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 이광석의 『피지털 커먼즈』(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메타버스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손보미(다중지성의 정원)

 

올해 국내 구글 사용자가 가장 많이 찾은 검색어는 ‘로블록스’였다고 한다. 로블록스는 주식회사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작하고 배급하는 온라인 게임의 이름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정리된 이 게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로블록스는 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 및 게임 제작 시스템이다.”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은 엄밀히 말해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기보다는 온라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이고 따라서 ‘로블록스’도 온라인 게임 플랫폼의 이름인 셈이다.

구글 코리아의 검색어 순위 발표에 이어, “어서 학원 가서 게임 배워야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도 떴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로블록스’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제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과 수강생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로블록스를 ‘게임계의 유튜브’라 칭하며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주식이 올해 ‘메타버스 대장주’로 불렸었다는 사실로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로블록스를 검색하고 또 이 플랫폼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먼저 이 책 『피지털 커먼즈』부터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책에 따르면, 현재 특정 기업들의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은 자본의 가두리치기(인클로저)용 장치들이다.

 

“오늘 ‘메타버스’라 불리는 기술문화 차원의 신생 공간은 또 다른 기술 세례와 축복에도 불구하고 바로 피지털계의 본격적인 인클로저를 알리는 서곡으로 볼 수 있다.” (7)

 

<‘온라인 플랫폼달콤한 신개념 가두리>

 

저자는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을 양봉장에 비유한다.

 

“플랫폼은 입주자와 이용자에게 차별 없이 놀 자리를 깔아 주고 각종 서비스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듯 보인다. 이들 입주자와 이용자 누리꾼은 마치 플랫폼에서 꽃밭 속 꿀벌처럼 자유롭게 데이터를 생성하고 주고받으면서 ‘화분’과 꿀 채집 활동을 한다. 누리꾼은 형식상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용상 플랫폼 임차인에 가깝다. 그날그날 본능에 이끌려 꿀을 채집해 플랫폼 벌통에 채우는 일벌과 같다.” (25)

 

공통의 에너지와 부를 기업의 이윤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 가두리를 치는 일이 물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과거와 지금의 다른 점은 그 포획 방식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작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생산공정을 통해 착취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서 신개념 작업장은 마치 양봉자가 벌통으로 꿀벌을 유혹해 수확물을 거둬들이듯, 플랫폼 앱 장치를 통해 일꾼들을 유혹해 억압 없이 자발적 노동을 끌어낸다.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노동은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즐거운 놀이와도 같아서 『제국의 게임』의 저자 다이어-위데포드는 이를 ‘놀이노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꿀벌이 꿀을 모으는 일이 애초에 양봉장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듯이 현재 온라인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활동들, 심지어 놀이라고 불릴만한 즐거운 활동들도 애초에 기업 주주들에게 이윤을 안겨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여기에 달콤한 신개념 가두리의 핵심이 있다. 지금 활발히 작동 중인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수많은 유인책을 통해 놀이를 포함한 생명의 다양한 활동들, 심지어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데이터 사회>

 

책의 표제어로 쓰인 ‘피지털’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피지컬’(물질)과 ‘디지털’(비물질)이 혼합된 지금의 현실을 ‘피지털’이라 부르고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세계를 ‘피지털 계’라 부른다. 그런데 ‘피지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이 피지털 계에 가두리를 치고 우리의 생명 활동을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자본주의는 플랫폼이라는 장치를 통해 … 인간 산노동은 물론이고 인간 의식과 생체리듬의 데이터 활동을 사유화된 가치 체제로 흡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6)

 

자본은 무엇 하나 평등하게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지컬과 디지털이 혼합된 피지털 계가 자본주의를 만나면 디지털 세계의 기술 논리로 피지컬 세계의 지형과 배치를 좌우하는 데이터 사회가 된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피지컬 에너지(물리적 힘)가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으로 포획되는 사회였다면, 데이터 사회는 인간의 피지털 에너지(물리적, 인지적 힘)가 주요 동력으로 포획되는 사회다. 즉 데이터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피지털 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데이터 사회, 즉 디지털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왜곡된 피지털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 질서를 향한 강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피지털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안 실천들을 통칭하는 이름이 바로 ‘피지털 커먼즈’다.

 

<피지털 커먼즈>

 

자본주의의 플랫폼 장치들을 통해 왜곡된 피지털 질서는 20세기말 한때 디지털 혁명으로 크게 번성했던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을 빠르게 쇠퇴시키고 있다.

 

“동시대 플랫폼 질서는 무한 복제, 비경합성, 한계비용 제로, 익명성 등 아이디어와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과 크게 배치된다. 영원히 ”자유롭고자 하는“ 디지털 정보의 본성은, 인류의 잠재적 창작의 원천이 되고 복제와 공유를 독려하면서 디지털 ‘자유문화’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95)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안을 고민할 필요를 역설하며 정부와 기업의 과도하고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제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요구와 감독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오, 남용을 막기 위해 다중 스스로 펼치는 문화정치 전술 또한 중요한데 대표적인 예로 핵티비즘(데이터 행동주의)이 있다.

데이터 행동주의는 기술시장 논리에 의해 몇몇 소수의 손아귀에서 자본의 구미에 맞춰 이용되고 있는 데이터를 원래 그 데이터의 주인들이 볼 수 있도록, 또 그 데이터들이 다른 질서 속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하는 활동이다.

 

“‘스노우든 아카이브’는 캐나다 기자, 대학, 시민단체의 공동 연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글로벌 시민 다중이 언제든 권력의 기록에 접근해 검색하고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통의 지식 커먼즈가 되었다.” (98)

 

<피지털 커먼즈는 생태 커먼즈>

 

자본의 인클로저의 다른 이름은 생태계 파괴다. 물론 지금 피지털 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클로저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기업들은 자유롭게 확산하고 다양하게 펼쳐져야 할 비물질적 에너지들을 데이터의 형태로 사로잡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이터 센터에 가둬두고 있는데 이 를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얼마 전에 구글은 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를 바다에 집어넣는 실험을 했다. 한 플랫폼 기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뭇 생명이 사는 터전인 바다에 뜨겁게 달아오른 거대한 쇳덩이인 자본의 수장고를 집어넣은 것이다.

지금의 플랫폼 기업들은 생태계의 파괴를 더 많은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고 있기도 하다. 공기와 땅과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그래서 슬퍼야 마땅한 현실이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더 오랫동안 게임 플랫폼의 세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기쁜 현실이 된다.

따라서 디지털 사회를 넘어설 대안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은 곧 자본의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 문제에 관한 관심 없이는 피지털 커먼즈 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피지털 커먼즈는 곧 생태 커먼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피지털 질서는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질서다. 이를 넘어서려면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즉 착취하고 수탈하고 결국 죽이는 질서가 아닌 살리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에 저자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명 존중 없는 혁신 논리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위태로운 생태 약자들을 중심에 둔 공생기술 전망이 필요하다. 물론 그 시나리오에는 인간 중심의 지구 구출 시나리오를 넘어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타자화된 인간 종을 비롯해 동물, 기계종, 돌연변이, 자연사물 모두를 살리는 공생공락의 차이 속 연대가 요구된다.” (377)

 

목초지에 울타리를 세우고, 강에 댐을 만들고,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고 또 자유로운 디지털 세계에 자본주의적 양봉장이 들어설 때, 자율적인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모든 활동이 자본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해 생명을 강탈당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디지털 꿀통 걷어차기>

 

피지털 계는 인간의 감각을 바꾸었다. 각종 디지털 기기와 결합한 인간은 감각과 인식의 확장 속에 있다. 관건은 이 확장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객체들과 민주적인 힘을 더욱 확장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피지컬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하는 ‘인간’ 의식 속에 모든 걸 가둬버릴 것인가.

로블록스 플랫폼에서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과연 어떤 확장 속에 있을까. 당연히 후자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의 삶 곳곳에는 늘 우연적인 만남이 존재하고, 그 어떤 척박한 곳에서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칭송하며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심각한 생태 재앙 속에 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디지털 꿀통이 선사하는 일시적인 안락함과 즉각적인 쾌락들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그 꿀통을 미련 없이 걷어차고 성공적으로 걷어치워 버릴 수 있는, “다른 삶과 범 생명 공존의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방법으로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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