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④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④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김훈의 『강산무진』에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무기력함이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게 조탁되어있다. 죽음의 두려움이 주는 고통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경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죽음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쁜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기쁜 인생을 향유하지 못한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은 자기 삶의 최종적 파멸로서의 죽음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란 살아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감각에 의존하는데, 죽으면 이러한 감각을 잃게 된다.” 즉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쁘게 되지도 않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된다. 우리가 죽게 되면 죽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고통이란 죽음을 경험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닥쳤을 때라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기에 죽음이 두려운지 조차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이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순간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동요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유령과 같은 허상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공포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죽음 다음가는 공포는 신에 대한 공포다. 모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불행해진 이유가 신이 불경한 자기 행동에 분노하여 징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제사장들에게 재물을 제공하면서 신의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엄청난 비합리성이 판을 치는 불의한 사회가 되어버린다. 종교적 권고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신에게 공양하는 범죄를 신성한 의례로 여기게 하는 미혹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종교로 인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악의 심연(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은 인간의 삶을 고통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인간의 행위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등의 감정을 함부로 남발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신은 불멸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 따라서 그의 불멸성과 축복에 어울리지 않는 속성들, 즉 걱정, 근심, 분노 등을 신에게 갖다 붙이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신은 인간과 같이 근심하거나 걱정에 휩싸이고 분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악한 자들은 신의 징벌을 통해 불행해지고, 자기에게 선한 자들은 신의 축복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이나 하는 것이지 지성적 존재인 신이 취하는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런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며, 아무런 징벌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즐거움의 항구

 

나이를 먹을수록 활력과 정열은 예전 같지 않다. 의욕은 있으되 청년의 정력적 활동을 따라가기란 역부족이다. 주변에서는 활력을 갖고 젊게 살기 위한 노력을 주문하면서 젊은이들 못지않게 열심히 활동하는 노년들을 보여준다. 이른바 청년 시절의 삶을 노년에서도 반복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 같이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한 노년의 삶이랄 수 있을까?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젊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노인을 행복하다고 해야 한다. 젊은이는 혈기왕성해서 운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하지만 노인은 항구에 정박하듯 제 나이에 닻을 내린다. 하여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즐거운 일이라 감사히 여기며 [그 경험을] 안전한 곳에 가져다 둔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청년보다는 노인이 더 행복할 수 있다. 청년은 언제나 자기 운수의 행로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만한 방향으로 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행복을 판별한다. 하지만 노인은 좀처럼 운수의 향방에 따라 자기 인생의 복됨을 결정하지 않는다. 노인은 항구에 굳건히 정박한 배처럼 운수가 어떤 변덕을 부리든 상관하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경험을 관조하면서 그 속에서 얻은 기쁨을 발견하는 즐거움에 행복감을 느낀다. 비록 새벽잠이 없어서 매번 외로운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로 인해 하루가 시작되는 신비로움을 고요히 응시할 수 있고, 두뇌 활동이 예전 같지 않아 빠른 독서는 하지 못해도 느릿한 독서는 구절마다 배인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만든다. 젊은 시절 성급하게 놓쳐버린 경험의 다양성은 노년이 주는 완상의 기회 덕분에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좋은 일들을 잊고서 그는 오늘 이미 노인이 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과거의 즐거움을 기억하는 사람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지만 새로운 쾌락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금세 늙는다는 말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이란 대체로 완상과 관조의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청춘의 즐거움 속에서 살게끔 만든다. 고통의 제거란 생의 경험 속에 내재된 기쁨의 요소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관조를 통해 자신이 겪은 경험 속에 내재한 좋은 일들을 간수하지 못하고 망각하게 되면 그는 고통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청년이어도 노년의 고통을 겪는다. 반면에 경험 속에 내재한 좋을 일을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관조할 줄 알면 노인이어도 청년을 살게 된다.

에피쿠로스에게 나이가 듦에도 젊게 사는 인생이란 청년의 삶을 모방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노인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첫 걸음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경험을 완상하며 즐거움의 계기를 발견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갈 때 젊은이의 그것과는 다른 삶의 활기를 얻게 될 것이다. 항구에 닻을 놓고 생의 즐거움을 완상하는 것. 이것이 청춘을 사는 노년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