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시민불복종의 문제[고전은 숨쉰다]

이기백(정암학당 연구원) 

시민불복종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역설.
공자는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 싶어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논어 위정편 4장)”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 나이에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 받고 독배를 든다. 과연 그는 그런 극형을 선고받을 만큼 뭔가 심각하게 법도를 어건 것일까? 그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 죄목으로 봐서는 그가 윤리적· 종교적인 면에서 심각하게 법도를 어겼다는 혐의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 죄목은 구실이고, 그가 기소된 진짜 이유는 당시 집권을 한 민주정권의 정적들 중 일부를 이들이 젊은 시절에 소크라테스가 교육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유력하게 제시되곤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목이 부당하다고 여겨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고, 또한 선고 후에도 크리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심원들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넌지시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크리톤≫ 50c, 54c). 하지만 그는 친구인 크리톤의 탈옥 권유를 물리치고 독배를 든다. 그가 탈옥을 거부한 이유는 ≪크리톤≫에서 접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와 법의 명령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견해를 제시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악법, 즉 정의롭지 못한 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변론≫에서는 악법은 단호히 지키지 않을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이를테면 아테네 법이 철학하는 것을 금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이에 불복종하고 철학함을 그의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게 복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준다. 그리하여 그는 시민불복종과 관련해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라 해도 좋을 큰 논란거리를 후세에 남겼다.
그가 보여준 일견 모순된 측면들은 그를 완고한 준법정신의 화신으로, 혹은 시민불복종의 선구로 해석되게 했고, 전문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의 수준에서도 격론을 불러일으켜 왔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실제 입장은 무엇일까? 그는 시민불복종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그는 악법이나 악한 법적 명령도 지켜야 한다는 보는 것인가, 아닌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사전에 없다

악법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악법도 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악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명시적으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음을 보여주는 전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그는 당시 아테네 법이 악법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크리톤≫ 54c).
그는 자신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법이 아니라 배심원들의 잘못된 판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건 훗날 누군가가 ≪크리톤≫의 일부 내용을 참작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가 ‘악법도 법이다’ 혹은 ‘악법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지켜야 한다고 본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크리톤≫과 ≪변론≫은 이런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일차적인 자료일 뿐 아니라, 우리가 왜 국가와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있는가 하는 정치철학적 혹은 법철학적 문제 뿐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위의 두 대화편을 악법 즉 정의롭지 못한 법이나 그런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초점을 맞춰 살펴볼 것이다.

 

≪크리톤≫과 ≪변론≫에서 상충되는 측면들
≪크리톤≫과 ≪변론≫에서 시민불복종 문제와 관련해 상충된 것으로 보이는 점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크리톤≫ 자체 내에서 그런 점을 짚어보고, ≪크리톤≫과 ≪변론≫ 사이에서도 그런 점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크리톤≫은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가 등장하는 지점(50a6)을 중심으로 전반부(46b-49e)와 후반부(50a-53a)가 구분된다. 후반부는 특히 복종의 의무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기서도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법률과 국가가 시민을 어린이와 노예에 비유하여 연설하는 대목이다(50c-51c). 그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조국이 무언가를 겪어내라고 지시하면 두들겨 맞는 것이든 투옥되는 것이든 잠자코 겪어내야 하며, 조국이 당신을 전쟁터로 이끌어 당신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게 되더라도 지시사항을 이행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나라와 조국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

여기서 ‘…무엇이든 이행하든가 아니면…설득해야 한다’는 구절은 해석하기에 따라 시민불복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위 인용문은 국가와 법의 명령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렇게 이해되는 게 옳다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가 된다.

그러나 ≪크리톤≫ 전반부에는 후반부와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는 정의의 원칙들이 제시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정의의 원칙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49b)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상충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변론≫에서도 ≪크리톤≫ 후반부와 다른 논조를 접하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고발자들은 철학하는 일을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을 그만둔다는 조건 아래 배심원들이 자신을 석방해주되 계속 철학을 하다가 붙잡히면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조건으로 자신을 석방하고자 한다면 배심원들보다는 철학함을 자신의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게 복종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29c-d).
소크라테스가 해온 철학적 활동은 사람들이 몸이나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혼이 훌륭하게 되도록 혼에 대해서 마음을 쓰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런 일 말고 “다른 일을 하진 않을 것이며, 설령 몇 번이고 죽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30a-c)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대해선 단호히 복종을 거부할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목숨보다도 철학을 더 귀하게 여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배심원들이 그를 석방해주되 철학을 금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복종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단지 가정적 상황이다. 그리고 아테네의 재판 절차상 현실적으로는 배심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금하는 조건으로 석방을 제의할 수도 그런 판결을 내릴 수도 없었다.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이런 점을 주목하여 소크라테스가 시민불복종의 한 사례를 보여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편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 금지령의 예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크게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예가 가정적 상황 속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여기서 분명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가 크게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단호히 복종을 거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의지는 ≪변론≫의 또 다른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과두정의 주요 인물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를 한때 교육시킨 바 있다고 해서 과두정을 옹호하는 인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30인 과두정권의 명령을 거부한 일도 있었다.
이 정권이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포함해 다섯 사람에게 그를 연행해 오도록 지시했을 때, 그는 이 일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아 연행에 가담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일을 회고하며 배심원들에게 “만약 그 정권이 빨리 무너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이 일로 해서 처형되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32c-d).

이 예도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시민불복종의 사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시민불복종이 성립하려면 30인 과두정권이 적법하게 집권하고 적법하게 명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정권이 적법하게 집권하거나 적법하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레온의 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적법성 여부와 상관없이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는 단호하게 복종을 거부했으리라는 것이다. 실상 그는 레온의 연행이 불법적인 일이어서가 아니라 정의롭지 못하고 불경건한 것이어서 명령을 거부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시민불복종과 관련해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모습 찾기
적어도 ≪변론≫의 두 예와 ≪크리톤≫ 전반부에서 나오는 정의의 원칙은 소크라테스가 악법을 지켜선 안 된다는 입장, 즉 시민불복종의 입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크리톤≫ 후반부에 나타난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의 입장 즉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준법을 중시하는 입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크리톤≫ 후반부가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이 부분의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를 소크라테스의 대변자처럼 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될 때, 같은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대화편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왜 달라졌는가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점을 피하는 한 가지 방식은 후반부에서 의인화한 법률과 국가의 견해를 소크라테스의 견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법률과 국가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웨이스가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법률과 국가가 등장하는 후반부를 탈옥을 권유하는 크리톤을 설득하기 위한 ‘고상한 거짓말’ 즉 한갓 수사적 연설로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은 크리톤이 이해력이 부족하고 비철학적이어서 소크라테스가 그와 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크리톤을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한 인물로 보는 것이나, 소크라테스가 단지 설득만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의문이다. 소피스트들을 상대로 논쟁하는 때에는 이들의 논리를 역으로 이용해 설득만을 위한 논의를 전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크리톤≫과 같은 플라톤의 초기대화편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웨이스의 해석에서는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단절적으로 보는데 이것도 적절한 이해로 보이지 않는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전반부에서 정의의 원칙에 관한 논의를 한 후에 후반부에서 그 원칙들에 근거해서 탈옥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관계를 웨이스처럼 단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 사이에도 큰 관점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가 시민불복종의 옹호자로서 일관된 모습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선 소크라테스를 시민불복종을 부정하는 철학자로 보는 해석부터 검토해보기로 한다.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크리톤≫의 전반부에 나오는 정의의 원칙도 ≪변론≫의 두 예도 시민불복종의 예가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특히 정의의 원칙을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이런 해석은 일단 수긍이 잘 안 간다. 왜냐하면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셈이 되니 말이다.

그러나 브릭하우스와 스미스는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롭지 못한 짓이 아니라 정의로운 일로 보았다고 해석한다. 법이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준법 자체는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크리톤≫의 전반부와 후반부 다 철저한 준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두 부분 사이에 상충되는 점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준법 자체를 정의로운 것으로 보고,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법에 복종하는 것까지 정의로운 것으로 보았다는 그들의 해석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변론≫의 두 예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적법하게 내려진 명령이라 하더라도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는 단호히 불복종할 의지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 불복종 행위를 할 철학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 1권의 논의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에게 “그러나 그들(통치자들)이 제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스림을 받는 이들로서는 이행해야만 하고, 또한 이게 정의로운 것이겠군요?”하고 묻는다. 이 물음은 옳게 제정되지 못한 법, 곧 정의롭지 못한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를 묻는 것인데, 논의 맥락을 볼 때 소크라테스는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 답을 갖고 있다.
즉 정의롭지 못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롭지 않은 것이라면 그로서는 불복종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 된다. 그러니까 ≪변론≫과 ≪국가≫의 예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크리톤≫의 정의의 원칙도 시민불복종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그러면 브릭하우스나 스미스와 달리 소크라테스를 시민불복종의 옹호자로 보고, 웨이스와 달리 ≪크리톤≫의 전후반의 논의에 단절이 없다고 볼 때 이 대화편의 후반부는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크라우트는 ≪크리톤≫의 후반부에서 준법을 가장 강력하게 강조한 부분(50c-51c)이 “나라와 조국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복종)하거나, 아니면 정의로운 것이 본래 어떠한지에 대해 나라를 설득해야 한다”(51b-c)는 결론에 이르고 있음을 중시한다. 설득이라는 선택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법에 대한 불복종의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반부에서 언급된 또 하나의 정의의 원칙, 즉 “합의한 것들은 이행해야 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란 원칙도 중시한다. ‘그것들이 정의로운 한에서’라는 단서는 불복종의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크라우트의 견해는 주목할 만한 견해이긴 하나 그와 관련해 많은 논란이 있어서 여기서는 그 논의로 들어가는 것은 생략하고, 그 대신 기존의 해석과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크리톤≫의 후반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신이든 인간이든 더 훌륭한 자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나쁘고 수치스런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변론≫ 29b)는 말을 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인용문에서 더 훌륭한 자에는 신과 인간에 더하여 법률이나 국가도 포함될 수 있을 텐데, 이들의 명령들이 서로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소크라테스는 더 상위의 훌륭한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변론≫에선 재판과정에서 철학할 것을 지시한 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철학을 금하는 법적 명령(배심원들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의 기로에서, 그는 주저 없이 법적 명령에 불복종하고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쪽을 택하고자 했다. 여기서 신의 명령이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 법적 명령에 불복하고자 했다기보다, 철학함이라는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을 단순히 철학하는 일보다는 비판적 사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차원으로 확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법이나 국가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되어 있지 않다. 이 대화편의 후반부를 이해할 때 이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는 국가나 법의 명령이 무엇이든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법의 명령과 신의 명령이 상충되는 경우에도 오직 법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크리톤≫에서는 국가나 법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이 상정될 상황이 아니어서 준법이 강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크리톤≫에서는 왜 신의 명령이 상정되지 않은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크리톤≫의 상황은 ≪변론≫의 상황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미 재판에서 그는 국가의 법적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철학하라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했고, 몇 번을 죽게 된다 하더라도 철학을 그만둘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는 그가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철학을 그만둘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그 결과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는 사형 대신 해외 추방형을 택할 수도 있었고, 이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도 원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추방되어 신의 명령대로 철학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변론≫37c-38b).―≪크리톤≫에서는 탈옥해서 다른 나라로 갈 경우 철학하며 지낼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그러니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법정의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친구인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하지만,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혹 탈옥이 신의 뜻이라고 그가 생각했다면 ≪크리톤≫에서도 법의 명령과 상충되는 신의 명령(탈옥하라는 명령)이 상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명령이 상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탈옥이 신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이 점은 이 대화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확인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신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니, 그대로 하세나.”라는 말로 탈옥 반대 논변을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민불복종론에서 본 소크라테스의 탈옥 문제
끝으로 오늘날의 시민불복종론에 입각해보다면,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하고 독배를 든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요건으로 거론하는 것을 정리해보면, 불복종은 공개적, 비폭력적, 양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불복종자는 처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소크라테스는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롤즈가 말하는 요건들은 당연히 수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요건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변론≫에서 보는 재판 상황에서 그가 한 이야기에 따를 경우, 법정이 그를 석방시켜주되 철학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그 명령에 불복종했을 것이다. 우선 그는 불복종행위로서 철학하는 일을 일반범죄자처럼 은밀하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했을 것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불복종의 자세는 레온에 대한 부당한 체포 명령과 관련해서 그가 실제로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변론≫의 두 예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에 맞게 불복종 행위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 철학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옳지 않은 법적 명령에도 복종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점은 ≪크리톤≫에서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사형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50c, 54c), 탈옥을 거부하고 그 판결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탈옥을 거부한 것을 시민불복종의 요건들에 비춰서 검토해 보자. 그 요건들에 비춰볼 때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 감옥에 있던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판결에 불복종하고 탈옥을 했다면 그것은 시민불복종이라고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 그 일은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해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교도관에게 뇌물을 써서 감옥을 나오고 변장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양심적인 것으로 보기도 힘들뿐더러, 그렇게 탈옥하는 그에게는 처벌을 받으려는 의지가 있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탈옥해 해외로 간다는 것은 아테네 법정에서 내리는 일체의 법적 처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탈옥했다면 그는 일반 범죄자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시민불복종자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법정의 사형판결에 불복종하여 탈옥을 감행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롭지 못한 판결에 복종하여 독배를 들고 탈옥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를 시민불복종의 옹호자가 아니라고 본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는 분명 시민불복종의 선구라 할 수 있다. 다만 롤즈도 그랬듯이 그는 시민불복종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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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4. 아테네 몰락기 민주정의 타락과 공포정치화

 

확실히 옛날의 위대한 말들은 그 후에도 울림이 있다. 안도키데스(Andokides)는 여전히 대담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사사로운 일에 몰두하는 자들에 의해서 폴리스가 보다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폴리스는 공공의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대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알키비아테스 논박(adv. Alkib.)] 2)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당시 주로 누가 공공의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셈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즉 대단한 애국심이 있는 양 보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들에 대한 불신이 크게 환기되었다고는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나랏 것을 훔쳐(klepptein ta d?mosia) 부자가 되려 한다는 험담을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담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마저도 종종 연단에 오르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분명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한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공직을 맡으면서 거액의 재산을 빼돌렸는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자신을 언제라도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정 하에서 연설가들 내지 선동가들은 변론을 해주거나 반대로 입 다물고 침묵해주는 방식으로 큰돈을 벌어 들였다. 말하자면 연단에는 황금이 묻혀 있었다.(chrysoun theros to b?ma)(아리스토파네스의 [복을 주는 신(plut.)] 377ff) 그들은 연설을 통해 손에 넣은 공직이나 군사 혹은 외교상의 직책을 이용하여 특히 아테네의 패권이 강대했던 시절에는 여러 동맹국들로부터 수많은 선물들을, 재판 당사자로부터는 뇌물을 받아 챙겼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국고에 까지 직접 손을 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무능력하고 수입은 없지만 욕심은 유별난 보통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이러한 소득은 그저 현란한 것으로만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랏돈을 가로 채 부를 축적한 자, 신전과 무덤 그리고 친구마저도 탈취하는 그 자들이란 모반과 위증을 일삼고 거짓선서를 해대는 재판관들이고, 뇌물에 놀아나는 관리들’이었다.(플루타르코스의 [계율집-정치편(rei publ. ger. praec.)] 26) 어쨌든 온갖 종류의 부패가 아테네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재무관으로 있으면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재무관이자 연설가였던 뤼쿠르고스(Lykourgos)도 그 한 사례이다. 아테네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당파가 있었는데 그 당파가 이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에 의해서 매수된 상태였다고 하니 당시 아테네의 부패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4-480년)

 

그리고 소송에서도 원고든 피고든 그 권력과 재력이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판결이 내려졌다. 하물며 이피크라테스(Iphikrates)라는 자는 사형 죄에 해당하는 고소를 당했음에도 젊고 건장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 재판정을 둘러싸게 한 후 단검을 슬쩍 내보이는 방식으로 재판관을 위협하여 무죄를 언도받기도 하였다.(Polyainos III, 9, 15) 그런데 이러한 횡포는 정치적 강자들끼리의 다툼에서 특히 더 기승을 부렸다. 이를테면 이름난 연설가가 선동적이고도 위협적인 연설로 정적을 고발하면 민중들은 그 연설에 압도되어 그 연설가를 진정한 애국자, 정치가로 여기기 십상이었고 또 연설가들은 민중들에게 상대 정적들에 대한 분노를 불러 일으켜 자신들이 저지른 부패를 은폐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안전한 방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찍이 니키아스(Nikias)는 시칠리아 해전에서 병사들 전체가 몰사의 위기를 맞았음에도 적시의 후퇴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그가 아테네로 돌아가 철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기소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동포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의 손에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의 최정예 부대가 궤멸당한 것이다. 연설가들과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놀아나는 시민들의 이러한 무분별과 광기는 이처럼 수많은 장군들과 책임 있는 자들의 결의를 무디게 하고 결단을 주저하게 하였다. 전쟁 대신 평화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한 정황에서조차 나라가 혼란스러워야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보다 더 잘 누릴 수 있다고 여긴 일부 아테네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계속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중상모략과 정당한 고소가 구분되기 힘들게 되자 아테네인들 서로의 불신은 극에 달해 급기야 고소는 또 다른 고소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소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건강의 표시로까지 여겨졌다. 그 과정에서 규정을 바르게 적용하여 제대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공직자 전체가 끊임없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재무관의 직책에 맡으면서 어떤 비리도 저지르지 않았던 뤼쿠르고스조차 고소를 당하자 노환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자신을 소명하고자 마차에 실려 평의회당에 출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소인은 메네사이크모스(Menesaichmos)라는 자 한 명뿐이었다. 결국 뤼쿠르고스는 이 자의 고소를 논박한 후 빈사의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도 메네사이크모스가 다시 그를 고소하자, 시민들은 그들 스스로 화환과 상을 수여했던 뤼쿠르고스였음에도 그 대신 그의 아들들을 감옥에 쳐 넣었다. 그 후 그들에 대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진지한 경고가 있고서야 아들들은 간신히 석방되었다.

뤼쿠르고스(Lykurgos 기원전 338-326년)의독어역본 표지

그런데 국가는 오히려 이러한 제도의 개선은커녕 전면적인 운용을 위해 중상모략가 내지 무고자((sykophant?s : 소송을 직업적으로 일삼는 자)의 위세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대집단의 역할을 자임했다. 즉 밀고가 정식 직업으로서 승인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이 국가도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스파이에 의존한 것만큼이나 이러한 보조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 이 폴리스는 스페인의 왕위와 같이 어느 신격화 된 것, 즉 일탈을 막는 것이라면 어떠한 과감한 수단도 불사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탈 상태가 계속 될 경우 그러한 수단을 통한 통치가 불가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테네 위주의 이 국가주의적 이념은 정상적인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뚤어져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 의해 조장된 이러한 공포정치는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제반 사회적 병폐를 공공연히 용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공포정치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기원전 431년) 후 100년 동안 아테네에서 하나같이 그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게다가 이 공포정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후계자 시대에는 로마인들에게까지 만연되어있었다. 밀고와 무고를 일삼는 직업이 어떠한 부끄러움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임을 한 국가가 인정한다면, 어떠한 시대, 어떠한 민족에서도 이런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국가는 그들을 찾아내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중세를 걸쳐 이러한 일을 명백하게 직업으로 인정하고 시민 모두를 그 감시 하에 둔 것은 그리스 민주정뿐이었고 게다가 그것이 완전한 상태로까지 나타난 것 또한 오직 아테네 민주정뿐이었다. 그러나 아테네 하층민들로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할 것까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처지와 사정은 물론 기분에도 부합하는 것이어서 이미 마음속으로 모두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섬의 소송의 증인이야. 밀고자이자 염탐꾼이지. 쥐구멍 파는 것은 사양해. 나는 이미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밀고로 살아오고 있으니까.” 이렇게 아리스토파네스의 [새(Aves)](1423행 이하)의 등장인물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쨌든 희극 작가들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밀고자라고 하는 인물을 마음껏 희화화해 주려는 유혹과 즐거움을 그들은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무고를 일삼는 자들은 모두 애국자처럼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폴리스와 “현행법”을 보위하는 자로 여겼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 무리가 주로 염탐하고 있었던 것은 일단 명분상 시민들이 국가의 요구에 충분히 응하고 있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횡포를 재제할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무고자가 자기가 고소한 소송에서 적어도 배심원의 5분의 1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경우 그는 1000 드라크마를 벌금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그가 제기한 소송건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경우에도 1000 드라크마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배심원 재판에서 5분의 1의 찬동자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 무고자는 벌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경우에도 통상 지불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버티었다. 뤼시아스(Lysias)의 시대에 그러한 미납액이 연체되어 1만 드라크마나 되었던 자(아고라토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배심원으로서 출석하고, 민회에도 얼굴을 내밀면서 여전히 모든 종류의 나랏일과 관련한 소송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끊임없이 이런 무고자들의 포위공격을 받고 있었다. 니키아스는 일생동안 무고자를 두려워해 늘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와 그가 이끈 군대의 운명에 얼마나 중대한 결정을 미쳤는가는 이미 말한 바가 있다. 크세노폰(Xenophon)의 저작에 나타나는 훌륭한 남자의 모범인 이스코마코스(Ischomachos) 또한 종종 밀고당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배울만한 것은 소크라테스(Sokrates)가 이스코마코스처럼 박해받고 있던 크리톤(Kriton)에게 던진 아래와 같은 근사한 충고이다. “무고자를 막아 줄 사람을 돈으로 끌어들여라.”(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Memor.)] II, 9, 1) 다행히도 크리톤은 무고자를 막아줄 사람으로서 아르케다모스(Archedamos)라고 하는 인물을 찾아냈다. 이 남자는 무고자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무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크리톤과 그의 친구들은 다 그를 의지하고 존경하였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이 아르케다모스 같은 유용한 무뢰한을 자신들의 식탁에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주정을 뒤엎고 권력을 잡은 30인 참주들은 다수의 무고자를 잡아 사형에 처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이내 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첩보자들을 이용해 의도된 목적을 완전하게 달성했는데 그것은 이 첩보자들이 이 기관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세뇌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아테네에서 무고에 의한 소송건은 그 성격과 목적이 달랐다. 즉, 무고자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송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소송 당사자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금품을 대가로 상호협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테오크리네스(Theokrines)는 친 형제의 살해자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소송을 철회하고 있다.(데모스테네스의 [테오크라테스 논박(in Theocrin.)] p. 1331) 그러니까 폴리스가 달성한 것은 일종의 악취 즉 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 죄를 범한 사람들 내지 선동정치가들과 그 배후에 있는 무고자들과의 거래와 타협 같은 것들이었다. 이 악취 가득한 행태들은 공공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가장 뛰어난 상당수의 시민들로 하여금 공공 생활로부터 남몰래 혹은 공공연하게 등을 돌리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안전책이었지만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추첨으로 어떤 직무에 선택된 사람이 최종 합격을 위한 심사(dokimasia)를 받아야할 경우 무고자는 즉시 그 개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권이 생기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무엇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 그런 짓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그래서 이 무고자 집단은 끊임없이 사람들 곁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고에 대해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착실한 사람들은 무고를 당하면 어떻게든 힘을 다해 소송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무고자들 또한 소송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막상 소송에 말려 들어갔을 경우 소송 경비에서 기소인의 몫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적절히 사전에 타협을 해 소송을 중도에 취하하게 했을 경우에는 별도의 금품을 뜯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소송이 진행된 후 무고자가 그것을 철회했을 경우에는 1000 드라크마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 돈 또한 그 희생자에 의해서 몰래 충분히 벌충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무고자는 소송을 계속했다. 고령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신을 모독하였다는 협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 또한 아마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낼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에우보이아)로 피해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그는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보낸 편지에다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알키노오스(Alkinoos)의 정원과 같이 무화과(sykon)가 우거진 마을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발음의 유사성을 토대로 무화과(sykon)로 무고자(sykophant?s)를 비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년)

그런데 아테네는 이런 종류의 무고자들을 조력자로 이용하면서 어쨌든 국가 기구로서 존속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생명력의 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어떠한 범죄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위협, 국가의 안보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의심되었고 그에 따라 소송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으로 급변하는 경향이 자주 있었다. 또 국가는 그리스인 본래의 종교로까지 추켜세워졌던 터라 형벌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을 훼손한 대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형벌이 비정상적으로 엄중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벌금형과 시민권 박탈과 함께 형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사형이 전혀 중대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서마저 적용되는 일도 생겨났다. 이처럼 폴리스는 때때로 광분상태에서 판단력도 없이 형벌을 쓸데없이 휘둘렀다. 이런 까닭에 가끔 누가 보더라도 국가에 대한 명명백백한 범죄라고 인정될만한 사건이 생겼을 경우에는 재판의 엄정성에 대한 본때라도 보이려는 듯 그 범죄 혐의자에게 국가에 대한 모반죄를 씌워 가장 엄한 벌로 처벌하였다.

뤼쿠르고스의 레오크라테스(Leokrates)에 대한 논박 연설은 그와 같은 모반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대표적인 고소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신성모독에 대한 고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들을 모욕하고 또 신들의 존재를 의심한 것에 대한 폴리스의 보복과 실제로 그 신들의 윤리적, 신학적 용렬성 사이에 존재하는 우스꽝스러운 불균형은 아테네 이외에 일찍이 어디에서도 존재한 적이 없다. 이런 종류의 단죄 방식이 만일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환상(phantasia)’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 그것은 아테네의 재판관들이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판결만을 내리고 있었다거나 또 당시의 유력자들이 광분상태에서 제멋대로 내린 판단이 거의 없었다고 가정할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명심해야 할 것은 소송의 수단으로서 시민에 대한 잔인한 고문이 아테네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포키온(phokion)편 35) 이 고문은 노예를 고문하던 주인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 유사물이었으나 사실 그것은 페리클레스 이래 아테네 그 자체가 견지하고 있었던 이념 ? 즉 아테네 제국주의와 민주정의 결합 ? 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했다. 아테네는 일단 자신의 국가주의적 이해와 관련된 사안의 경우 그것을 혐의지우거나 적발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다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5.?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다음에 계속)

 

 

최초 여성해방론자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의 주제 [Q 선생의 閑談]

[Q 선생의 閑談]

최초 여성해방론자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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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규성 (e-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화여대 교수)

1922년(26세)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1971, 평남 용강출신)는 「일체의 世慾을 斷하고」라는 글을 통해 “슬프고 아프던 때는 사라져 버렸다”고 선언하고, 자신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를 통렬히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결의를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내 인격을 후욕(?辱)하고 내 이름을 더럽히던 속상(俗尙)에서 나는 뛰어나왔다. 나는 지금 인생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허영도 다 ? 버렸다. 나의 행동을 변호해 줄로 믿었던 소위 재래의 모든 전통적 사상을 파괴한다는 사회주의자 무리에서도 나는 뛰어나왔다. 아! 나는 절실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개인주의!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 말인가? 나를 이제부터 살리고 나를 완성해줄 이는 오직 신개인주의 밖에 없다. 나를 완성하자. 그리고 내 자아 가운데서 엄숙한 인생을 창조하자.”
김원주는 1920년 도쿄 영화(英和)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여 그해 4월 재산이 있었던 남편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해방 잡지 『신여자』를 4호까지 발행한다. 남편 이노익(李老翊)과의 결혼(1918년∼1921, 4년간)은 김원주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 없는 무의미한 생활이었다. 여성이 주체가 되어 만든 최초의 잡지는 무의미한 생활의 청산(자유이혼)과 이로 인한 재정결핍으로 좌절된다. 그 후 김원주는 경제적 독립을 여성해방의 선결조건으로 절감한다. 당시 일본의 다이쇼(大正) 생명주의 시기에 민주주의와 여성해방론과 연관하여 유미주의적 개인주의 사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여성해방론은 스웨덴의 엘렌 케이(Ellen Key)의 진화론적 모성주의와 아동보호론을 배경으로한 ‘연애의 자유(freedom of love)’가 거친 ‘자유연애(free love)’로 중국과 한국에 유포되었다. 김원주를 비롯한 당시 신여성들은 엘렌 케이의 개인의 존엄성에 바탕한 연애론에서 인격존중에 의거한 연애와 충실한 사랑이 없는 결혼의 무의미성 및 자유이혼론을 수용했다. 이러한 사상은 봉건적 가부장 문화를 배경으로 한 조기 강제결혼을 비인간적인 처사로 인식하게 했으며, 여성의 자각적 주체성을 모색하게 했다.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1971)
그는 일본 유학을 통해 두 가지 개인주의 사조(엘렌 케이의 합리적 개인주의와 오스카 와일드류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의 흥기를 목격한 것으로 보이며, 도쿄에서 김명순과 동거하다가 귀국한 노월 임장화(蘆月 林長和)와 1923년 경부터 1925년까지 동거생활을 한다. 김원주는 이른바 자본주의적인 경쟁적 개인주의가 아닌 내적 인격의 형성을 지향하는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예술지상주의적 개인주의 철학을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보들레르, 쇼펜하우어, 니체 등을 통해 수용한 임장화와의 만남을 통해 그와 공유하는 개인주의를 심화한다. 김원주의 개인주의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장화의 사상과 연계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임장화의 사상이 그의 고백체 소설 전체가 그렇듯 관능성과 퇴폐성을 보여주는 반면, 김원주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완성을 위한 강한 의지적 노력을 보여준다. 임장화가 순간적 감각인상에 몰입하거나 부르주아적 규범에서 탈출하려는 분열된 자아를 향유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김원주는 엘렌 케이의 영향으로 보이는 ‘영육일치(靈肉一致, unity of soul and senses)’의 정신에 바탕하여 자아의 형성과 구원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원래 서구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상주의 영향 아래 사적인 감각인상에 몰입하거나 기성제도성에서 탈주하려는 개별성(singularity)을 절대시하기 때문에 자폐적 나르시즘이라는 비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개인주의도 멋부리기(댄디즘)나 반항적 글쓰기를 통해 나름의 사회적 소통을 추구했다. 김원주는 스스로 ‘영원한 저주’로 본 ‘서러움’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사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격존중’의 시대’가 도래하는 ‘때’에 ‘충실’한 태도를 갖고자 한다. 그는 고백을 담은 서간체 형식의 글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사회적 소통을 찾는다. 김원주는 근대적 산업체제에서 나온 효용주의적(utilitarian)인 개인주의나 집단적 실천이 아닌 인격적 관계의 확산을 통한 보편적 유대의 길을 찾는다. “인생이 개인주의적 사상에서 다 ? 같이 완성되고 세계가 한없이 자유롭고 아름답게 될 때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고 향락하기 위하여 남의 생활을 간섭치 않으며 또는 자기의 생명과 인격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 때가 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적 확신은 예술지상주의의 주요 특징인 내적 자기분열의 고뇌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파괴적 소외를 극복하고 이를 지배하는 결단을 동반한다. 이 결단은 “자기 생명가운데 남의 생명을 발견하며 남의 인격가운데 자기 인격의 존엄을 보게 될 거인적 개인주의 시대가 올 것을 믿는” 역사적인 결의가 된다. 김원주의 신개인주의는 유미주의적 개인주의가 갖는 유아론적 성향을 벗어나려는 예술 정치학을 포함한다.
김원주의 ‘거인적 개인주의’는 ‘나의 부드러운 정서’와 ‘내 본성에 깊이 파묻힌 겸양’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설움 쌓인 한 줄기 희망’으로, ‘따듯한 한 줄기 일광’으로 받아들인다. 서구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나듯 부르주아의 산업주의와 가부장적 규범주의에 반항하는 탈주행위가 주는 악마적 자기 파괴성을 동반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반항적 탈주의 강도가 약할 때는 부르주아에게 귀여운 응석받이가 되었다가 도를 넘을 때는 퇴출과 감옥행을 겪는다(오스카 와일드).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기소외를 관능적으로 즐기는 퇴폐성과 부르주아적 도덕규범에 저항하는 악마성에 집착하거나, 내적 망명을 택하여 신비주의 철학에 몰입하거나, 현실을 떠나 부랑(浮浪) 지식인이 되거나 예술프로레타리아가 된다. 근대적 합리적 자아의 이면에 있는 가공할 분열성이 낭만주의적 유미주의에서 새어 나왔다. 가장 무서운 허무주의는 랭보(A. Rimbaud)의 도망이다. 랭보, 그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 신경쇠약자, 하릴없는 건달패, 갈 데까지 심성이 비뚤어진 위험인물, 떠도는 어학선생, 길거리 장사꾼, 써커스단의 인부, 부두노동자, 농장의 날품팔이, 선원, 네델란드 군대의 지원병, 기사, 탐험가, 잡상인 따위로 지내다가 아프리카 어디에서 전염병에 걸려 마르쎄유의 어느 구호병원에서 한 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37세의 나이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 사나이.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개인의 존엄을 함몰시키는 산업사회에 대한 저항은 세계상실과 인본주의적 자아의 상실을 특징으로 갖는다. 세계는 허공에 떠있고 당당한 계몽적 주체성은 죽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술지상주의가 경험한 세계와 인간의 종말은 근대산업의 분업체계가 낳은 산물이었으며, 그들 이전 선배들의 고상한 낭만주의가 뿌린 씨앗의 결과였다.

나혜석(1896~1948)
김원주의 지적 동료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해방의 기치를 들었던 여류인사들 가운데 김명순은 정신병에 걸려 일본 정신병원에서 객사하고 아들은 자살한다. 나혜석은 이혼을 당하고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고향에 큰 농장이 있었던 임장화는 1920년에서 25년까지 5년간 지적 활동을 하다가 잠적하여 그의 생몰연대도 불확실하다. 이들은 자유로운 사랑의 주체성을 사회해방의 신호로 인식했으며, 그 결과 온갖 추문과 함께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임장화는 동인지 『영대靈臺』의 원고료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도 받았다(당시 문인들 사이에서는 원고료와 술값을 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원주가 신개인주의를 분명히 내걸며 추문을 퍼뜨리는 지성계를 통렬히 비난한 것도 자유이혼론에 따라 남편 이노익과 이혼한 직후의 일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아의 형성과 구원을 향한 의지를 확인한다. 의지는 ‘외로운 나’와 ‘충실한 생활’을 연결한다. 이러한 삶은 ‘형극이 많고 도정이 먼’ ‘순례의 길’이다. “나는 가슴을 헤치고 넘치는 기쁨으로써 인생을 맞아들이겠다. […] 인생은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잔혹하였다. 소녀시대에 부모를 잃고 형제를 영별한 나는 철모르게 청춘시대를 맞아 개성의 눈 뜰 새도 없이 나한테 아버지뻘이나 되는 이와 이해 없는 결혼을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차차 개성의 눈을 뜨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때에는 나는 단연히 이때 애인도 돈도 없이 앞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단지 대담한 일만 하였다. 그러나 요행히 모 잡지사 경영인의 호의로 지금까지 생활비만은 얻어 쓰게 되었다.”
이러한 궁핍의 위협에도 김원주는 ‘완전한 사랑의 경지’를 ‘신생’의 ‘지평선’으로 바라본다. “나의 가슴을 쓰리게 하던 전반생은 자취도 없이 다 ? 사라져버렸다. 나의 청춘을 완전한 사랑의 경지로 인도해줄 한 줄기 빛이 무한한 지평선 위를 빛 날리며 나에게 신생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아 ? 미쁜(진실한) 신생의 길이여. 나는 그대의 가르침을 어김없이 지키리라.”
개인주의의 진정한 자아완성은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노선은 1923년 만공선사(滿空禪師)의 법문을 듣고 감동받고, 1933년 수덕사 덕숭산문(德崇山門)에 입문하게 되는 예후가 된다. 그 사이 1928년에는 『불교佛敎』의 필진으로 활약하던 중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불교이론에도 조예가 있었던 백성욱과 만나 동거하게 되면서 불교의 ‘절대적 사랑’,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는 사랑’의 이념을 심화하여 종교적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조실부모한 서러움과 함께 사물의 무상함과 무근거함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1920년 『신여자』의 발간 이전부터 그를 떠나지 않는 제2의 천성이었다. 입센의 노라가 당시 신여성에게는 여성이면서도 진정한 독립적 인간성을 집약하고 있는 해방의 모델이었다. 김원주는 「노라」(1922)에서 ‘우리 조선 여자 사회에 나타난’ ‘노라라는 여성’은 ‘잠을 깨어 자기의 의식을 분명히 알게’하는 ‘새벽빛’이다. ‘각성치 않은 노라’는 ‘인문 발달상에 방해가 되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이 사회는 고만한 암흑한 지옥’이 된다. 김원주는 ‘우리 여자 사회도 무수한 노라가 쏟아져 나오길 충심으로’ 바란다. 김원주의 노라가 동양의 일엽선사로 변화되는 것은 무상과 자아완성에 대한 관심 속에 이미 그 징후가 있었다. 이는 오스카 와일드가 서구 신비주의 철학과 장자(莊子)의 ‘지인무기(至人無己, 초인은 자기가 없다)’의 철학을 선호한 것과 유사성을 갖는다.

수덕사
표면상의 차이로 보면 김원주의 생애와 사상은 대체로 『신여자』발간기(1920∼1921)의 여성해방론, 『신여자』 폐간 후 여성해방론과 연계된 신개인주의론과 불교적 자아론(1922∼1933), 덕숭산문에서의 수도시기(1933∼1960), 그리고 다시 문예활동을 시작하여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임장화나 다른 신여성들과는 달리 김원주의 생애에는 무정한 세상과 서러움을 이기는 창조에의 포부가 일관된 흐름으로 있다. 그의 자아는 인격적 사랑과 예술을 형성하는 창조적 활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교에 입문해서 존재의 극치에서 만나는 무(無)는 창조성으로 가득한 우주적 자아의 본체이다. 우연이지만 그의 스승 만공선사의 법명은 ‘가득 찬 공[滿空]’으로 일엽선사는 이 개념을 자신의 불가적 세계상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충만의 철학은 빔을 통과해서 도달된다. 빔은 우주 삼라만상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한다. 우주가 부처[佛]인 바, ‘님’인 부처를 향한 사랑이란 다름 아닌 우주와의 일치이다. 잃어버린 세계, 분열된 자아는 우주와의 일치에서 회복되고 구원된다. 사바세계 속에서의 애욕의 대립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의 합일에서 비로소 통일된다. 대립의 통일, 이것이 사랑의 절대적 이념이다. 일엽선사는 과거 자신의 연애가 비록 거기에 사랑의 이념이 불완전한 형태로 현현되어 있었지만 상대적 대립을 면치 못한 미로였다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되찾는 사랑에서 무대립의 평안과 자유를 얻었다고 선언했다. 여성해방과 신개인주의 철학은 충만과 공의 철학에서 그 완성을 보게 된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평안과 자유 그리고 창조는 대립의 초극에서 결실에 도달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세계지혜는 그에게 차가운 세계였던 겨울 ‘밤’의 여로를 통과한 것이다.
김원주의 님을 향한 사랑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함께 20세기 한국 불교철학의 두 금자탑이다. 한용운의 절대적 사랑은 부재 가운데서 애달픈 동경의 이념으로 작용하고,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는 반면, 김원주의 절대적 사랑은 침묵 속의 선 수련을 통한 자각의 순간에 현전한다. 이러한 차이는 이른바 1920년대 연애담론이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전략이라는 정치적 자장(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를 통한 문화적 동화정책) 속에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원주와 그의 동료들은 개인주의 특유의 비정치적 사고를 고집한데에도 기인한다. 그들의 실천은 추한 외부세계로부터 내부로 망명한 개인의 상상력과 문예활동을 통해 조선의 상황을 구제한다는 예술 정치학이었다. 동학혁명에 두 번이나 가담했던 한용운은 민중과의 평등한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변혁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김원주의 개인주의적 사고는 봉건유습에 저항하는 저항성을 갖지만 식민지 상황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냉담했다. 그는 유미주의적인 실존적 퇴폐성과 분리되지 않는 문예활동을 현실을 고통으로 경험하고 이를 초극할 수 있는 새로운 자아의 창조로 나아가는, 선가(禪家)의 용어로는 ‘향상(向上)’의 길에 주력했다.


김원주는「단장斷腸」(1927)에서 화자인 나를 통해 임장화의 퇴폐적 감각을 연상시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아!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이 고통을 어찌 차마 견디나. 아! 모두 잊어버리자. 무슨 기억이고, 생각이고 하여서는 무엇하랴. 그저 모두들 모르고, 모두들 잊어버리고, 그저 어제 모양으로 혼몽 천지로 지냈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나 같은 놈은 내 정신, 내 의식만 돌아오면 쓰리고 아리고, 매운 고통뿐이니 ……. 아아, 술 가운데 세상도, 사회도, 집도, 나도, 고통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아무것도 없는 오직 술 가운데만 살고 싶어라.” 세계의 실재성이 가하는 자아 분열적 고통은 세계를 혼몽 천지로 보고 싶어 하는 유아론적 공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내적 착시가 보는 환상 세계에는 구체적 감정들의 기복이 없다. 여성해방론에서는 영육을 갖춘 인격의 독립성이 세계의 본질적 존재로 격상되었지만, 이제 나는 세계 밖으로 축출된 비본질적인 우연적 존재로 격하된다. 퇴폐적 관점을 상징하는 술은 세계의 실재성을 파괴하는 무기이지만, 세계를 붕괴시킨 대가로 건실한 인간적 주체의 파멸이 다가 온다. 김원주는 서구 근대성에 잠재된 그리고 결국 낭만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허무주의적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술이 맨 정신으로 세계를 환상으로 보는 불교적 자아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절대적 사랑의 자아에서는 세계는 거울에 비친 영상으로 경험되고 감정들은 순화된다.
이상의 맥락에서 볼 때 김원주의 사상은 (1) 여성해방론 (2)신개인주의론 (3) 만공(滿空)의 철학으로 나누어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관된 관심은 개인주의와 개인의 창조적 완성이다. 그리고 개인은 사랑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진화에 의해 성숙한다. 사랑은 오늘의 인류가 아직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한 심연으로 남아있다. 사랑은 김원주에게 아마도 누구에게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대립의 고통을 구성하게 하는 어렴풋한 선험적 이념이며, 따라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찾게 하여 구체적으로 구성하게 하는 상상력의 원천일 것이다. 사랑은 미망의 원천이자 이로부터의 해방의 추동력이다.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시대와 철학]

 

박영균(한철연 기조부장)

 

증오를 부추기는 세상

 

2012년 여름과 초가을, 한국 사회는 온통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대외적으로 한국 사회는 이명박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기점으로 하여 반일감정에 휩싸여 있으며 대내적으로는 ‘묻지마 살인’과 ‘성폭행’이라는 흉악범들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여기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사건에는 사람들에게 공분을 자아낼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분’이 ‘증오의 정치’를 생산할 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해치는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때, 그것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분노가 특정 범죄자들, 특정 인물에 대한 ‘제거 또는 살해의 욕망’으로 전화할 때, 그것은 ‘위험’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 ‘위험’은 결코 ‘작은 위험’이 아니다. 그것은 흉악범죄가 지닌 위험보다 훨씬 위험한, 근본적인 위험이다. 이런 위험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의원은 “흉악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 사형제는 필요하다”고 출입기자 오찬에서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이어 새누리당 박인숙의원은 재범 가능성이 큰 상습적 성범죄자에 대해서 물리적 거세를 실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그리하여 흉악범들에 대한 분노는 그들에 대한 제거의 욕망으로 이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합리적인 토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나주 초등학생 납치 성폭행 사건 피의자 고아무개 씨가 2일 고개를 떨군 채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그러나 이런 선의 절대성에 근거한 ‘제거의 욕망’은 본질적인 물음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이런 흉악범들을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면 범죄는 사라질 수 있는가이다. 그들은 모든 죄의 원인을 몇몇 흉악범들에게 돌린다. 그들이 보기에 범죄는 범죄를 저지른 자 안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애초 인간이 아닌 ‘괴물들’만을 제거하면 사회는 마치 깨끗해질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암세포를 돌려내면 암은 사라지기도 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암세포를 돌려낸다고 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암세포를 이겨낼 수 있는 우리의 신체, 사회적 환경이다. 사회가 흉악범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와 같은 암세포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눈에 즉자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즉물성에 빠져 ‘혐오’를 증오로 바꾸어 놓고 있다.

‘악’에 대한 정당한 ‘분노’는 정의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는 ‘혐오의 감정’을 근거한 ‘분노’가 되어 버릴 때, 그것은 오히려 더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복수’는 정의의 감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악을 제거하고자 했던 복수의 감정이 오히려 자신을 더 흉측한 괴물로 만들어버리면서 ‘복수의 악순환’을 낳는 것처럼 그것은 ‘악’을 먹고 자라는 더 근본적인 ‘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증오의 정치학과 노예의 도덕

 

정념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스피노자는 이미 이와 같은 ‘악’의 악순환을 사유했었다. 그는 ‘원인에 대한 무지’가 부정적 정서에 근거한 악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악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정념에 붙잡혀, 이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유하지 않으며 현재의 정념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형제’와 같은 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그것을 처벌할 수 있는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한다.

최근 한 연예인(배우, 김규리)은 자신의 트위터에 “신체절단형 난 반댈세~ 유신이 부활하면 아무나 멍에 씌워 절단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음. 무서워~~”라는 글을 남겼다. 민주통합당도 박근혜의 사형제 옹호 발언에 대해서 유신정권 시절 ‘인혁당’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했던 과거의 역사에 들추어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이에 대해 ‘웬 뜬금없는 이야기냐’는 식으로 민주통합당을 몰아붙였다. 사실, 이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 하나는 흉악범에 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정치범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전쟁’, ‘범죄에 대한 전쟁’ 등, ‘?에 대한 전쟁’이라는 모토로 표현되는, 어떤 특정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식이었다. 박정희 구데타 정권은 ‘북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전두환 구데타 정권은 ‘범죄의 위협과 이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면서 이에 대한 청산 작업을 벌였다. 유신독재시절에 정적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것도, 사회정화를 내세우며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런 ‘악에 대한 전쟁’이었다.

만일 독재를 만들어낸 것이 대중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악의 제거’라는 ‘선(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바디우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사이비 선에 대한 열정일 뿐이다. 그것은 실상, 선을 추구하는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확히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를 보라. 그들이 선교하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신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옥’이라는 형벌의 참혹성에 대한 공포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폭력범죄자’들에 대한 공분 또한 정확히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물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포를 통해서 생산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보다 거대한, 근본적인 악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를 지배하는 권력’에 나를 위탁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보았듯이 폭군은 이와 같은 슬픔의 정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슬픈 정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그것을 권력에 위탁시킴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켜버린다. 따라서 김규리의 이야기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권력은 ‘악’을 먹고 자라난다. 그들은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강화하며 법을 신성화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군주제의 커다란 비밀과 그것의 근본적인 관심은 인간들을 속박할 때 이용하는 공포를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하면서 인간들을 속이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예속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이기라도 하듯이 예속을 위해서 투쟁한다.”

 

지배의 정치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분단 문제가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와 대립으로, 지역 간의 갈등과 분열로 비화하는 것 또한, 바로 이와 같은 ‘증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북’을 악으로 불러내며 그것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파시스트적 권력을 만들어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거대한 권력이 되어버린 기독교는 ‘예수 믿어. 안 그러면 지옥 가!’라는 공포를 통해서 교회 내에서의 유일권력을 만들어냈으며 그 권력을 만들어준 대중은 스스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부정적 정서’와 ‘정념’의 포로가 되어 주인을 위해 싸운다. 따라서 문제는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해방과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투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투쟁은 단순히 부정의와 싸우는 것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아차’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그 스스로를 속이면서 빠져드는 ‘정념들’과의 투쟁 또한 요구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선’으로 포장하는 ‘정의’가 아니라 ‘정의’ 그 자체, ‘선’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나(대중) 자신의 성찰이자 권력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나의 슬픈 영혼을 부추겨 그들의 지배적인 힘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고해의 삶에서 얻는 상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지배의 정치학은 우리의 고통을 파먹고 살며 우리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며 그 잔혹한 삶의 고통이 유발하는 분노의 정념을 파먹고 자라난다. 따라서 지배의 정치학은 나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밖을 향해, 타자에 대한 공격과 원한으로부터 출발한다. 민주주의가 가진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때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는, 5년 전에 그랬듯이 한편으로, ‘민생이니 사회통합이니’하면서 노무현-김대중-전태일기념사업회를 방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의 강력한 권력을 환기시키는 이중의 행보가 지닌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을 배신하고 또 다시 대중들 스스로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구두입니까? [청춘의 고전 시즌2]-⑪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⑪

?? 일시: 2012. 8. 25.?(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이것은 누구의 구두입니까?

– 반 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
?
강연: 서영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과 ‘예술’ 이 두 영역은 인간이 역사 행위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장 ‘문화화’된 창조성의 산물이다. 이 두 영역의 활동을 통해 세상은 드러나고 해석되며 지속된다. 그렇다면 철학과 예술은 서로 어떤 관계이고 철학은 예술을 어떻게 보는가? 보이고 감각하는 이 세계의 것들을 예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예술적 감성과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해석해내고 설명하려는 이성적 사유는 언뜻 보면 닮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아주 달라 보인다. 이 차이가 이 둘 사이의 얘깃거리가 된다.

열한 번째 시간에는 ‘철학자가 이해하고 생각한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철학자들이 이해했던 예술에 대한 여러 개념을 기반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선대 철학에 대한 물음과 극복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 철학사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극복 양상과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강의를 맡은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를 소개하면서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자, 나치 부역자, 신비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전적으로 맞거나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 수 있음을 주지하게 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서양철학사가 서구 형이상학과의 대결의 역사였다는 단서를 전제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하이데거는 철학사 전체의 핵심 근거에 대해 문제시하고, 그러한 근거 자체를 ‘근거 없는(grundlos) 것’으로 만드는 사상가”라고 하면서 이제까지 자명한 것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핵심에는 ‘철학의 종말’을 선언했고 대안으로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얘기한 하이데거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철학과 예술의 대결 : ’철학의 종말’과 대안으로서의 예술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은 철학 일반의 종말이 아니다. ‘형이상학의 종말’을 말한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의 특징에 대해 “서구 형이상학의 사유 전통을 해체했다는 것이 다른 철학자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니체와 헤겔까지의 철학을 한 주름으로 꿰어버리고 이것이 서양의 전통적 틀이라고 규정하면서 하이데거 자신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고 한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철학’과 ‘예술’이라는 두 영역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는데 서영화 교수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니체-헤겔-하이데거의 순으로 큰 축을 설정한다. 단적으로 설명하면 플라톤은으로 보았고, 니체는을 역설했다. 그러나 헤겔에 가서는 다시으로 규정된다. 이후 하이데거는 다시 철학의 종말을 주장하고 철학의 자리에 예술을 등장시킨다.

플라톤에게 있어 예술은 하나의 가상을 만드는 것이고, 철학은 이론적 지식을 통해 참된 것에 대한 앎에 도달하게 만들어 준다. 철학은 참된 ‘이데아(idea)’를 이끌어주는 것으로 수학-기하학은 이데아의 앎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의 경우 이데아는 생성-소멸의 과정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감각적 경험세계의 생성-소멸에는 참된 것이 없다.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이데아에 대한 2차적인 모방이며 ‘오디세이아(odysseia)’와 ‘일리아드(Iliad)’처럼 광폭하고 음란한 신들에 대한 묘사와 현실 속의 인간을 운명에 대해 비탄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플라톤은 교육에 있어 ‘철학과 예술 간의 대결’을 선언하면서 기존 공동체 내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예술을 대신해 철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니체는 플라톤적 진리관은 인간 생의 보전을 위한 가치로써 삶의 지지대나 의지처로 파악한다. 니체는 생동하는 현실세계를 중심으로 1차적 관계를 맺는 것이 진리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본다. 니체의 예술론은 세계를 지배해 오던 형이상학적 가치가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될 때(심연 속으로 몰락;니힐리즘의 도래) 비로소 인간에게 새로운 의지가 발현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존재자를 존재자이도록 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will to power)’이고 예술은 이것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어 변화무쌍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형태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니체 또한 형이상학자로 이해한다. 니체의 진리관은 분명 플라톤의 개념을 전도한 것이지만 니체에게는 ‘힘에의 의지’의 강화가 모든 생명체들의 본질이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가 볼 때는 플라톤의 이데아 성격과 같다는 것. 서영화 교수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바깥의 무시간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이해해야만 인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니체도 형이상학자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예술작품도 ‘영원히 정지한 시간성’과 ‘불변성’의 방식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면 이것은 형이상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전통적으로 존재자를 ‘형상+질료’의 조합으로 규정하는 것은 개별사물을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이 때 전통적 규정에서 중세까지 형상의 자리를 차지하던 것은 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철학의 근본 물음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라는 존재자의 원인과 본질의 탐구 끝에는 결국 신을 설정할 수밖에 없던 사실이 존재하고 이를 참으로써 보증하는 것이 논리학의 역할이었다. 이 역할을 논리학적 방식 보다 예술의 방식을 통해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의 필요성은 형이상학적 틀과 논리학의 만남으로서 서구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해온 철학이 종말을 고해야할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

1) 사물과 도구, 그리고 예술작품

▲ 샘(Fountain), 1917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위 그림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변기라고 불리는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이다. 1917년 뉴욕의 전시회에서 전시되었지만 전시회장 밖에서 전시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프랑스 퐁피두센터 현대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으며, 37억 달러를 호가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생기는 질문: 기성품을 예술가가 일상적 환경이나 장소에서 빼내와 예술작품이라 선언하면, 예술작품이 되는가? 무엇이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과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런 의문들을 정리해보면 아마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예술가에게 있고 예술가의 본질은 작품에 있으며 작품의 본질은 다시 예술에 있다’라는 문구처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순환에 빠진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문제 삼는다.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활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은 예술작품을 통해서다.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물이 사물이도록 하는 본질에 대한 물음과 규정에 있다. 하이데거의 경우 ‘사물’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자의 본질을 형이상학적 사유 전통에서 찾기 거부하는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물음을 실제 예술작품으로부터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물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무(無)가 아닌 존재자 일반이 사물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사유 전통 내에서 사물에 대한 해석은 다르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가 이해한 사물에 대한 조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하는 ‘형상+질료’의 결합 틀이 예술이론과 미학의 개념 도식이 되고 이 개념 도식이 근대 이후 형상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오면서 형성된 형이상학적 ‘주체-개체’의 도식과 만나 서구 사회에서 사물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개념역학’이 된다”는 것. 이에 의해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존재하는 것을 도구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형상+질료’ 결합 틀의 근원은 사물의 본질이 ‘도구적 용도성’에 있다는 견해이다. 이 지배하에 있는, 예를 들면 항아리ㆍ망치ㆍ신발과 같은 존재자는 어떤 것을 위해 제작된 산물로서 사물과 작품 간의 고유한 중간 위치에 있다.

문제는 서구 사회가 이 도구 존재자에 대한 이해 틀을 모든 존재자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 틀로 간주하고 있다는데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 자체(사물)를 도구로 이해하는 것을 ‘사물에 대한 습격’이라 명명했고 이 ‘도구적 용도성’을 벗겨낸 것을 ‘사물’이라고 한다. 도구는 유용한 것으로 친숙하고 사물은 낯선 것이 되면서 ‘폐쇄성’을 가지고 ‘은폐’된다.

2) 고흐의 신발 도구와 용도성의 본질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분석하는 “고흐의 신발(ein Paar Bauernschuhe von Gogh)”은 사물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도구에 대한 분석이다. 하이데거의 전략은 형이상학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형이상학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물=도구’라는 인식 틀에 대해 사물이 진정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의도이다.

▲ 신발(A Pair of Shoes), 1886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작품에서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가 드러난다고 한다. 작품 ‘신발’에 대한 하이데거의 감상은 축약하면 이렇다.

“신어서 틀어지고 헤어진 신발 안쪽의 어둡게 열려진 틈 속에서 노동의 고단함이 보이고 신발 도구 속에서 거친 바람이 부는 들녘의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완고함이 보인다”ㆍ”신발을 통해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농부의 근심과 들녘에 나가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출산과 죽음 앞에서 나타나는 초조와 전율이 보인다”

신발 도구 속에서 대지와 농부의 세계가 함께 보인다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이 때 재현의 대상인 신발은 어느 특정한 누구의 신발이 아니고 도구 연관 전체로서 ‘농부의 세계’를 드러내준다고 한다. 세계를 보는 농부의 시선과 삶의 지향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것은 농부가 신발을 신는 일상 행위에서도 나타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때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신뢰성’에 있다. 누군가 신발을 신었는데 그야말로 아주 편해서 신발이 신발 역할을 잘 할 때가 가장 신발다운 때이고 이렇게 되면 신발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발을 신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신발이 사라져버리는 그 지점에서 ‘신뢰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서영화 교수는 “망치도 더 이상 망치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망치가 가장 망치다울 때이다. 회화작품을 그리는 도구도 마찬가지인데 하이데거는 도구를 하나의 관찰대상으로 삼게 되면 도구답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 때는 ①도구가 고장 났을 때, ②도구를 과학적 관찰대상으로 삼을 때”이다. 하이데거의 말로 이어나가보면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1차적으로 신뢰성에 있고 신뢰성의 특징은 평소에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신뢰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다. 플라톤적 진리처럼 신발의 본질은 신발의 이데아계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 불변하는 객관적인 ‘참’인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술작품은 ‘존재자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다. 고흐의 그림에서 신발은 일상적으로 보았던 곳과는 다른 곳에 위치한다. 즉 작품 안에서 작품 존재로 있게 되는데 이 때 우리가 평소에는 인식할 수 없던 용도성의 본질인 신뢰성을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한 것이다. 본질을 은폐하려는 사물의 성향을 풀어헤쳐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고 예술작품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고 본다.

작품과 진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일으키는 것(선동, 사주)”이고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가 투쟁하는 것을 격돌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 자리에 촉매처럼 위치해 있다. ‘투쟁’이란 세계와 대지를 긴밀하게 공속(共屬)시키는 친밀한 통일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와 ‘대지’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란 고흐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농부의 세계처럼 삶이 결정되는 순간 그 자리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곳이 된다. ‘대지’는 말하자면 인간이 체류하는 고향과 같은 거처로서 하이데거는 대지를 질료와 같은 개념으로 쓴다. 이른바 ‘스스로 그러한(自然)’ 질료적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사물 고유의 성향이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대지의 성격, 질료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비로소 그것을 최초로 솟아나게 한다. 고흐의 회화작품에서 ‘농부의 세계’와 ‘대지’는 ‘개방’되면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세계가 대지 위에 근거하는 것임을 드러내 보인다.

작품 안에서 농부의 세계와 농부가 딛고 살아가는 땅-대지가 신발 안에서 투쟁하게 만드는 것이 고흐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 아니다.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를 서로 격돌하게 만들뿐이고 그것의 결과가 진리의 생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의 내밀한 통일과 투쟁의 격돌 속에서 진리가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서영화 교수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격돌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사례로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을 든다. “일제강점기 석굴암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이후 지금까지 최초에 조성되었던 당시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로(結露)현상인데 애초에는 본존불이 앉은 바위 밑으로 감로수라는 샘물이 흘러 자연적으로 결로현상을 막을 수가 있었다. 과거에는 석굴암이 감로수를 차단하지 않고, 화강암이라는 질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절대자가 만나는 장인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 당시 신(神)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석굴이라는 대지가 투쟁의 격돌로서 드러나는 예술작품이었다”

진리와 예술

하이데거는 보이는 대상 A자체가 참으로 드러나야지만 보는 주체 B도 A를 참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개념화해서 말하면, 참된 인식은 이성적인 표상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사물 자체가 스스로 발산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물의 ‘개방력’이다. 사물이 그 자체로 드러나 있어야 예술작품에서도 드러난다는 것. 사물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작품 안에서 ‘사물의 세계’와 ‘사물이 속하는 대지’가 충돌한 결과가 ‘참으로 그렇게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사물 자체가 ‘개방력’을 가지고 있고 이 개방성이 열릴 때 우리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 내적인 통일 속에서 석굴암의 본존불상처럼 형태로 확립되어 있을 때 감상자는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선다. 즉 존재자의 개방성이라는 적막한 충격 앞에 세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던 것으로 부터 벗어나게 된다.

고흐의 신발 그림을 봤을 때 감상자는 여기에 ‘신발이 없지 않고 있다’라는 그 사실을 느끼게 되고 하이데거는 이것이 매우 적막한 충격으로 감상자에게 다가온다고 한다. 서영화 교수는 ‘없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태도는 하이데거적 언어로 말하면 존재자가 참으로 개방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상자가 예술작품을 볼 때 사물을 도구적인 것으로 보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비은폐화되어 드러난 존재자의 본질을 자각하게 되면 작품 감상자는 작품의 보존자가 되어 작품을 비로소 현실적이고 예술작품답게 만드는 전환을 이루어낸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일상의 기성품에서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의 예술작품으로 변환된 사실이 이 사례이다. 그렇다면 작품 안의 작품존재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는 존재자의 ‘개시성(開示性)’이야 말로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도록 하는 최종 근거가 된다.

서영화 교수는 마지막으로 앞의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얘기를 덧붙였다.

“현재 우리는 인간을 인적자원, 자연을 자연자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유익하고 유용한 것은 ‘있는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에게 유용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이런 태도는 평소에는 매우 친숙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대상 사물이 작품 안으로 옮겨가게 되면 친숙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게 된다. 하이데거의 경우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내 앞에 있는 그 무엇을 나에게 유용한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된다. 대상에 대한 자각 이전과 이후의 태도가 전혀 다르게 된다. 확대해보면 내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자체가 전혀 달라진다. 결로현상 때문에 석굴암에 에어컨디셔너를 달았다는 사실이 일상의 감상자에게는 처음에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과거에는 이런 장치가 필요 없어도 석굴암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물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의 태도도 전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곧 통상적인 행위와 평가에 대해 조심스러워지고, 자신의 지식과 시야를 함부로 적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철학과 대결한 이유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이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이재원 단편소설 – 배추이파리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 – 배추이파리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두세 달 간 대웅전을 짓는 일을 하는 동안 덕암사 주지는 틈만 나면 사진기를 들고 와 일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찍은 내 사진만도 한 봉투나 되었다. 그는 절 지은 기념으로 그 사진들을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나는 일하고 있었다. 가장 활기 있던 나의 생의 한 시절이 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절 지붕을 올리는 중인가 보다. 나는 용마루 위에 서 있다. 작업하다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옆에 장씨가 몸을 구부린 채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장씨는 항상 등산화를 신고 일했다.

장씨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등산화를 신고 일하는 탓에 장씨는 항상 몸이 굼떠 보였다. 하 사장은 그런 장씨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하 사장은 장씨에게 일 시킨 것을 후회하곤 했다. 장씨는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덕암사 일을 시작하기 전, 안영사에서 종각 짓기를 마치자 함께 일하던 일꾼 두 사람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덕암사에 와 일할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 사장이 찾아낸 것이 장씨였다.

장씨는 토목공사 패거리를 따라 덕암사에 왔다. 덕암사 기단 공사랑 주변 축대 공사를 마치자 장씨는 혼자 덕암사에 남아 공사 잔거지를 하고 있었다. 하 사장은 그런 장씨를 뒷일꾼으로 썼다.

장씨는 마흔이 갓 넘었다. 그러나 미혼이었다. 막일로 몸이 굳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요, 특별히 다른 기술도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에 무엇으로 소일했느냐, 누구와 사느냐고 물을라치면 그는, “머,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에요. 갈 곳 없으면 형님 집에……” 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식사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앉아 식사하고 있다. 양씨가 내 옆에 있고, 진옥 씨가 사람들 옆에 서 있다.

그녀는 다리를 절었다. 어떤 사람은 주지의 부모가 그녀가 어렸을 때 수양딸로 데려다 키웠다고 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우리보다 오래 덕암사에 있었던 탓에 장씨는 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장씨는 그녀가 공장을 다니다가 몸이 나빠져서 휴양차 이곳에 와 있다고 했다. 그녀가 딱히 절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공양주 보살을 도와 식사 준비도 같이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적으로 식사를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지 다음으로 절에서 중요한 일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요사채 겨울나기를 주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씨를 시켜 요사채 주변 헛간에 비닐로 문을 해 달기도 한다.

장씨는 그녀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이다. 말끝마다 “진옥씨가 불러서……”라고 한다. 진옥 씨가 자기에게 일시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은 태도이다.

원래 식사는 대웅전 공사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요사채에서 했다. 그러나 하 사장이 공양주 보살에게 현장까지 점심을 날라다 줄 것을 부탁했다. 겨울이라 날이 짧아 그렇지 않아도 일할 시간이 적은데 점심 먹으러 오르락내리락 하니 일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추운 데서 식사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로 그런 불만을 나타내는 이는 양씨 뿐이었다. 하 사장이 없는 곳에서 양씨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밥 먹는 시간이 을매나 된다구 밖에서 식은밥을 먹게 하누? 에이, 이번 일 끝나면 나는 일 그만할 께다.”

양씨는 50이 넘었다. 하 사장이 일을 들볶을 때 가장 괴로워하는 이가 양씨이다. 포를 조각하거나 끌 구멍 파는 데는 이력이 났지만 연목이나 인방 감을 메어 나르는 일에는 몹시 힘들어 한다. 무릎뼈를 다쳐 찬바람이 불면 시리다고 했다. 하사장이 일을 채근하는 눈빛을 보내거나 일을 채근하는 소리를 지를라 치면 양씨는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다고 하 사장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화 김씨는 일꾼들 돈 떼어먹은 적 없고, 품값 주는 날 하루도 넘겨본 적이 없다는 면에서 하 사장이 성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곤 했다. 물론 세화 김씨도 하 사장이 닦달하는 대상에서 비켜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머뭇거리면 하 사장이 세화 김씨의 연장을 빼앗아서, 김씨 말대로라면 미친년 널뛰듯 지랄한다는 것이다.

사장이라고 하지만 하 사장도 함께 일하는 목수이다. 절 공사를 도급 맡아 일하므로 사장이라고 불린다. 하 사장은 입버릇처럼 퇴직금 이야기를 하곤 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야 퇴직금이나 있지. 우리네야 퇴직금이 있나, 절 지어 돈 남으면 퇴직금 쪼로 작은 건물이라도 하나 마련해야 할 텐데, 이것 참 날은 춥지, 일 능률은 안 오르지, 이것 참.”

하사장의 말을 잡고 늘어지는 장씨와 그에 대한 하사장의 대거리는 우습지만은 않다.

“그래, 건물 살 만큼 돈을 거의 모았에요?”

“건물 살 돈 있으면 이 겨울에, 가족을 떠나서 이렇게 고생하겠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일해서 조금 모아 보려는 거지.”

하 사장은 장씨를 향해 눈을 치뜨고는 쏘아댄다.

“오늘 먹을 것만 있으문 돼요. 배추이파리는 낼모레 썩으니까.”

“돈이 썩는다면 사람들이 일하겠소? 너도나도 오늘 먹을 만큼만 일한다면 겨울엔 어쩔 거요? 굶어죽을 것 아뇨? 벌어놓은 것 없으니.”

“목수가 하루 일 하면 열흘은 먹는데 굶기야 하겠에요? 목수가 일 안 하면 아쉬운 건 사장들이겠지.”

“거 쓸데없는 말 그만 합시다.” 하고 하 사장은 대꾸를 피한다. 배추이파리 공화국(이것은 내가 장씨가 말하는 내용에 붙인 제목이다)을 이야기할 때의 장씨는 이 문제를 대단히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생각해 본 사람과도 같다. 특히 화투판이 벌어질라치면 장씨는 배추이파리 공화국을 실현하려는 사람 같다.

저녁 식사 후 대개는 일찌감치 이불을 펴고 누워들 있다. 잠은 안 잘지라도 지친 몸을 쉬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화투판이 벌어진다. 대개 세화 김씨, 장씨, 나, 그리고 하 사장이 함께 한다. 하 사장은 내일 일을 설칠까봐 일꾼들이 밤늦게 자는 것도 꺼려하였다. 아니면 매일 화투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장씨는 화투판에서도 말끝마다 ‘배추이파리’이다. “배추이파리는 썩으세요. 웬만큼만 긁어가세요.”라거나, “배추이파리는 꼭 필요할 때만 좋은 것이세요.” 라는 식이다.

장씨가 돈을 따는 날이면 색다른 일이 벌어졌다. 하 사장은 일꾼들이 술을 먹는 것도 꺼렸다. 역시 내일 일을 설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씨는 하 사장의 그런 눈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화투판이 끝나고 돈을 세어 보고는 장씨는 기세 있게 말한다.

“내가 이만큼 땄에요. 배추이파리 석장. 이걸 나 혼자 집어넣으면 배추 이파리가 썩어요. 술을 사오겠에요.”

그런 다음 예의 그 등산화를 신고는 산을 내려간다. 장씨는 술과 안주 등속을 사되, 과일이나 음료수, 과자 등속을 넣은 다른 꾸러미 하나를 더 만들어 온다. 그러고는 그것을 공양주 보살과 진옥 씨가 있는 방 안에 밀어넣어주곤 한다. 장씨와 진옥씨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들이 자는 방까지 들려온다.

“공양주 보살은 잠들었어요. 저두 먹기 싫어요. 갖다 잡수세요.”

장씨는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모양이다.

“우리는 술과 안주가 있에요. 두었다가……”

장씨는 우리 방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장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숨 잠들어 있던 사람들까지 술 소리에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녁 식사 후 시간도 적당히 지난 후라 술 한 잔은 그야말로 몸을 녹아나게 한다. 장씨가 돈을 따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삼스레 장씨의 배추이파리공화국을 되뇌며 잠드는 것이다. “배추이파리는 꼭 필요할 때에만 가치가 있에요.”

신정이 다가와 우리는 일을 며칠 쉬기로 했다. 우리가 쉬겠다고 한 것이기보다는 하 사장이 결정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나이 많은 축들은, 명절이란 구정이니 신정에는 일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 사장은 역시 일 능률을 먼저 생각한다.

“일이 안 돼요, 남들 쉴 때 일하면.”

일을 쉬기로 했다면 의당 일하던 사람들은 집으로 간다. 그러나 장씨는 마땅히 갈 데가 없는 눈치였다. 장씨를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두어 달 만에 집에 가는 것이요, 한꺼번에 받은 임금봉투도 두툼해 사람들은 흥에 겨워했다. 홀로 남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라서 그런지, 장씨가 조금 쓸쓸해 보여 나는 말을 걸어본다.

“돈 받으니까 모두 기분들 좋아하네요. 이게 배추이파리라 한다면 사람들 기쁨이 줄어들지도 모르겠네.”

적어도 배추이파리를 화폐로 쓰자는 발상에 관해서만은 장씨 대답은 경탄스러울 정도이다.

“그 반대일지도 모르잖겠에요?. 배추이파리 한 보따리씩 갖구 가지만, 도중에 썩어버릴 테니까 나한테 한 주먹씩 나눠줄 것 아뇨, 술두 먹구, 진옥 씨 허구 맛있는 것 사먹으라구. 주는 사람 즐겁지, 받는 사람 기쁘지, 이형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에요?”

나는 웃으며 또 농쳐본다.

“그럼 진옥 씨 하고는 잘 되어가는 중이란 말예요? 아이구, 고목나무 꽃 필 일 생기네.”

장씨는 황망히 손 저으며 부정한다. 마치 나에게 달려들 기세이다.

“그런 게 아니라, 진옥 씨도 지금은 돈을 못 버는 처지이니 나누어 쓸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진옥 씨와 잘 되어갈 수 있겠에요?”

며칠 집에서 쉬고 다시 덕암사로 왔을 때 장씨만이 덩그런 요사채를 지키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자, 진옥씨가 어디선가 나타나 잠깐 얼굴을 보이곤, 다시 어디론가 박혀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밤늦게 도착할 것이다. 장씨가 절에 남아 있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하다못해 극장이라도 가거나 술 한잔 하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무료히 요사채에 머물러 있을까.

저녁 준비를 할 때에야 무엇인가 느낌이 왔다. 일꾼들이 집에 가자 공양주 보살도 멀리 나들이한 터여서 식사 준비를 할 사람은 진옥 씨뿐이었던 것이다. 진옥 씨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이 있자 장씨가 아주 익숙한 듯이 주방으로 갔다. 상을 내려 수저 등속을 준비하고 밥통을 열어 밥을 푼다. 진옥 씨가 한 일이란 국이며 찌개를 만든 것뿐이다. 마치 신혼부부가 다정스레 저녁을 준비하는 것 같은 정경이었다.

식사 후 장씨는 술 한잔 하자며 나를 이끌었다. 산길을 내려가면서 장씨가 말했다.

“이형이 하 사장과 일 한지는 얼마 안 되었다면서요?”

아마도 하 사장이 말을 한 모양이다.

일하겠다고 찾아온 내게 하 사장은 나의 목수 경력을 물었다. 목수들은 대개 함께 일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목수가 일하겠다고 혼자 현장에 찾아오는 법은 드물다. 하 사장은 마땅히 물어볼 만하다.

나는 하 사장에게 사정을 말했다. 목수일 하기를 몇 년 쉬었다. 쉬는 동안 장사를 했다. 그러나 장사도 잘 안되어 다른 밥벌이를 찾아야 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목수 일이었다. 함께 목수 일을 하던 옛 동패들을 찾아보니 모두 흩어져 있었다. 할 수 없이 나 홀로 떨어져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러니 내게 일을 시켜다오.

나는 장씨에게 말했다.

“이럭 저럭 하 사장과 함께 일한 지 일년이네요.”

시내에 이르자 장씨는 앞장서 술집으로 들어갔다. 여러 종류의 술을 파는 집이었다. 장씨는 국산 양주를 시켰다. 나는 생맥주를 마시는 편이지만 장씨 주문을 막고 싶지도 않았다. 양주도 그 독특한 맛이 있지 않은가. 나는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간조했다는 말이지요, 비싼 양주를 산다는 게? 좋아요, 홀가분한 총각이 한번 써 보시오. 나는 다음에 생맥주를 사겠소.”

그는 소리나게 양주 한 잔을 마시고 말했다. 아니, 빨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원래 나는 양주를 마십니다. 공사판 슬슬 따라다녀도 양주 마실 만큼 벌지 않겠에요? 머, 이렇게 사는 거지요.”

나는 그가 돈이 생기면 들로 산으로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는 말했다.

“양주 마시면 산에는 언제 갑니까? 돈 모아야 산에 가서 몇 달 살 것 아닙니까?”

“갈 형편이 되면 가지요. 산이나 들도 따뜻한 때라야지 지금 같은 겨울이야 어디 적당하겠에요? 지금은 들이나 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형과 술 한 잔 하자고 했에요.”

“어떤 이야기입니까?”

“이형 중매 해 봤에요?”

“아니요.”

“중매 한 번 해 보겠에요?”

“누구와 누구를?”

“나와 진옥 씨.”

“네?”

나는 비록 다리를 절지만 자태가 빼어난 진옥 씨를 떠올려 보았다. 답이 금방 나왔다. 속으로 조용히 머리를 흔들고는 술을 들이켰다.

“당사자끼리 부딪쳐 봐야 해결날 일 아닐까요? 데이트하자고 이야기해 보시지, 진옥 씨한테?”

“그렇잖아도 식사하러 나가자고 이야기 했더랬에요. 그런데……”

“진옥 씨가 거절합디까?”

장씨는 대답을 피했다. 그러고는 딴 말을 한다.

“진옥 씨가 이형을 좋게 생각하는 눈치였에요. 진옥씨가 그럽디다. 이형은 일 잘하는 목수라고. 또 노가다 티 내지 않고 젊잖은 사람이라고.”

“나를 좋아한다면 비참한 일이 생기지. 나는 결혼했는데. 이건 농담이고, 그래서 내가 말하면 진옥 씨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거란 말이군요?”

나는 좀더 장씨의 개인사를 알고 싶어졌다. 묻고 들은 결과는 짐작했던 대로였다. 재산도 없다. 조실부모한 후로 형님 밑에서 컸다. 지금도 형님 집에서 얹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형님이 부자도 아니다. 독립해 볼 생각은 여태 하지 않고 살았다. 따라서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다.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다. 내가 장씨에게 말했다.

“장성한 조카들이 각자 제 밥벌이하는데 장씨 혼자 벌어 혼자 쓰기도 바쁘다면 형님이나 형수 눈총 받을 텐데?”

“내 이래 봬도 국수 뽑는 기술자였에요. 형님이 오랬동안 물국수 공장을 했었거든요. 형님댁에서 내가 쓸모 없는 인간은 아니었에요. 눈총 받을 일 없었에요.”

“그러나 지금은 결혼할 준비도 안 되었다는 게 문제지요. 공장을 했으면 형님이 장씨 월급도 챙겨 놓았어야 할 것 아니오?”

“월급을 따로 챙길 만한 공장이 아니었에요. 여러 식구 굶지 않고 먹고 사는 것으로 족했에요.”

“그러니까 형님 가족들을 위해 일했다? 좋아요, 장형이 배추이파리를 돈으로 쓰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답게 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지금 가정을 꾸릴 만 한 준비가 안되었으니, 진옥 씨 문제를 이야기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아요. 결혼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장형이 진옥 씨에게 직접 의중을 떠봐도 전혀 이상할 리 없죠. 그러나 지금 장형이 할 일은 청혼이 아닌 것 같네요. 하 사장 몇 년 착실히 따라다니면서 돈을 모으는 일 갖네요.”

장씨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더이상 진옥 씨를 화제로 올리지 않고 술만 마셨다.

덕암사는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 갔다. 양씨는 여전히 힘이 부쳐 보이되 견디어 나갔다. 장씨는 특별히 요령을 피우는 것은 아니지만 그 등산화가 항상 그를 방해했다. 하 사장은 장비를 쓰지 않고 순전히 사람 힘으로 절 구조를 짜 맞추어 나갔다. 대웅전 중심에 크고 긴 촉대를 세우고 도르래를 매달아 대들보와 서까래 등속을 끌어올려 지붕을 짜맞추는 식이다. 양씨는 하 사장이 없을라치면 항상 한마디 한다.

“크레인 불러 (대들보) 들어올리면 얼마나 편해? 몇 푼 아끼려고 사람을 이리 잡누? 에이, 이번 일 끝나면 나는 집으루 갈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양씨를 비롯해 누구 하나 하 사장 앞에서는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덕암사 일을 마치면 북악사 종각을 짓기로 되어 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각은 대웅전 짓는 것보다는 사람이 덜 필요하다. 목이 잘리지 않고 하 사장과 함께 일하려면 열심히, 말없이 일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덕암사 일을 마무리하면서 하 사장과 세화 김씨 둘만 소근거리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북악사에 가서 종각 지을 일을 계획하는 것이다. 누구누구를 데리고 갈 것인가를 의논할 것이다. 그들 둘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화 김씨가 이야기했다.

“북악사 옹벽 거푸집 짤 때에도 이씨 혼자는 어려울 거라. 그러니까 장씨도 한몫 쓸 만할 거라요.”

하 사장이 나를 돌아다보며 말한다.

“이씨, 옹벽 거푸집쯤이야 혼자 할 수 있죠? 안영사 기단 거푸집도 이씨 혼자 잤는데, 뭘.”

내가 혼자 못 한다고 해서 장씨를 데리고 갈 하 사장이 아니다. 나는 그저 머리를 주억거릴 뿐이다. 그러자 하 사장은 김씨를 돌아보며 말한다.

“장씨를 데리고 간다 해도 옹벽 거푸집 짤 때만 필요할 뿐이잖소. 그러니까 장씨는 뺍시다.”

결국 장씨가 북악사 일에서 제외되었다. 장씨는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였을까, 장씨는 하나터면 사고날 뻔 했다. 밤새 서리가 내린 아침이었다. 장씨와 나는 대웅전 지붕에 올라갔다. 지붕 상판을 덮던 어제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장씨가 상판을 덮고 남은 재료를 밟고 미끄러졌다. 장씨는 미끄러지면서 허둥대다가 연목 끝에 박아놓은 발비를 잡고 나서야 간신히 미끄러지기를 멈추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장씨를 끌어 올렸다. 장씨는 간신히 지붕 위로 올라왔다. 장씨가 손이 거북스러운 듯한 몸짓을 했다. 나는 장씨의 장갑을 벗겨보았다. 장씨의 한 손가락 손톱이 벗겨져 있었다. 나는 그 손톱을 바로 펴고는 헝겊으로 싸매었다. 장씨는 내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맙시다. 말 나면 하사장 귀에 들어가고, 안전사고로 하 사장을 걱정시키면 들볶이는 것은 일꾼들이니.”

상량식날 밤에도 장씨는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것은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덕암사 세면장은 작았다. 두 사람 간신히 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을 마치고 얼굴과 손 발을 씻을라 치면 북새통이었다. 나는 혼잡을 피해서 저녁을 먹고 나서 세면장에 씻으러 가곤 했다. 그날도 느긋하게 혼자 씻고 있었다. 세면장에 들어와 작업복을 벗던 장씨의 주머니에서 무엇인가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장씨가 갑자기 허둥대며 그것을 주어들고 안절 부절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내가 안 것은 잠깐 후의 일이었다. 금반지였다!

상량식 하는 날 신도들은 대개 불전과 함께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들을 단 앞에 꺼내 놓곤 했다. 패물들은 따로 추려서 대들보 한 쪽 홈에 넣어 봉해졌다. 나는 장씨를 뜨아 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장씨가 말했다.

“이형, 죄송합니다. 모른 척 해 주세요.”

이윽고 덕암사 일을 마치는 날 일하던 사람 모두 시내에서 회식을 했다. 절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장씨를 술집으로 이끌었다. 생맥주를 마시면서 장씨는 하 사장에 대한 불만을 자제했으나 쓸쓸함을 숨기지 않았다.

“덕암사에 같이 왔던 토목공사 패거리를 따라가지 않았던 것은 물론 공사 뒷마무리 작업과 요사채 일 때문이기도 했에요. 그러나 내 의중은 토목공사를 배우는 것보다는 절 일을 배우는 것이 좀더 품격이 있어 보였에요. 그런데 북악사 공사에는 데리고 가지 않겠다니 조금 챙피하네요.”

나는 할말이 없었다. 양씨는 세화 김씨와 처남 매부지간이다. 따라서 사람이 많다 해도 양씨를 집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또 목수들은 대개 하 사장과 오래 일한 사이이다. 따라서 장씨가 밀려나지 않았다면 내가 밀려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밀려나는 것이 일할 곳이 없다거나 돈 때문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수라고 간판 걸고 다니다가 일터에서 쫓겨난다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연장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해 온 터에 일 못해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만약 하 사장이 나를 자른다면 나는 가만히 잘리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데리고 간다 해도 당신 손해 안 끼친다. 내 품값 내가 벌어먹을 수 있다. 사람 하나가 더 있으면 다른 사람들 일도 줄어들고 공사 기간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 아니냐. 그러니 나도 데리고 가라.’ 그러나 내 코가 석자인 터에 장씨를 돌보아 줄 만한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장씨에게 앞으로의 거취를 물었다.

“스님이나 진옥 씨 모두 (내가)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절에 머물러도 된다고 하세요. 절 살림도 크니까 일할 사람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그러나 머, 내가 절에 있을 사람은 아니고……”

“여기 덕암사에서 겨울을 나는 것도 좋겠네요. 봄이 되면 어디 가서든 일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웃으면서 장씨에게 말했다.

“그동안 진옥 씨하고 잘해 보세요.”

장씨는 헤벌쭉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지금의 장씨 상황에서 진옥 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장씨에게는 희망이요 기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북악사 공사 현장은 자동찻길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자동찻길에서부터 지게로 일일이 연장이며 나무를 현장까지 져 날랐다. 그리고 기둥과 대들보 등은 목도를 해 날랐다. 좀처럼 불평을 하지 않는 세화 김씨가 지게를 지고 가다가 쉬면서 한마디 한다.

“장씨를 데리고 왔으면 얼마나 좋누? 이렇게 힘쓸 일이 많은데 꼭 필요한 사람만 데리고 와서는 사람 들볶는다니까. 저만 퇴직금 없나? 저만 빌딩 가져야 하나? 사람을 좀더 써서 우리 일을 덜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 김씨에게 물었다.

“덕암사 상량할 때 주지가 돈 좀 안 놓았어요?”

“놓았겠지요.”

“누가 보관하고 있나요?”

“하 사장이 가졌겠지요.”

“그 돈 언제 나눠줄까?”

양씨가 내달아 말 했다.

“하 사장은 돈 안 나눠줘. 상량해 보아야 여태 맥주 한 잔 없었어.”

“상량 돈은 대개 나누 갖잖아요? 기와쟁이들 몫까지 나눠주는 법인데?”

김씨가 거들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거라요. 도대체 자기 뱃속만 생각하니, 이거 해 먹겠느냐고.”

북악사 일이 한창일 무렵 장씨 소식을 들었다. 북악사 주지가 모임을 갔다 와서 장씨 이야기를 했다. 덕암사 주지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절 공사 후 뒷일이 많기도 하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보여 장씨를 덕암사에 있으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지 며칠을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러더니 며칠 전 새벽녘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취해 쓰러져 장독처럼 몸이 굳어 있는 장씨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니 와 보라.

의사에 의하면, 온 몸에 동상을 입어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장씨를 병원에 옮긴 경찰이 덧붙이기를, 죽으려고 작정했는지 누워 있던 자리에 소주병이 여러 개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얹혀 살던 주제에 사고 쳤으니 절에서도 쫓겨나겠네. 이제 어디로 가누?”

“배추이파리만 찾더니 배추이파리도 필요 없는 나라에 갈 뻔했군.”

그러나 나를 비롯해서 우리 중 누구 하나 장씨를 문병 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공사판에서 만난 사람은 현장 일이 끝나면 인간 관계도 동시에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덕암사 사진을 볼 때마다 장씨에게서 들은 배추이파리 이야기는 생각해 볼수록 항상 새로운 느낌을 준다. 나는 만 원 짜리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뇌어 보았다.

“이것이 배추 이파리로 만들어졌다 하자…”

4.11 선거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시대와 철학]

4.11 선거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시대와 철학]

이 순 웅(숭실대 강사)

 

1. 집단주의의 뿌리

 

1980년대 초반에는 ‘NL(national liberation)’이니 ‘PD(people democracy)’니 하는 게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표면화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피를 먹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 그 정권을 감싸고도는 미국, 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바빴다. 북한에 관해서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친일세력을 청산했고 거지가 없을 거라는 정도라고나 할까.

1982년쯤일 것이다. ‘야비’(야학 비판)라는 문건이 돌고, 학생운동의 위상에 관한 논쟁이 조금씩 일었다. 그건 한국 사회에 관한 진단의 문제였고 변혁 방법론에 관한 문제였다.

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198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가 ‘외채 4강’에 들기도 했다. 한 번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4개 국가가 국제 축구 대회를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4개 국가는 외채가 많은 순으로 1~4위였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 ⓒ연합뉴스

당시의 변혁 노선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자본주의 파국론’에 입각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학생 운동보다는 노동운동에 기대를 일종의 ‘준비론’이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에 따르면 학생운동은 일종의 기동전 같은 것으로서 도시 봉기의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980년 광주, 강절도 사건이 전무했던 것으로 알려진 해방구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시민군 편이었고 ‘완벽한’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파국론에는 광주에서의 봉기가 확산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내지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봉기가 가능하리란 진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외채 비율이 높은 것은 일종의 경제 파국의 징표처럼 보였다. 경제 파국은 민중의 불만을 유발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러시아식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이 변혁 노선의 한 축을 형성했던 것이다.

한편 준비론은 광주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근본적인 변혁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전두환 정권은 봉기를 진압했고, 각종 언론 등을 동원한 이미지 조작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계급에 기반을 둔 투쟁, 보다 근본적인 계급, 노동자 계급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은 일종의 특권 신분으로서 언제든지 변절할 가능성이 있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했다. 일종의 사상적 무장이 강조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례도 있다. 광주 항쟁이 일어나기 전,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들은 만일의 경우 다시 거리로 나서겠다고 하면서 철수해버렸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작전 실패’였던 것이다. 군부 정권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서울의 학생운동은 군부 세력의 폭력적 각개격파에 무너졌으며 광주에서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광주 항쟁에서도 인텔리들은 투항을 결정한다. 주로 인텔리로 구성된 지도부는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는 결정을 내렸으며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대개 못 배우고 가난한 민중들이었다.

비록 오래 전 얘기이긴 하지만 두 노선은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는 방법론이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어떤 노선이 옳은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노선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유다. 각각의 노선이 가진 논리적 정합성이나 현실 타당성이 아니라 내 선배가 어떤 노선을 선택했느냐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어떤 노선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선배들이 둘로 갈라졌다. 선배들의 판단은 무오류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던 당시로서는 혼란이 적지 않았다. 어쨌든 나 역시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사실 그때의 내 기준은 좀 더 좋아하는 선배 편에 서는 것이었다. 어쩌면 논리보다는 인간관계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선택이 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중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만, 당시에는 일종의 현장 준비론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무서운 게 있다. 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당시에 이런 저런 노선상의 이유로 갈라졌던 이들이 ‘영원히 안 보는 관계’로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논리를 선택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배가 까라면 깠던 시절, 선배의 말은 다 옳은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파국론이나 준비론이나 둘 다 옳은 것처럼 여겨졌고 따지고 보면 어떤 노선이 옳은지 검증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일종의 혈맹 관계처럼 맺어졌던 그 인간관계를 누가 감히 깰 수 있었을까.

1980년대 후반의 학생 운동은 정파 간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던 노동 현장 운동과는 달리 통일운동 일변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NL파가 득세했다. 북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북한을 주력군 내지 동맹군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던 것 같다. 수령론이 어떻고, 북한 방송을 듣고 세미나를 한다는 등의 얘기를 간간이 들은 적이 있는데, 나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들이었다. 북한이 그 정도였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제법 길다. 박정희 정권 시절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40년이 넘는다. 봉건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민주화를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운동 환경은 민주적 의사소통보다는 가부장제나 권위에 의존하는 형태의 운동을 만들어냈다. 거기에다 학연, 지연 등의 요소는 같은 노선을 가진 운동권끼리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하는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말은 노선이 다르면 원수처럼 지내기도 했다는 뜻도 된다.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의 내홍이 점입가경이다.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갈등이라 묘사되는 현 상황이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일종의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민통당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2012년 5월 13일 현재, 이른바 당권파는 폭력적 상황까지 연출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기존의 제도권 정치를 통해서 보고 배운 것이기도 하기에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리고 통진당이 한국의 진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니 크게 기대할 것도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당 이름 치고 안 좋은 이름이 어디 있는가.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 민주당, 새누리당 등 모두 좋은 이름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름에 걸맞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기에, 진보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서 곧 진보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태극기 머리에 두른 사람 중에서 제대로 된 애국자는 거의 없지 않은가. 어쨌든 현재의 통진당 사태를 볼 때 다음과 같은 판단은 가능해보인다.

아마도 비당권파는 이번 기회에 당권파의 (흔히 패권주의라 부르는) 집단주의를 일소하고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잡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일사불란한 전열을 갖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NL은 대중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대중 사업은 정치(精緻)한 논리적 토론이나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교분과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때로는 이러한 문화가 일사불란하게 어떤 대응을 할 필요가 있을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지난번 선거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다분히 ‘성공적’인 결과를 낳은 이유 역시 오랜 대중 사업의 결과다.

반면에 PD는 견결한 계급성을 강조하지만 ‘영 아니다’ 싶은 대상과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성공적인 대중 사업과 거리가 멀다. 선거판에서 PD나 좌파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다. 얼마 전 좌파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진보 전략 회의’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에 관한 토론회를 열었다. 좌파의 총체적 실패를 두고 ‘반성하자’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나는 그 평가가 ‘우리도 NL처럼’으로 들렸다. 기왕에 선거판에 끼어들 것이라면 NL을 비판하기 전에 NL처럼 하지 못한 것에 관해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비당권파는 일사불란한 전열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NL적 성향의 당권파와 달리,다소 어중간한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어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더욱이 민심을 배반했다고 평가받는 유시민 그룹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좌파로부터의 심정적 지지를 얻는 데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3.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

 

진보 운동 진영이 선거에 뛰어드는 것은 부르주아 제도들을 활용하면서 부르주아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극복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활용과 관련해서는 이미 부르주아 지배 계급이 고수다. 선거판은 일종의 포커 게임이기도 하다.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면서도 자기 패를 모두 보여 주지는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진보 좌파는 패를 너무 많이 보여준다. 자금도 딸리고 경험도 없기 때문인지 속을 다 드러낸다. 그만큼 진보 좌파가 선거판에서 기득권 세력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국민들이 진보적 좌파에게 표를 주는 이유는 수권(受權) 능력 때문이 아니다. 보수 여당이나 야당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순수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순수함이 훼손된다면 씻을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불순함으로 본다면야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이 훨씬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간인 사찰 사건은 그야말로 탄핵을 해야 마땅한 사항 아닌가. 보수 여당의 정책을 일정 부분 계승한 보수 야당도 정권을 잡았던 적이 있다. 국민들이 그들의 부도덕함이나 반(反)민주성을 유야무야 대충 넘기는 이유는 그래도 그들은 권력을 잡고 무언가를 할 능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능력이 있든 없든 어쨌든 그들은 국민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보수 야당과 선거 제휴할 때도 이른바 ‘당선 가능성’이라는 것이 늘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제 통진당은 기존 정치권에서 보여줬던 행태를 그만 보여줬으면 한다. 이제 그만 주목받았으면 한다. 그리고 비당권파는 자신의 현실적 한계를 일단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당권파는 결코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정치에서는 논리가 힘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집단적 연대가 힘이다. 전두환 대통령도 자기 부하들을 절대 충성파로 만드는 데 능했다. 누가 뭐래도 ‘존경하옵는 각하’다. 한편 그 시절에는 언론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는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시대다. ‘모두가 정치가요, 모두가 정치 평론가다.’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는 것은 통진당에게 이롭지 않다.

당권파에게는 비당권파의 모습이 ‘조직적 기반도 없으면서 날로 먹으려는 태도’로 보일 것이다. 어떻게 이룬 결과인데 이렇게 줄 순 없다고 볼 것이다. 나아가서는, 당권을 준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당권을 가질 수도 없을 거라는 판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례대표 선거과정에 오해가 있다고 하니 좀 더 조사를 해보는 것도 이미지 연출과 관련해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것이다. 투표 부정은 관례대로 한 것이거나 과장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인데, 불분명하면 불분명한 대로 그때 가서 국민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보여줄지 고민했으면 한다. 그래서 통진당이 아니라 통진당의 일부를 포함한 ‘실질적인 진보적 좌파’가 정치에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거나 장관 정도라도 만들고자 하는 단기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으면 한다. 아마도 이 길은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 모두에게 실망한 이들의 마음을 얻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고, 진보라는 말이 누더기처럼 보이지 않을 때 좀 더 활짝 열릴 것이다.

 

21세기 『자본론』, 월간 〈작은책〉/ 나태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21세기 『자본론』

– 월간 〈작은책〉-
?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참 언론은 약한 사람 눈, 귀, 입이 되어야 한다. 이 땅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99프로가 아니라 1프로를 위하는 언론기관들이 많다. 언론이라고 말하기조차 구차스러운 수구 언론들이 판을 친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힘이 약해져야 이 땅 서민들이 속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김진숙이 노동자를 해직시킨 한진중공업에 맞서서 높은 크레인에 올라갔다. 1년 넘는 기간 동안 올라갔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김진숙을 구하기 위하여 희망버스를 타고서 김진숙을 만나러 갔다. 제 정신이 박힌 진보언론에서는 김진숙과 희망버스를 크게 다뤘다. 조선일보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한미매국협정(한미FTA)이 시작되었다. 10년, 20년, 30년 후에 한미매국협정으로 비롯된 피해는 끔찍스러울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한미매국협정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중동은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한다. 조중동은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하는 여론을 만든다. 왜? 한미매국협정은 한국의 1프로와 미국 1프로에게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1프로로부터 많은 광고를 받으려는 꼼수 때문이다. 저들에게 광고주가 되지 못하는 99프로는 항상 눈 밖에 나있다. 조중동도 99프로를 위한 기사를 쓴다고 반론을 펴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그런 행동은 자신들이 내는 신문이 괜찮은 신문이라고 물타기 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이 땅 99프로에게 고통을 주는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하는 여론 만들면서 99프로를 위하는 기사 쓰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일뿐이다. 전경련 회장 허창수가 “경제민주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허창수가 무식하고 염치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조중동이 뒷 배경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갑갑한 것은 저들의 수작에 넘어가는 99프로가 많다는 사실이다. 1프로의 종노릇하는 조중동은 과연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죽하면 민주시민이 촛불집회 열 때마다 ‘조중동 OUT’ 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겠는가.

조중동의 그림자가 짙을수록 진보월간지 〈작은책〉이 내는 빛은 더 더욱 환하다. 우리는〈작은책〉에서 이 땅 99프로가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프로로부터 퇴직당해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프로에 맞서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한미매국협정이 폐기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가부장제에 눌려서 힘들게 살면서도 가부장제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이 땅에서 겪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지구를 지켜주는 생태교육도 받을 수 있다. 어린이학교 학생들의 재기발랄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8천년 민족사 최고 문장가 박지원선생이 칭찬하는 보통 사람들이 〈작은책〉작은책에많이 나온다.

〈작은책〉을 읽게 되면 국회의원들이 몸싸움하는 것을 피상적으로 비판하지 않게 된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 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저들 가운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파업하는 철도 노동자들을 비판하지 않게 된다. 파업하는 철도 노동자들에게 마음을 함께해 줄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 민주시민들처럼 말이다.
월간나는 개인적으로 〈작은책〉에 아쉬움이 있었다. 〈작은책〉에서 농촌 이야기를 다룰 때 그랬다. 〈작은책〉이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2012년 9월호를 보면서 나는 내 아쉬움을 달래게 되었다.
“독자님들, 저는 지금 전북 변산에 내려와 있습니다. 내년에는 〈작은책〉사무실을 일부 변산으로 옮길 예정이지요. 〈작은책〉이 노동자들의 현장뿐만 아니라 농민과 농촌의 실태를 가까이에서 보고 알리면서 독자님들과 함께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작은책〉2012년 9월호 10쪽)

한미매국협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 땅 농민이다. 농민이 피해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다. 일본에서는 다른 나라와 무역 협정 맺을 때 농민을 확실히 보호하는 쪽으로 협정을 맺는 것을 보면 우리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부디 〈작은책〉이 이 땅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잘 알려주기를 바란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한미매국협정을 폐기하는 데에 〈작은책〉이 큰 역할을 해 주기를 기도한다. 〈작은책〉이라면 그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작은책〉에 나왔던 분이 6개월, 1년 뒤에 한겨레신문이나 프레시안에서 다뤄지는 경우를 가끔 본다. 〈작은책〉정기 구독자이기에 느끼는 기쁨이다. 공유정옥씨가 하나의 보기가 될 것이다.(삼성반도체에서 일하시다가 백혈병을 얻어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반올림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공유정옥씨이다). 〈작은책〉이 진보적인 언론 가운데서도 맨 앞에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책〉17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산과 만난다. 이오덕이라는 백두산 말이다. 민주주의 고갱이는 투표이다. 하지만 투표를 했다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먹물들은 말한다. 민주주의 핵심은 대의제라고 말이다. 거짓말이다. 민중이, 백성이, 일꾼이, 노동자가, 가난한 사람이, 시민이 주인이 되어야 진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야 백두산 이오덕 선생 뜻을 알 것 같다. 이제야, 이제야 말이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 “어린이(초등)학교 학생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 뜻을 이제야 깨닫는다.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이 말이다. 맞다. 참말로 민주주의는 일하는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것이다. 나는 안다. 이오덕 선생이 이 말을 하려고 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먹물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일하는 사람이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 준다. 그래서 나는 〈작은책〉이 좋다. 이오덕 선생은 좋으시겠다. 작은책이 울끈 불끈 힘차게 나아가니 말이다. 〈작은책〉이 벌써 17주년(2012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칼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이 다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자본론』 대가 김수행 교수와 강신준 교수가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자본론』은 노동자의 성서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론』 이라는 책은 너무 어렵다. 실력 있는 사람과 어울려 여럿이서 읽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것도 1년에서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공을 들여야 읽어낼 수 있는 어려운 책이다. 보통 사람이 혼자 읽기는 쉽지 않은 책이다.

『자본론』을 읽고 싶지만 어려워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진보월간지〈작은책〉을 권한다. 한 달 보는데 3천원이다. 2010년에 작은책 강연 뒷풀이 때 한 분이 작은책 한 달 보는 값을 올리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당시 작은책 일꾼 최규화 씨가 말했다. “한 달에 3천원 해도 부담 되서 못 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책〉 정신이다. “한 달에 3천원 해도 부담 되서 못 보시는 분들이 많은” 이런 상황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 현실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작은책〉 꼭 정기구독 해주십사 부탁드린다. 〈작은책〉을 정기구독하는 순간 여러분은 지성인이 된다. 한 달에 3천원도 부담 되서 〈작은책〉 보지 못하는 분을 위해서 〈작은책〉 후원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삼성일반인노조, 구속노동자후원회 같은 단체나 해고노동자 등이 여러분의 후원으로 〈작은책〉을 받아보실 수 있다.

 

 

들뢰즈, 베이컨의 외침을 감각하다 [청춘의 고전 시즌2]-⑩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⑩

?? 일시: 2012. 8. 11.?(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들뢰즈, 베이컨의 외침을 감각하다

?- 베이컨의 와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
강연: 김범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일그러진 얼굴의 초상화

▲ Three Studies of George Dyer, 1966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이 그림은 베이컨(Francis Bacon, 1909~ 1992)이 그린 인물의 초상화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초상화와 많이 다르다. 일그러지고 뒤틀려있어 원래 누구의 얼굴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 힘들다. 흡사 피카소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가 뒤섞인듯하고 대상을 왜곡시키며 순간을 포착한 듯 보이는 이런 화법은 베이컨 그림의 특징이다.

청춘의 고전 열 번째 강의에서 만나볼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리며 얼굴을 ‘해체’시켰듯이 항상 자신의 그림에서 ‘형상을 해체’시킨다. 이 해체를 두고 김범수 교수는 “이것은 가장 감각적인 상태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베이컨의 그림에서 “왜 얼굴이 일그러지는가?”라고 다시 묻는다. 여기에 답하려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철학에서 힌트를 얻어야 한다.

이번 강의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안내해줄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가 “감각은 심층에서 방출 된다”고 말한 점을 강조하면서 베이컨은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자화상의 경우 그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베이컨의 그림과 들뢰즈의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김범수 교수는 “사실 들뢰즈는 이미 『감각의 논리』란 책에서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바가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당시 철학자로서는 파격적인 외도를 많이 했는데 문학, 미술, 영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들뢰즈는 이런 독특한 철학관을 통해 베이컨과 관계를 맺고 그의 그림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체계는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1930~1992)와 함께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에 대한 정의를 ‘개념창조’라고 한데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개념창조란 말은 들뢰즈가 자주 쓰는 내재성의 철학ㆍ유목의 철학이란 말과 일맥상통한다. 내재성이란 초월성(신, 이념, 자유의지)과는 반대의 개념이고 경험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 자연 전체의 얘기이고 경험하는 세계는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혼돈상태와 같다. 이 때 혼돈은 규정되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 규정되지 않은 이 애매모호함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은 신을 찾았고 자유의지를 찾았다. 또 정치에서 이념은 신을 대신하기도 했다”

들뢰즈는 이런 통념을 바꾸려고 한 철학자다. 그런데 철학을 하면서 ‘규정’이라는 것은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들뢰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개념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들뢰즈는 ‘개념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것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베이컨의 ‘외침’ : 재현체계의 거부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는 “예술은 감각-정서의 구현”이라고 정의한다. 예술은 감각의 구현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이것은 ‘내재성의 사유’와 다를 바 없고 들뢰즈는 결국 예술과 철학이 모두 ‘내재성의 사유’와 관련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하면서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에 주목한다. 이 그림은 원래 벨라스케스의 원본 그림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리메이크한 그림이다.

▲ 좌측 :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 1650 ⓒDiego Vel?zquez(디에고 벨라스케스) / 우측 :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 1953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외치는 듯 보이는 얼굴의 묘사는 괴기스럽고 보는 이로 하여금 다분히 공포감을 준다. 얼굴은 마치 빛의 간섭현상처럼 바탕과 중첩되면서 해체되는데 이를 들뢰즈의 용어로 ‘아플라(aplat)’라고 한다. 아플라가 존재하고 형상은 지워지며 윤곽이 그려지면서 기존의 구상미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 되었다.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다시 그린 이유로 관람자들이 교황의 그림이라는 선입관으로 그림에서 기존의 서술적 이야기를 끌어내는 점을 문제 제기하면서 동시에 엄숙한 원본 그림과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식이 선행되기 이전에 감각을 일깨우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김범수 교수는 이어서 베이컨과 들뢰즈의 공통점을 ‘재현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베이컨은 전통적인 구상미술의 재현을 거부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은 전통적인 재현체계를 갖춘 구상미술의 전형이다. 그림 안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이미 기존의 것과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고 화가는 이것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불과하다. 기존 통념으로 주어진 것 위에서 다시 재현하는 이런 체계는 감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아테네 학당, 1510~1511 ⓒRaffaello Sanzio(라파엘로 산치오)

들뢰즈의 철학 역시 표상ㆍ재현체계를 거부한다. 김범수 교수에 의하면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특히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기준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미 존재하는 틀거리(근거)에 특정 사안을 외삽(外揷)해 버리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기존의 주어진 것에 그냥 덧붙여서 추정되는 결론을 맞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습관에 의한 사유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은 내재성이 될 수 없고 창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이 재현의 체계를 거부했다는 것이 들뢰즈에게는 큰 매력으로 느껴졌을 것이고 이것이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한다.

 

‘기관 없는 신체’와 ‘고기-되기’

들뢰즈는 당시 ‘잔혹(殘酷) 연극’이론으로 무대 위에서 대사뿐 아니라 조명?음향?배우의 몸짓 등을 통해 훗날 전위극(前衛劇)이라는 새로운 감각의 연극 장르를 개척한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에게서 빌려온 개념 ‘기관 없는 신체’가 베이컨의 작품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말했다.

베이컨은 항상 “나는 공포보다 오히려 외침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고 더 나아가 “나는 결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미소를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공포는 외침을 통해 완화되고 입은 벌려진 채로, 얼굴은 주변의 배경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얼굴이 변형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신체 기능이 사라지면서 그 ‘기능’은 새롭게 재편된다. 베이컨은에서 이른바 ‘고기-되기’ㆍ’동물-되기’ 라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되기’라는 개념은 감각과 힘을 다시 배치한다는 의미이다.

▲ Painting, 1946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김범수 교수는 ‘되기’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예를 들어 축구선수가 야구선수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축구선수의 근육과 운동 및 환경이 야구를 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바로 이 새로운 배치가 ‘생성’의 의미이고 ‘되기’의 의미라고 한다. 우리는 골키퍼가 절묘하게 공을 막아낼 때 ‘동물적 감각’으로 골을 막았다는 표현을 한다. 이 표현은 골키퍼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각과 힘을 동물과 같은 상태로 배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장 감각적인 순간이며 가장 감각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인 동물적인 것은 고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신체의 ‘기능’은 중요하지 않고 ‘감각의 다발’의 ‘배치’가 중요하다.

여기서 ‘기관’과 ‘신체’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면 ‘기관’이란 “기능에 국한된 하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그 목적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고 ‘신체’는 이와는 반대이다. 들뢰즈는 “신체는 물질덩어리로 ‘강도 0’의 상태, 즉 양 힘이 팽팽하게 맞붙어 움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김범수 교수는 “내 가슴 앞에서 양 주먹을 맞붙여 동시에 가운데로 힘을 가하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두 주먹의 배치가 달라지면 균형의 상태가 달라지듯이 ‘신체’는 힘들로 가득해서 역량들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이 이루어지는 상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강도로 가득하고 감각과 정서가 집약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기관 없는 신체’에 해당한다.

‘Painting’에서 베이컨은 고기를 ‘감각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사용했다. 그림 안에서 잔혹해보이지만 끊임없이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들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베이컨은 여전히 형상을 지운다. 그림 속의 우산은 얼굴 없는 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든 차단하려는 용도이며 바탕에서부터 대상의 이야기가 다시 배치되게끔 그림을 그려냈다. 이런 감각의 배치 때문에 베이컨이 그린 초상화 속의 얼굴은 항상 일그러져 있고 변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겉모습이라 함은 오직 한 순간에만 고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잠깐 눈을 깜박이거나 고개를 약간 돌렸다가 다시 보면 그 겉모습은 이미 달라져 있다. 내 말은, 겉모습이란 계속적으로 ‘떠다니는 것[부유(浮遊)]’과 같다는 의미이다” – 프란시스 베이컨 –

김범수 교수는 베이컨에게 있어 ‘얼굴의 왜곡’이란 “사물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존재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가장 감각적인 상태를 구현”함으로써 “저 심층에서부터 감각을 방출시켜 안정 상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충동’을 반영하고 있다”고 정리한다. 김범수 교수는 여기에 덧붙여 이 상태는 프로이트가 말한 ‘흥분을 적당히 방출하는 것이 평온의 상태며 쾌락의 상태’라는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베이컨의 그림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상태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며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그 의도를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 자화상, 1971 ⓒFrancis Bacon(프란시스 베이컨)

 

들뢰즈의 존재론과 베이컨의 그림

베이컨이 많은 작품들에서 보여준 시도들은 들뢰즈의 철학에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들뢰즈의 존재론과 관계하는데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전통적인 ‘be’ 동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can’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적 ‘can’의 의미는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으로, 생성으로, 창조로 자신의 존재론을 구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있음’에 대한 이야기는 전통적 존재론이다. 김범수 교수에 의하면 고대 철학의 이데아론, 범주론 등은 모두 ‘be’ 동사의 얘기로 ‘be’는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때 확실한 규정이 생긴다. 그러나 들뢰즈의 존재는 주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 없이 ‘can’-‘pouvoir’-‘puissance(힘, 역량)’으로 얘기할 수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변화하는 존재의 양태를 ‘be’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주체는 ‘애벌레 주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김범수 교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 Cogito ergo sum)” 명제를 예로 들면서 완벽한 인간의 이성적 사유와 주체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 보이는 이 명제도 결국 최종 확인을 위해서는 수많은 ‘나’가 있어야 하고 그 수많은 ‘나’ 중에 또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에는 ‘나’라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시켜주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내 안에 여러 ‘나’가 꿈틀대고 있는데 이 여러 ‘나’들의 힘들이 작동되는 관계가 있고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이 관계가 작동된다. 들뢰즈에게 ‘있다’라고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생성하는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자리에 지금 존재하는 ‘내’가 있지만 내 안에 많은 ‘나’들이 분화하여 새로운 관계들을 이 안에서 맺고 있다는 것이다.

김범수 교수는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예를 들어 다시 들뢰즈의 존재론 설명을 이어간다. “스피노자의 경우 제일 중요한 개념은 ‘실체’이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자연전체’이며 실체가 자족적으로 관계들에 의해 변화한다. 내부에서는 변화들이 우글거리는데 ‘기관 없는 신체’는 바로 그 상태를 말한다. 들뢰즈는 지구를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는데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실체개념이고 역량으로서의 존재이다”

이 존재론이 베이컨에 와서 새로운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서 회화의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형상화 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 자체가 자신의 존재론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생성을 얘기하고 기존의 습관적이고 재현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이 저 밑바탕에서부터 배경과 함께 다시 배치되는 모습, 이것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원초적인 힘이며 이 자체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같은 맥락에서 베이컨이 구상화의 틀을 버리고 서술에서 벗어났을 때, 저 밑바탕에서 찾은 새로운 것은 고기, 동물,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에 해당한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청춘의 고전 시즌2] – ⑨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⑨

?? 일시: 2012. 7. 21.?(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 ?낭만주의적 시선과 사실주의적 시선의 차이 –

 

강연 :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혁명에 대한 이미지와 정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란 이름만으로 쉽게 떠올리고 공감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이미지가 있다.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수많은 군중의 선두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어 올리는 여신의 이미지.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외젠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다.

‘1830년 7월 28일’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 때 프랑스 화폐의 배경 그림으로 쓰였고 최근까지 수많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 그림의 표상을 인식하는 만큼 실제 혁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이 그림을 “세상 모든 혁명의 면모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것”으로까지 여기는 듯하다. 아마도 이 숨길 수 없는 막연함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0 ⓒEug?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

청춘의 고전 아홉 번째 시간, 이번 강의를 맡은 조은평 교수는 이 강의를 구상한 의도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아주 간단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혁명’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것은 ‘상징화된 혁명’의 이미지와 표상의 의미로 ‘상식화된 혁명’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실제 ‘혁명’에 대한 기억은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이 문제의식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의 진짜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면서 1871년 ‘파리코뮌’의 혁명성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상징화된 그림 속의 혁명과 실제 혁명 사이의 간극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어지는 화풍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은 1871년 3월 18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 사이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72일간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를 말한다.

사실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의 내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대단하지만은 않다. “단 3일에 걸쳐 샤를 10세의 복고왕정을 몰아내고 ‘루이 필리프’라는 새로운 국왕을 내세워 입헌군주정이라는 또 다른 왕정을 이뤄낸 부르주아 혁명의 한 단계”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잊혀지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프랑스 왕정을 종식시킨 공화정의 상징이 되었다. 반대로 파리코뮌의 혁명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코뮌 당시의 조치와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기억돼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민주주의는 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상대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봉합’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문으로부터 이 강좌는 시작되었다.

낭만주의 시선과 사실주의 시선의 차이

“진정한 예술가란 격정과 열정을 증폭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주제다. 주제는 너 자신이다. 주제는 자연 앞에서 받는 녀의 인상, 너의 감정이다” – 파트리시아 프리드카라사 저, 『회화의 거장들』 중에서 들라크루아의 말 –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예술은 바로 ‘순수한 환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었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였다. 조은평 교수는 “사실 이러한 순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낭만주의 회화의 전략인 것 같다”고 부연한다.

19세기 초에 발생하여 신고전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낭만주의는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가 자신의 느낌과 감성을 표현해낸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현실에서 직접 겪은 사건을 그림에 나타내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을 화폭에 담는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도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으로 실제로 들라크루아 자신이 직접 혁명에 참여하여 목도한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전해들은 혁명 얘기에 감동 받아 3~4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또 다른 들라크루아의 작품으로 고대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의 몰락을 주제로 자신의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완성한 작품인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나 제리코(G?ricault, 1791~1824)가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의 난파사건을 모티브 삼아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낭만주의 그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작가의 개성과 감수성, 상상력을 잘 드러내고 인상적인 주제를 대담한 색채와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하여 화가의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들은 당시의 실제 현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경우 “들라크루아는 정치적 의미에는 관심 없고 단지 정말 역동적으로 작품 속 대상을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 ⓒEug?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

▲메두사호의 뗏목, 1819 ⓒG?ricault(제리코)

이에 비해 낭만주의적 전통을 거부하면서 나온 사실주의 회화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주변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다. “기억의 낭만은 기억 속에서는 아름답지만 반대로 사실은 잔인하고 불편할 수 있지 않은가?” 조은평 교수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천사를 그리겠다”고 한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발언을 두고 보면 이전 낭만주의 화풍과 비교하여 사실주의 화풍의 차별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화풍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을 보는 시선 또한 매우 달랐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쿠르베는 1848년 혁명에 가담했고 1871년 파리코뮌에도 적극 가담한다.

쿠르베는 살롱에 제출한 <오르낭의 매장>이 퇴출당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개인전을 열게 되었고 최초로 ‘사실주의(re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실주의는 이상에 대한 부정이다”, “사실주의는 민주적인 예술이다” 쿠르베는 사실주의라는 용어로 “일상생활의 주제를 역사화의 반영으로까지 끌어올리는 회화 스타일”을 지칭한다. 조은평 교수는 “과거에는 역사가 이상화된 이미지였지만 쿠르베는 일상생활의 주변 얘기들을 역사화의 주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한다. <오르낭의 매장>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 도미에(Daumier, 1808~1879)가 그린 <삼등 열차> 역시 같은 맥락의 그림이다.

▲ 오르낭의 매장, 1849~1850 ⓒCourbet(쿠르베)

▲ 삼등 열차, 1862년경 ⓒDaumier(도미에)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에서 쿠르베는 화가인 자신이 중심에 있고 한쪽에는 괴로운 생활에 찌든 평민의 모습을 그려 넣고 반면에 다른 쪽에는 자신이 그리는 풍경화를 보고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는 귀족들을 그려 넣어 양쪽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구도를 구현했는데 그림에서 자신의 위치와 대상들의 강조를 통해 사실주의의 시선으로 현실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임과 동시에 모순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 1854~1855 ⓒCourbet(쿠르베)

낭만과 사실의 간극 : 1830년 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

조은평 교수는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너무 컸었고 추구하는 화풍의 차이로 인해 두 그림 사이의 간극은 환상과 현실의 간극과 같다”고 하면서 문제는 “역설적으로 들라크루아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그림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대중적인 혁명의 이미지로 기억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낭만적인 혁명의 이미지가 자꾸 대두되면서 혹시 이런 낭만주의적 혁명의 이미지를 통해 당시 혁명의 진실 뿐 아니라 혁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저 흘려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민주주의는 다 저런 피를 먹고 이룩되었다는 식의 생각으로 점철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자답했다.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고 민주는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 속에서 낭만의 추억으로 혁명을 떠올리면서 지금을 잊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곧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대의제 민주주의, 세계화된 자본제 등)을 낭만주의적으로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 속에서 공화국이 완성된 것만 기억하고 이것이 공화정의 완성이라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이미지”라고 하면서 “더 극단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려 했던 것들이 억압되고 참혹하게 진압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사이에 프랑스 혁명의 종착점인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감춰지고 만다.

혁명의 모습들은 결국에는 혁명 내부의 여러 갈등 요소와 존재들을 봉합하는 차원에서 ‘종결됐다’고 사람들에게 강요되었으며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라는 것이다. 삼색기는 결국 균열을 봉합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길이 있었음에도 봉합을 통해 그 길이 차단된 것이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아벨 로르동의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의 이야기>와 앙리 펠릭스 엠마뉘엘 필리포토의 <1848년 2월 25일 시청에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물리치는 라마르틴>에서 보이는 단색기와 삼색기의 대립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의 이야기, 19세기경 ⓒ아벨 로르동

▲ 1848년 2월 25일 시청에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물리치는 라마르틴, 19세기경 ⓒHenri-Felix-Emmanuel Philippoteaux(앙리 펠릭스 엠마뉘엘 필리포토)

모든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혁명에 참여했었지만 자본주의 세력의 안정화, 산업자본가ㆍ금융가 등 세력이 성장하면서 결국은 부르주아 혁명의 확립으로 귀결되어 그 이상의 급진적 혁명은 계속해서 봉쇄된 역사였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848년 ‘2월 혁명’ 이후 ‘6월 봉기'(1848년 6월 23일~26일 파리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자ㆍ노동자의 반란)가 진압된 당시 현실이다. 이를 두고 맑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신(新)라인 신문 Neue Rheinische Zeitung』에서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애는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혁명가들의 이해관계가 상통할 때만 지속됐다. 1789년 이후 수많은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들 중 질서에 대항하려는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지배와 예속의 정치적 형태가 숱하게 변화했음에도 모든 혁명은 계급지배와 노동자들의 예속, 부르주아 질서를 존속하게 내버려두었다. 6월은 이 질서를 건드렸다.”

조은평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은 성공하여 입헌왕정을 확립하고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던 반면, 파리코뮌은 지나치게 혁명을 극단화한 결과, 공화정을 넘어 극단적인 민주주의 길로 나아가려 했기에 진압 당한 과격한 이상주의자들의 결과물로 치부되는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파리코뮌’을 담은 그림은 별로 없다. 파리코뮌은 멋진 그림으로 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 1871년 3월 19일 바리케이드, 1871 ⓒ장 밥티스트 프랑수아 아르노 뒤르벡

파리코뮌의 기억과 현대 민주주의

조은평 교수는 파리코뮌의 의미가 “실질적 민주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코뮌의 의미를 평가했는데 내용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 상비군의 폐지와 무장 인민의 대체, ? 행정과 입법을 겸하는 행동기구, ? 경찰의 폐지와 코뮌의 관료에 대한 상시적 해임 가능(소환권), ?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 ? 교회의 해산과 교회 재산 몰수, ? 억압이 아닌 확장적인 정치형태를 구현 등을 들 수 있다.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들 운명의 주인이 되었고 노동자 계급이 단순히 기성의 국가 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들의 목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없음을 확실히 했다.

이 당시 파리의 상황은 도둑이나 절도와 같은 범죄가 거의 없었고 1848년 2월 이래 파리는 안전을 되찾았는데 경찰과 같은 국가의 질서유지 방법이 동원되지 않은 상태에서였다. 쿠르베도 1871년 4월 15일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파리는 참으로 낙원입니다. 경찰도 없고, 비행도 없으며, 어떠한 방식의 부당한 행위도 없습니다. … 파리가 언제나 이처럼 있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프랑스 내전』中)

맑스는 파리코뮌을 두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했다”고 평가했는데 사실상 “99% 민중의 독재”라는 말은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고 “민주통치가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상태”라고 조은평 교수는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본뜻인 ‘인민(demos)의 통치(지배kratos)’로 이해할 수 있다. 파리코뮌은 역사상 가장 인민의 통치(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일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ofㆍbyㆍfor the people)’라는 구호는 시혜적 느낌이 강하다. 이것을 파리코뮌의 기억과 연결한다면 그 간극은 더 크다. 조은평 교수는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한 문장을 인용하여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기의가 불명확한 텅 빈 기표”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민주적 제도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금의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인민의 역량에 족쇄를 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관여하는 정치와 경제시스템에 참여하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이런 무능력한 현실을 인식하며 사실주의적인 시선을 통해 얻는 비관적 전망은 정치에 대한 냉소를 초래한다고 본다. 마치 “세계에 대한 욕망을 견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가 자신을 욕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리비돌로지』中)인 우울증자들과 같다는 것.

혁명에 대한 단상도 이와 같아서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환상”과 “사회주의 국가 몰락에 의한 사회주의에 대한 냉소”가 맞물려 우리 현실에서 구체적인 혁명의 전망은 상실한 듯하다.

“정권교체라는 낭만적 정치혁명”이 있을 뿐이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그랬던 것처럼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같은 혁명의 이미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전락한다. 조은평 교수는 오늘날의 이런 망각 상황에 대해 ‘파리코뮌’은 바로 “우리 시대의 실재가 유령처럼 튀어 오르게 해주는 망각된 혁명의 기억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와 해방의 길

조은평 교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이데올로기 동굴 속에 있는 현대인을 가정한다. 그리고 파리코뮌의 노동자들은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죄수’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힘으로 동굴을 빠져나가 햇빛은 본 해방된 노동자들”이라고 비유한다. 한편 지젝(Slavoj zizek, 1949~)의 지적처럼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서 결국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서 어떤 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 세상이 확 바뀌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파리코뮌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문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 관리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아닌 누구나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파리코뮌의 의의이다.

“인민은 자기 의무를 다한 수임자(受任人)들에게 감사해선 안 된다. … 왜냐하면 인민의 대표자들은 의무를 다한 것이지 도움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리코뮌 당시 클럽 기관지였던 『프롤레타리아』에 실린 말이다.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이것은 ‘평등의식’을 말하는 것이고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가 『무지한 스승』에서 규명한 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파리코뮌에서 보여준 철저한 평등의 시각과 실천이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현장을 있게 만든 힘이었고 랑시에르가 규명한 지적평등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이를 현실에서 입증해 나간다면 현실은 다시 파리코뮌과 같은 급진적인 사고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은평 교수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해방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해방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해방하는 인간”과 “해방되는 인간”을 만들어 내면 이들이 모여 “해방된 사회”를 만들어 낸다.

체 게바라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말했다. 조은평 교수는 “낭만주의적 시선에 문제를 제기하고 사실주의로 가자”고 하면서 낭만주의로 혁명을 보지 않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이 파리코뮌과 혁명의 의미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거꾸로 그런 리얼리스트의 시선 속에서 불가능한 꿈은 다시 낭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망각하기 위한 낭만이 아니라 열정이나 열망으로 불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람시가 얘기한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지성을 들이댈 때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비관주의의 함정으로 빠지는 실수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