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논의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의 차이점/신승철 [1월 월례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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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욕망 논의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의 차이점
발표자: 신승철 (동국대)

 

생각의 빈칸

후기: 윤지영( 명지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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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해에서 신년으로 넘어가는 시간적 단절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비약과 도약의 에너지를 퍼 올리게 한다. 13개월이라는 연속성이 아니라 새로운 해의 1월 앞에서 우리는 생각의 빈칸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빈칸 앞에서 라캉의 구조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대결 구도는 그 논쟁점의 풍요로움만으로도 매혹적이었다.

신년 모임과 함께 진행된 1월 월례 발표회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인원의 참석 하에서 토론과 논의의 장이 펼쳐졌다. 2013년이란 새로운 해에 어떻게 현실 좌표축을 재구성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 개념의 이론 틀 안에서 모색될 수 있었다.

신승철 선생님의 이 논문은 라캉의 욕망 개념의 보수성을 날카로이 비판하고 있다. 라캉의 욕망 개념이 여전히 거세의 법에 종속되어 있음으로써 엄마-아빠-아이라는 삼자적 가족 관계의 이데올로기성에서 벗어나 있지 못함을 드러낸다. 정상화의 메커니즘으로서 무엇을 병리화하는가에 주목하고 있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는 여전히 욕망의 생산성과 생성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은 물론 이를 억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승철 선생님은 라캉의 욕망은 예속 집단을 양산하지만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는 주체 집단을 생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속성과 자발성의 포지션이 명확하게 이분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권력과 저항은 분리된 두 포지션으로 고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작용과 유동성으로 접점과 모순항을 양가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지대이기 때문이다.

ⓒ박영미

프랑스 철학계에서 제대로 된 사상적 엄밀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가타리의 개념들을 재평가할 수 있는 논문이라 할 수 있다. 기호-흐름이라는 개념을 통해 라캉의 의미론-팔루스라는 전제적 기표를 축으로 한 협착적 기호화 과정을 비판할 수 있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본인역시 라캉이 규정하고 있는 남근 이성 중심적 언어 질서에서 어떻게 벗어나 새로운 언어 형식을 모색하는가란 문제의식을 심화 발전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안에서 가타리의 비기표적 기호론은 퍼스의 우연성의 경제학과 알튀세르의 만남의 위상학과 더불어 새로운 언어 형식-의미의 열린 양태와 부유, 표류라는-을 구상하는 데에 커다란 영감을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논평을 통해 본인은 가타리의 개념들이 포스트 휴먼적 사상 지류와도 이어질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타리가 생태계라는 표현을 통해 더 이상 인간 질서로서의 상징계에 포박당하지 않는 탈 인간주의적- 인간이란 거대 서사의 폭력성과 한계를 드러내는 트랜스 휴먼적, 포스트 휴먼적 사유와 실천 양식 등을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미

신선생님의 발표와 본인의 논평은 미리 주어진 각본대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피드백과 질문의 질문들에 의해 비예측적으로 논의가 확장되기도 심화되기도 한 점이 흥미로웠다. 라캉이 제시한 쥬이상스 (jouissance)가 여전히 협착적 쾌락인가 아니면 팔루스란 고정점, 누빔점을 파기해 버리는 분리적, 저항적, 혁명적 지점인가에 대한 논의는 합의점에 도달하지 않은 채 갈등과 긴장성이란 생동적 힘을 품고, 열린 논의의 장으로 미끄러져 갈 수 있었다. 이러한 팽팽하면서도 상호 교류적인 토론의 장을 통해 혁명적 상상력과 지적 호기심, 나아가 앞으로 후속 연구를 통해 항해할 사유의 모험과 궤적들이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철학이 끊임없는 생성과 창조의 과정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빈칸들을 남겨둬야 하는 비움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의 빈칸에서 예측치 못한 영감이 솟구치고 앎의 견고한 단선체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균열과 파열의 힘을 가타리는 접속과 배치라는 용어를 통해 드러내며 나아가 욕망이란 복합적 다면체들의 스펙트럼을 펼쳐내길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