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4)

김남우 (정암학당)

[우신은 삶의 행복이 사태의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 허상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거짓과 아부와 허상 등은 모두 어리석음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을 위무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해주는 경우에 이것을 ‘아부’라 합니다. 오늘날 아부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래도 아부는 사태 자체보다는 언어에 현혹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들은 아부와 진실함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도저히 가까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 못하는 짐승들을 예로 살펴보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개처럼 착 달라붙으면서도 진실한 짐승은 또 어디 있습니까? 다람쥐처럼 알랑거리며 사람들에게 진실한 동물은 또 무엇입니까? 설마 포학한 사자들이나 야성의 호랑이들 혹은 거친 표범들이 인간 삶에 더욱 유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아부도 있는바, 이로써 몇몇 악의적인 냉소주의자들은 상대방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가련한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하지만 나 우신을 따르는 아부는 호의적이며 선량하여, 아부와 반대되는 직언, 혹은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우악하고 신랄하고 귀 따가운 사설보다는 훨씬 덕에 가깝다 하겠습니다.1) 이런 아부는 낙담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어둡고 우울한 사람에게 활기를 주며, 풀죽어 늘어진 몸에게 자극을 주며, 멍청하게 넋이 나간 인간을 일깨우며, 병에 지친 육신에게 고통을 덜어 주며, 감사납고 매몰찬 인사를 나긋나긋하게 녹이며, 사랑으로 인연을 맺어 주며 맺어 준 사랑을 붙잡아 둡니다. 또 어린 학생들이 책을 붙잡고 공부하도록 부추기며, 노년을 는실난실 들뜨게 하며, 송덕을 가장하여 심사 불편이 없게 군주들을 훈계하여 가르칩니다. 정리하면 아부는 누구나 스스로에게 흡족하고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인바, 이는 행복의 한 부분 혹은 행복의 요체라 하겠습니다. ‘노새끼리 서로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보다 제격인 일이 있겠습니까? 아부가 존경받는 웅변술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의학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며 시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지 못할까 마는, 아무튼 아부는 인간 삶 전체를 달콤하게 하는 꿀이며, 살맛을 북돋는 양념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합니다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습니다. 인간 만사는 변화무쌍하고 황홀난측하여,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덜 오만하다 할 나의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옳게 판단하였던바,2) 무엇 하나 제대로 분명히 사태를 파악하기란 아예 무망한 일이며, 설혹 무언가 사태의 실마리가 보였다 한들 이는 드물지 않게 즐거운 인생에 오히려 성가실 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영혼은 진상보다는 차라리 거짓에 끌리기 쉽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요구한다 치면, 교회의 설교시간을 보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심각한 말씀을 전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꾸벅거리며, 하품하며 싫증을 냅니다. 사제의 사설 ― 아니 설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실수했습니다 ― 에 흔히 있는 일인바 꼬부랑할망구의 옛날이야기가 피어오르면, 사람들은 모두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피며 입을 벌립니다. 심지어 성인이 이야기를 술술 재미지게 풀어내거나 솔깃하게 지어 낸다면, 이에 대한 예로 여러분은 게오르기우스 혹은 크리스토포루스 혹은 바르바라 등의 성인들을 떠올릴 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이 성자를 베드로 혹은 바오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경건하게 경배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 말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이쯤 합시다.

그러니 행복에로의 접근은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가능합니까? 사태의 진실을 파악해야 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수고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며, 문법과 같이 하찮은 일조차도 값싼 것은 없습니다만, 거짓은 제일 쉬운 일인바 가진 허상만큼 혹은 가진 허상보다 훨씬 큰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금에 절여 삭힌 고기를 먹으며, 어지간한 사람도 그 역겨운 냄새를 견딜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천상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묻거니와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이 별미라 할 상어알 젓을 메스꺼워한다면,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또 만일 무지막지하게 못생긴 아내를 보면서 마치 베누스 여신과 경합을 벌일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것과 진배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주홍과 노랑으로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그림을 쳐다보며 경탄을 금치 못하여 아펠레스 혹은 제욱시스의3)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실제 저 유명한 화가들의 위대한 그림을 비싼 돈을 치르고 구입하고도 그림 감상에서 그저 엇비슷한 정도의 쾌락을 얻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이를 알고 있습니다.4) 그는 새로 얻은 부인에게 선물로 인조 보석을 선물하면서,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를 발휘하여 그 보석이 천연의 진품 보석이며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내 묻거니와, 그런 보석으로 눈과 영혼을 충분히 배부르게 먹이고, 가짜 보석을 마치 굉장한 보물인 양 감추고 아낀다면 가짜든 진짜든 여인에게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의 착각을 이용하여 비용을 아꼈으며, 많은 돈을 주고 사들인 선물로 아내를 감동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자신에게 붙들어 두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온갖 다양한 사물의 그림자와 모상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진상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지 않으며 지금 그대로 만족한다고 할 때, 동굴로부터 탈출하여 세상 온갖 사물들의 진상을 알게 된 현자와 이들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루키아노스가 이야기한 부자 뮈킬로스가 만일 영원히 황금의 꿈을 꿀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다른 행복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이가 전혀 없으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허상에 빠진 어리석은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허상을 선택한 경우가 훨씬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 분명한 즉,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허상의 억견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유이든지 함께 누릴 사람들이 없다면 하나도 즐거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설령 있다 한들 매우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수백 년 동안 희랍인들을 현자로 다만 일곱 명을 헤아리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칠현인을 자세히 파고들면, 아니면 내 목숨을 내놓겠는바, 그들 가운데는 얼치기 현자가 끼어 있으며, 혹은 그들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1)호라티우스 <서간시> 1, 18, 6행

2)여기서 ‘오만한 태도’와 관련하여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21d이하 (최명관 역, 종로서적, 1981, 47쪽)을 보라. “오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저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지자라고 여겨지고 있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당신은 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알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3)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다. 제욱시스는 기원전 425년 이전에 아테네를 찾은 화가로서 소크라테스 등과 교류하였다. 남부 이탈리아 크로톤의 헤라 신전에 헬레네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4)아마도 토머스 모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ME 133쪽 참조).

사랑의 조미료로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비법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박비호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사랑의 조미료’에 관한 이야기

“지금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이 말은 십 여 년 전부터 급식 조리 사원을 뽑을 때 지원자들에게 내가 던지는 유일한 질문이다. 질문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요즘 당신은 가족들과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이다.

지금부터 십 칠년 전에 학교에 납품하는 위탁 급식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이 된 것은 과연 소비자들이 얼마동안이나 우리 음식에 질리지 않고 계속해서 먹어줄까 하는 것이었다.

‘일류 호텔의 주방장들이 고급재료를 엄선하여 만든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계속하여 두 끼를 먹기가 힘들지만 집에서 아내나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은 비록 솜씨가 부족하고 재료가 보잘 것 없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먼저 그 원인을 찾고 난 후에 이 사업을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나는 얼마 후에 그 해답을 어머니와 아내의 가족에 대한 ‘사랑의 결과’ 라는 형이상학적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은 음식의 재료나 음식 솜씨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족에 대한 정성과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일명 ‘사랑의 조미료’ 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 그리고 사랑과 정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사원으로 채용하였고 음식 재료의 선택부터 음식을 만드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고스란히 사업장에서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사랑의 조미료’를 흠뻑 뿌려 만든 음식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날 집안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나 사원 상호간에 갈등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 혹은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걱정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음식 조리에서 배제하였다. 이와 같은 운영의 결과였는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십칠 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서해안에서 유일한 급식 납품업체를 운영할 수 있었다.

 

과학으로 비과학적인 문제를 증명한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

2002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194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요코하마 시립대학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한 에모토 마사루의 작품으로 모든 생물의 생명은 물론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물을 주제로 수시로 변하는 물의 사진을 통하여 물에도 의식이 있음과 특히 물이 말과 글씨, 음악 등에 따라 변화되는 것을 물 결정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특히 우리 인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물이 우리의 의식에 따라서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책이다.

1. 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저자는 ‘인간은 물이다.’ 라고 정의하면서 이 말을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키워드라고 한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드라마는 물이 비쳐내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바다에 물방울을 떨어뜨림으로써 사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물에게 말을 들려주고, 글씨를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었을 때 물이 보여주는 신비하고 놀라운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랫동안 물과 파동에 대한 연구를 해온 저자는 눈(雪)의 결정체 하나하나가 그 모양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부터 물의 결정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사랑, 감사’와 같은 말이나 긍정적인 글을 보여준 물에서는 완전한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이 나타났지만 ‘악마’, ‘멍청한 놈’, ‘바보’, ‘짜증나, 죽여 버릴 거야’ 등과 같이 부정적인 말에는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찌그러진 결정체의 모습이 나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 주세요’ 라는 온유한 말에는 꽃처럼 예쁜 육각형 결정이 나왔지만 ‘그렇게 해!’ 라는 명령조의 말에는 ‘악마’ 라고 말할 때와 같은 결정을 보였다고 한다. 물 결정 사진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결정을 보인 것이 바로 ‘사랑’과 ‘감사’라는 말에 대한 결정이다.

인간의 몸도 70퍼센트가 물임을 고려하면 우리가 서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즉 사랑과 감사처럼 긍정의 에너지를 주고받으면 몸속 물도 건강하게, 맑고 아름답게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과 감사로 가득 채우면 사랑해야 하는 것, 감사해야만 할 멋진 일들이 저절로 찾아와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만 원한이나 불만, 슬픔과 같은 파동을 발하면 한층 더 원한을 품어야 할 상황이나 슬픔으로 가득 찬 세계를 자신에게로 끌어 오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세계를 선택하고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한다.

2. 물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입구

하늘에서 내려온 빗물은 몇 십 년, 몇 백 년의 세월에 걸쳐 흙을 통하여 지하수가 된다. 저자는 스위스 취리히 공대 교수였던 조안 데이비스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물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되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은 정보를 기억하고 지구를 순환함으로써 그 정보를 전달하며 물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해독하는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물의 결정에 관한 관찰이라고 한다. 특히 ‘고맙습니다’ 라는 말에 반응하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결정체와 ‘사랑과 감사’라는 말에 반응하는 장엄한 광체가 물의 생명과 혼의 모습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과 감사’ 라는 말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말이라고 한다.

3. 의식이 모든 것을 만든다.

저자는 물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매력에 이끌려서 인간이 오염된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가의 답을 물과 연관하여 찾고 있다. 그리고 물의 결정이 생기는 이유는 모든 물질의 감정과 의식이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파동이 물에 영향을 주어 파동에 상응하는 결정구조를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글자 또한 고유한 파동이 있기 때문에 물이 거기에 반응한다고 주장한다.

생각과 의식이 파동 에너지로 전파되듯이 사랑을 느끼는 것도 혹은 서로 반목하는 것도 파동의 영향이라고 한다. 또 분노와 슬픔, 원한 같은 감정을 치유하는 데도 파동의 법칙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좋지 않은 감정과 정반대의 파동을 내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한이란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분노에는 연민을, 공포에는 용기를, 불안에는 안심을, 초조에는 안정을, 압박감에는 평상심을 가지면 된다고 한다. 이런 원리로 원한의 감정으로 병에 걸린 사람은 감사의 마음을 되찾음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과 의식은 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즉 의식이 물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4. 한순간에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끝으로 저자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연구하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셀드레이크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번 만들어진 형태의 장은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넘어서 전파된다고 한다.

즉 형태의 장이 만들어 지면 다른 장소에도 영향을 끼치며 이것은 한 순간에 세계를 바꾸는 일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장으로 살아가는데, 따라서 우리는 주위 사람이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의식을 향한다는 말은 사랑으로 대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장을 만드는가에 따라서 고통과 상처의 장으로 만들 수도 있고, 사랑과 감사로 가득한 세계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넘치는 사랑과 감사로 세계를 감싸줄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멋진 형태의 장이 되어서 세계를 바꾸어 간다고 한다.

 

인간이 서로 조화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사랑의 조미료’라는 말이나 ‘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과 음악 같은 소리는 물론 글자에도 반응한다.’는 형이상학적인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비과학적이고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랑과 감사라는 말은 멀지않은 장래에 그 중요성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확실하게 증명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 역시 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물에서 조차 아름답게 반응하는 낱말인 ‘사랑과 감사’라는 말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지역이나 인종, 언어 등 모든 여건을 초월하여 인간이 서로 조화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

*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일곱 번째 글로서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양억관 옮김/나무심는사람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있다 – 박지원, 「不移堂記」 [연암읽기 02]

전호근(경희대)

사함은 연암 박지원의 벗이다. 본디 대나무를 좋아했던 사함은 자신의 호를 죽원옹(竹園翁), 곧 ‘대나무집 늙은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연암이 막상 가서 보니 사함의 집에는 대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연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을 터. 그러고는 느닷없이 자기 스승이었던 이양천의 이야기를 꺼낸다.

연암의 스승 이양천은 일찍이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던 이인상과 막역한 사이였다. 본래 제갈공명을 흠모했던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공명의 사당에 심어져 있는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난 뒤 이인상이 족자를 보내왔는데 펼쳐보니 잣나무 그림은 없고 양나라 사혜련이 지은 「설부(雪賦)」, 그러니까 눈에 관한 시만 있다. 이양천이 어찌 된 거냐고 묻자 이인상은 「설부」 안에 잣나무가 들어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대꾸한다. 그림을 달라고 했는데 글씨를 보내오고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눈 속에서 찾아보라니? 이양천은 의아할 밖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이양천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간했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유배지로 가던 중 눈이 내리더니 곧이어 금부도사가 오면 사약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전갈이 왔다. 따라갔던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울부짖는데 이양천은 문득 멀리 눈 속에서 어릿한 나무를 발견한다. 아, 이인상이 말하던 눈 속의 잣나무가 바로 저기 있구나!

섬에 갇힌 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드는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토하고 어지러워하는데 이양천은 이렇게 노래했다.

“남쪽 바다의 산호야 꺾인들 어쩌겠는가마는 오늘 밤 임금의 처소가 추울까 걱정이라네[南海珊瑚折奈何 ?恐今宵玉樓寒].”

얼마 뒤 이인상에게서 편지가 왔다.

“근래에 그대가 지은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았더니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겠소. 이제 보니 그대야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할 만하오.”

이런 이양천이 세상을 떠난 뒤 연암은 그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학사는 참으로 눈 속의 잣나무로다. 선비는 곤궁해진 뒤에 평소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법이니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어찌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변하지 않는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사함에게 들려주고 연암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나의 벗 ‘죽원옹’ 사함은 대나무를 사랑한다. 사함이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이라면 날씨가 추워진 뒤에 우리는 눈 덮인 그대의 뜰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잣나무와 대나무는 모두 선비의 변함없는 지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지만 당대의 화가 이인상이 보기에 그야말로 자신의 삶으로 잣나무를 제대로 그린 사람이었다. 연암 또한 자신의 벗 사함이 어려운 시절이 닥치더라도 변함없이 지조를 지켜 삶의 대나무를 그리리라는 믿음으로 보이지도 않는 눈 속의 잣나무를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2)[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산속 움막으로 쫓겨 가다.

몸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는 어머니가 끓여주던 미역국이 먹고 싶다. 싱싱한 생선과 생미역을 넣고 끓인 뜨거운 국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면서 힘이 솟았다. 어머니는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면서 안쓰러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미역국에서는 언제나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행복한 일상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에게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어머니이다. 할머니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시냐는 질문을 자주 했다. 그 질문 뒤에는 “김선생도 아(아이)가 있제?”라는 또 다른 질문이 꼭 이어 나왔다.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얼굴도 알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수많은 마음 속 옹이 중의 하나였다.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소문은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갔고, 가끔씩 호기심으로 소문의 진위를 탐색하기 위해 오던 이웃들의 발길도 끊겼다. 할머니와 어머니 둘이서 살던 집은 세상 속의 섬이었다. 두 사람은 말을 잃어갔고, 하루 종일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음이 기정사실화 되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살고 있던 집을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팔고, 동네 뒷산 기슭에 있는 허물어져가는 움막 같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은 밤이 되면 더 무섭고 추웠다. 짐승의 울음소리도 무서웠지만, 누군가 와서 해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깊이 잠들 수도 없었다.

19살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초여름이었지만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 산속 움막은 계절과 관계없이 밤만 되면 서늘한 바람이 여기저기서 들어왔고, 혹시 잠이 깊이 들었을 때, 누군가 와서 딸을 해칠까봐 어머니는 깊은 잠을 자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태어날 아이에 대한 불안감에서 할머니는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냈다.

움막 주위 어디에도 물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왔지만, 한센병에 걸린 할머니가 물가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씻을 물도 마실 물도 움막 가까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산속에 흐르는 물줄기 가까이에 갈까봐 멀리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은 시간을 피해서 새벽이나 저녁 무렵에만 우물로 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용케 알고 쫓아와 두레박을 뺏고 물통을 발로 차며 우물가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옷고름이 찢어진 채로 빈 물통을 들고 와 통곡하는 날이 많았다.

 

이래도 부모는 병든 자식이

그렇게도 좋을까

우물에 물을 뜨러 가시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레박을 빼앗기며

양철통을 발로 차이고

온갖 학대와 멸시와 천대를 받고

돌아오면 모녀간에 부둥켜안고 울어

눈도 붓고 얼굴도 부었네.

<내 인생길> 부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다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숨결이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벌레도 풀의 이슬을 먹고 사는데, 나는 사람이다 하고 소리 질렀다. 나는 벌레도 아인기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할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떨어져 내리더니 코끝에 걸쳐 있는 안경알에 고였다.

할머니는 스스로를 사람도 아니고 벌레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이라고 했다.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살 수 없는 한센인은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한하운, <나>)”과 같은 존재였다. “다만, 억겁을 두고 나누고 또 나누어도 많이 남을 벌(<나>)”받은 존재인 것이다.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한하운, <삶>)”라는 처절한 싶은 현실뿐이었다.

한센병에 걸린 자신으로 인하여 어머니가 겪는 고통은 할머니에게 자신의 병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벌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들판으로(<내 인생길>)” 내달려도 마음의 고통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돌에 채이고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는 한센병의 진행을 도왔다. 병은 몸을 조금씩 잠식해왔지만, 뱃속의 아이 때문에 시중에 떠도는 약은 아무 거나 먹을 수 없었다. 한센병에 좋다고 인정된 약은 너무 비싸 사 먹을 수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절망이라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왔다. “차라리 이 땅위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내 인생길>)” 자신으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사는 어머니를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병들어 갔다. “배는 불러오제, 끼니거리도 구하기 힘들제, 우리 어무이는 온 산을 헤매고 다니며 산나물이고 열매고 갖고 와서 나 먹이기 바쁜기라.” 할머니의 숨결이 다시 가빠졌다. 눈시울은 붉게 물들고 맞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살아 있는데, 죽은 사람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씻지도 못하고, 사람 가까이에 갈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은 사는 것일까? 죽는 것일까?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현재 살아 있지만,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난날을 말로 다 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눈물과 떨림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6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차라리 자기가 없었더라면, 어머니는 가족이 함께 살던 큰 집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임신만 하지 않았더라도 어머니 곁을 떠났을 것이고, 그러면 어머니가 좀더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회한도 컸다.

 

느삼태 찾아 이산 저산 헤매던 어머니

무더운 8월 여름에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조금씩 나오던 젖도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아이는 언제나 배를 곯았다. 어쩌다 살갑게 지냈던 사람들이 아이 낳은 것을 알고 살짝 갖다 놓고 가는 양식이 유일한 끼니거리가 되는 날이 이어졌다. 산 아래 사람이 사는 세상은 해방이 되었다고 기쁨이 넘쳤지만, 산기슭 움막에는 적막만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옷을 못 입혔제. 지도 산 목숨이라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는데, 젖이 안 나오는 기라.” 할머니는 이야기를 멈추고 긴 한숨을 쉬었다. “에미는 나병에 걸렸는데, 아는 괜찮더라. 참 우습제.” 많은 사람들이 전염될까봐 외면했는데, 정작 한몸으로 있었던 아이는 건강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찾아오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일본으로 급히 돌아갔다는 사실도 어렵게 찾아 온 친구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에 할머니를 찾았노라고 친구는 전해주었다.

어쩌면 아이를 낳은 사실도 영원히 모를 것이라고 할머니는 짐작했다. 실제로 마쓰시타가 아이의 존재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할머니는 자신과 아이가 마쓰시타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자 병은 무서운 기세로 할머니를 덮쳤다.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산모와 제대로 울지도 않는 갓난 아기를 두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산을 헤매고 다녔다. 한센병에 좋다는 느삼태를 구하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렸다. “허리에는 노끈을 드리우고 약초 망태기는 어깨에 메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산 저산으로 헤매며(<어머니>)” 다녔다.

어머니는 오로지 느삼태를 구하기 위하여 어떤 날은 “엎어지고 넘어져” “머리 깨어 피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까치 밭길에 천 갈래 만 갈래 찢긴 옷”을 “바람에 휘날리”며 돌아오기도 했다. 느삼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내 한이야 내 한이야”하며 통곡했다. 어머니의 통곡 소리는 지금도 할머니의 귓가를 맴돌고 있다.

 

사모곡과 할머니의 두통

어머니가 당했던 고통의 근원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는 “머리털 하나하나 뽑아서 어머니 신틀메를 삼아도, 뼈를 깎아 어머니 공덕탑을 세워도” 불효를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6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할머니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가 한 편의 시로 재현되었다.

이 불효 여식

벌레만도 못한 인생

이것 무엇 보시고

당신께서는 그 높은 사랑

사랑으로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십니까.

 

팔십 평생 살며

어머니 앞에

딸자식 자랑거리가 못되어

많은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받아가며

어머니 앞에 황송할 뿐인

이것이 내 인생길입니다.

 

어머니

끝끝내 당신은

나를 두고 눈물로

황승길 가셨나요.

아,

어머니.

<어머니> 부분.

시 <어머니>를 읊고 나자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이마에 열기가 있었다. 놀라서 화장대 서랍을 열고 약을 찾았다. 서랍 안은 몇 권의 공책과 전화번호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수많은 약봉지 속에서 두통약과 해열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약을 찾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돌아앉은 채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할머니의 말을 듣기만 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이거, 묵어 있던 거 몸 밖에 꺼내어 뭐할 낀고 싶다.”

“우리 어무이는 참 고왔다. 아버지가 좀 일찍 돌아가시고 해도, 남긴 것도 있고 논도 있고 먹고 사는 데에 넉넉했다.”

“봐라, 김선생. 약 안 먹어도 된다. 옛날 생각해서 머리 아프다.”

“어제 밤에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더라. 마이(많이) 나서 마이 울었다. 그래 머리 아프다.”

할머니 옆에 가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웃는 것뿐이었다. 할머니를 만나면 시를 읊기 전까지는 내가 많은 말을 하지만,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고 그것을 받아쓰기 시작하면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쓰는 내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할머니의 두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

#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전호근 작 <벽>(2007)입니다.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세일러문의 국가[썩은 뿌리 자르기]

양정진(한국철학사상연구회)

1.‘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에 이어 복지국가 열풍이 찾아왔다. (행성X와 혜성 엘레닌을 사랑하는 음흉한 나에게는, 정의론 중에서도 왜 하필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뇌내망상의 세계를 만들어낼 신나는 구실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 현재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이 정의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하기가 힘든 것 같다. 그리고 무지개의 끝에 숨겨져 있는 줄만 알았던 그 정의가, 복지국가라는 이름의 오색 빛깔 스펙트럼으로 공중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조지 레이코프 식으로 말하자면 과거 우리의 ‘엄격한 아버지’께서조차도 우리에게 복지국가를 실현시켜 주시고자 했던 것뿐이라고 그의 생물학적 딸이 주장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 진보는 국가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가 자체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폄하하던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공공선과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서 국가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의 기획은 현실적으로 실패했으며 시장과 국가를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의 ‘역사의 종말’ 론을 반복하는 경향으로도 나타난다. 내용상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주장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주장들이 하필 샌델의 정의론 열풍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으로 보인다.

2.복지국가, 좋다. 더 이상 아무도 크레인에 올라갈 필요가 없고 분신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 온다면, 살갑게 돌봐 온 배추를, 소와 돼지를, 아이를 가슴에 묻지 않아도 된다면, 점심 먹을 시간 좀 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다면, 학생 신분이라는 게 사치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 그게 어떤 이름을 갖고 있든 대체 무슨 상관일까. 누구 말마따나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만 제대로 보장될 수 있어도, 최소한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가슴 벅찰 듯하다.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처절하게 행복한 상상들이 정의라는 관념과 연결될 때, 또 복지국가라는 이념이 정책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상황일 때, 이 상상들은 단일한 입장으로 좁혀지기가 쉽지 않다.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누구의 정의인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물어야 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실시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의가 더 우선인가’에 대한 세부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3.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단지 ‘현존하는 긴급한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앞뒤 자르고 무조건 진보가 뭉쳐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험(CPD)’을 제거해야 한다는 냉전 시대 미국의 논리와 닮아 있다. 미국은 바로 이 논리를 확장하여 9.11 이후 애국자법을 발효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과거에는 매카시즘으로, 현재에는 이슬람교도와 이민자들을 제물로 삼는 희생제의로 나타났다. 즉, 미국은 악을 제거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제거했다.

악을 제거하겠다는 수단은 그렇게, 정의의 실현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제치고 스스로 목적이 된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은 용납된다. 선과 악의 이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악의 반대가 곧 정의라는 이 단순한 논리 안에서, 악의 제거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악으로 규정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난 몇몇 선거에서 어떤 진보 정당은 악으로 규정되기도 했고, 또 어떤 진보 정치인은 ‘정치 생명이 끊어졌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제는 누가 진보인지, 무엇이 진보인지도 헛갈릴 지경이다. 이러한 이분법을 깨지 않는 한, 민주주의도 복지국가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악만 일단 제거하고 나면 공공선과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 국가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은 혁명이 일단 성공하고 나면 이상적 사회 건설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국경 따위 가볍게 뛰어 넘는 국내외 거대 자본 및 잃어버린 십 년을 보상 받고 그들만의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 점진적으로 공공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과연 정말로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쉽고 더 빠른 방법인지 나로서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현재 이곳의 이 누더기 같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다음 선거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기다리고,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은 그냥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면서 죽든지 텅 빈 축사에서 목을 매든지 반도체 공장에서 암에 걸리든지 4대강 공사 현장에 묻혀버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건지, 혹시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 감각이 마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4.어차피 둘 다 이상적이긴 매한가지다. 더구나 둘 다 ‘그 이후’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사실상 마찬가지다. 둘 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이후의 세계를 합의하고 구성해나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를 바 없다. 어떤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어떤 것은 너무 이상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최종 근거 따위는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혁명론자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나의 현재 정치적 입장을 굳이 설명하자면 슬프지만, 무뇌형 변신박쥐라고 해야 적절하겠다.)

그러므로 국가 자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보다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은, 그리하여 시장과 국가를 자연화 하는 데까지 이르는 주장은, 그다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입장이 더 이상적이고 어떤 입장이 더 현실적인지가 아니다.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다 그냥 이상일 뿐이다. 이상으로서 그 의미를 갖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이상을 꿈꿀 것인가이다. 즉, 문제는 정의라는 이념의 내용을 채우는 일이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는 그 이상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를 논할 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5.이상이나 이념이 현실에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이상이 현실에 대한 규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상을 갖는지에 따라, 현실을 얼마만큼 바꿔내야 할 것인지, 어디에서 만족하고 변화를 멈출 것인지가 결정된다. 개혁이 됐든 혁명이 됐든 변화의 최종 목적지를 설정해 주는 것이 바로 이상이다.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고 모두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가운데 이들 사이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이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가일 것이다. 목적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수단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여기서 물어야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이다. 각자가 취하는 이상, 각자가 설정하는 최종 목적지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래서 그 최종 목적지에서 내버려지는 것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시장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의 이상을 자본주의 내부에 설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상은 아무리 깜찍한 말로 포장해도 자본주의 체제 그 바깥으로 절대 나아갈 수 없다. 기껏해야 그러한 이상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 목적지에서는 단지 중산층의 삶이 얼마나 부유해졌는지, 빈곤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등을 통계적으로 제시하고 한 사람 당 한 표의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목적지에서는 화폐 한 장 당 한 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사실이고 그래서 잘 은폐되어야 하는 사실일 수밖에 없다. 좋은 삶이 곧 돈을 많이 가진 삶을 의미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것만 잘 은폐된다면 달리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대화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 해결되면 좋고 해결 안 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냥 해결될 때까지 열심히 대화해야 한다. 대화에 낄 수 없는 존재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문제를 대신 말해 주는 시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6.마이클 샌델의 공화주의적 정의론 역시 다르지 않다. 샌델이 정치를 도덕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도덕은 선거에서 보다 많은 표를 획득할 수 있는 도덕이다. <왜 도덕인가>에서 샌델이 미국 국민 전체의 의지이자 미국 국민이 원하는 도덕을 드러내는 지표로서 설정하는 것은 선거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미국의 특수한 선거제도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바로 선거에 반영되는 의지가 대체로 기득권층의 의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샌델이 말하는 도덕은 백인 남성 기독교인으로 대변될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의 공동선이지, 미국 사람들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공동선일 수는 없다. 더구나 샌델이 묘사하고 있는 미국 내 인권 확대의 역사가 정치 엘리트 및 백인 남성들의 역사라는 점 또한 샌델의 정의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지를 드러내 주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이 점은 미국의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듯하다. 9.11 테러 이후 누군가는 ‘예외상태’가 상례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또 누군가는 이슬람교도와 같은 특수한 사람들이 희생양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국제적 연대보다도 공동체의 정체성 및 이웃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샌델의 논의는 단순히 개인과 공동체가 맺는 긴밀한 관계에 대한 윤리라고만 읽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다. 샌델이 세계화된 자본에 맞서 공공영역을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순간에조차도, 샌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국 중산층의 재산과 안위이지 빈곤 계층이나 유색 인종의 행복은 아니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7.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수용되는 방식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샌델의 정의론이 놓여 있는 미국의 역사적 맥락이나 사상적 맥락이 잘려나간 채로 <정의란 무엇인가>가 소비되고 있는 현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대기업에 심각하게 프랜들리한 정부가 샌델의 책을 선전하는, 샌델 자신조차도 경악할 만한 어이없는 상황이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미국에서 출간된 2009년에 같은 하버드대 교수인 아마르티아 센의 <정의라는 아이디어>도 출간되었고 미국에서는 센의 책이 보다 더 주목을 받았지만, 그러나 2010년 우리의 서점가를 점령한 것이 센델의 책이라는 사실은 자못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렇게 샌델 열풍을 타고 우리는 샌델이 해석해낸 공리주의와 샌델이 해석해낸 칸트와 롤스를, 샌델이 규정하는 정의와 공동선을 흡수하고 있다.

맥락이 잘려나간 샌델이 현재 활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방식은 ‘나의 주장은 곧 국민의 뜻’이라는 정치인들의 상투어구를 ‘나의 정의가 곧 보편적 정의’라는 새로운 미사여구로 바꿔놓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웃어넘길 수 있다. 두려운 것은 샌델의 논의가 ‘정의’를 공동체에 대한 ‘충직’이나 ‘애국심’과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 그래도 인권에 대한 감각이나 타자에 대한 관용에조차 익숙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샌델의 개념은 공동체나 애국심을 강조하는 논리로, 국가를 신화화하는 논리로 도용되려 하고 있다. 샌델의 논의가 가질 수 있는 미덕은 잘려나가고 이 몇몇 개념들만이 자의적으로 남용될 때, 그 결과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의 강화, 또는 전체주의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8.때문에, 자신의 정의가 보편적 정의라고 외치며 정의의 이름으로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어떤 복지국가론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는 묻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수를 따르라는 말을 현실을 인정하라는 말로 바꿔치기하는 그 복지국가가, 합의를 실천하지 않고 합의를 종용하는 그 복지국가가, 과연 보편적 복지를 실행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타박하는 복지국가가 민주주의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

만일 그 복지국가가 먹고사니즘을 내세우며 FTA를 밀어붙이고 삼성공화국을 연장시키는 국가라면, 새만금 간척지에 골프장을 세우는 것이 사회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국가라면, 나는 그 복지국가 절대 반대다. 머나먼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돕느라 자기 자식들의 눈물은 훔쳐 주지 않는 어머니가 제대로 된 어머니 맞냐는 샌델의 논의를 착실하게 따라, 해외 파병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복지국가라면 나는 반대다.

자본에 친절한 국가와 벌거벗은 존재[썩은 뿌리 자르기]

박종성(건국대학교 강사)

우리는 자본의 운동을 원활히 진행시키고자 여러 장치들을 고안하는 국가가 벌거벗은 자들로 배제시키고 있는 존재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생존은 자본의 운동에서 야생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실업자의 증대, 사회보장의 축소, 생존권의 와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경쟁의 원리로 방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드러나는 혼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국가는 강권적인 태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는 자본의 운동을 통해 부의 사유화를 지향하며 폭력의 조직화를 실현시키 나가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에서 국가의 폭력성은 감소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금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현재의 국가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라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기존의 국가관에 대한 고찰을 동반한다.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 그 자체는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는 비가시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국가가 비가시적인 존재라고해서 국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 국가라는 고유의 존재성은 “폭력과 관련된 운동”으로 개념화될 수 있다. 국민국가가 추구하는 보편성은 동일성에 근거한 배제와 맞닿아 있다. 주민 전체의 동일성에 의해 국가의 폭력이 규범화되는 국민국가 형태에서는 폭력이 독선과 광신으로 귀결될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주장들은 동일성에 근거한 배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G20회의장 무슬림 접근금지”, “동남아 마약상 같은 연예인” , “주요 20개국(G20) 회의장 반경 2㎞ 이내에 무슬림 애들 접근금지시켜야 한다. 혹시나 모를 테러를 대비해서 접근시 전원 사살해버려라.” , “외국 여자와의 국제결혼을 부추겨서 농촌에는 혼혈아들이 엄청나게 태어나고 있고, 이것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에이즈나 성병 등의 정보가 전혀 없다. 이들은 범법자다. 체류 외국인으로서 기본적인 체류의 법을 어긴 준법정신의 기초가 심히 의심스러운 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해 10월 한달 동안 국가인권위원회가 인터넷 공개 블로그, 이미지, 댓글, 동영상 등을 모니터링한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 중에 모두 210건의 인종차별 사례를 수집했다고 5월 9일 밝혔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인권위는 법무부 장관에게 인터넷상의 인종차별적 표현을 개선하는 방안을 포함할 것을 권고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이사회 의장에게는 인터넷상으로 인종차별을 하거나 이를 조장하는 표현물이 유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을 표명했다고 한다. 또한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2007년 민족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서로 다른 민족 간의 이해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우리 정부에 대해 교육·문화·정보 등의 분야에서 이를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고 한다.

국민국가는 탄생/혈통을 내세워 국가의 구성원을 주장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동일화(identify)하는 인종주의와 관계 맺는다. 그런데 인종주의는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혈통뿐만 아니라 도덕, 신앙, 근면함, 범죄율의 높고 낮음, 문명이나 야만의 정도 등을 포함하는 문화적인 혈통도 포함한다. 인종주의는 민족주의보다 넓은 의미이다. 민족주의는 인종주의를 통해 민족적 동일성을 확립하는데 바로 여기에 배제의 제도화가 존재한다. 국민과 외국인이라는 차이가 확인되는 것은 동일성이 구축되는 방식에 있는 것이다. 동일화의 과정은 차별화의 과정에 선행한다. 다시 말해 국민 공동체 밖에 존재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국민국가에서 평등주의는 국적이나 국민성이라는 특정한 동일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결국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 저항한다. 보편적 인권 개념은 국가로의 귀속없이, 특정한 동일성을 가지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낭시에르가 말하는 ‘아무개와 아무개의 평등’, 즉 ‘근원적 평등 개념’이 현실적으로 요청되어야함을 의미한다.

민족/혈통에서 동일성에 의한 배제의 원리는 비단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는 자본에 친절한 국가의 성격으로 확장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는 이러한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자본의 운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벌거벗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본의 흐름을 보장하는 전제가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6월 12일로 158일째 농성을 진행 중인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투쟁이 바로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동일성에 의한 배제의 논리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국가 안에 살면서 국가에 속하지 않고 배제된 존재들은 공동체의 외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12일 오후 4시 40분경 빈민촌인 포이동266번지(개포동1266번지)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7시간 만에 불은 진화되었고 96가구 중 74가구가 전소했다. 이곳은 1981년 정부가 도시 빈민을 ‘자활근로대’라는 이름으로 강제이주시키면서 형성된 빈민촌이라고 한다. 불법점유자가 된 주민들은 주민등록까지 말살당했고 지난 2009년 강남구청은 주민등록을 인정하고 현 주소지를 인정했다고 한다. 유성기업지회(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영동지회)의 ‘주간연속2교대제 및 월급제 쟁취’를 위하여주간조가 2시간 부분파업을 하였다. 13일 현재 회사는 27일째 ‘공격적 직장폐쇄’를 했다. 파업 후 7일만에 경찰병력이 투입해 전부 연행했고, 노동조합의 지회장과 쟁의부장이 구속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와 자본주의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사회복지와 생존권을 방치하는 국가의 형태는 자본의 축적을 쉽게 하기 위하여 자본 운동의 주도성을 강조한다. 결국 자본주의 실현의 모델은 고용 보호,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는 국가 형태, 즉 작게 보이는 국가는 자본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를 가혹한 폭력으로 제거해 나간다. 따라서 작게 보이는 국가는 가장 억압적인 국가일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국가의 쇠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세계적인 운동 속에서 국가는 복지정책을 포기하는 모델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모델은 우리의 현실과도 그대로 일치하는 현상이다. 국가라는 단일성, 동일성 속에 들어오지 않는 불법체류자들의 삶 또한 동일성의 배제 논리가 적용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국가가 공공부문에서 퇴각하는 것을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탈출로 파악하여 국가의 힘이 약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구보씨 여전히 소통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12]

문성원(부산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구보씨가 이런 말을 처음 들은 건 대학교 때였다. 항상 재기가 넘치던 한 선배로부터였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할까를 짚어보기 마련이다. 모든 걸 둘로 나누어본다는 건, 얼핏 생각하기에도 단순하고 마땅찮은 특성이다. 양분법이나 흑백논리처럼 좋지 못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나는 둘로 나누어 보는 쪽이 아니란 말이야’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즉시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나는 둘로 나누는 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람을 양분하여 보는 사고방식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사실 이건 배중률(排中律)이라는 논리적 법칙을 활용한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A이거나 A가 아닌 것이지 이도저도 아닌 그 중간은 없다는 게 배중률이다. 이 A의 자리에는 어떤 것이 들어가도 괜찮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쥐를 닮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해 보자. 이것 역시 참인 진술이 되지 않는가.

물론, 쥐를 닮은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 있는 한에서 그렇다. 또 모든 사람이 쥐를 닮은 사람은 아닌 한에서 그렇다. 사람은 모든 걸 세 가지로 나누어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 가지로 나누어 보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있고 또 모든 사람이 다 사물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면, 그 진술은 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는 말에는 그런 단서가 없어도 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이미 사람을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으로서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의 예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짓말쟁이 역설의 반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런 말은 자기 배반적이 된다. 말한 사람도 사람이고 그래서 거짓말쟁이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의 예가 됨으로써 적어도 반쯤은 자기 말을 확증하는 셈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사물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이 말은 거짓이 된다. 그런 경우엔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한 종류의 사람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럴 리야 있겠는가?

사실, 이 말은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자신은 양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나머지 한 종류의 사례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런 다음, 자신이 양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양분법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서 듣는 사람에게 머쓱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게 이 말의 전략이고 재미다. 배중률을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이 말이 숨겨 놓은 함정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실제로 우리는 둘로 나누어 보는 사고에 익숙하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내가 아닌 것도 내게 좋은 것과 내게 나쁜 것, 내게 유리할 것과 내게 불리한 것으로 나눠진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흐리멍덩한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도 집중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그렇지,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르면 도리 없이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운데 한쪽에 속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사는 내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 두 가지로 나눠지기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 보는 사고방식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해 바로 나쁜 것이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함정에 걸려든다. 그런 대답 자체가 이미 모든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보는 ‘나쁜’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은 경우도 있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모든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양분하여 보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적응의 산물이다. 자연적 삶 속에서는 어떤 것이 나에게 위험한 것인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재빨리 판단하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새로 나타난 놈이 먹이인지 천적인지 친구인지 적인지를 분간하지 못해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당해서 거꾸러지기 십상이다.

세상에 어디 나쁘기만 한 것이 있겠는가. 또 어디 좋기만 한 것이 있겠는가.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으면 좋은 면도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유 있는 상황에서나 부릴 수 있는 사치다. 야생의 삶에서는 빠른 판단과 빠른 대처가 생존을 좌우한다. 인류는 그 진화적 됨됨이가 형성되는 긴 시간을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야생이 아닌 문명 세계다. 여기서는 원초적인 이분법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랜 기간에 걸쳐 마련된 우리의 성향은 쉽게 지워지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번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은 보통 미워하거나 피하게 된다. 아,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고, 실은 저 사람에게도 괜찮은 면이 많아.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한번 구겨진 감정과 마음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마음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 사람과 닮거나 유사한 특징을 지닌 사람들에게까지 연장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건, 어떤 면에선 유용한 반응 양태다. 솥뚜껑을 자라로 오인한 건 우스운 꼴일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그게 솥뚜껑이 아니라 자라였다면 어찌 하겠는가. 일단 경계하고 주의해서 열 번 오인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못해 한 번 물리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단, 이건 솥뚜껑처럼 숨어 있는 자라가 그렇게 드물지 않은 환경에서의 얘기다.

자라를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둥그런 물건만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면, 그건 곤란한 일이다. 이런 증상이 심할 경우엔 교정이나 치료가 필요하다. 심각한 충격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은 그런 일이 마음에 남긴 상흔을, 이른바 트라우마를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아픈 기억과 관련된 즉각적인 반응이 이유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놓인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직접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나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쓴다. 감정적으로는 아직 개운치 않은 상대에게도 짐짓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고 심정의 쏠림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평가하려고 자세를 다잡는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거의 본능적인 양분법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분법이 지배하는 현상을 쉽게 목도하곤 한다. 인터넷만 열어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사안에는 대개 호오(好惡)의 입장이 선명한 댓글들이 달린다. 소위 악플들에는 노골적인 혐오나 증오의 감정들이 드러나고, 내편과 상대편이 전쟁터에서처럼 갈린다.

이것은 진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잔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찍이 초기 포유류에서 물려받은 변연계(邊緣系)의 감정 회로를 신피질(新皮質)의 이성적 계산이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용선, TV토론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구보씨는 어제 TV에서 본 토론을 생각해 본다. 으레 그렇듯 그 토론에도 말 잘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고 대부분이 대학 교수다. 대뇌 전두엽의 잘 발달된 신피질을 훌륭히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의견이 선명하게 갈린다. 그래서 세상에는 다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상하게 양분법을 사용하는 사람과 투박하게 양분법을 사용하는 사람. 도대체 왜일까?

“구보야,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물어볼 만한 걸 물어보는 사람과 물어볼 만하지 않은 걸 물어보는 사람. 너 같은 철학자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안 물어봐도 잘 알겠지?”

드디어 Y가 이죽거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 손톱으로 할퀴는 여자와 말로 할퀴는 여자. 아니, 한 종류가 더 있다. 손톱으로도 할퀴고 말로도 할퀴는 여자. Y는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알고 있을까?

“하지만 Y야, 그런 걸 궁금해 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야. 또 철학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난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데, 마치 쓸데없는 걸 물어본다는 식으로 그렇게 무시하려 들면 곤란하다구.”

“엥, 진지하게 묻는 거라구? 설마… 나도 교수나 언론인 같은 지식인들을 많이 만나 봐서 알지만, 그네들이라고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건 전혀 아니거든.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맑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길 듣고 있다 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구보 너처럼 스스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 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하지만 봐.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쉽게 말을 바꾸고 논리를 뒤집어 가며 자신의 이익을 쫓아갔는지를.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쫓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쫓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어, Y야, 너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무슨 일 있었으면 좋겠어?”

“네 말 하는 폼새가 좀 이상하잖아. 지식인 나부랭이라니…”

“그럼, 아니야?”

“Y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대화하자는 게 아니라 싸우자는 거라구. 감정이 실려 있는 말이잖아. 그래가지구는 소통이 안 돼. 기껏해야 자기만족적인 화풀이인 거지. 거기서 어떤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겠어?”

“에그, 또 소통이야? 구보야, 너야말로 참 이상하다. 소통을 내세우는 게 무슨 만병통친 줄 아니? 고상하게 웃는 낯으로 얘기해도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침묵하거나 화내는 게 소통의 효과적인 방편일 때도 있어.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정해진 틀에 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5)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5)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3. 고대 그리스인의 동성애 ? 소년사랑(1)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보통 동성애를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동성애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동성애와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동성애는 성인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의 사랑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는 주로 어른 남자와 소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형태의 동성애는 개념적으로 당시에 불려 졌던 그대로 소년사랑(paiderastia)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러한 양태의 동성애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추행에 해당하는 아주 혐오스러운 것으로 비쳐지겠지만 고대 그리스 사회 특히 귀족들의 생활 속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일상적인 현상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소년사랑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도시국가들 전체에서 그리고 전 시대에 걸쳐 하나같이 존재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소년사랑은 그리스의 초기 정착사가 보여주듯이 가장 강력했던 전시 동원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스파르타에서 늘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남성 중심의 집단생활 속에서 남성들 간의 명예를 얻기 위한 경쟁적 욕구, 공동생활을 통해 드러나는 남성들 간의 교감 등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였을 것이고 그 후 점차 아테네 등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은 성인 귀족들의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정과 맞물리면서 특이하게도 발생 당시부터 일단 겉으로는 전시를 대비한 교육적 동성애의 면모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 또한 기본적으로 쌍방 간에 욕정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었다. 나이든 성인 남자가 주도권을 쥐고 교육을 수반한 덕과 사랑을 베풀고 그에 따른 성적 쾌락을 얻으며, 젊은 소년은 나이든 쪽의 경험과 덕을 배우고 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에 따른 ‘호의에 찬 친분’(philia)과 후원을 얻는 것이 통상적인 소년사랑의 양태였다. 그래서 그들을 부를 때 나이든 쪽은 “사랑하는 자, 에라스테스(erast?s)”라고 부르고 소년은 “사랑받는 자, 에로메노스(er?menos) 또는 파이디카(paidika)”라고 불렀다.

서로 입을 맞추고 있는 에라스테스와 에로메노스. (도기그림,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렇게 그들의 관계는 뚜렷한 구별이 있었다. 요컨대 사랑을 하는 건 나이든 성인 남성 쪽이다. 이처럼 “능동적인 성역할과 수동적인 성역할” 간의 구별은 성에 관한 고대 그리스적 사고의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한시적인 것이었으며 이런 한시적인 관계가 끝난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이성애로 진전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가 갖는 이러한 고유한 특징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를 하면서 이성애를 병행하는 것 또한 이상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동성애는 용맹한 전사로서의 항시적인 젊음을 꿈꾸는 에라스테스의 열망과 성인 어른의 경험과 덕망을 배워 훌륭한 전사로서 성장하기를 원하는 어린 에로메노스의 욕구가 결합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메노스의 젊음이 종결되는 시기 즉 수염이 나는 시기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관계는 종결되고, 성인 남자는 이성애로 진행하고 소년은 성장하면서 점차 또 다른 에라스테스가 된다. 소년에 대해 사랑하는 쪽은 30-40세 의 성인어른으로서 여성과 결혼한 기혼자 일 수도 있고 나중에 결혼할 수도 있다. 소년이 수염이 난 후에도 동성애를 지속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에 나오는 파우사니아스와 아가톤 처럼 평생을 두고 동성애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오히려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현대와는 달리 고전기 그리스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혼과 그에 따른 결혼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전시동원체제인 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성들과 엄격하게 분리된 생활을 해왔고 혼기에 이르면 순전히 부모들이 정해준 14세 정도의 어린 여성과 결혼을 했으며, 결혼 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리는 엄격하게 유지되고 활동 공간 또한 나뉘어져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결혼한 부부로서의 행복한 생활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결혼한 여성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출산과 가사,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기본적인 임무였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연유로 고전기 고대 그리스에서 ‘낭만적 사랑’은 자유인 신분의 성인 남자들과 정부(情婦 hetaira)들 간에, 또는 그들의 남자 상대자들 간에(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른바 사랑에 대한 감정은 자유인 신분의 남자들 사이의 동성애, 즉 성인 어른과 소년 사이의 동성애 관계에서 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도 일반인 모두에게 허용된 것은 아니었고 명예로운 전사로서 성장해가길 욕망하는 일부 귀족 계층에 국한된 것으로서 이른바 그들만의 성(性)의 고급 영역이었다. 남성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전사로서 성장해야한다는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환경적 조건에 따라 남성들 간의 성애가 더욱 조장되는 측면이 있었다. 특히 알몸으로 이루어지는 김나지움에서의 레슬링은 빛나는 젊음들끼리 육체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서로 접촉하는 대표적인 귀족 남성들의 특권적 경기이자 훈련과정이었다. 게다가「향연」에서 보여지듯 남성들만의 심포지온 자리에서 술을 나누며 교유하고 토론하는 것 또한 그러한 훌륭한 전사이자 책임 있는 귀족으로서 커가길 욕구하는 그들만의 상호 교육과정이자 동시에 그들만의 특권적 오락이었다. 요컨대 고전기 아테네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경기, 전투, 정치, 철학, 수사술과 같은 높은 신분의 활동들은 자유인 신분의 남성들의 특권이자 의무로서 오로지 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물론 여성 특유의 활동들이 지니는 가치가 때때로 인정되기는 했지만, ‘덕(aret?)’과 ‘행복(eudaimonia)’에 대한 고대 그리스적인 개념은 남성들의 이러한 고급 활동들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그런 활동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 간의 성적 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나아가 휼륭한 전사가 되기 위한 기본과정으로 합리화되는 기본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향연」에서 일부 연설가들은 소년사랑과 ‘덕’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적인 취향이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 대중일반에게도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나타나듯이 소년사랑의 문란상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었고 그에 대한 비판과 법적인 통제 장치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향연」에서 파우사니아스가 말하는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의 구분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기원전 4세기 마침내 고대 그리스 사회가 종말을 고하게 되면서 이러한 소년사랑의 관습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지만,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에 대한 관심이나 그것을 다루는 글들은 장르에 관계없이 그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내용 또한 도덕적인 분노를 표명한 것으로부터 혹은 비정상인 호기심이나 그 탐미적인 아름다움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는 것까지 천차만별한 양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에 대해 어떤 관심과 시선을 갖든 간에 아래의 두 가지 사실만은 누구나 다 하나같이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소년사랑은 그리스인의 생활, 특히 귀족들의 생활에서 상당한 정도까지 퍼져 있었던 일상적 현상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소년사랑 역시 아주 추악할 정도로 타락한 형태로부터,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소년사랑의 모습을 포함하여 대단히 고상하고 순수한 정신적 관계를 갖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소년사랑에 대한 그와 같은 다양한 양태들 중 일부를 관련 고전들을 통해 간략히 일별해보기로 하자.

우선, 비록 극의 내용이긴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새(Ornithes)」의 한 장면은 아테네 사람들이 소년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상적 의식의 한 단면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에우엘피데스(Euelpides)는 사람들이 안락하게 살고 있고, 소년사랑 또한 매우 번성해 있는 게으름뱅이들의 천국을 몽상하고 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소년을 아들로 둔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이 한 성인 귀족에 의해 사랑의 상대로 선택되지 않은 것에 모욕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비난을 퍼붓는 장면이 나온다.(139-142).

그래? 스틸보니데스, 너 참 잘 났다.
내 아들이 목욕을 하고 나서 김나지온을 나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인사도, 입맞춤도, 어디 데려갈 생각도 하지 않고,
한번 안아주지도 않는군. 당신 참 고루한 친구시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플라톤의 「법률」제1권(636C)을 보면 관능적인 소년사랑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플라톤의 비난 섞인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연로한 플라톤은 등장인물 ‘아테네인’의 입을 통해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 사이의 사랑 일체를 ‘자연에 어긋난’(para physin)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미소년 가뉘메데스(Ganym?d?s : 트로이아 트로스왕의 미남 아들인 가뉘메데스는 그 미모 때문에 올륌포스로 납치되어 제우스에게 술을 따르는 작부(酌夫: oinokheus)가 되었다. 호메로스 「일리아스」20. 231-5 참고)를 인용하면서 크레타인들이 동성 간의 성적 쾌락을 공공연하게 비호하기 위해 마치 제우스가 소년 사랑이나 한 것처럼 그를 끌어 들이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하긴 테오그니스(Theognis)가 편찬한 책에 포함되어 있는 짧은 비가(elegeia) (1345-50)를 보면 그것을 쓴 작가 자신 스스로 소년사랑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크레타인들 처럼 자신의 경우를 아름다운 가뉘메데스를 납치한 제우스를 들어 미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전설적인 입법자 뤼크루고스(Lykurgos)가 정한 스파르타 법률에 대한 보고들은 소년사랑과 관련한 아주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스파르타의 법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소년을 육성할 책임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고대의 저작가들은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제도적 성격 때문에 소년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관능적 측면을 어떻게든 배제시키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어 크세노폰(Xenophon)은 사랑하는 사람과 소년 사이에서 관능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과 혹은 형제들끼리 서로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고 단언하고 있다(「라케다이몬의 정치체제(de rep. Laced.)」2· 13).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는 소년사랑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소년사랑에 대한 규정을 어기고 잘못을 범한 자는 일생 동안 공적인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뤼크루고스의 생애」17 이하, 「라케다이몬의 정치체제」7). 후대의 소피스트로서 플라톤주의자인 튀로스(Tyros)의 막시모스(Maximos : 기원후 2세기)는 이것을 한층 더 이상화하여 스파르타의 남성은 단지 미소년을 아름다운 조각을 사랑하듯이 사랑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스파르타의 법률이나 그에 대한 견해들이 소년사랑에 대한 실제 행태들과 크게 달랐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소년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규정에 따라 도덕적인 절제를 보여주고 있는 사례들 또한 발견된다. 스파르타왕 아게실라오스(Agesilaos)는 스피트리다테스(Spithridates)의 아름다운 젊은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 소년이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에게 키스 하려고 했을 때 소년을 밀쳐 냈고, 어떻게든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소년과 단둘이 있는 경우를 극력 피했다.(크세노폰 「아게실라오스」5·4) 그런가 하면 자기가 에라스테스로 받아들이지 않은 자가 설사 권력자일지라도 그에 대한 신체적 봉사를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한 어느 미소년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의 생애」24) 용병 대장 데메트리오스(Demetrios)는 아테네에 머물면서 마치 폭군이나 된 것처럼 창녀나 소년들을 강제로 불러들여 무질서한 성적 쾌락에 빠져 있었다. 그는 데모클레스(Demokles)라는 미소년에게도 욕망을 느껴 사랑을 구했지만 데모클레스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몸의 안전을 위해서 몰래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방탕한 데메트리오스는 데모클레스가 어느 사설 목욕탕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곳으로 가서 그를 겁탈하려고 하자, 데모클레스는 달리 도망갈 길이 없다고 여기고 뜨거운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의 뚜껑을 열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밖에 소년들이 김나지움 즉 레슬링 경기장에서 알몸으로 경기를 하게 하는 관습 자체가 소년사랑을 확대시킨 큰 원인 중 하나로 생각하는 글도 플라톤의 「법률(Nomoi)」(1· 636)을 비롯해서 키케로의 「투스쿨룸 대화(Tusc.)」(4·33)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키케로는 앞의 책에서 엔니우스(Ennius)가 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노출 하는 것은 추행의 시작이다”라고 하는 시행을 찬사를 담아 인용하고 있다. 물론 레슬링 훈련이 미소년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어른 남성들의 관음증을 충족시키려고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소년사랑을 비난하고 있는 플라톤은 수호자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하물며 여성들도 옷을 벗고 남성들과 체육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5권 452a, b). 분명 소년사랑의 발생 배경에는 그것과는 다른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소년사랑의 맹아는 일찍이 남성 중심의 전시 동원 체제를 항시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그리스 민족 대이동의 시대에서 부터 구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사회는 여느 고대 사회 못지않게 역사 이래 극히 남성 중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여성도 남성과 성향에 있어 동류의 존재이고 남성과 마찬가지로 능히 수호자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국가」5권 456a, b) 당시로서는 매우 놀랍고 대담한 생각이었지만,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 시대에서도 여전히 여성의 역할은 오로지 가사와 아이들의 양육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고대 그리스의 성인 남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초래한 욕구 불만 때문에 헤타이라나 소년들에게서 성적 욕망을 해소하려고 했던 것일까?

(다음에 소년사랑 (2) 계속)

자거라투스투라 소설가 김숨을 만나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사업단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자거라투스투라야, 왜 눈이 벌겋지? 요새 불면증이라도 생긴 거냐?

아니에요. 니체 아부지, 소설책 읽느라고요.

그 나이에, 아직도 소설을 읽느냐? 한심하다고 생각되지 않니? 니 친구들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데…넌 권력의지란 없느냐?

니체 아부지, 아부지가 말한 ‘권력의지’라는 것 때문에 철학자들이 죽을 지경이에요. 아부지를 위해 변명하느라고 말이에요. 저는 그걸 인간의 내면 속에서 솟구치는 자유로운 생명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서,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주려 하지만, 솔직히 저 스스로 그 개념이 좀 수상하긴 해요.

뭐가 수상하다는 말이냐?

그럼, 니체 아부지,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나오는 음모적인 무정부주의자도 그런 생명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거라투스투라야, 니는 아직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네가 그 속에 들어가 앉은 것은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너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작은 욕망 때문이지. 나는 그런 사람을 ‘종말인’이라고 부른다.

니체 아부지, 자유로운 생명력이 보편적인 선을 지향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신학자 샤르댕은 그런 해석을 하고 있지만, 역시 신을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을 거 같아요.

보편적인 선이라는 굴레조차 내 던져 보렴. 그때는 이 세상이 또 다르게 보일 것이야. 왜 불교의 선사들은 백척간두에서 자기 몸을 던진다 하지 않니. 너도 그렇게 너를 버려 보렴.

니체 아부지, 솔직히 전 그게 두려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 자신이 아니라 겨우 교수직을 던지는 정도이죠. 그런데 아부지, 요새 아주 엄청난 소설가를 제가 발견했어요? 니체 아부지, 소설가 김숨이라고 알아요?

자거라투스투라야, 숨 막힌다. 이름이 왜 이렇게 숨 막히냐? 물론 예명이겠지만 너무 팍팍하게 지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알은 거지?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어요. 잘 아는 시인을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 있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돼지고기를 굽기만 하고 전혀 먹지는 않더라고요. 그 침묵이 심상치 않아서 제가 지은 책하나 드리고, 그가 지은 소설책 한권을 받았죠. 장사치고는 제가 훨씬 이득이죠. 안 팔리는 책과 잘 팔리는 책을 교환했으니까요. 그 소설책 이름이 또 숨 막혀요. 『간과 쓸개?라니까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그런 거 말이냐? 그럼 풍자소설이겠네?

그렇지는 않아요. 대개 200년도 후반 미국발 금융위기 전후에 쓴 단편소설들을 끌어 모은 책이에요. 그 중 첫 번째 소설의 제목이 ?간과 쓸개?이고, 그 제목을 따서 책 이름으로 했어요.

소설책 한권 읽는다고 그렇게 눈이 충혈되었냐? 소설이야 그저 전철에서 읽으면 충분한 거 아니냐.

니체 아부지, 소설가 들으면 도끼 들고 나오겠어요. 김숨의 소설이 하도 재미있어서 그의 소설을 대부분 구했어요. 많이도 썼는데 지금까지 제가 구해 읽은 것은 『간과 쓸개』 말고도 『투견』, 『백치』, 『침대』가 있어요.

그래 자거라투스투라, 니가 보기에 어떻드냐?

놀라운 소설가예요. 뭐랄까 힘이 넘쳐요. 위에 말한 책 가운데 가장 빨리 나온 게 『투견』인데 (2005년 정도) 그의 소설은 거의 대부분 현실에 짓밟힌 채 무기력하게 그리고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어 든든한 리얼리즘의 바탕 위에 서있죠. 그런데 강열한 이미지들, 철학적인 사색들로 해서 투박한 힘이 느껴지죠. 여성 작가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예요. 그게 꼭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니까요.

아, 김숨이 여성 작가이냐? 나는 이름 때문에 정말 김기덕처럼 생긴 남자가 아닐까 했는데…

그런데 니체 아부지, 소설가 김숨에게 200년도 후반에 아마 2007-8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무언가 변화가 있어요. 그저 한번 쓱 훑어보았기에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예를 들어 혹 종교적인 개종과 같은 사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럼 김숨이 기독교인이란 말이냐?

그건 몰라요. 저는 한 번도 김숨과 예기한 적은 없다니까요? 아까 말했잖아요. 그저 말없이 돼지고기만 굽고 있었다니까요.

그럼 종교적 개종이란 무슨 말이냐?

아니 그와 유사한 사태라는 거죠. 니체 아부지, 말 귀를 그렇게 못 알아들어요?

알겠다.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하라는 얘기지. 니는 나의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자식이 애비한테 대드는 것을 나는 못 본다.

글쎄 소설가 김숨이 다루는 대상은 항상 그래요. 예를 들어 『백치들』에서는 IMF 사태로 직장을 잃은 백수들을 다루고 있죠. 어떤 사람들인지는 충분히 짐작되죠. 그런데 김숨은 이들을 묘사하면서 마치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마르케스가 시도했던 것처럼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과 비슷한 것을 구사해요. 그래서 마술적인 분위기가 백수들의 어두운 삶을 에워싸고 있죠. 그들의 패배와 그들의 무기력 속에 그들이 가진 간절한 소망이 그렇게 표현되어요.

음. 마르케스는 남미의 원시림의 느낌이 들지 않나? 김숨도 그런가?

그런 원시림의 느낌은 아니에요. 오히려 썩고 끈적끈적한 물웅덩이 느낌이 들죠. 그러나 그 속에서도 생명은 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간과 쓸개』에 와서 소설가 김숨에게 또 다른 변신이 일어났어요. 물론 여전히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짓밟힌 하층민의 삶이죠. 하지만 이 책에서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넘어서 거의 카프카적인 느낌이 들어요.

카프카라니?

그 중의 한편을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릴 께요. 그러면 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거예요. ?모월 모일?이나 ?룸 미러?가 있는데, 그 중에 ?룸 미러?가 좋겠네요.

‘두 부부가 토요일 오후 차를 타고 구리에서 강변도로를 거쳐 파주로 가죠. 아내가 이 소설의 화자인데, 그들은 남편의 이모부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죠. 남편의 이모가 20년 전에 죽은 이후, 남편은 이모부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해요. 당연히 왜 죽었는지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죠.’

‘차의 뒷자리에는 아이들(두 남자아이)이 타고 있는데 그들은 차를 타자말자 자고 있어요. 남편은 끊임없이 룸 미러를 힐끗힐끗 보면서 아이들이 깨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죠. 그건 화자인 아내도 마찬가지이에요.’

두 남자아이가 깨어나면 어떤 소동을 벌일지 짐작이 되죠. 그래서 차라리 그 아이들이 잠들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거예요. 그들의 삶은 그저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정도이죠. 니체 아부지, 짐작이 되요?

글쎄다. 그건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이나 알겠지 19세기 독일에 살았던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남편은 전에 아이들이 키우던 도마뱀을 죽이려 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박제가 된 새를 선물로 합니다.’

이게 바로 아이들을 재우는 방식이죠. 아마 도마뱀이 아이들에 내재하는 생명력이라면, 박제가 된 새는 이를 감시하는 초자아를 의미하겠죠. 어떻든 그 결과 이 중산층 부부는 평온하면서 질서 있는 삶을 살죠. 물론 거세된 삶이겠죠.

자거라투스투라야, 니가 해설까지 덧붙이지 말고, 그저 소개만 하렴. 그래야 나도 나름대로 감상하지 않겠느냐?

알겠어요. 해설은 자제하죠. 하지만 해설하지 않고 설명하는 법을 제가 몰라요. 아니면 직접 읽어보시죠.

알았다. 하여튼 계속해 보렴.

한강을 끼고 달리면서 그들은 아주 진부한 사건들을 만나죠. 관광버스를 만나는데, 그 버스 회사의 이름이 ’우주 관광‘이에요. 처음에는 빈차였는데 이상하게도 나중에는 사람이 가득 타고 있어요. 그 가운데 잠든 노인이 있는데 화자가 들여다보니 혀가 없어요. 또 살찐 돼지를 싣고 아마도 도축장으로 가는 트럭도 만나죠. 화자는 돼지들에게서 역겨운 냄새를 맡고 구역질을 느끼죠.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 같아요. 거세된 삶, 그것은 곧 죽음 속에 들어있는 삶이죠. 바로 이런 세계는 니체 아부지가 유럽의 종말로 묘사한 그런 삶의 모습이죠.

그런데 차가 자유로로 들어가면서 점차 지체되기 시작해요. 비구름이 몰려와서 날은 저녁처럼 어두워지죠. 주인공이 잠깐 잠들었는데 그 사이(꿈이지 아니면 생시인지 불분명해요) 강변을 질서 있게 나르던 새들이 위협적으로 나르더니 갑자기 살찐 돼지들을 공격해요. 그리고 뒤차에서 상향등을 켜서 비현실적인 빛이 그들의 차안에 비추어 들죠. 그래서 땅에서 기던 차가 갑자기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 들어요. 여기서부터 현실이 환상적인 세계로 바뀌는데 그런 변화가 꼭 카프카적인 세계 같아요. 하여튼 이런 일들은 무언가 다가오는 어떤 것을 암시하는 알레고리죠.

그래서 제가 소설가 김숨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짐작하는 거죠. 실제로 ?룸 미러?의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겨요. 갑자기 차들이 정지해 버리고 사람들은 내려서 걸어가죠. 화자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어 내려서 사람들을 따라 걸어요. 사람들 중 어떤 여인은 딸을 안고 가는데 그녀의 긴 머리칼이 딸의 숨을 막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그냥 미친 듯이 걸어요. 주인공이 마침내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죠.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데?

아니 소설은 거기서 끝나요.

“그리고 마침내 내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을 보았다. 지금쯤 내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며…”

이게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에요.

그럼, 자거라투스트라 너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글쎄요. 모르죠.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 사건은 잠든 아이들을 깨어나게 할 만한 사건이라는 거죠.

그게 뭐냐?

글쎄요. IMF 사태 같은 거? 아니면 노무현의 죽음? 하여튼 아이들이 깨어난다는 것은 적어도 니체 아부지가 말한 생명력이 솟구친다는 뜻이겠죠. 죽음과 같은 현실을 깨뜨리는 그런 힘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긍정적으로 해석해요. 하지만 부정적일 수도 있죠. 그것은 소란과 폭동을 동반하는 것일 테니까요.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사랑, 배신 그리고 자살

송지선 아나운서의 투신자살이 5월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언론이 문제네, 악성댓글이 문제네, 우울증이 문제네, 야구선수 임태훈이 문제네 등등 말들이 많았다.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였을까? 자살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기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송지선에게 임태훈은 함께 한 사랑에 책임질 줄 모르는 혹은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송지선은 그가 그녀를 배신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의 예의 없는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

작고한 탤런트 최진실 역시 애정 관계에서 비롯된 배신감 때문에 자살을 했다. 결혼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조성민은 자신의 사랑이 식었음을 전했고 그의 사랑을 철석같이 믿었던 최진실은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랑의 실패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지 않다. 경제적 파탄의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만큼이나 사랑의 실패로 인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살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애정의 문제로 슬픔에 잠기고 오랜 시간을 절망과 한탄 속에 ‘죽은 듯’ 혹은 ‘죽지 못해’ 살아간다. 평생 동안 바람피운 아버지를 원망하고 울분을 토했던 우리 엄마에서부터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자리에 누워버린 내 친구까지.

이러한 사건을 두고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누가 잘못을 했는가. 원인이 무엇인가, 뭐 이런 것이 아니다. 사건의 진실이나 원인은 경찰이나 기자들이 더 잘 파헤쳐 줄 수 있고, 누가 얼마만큼 잘못을 했는가는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점에서 답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왜 이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강행하게 되었는가이다. 사랑의 실패는 왜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드는가? 왜 그러한 사건은 삶의 의미와 생동감을 일거에 빼앗아 가는가?

나의 경험과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대화를 반추해 볼 때 배신은 언제나 심리적 자존감의 파괴와 관련되어 있었다. 평생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를 향해 우리 엄마가 항상 했던 말은 “나를 어떻게 보고!”였고, 자신의 애인이 동거하는 여자 친구에 대해 숨겨왔음을 나중에 알게 된 한 학생은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 괴로워했으며, 천청벽력과 같이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은 내 친구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고 호소했다. 그렇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 존재 전체, 나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다.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가 거절되는 느낌이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렇다면 왜 사랑은 이렇게 존재 전체와 관련된 사건이 되는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당사자의 존재를 뒤흔들고 삶의 의미마저 잃게 만드는가? 최근에 내가 본 한 권의 심리 에세이는 헤어짐이나 배신을 내 존재 자체가 거부되는 사건으로 보지 말 것을 권고한다. 자존심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니 그럴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사랑이 무엇인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사랑을 “인정(recognition)”관계로 설명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뿐 아니라 연인, 친구 간의 사랑은 모두 내가 너를 그리고 네가 나를 구체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로 배려하고 정서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행위라는 것이다. 호네트는 사랑이라는 인정관계를 두 사람의 절대적 합일상태로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 속에서 두 사람은 독립된 개체로 분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절대적 공생기를 지나 상대적 공생기에 아이는 엄마를 환상 속에서 파괴한다. 그러나 아이의 파괴행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곁에 남아 아이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계속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환상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이러한 독립된 어머니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서적 합일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네트는 제시카 벤자민을 인용해 사랑을 “자기주장과 타자 인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정행위로서의 사랑이 실패할 때 왜 우리는 존재 전체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패와 더불어 우리는 사랑을 통해 획득한 자신감(Selbstvertraun)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사랑을 통해 나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욕구가 배려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자신이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우리는 구체적 타자에 의한 정서적 인정의 경험을 통하여 나의 구체적인 존재가 가치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정서적 인정, 즉 사랑이 철회될 때 우리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훼손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사랑의 실패는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실패는 내 자존심과 자신감을 뒤흔든다.

이러한 존재의 상실감이 더욱 절망적인 것은 사랑이 바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심리학 에세이는 또한 이번에 사랑이 가면 아주 사랑이 안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하고 권고한다. 사랑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은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의 실패를 통해 잃게 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형성한 특별한 자신감과 자손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또 다른 사랑은 올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바로 그 사람과의 사랑, 그 사람의 정서적 인정, 그 사람을 통해 형성된 나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대체될 수 없다. 사랑이 끝나면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을 지우고 추억이 될 만한 물건들을 버리는 이유는 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형성했던 그 특별한 나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그런 나의 존재는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대체될 수 없기 때문에.

이렇듯 사랑의 실패가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것은 사랑이 나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구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패가 지독하게 절망적인 것은 그것이 대체될 수 없는 사람과 만들어낸 구체적이고 특별한 나의 존재의 의미를 한 순간에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토록 의미를 부여했던 나 자신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생각, 자존심이 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든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무거움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가볍게 수행된다. 예전과 달리 사람들은 쉽게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실패는 참을 수 없이 무겁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이 극단적일수록 사람들은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뒤흔든다. 이런 의미에서 호네트 역시 정서적 인정이 되지 못하는 상태가 윤리적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호네트는 아쉽게도 사랑이라는 인정형식이 구체적인 개인들 간의 특수한 관계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로 확장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적인 관계는 보편적 학문의 담론이 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호네트의 생각일 뿐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사랑이 학적 가치를 갖지 않는 에세이나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학문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사랑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생각, 나아가 감정에는 어떤 윤리적 잣대도 들이댈 수 없다는 생각이 어떤 끔직한 풍경을 만들어 냈는가? 우리는 방금 전까지도 사랑했던 사람을 내팽개치고 거리와 공론의 장으로 나와 사회를 비판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다. 그가 혹은 그녀가 죽어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건 당사자가 겪어 내야할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래서 사회비판과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