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철학 고전읽기 강의계획서-아리스토틀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읽기

담당 선생님: 김진성

1. 강의 개요

<형이상학>은 변화하는 세계에서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영원불변의 존재(神)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다루어지는 다양한 주제들 중 다음의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춰 발췌하여 강독하면서 <형이상학>의 내용을 개괄하고자 한다.

 

2. 주별 강의 계획

1강(6월 23일): ‘철학’이란 무엇인가?

– 철학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철학은 다른 학문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본다.

? 강독: <형이상학> 1권(Α) 1-2장, 6권(Ε) 1장

 

2강(6월 30일): ‘존재’란 무엇인가?

– 철학이 탐구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 강독: <형이상학> 4권(Γ) 1-2장, 5권(Δ) 7장

 

3강 (7월 7일): ‘모순’이란 무엇인가?

– ‘대립’ 개념을 분석하고, 모든 것들에 보편타당한 근본원리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 강독: <범주들> 10장, <형이상학> 4권(Γ) 3장

 

3. 주교재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김진성 옮김), 이제이북스 2007.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들, 명제에 관하여>(김진성 옮김), 이제이북스 2008.

 

* 강독에 필요한 부분을 복사해서 강의 때 드리겠습니다.

 

 

희랍철학 고전읽기 강의계획서-국가론 편(플라톤)3-6주차

희랍철학 고전 읽기: 3주~4주차 강의계획서

담당 선생님: 김인곤

<3주차>

1. 소피스트적 정의관 비판(I권_336b~II권_367e)

①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정의는 강자의 이익) 비판(336b~354c)

②글라우콘의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비판(357a~367e)

2. 플라톤의 정의관 : 이상 국가 건립을 통한 정의 개념 확립(367e~434d)

①-1국가 수립의 기본원리(369b~374e)

 

<4주차>

①?2. 수호자의 자격과 임무(375a~376e, 421d~427c)

②개인의 정의와 국가의 정의 : 혼의 세 부분과 국가의 세 부류(427c~455b)

③이상국가의 실현 가능성 : 철학과 정치권력의 통합(471c~487a)

 

**두 사람이 소 주제 하나씩 나누어 맡아서 준비해 오면 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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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철학 고전 읽기: 5주~6주차 강의계획서

담당 선생님: 김주일

4) 506d7~521c10(6권~7권) : (좋음의 형상,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5) 543a1~580a9(8권~9권) : (정체의 형태와 개인의 성향)

5-1) 543a1~555b2(명예지상정체, 과두정체)

 

6주차 :

5-2) 555b3~580a9(민주정체, 참주정체)

 

– 과제 : 5주차에는 ① 좋음의 형상과 선분의 비유, ② 동굴의 비유, ③ 명예지상정체

6주차에는 ① 과두정체(5주차에 분류되어 있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6주차로 넘김),

② 민주정체 ③ 참주정체를 매주 한 주제를 두 사람씩 맡아 발제해 오면 되겠음.

발제는 줄거리가 아니라 논의 중심으로 논의 구조가 드러나게 해오기 바람.

희랍철학 고전읽기 강의계획서-크리톤 편

플라톤 <크리톤> 읽기

담당: 이기백 선생님

1. 강의 개요

<크리톤>을 읽으며 소크라테스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과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원칙을 살펴보고, 그가 과연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했는지, 혹은 그런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주별 강의 계획

4월 21

<크리톤>과 관련된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일부를 읽고(당일 자료를 줄 것임)

<크리톤> 43a-49e 부분을 읽을 것임.

 

4월 28

<크리톤> 49e-54e 부분을 읽고,

시민불복종 문제와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소논문을 읽으며 검토할 것임.

 

3. 주교재

플라톤, <크리톤>(이기백 옮김), 이제이북스

 

 

작은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의무급식이야기[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이수진(학부모)

 

같은 동네에 사는 젊은 새댁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올해는 우리 아이가 무상급식이 안된다는 데요, 얘기 들으셨어요?”

“아니, 왜? 작년엔 받았잖아. 학교에서 별소리 못 들었는데”

“유치원하고 중등은 지원이 없구, 초등만 준다는데요. 지역신문에 났어요.”

 
ⓒ오마이뉴스학교에서 학부모 운영위원을 하고 있고 지역에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일을 하다 보니 종종 학교 문제에 관한 문의 전화를 받곤 한다. 느닷없는 전화를 끊고 이래저래 알아보니 참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작년에 3개월간(9월-12월) 유치원 만5세가 경기도교육청 예산 지원으로 의무급식(무상급식)의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급식비를 100% 지원해주었으나 올해는 예산 부족으로 지자체에서 40%(약 1억 8천만 원)을 부담하고 경기도 교육청이 60%(약 2억7천만 원)을 분담하여 의무(무상)급식을 실시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시에서는 예산부족이라는 이유로 대응자금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예산편성안함). 해당 교육청에 알아보니 교육청 담당 장학사가 여러 차례 시장을 찾아 갔으나 거절하였다고 한다.

우리시가 예산부족으로 내세운 대응투자금 40%는 정확히 1억 8천 6십 8만 8천 원으로 우리시 전체예산의 0.04%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그 돈이 없어서 2억 7천 만원을 날려버리고 급식비를 내고 밥을 먹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학교에도 똑같이 적용 돼서 중학교에도 우리시만 급식비 지원이 되지 않고 있다.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주민의 의사를 묻는 공청회나 의견수렴의 절차 없이 시가 일방적으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지역신문 귀퉁이에 난 기사를 보지 못했다면 영문도 모르고 당할 일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아줌마들 사이에서 오가고 난 후 유치원 학부모들이 주축이 돼서 시청에 문의 전화를 하고 민원을 내기로 했다. 다른 시에서는 경기도교육청의 보조를 받아 무상급식을 실시한다는 데 왜 우리시만 못한다고 하는지 민원을 내니 돌아 온 답변 은 더욱 가관이다. “예산이 부족하다”, “일방적인 도교육청의 밀어붙이기 행정이었다”며 수요예측이 가능했던 무상급식 예산을 편성하지도 않은 채, 학부모들에게는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3월말에 추경예산을 잡는 시의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학부모들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유치원은 공립과 병설 유치원 학부모들이 연락을 해서 까페를 만들고 시청 앞에서 무상급식을 요구하는 집회를 갖고 기자회견을 열기로 하고, 중학교 학부모들은 학부모회 회장들이나 학부모운영위원이 긴급하게 연락을 해서 회의를 열고 ‘의무(무상)급식을 바라는 학부모임’을 만들어 서명 작업과 일인시위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신속하게 모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지역이 워낙 좁은 까닭도 있지만 그동안 학부모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는 마련되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인구 20만이 되지 않는 경기도의 작은 중소도시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지역이였다가 일명 신도시가 들어오면서부터 도농복합지역으로 바뀐 곳이다. 그렇다보니 신도시로 이주한 입주민과 기존 지역민과의 의식차도 있고 생활차이도 있다. 수도권이라고 하지만 농촌지역에 가까워 시청에 들어가면 지역 토박이 성씨(姓氏)를 쓰는 공무원들이 대부분일 정도였고 공무원들이 어찌나 권위적이던지 민원을 넣으러온 시민들에게 불친절은 기본이고 고압적 자세로 업무를 봐주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서울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은 수시로 민원을 내고 전화를 걸어 공무원과 싸우는 일이 잦았고 시를 상대로 소송을 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시민의 목소리를 내는 시민단체들이 생겨나게 됐고 많지는 않지만 지역공동체 일을 하시는 분들이 생겨났다.

지역에서 일을 하다보면 답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워낙 보수성이 강한 지역이라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이 거의 대부분 보수당 당원들이고 이들은 자기의 생각 없이 무조건 당의 입장으로 말한다. 무상급식만 하더라도 인터넷에서나 올라오는 말들이 서슴없이 시의원입에서 튀어 나온다.

예를 들면 ‘무상급식 하느라 예산이 전부 애들 밥먹는데 들어가서 시에 돈이 없다. 그래서 아직 도로를 못 만든다’라고 아파트 대표자들을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야기 한다. 참고로 그 도로는 10년째 공사 중인 곳이다. 무상급식은 작년부터 이루어 졌는데 그전에는 왜 그 도로를 완성하지 못했느냐고 물으면 ‘너무 예민하신 것 아니냐, 뭐 그렇다는 얘기지 어떻게 그걸 일일이 말할 수 있겠느냐?“고 한다. 또 어떤 시의원은 ”무상급식하면서 급식질이 떨어져서 아이들이 맛이 없어 밥을 못 먹는다고 하더라“란 이야기도 한다. 학부모회 일을 하기 때문에 급식실 영양교사들을 만날 일이 있어 그 분들에게 물어보면 ”의무(무상)급식을 하고 나서는 예산이 안정화 돼서 오히려 급식질이 좋아졌다’고 한다. 무상급식을 하기 전에는 급식비를 못내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예산이 불안정하고 급식비를 못낸 아이들까지 먹여야 하므로 예산이 늘 부족했었다고 했다.

의무(무상)급식을 놓고 헛된 곳에 돈을 쓴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현장의 이야기를 한 번도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다.

각자 자기가 사는 곳에서 서명 작업을 받기로 하고 헤어진 중학교 학부모회 회장님들은 그 후 다시 모이질 않았다. 학교 측에서 정치적 문제가 개입된 것 같으니 학부모들에게 그 모임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단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순수한 행동이 아니라 무상복지, 무상급식이라는 정치적 문제라나 뭐라나.

그렇다고 의무(무상)급식을 바라는 학부모 모임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위축되지는 않았다. 뜻있는 학부모들이 계속 활동하기로 해서 일인릴레이시위도 계획대로 진행됐고 서명 작업도 받아서 제출했다.

우리시에서 의무(무상)급식은 아직도 예산편성을 기다리는 중이나 유치원생은 곧 편성이 돼서 의무급식을 먹게 될 것 같고, 중학생은 좀 더 시위가 필요할 듯하다.

3월이라 해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지하철역 앞에서 일인시위에 참여하게 된 나는 지나가시면서 ‘수고하십니다’ 한마디 해주시는 아저씨들이 있어 가슴이 따뜻했고, 일인시위 한다고 아침부터 일부러 지하철역까지 나와 준 아줌마들이 있어 어깨가 으쓱했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참고로 12년 2월 현재 경기도교육청 소속 30개 시군교육청 가운데 14개시(대부분 경기외곽지역)에서 대응투자을 하지 않아 의무급식을 하고 있지 않으며 4월까지 몇 개의 시가 대응투자 예산을 세워 이후 집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연구자 양성 프로그램-철학세미나 1기 모집[ⓔ시대와 철학 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1기 수강생 모집

– 철학근력향상 프로그램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합니다. 철학 공부에도 기본 근력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철학 공부를 위한 근력 향상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제도권 대학원에서의 철학 세미나가 갖는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전문적인 학문 연구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기초 연구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어 철학 세미나를 마련했습니다. 철학 세미나는 철학 원전을 토대로 동·서양 철학사, 형이상학 그리고 사회철학의 주요 저작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2년여의 대장정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1기 세미나에서는 희랍 철학 세미나, 서양 근대 철학 세미나, 독일어 문법 학습과 원전 강독이 진행됩니다. 2기에서는 동양 철학 원전 강독, 서양 현대 존재론과 정치철학, 예술철학, 그리고 과학철학 세미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헬쓰장에만 몸짱 트레이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 원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저항적 시선이 공존하는 세미나를 한철연에서 모신 철학 근력짱인 선생님들과 함께 만들어 가지 않겠습니까?

 

과목 소개

독일어 원전 강독 연습 : 독일어 문법 학습 + 마르크스,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강독

강사: 서유석 (호원대 교수)

기간: 4월 21일 ~ 9월 29일 (24주) 토요일 오전 10-1시

 

희랍철학 고전 읽기

플라톤 – 크리톤, 국가, 아리스토텔레스 – 형이상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발췌 세미나

강사: 김인곤, 김재홍, 김주일, 김진성, 이기백 (정암학당 연구원)

기간: 4월 21일 ~ 7월 7일 (12주) 토요일 오후 2-5시

 

서양 근대 철학 고전 읽기 : 이성 비판으로부터 정신현상학으로

칸트 – 순수이성비판, 헤겔 – 정신 현상학 발췌 강독 세미나

강사: 이병창 (전 동아대 교수)

기간: 7월 14일 ~ 9월 29일 (12주) 토요일 오후 2-5시

 

대 상: 대학원 재학생 및 수료생, 학부 3-4학년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수업 방식: 원전 발췌 강독 세미나 (학생들은 번역본을 참조할 수 있음)

신청 방식: 메일 (yhseo2001@naver.com)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 다운로드: 한철연 홈페이지 hanphil.or.kr)

수 강 료 : 없음 (과목당 최대 수강 인원 10명, 최소 수강인원 3명, 3명 미만 시 폐강)

문 의: 02-332-4301, yhseo2001@naver.com

시 간: 2012년 4월 중순~ 9월 중순,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

장 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 1, 2실

자거라투스트라,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세상의 어머니여! 모든 아이들을 보호할 것인가, 우리 아이를 위험에 내놓을 것인가

김 경 원(문정중학교 교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과 세계 기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아기를 낳지 않는다 했던 여자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자연 번식(?)에도 성공하였다. 중고등 시절, 선생님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딴 짓과 자습 빼먹기를 밥 먹듯이 하던 여자는 먹고 살 방도를 위해 젊은 시절을 헤매다 양심도 없이 뒤늦게 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의 유부녀 여교사가 된 것이다. IMF 시절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소심해질 대로 소심해진 국민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 내 주변의 사람들은 부쩍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지난 달에 부산에서 만났던 초면의 남편 선배는 요즘 구독하는 신문에서 보니 학교가 정말 심각하다며 나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최근 만난 큰시누이는 내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고 했다. 뭐 그냥 그 자리에서 울어야 할 분위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물론 내 주위에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심란한 에피소드는 많다. 내 주변의 소심한 동료는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돌아와 한참을 넋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다. 그 선생님은 말 안 듣는 악동들의 교실에서 벗어난 충격(?)으로 점심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정말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 앉아 있는 것인데 그러한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어떤 선생님은 자다가도 수업 시간에 힘들었던 장면이 생각나 벌떡 일어나 당시에 억울하게 당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분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주변 학교의 즐거우신(?) 학생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활약상도 우리 학생들을 통해 종종 나의 귀에 들어오기도 한다. 킥복싱을 배운 학생과 학부모 혹은 자해하는 학생에 의해 위협을 당한 교사의 이야기는 같은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서 듣기에 민망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본인도 교직 생활 10여년 동안 무협의 세계에서 생활하며 나름대로 몇 가지 어려웠던 에피소드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들으면 매우 버릇없고 나쁜 인간 말종들의 이야기로만 들리기 때문이다. 혹은 학생 장악력에 문제가 있는 여교사의 하소연으로 들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섬세하게 그 상황의 뒷면까지 보면 어려운 가정 형편에, 가족의 해체에, 잘못된 입시 위주 경쟁 교육에, 믿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에, 권위적인 교사 및 학부모들이라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회 도로로 해결 방법을 찾게 되기도 한다. 최근 언론 지면에는 학교에 학생들을 장악할 남교사가 너무 없었다거나, 가해 학생에게 너무 처벌이 미약했다거나, 학교 문제라고 해서 외부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거나 사회적으로 교사들이 체벌 등 강제적으로 학생을 장악할 방법이 없었다는 반성들이 들끓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남교사를 확충하자거나 가해 학생에게 강력하게 처벌하자거나 경찰의 적극 개입을 인정하거나 교사들에게 강력한 제제 주단을 주자는 등의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그 조치에 경쟁 위주의 교육 제도 시정이나 가족 복지에 대한 배려는 들어 있지 않다.

오늘도 인터넷에는 단골 기사인 학교 폭력 관련 기사가 새로 올라와 있다. 10만원 때문에 친구를 죽인 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태연히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었다는 고등학생의 이야기가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요즘 애들은 쯧쯧쯧…….”, “이런 애들은 콱 죽을 때까지 콩밥을 먹여야지.”, “이게 인간이야? 괴물이지!” 등등 강력한 대응이 자신의 도덕성을 입증하는 양 우리는 한 두 마디씩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성토하곤 한다. 그러면 우리는 깨끗하다. 이러한 괴물을 낳은 사회의 일원이지만 우리는 분명 깨끗할 것이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이 아이의 아버지는 일찍이 도박에 빠져 집을 나가고 엄마가 홀로 일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과거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현재는 폭력적인 가난 앞에 노출되어 있던 이 아이의 엄마는 분명 비정규직이었을 것이고 늦게까지 일하느라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말하면 그것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학교 폭력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아이들을 학교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것인가? 엄마로서는 눈물 나는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교사인 나조차도 학교 폭력으로부터 내 아이를 완전하게 보호할 수 없다. 단지 운 좋게도 친절한 담임 선생님과 좋은 단짝 친구와 너그러운 일진을 만나길 기도할 뿐……. 혹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총알도 피하는 유연성이 우리 아들에게 허용되길 바랄 뿐이다.

이기적인 엄마들 입장에선 우리 아이만 이 혼란한 세상에서 쏙 빼서 보호할 수 있은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쉽지 않아 나의 아이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안전하고 행복해야 비로소 나의 아이까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절실하게 나의 아이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안위까지도 내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듯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무한한 친구의 친구의 가정이 어떠한지 아버지는 도박을 끊으셨는지 어머니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셨는지가 진심으로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신이 세상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듣는 엄마들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결코 자신의 자식만을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을 보호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자식을 위험 속에 내놓든지 둘 중 하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편집자문위원)

니체 아부지, 울긴 왜 울었어요?

울다니, 내가 언제?

참 아부지도! 그 일이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서, 이번에 영화로도 나왔던데요. 왜, 토리노를 여행하시다가, 가혹하게 얻어맞는 말의 말머리를 껴안고 울었다면서요? 왜 우셨어요?

아, 그거 말이냐, 어디 말이 불쌍해서 울었겠냐? 내 처지가 말하고 같아서, 그랬지. 왜 동병상린이라는 말도 있지 않니? 그런데 그게 영화하고 무슨 상관이냐?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됐단 말이냐?

헝가리 영화 감독 벨라 타르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로 ‘토리노의 말’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대요. 그래서 저도 보고 왔어요. 물론 아부지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요. 아버지의 토리노 에피소드에서 감독이 착상을 얻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얻어맞는 말과 유사하게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어떤 부녀에 관한 이야기이죠. 영화는 시작하면서 이 부녀의 삶을 암시라도 하는 듯이, 마차를 끌고 가는 말의 모습을 오랫동안 비추어 주죠. 비루먹어서 정말 가련하게 보이지만, 마부가 때리는 채찍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짐승처럼 마차를 끌고 달리는데, 카메라는 말 머리에 바짝 붙어서 말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요. 이 장면이 너무나 오래 동안 지속되어서 지루해질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우리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면서 매혹하죠. 관객은 서서히 그런 말의 비루먹고, 짐승 같은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끼게 돼요. 그런데 아부지, 동병상린이라면 아부지도 누군가에게 가혹하게 얻어맞았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나를 때린 게 어떤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신이었지.

그런데 아부지, 아부지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던데, 웬 신이 아직 살아서 아부지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말이에요?

글쎄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야, 채찍에 얻어맞는 말의 모습을 보니, 꼭 신이 우리를 그렇게 처벌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야. 물론 신이란 것은 없겠지. 그런데도 우리는 신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어. 그 관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해 왔던 것이지. 너도 알겠지만, 난 한 평생 그런 신에 대한 관념과 싸웠지. 그런 신에 대한 관념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이 세상에 살면서 제대로 행복하게 웃어보지도 못했던 것이 아니니? 행복이란 것은 없었어. 그저 잠시의 휴식이 있었을 뿐, 우리의 짐승 같은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지. 그래서 마침내 나는 선언했던 거야. 신은 죽었다고. 그러면 이제 신이란 관념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던 거야. 신은 이미 죽어도 골백번 더 죽었지만, 인간은 신이란 관념을 버릴 수가 없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결국 내 인생도 그런 신의 관념에 잡아먹히고 말았지. 토리노에서 말이 얻어맞는 것을 보니, 나 니체조차, 신이 죽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 니체조차도 신의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되었다는 것이 한순간 너무 명확하게 자각되었던 거야. 주요한 것은 신은 관념만으로도 마치 실재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야. 신의 관념에는 존재의 관념이 포함된다고 하지 않니? 그러므로 관념만 있으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아부지가 스스로 바보였다고 말한 거예요? “어머니 나는 바보였어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면서요? 그럼 아부지는 결국 신의 관념과 싸우다가 패배한 것을 자인한 셈이네요.
그런가, 나도 모르겠어. 그 순간 나는 내가 꼭 바보였다는 느낌이 들었어. 신의 관념이라는 허깨비 앞에서 내가 졌다고 생각되었어. 그래서 그 뒤로 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저 짐승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아픈 줄도 기쁜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려 했지. 사람들은 내가 이제 진짜로 미쳤다고 하지만, 내가 미친 게 아니야. 나는 오히려 알았던 거지. 우리가 그저 짐승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던 거야.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와 똑 같았어.

그런데 아부지, 이 영화의 내용도 유사해요. 점차 죽음과 파멸이 다가오죠. 영화는 6일 동안 지속되는데 계속해서 카메라는 어느 황량한 벌판에 사는 두 부녀의 삶을 냉혹하게 지켜보죠. 그 벌판은 메말라 있고 그 위에는 쉼도 없이 돌풍이 몰아치고 있어요. 그 돌풍은 관객인 우리조차 지겨워하게 만들 정도이에요. 그 돌풍 앞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비록 돌 벽으로 되었지만, 이미 곳곳에 무너지고 있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죠. 서서히 그들의 삶이 파괴되어 가요. 이튿날부터 말이 더 이상 마차를 끌기를 거부하죠. 나흘 째 유일한 우물의 물이 말라 버리고. 그날 두 부녀는 집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들판은 텅 비어 있지만 그렇게 비어 있음 때문에 어디에로도 갈 수 없어요. 다시 두 부녀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닷새째 집안의 등불이 꺼지죠. 마지막 엿새째 암흑 속에서 두 부녀는 이제 모든 것이 죽음과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아요.

그럼 자거라투스트라야, 이 영화는 자연주의적인 영화이냐? 김동인의 감자처럼, 결국 주변의 환경 때문에 인간이 무너지고 만다는 거냐?

니체 아부지, 사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 모파상의 작품인 것 같은데, 제가 지금 분명치 않습니다만, 눈보라 속에서 산장을 지키던 사람이 마침내 미쳐버리는 얘기가 떠올라서, 이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두 사람이 미치지 않을까 내심 기다렸지만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끝났단 말이냐?

감독의 태도는 독특합니다. 이렇게 가혹한 삶 속에서 두 부녀는 마치 기계처럼 똑 같은 일을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반복해요. 그들은 깨어나면 한 잔의 술을 마십니다. 그것은 어떤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일처럼 보여요. 독일의 고지대에서 사람들도 깨어나면 맥주 한잔을 마신다고 해요. 그래야 머리가 부팅된다나요. 또 아버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해 딸이 아버지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도와주는데, 돌풍을 막기 위해 걸쳐 입은 여러 겹의 옷을 하나하나 벗고 다시 입죠. 그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 같아요. 두 부녀는 어떤 말도 서로 건네지 않습니다. 오직 “먹자, 자자” 라는 간단한 말만 오가는데, 그 말은 아마 항가리어이겠지만, 우리 귀에는 거의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같이 들렸어요. 두 부녀의 삶은 진부하지만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뭐라고 할까요. 어떤 인간의 자유의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삶입니다. 어떤 가혹한 압박이나 굴욕조차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인간의 힘 말이에요.

자유의지라, 그러면 그들이 초인이란 말이냐?

사실 저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장작을 패고, 옷을 깁고 하는 생존에 긴요한 일 외에는 창문 앞에 세워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몰아치고 있는 돌풍을 응시할 뿐입니다. 그들의 응시를 보면서 저는 들뢰즈가 말한 ‘시청각적 상황’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어요. 들뢰즈는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을 강제로 사유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 사유가 바로 응시라는 거죠.

자거라투스투라야, 거 참 그 영화 어디서 하냐? 나도 꼭 봐야 하겠는 걸. 아주 마음에 든다. 내 철학의 정수이구나.
그래요, 사실 감독 벨라 타르도 사회주의 항가리 출신이지만 니체 아부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요. 저는 사실 그 감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이 감독이 만든 영화들 ‘파멸’이라든가 ‘사탄탱고’ 등을 보아야 하겠어요.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이 영화는 엿새 동안 진행되는 데 이튿날과 사흗날 외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죠. 이튿날은 동네의 이웃이 찾아옵니다. 그는 사실 술꾼이에요. 그러나 말로는 결코 굴복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주인공은 그의 말은 믿지만 그의 행위는 믿지 않는 듯 술 한 병을 주어서 쫓아 보내고 말죠.

굴복이라니, 누구한테 굴복한다는 말이냐?

니체 아부지, 그게 사실 이 영화를 해석하는데 걸리는 가장 큰 문제에요. 저는 그 이웃 손님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의 대상이 신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이 등장하죠. 끝없는 돌풍이나, 우물이 마르거나, 불이 꺼지는 것 등은 단순한 자연적인 사건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신의 힘이 여기서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저는 꼭 욥기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성경의 욥기에서도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은 욥을 파멸과 죽음으로 밀어 넣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같은 맥락이지만 대답은 욥과는 반대이죠. 즉 주인공은 신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혹한 시련 앞에 처해 있어요. 그러나 그는 결코 신에게 굴복하지 않죠. 그 시련 앞에서 그는 오연하게 나는 인간이고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듯해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들의 엄숙한 선언이 마치 해방의 선언처럼 울려 퍼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그들이 프로메테우스란 말이냐?

에, 정말 감독은 그들의 모습을 마치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그려놓았어요. 거인 또는 영웅들이 모습이죠. 저는 이 영화에 사흘째 날에 등장하는 집시의 모습에서 감독의 이런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집시들이 다가왔을 때 주인공 부녀들은 그들을 쫒아내죠. 집시들은 떠나면서 딸에게 책을 하나 전해 줍니다. 그 책을 딸이 나중에 읽는데, 거기에는 성소가 더럽혀졌고 너희가 저지르는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 적혀 있어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죄의식이죠. 집시가 전해주는 이 책은 바로 신에게 저항하는 이 영웅들을 신에게 굴복시키려는 달콤한 죄의식의 말이었던 셈이죠. 물론 집시 자신은 신의 율법에 따라 살지는 않아요. 집시들은 그런 죄의식 때문에 차라리 신의 명령을 포기한 삶 즉 욕망의 삶을 살지만 죄의식을 버릴 수는 없죠. 반면 이 영화의 주인공 두 부녀는 이런 신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죄의식 자체를 거부합니다.

자거라투스투라야, 이제 알겠니?, 내가 왜 나를 바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신의 힘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를 뿐이야.

니체 아부지, 신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이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어지? 넌 아직도 모르겠냐? 신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주인공 두 부녀는 마침내 마지막 날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 스스로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인간에게 허용되는 최후의 자유의지가 아닐까요? 먼저 딸이 먹기를 거부하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면서 감자를 으깨어 먹으려던 아버지조차 마침내 손을 내려놓습니다. 분노에 가득한 눈으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죠. 그리고 영화는 페이드아웃 됩니다.

 

 

 

 

 

3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한철연 3월 월례발표회를 알려드립니다.

3월 월례발표회는 신입회원의 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자 김은하 선생님은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칸트의 매체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철연의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에서 활동중입니다. 이번 월례발표회에서는 박사학위논문의 주요 내용을 발표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석하셔서 새로운 연구 주제에 관해 함께 토론 해주십시오.

발표자: 김은하(건국대)

제목: <직관-기호-개념: 사유의 체계론적 관점에서 본 기호의 위치>

시간: 3월 23일 오후 5시

장소: 한철연 제1 세미나실

다음은 발표자의 간단한 논문 소개입니다.

“순수이성비판 A98-103에 해당하는 칸트 체계론(Systematik)은 정신활동의 순수·논리적인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기능은 크게 필연적으로 “직관-구상-개념”의 3중적 종합체계로 이루어진 것이다.

먼저 직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이란 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병합적인 질서와 순차적인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개념을 통한 종합이란 대상의 다양들을 규칙성있게 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한 대상을 생각할 때에는 그 대상을 직관 속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기호가 매개된 연속적인 구상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식은 기호에 의한 하나의 삼중구조(triplex genesis e natura mentis) 형태를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