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0-이성[Vernunft]의 형식과 내용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0-이성[Vernunft]의 형식과 내용에 관해
1)
헤겔 논리학 2부인 주관 논리학의 1편 주관성 장은 개념-판단-추론으로 전개되면서, 전통적인 논리학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이다. 앞에서 개념과 판단을 살펴보았다. 이제 추론을 살펴볼 차례다.
개념은 이 개념을 이루는 내적 계기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 아직 외적인 자립적인 존재로 출현하지 않는 상태다. 판단에 이르러 이 내적 계기가 외적으로 출현하면서 판단을 이루는 주어, 술어의 규정성이 된다.
판단은 주어, 술어의 개념 규정성이 아직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판단의 형식이 발전하면서, 서로의 관계가 점차 고양된다. 마침내 최종적 판단인 개념의 필연성[자명한] 판단에서 개념 규정성이 내적 관계를 이룬다.
이때 양상 술어는 하나의 주어에 속하는 술어가 아니라 하나의 판단에 속하는 술어가 되면서 이미 판단에 관한 판단이 된다. 이 ‘판단에 관한 판단’은 곧이어 ‘판단과 판단의 관계’로서 추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추론을 통해 개념의 계기들 사이의 연관 관계가 다시 회복되지만, 개념에서처럼 단순히 내적 계기로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이 추론은 개념과 판단의 통일이 된다.
“추론은 판단 속에서 개념이 회복된 것이다. …. 추론에서 개념의 규정들이 판단의 양극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규정된 통일 또한 정립된다.”(주관 논리학, GW12, 90)
2)
헤겔에서 판단의 능력은 지성이라고 불리며, 추론의 능력은 곧 이성이라 한다. 헤겔에서 이 두 능력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이미 개념의 계기는 내적으로 연관되고 이 관계가 추론이므로 개념은 내적으로 추론이다. 반대로 추론은 이미 말했듯이 개념의 통일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니, 지성과 이성은 서로 통일되어 있다.
지성은 이성의 한 계기이며, 지성이 전개되면 곧 이성이다. 그러나 지성의 차원에서 아직 이성은 감추어져 있으며, 이성의 차원에서 지성은 자신의 한 계기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추론의 능력으로서 이성은 이성의 형식과 관련된 이름이다. 이성은 일반적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대체로 일반적인 법칙, 또는 법칙의 원천을 인식하는 능력이라 말해진다. 법칙의 원천은 곧 신이나, 일자, 초월자, 무한자, 자유, 영혼 등이니 바로 이런 대상이 이성적 대상이라 지칭된다. 이 이성적 대상이 곧 이성의 내용적 측면이다.
통상적으로 일반 법칙의 인식은 매개나 추론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또는 내적 심정을 통해 인식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추론 능력이라는 이성의 형식적 측면은 무시되기 일쑤이며, 중요한 것은 바로 이성적 대상 자체의 인식에 있다고 말해진다.
반면, 헤겔은 이성의 내용적 측면은 이성의 형식적 측면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심정을 통해 이성적 대상인 신이나 자유를 인식한다면, 이 신이나 자유는 이성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감각적 확실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성적 대상이 진정으로 이성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의 형식인 추론을 통해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성의 형식이야말로 이성적 대상을 진정으로, 본래 대로 인식하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헤겔에서 이성적 대상은 현실의 근원이나 현실 너머에 직접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외화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니, 이 운동 자체가 이성의 형식인 추론이다. 이성적 대상 자체가 추론적으로 자기를 전개하니 이를 인식하는 방식 역시 추론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3)
이성의 형식인 추론이 신이나 자유, 영혼조차도 인식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보는 데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된다. 신적인 것을 인식하는 이성이 고착 추론이라고 하면 어떤 반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반감은 추론적 이성을 낮춰보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 ‘고작 추론이라는 것을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는 생각일 것이다.
사실 일상적으로 추론은 대체로 낮춰본다. 추론을 다루는 논리학이란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학문으로 여겨진다. 논리학은 배워본 사람은 알지만, 무척이나 까다롭고 번거로운 학문이다. 오늘날 형식 논리학에 이르러서는 거의 수학적인 증명에 가까워지며, 더 복잡한 양화 논리나, 양상 논리에 이르면 일반인이 아니라 전공자조차도 포기하고 만다.
또, 논리학을 배우면 사유를 논리적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사실 논리학을 배웠다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논리학의 법칙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논리학자보다 더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마치 해부학이나 생리학을 배우지 않더라도 소화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듯이 논리학을 전혀 모르더라도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사유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한다.
까다롭고, 배울 필요가 없는 논리학, 추론의 형식은 게다가 거의 무의미하기조차 한다. 삼단논법의 대표적 예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추론을 보자.
‘소크라테스가 죽는다’라는 사실은 이런 형식적으로 체계화된 추론을 거치지 않더라도 직접 알 수 있으며 게다가 굳이 이 결론을 추론을 통해 안다고 하더라도 그 대전제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는 결론에 해당하는 것 즉 ‘소크라테스가 죽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죽고’.. 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니 그 자체가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이다.
논리학, 추론이 아무리 그 이름은 ‘이성’이라 하더라도 그런 이성은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것이니 그런 이성으로 신과 영혼과 자유를 인식한다는 것은 오히려 신과 영혼, 자유를 낮춰보는 것이 될 것이다.
4)
그러나 헤겔은 이성과 추론을 낮춰보는 견해는 이성과 추론의 본성에 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그런 낮춰봄은 통상적인 논리학에서 다루는 이성이나 추론의 형식[삼단논법, 헤겔적 표현으로는 E-B-A]이 사실은 다만 이성과 추론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겨우 출발점에 불과한 것인데도, 마치 이것이 이성의 유일한, 본래 능력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나온 거라 한다.
헤겔은 추론에 관한 통상적 서술은 결코 ‘이성적 인식’이 아니며, “이성적 형식으로서 추론에 관한 서술”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잘못된 서술은 “‘추론의 지성적 형식’에 머물러서, ”개념 규정들이 ‘추상적 형식적 규정’으로 간주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07)라는 데 나온다고 한다.
즉 추론 형식에 관한 오해는 이 추론 형식에서 그 형식을 구성하는 항(즉 대개념, 소개념, 매개념)을 추상적인 규정성으로 보고, 각자 고립적이고 서로 무차별적인 것으로 보면서, 따라서 추론의 형식은 그 형식이 다루는 내용과는 무관한 것, 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추론 형식은 ①사태가 그 스스로 전개하면서 드러내는 형식일 뿐이며, 그 때문에 추론을 이루는 항은 개념 규정으로서 이는 ② 독자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이미 자기 속에 포함하는 총체라는 것이다.
“개념 규정 사이에 내재와 포섭이 존재한다는 사실 속에 이미 … 개별자는 그 자체로 일반자이며 … 일반자는 그 자체로 개별자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며, 더 자세히 말해 추론은 바로 이 통일성을 매개로 명시적으로 정립하고 추론이 지닌 규정[의미]란 바로 매개에 있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며, 즉 개념 규정들이 … 오히려 그 통일성을 토대로 삼는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주관 논리학, GW12, 107)
그러므로 헤겔은 라이프니츠처럼 일반 논리학을 기호 언어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경멸한다. 그런 시도는 논리학에 수학적 연산을 도입하려는 시도인데, 수는 개념이 없는 소재이며 계산은 외면적으로 합치하거나 분리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논리학은 “개념 자체를 유일한 내용을 삼는 대상”인데, 그런 논리학을 다루면서 “그토록 철저하게 비개념적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주관 논리학, GW12, 108-109)은 이성의 대상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