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편집자문위원)
니체 아부지, 울긴 왜 울었어요?
울다니, 내가 언제?
참 아부지도! 그 일이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서, 이번에 영화로도 나왔던데요. 왜, 토리노를 여행하시다가, 가혹하게 얻어맞는 말의 말머리를 껴안고 울었다면서요? 왜 우셨어요?
아, 그거 말이냐, 어디 말이 불쌍해서 울었겠냐? 내 처지가 말하고 같아서, 그랬지. 왜 동병상린이라는 말도 있지 않니? 그런데 그게 영화하고 무슨 상관이냐?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됐단 말이냐?
헝가리 영화 감독 벨라 타르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로 ‘토리노의 말’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대요. 그래서 저도 보고 왔어요. 물론 아부지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요. 아버지의 토리노 에피소드에서 감독이 착상을 얻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얻어맞는 말과 유사하게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어떤 부녀에 관한 이야기이죠. 영화는 시작하면서 이 부녀의 삶을 암시라도 하는 듯이, 마차를 끌고 가는 말의 모습을 오랫동안 비추어 주죠. 비루먹어서 정말 가련하게 보이지만, 마부가 때리는 채찍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짐승처럼 마차를 끌고 달리는데, 카메라는 말 머리에 바짝 붙어서 말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요. 이 장면이 너무나 오래 동안 지속되어서 지루해질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우리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면서 매혹하죠. 관객은 서서히 그런 말의 비루먹고, 짐승 같은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끼게 돼요. 그런데 아부지, 동병상린이라면 아부지도 누군가에게 가혹하게 얻어맞았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나를 때린 게 어떤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신이었지.
그런데 아부지, 아부지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던데, 웬 신이 아직 살아서 아부지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말이에요?
글쎄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야, 채찍에 얻어맞는 말의 모습을 보니, 꼭 신이 우리를 그렇게 처벌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야. 물론 신이란 것은 없겠지. 그런데도 우리는 신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어. 그 관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해 왔던 것이지. 너도 알겠지만, 난 한 평생 그런 신에 대한 관념과 싸웠지. 그런 신에 대한 관념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이 세상에 살면서 제대로 행복하게 웃어보지도 못했던 것이 아니니? 행복이란 것은 없었어. 그저 잠시의 휴식이 있었을 뿐, 우리의 짐승 같은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지. 그래서 마침내 나는 선언했던 거야. 신은 죽었다고. 그러면 이제 신이란 관념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던 거야. 신은 이미 죽어도 골백번 더 죽었지만, 인간은 신이란 관념을 버릴 수가 없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결국 내 인생도 그런 신의 관념에 잡아먹히고 말았지. 토리노에서 말이 얻어맞는 것을 보니, 나 니체조차, 신이 죽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 니체조차도 신의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되었다는 것이 한순간 너무 명확하게 자각되었던 거야. 주요한 것은 신은 관념만으로도 마치 실재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야. 신의 관념에는 존재의 관념이 포함된다고 하지 않니? 그러므로 관념만 있으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아부지가 스스로 바보였다고 말한 거예요? “어머니 나는 바보였어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면서요? 그럼 아부지는 결국 신의 관념과 싸우다가 패배한 것을 자인한 셈이네요.
그런가, 나도 모르겠어. 그 순간 나는 내가 꼭 바보였다는 느낌이 들었어. 신의 관념이라는 허깨비 앞에서 내가 졌다고 생각되었어. 그래서 그 뒤로 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저 짐승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아픈 줄도 기쁜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려 했지. 사람들은 내가 이제 진짜로 미쳤다고 하지만, 내가 미친 게 아니야. 나는 오히려 알았던 거지. 우리가 그저 짐승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던 거야.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와 똑 같았어.
그런데 아부지, 이 영화의 내용도 유사해요. 점차 죽음과 파멸이 다가오죠. 영화는 6일 동안 지속되는데 계속해서 카메라는 어느 황량한 벌판에 사는 두 부녀의 삶을 냉혹하게 지켜보죠. 그 벌판은 메말라 있고 그 위에는 쉼도 없이 돌풍이 몰아치고 있어요. 그 돌풍은 관객인 우리조차 지겨워하게 만들 정도이에요. 그 돌풍 앞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비록 돌 벽으로 되었지만, 이미 곳곳에 무너지고 있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죠. 서서히 그들의 삶이 파괴되어 가요. 이튿날부터 말이 더 이상 마차를 끌기를 거부하죠. 나흘 째 유일한 우물의 물이 말라 버리고. 그날 두 부녀는 집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들판은 텅 비어 있지만 그렇게 비어 있음 때문에 어디에로도 갈 수 없어요. 다시 두 부녀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닷새째 집안의 등불이 꺼지죠. 마지막 엿새째 암흑 속에서 두 부녀는 이제 모든 것이 죽음과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아요.
그럼 자거라투스트라야, 이 영화는 자연주의적인 영화이냐? 김동인의 감자처럼, 결국 주변의 환경 때문에 인간이 무너지고 만다는 거냐?
니체 아부지, 사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 모파상의 작품인 것 같은데, 제가 지금 분명치 않습니다만, 눈보라 속에서 산장을 지키던 사람이 마침내 미쳐버리는 얘기가 떠올라서, 이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두 사람이 미치지 않을까 내심 기다렸지만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끝났단 말이냐?
감독의 태도는 독특합니다. 이렇게 가혹한 삶 속에서 두 부녀는 마치 기계처럼 똑 같은 일을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반복해요. 그들은 깨어나면 한 잔의 술을 마십니다. 그것은 어떤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일처럼 보여요. 독일의 고지대에서 사람들도 깨어나면 맥주 한잔을 마신다고 해요. 그래야 머리가 부팅된다나요. 또 아버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해 딸이 아버지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도와주는데, 돌풍을 막기 위해 걸쳐 입은 여러 겹의 옷을 하나하나 벗고 다시 입죠. 그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 같아요. 두 부녀는 어떤 말도 서로 건네지 않습니다. 오직 “먹자, 자자” 라는 간단한 말만 오가는데, 그 말은 아마 항가리어이겠지만, 우리 귀에는 거의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같이 들렸어요. 두 부녀의 삶은 진부하지만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뭐라고 할까요. 어떤 인간의 자유의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삶입니다. 어떤 가혹한 압박이나 굴욕조차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인간의 힘 말이에요.
자유의지라, 그러면 그들이 초인이란 말이냐?
사실 저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장작을 패고, 옷을 깁고 하는 생존에 긴요한 일 외에는 창문 앞에 세워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몰아치고 있는 돌풍을 응시할 뿐입니다. 그들의 응시를 보면서 저는 들뢰즈가 말한 ‘시청각적 상황’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어요. 들뢰즈는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을 강제로 사유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 사유가 바로 응시라는 거죠.
자거라투스투라야, 거 참 그 영화 어디서 하냐? 나도 꼭 봐야 하겠는 걸. 아주 마음에 든다. 내 철학의 정수이구나.
그래요, 사실 감독 벨라 타르도 사회주의 항가리 출신이지만 니체 아부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요. 저는 사실 그 감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이 감독이 만든 영화들 ‘파멸’이라든가 ‘사탄탱고’ 등을 보아야 하겠어요.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이 영화는 엿새 동안 진행되는 데 이튿날과 사흗날 외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죠. 이튿날은 동네의 이웃이 찾아옵니다. 그는 사실 술꾼이에요. 그러나 말로는 결코 굴복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주인공은 그의 말은 믿지만 그의 행위는 믿지 않는 듯 술 한 병을 주어서 쫓아 보내고 말죠.
굴복이라니, 누구한테 굴복한다는 말이냐?
니체 아부지, 그게 사실 이 영화를 해석하는데 걸리는 가장 큰 문제에요. 저는 그 이웃 손님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의 대상이 신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이 등장하죠. 끝없는 돌풍이나, 우물이 마르거나, 불이 꺼지는 것 등은 단순한 자연적인 사건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신의 힘이 여기서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저는 꼭 욥기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성경의 욥기에서도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은 욥을 파멸과 죽음으로 밀어 넣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같은 맥락이지만 대답은 욥과는 반대이죠. 즉 주인공은 신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혹한 시련 앞에 처해 있어요. 그러나 그는 결코 신에게 굴복하지 않죠. 그 시련 앞에서 그는 오연하게 나는 인간이고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듯해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들의 엄숙한 선언이 마치 해방의 선언처럼 울려 퍼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그들이 프로메테우스란 말이냐?
에, 정말 감독은 그들의 모습을 마치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그려놓았어요. 거인 또는 영웅들이 모습이죠. 저는 이 영화에 사흘째 날에 등장하는 집시의 모습에서 감독의 이런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집시들이 다가왔을 때 주인공 부녀들은 그들을 쫒아내죠. 집시들은 떠나면서 딸에게 책을 하나 전해 줍니다. 그 책을 딸이 나중에 읽는데, 거기에는 성소가 더럽혀졌고 너희가 저지르는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 적혀 있어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죄의식이죠. 집시가 전해주는 이 책은 바로 신에게 저항하는 이 영웅들을 신에게 굴복시키려는 달콤한 죄의식의 말이었던 셈이죠. 물론 집시 자신은 신의 율법에 따라 살지는 않아요. 집시들은 그런 죄의식 때문에 차라리 신의 명령을 포기한 삶 즉 욕망의 삶을 살지만 죄의식을 버릴 수는 없죠. 반면 이 영화의 주인공 두 부녀는 이런 신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죄의식 자체를 거부합니다.
자거라투스투라야, 이제 알겠니?, 내가 왜 나를 바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신의 힘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를 뿐이야.
니체 아부지, 신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이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어지? 넌 아직도 모르겠냐? 신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주인공 두 부녀는 마침내 마지막 날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 스스로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인간에게 허용되는 최후의 자유의지가 아닐까요? 먼저 딸이 먹기를 거부하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면서 감자를 으깨어 먹으려던 아버지조차 마침내 손을 내려놓습니다. 분노에 가득한 눈으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죠. 그리고 영화는 페이드아웃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