지 않고 흉내를 낼 경우 그러한 모방은 시가를 배우는 어린이들 특히 수호자가 될 사람들에게 아주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모방 자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일인일기의 원칙에 따라 시가 교육과정에서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은 물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흉내 내는 시인들과 음송인 내지 배우들의 행태가 초래하는 해악을 비판하는데 있다. 특히 수호자들은 플라톤의 처음 주장대로 일인일기라는 전문가 주의 원칙에 따라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을 포기하고 ‘엄밀한 뜻에서 이 나라의 자유의 일꾼들’이어야만 하므로 시가 교육 단계에서부터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처럼 분별없이 온갖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행위들과 온갖 종류의 나쁜 소리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 절제 있고 경건하며 자유로운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에게 모방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모방은 배움의 중요한 양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다름 아닌 그 모방의 대상과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온갖 다양한 사람들의 행위나 소리들을 흉내 내거나 묘사해내는 능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문 기술이자 능력으로서 이른바 연극배우의 고유한 기능이다. 단 한 사람의 성격과 역할만을 잘 흉내 내고 모방할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배우가 아니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태를 마치 그 사람인 양 똑같이 흉내, 즉 연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연극배우가 갖는 고유 기능이다. 그리고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 가치가 요구되는 그 만큼 그러한 능력 있는 연극배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나 연극배우를 일인일기 내지 전문가 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로 비판하고 있는 플라톤의 관점은 사실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게다가 연극배우들이 다양한 행위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연기에 불과하다. 악역만을 전문으로 하는 연극배우가 악한 사람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 그럼에도 굳이 플라톤이 일인일기 원칙에 입각하여 시인들이나 배우들에게 비판을 퍼붓는 배경에는 이미 선대의 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은 물론 당대에 활동하던 기존 시인들의 행태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부정적인 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서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396e) 이미 당대의 시가에서는 수호자가 모방을 통해 배울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호메로스 등 선대 시인들은 시가를 지으면서 이미 신과 영웅들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며, 당대 시인들 역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시가 교육 과정에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규모의 연극을 통해 유포 재생산함으로써 어린이들과 대중들을 그릇된 가치관으로 이끌어 아테네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당대 시인들은 물론 음송인들과 배우들 모두 그릇된 시가 내용을 무분별하고 반성 없이 지속적으로 모방하고 유포함으로써 단순히 시의 창작이나 연기행위를 넘어 그것을 그들 자신의 삶인 양 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대중들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분별력을 잃고 자신의 고유 욕망을 넘어 서로의 욕망을 넘보게 되면서 각기 다양했던 모두의 욕망이 종국에는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의로운 나라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는 좋고 나쁨에 구애 없이 무분별하게 모방을 일삼는 이러한 시인들과 음송인들, 배우들의 삶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모방 양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시가 교육이나 예술 교육 자체가 갖는 중요성까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중요한 만큼 더욱 철저히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서 지고의 진실로서 신의 선성을 토대로 기존의 시가 교육과정을 철저히 재편하려는 것이다.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는 그와 같이 새롭게 재편된 시가 교육 과정을 통해 당대의 시인들과 다르게 오직 신과 영웅들의 선한 모습을 모방하고 배움으로써 훌륭한 수호자로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온전하게 수행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대 시인들과 시가 교육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수행할 수호자들의 교육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고 엄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대 시가와 시인들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예술인 내지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그들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자유주의적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매우 중차대한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처럼 시가 내지 예술 교육이 미치는 영향은 심대하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시가의 이야기 서술 방식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마무리 한 후에 시가가 갖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매우 상세하게 이어간다. 시가에서 이야기 서술 방식이 갖는 중요성도 크지만 시가가 일종의 노래의 형식을 갖고 음송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가 교육에서 음악적 요소가 차지하는 영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