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 지음, 『유기체지향 존재론』(갈무리, 2026.10) 서평
『유기체지향 존재론』 : 생명정치를 거역하는 생명
정현주, 전남대학교 학술연구교수
1. 생명정치에 대한 문제의식
류성실의 작품 <Ten Thousand Dreams>(2026)은 여학생 교복을 입은 12개의 마네킹이 합창을 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성공에 대한 국가의 강박적 야망을 드러내는 합창은 거대한 집단적 규율을 이룬다. 서사는 국가의 ‘꿈’을 개인에게 심는 교육의 참모습과 이를 거역하려는 반체제적 불협화음을 동시적으로 표출한다. 피날레에서 한 마네킹의 치마가 위로 들쳐지면서 그 자궁으로부터 강렬한 빛이 관객에게 뿜어져 나오는 순간, 이 압도적 장면이 드러내는 것은 교육과정에 침투해 생명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조작하는 생명정치다. 이 암울한 전망 속에서 생명정치적 통제에 대항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무엇에 근거해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유기체지향 존재론』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렘케에 따르면 생명정치를 규정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가치중립적 활동이 아니라, 도리어 그 탐구가 불가피하게 변화와 갈등을 야기하는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작업이다. 주카우스카이테(A. Žukauskaitė)는 유기체와 유기적인 것(the organic)의 내재적인 ‘저항의 존재론’을 정립하기 위한 시도로 나아간다. 이는 생명 자체의 저항 역량을 규명하는 일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푸코와 들뢰즈, 말라부의 관점에서 그 잠재력은 생명체의 구조 자체에 새겨져 있다. 그녀는 이러한 유기적인 것의 특성이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에 대립하는 실체적 거점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입증하고자 한다.
저자는 서론에서 칸트의 ‘자연목적’ 및 내재적 인과성 개념에서 출발하여, 폰 베르탈란피의 일반체계이론,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성(autopoiesis) 이론을 차례로 엮어낸다. 칸트 이후 유기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고전적 기계론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다. 유기체는 외부의 원인이나 선형적 인과성으로 환원되는 기계적 모델과는 달리, 재귀적이고 내재적인 인과성을 따라 스스로를 준거하고 변형하며 우연성을 내부 질서로 통합한다. 특히 사이버네틱스적 관점에서 살아있는 유기체는 포도당 등을 이산화탄소, 물, 요소로 연소시키는 열기관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와 기계/기관은 분리되지 않는다. 또한 기계가 유기체 작동을 모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와 기계는 아무 차이도 없다. 실제로 사이버네틱스의 자기조직화 개념은 기계론과 생기론 사이의 논쟁을 그 근원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결과적으로 유기적 사고는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성이론과 연결됨으로써,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산출하며 변화할 수 있는 자체의 역량”이라는 생명 자체의 자기조직화·자기생성·가소성이라는 내재적 역량을 도출하는 이론적 기초를 구성한다. 『유기체지향 존재론』은 일반체계이론, 사이버네틱스, 자기생성체계, 일반 기관론으로 이어지는 유기적 사고의 흐름을 짚어냄으로써 생명체 고유의 자기 주도적인 자기조직화 역량을 입증하고자 한다.
2. 유기체지향 존재론의 세 원리
따라서 생명정치가 위계질서를 창출하고 분할과 배제를 통해 생명을 수량화·착취할 때, 유기체지향 존재론은 다음의 세 가지 개념을 핵심 원리로 삼아 이에 저항한다. (1) 유기체가 지닌 가소성을 통해 입증되는 과정성(Processuality)은 존재를 지속적인 개체발생으로 보는 가장 상위의 원리다. 생명의 가소성은 권력체계가 생명을 통제·조절·착취하게 만드는 조건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고정된 도식을 지속적으로 벗어나 맞설 수 있는 생명 고유의 역량이기도 하다. (2) 저자는 유기체를 총체적 실체가 아닌,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뒤얽힌 들뢰즈적 회집체(assemblage)로 이해하고 이를 공동생성(sympoiesis) 개념과 연결하면서 철학적 출구를 마련하고자 한다. 저자에게 회집체란 환경·미생물·공생체·테크닉적 확장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수평적으로 결합하는 다중성(Multiplicity)을 특징으로 하는 통생명체(holobiont)다. 이는 유기체를 단일하게 경계 지어진 개체나 총체로 보는 생명정치의 위계와 구획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론적 역량을 드러낸다. (3) 유기체가 단순한 외적 자극에 선형적으로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라, 우연성과 자극을 내재적으로 흡수하여 완전히 새로운 구조와 행동 양식을 창조하고, 쇠퇴, 질병, 트라우마, 사멸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점은 예측 불가능한 질적 변화를 함축한다. 이러한 잠재성(Potentiality)과 비-잠재성(impotentiality)은 생명정치적 공학을 맞서 약한 신체들에도 동등한 존재론적 가치와 존엄을 부여할 수 있는 자율적 역량이 된다. 나아가 유기체 고유의 자기조직화·자기결정모델은 인류세 등의 행성적 위기와 생물학적·테크놀로지적 얽힘을 새로이 사유할 수 있는 철학적 조건을 제공한다.
이 서론에서 구축된 프레임은 본문의 제1장부터 제7장에 이르기까지 전후 프랑스철학, 일반기관론, 행성적 가이아 이론, 공동생성 담론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3. 시몽동에서 일반 기관론까지의 사상사적 계보
주카우스카이테가 유기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본론에서 그려내는 것은 대륙철학 전통의 사상사적 지형도다. 게다가 이 존재론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개념의 토대가 대륙철학의 것이라고 해도 저자가 최종적으로 시선을 두는 곳은 전후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미친 사이버네틱스의 영향이다. 즉 이들의 존재론에 이식된 재귀적 자기조직화와 내재적 인과성이다. 이것은 외부의 선형적 인과나 초월적 목적론을 거부하고, 체계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준거하며 우연성을 내부 질서로 통합하는 작동 원리이다. 시몽동은 실체 형이상학과 전통적 질료형상론과 씨름하기 위해 존재론의 중심에 과정과 변화의 잠재성을 설명하는 개체화(individuation) 이론을 위치시킨다. 뤼예 또한 형태발생 과정을 분자형태학으로부터 아무 공백 없이 자체 내부의 질적 변화를 주도하는 자기조직화 활동의 하나로 봄으로써 형태가 미리 결정되어 수량적으로만 확대된다는 전성설 및 유전자 중심주의와 결별하고,10) 유기체를 동등잠재성과 자기살핌의 역량을 갖춘 ‘일차 의식’으로 정의한다. 이때 뤼예의 의식개념은 어떤 외적 관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준거적 회로로서 내적 시각에 해당한다. 두 사상가 모두 미리 형성되거나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는 고정된 ‘개체’ 개념을 배격하고 변화와 생성의 주체를 생명으로 보며, 따라서 유기체가 스스로 질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주체라는 점에서 자율적 자기조직화를 고려한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주카우스카이테는 들뢰즈의 독해에 있어서 시몽동 수용을 통해서는 사이버네틱스의 자기조직화 원리를 연결시킨다면, 뤼예의 수용을 통해서는 제2차사이버네틱스의 자기관찰 체계 및 재귀적 인지 모델을 연결시킨다. 들뢰즈는 시몽동의 ‘전-개체적 상태와 개체발생의 구도를 잠재적인 것(virtual)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생성하는 상호연출로 변형한다. 그런데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개체발생 과정에서 역동성의 수용자로서 애벌레/배아적 주체성은 뤼예의 일차 의식, 곧 유기적 의식과 공명하며 이는 나아가 바렐라의 자기 없는 자기라는 신체화된 재귀적 인지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뤼예의 일차 의식은 말라부의 내재적 가소성과, 스티글러와 육 후이의 일반 기관론의 기술적(technical) 객체의 내재적 발전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유기체의 내재적 자기조직화 역량이 신경망의 유기적 가소성을 거쳐 외부 테크놀로지 및 사회적 기관으로까지 집단적으로 확장되는지에 대한 단계적 답변을 구성한다. 결과적으로 칸트로부터 스티글러·육후이까지 저자가 쌓아올린 대륙철학의 사상사적 계보는 뇌/신경계, 유기적 신체, 기술, 사회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서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재귀적 자기조직화와 가소성 개념을 핵심 축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연속적인 생명-기술적(life-technical/technological) 회집체임을 입증한다. 이는 다시금 해러웨이의 통생명체/공동생성 담론을 연결하는 강력한 사상적 다리가 된다. 그리고 생명정치에 대항하려는 저자의 확고한 입장은 행성과 생물학적 혼종의 관점으로 나아간다. 생명 자체가 비유기적·기술적 확장 및 타자들과의 공생을 통해 스스로를 조직하는 포괄적 회집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4. 행성, 생물학적 혼종으로의 확장
해러웨이는 생물학적 세계에서 그 어떤 것도 스스로를 혼자 만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녀의 통생명체/공동생성의 논리에는 신경계와 살아있음의 조직 자체는 작동적으로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외부의 타자를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자기생성이론에 대한 문제의식이 놓여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생성이론만으로는 환경에 적응하여 스스로의 체계를 유지하는 ‘항상성’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구조가 출현하고 생명정치적 통제를 벗어나는 ‘질적 변화와 저항’이 가능한지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지점의 어려움은 신경계 내부의 관점과 환경 내에 거주하는 유기체를 관찰자가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충돌하는 논리적 공백으로부터 온다.
저자는 해러웨이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공유하기보다는 다른 경로를 모색한다. 이 경우 주어진 과제는 자기생성체계의 구조결정론적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왜 생명이 비 유기적 테크닉적 객체(일반 기관론)나 생태-면역학적 관용이라는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환경으로 외부화된 회집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지 그 당위성 설명하고 자기생성과 타자생성/공동생성을 아우를 수 있는 지점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확보하는 데 있다. 저자는 울프의 논의를 빌려 해러웨이의 통생명체 또한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처럼 회집에 대한 다양한 정도의 개방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경계를 전복해야하는 사태에 마주하게 되는 모순을 경고한다. 그리고 유기체지향 존재론은 자기준거체계와 가이아 이론을 연계시킨 바렐라 및 클라크의 견해를 따라, 체계(system)는 전체성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이버네틱스적 정식화의 수용으로 나아간다. 자기생성체계의 폐쇄성은 오히려 체계 내부의 재귀적 연산을 통해 우연성을 수용하고 환경과의 연결성과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근원이다. 그리고 폐쇄성의 함축으로서 공동생성은 자기생성을 내부로 포섭하여 더 높은 차원의 복잡성으로 확장하는 공생적 연동(symbiotic couplings)으로 나타난다. 결국 유기체지향 존재론이 입증하는 것은 자기생성 체계를 축으로 한 가소적이고 공생적인 생명-기술적 회집체이다. 이는 생명을 규제하고 수량화하려는 국가적·생명정치적 통제에 남김없이 포섭되지 않는 가장 급진적인 내재적 저항 거점이 된다.
북리뷰를 마무리하며,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생명정치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타당하다. 그렇다해도 우리는 어떤 유기체가 지닌 생태적 적소의 본질이나, 어디까지 그 범위가 미치는지는 오직 그 적소를 통합하는 유기체의 ‘살아있음’의 방식을 관찰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 지구 위의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유기체가 생태학적 유기체-적소 단위체들로 된 다양한 연결망을 통합하면서 존재할 때, 가이아를 단순히 자기생성체계이자 공동생성체계로 암시하는 방식은 그 행성적 본질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6- 추론의 자기 지양[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6- 추론의 자기 지양
1)
필연성(관계) 추론은 정언 추론에서 가언 추론을 거쳐 선언 추론에 이른다. 이 선언 추론이 추론의 마지막 형식이다. 필연성 추론은 주어와 술어를 매개하는 것이 유 즉 실체다. 유는 한편으로 단순한 규정성인 유적 본질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가 실현된 개별적 종의 전체이다. 유적 본질이 특수성에 해당한다면, 종의 전체는 곧 일반성을 의미한다. 유 자체는 구체적인 개별성에 해당한다.
정언 추론은 현존 추론의 일격[E-B-A]을 따른다. 그 매개는 특수자[유적 본질]로서 유인 동시에 유 자체이다. 정언 추론에서는 유적 본질이 대전제에 언표된다. 소전제에서 유가 실현된 우연한 개별자가 제시된다. 여기서 아직 일반자로서 유는 우연한 개별자 속에 감추어져 있다.
가언 추론은 이격[B-E-A]을 따른다. 가언 추론의 매개는 일반자로[A와 B의 관계]서 유와 개별자의 존재[A라는 존재자)다. 가언 추론에서는 대전제에서 개별자의 조건적 관계를 통해 제시된다. 이 조건 관계는 실체적 연관을 의미한다. 소전제는 개별자의 존재를 나타낸다.
가언 추론에서는 우연한 개별자 사이의 관계를 통해 개별자 전체가 제시되지만, 여기서 개별자의 관계 즉 실체적 연관은 개별자에 외면적이어서 이 개별자는 직접적이고 우연적이므로 그 전체는 진정한 전체로서 유를 이루지 못한다.
2)
이제 정언 추론이나 가언 추론과 비교해 선언 추론의 형식을 살펴보자. 헤겔은 선언 추론이 삼격의 도식[E-A-B}을 지닌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선언 추론의 형식으로 매개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제시한다. 결론은 그 반대로 나온다. 매개가 긍정이면 결론은 부정이고, 매개가 부정이면 결론은 긍정이다.
긍정적 형식:
A는 B 또는 C이다. A는 B이다. 그러므로 A는 C가 아니다.
부정적 형식:
A는 B 또는 C이다. A는 B가 아니다. 그러므로 A는 C이다.
가언 추론과 선언 추론에서 바뀐 것은 대전제에서 가언 판단이 선언 판단으로 바뀐 것만은 아니다. 사실 형식 논리학적으로 가언 판단과 선언 판단은 서로 교환될 수 있으니, 이런 대전제의 바뀜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선언 추론에서 이 선택지가 ‘배타적인 통일’[entweder oder, negative Einheit, gegenseitig]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B와 C는 서로 배타적이며 그런 한에서 유의 전체를 이룬다. B와 C가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다는 사실은 소전제와 결론이 서로 부정적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형식적으로 보아서 대전제의 선언 판단은 반드시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언 추론은 형식상 이미 소전제와 결론을 통해 배타적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배타적 통일성이 아닌 선언 판단이 가능하지만, 배타적 통일이 없는 한 선언 추론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선언 판단이나 선언 추론을 이런 배타적인 통일을 지닌 것에 한정한다. 사실 배타적 통일성이 없는 선언 판단이나 선언 추론도 가능하다. 일반 논리학에서 선언은 이런 비배타적 관계를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헤겔이 선언 추론을 배타적인 것에 한정한다. 그 이유는 배타적 통일을 지닌 선언 추론만이 다른 형식과 비교해서 새로운 발전된 인식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3)
헤겔에서 유는 항상 배타적으로 분화한다. 배타적 관계는 타자를 통해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며, 곧 부정의 부정을 통한 관계다. 만일 선택지가 배타적인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의 전체는 유를 이루지 못한다. 그런 전체는 서로 무차별한 개별자의 집합일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유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인종의 구별은 유를 이루지 못한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은 파충류, 포유류와 유인원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흔히 동물 유의 종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헤겔에서 이런 구별은 유가 개념적으로 분화된 종이 아니다. 오히려 암컷과 수컷의 구별은 생물체의 유를 이룬다. 유는 암수로 구별된다. 암수만이 생물체 유의 종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가언 추론에서는 매개는 세 가지 규정을 동시에 지닌다. 대전제에서 주어는 A는 개별자의 배타적 통일(B or C)로서 유 즉 일반성을 의미한다. 소전제에서 A는 특수성으로서 유 즉 특수화된 종(B)이다. 결론에서 A는 특수성의 부정(-C)이니, 곧 개별성을 의미한다. (부정적 형식에서는 소전제가 개별성이고 결론이 특수성으로 될 것이다.)
이제 매개가 모든 개념 규정성을 총체이므로 이 매개는 주어와 술어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이미 정언 추론에서 내용상 동일성이 출현했다. 그러나 이제 선언 추론에 이르면 내용상 동일성은 형식상의 동일성으로까지 발전했다.
“선언 추론 안에 개념의 총체로서 설정된 중심은 그 자체로 두 극단을 완전한 규정성 속에서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극단은 중심과는 구별된 가운데 다만 정립된 것으로 존재할 뿐이니 중심에 대립하는 더 이상 본래적인 규정성이 그런 정립된 극단에 속하지 않는다.”(주관 논리학, GW12, 124)
4)
추론이 여전히 주관성에 머물렀던 것은 추론의 양극단을 매개하는 매개 항이 양극단에 대해 외면적인 추상적 규정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선언 추론에 이르러 양극단과 매개 항은 모두 내용적으로 유를 의미하며, 동시에 형식적으로도 매개는 주어와 술어의 규정성을 자기 안에 포함한다.
“[추론에서] 이러한 형식주의적인 것 또는 주관적인 것이 성립하는 원천은 양극단을 매개하는 자가 추상적 규정으로서 개념이며 이 매개하는 추상적 규정이 자기가 통일하는 양극단과 구별된다는 데 있었다. 반면, 완성된 추론[선언 추론]에서 객관적 일반성[유]이 그에 못지않게 형식적 규정들의 총체로서 정립되면서 매개하는 것과 매개되는 것 사이의 차이가 제거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25)
이제 매개와 매개되는 것, 전제와 결론의 구별이 사라지고 “매개되는 것은 매개되는 것의 본질적 계기이고” 각 계기는 매개를 통해 필연적으로 출현한다. 여기서 매개는 현존 추론처럼 타자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반성 추론처럼 자기의 결론을 전제하지 않고 각 항의 동일성을 통해 더는 매개가 필요하지 않으니, 이미 추론이라는 매개를 넘어선 직접적인 된다.
이제 종합적으로 추론의 각 형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추론에서 각 항은 개별성, 특수성, 일반성이라는 개념 규정성을 지닌다. 여기서 매개 항은 개념 규정성의 총체이어야 한다. 그래서 매개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당위는 추론이 발전하는 가운데 실현된다.
우선 현존 추론에서 매개는 각 추상적 규정을 교대로 지닌다. 반성 추론에서는 매개는 개별성과 일반성의 직접적 결합으로서 양면성을 지닌다. 마지막 필연성 추론에서는 매개는 개념 규정성의 총체이다.
이와 같이 매개가 양극의 규정성을 통일하면서 매개와 매개된 것이 구별되지 않으면서 개념의 분화가 지양되고 마침내 통일이 회복된다. 이 통일성은 다만 내적인 분화에 머물렀던 개념이 아니라 판단을 통해 분화가 이루어진 동시에 추론을 서로 통일된 것이다. 이렇게 분화된 가운데 통일된 것이 세계의 총체 즉 객관성이다.
“추론은 매개이며 개념이 완전하게 정립된 것이다. 추론의 운동은 이 매개를 지양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오직 타자를 매개로 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그 결과는 매개의 지양을 통해 출현한 직접성이며 그에 못지않게 매개와 동일하게 된 존재이니 그 존재는 개념이되, 자신의 타자 속에서 그리고 그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회복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 존재는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사태 즉 객관성이다.”(주관 논리학, GW12, 126)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5-필연성[관계]의 추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5-필연성[관계]의 추론
1)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상적 규정성이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 즉 개별자의 전체이다. 이제 필연성 추론에 이르면, 매개 항은 곧 일반성인데 단순하게 된 것 즉 유이다.
매개 항인 이 유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된다. 첫 번째는 ‘단순하게 규정된 일반성’ 즉 유적 본질을 통해 규정된 유이다. 유적 본질이 ‘규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현존 추론의 매개 항과 같은 특수성이다.
두 번째는 구별된 개별자[종]의 전체[일반성]로서 유이다. 헤겔은 이를 ‘충족된 단순한 일반성’으로 규정한다. 개별자 전체라는 점에서 이 매개 항은 반성 추론의 매개 항과 같다. 이 일반성은 전체라는 점에서 일반성이며 동시에 개별성의 전체라는 점에서 개별성이다.
매개 항인 유 즉 실체는 우선 일반자의 본질이 단순화된 것이므로 이 점에서는 일반성과 특수성, 개별성을 동시에 지닌다.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단일한 규정성이었고 격의 변화에 따라 교체되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이중적인 것이었으나, 내적인 전체성이 점차 표면으로 부상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필연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세 가지 개별 규정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추론과 구별된다.
이 추론이 필연적인 것은 매개 항이 양극단의 규정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의 주어는 유가 실현된 개별성이며 결론의 술어는 일반성 즉 유적 본질인데, 매개 항으로서 유는 한편으로 유적 본질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별자 전체이니, 이 매개 항은 결론의 주어와 술어를 필연적으로 결합한다.
양극단의 내용은 매개 항이 출현하는 다른 형식일 뿐인, 양극단과 매개 항은 내용상 동일하지만, 다만 형식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추론의 각 항이 지닌 형식 규정은 독자적으로는 비본질적인 형식이다. 이 필연성 추론은 그 추론이 필연성을 띠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2)
정언 추론은 형식적으로 현존 추론의 일격이나 반성 추론에서 전체성 추론(연역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추론들에서 대전제를 이루는 명제가 서로 다르다. 현존 추론에서 대전제는 단순한 질적인(현존) 판단이다. 여기서 술어는 추상적 우연성이다. 전체성 추론에서 대전제는 전칭 명제이다. 그 술어는 필연성이다.
정언 추론에서 대전제는 정언 판단이다. 즉 주어는 어떤 유이고 술어는 그 유가 지닌 종차 또는 유적 본질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은 사유하는 동물이다’와 같은 명제이다. 정언 추론의 소전제에서 술어는 대전제의 주어와 같은 유이다. 이 소전제에서 주어는 그 유에 속하는 단순한 개별자이다. 그러므로 이 개별자는 유가 실현된 우연한 개별자이지만, 그 속에 이미 유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정언 추론에서 매개는 곧 유이며 논리적 범주로 말하자면 실체이다. 이 실체는 유가 실현된 개체들의 ‘단순화된’ 집단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유적 본성(예를 들어 사유)’도 아닌 유 자체 즉 실체이다.
매개 항으로서 유는 결론의 술어로서 유적 본질과 결론의 주어로서 유가 실현된 개별자를 결합하는 것이니, 이 추론은 필연적이다. 세 가지 항이 사실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다만 형식상으로만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으니, 이미 내용적으로 본다면,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니 이미 추론을 넘어선 것이다.
현존 추론에서 각 항은 서로 자립적이므로 여기서 추론을 통한 매개는 외면적이다. 이 추론은 형식적으로 타당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모순에 이를 수 있다. 반성 추론은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삼으므로, 이 추론은 내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 아직 각 항의 자립성이 남아 있어 추론으로서 모습을 유지한다. 그런데 정언 추론에 이르면 형식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므로 추론은 이미 자기를 지양한 것이니 추론의 모습은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정언 추론은 더 이상 주관적이지 않다. 그 항들의 동일성에서 객관성이 시작된다. 중심은 양극단과 내용상으로 동일하며, 양극단은 그 중심 안에서 각자의 자립성을 지닌 채 포함되어 있다.”(주관 논리학, GW12, 120)
정언 추론에서 아직 남은 것이 있다면, 이 형식상 차이 때문에 남아 있는 추론의 겉보기 모습조차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은 가언 추론과 선언 추론을 거쳐 제거된다.
3)
정언 추론에서 소전제의 주어는 개별자이며, 이는 실체가 실현된 우연한 존재다. 따라서 다른 개별자 역시 이 개별자에 못지않게 실체에 속할 수 있다. 거꾸로 보면 이 개별자는 실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직접적인 성질을 지니는 것이며 이 개별자가 실체에 속한다는 것은 다만 내적인 필연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정언 추론은 가언 추론으로 이행한다. 가언 추론은 정언 추론의 진리다. 즉 정언 추론에서 여기서 두 가지 개별자의 실체적 연관은 내적인 필연성으로 남으며 각 개별자는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니, 바로 이 내적 필연성으로서 실체적 연관이 곧 가언 추론이다.
가언 추론의 대전제는 가언 판단이다. 즉 ‘A이면 B이다’라는 형식을 취한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 A와 B의 연관은 이 개별자가 실체에 속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연관이며 아직 개별자가 직접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한, 내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는 아직 A가 존재한다거나 B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이제 가언 추론에 이르면, 소전제에서 A의 존재가 정립된다. 가언 추론에서 매개는 곧 A이다. 그것은 대전제에서는 하나의 가능성, 가정으로서 출현하며 소전제에서는 하나의 실제성, 현존으로 언급된다.
결론은 계사를 통한 판단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여기서 매개자로서 계사는 보이지 않는다. 계사는 ‘그러므로’라는 연결사가 대신한다. 헤겔은 이런 방식의 연결사를 ‘충족된 매개적 통일성’이라고 부른다.
4)
헤겔은 이런 가언적 관계(판단, 추론)는 조건적 관계로도 해석되며 더 인과 관계나 근거 관계로도 해석될 수 있으나, 가언 판단이나 추론에서는 조건적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근거나 원인은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자기를 통해 자기에 대립하는 개념인 토대나 결과와 같은 그 타자로 이행하지만, 조건 관계에서는 아직 조건과 제약된 것은 서로 무차별하고 그 관계는 내적인 필연성이므로, 이는 다른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더 일반화된 관계이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헤겔은 가언 판단과 가언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해 나간다. 우선 가언 판단에서 A, B는 자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하며 그 관계는 다만 내적인 필연성일 뿐이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 조건[A]은 다만 가능성이며 그것은 결과[B]에서 실현되면서 실제성을 지니게 된다.
결과가 실현되기 위해서 그 조건은 다만 하나인 것은 아니다. 여러 조건이 동시에 작용해서 하나의 결과가 실현된다. 결과에 기여 하는 조건들은 개별화되고 분산되어 있으며, 결과에 이르러 비로소 통일성을 얻는다.
그런데 가언 추론에 이르면, 소전제를 통해 A의 존재가 언급된다. A라는 존재는 개별자이므로 다른 존재에 무차별한 존재이지만, 하나의 우연적 존재이므로 부정성을 지니면서, 지양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대전제에서 A와 B의 관계는 가언 판단으로 보면 내적 필연성에 불과하며 이런 내적 필연성은 A, B의 자립성에 막히게 된다. 그러나 가언 추론에서 보면 소전제의 부정성을 통해 대전제는 자기를 실현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것이 실체적 연관이라는 개념이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하는 ‘개념의 자유로운 통일성’이 출현할 단서가 된다.
“이제 A가 매개하는 존재가 되는데 왜냐하면, 첫째로 매개자가 직접적 존재이자 무차별한 실제성이지만, 둘째로 동시에 본래 우연적이고 자기를 지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을 새로운 형태를 지닌 실제성[B]으로 즉 그 조건들을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들로 옮기는 것은 조건들이 추상적인 직접성으로서 존재라는 사실이 아니라 이 조건들이 개념 속의 존재, 즉 우선은 생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건이 생성이더라도 개념이 더 이상 이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특히 자기에 관계하는 부정적 통일성으로서 개별성이다.”(주관 논리학, GW12, 122)
“왜냐하면, 이 중심은 한편으로는 객관적 일반성 즉 동일 내용의 총체성과 다른 한편으로 무차별한 직접성 사이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 중심은 더 이상 내적 필연성이 아니라 존재하는 필연성이며 객관적 일반성은 단순한 직접성과 즉 존재로서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내포한다.”(주관 논리학, GW12, 122)
매개 항인 A의 존재가 이처럼 모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결론 즉 ‘B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순이다. B는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매개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우연적이며 후자의 측면에서 필연적이다.
5)
정언 추론에서는 매개는 주어와 술어를 긍정적으로 통일한다. 이를 통해 세 항이 동일한 내용임을 보여준다. 가언 추론에서는 부정적 통일을 통해 이런 동일성을 표현한다. 즉 A가 사라지면서 B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런 사라짐과 출현을 통해 정작 실현되는 것은 A와 B라는 실체적 연관이다.
“제약하는 실제성을 제약된 실제성으로 옮겨놓는 것이 지닌, 형식 전환의 활동성은 본래 통일성이며, 그런 통일을 통해 … 무차별한 현존에 이른 규정성은 이제 해소되고 A와 B의 구별은 공허한 명칭에 불과하게 된다.”(주관 논리학, GW12, 123)
가언 판단은 이미 내적으로 실체적 연관을 보여준다. 이 실체적 연관은 가언 추론을 통해 실현된다. 실체적 연관이 실현되면서 ‘유적 본질’을 지닌 실체는 ‘개념적으로 분화한 종의 집단’으로 실현된다. 이 양자의 관계가 곧 선언 판단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4-유비 추론의 적극적 가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4-유비 추론의 적극적 가치
1)
반성 추론은 연역법과 귀납법에 이어서 유비 추론 즉 유추로 발전한다. 이 유추의 근본 도식은 삼격 즉 E->A->B(헤겔은 B->A->E로 표현한다)이다. 유추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예를 들 것이다.
지구[Earth]는 사람이 거주하는 행성이다.
달은 하나의 지구[Earth]이다.
그러므로 달은 사람이 거주하는 행성이다.
이와 같은 유추는 흔히 형식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유추에서 매개가 되는 두 개념(예를 들어 ‘지구’)는 겉으로는 같게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이어서, 정확하게 매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네 개 항의 오류, 모호한 매개의 오류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형식적인 오류인 유추는 실상 과학적 탐구에서 아주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만일 유추가 없었더라면, 많은 과학적 진리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자의 구조를 파악하는데서 우주의 구조가 원형이었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는 예이다.
우리의 인식도 사실은 하나의 유추이다. 사유의 도구인 많은 추상적인 개념은 사실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구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개념[concept]’는 ‘임신하다[concieve]’에서 나왔다. 아이를 임신하는 것과 머리가 사유를 잉태하는 것이 같은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유추는 사실 우리 사유의 원초적인 모습인데, 이런 유추를 사유에서 추방한다면, 우리의 사유는 빈곤해질 것이다. 헤겔은 유추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데, 그것이 지닌 긍정적 측면을 특별히 부각한다는 점에서 유추에 대한 유추에 대한 헤겔의 설명이 돋보인다.
2)
유추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 항이다. 이 매개 항은 소전제에서는 유로 표현된다. 위의 예에서 ‘달이 하나의 지구라’ 할 때 지구는 지구의 유적 속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지구라는 것’ 또는 ‘하나의 지구’이며 아직 그 유적 본질(종차)이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유적 본질을 지칭하는 것이다. 반면 대전제에서 매개 항은 개별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지구’는 개별적 행성으로서 지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추에서도 매개 항은 연역법이나 귀납법과 같이 일반성과 개별성이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연역법이나 귀납법에서 일반성은 전체성이며, 개별자의 전체를 의미하며 여기서 유적 존재는 잠재적이고 아직 정립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추에서 일반성은 정립된 유적 본질 즉 일반적 유의 본질적 속성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발전된 측면을 지닌다.
소전제에서 주어는 이런 유적 존재에 속하는 하나의 개별자이다. 물론 여기서 개별자는 유적 존재가 우연하게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연역법의 소전제와 같다.
그런데 대전제에서 술어는 주어인 개별자에 속하는 성질인데, 여기서 우연성과 필연성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 술어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으나 유추에서 이런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전제가 ‘지구는 사람이 사는 행성이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사는 행성’이란 술어는 개별자인 지구에 속하는 우연성이다. 그러나 만일 그 술어가 ‘공전하는 행성’이라면 지구의 필연성에 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만일 이 유추가 부당하다면, 그 부당성의 원인은 흔히 말해지듯이 유추가 모호한 매개 항을 또는 서로 다른 매개 항을 사용한다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한다. 유추의 부당성은 전적으로 대전제의 술어가 개별자에 속하는 우연성 즉 추상적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유추에서 대전제의 술어를 개별자의 유에 속하는 필연성으로 규정한다면, 이 추론은 오히려 타당한 추론이 된다.
3)
흔히 유추의 부당성 때문에 이를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유추의 형식을 일종의 삼단논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때 유추의 일반적 형식을 유추의 대전제로 삼는다. 그러면 유추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된다.
대전제:
‘어떤 객체에 어떤 징표에서 유사한 것은 다른 특징에서도 그 객체에 유사하다.’(즉 a가 p&q인데, b가 p라면, b는 q이기도 하다.)
또는 이 대전제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두 대상이 어떤 성질에서 일치한다면, 하나가 가지는 다른 성질을 다른 것도 지니게 된다“(a가 p이고 b도 q인데, a가 q를 동시에 갖는다면, b 역시 q를 갖는다.’
소전제:
‘지구는 흙으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사는 행성이며’,
‘달은 흙으로 이루어진 행성이다.’
결론: ‘달은 사람이 사는 행성이다.’
추론의 형식을 이렇게 삼단논법으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결론이 부당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헤겔은 유추라는 일반적 형식에 경험적 내용을 집어넣든, 유추의 일반적 형식 자체를 삼단논법의 대전제의 내용으로 삼든 결과는 마찬가지라 한다.
자주 문제 삼는 것은 유추의 형식 자체에서 매개 항의 이중성인데, 사실 이런 이중성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연역법이나 귀납법 즉 일반적으로 말해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이 가진 일반적 특징이다. 유추의 형식이 매개 항의 모호성 때문에 형식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귀납법이나 연역법도 타당하지 않다.
헤겔은 오히려 이런 문제점은 추론 형식이 발전하는 과정 중에서 인식적 의미 또는 객관적 의미가 제한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 그런 추론 형식이 원천적으로 추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4)
헤겔은 오히려 유추가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발전된 인식적 의미를 지니면서, 그 결과 관계 추론으로 이행하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이제 그 발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연역법에서 매개 항의 일반성은 개별자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 특히 여기서는 주어의 전체성[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으로 출현했다.
그것은 귀납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 매개 항의 일반성은 전제들의 전체성[e1, e2, e3…]으로 출현한다. 이런 전체성에서 유적 존재는 잠재적으로 내재하지만, 아직은 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게 되면, 일반성은 개별자[대전제의 주어]와 유적 본질[소전제의 술어]의 직접적인 결합이라는 방식으로 출현하면서 유적 존재가 처음으로 정립된다.
이처럼 잠재적이었던 유적 존재가 유추를 통해 처음으로 유적 본질로 정립된다는 점이 유추가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뛰어난 점이고 연역법이나 귀납법이 사실 인식에 별로 기여하지 않는 반면, 유추가 과학의 발전에 더 많이 기여해 온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매개는 개별자와 일반자의 결합이지만, 여기서는 개별자는 긍정적이며 일반자는 내적인 것이다. 아직 개별자는 자기를 부정하여 일반자로 고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면 일반자 즉 유적 본질이 직접 출현하면서 개별자와 결합한다.
이런 결합은 아직 직접적이지만, 이제 개별자가 이 일반자를 통해 부정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성 자체가 개별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추를 통해 이런 가능성이 열림으로써 이로부터 일반자 자체가 매개 항으로 되는 추론 즉 관계 추론이 출현하게 된다.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상적 규정성이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이 이중화되면서 최초의 부정이 등장한다. 그리고 반성 추론의 끝에서 유추에 이르러 직접적 규정성은 완전히 지양될 가능성이 열린다.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잠재적 일반성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일반성’이 된다.
“유추 추론에서 유는 단지 직접적인 전제로서만 중심의 요소였다. 추론 자체가 전제된 직접성의 지양을 요구함에 따라 개별성의 부정이 정립되며 이를 통해 일반자는 더는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정립된다. 반성의 추론은 처음으로 직접성에 대한 첫 번째 부정만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제 두 번째 부정이 등장함으로써 외적인 것에 머무르던 반성의 일반성이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규정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17-118)
5)
현존 추론에서 하나의 추론 형식은 자기의 전제를 자기 밖에 있는 다른 추론 형식을 통해 입증했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하니, 자기를 매개로 한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면 전제와 결론은 동일하게 된다. 유추에서 대전제는 p이면서 동시에 q라는 성질을 지니는데, 결론 역시 b는 q라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전제와 결론의 동일성은 관계 추론이 지니는 특징이니, 이런 점에서도 유추는 반성 추론에서 관계 추론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된다.
“[유추를] 긍정적 측면에서 볼 때 결론은 전제와 동일하며 매개는 그것이 전제하는 것과 합쳐진다는 것이 드러나며 이로써 반성적 일반성이 지닌 동일성을 통해 그것은 더 높은 일반성이 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18)
개념의 내적 통일성은 판단에서 자립적인 양극단으로 분리된다. 추론에 이르면 양극단은 매개를 통해 서로 매개된다. 현존 추론에서 전제는 외적으로 매개되지만,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한다. 마침내 유추에 이르러 전제와 결론은 동일해지며, 따라서 매개 항은 양극단과 동일하게 된다.
마침내 유추를 넘어 전제와 결론, 매개와 매개된 것의 내용적으로는 이미 동일하게 되었으나, 다만 형식적으로만 서로 구별되는 관계 범주가 출현하게 된다. 관계 추론의 운동을 통해 이런 마지막 형식적 차이조차 극복되면 이제 개념의 주관성 장은 끝나면서 객관성 장으로 이행하게 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연역과 귀납[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연역과 귀납
1)
추론의 운동은 매개가 지닌 규정성의 발전에 있다. 현존 범주에서 추론의 매개는 직접적으로 규정성을 지니지만, 이 규정성은 추상적 즉 “개별적으로 독자적인” 규정성이었다. 매개는 자립적인 양극단에 외적으로 관계한다. 여기서 매개는 다른 규정성으로 이행하면서 전체 규정성을 다 거치지만, 이런 이행은 타자로의 이행에 불과하다.
이제 반성 범주에 이르게 되면, 매개는 이중적으로 된다. 여기서 매개는 외적인 규정성 이미 자기의 규정성 안에 비치면서[scheinen] 자기 내로 반성[Reflektieren]하니, 표면의 규정성과 이면의 규정성이 다른 양면성에 머무른다.
그런 한에서 매개는 “다른 규정과 관계하는” 구체적인 것이며 자기 자신에서 총체성이지만, 아직은 타자를 반영하는 데 그치는 직접적인 총체성이다. 매개가 총체적이므로 매개는 양극단에 외면적이지 않으며 이미 양극단의 “자기 속에 포괄한다.” 이 추론에서 매개의 반성적 성격 때문에, 이 추론은 반성 추론이라 불린다.(주관 논리학, GW12, 110)
그러나 매개는 타자를 반영할 뿐, 자기의 자립성을 유지하니, 아직 개념이 자기를 전개하는 ‘개념의 절대적 동일성’에 이른 것은 아니며 다만 ‘반성의 통일성’에 그친다.(주관 논리학, GW12, 110)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반성 추론에서 매개는 첫째 개별성을 지닌다. 둘째 이 개별성은 일반성으로 확장되어 있으니, 즉 모든 개별자이다. 셋째, 이 개별자 전체 속에 유의 일반성이 들어있지만, 아직 그 유는 정립된 것은 아니다.
2)
반성 추론에서 매개의 성격에 따라 양극단의 성격도 변화한다. 현존 추론에서 두 전제는 직접적인 판단이며, 따라서 이 전제가 입증된 매개된 판단이려면 자기와 다른 추론의 결론이어야 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추론의 결론을 전제로 삼고 자기는 다른 추론의 전제를 제공하는 일종의 순환적 관계를 이루었다.
그런데 반성 추론에서는 전제는 반성적이다. 이 반성 관계는 다른 추론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전제와 결론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성 관계다. 이 반성 추론에서는 연역법이나 귀납법에서 상세하게 보듯이 전제와 결론이 각기 서로를 반성한다. 즉 전제는 결론을 이미 함축하며 결론은 전제를 함축한다.
반성 추론에서 전제와 결론 사이의 반성 관계는 아직 서로의 직접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전제와 결론은 매개와 마찬가지로 양면성을 지닌다. 각자는 표면적으로는 직접적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자를 반성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3)
반성 추론에서 첫 번째 추론은 전체성의 추론이다. 이 추론 형식은 현존 추론의 일격과 유사하지만, 대전제가 전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흔히 이 추론은 연역법이라 알려진 추론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데스는 죽는다.
대전제에서 주어의 전체성{‘모든 사람’]은 유인 한에서 그런 술어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이 유는 아직 잠재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를 정립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성은 개별자 전체이므로, 개별자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주어는 이중적으로 표현된다. 즉 위의 예에서 ‘모든’은 전체성을 말하며, ‘사람’은 잠재된 유적 존재를 표현한다.
이 전체는 개별자의 전체인 한에서 ‘개념의 일반성’이 아니라 ‘반성에 속하는 외적인 일반성’이다. 즉 전체성은 “개별자를 다만 외적으로만 일반성 속에 포괄할 뿐이며” 개별자는 “그 일반성 안에서 여전히 직접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전제의 주어인 전칭과 소전제의 술어가 매개 항이 되는데, 소전제에서 술어는 주어에 대해 유적 존재가 된다. 매개 항은 대전제에서는 전체성이면서 잠재적으로 유로 규정된 것인데 이제 소전제의 술어에서 유적 존재로 정립된다. 그러므로 매개 항은 한편으로 개별성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유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이중성을 띠게 된다.
소전제에서 주어는 개별자로서 술어인 유에 속하지만, 유가 우연하게 실현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어는 개념이 자기 분화하여 이루어진 것 즉 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위의 예에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는 유의 종이 아니라 그 유가 우연히 실현된 개별자이다.
일격은 술어가 우연적이므로 추론이 타당하더라도 그런 추론을 통해 얻은 결론은 우연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일격에서는 모순적인 결론이 동시에 끌려 나올 수도 있다. 반면 전체성 추론에서 술어는 모든 개별자에 속하는 것 즉 필연적인 것이므로 여기서 결론은 필연적 진리에 이르게 된다.
3)
전체성 추론에서 대전제는 개별자 전체에 관련하는데, 여기서 대전제는 직접 진리로 전제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정된 것이 아니라 진리로 단언된 것이다. 이런 대전제로부터 매개 항을 통해 소전제가 나오는데, 소전제의 진리는 직접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매개된 진리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대전제의 진리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 가운데 전체를 직접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 때 이 대전제의 진리는 결론이 진리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끌어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반성 추론에서 그 추론 자체에서 정립되는 사실은 곧 대전제가 바로 그 자신의 결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런 대전제가 개별자와 술어의 결합을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 그 결합은 결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주관 논리학, GW12, 113)
대전제의 직접적 진리는 공허한 가상이다. 거꾸로 결론은 직접 개별적으로 경험될 수 있으니, 결론이 직접적인 것이며 결론이 마치 대전제로부터 끌어낸 매개된 진리라는 것은 거짓된 외양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 추론에서 한 추론 형식에서 전제는 같은 현존 추론 가운데 다른 추론 형식의 결과이며, 추론 형식은 서로 전제로 하면서 순환한다. 여기서 하나의 형식에서 전제가 되는 것은 자기 바깥에 있는 형식이다. 그러나 전체성 추론에서 전제는 자기의 결론으로부터 끌어낸 것이니, 그런 점에서 자기를 매개로 한다.
반성 추론의 대전제는 개별자의 진리로부터 끌어낸 것이니, 이제 전체성의 추론은 개별자를 매개로 한 반성 추론으로 즉 귀납법으로 이행한다.
4)
전체성 추론이 일격[E->B->A]에 속하는 것이라면, 귀납법은 개별성을 매개로 하는 이격[A-> E->A]에 속한다. 이 귀납법의 일반적 형식은 잘 알려진 대로 다음과 같다.
사자는 네 발을 가진다.
코끼리도 네 발을 가진다.
…
무한히 나간다면
모든 포유류는 네 발을 가진다.
현존 추론의 이격에서 매개는 추상적인 개별성에 지나지 않으면서 고립적이고 어느 전제에서나 주어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 이격은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귀납법에서 매개는 개별성이지만, 전제 전체에 걸친 전체성이므로 “완전한 즉 그[개별성]과 대립되는 일반성과 함께 설정된 개별성”이므로 그런 점에서 매개가 모든 전제에서 주어의 위치를 차지하면서도 이 추론 자체는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이 된다.
그런데 귀납법에서 표현상으로 매개는 한정된 전제로 이루어지지만, 실상 여기에는 이런 한정된 전제가 더 확장되어[즉 ‘이런 전제가 무한히 나간다면’] 전체성에 이르더라도 그 전제는 여전히 옳다는 것이 가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어는 가정된 전체성이며 잠재적으로는 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개별자의 전체는 결론의 주어에서 표현된다. 여기서도 전체성 추론에서처럼 매개 항은 개별자의 전체인 동시에 잠재적으로 유적 존재다. 여전히 개별자가 자립적이며 표면에 나오며 유적 존재는 이면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결론의 주어는 이중적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자면 ‘모든 포유류’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한편으로 ‘모든’을 통해 전체성을 표현하되, ‘포유류’라는 표현을 부가하면서 암시적으로 유가 표현된다.
여기서 모든 전제와 결론에서 술어는 동일하다. 이 술어는 결국 우연적인 일반성이 아니라 모든 개별자에 속하는 필연적인 일반성으로 규정된다. 그런 점에서 술어는 전체성 추론에서 술어와 동일하다.
이런 귀납법에서 동일한 술어가 전제에서는 각각의 개별자에 귀속되며, 결론에서는 개별자 전체에 귀속된다. 각각의 개별자가 곧 개별자 전체이므로 전제와 결론은 동일한 내용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5)
귀납법에서는 전제인 개별 명제가 진리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런데 실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리는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귀납 추론은 이런 한정된 경험을 통해 전체의 진리를 얻는다.
전체의 진리는 다만 가정된 또는 추측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리로 정립되는데, 한정된 경험을 통해 이런 진리를 정립하는 것에는 비약이 들어있다. 한정된 경험으로부터 전체성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의 과제이고 하나의 당위이지만, 이 당위가 실현되는 일은 개연적[problema tisch]이다. 따라서 이는 최종적으로 허위로 결정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그것은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주관은 결단하면서 진리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 귀납법은 추론하는 주관의 결정에 의존하며, 주관이 이런 결단을 내릴 때, 주관은 이미 전체의 진리를 전제하고 있다.
“귀납은 오히려 여전히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추론이다. 중심은 직접성 속에 있는 개별자다. 개별자들을 전체성을 통해 유로 종합하는 것은 외적인 반성에 불과하다. 개별자들에 이미 존재하는 직접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외면성을 고려할 때 일반성은 단지 완전성에 불과하거나 오히려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주관 논리학, GW12, 114)
앞에서 연역법의 대전제가 결론 즉 개별자의 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제 귀납법에서는 거꾸로다. 귀납법에서 전제의 진리는 이미 결론 즉 전체성의 진리를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귀납법 역시 연역법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전제로 한 추론이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결론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귀납법을 통해 개별자가 당위인 유적 존재와 결합된다. 귀납법에서 이런 결합은 다만 가정된 것에 불과하다. 만일 이것을 하나의 가정으로 보고 그친다면, 여기서 중심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두 부분(개별성과 유적 존재)으로 분열될 것이며, 추론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이 실제로 정립되면 개별자가 곧바로 유적 존재가 되면서 이로부터 유비 추론이라는 형식이 발생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 수학적 추론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 수학적 추론에 관해
1)
현존 추론의 일격은 E->B->A이다. 이격은 B->E->A이다. 여기서 첫 번째 소전제 E->B에서 B가 우연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세 번째 형식은 두 번째 추론 형식의 결론인 B->A를 대전제로 삼고 첫 번째 형식의 결론 E->A를 소전제로 삼는 것이다. 이제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두 전제에서 술어가 되는 A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곧 E->B인데, 이것은 첫 번째 형식에서 매개 없이 전제된 소전제가 이제 매개를 통해 나온 것으로 된다.
이로써 추론의 상호 매개가 완성된다. 세 가지 추론 형식을 통해 지금까지 추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 명제 E->A, B->A, E->B가 모두 직접적인 명제에서 추론을 통해 정립된 명제로 변화했다. 그러나 각 명제를 매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추론이 아닌 자기 밖의 추론이다. 세 가지 명제는 서로 순환적으로 타자에 의해 증명된다.
2)
세 번째 형식에서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민주당원이 한국인이고’ ‘국민당원이 한국인’이더라도, 민주당원이 국민당원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즉 A가 E에 우연성이고 B에게도 우연성이라면, B->A이고 E->A이더라도 E->B가 성립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매개자인 A가 어느 전제에서도 술어이므로, 즉 타자를 포섭하거나 타자에 내재할 뿐, 타자를 포섭하는 동시에 타자에게 포섭당하고 타자에 내재하는 동시에 타자를 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추론 형식도 특칭화를 통해 형식적 관점에서 추론의 일격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즉 E->A이고 어떤 B는 E라면, 어떤 B는 A가 된다. 이런 특칭화를 통해 형식적으로 타당하더라도, 결론의 특칭성은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성립하는 것 즉 무규정적인 것이 되므로, 헤겔은 이런 특칭화를 통한 정당화는 의미 없는 것이라 한다.
만일 두 번째 전제인 B->A를 부정 명제로 즉 ‘B는 -A가 아니다’로 바꾼다면, 형식적으로 추론은 성립할 수 있다. 이 경우 결론도 부정적으로 된다. A는 B는 배타적이므로 E가 A라면 ‘E는 B가 아니게’ 된다.
“이 추론은 추론의 일종으로서 이 추론에 부합한다면 여기서 E->A라는 한 관계가 이미 충분한 관계를 갖는 만큼, 다른 A->B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충분한 관계를 가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무차별한 판단 즉 부정 판단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하면 추론은 합법적으로 되지만, 결론은 필연적으로 부정적으로 된다.”(주관 논리학, GW12, 103)
이런 가정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세 번째 형식은 첫 번째 형식에서 대전제에서 술어 A 역시 우연성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추론에서 소전제의 술어인 B의 우연성은 이미 앞에서 두 번째 형식을 통해 폭로되었다. 이제 세 번째 추론 형식을 통해 첫 번째 추론의 형식에서 전제가 모두 우연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3)
두 번째, 세 번째 추론 형식을 통해 추론의 대표로 알려진 첫 번째 추론 형식이 사실은 우연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현존 추론에서 운동이 전개할 부정적 결과다. 삼격은 앞에서 보았듯이 형식적으로 성립하지 않지만, 삼격이 성립하는 특별한 경우가 있다.
즉 수학에서는 ‘두 사물이나 명제가 제삼의 것과 같다면 그 둘은 서로 같다’라는 법칙이 성립한다. 예를 들자면, 수학에서 a+b=c이고 x+y=c 라면, a+c=x+y가 된다. 또 기하학에서, 서로 질적으로 다른 도형에서 두 개의 도형이 세 번째 도형과 크기에서 동일하다면, 이 두 도형도 서로 크기가 동일하게 된다.
이는 수학적 추론이라 알려지는데, 헤겔은 이는 일반논리학을 완성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혀 몰랐던 격이라 한다. 헤겔은 이를 사격으로 규정하며 그 도식을 A=A=A로 표현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사격(즉 특별한 삼격)이 성립하는 경우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그것은 다만 양적인 것이나 수적인 것의 동등성이나 부등성을 다룰 때만 성립한다.
“이 추론[수학적]이 직관적으로 명백하다는 장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장점의 근거는 규정이 지닌 모든 질적 상이성을 추상하고 오직 그 규정의 양적 동등성이나 부등성만을 받아들인다는 것 즉 이 추론의 형식주의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주관 논리학, GW12, 104-105)
동등성이나 부등성은 산술적 계산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수학적 계산에서는 이 삼격이 성립한다. 그런데 기하학적으로는 그 외의 다른 관계도 있다. 예를 들어 비교의 관계 즉 ‘크다’나 ‘작다’라는 관계를 보면, 여기에서는 이런 수학적 추론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A가 C보다 크고’, ‘B가 C보다 크다’라고 할 때 A와 B 가운데 어느 것이 큰지는 알 수 없다.
수학적 동등성은 모두 ‘=’ 의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헤겔이 이 수학적 삼격을 A=A=A로 표현한 것은 이처럼 =의 관계에서 삼격이 성립하기 때문일 것이다.
4)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론 형식이 일격에서 이격, 삼격으로 바뀌면서, 특수성에서 개별성을 거쳐 일반성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개념 계기가 매개로 되었지만, 단지 자리를 바꾸었을 뿐, 그 자신이 내적으로 타자로 이행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추상적인 규정이 매개로 남아 있었다.
현존 추론은 서로 타자의 전제가 되어 각자는 입증된 전제로부터 매개를 통해 끌어낸 결론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그 결론은 완전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 전제가 되면서,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한다. 하나의 추론 형식에서 전제는 입증된 것이어야 하지만, 그 전제를 입증하는 것은 그런 전제로부터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완전하며, 즉 자기의 결론은 입증된 전제로부터 끌어냈다는 주장은 오히려 기만이며 그런 추론은 가장 불완전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현존 추론의 운동을 통해 전제에서 동일성의 조건이 출현한다. 이격을 통해 소전제에서 E=B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시되었으며, 삼격을 통해 대전제에서 B=A임이 드러났다. 이런 긍정적 결과를 통해 현존 추론에서 항이 지닌 추상적 질적인 성격은 사라지고 오직 단일한 성질이 지닌 양적인 것이 매개 항으로서 추론에서 등장한다. 이를 통해 현존 추론은 반성 추론으로 이행한다.
“그런 변증법적 운동의 단순하게 부정적인 결과는 단순한 양적인, 수학적 추론을 통해 질적 형식 규정성이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출현하는 긍정적 결과는 즉 매개가 개별적인 질적인 형식 규정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질적 규정성의 구체적인 통일성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고찰된 세 가지 추론 격이 지닌 결함이나 형식주의는 그러한 개별 규정성이 추론의 격에서 중심을 이루어야 했다는 데 있다.”(주관 논리학, GW12, 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