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의 새를 노래할 수 있어’를 보고[흐린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타인의 고통받는 얼굴에 관해

1)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이하 ‘너의 새는’)는 청년의 절망감을 주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제목이 좀 특이한 데, 원래 비틀즈의 노래다. 노래 가사는 ‘너는 너의 새가 노래할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 너는 나를 갖질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너의 새가 죽더라도 나는 늘 너의 곁에 있는데’라는 뜻으로 보인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는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 사토 야스시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다. 사토 야스시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40세 자살했으니, 남긴 작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내가 접한 것은 딱 한 권 ‘황금옷’이라는 단편집이다. 그 작품집에는 세 단편, ‘황금옷’ 외에 ‘오버 더 펜스’, ‘여름을 쏘다’가 들어 있다.

그의 작품은 많이 영화화되었다. ‘오버 더 펜스’라는 작품도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그 밖에도 ‘그곳에서만 빛난다’라는 영화도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고 한다. 그가 나이 서른 무렵 1980년 경 쓴 작품인 ‘너의 새는’은 2018년 미야케 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영화 ‘너의 새는’은  연애 이야기이다. 여기서 세 명의 주인공이 즉 화자인 나와 사치코, 나의 룸메이트인 시즈오가 등장한다. 배경은 일본의 바닷가 작은 도시이다. 나와 사치코는 작은 서점의 알바생이다. 시즈오는 직장을 구하는 중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 사람의 연애 이야기이다. 핵심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나’는 길거리에서 서점의 점장과 함께 가는 사치코를 만난다. 사치코와 ‘나’는 서로 가까워지고 ‘나’는 사치코를 자취방으로 데려온다. 나에게 무언가 기대했던 사치코는 점차 시즈오에게 기대게 된다. 시즈오가 캠핑을 가자 하자 사치코는 따라나서지만, ‘나’는 포기한다. 이미 사치코의 감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치코는 돌아와 ‘나’에게 시즈오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영화 마지막에 ‘나’는 떠나는 사치코를 쫓아가서 고백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나의 삶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2)

얼핏 삼각관계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남녀 주인공의 성격이 매우 독특하기 때문이다.

우선 남자 주인공을 보자. 화자인 ‘나’는 대학은 졸업했지만, 서점에서 알바를 한다. 그는 달리 취직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평생 알바를 할 것 같다. ‘나’는 자신이 사회로부터 밀려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나’는 성실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직장에 제시간에 나가는 법도 없다. ‘나’는 일도 건성으로 하며 책 도둑을 쫓아가지 않았다는 사장의 책망을 듣고도 “자르고 싶으면 자르시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반발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조 같이 들린다.

‘나’는 세상과 고립적으로 살아간다. ‘나’에겐 다른 친구가 보이지 않는다. 시즈오와는 가깝지만, 필요에 따라서 함께 살 뿐이다. 다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한에서만 가까이할 뿐이다.

‘나’에게 여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치코를 그저 함께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하거나 가벼운 육체적 관계를 맺는 정도로만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듯 보이지만 그것을 벗어날 생각도 없으며 이미 그것이 절망이라는 느낌조차도 사라져 그저 일상이 되었다. 남들이 그런 ‘나’를 비참하게 본다면 ‘나’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어때서?”

주인공의 이런 처지는 외적은 풍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화가 전개되는 계절은 끈적끈적하고 무더운 여름이다. ‘너의 새’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9월이 되어도 10월이 되어도 다음 계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 풍경은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 ‘여름을 쏘다’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1층 지붕에 가늘고 길게 펼쳐진 그림자 속에서 다리를 접고 쭈그려 앉아 한여름의 햇살이 기세를 누그러뜨릴 때까지 날갯죽지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 않고 버텨 내는 것이다. 그 좁은 그림자 속에 일렬로 늘어서서”

3)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는 주인공의 절망감을 표현할 뿐 절망감에 사로잡힌 이유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단서를 찾자면 우선 작가 자신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토 야스시는 49년 출생이니 아마도 60년대 초 대학을 다녔을 것이다. 이때 일본에서 전후 체제를 비판하는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가장 격렬했을 때다. 그의 소설을 보면 그도 이런 운동에 약간은 가담한 걸로 보인다. 70년대 초 적군파 파문 이후 일본 학생운동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일본 주식회사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그의 절망의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토 야스시의 작품 속에서도 그런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오버 더 펜스’에서 주인공은 도쿄에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와 직업훈련을 받고 있다. 그는 무언가 작은 것이더라도 성취하려는 야망을 지닌 교관을 보면서, 도쿄에서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상사를 연상한다.

처음엔 주인공도 일본 주식회사가 감추고 있는 억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그저 일개미처럼 살아갈 뿐이다. 그 억압은 오히려 그의 아내에게 나타난다. 아내는 아이를 낳은 후 우울증을 겪으면서 심지어 아이의 얼굴을 방석으로 눌러 죽이려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아내와 아이를 친정으로 데려다 준다. 얼마 뒤 아내는 장인을 통해 재출발하겠다면서 편지를 보낸다.

비로소 절망이 그를 사로잡았고 그도 사표를 내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든 것을 잊으려 한다.

“도쿄 생활이 점점 의식에서 사라져 갔다. 겐이치와 다이시마가 물어오면 도시에서 쫓기며 살아가는 게 넌더리가 났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다 보면 그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깡그리 잊고 말 것이다.”

4)

여자 주인공 사치코도 역시 어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치코를 사로잡은 절망감은 사치코가 서점 주인과 맺은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사치코는 서점 주인장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관계가 어떤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치코는 이를 잘 안다.

사치코는 헤어지고 싶지만 헤어지는 일조차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서점 주인이 매달리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전체 맥락은 만일 헤어졌을 때 사치코 자신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사치코는 주인공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서점 주인과의 관계를 벗어나 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나’란 인물과의 관계 역시 어떤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다.

사치코는 ‘나’의 그런 반응에 대해 실망하면서 다시 그런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사치코는 서점에 나가지 않고 시즈오를 불러내 시즈오에게 다가간다. 시즈오는 적어도 사치코와 닮은 점이 있다. 시즈오는 아직 하늘의 별과 숲에서의 고독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치코는 시즈오를 따라 캠핑에 가고 시즈오와 연인 관계에 이른다. 하지만 이 역시 사치코가 진심으로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키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치코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고 그 점에서는 ‘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의 경우는 자신의 절망을 절망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저 그런 삶일 뿐이다. 그러나 사치코는 다르다. 아직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려고는 기대를 그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치코는 고통스럽다. 사치코가 지닌 내적 고통은 사치코가 시즈오와 함께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에서 조금은 드러난다.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낸다. ‘황금옷’의 여자 주인공 아키는 이혼했다. 남자는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와 자고 다녔고 그것에 반발하듯 아키 역시 남편의 친구와 더불어 잠을 잤다. 서로 무관심한 상태에서 1년 후 헤어졌다.

그런데 아키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러워 한다. 아키는 이 고통을 억누르고 있어서 평소에는 밝은 모습이다. 하지만 때로 이 고통이 그녀의 빈틈을 비집고 솟구쳐 오른다. 그런 고통은 때로는 정신적인 병이 되어 나타난다. 아키는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집에 오면 온몸을 거의 강박적으로 깨끗하게 씻는다.

“이렇게 씻잖아. 그러고 나서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도로아미타불이야. 몸이 완전히 더럽혀진 느낌이 들어. 할 수 없이 다시 샤워를 하거나 이렇게 수건으로 닦는 거지.”

‘너의 새는’에서 사치코에게 이런 강박증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아마도 사치코에게도 이런 모습이 감추어져 있지 않을까 충분히 짐작된다.

5)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가 간단치 않은 것은 바로 남녀 주인공이 가진 이런 내적인 풍경 때문이다. 풍경은 공허한 풍경이다. 이런 공허한 풍경 가운데서도 이들 주인공이 오직 하나의 삶의 감각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육체적인 것에서 발견된다.

‘너의 새는’에서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힙합 클럽에 가서 오랫동안 춤을 춘다. 그들의 춤 속에 내적인 갈망이 리듬으로 표현된다. 영화는 그들의 춤추는 모습을 상당히 길게 잡아준다.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육체적인 것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황금옷’의 주인공은 수영을 즐기며, 작가는 이 모습을 이렇게 그려낸다.

“손발을 한껏 뻗어서 물의 감촉을 즐겼다. 이런 감촉만으로 아키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에게 이 세계는 수영장을 가득 채운 물 같은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즐겁게 헤엄쳤다. 아키를 생각했다. 그녀도 이렇게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바다에 떠 있다 보면 수영장에서 헤엄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나를 데려와 줘서 고마워.’ 물론 미치오의 말이 옳았다. 아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적었지만 25미터 거리의 수영장에서 헤엄치 노라면 좁아 터진 수조에서 사육 당하는 물개가 된 기분이었다.”

이들이 육체적 감각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절망이 일본 주식회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런 일본 주식회사를 넘어선 어떤 사회, 그 속에서의 삶일 것이다. 그들이 오직 기쁨을 발견하는 섹스 역시 그런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새로운 사회와 삶은 실현될 수 없다. 그들이 그런 삶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이 춤과 수영을 통해 얻는 감각적 즐거움이란 하나의 잔재이다. 이런 잔재는 말라비틀어진 삶의 잔재, 마치 목마를 때 콜라를 마신 듯한 느낌일 뿐이다. 막연하게 또는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느낌이 그런 것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은 카뮈 이방인의 뫼르소를 닮았다. 그들 주인공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고립된 채 뜨거운 여름 지중해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 뫼르소를 연상시킨다.

6)

이제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이해해 볼 때다. 사치코가 시즈오와 연인 관계를 맺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처음에 담담하다가 사치코가 떠나자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가 나의 삶은 거짓이었다고 말한다. 이는 ‘나’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전환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영화만으로는 그 전환의 계기가 불투명하다. 아마 원작인 소설을 보았다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지금까지 참조한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을 통해 그런 전환의 계기가 약간은 드러난다.

‘황금옷’에서 주인공은 아키가 강박적으로 몸을 씻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아키가 약을 먹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진 것인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인공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깨어난 것이다. 이 소설은 남자 주인공의 냉담함은 여자 주인공의 고통을 통해 깨어지는 구조를 가진다.

‘너의 새’의 경우에도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사치코가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치코가 시즈오와 함께 노래방에서 노래할 때다. 사치코가 부르는 노래는 그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주인공인 ‘나’는 없었고 오히려 시즈오가 옆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면적 고통은 무의식적으로 주인공 ‘나’에게 각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나’가 화장실에서 동료가 사치코를 비난할 때 갑자기 흥분하여 동료의 머리를 벽에 처박는 장면을 보면 그런 각인의 흔적이 엿보인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사토 야스시의 소설 구조는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신을 보게 되며 신의 명령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