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철학(5) – 왕선산의 존재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5)-왕선산의 존재론

 

1)

앞에서 말했듯이 이규성은 90년대 초반까지 황종희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일원적 기라는 실재로부터 소통성의 가능성을 찾았다. 그러나 우주적 기의 음양이 교체하는 운동 양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규성의 판단에 따르지만, 우주적 기의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부당하게도 유가의 차별적 질서로 되돌아갔으며, 현성파는 무차별 평등 사회를 꿈꾸었지만, 다만 기의 흐름이 변화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일원적 기의 운동으로는 만물의 소통성의 토대를 마련할 수는 있지만, 홀리즘의 위험을 간직한다.

90년대 중 후반 이후 한국 사회의 시대적 정신이 변화했다. 90년 초반까지 연대를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던 운동 세력은 후퇴하고 서구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불어닥쳤다. 이 사상은 여러 면모를 지니지만, 그 핵심은 개인의 자발성에 대한 강조였다. 그 때문에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 소통적 연대라는 새로운 시대 정신이 출현했다.

2001년 이규성은 <왕선산-생성의 철학>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추구했던 형이상학을 왕선산의 철학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1 이규성의 책의 서문에서 황종희의 철학은 내재의 철학인데, 그를 다루면서 생성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졌고 생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에 나오는 ‘내재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은 서로 동전의 이면으로 보이고 다만 강조점을 어디에 두었는가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종희와 왕선산에 관한 이규성의 해석을 면밀하게 비교해 보면, 두 철학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황종희의 ‘내재 철학’에서는 본체라는 개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왕선산의 ‘생성 철학’에서는 본체라는 개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물의 본체 개념이 없으면, 홀리즘의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사물의 본체 개념을 전제로 하면 개체의 자주성이 확립되지만, 개체들은 서로 독립하여 연대 가능성이 약화된다. 이를 통해 이규성이 황종희를 떠나 왕선산으로 이행한 이유가 밝혀진다. 즉 이런 이행은 이규성이 시대 정신의 변화에 따라 소통성 못지않게 개인의 자발성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규성이 소통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통성을 홀리즘적 단계에서 고양시켜 개인의 자발성을 인정하면서도 소통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자 한다. 이것은 이규성 자신의 철학적 의식 자체의 발전을 의미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이규성의 철학적 정신은 이때부터 드러난다고 보겠다. 문제는 황종희의 철학에서와 달리 왕선산의 철학은 음양 두 기의 운동으로부터 본체를 확립하기는 하는데, 여기서 어떻게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가이다. 이제 왕선산의 철학으로부터 소통 가능성을 찾기 위해 고투하는 이규성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신 유가 형이상학 전반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이다. 주희에서 태극의 동정이 음양을 낳는다. 황종희에서 음양은 하나의 기의 두 대립적 양태다. 이 음양의 동정이 교체하는 양상이 곧 이법이다. 그러나 왕선산에 이르면, 그 관계는 달라진다.

왕선산에서 음양 두 기(음양 대신 인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하나의 기이면서 동시에 둘로 나누어져 운동한다. 왕선산에서 음양 자체가 실체 자체이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상호작용하니 그런 점에서 음양은 하나의 기다.

이 운동 속에서 음양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그런 균형 상태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균형 상태가 태극이며 태극은 운동이 발전하여 균형에 이른 상태라면, 아직 운동이 발전하지 않은 미발의 상태가 곧 무극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지에서 운동으로 다시 정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끊임없는 운동일 뿐이다. 음양의 균형 속에 나타나는 정지는 절대적 정지가 아니라 음양이 운동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정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태극은 음양의 기의 운동과정이 나타내는 매순간 조화의 극치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화에서의 조화의 극치이다. 따라서 태극은 기라는 실체의 속성이다.”(생성의 철학, 155)

음양의 동정이 만물을 이루니 여기서 만물은 나름대로 고유한 본체를 지닌다. 그 고유한 본체는 기의 동정 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동정 자체가 이루는 균형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체는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질료적 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일월의 형체는 만고불변이다라고 했다. 형체란 그 규모와 겉모습을 말하며 질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질료는 날로 바뀌나[일신] 형체는 여일하다.”(왕선산, 사문록, 생성의 철학, 176 재인용)

 

3)

그러므로 왕선산에서 현상적 사물은 “양면적 성격과 조화로운 규칙성”을 지니며, 이는 음양의 “상호 교환 관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139)라고 한다. 양자가 균형을 이루는 모습 즉 ‘혼융한 합일’은 곧 ‘태화’이며, ‘충화’다. 또는 양자 관계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이기지 않는[불상리 불상승] 관계에 있다.”(159)

“그러나 그[태극]의 실제는 음양의 혼융한 합일일 뿐이기 때문에 음양이라 이름 지을 수도 없다. 그리하여 다만 그 궁극성 때문에 더할 것이 없는 것을 서술하여 태극이라 한 것이다…. 음양의 본체는 인온이 서로 얻고 동화하면서 변화하여 천지에 가득차 있으니, 이것이이른바 태화이다. 장자는 것을 위대한 조화라고 했다.”(왕선산, 사문록, 생성의 철학, 154, 재인용)

“음과 양이 적대함이 없는 것을 충이라 한다. 그것의 청탁이 작용을 달리하고 다수의 나뉨이 평등하지 않으나 공을 같이 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는 것을 화라고 한다. 충화가 천지에 유행하고 천지는 그것을 완비하여 서로 화합함으로써 소산물을 널리 풍부하게 한다.”(생성의 철학, 158)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왕선산의 철학을 변역의 철학이며 회통의 철학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음양과 동정, 태극과 무극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마치 촛불2과 같다. 촛불은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고요한 촛불의 형태를 유지한다. 이 힘의 균형 속에 이루어지는 촛불의 모습이 곧 촛불의 형상이며, 그것은 정지한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가운데서 성립하는 균형을 의미한다. 이규성은 이런 왕선산의 도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의 통일 개념과 닮았다고 한다.

 

4)

음양의 운동 속에서 운동은 항상 균형만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 운동은 상호 부조화하는 가운데 서로 침범하는 대립 한 가운데 존재한다. 그 균형은 곧 운동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시종도 없으며, 그 사이에 휴지나 틈도 없다. 이런 운동 속에서 사물이 형성되니 그 운동의 균형은 일정한 ‘수’를 이룬다. 사물의 운동 상태는 항상 부조화하고 서로 침범하는 대립 속에 있으므로 그것은 운동의 ‘상’을 나타낸다.

“태극은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에 있으면서 시초도 없고 종말도 없어 틈이 있을 수도 없다.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도 모두 그것의 상이며 하나에서 만 가지에 이르기까지 수는 모두 그것의 수이다.”(생성의 철학, 157)

음양의 운동이 조화의 균형 상태를 이탈하지 않을 때 중정이지만, 음양의 운동은 항상 대립 속으로 나가니, 이런 운동 상태는 균형으로부터 이탈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중정의 상태로 돌아가는 시기이니 곧 변역의 시기다.

왕선산의 철학에 따르자면, 주역의 64괘는 사물의 균형 상태를 표현하지 않는다. 주역의 64괘는 사물이 중점으로부터 이탈한 상태 즉 변역의 상태를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은 다시 중점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탈과 복귀, 변역과 중정이 교체되는 이런 운동을 이규성은 “반대적인 것의 화이부쟁” 또는 “일지일지의 운동”(생성의 철학, 167)으로 표현한다.

 

5)

왕선산의 존재론은 두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하나의 관점에서 운동은 본체에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운동 상태 자체는 본체로부터 이탈한 상태다. 투쟁은 운동의 비본질적 성질이다. 그것은 극복되고 순화될 과정상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161)

이렇게 각 사물이 고유한 본체가 존재하는 세계는 한편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처럼 각자 자기의 이데아를 지켜나가는 세계다. 따라서 이 세계관에서 양명학의 일원적 기의 운동에서나 또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의 창조적 진화에서 보듯 “새로운 요소의 생기와 이것이 과거의 단순성과 결합하여 질적으로 좀더 복잡한 총체성을 생산해 나간다는 전진적 존재론은 나오지 않는다.”(생성의 철학, 161)

“이로써 그는 중국 특유의 유기적 세계관을 방대하게 형성했다. 따라서 그의 세계관은 기계론보다는 역동적이지만, 전진적 친화적 세계관에 비해서는 회귀적인 원환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생성의 철학, 164)

그러나 왕선산의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만물은 이런 균형을 본체로 하지만, 그 자신은 어떤 운동 상태에 있다. 즉 만물은 균형을 중심으로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고 다시 중심으로 복귀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의 상호 투쟁과 상호 보완이라는 관계가 나온다.

예를 들어 남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양에 치우친 상태이며 여자는 마찬가지 인간을 중심으로 음에 치우친 상태이니, 이렇게 각자 반대로 치우친 존재이므로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이미 자기 내에서 중심인 인간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그런 가운데 서로 복귀하는 힘을 빌려주고 빌려 받는 상보적 관계를 이룬다. 이 관계가 곧 상반상성의 관계이다. 이렇게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남녀는 사회적으로 중심의 통일을 이룬다. 이 중심의 통일은 남녀 각자가 자기의 중심으로 복귀한 것이며 동시에 남녀가 이루는 통일체이다.

자연에서 사물은 자기가 존재하는 범주나 층위 속에서3 각자 서로 대립하는 음과 양으로서 상호 투쟁하는 동시에 서로 보완한다. 사람에서 남녀가 그러하다면, 지배층과 피지배층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각층에서 이런 상반상성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늘과 땅, 물과 불, 꽃과 새는 서로 싸우고 서로 돕는다.

사물의 균형과 고유성의 측면에서 사물은 개별적이며 자주성을 지닌다. 그러나 사물이 운동 상태에 있어서 자기 내로 복귀하려 하며 상반상성의 관계에 있다는 측면에서 소통성을 지닌다. 이규성이 왕선산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런 자주성과 소통성이 동시에 가능한 형이상학적 토대이다.

 

6)

그러나 문제는 이 본체의 모습이다. 이규성은 본체에 대한 설명과 관련해서 왕선산의 오류를 지적한다. 왕선산의 음양이 동정하는 운동을 개념적으로 본다면 음과 양은 상호 평등할 뿐이다.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위는 아니며 다만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하나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도 왕선산은 운동 가운데 양과 음의 역할을 분담하며 양이 음에 대해 우위를 가진다고 본다. 양은 강건하며 음은 유순하니, 건의 강건성이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와 변화의 주인이며” 음의 유순성은 리를 지켜나가는 것 즉 “변화를 수용하여 작용을 성취하는 것”(생성의 철학, 172)일 뿐이다.

양과 음의 통일이 사물을 이루지만, 그 가운데 양이 음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은 왕선산 자신의 형이상학으로부터의 이탈이며 결국 전통적 유가 질서로 복귀하려는 것을 정당화할 뿐이다. 이규성은 음양에 대한 이런 해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문맥에서 강건성은 집단을 응집하는 지배의 주체성이 된다. 그것은 집단을 새로운 미래로 열어젖히는 창조성이 아니라 군거 본능에 지배된 곤충적 주체성이 된다. 집단화된 음의 세력은 강건성의 주체에 의부해야만 자연 질서에 따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생성의 철학, 173)

이규성의 생성 철학(4) – 왕명 좌파와 그 한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4)-왕명 좌파와 그 한계

 

1)

이규성의 책 황종희- 내재의 철학 가운데 뒷부분(6장)은 양명 좌파로 알려진 현성파의 철학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이지가 집중적으로 논의되는데(7장),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이 책이 쓰인 시기 즉 90년대 중반의 시대적 분위를 잘 보여준다.

89년 민주화 이후 그런 가운데 급진적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회적으로 평등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적 변혁의 전망에 들뜨기 시작했다. 이런 전망에 기초해 남북의 통일을 향한 염원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치적 실패(군부의 선거를 통한 재집권)로 좌절한 지식인들은 마침내 필사적인 투쟁을 전개했으니, 이 시기 많은 청년이 좌절과 분노 속에서 목숨을 던졌다. 다른 한편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기왕에 고조된 심정은 갈피를 잡지 못해 허둥거렸다.

이런 시기 이규성은 양명학의 형이상학에 기초하지만, 유교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황종희의 철학에 멈춰있을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양명 좌파를 통해 제시된 평등주의적 경향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식은 이규성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아래는 186-188쪽에 걸쳐 주장된 이규성의 논리를 정리한 것이다.

① “어느 경우에는 기존 문화의 전반적인 파괴가 지배적이고 어느 경우에는 문화의 비판적 계승이 지배적이다.”

② “모든 유형의 저항들의 인성론적 기초는 … 저 원융한 흐름을 추구하는 무의식일 것이다.” “서로 융통하는 우호성을 상징하는 행위를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요구한다.”(여기서 ‘원용한 흐름’ ‘서로 융통하는 우호성’은 현성파의 무차별성과 평등성을 의미한다.

③ “명대 이지의 급진주의도 분명 이러한 방향을 어렴풋이 암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④ “그러나 이러한 실마리 적 암시도 육상산과 왕양명 및 현성파의 예비적 전개가 있어야 했다.”

⑤ “황종희 철학의 외재적 근거는 저들에게 있는 것이 될 것이다.”(황종희는 현성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통해 자기의 보수적 논리를 확립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2)

현성파의 근본 입장은 무차별성이나 평등성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기가 운동한 상태라고 한다면, 각 사물은 발산하면서 수렴하고 다시 발산하니 어떤 고정된 본체를 지니지 못하고 서로 연결되며, 그런 가운데 만유는 이 기의 운동이 전개하는 하나의 매듭에 지나지 않으니 서로 무차별하며 평등하다.

이런 우주 개념에 따르자면, 인간에게서 성과 욕정도 하나의 운동 단계일 뿐이며 성을 대변하는 지배 계급과 욕을 대변하는 피지배 계급도 평등한 무차별적 존재일 뿐이다. 이미 세계는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은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존재하고 또 일정한 시기가 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각자는 우주적 기의 운동 속에 참여하여 자신의 현존 자체에서 만족하니 “현재의 마음이 곧 올바른 생각이며”(황종희, 197, 왕심재 재인용), 현재에 만족한다. 이것이 곧 현성 즉 ‘현재 이루어져 있다’라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욕망과 현재, 민중, 쾌락을 긍정하는 입장이 되며, 그런 만큼 지배 질서와 도덕을 거부하는 저항적 의식이 된다. 왕심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라.

“그러므로 도란 본질이며, 천덕인 양지여서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양지를 따라서 즐겨 타인과 같아지게 되면 마음이 충만하게 퍼져 열리게 되어 천지는 변화하고 초목은 번성한다.”(황종희, 197, 재인용)

이런 입장에 서면 도덕 질서라는 명분으로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입장은 거부된다.

“작위적으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을 최상의 진리로 삼는다. 새가 울고 꽃은 지며 산은 치솟고 냇물은 흐른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여름에는 시원한 갈옷을 입고 겨울에는 모피옷을 입는다. 지극한 도는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황종희, 198, 왕심재 재인용)

이규성에 따르면 황종희는 이런 현성파의 논리에 대해 비판했다고 한다. 현성파를 따르면, 자칫 “광기와 방탕이라는 하나의 길로 들어간다”라는 것이다. 황종희는 그 때문에 유행에 머무르지 않고 주재를 다시 회복하려 했으나, 이규성에 따르면 “현성론에 대한 황종희의 우려와 대항은 사대부 계급의 헤게모니 장악과 관련된 정치적 성격의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규성의 판단에서 이규성이 황종희보다는 차라리 현성론에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어떻게 보면 현성파는 기존 질서나 도덕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 이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나갈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기의 운동에는 이런 양태도 있고 저런 양태도 있으니, 우주적 기와 합일하는 인간으로서는 기의 움직임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항한다는 행동 자체가 기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현성파는 내적 망명이나 현실 도피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활동을 전개한 철학자가 이지다. 그는 물론 이론적 활동에 그쳤지만, 적어도 그런 비판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특출하다. 이규성 역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이지의 비판은 곧 도리를 가르치는 것은 거짓된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는 입장에서다. 이는 사회의 지배적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오히려 동심 즉 자연적 마음을 그대로 두면, 기의 운동에 합일하여 살아가면서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독서인들은 겉으로는 도학을 하고 속으로는 부귀를 추구한다. 유자의 우아한 옷을 입었으나 행동은 개돼지와 같다. … 재주와 학식이 없는데도 성인 도학을 강학한다는 이름으로 부귀를 요구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빈곤하고 천할 것이기 때문이다.”(황종희, 226, 이지 재인용)

“도덕적 인격은 특권 집단의 비특권 집단에 대한 거리와 부정에 기초한 고립된 인격이라면, 동심은 인격의 자기 위세가 없는 ‘자기도 없고 타인도 없는’ 마음이다.”(황종희, 236)

 

4)

이지 자신은 도덕을 비판하면서 사회적 질서도 부정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동류이고 동체”라는 의식을 지녔으며, 제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부정한 대동 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런 비판적이며 동시에 평등한 의식은 아무런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지가 기존의 도학을 비판한 것은 그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소위 회의주의의 역설에 붙들리게 된다. 회의주의는 어떤 주장도 진리가 될 수 없다고 회의하지만, 회의 자신은 스스로 진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회의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주장이며 회의주의 자신의 논리에 따라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회의주의의 역설은 기존의 도학을 비판하는 이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기존의 도학이 우주적 기에 대한 하나의 강요라면 이지의 비판 역시 하나의 개입이니, 그 역시 하나의 강요가 아닌가?

회의주의가 결국 판단중지에 이르러 현실을 방임하고 말았듯이 이지 역시 마찬가지로 방임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현성파의 근거는 곧 우주와 합일한다는 것에 있는데, 이는 결국 우주적 기의 운동이 되는 대로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수동적 태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이지는 결국 현실을 벗어나 중이 되고 말았다.

이규성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현성파가 주장하는 무차별성과 평등성은 이규성이 철학적으로 추구하던 개방성과 소통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성파에 따르면 그저 우주적 기의 운동이 흘러가는 대로 그것이 발산하고 수렴하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이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거꾸로 현실을 옹호하는 이론이 되어 버린다. 이규성으로서는 이런 현실 방임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규성은 현성파에 대립하는 황종희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없다. 황종희는 현성파와 동일한 형이상학적 전제 즉 기 일원론에 기초해서 전통 질서를 옹호하고자 했는데, 일단 여기서 질서는 하나의 양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주희와 같은 주리론자에게서 보이는 것과 같은 강력함을 발휘할 수 없다. 더구나 이규성 자신이 90년대 초반에 가졌던 평등주의적 성향은 황종희에게서 나타나는 억압적 질서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현성파나 황종희나 모두 양명학적 형이상학에 기초한다. 그것은 하나의 기가 운동하여 전체를 관통한다는 형이상학인데 이런 입장은 황종희처럼 정통 질서를 한정적인 방식으로 옹호하던가 아니면 현성파처럼 비판적이지만, 방임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기 일원론은 이규성이 바라는 대로 소통성의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회를 지향해 나가는 적극적인 힘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개방성과 소통성을 옹호하는 형이상학을 발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90년 중반 그가 기울어졌던 양명학을 떠나게 된다.1 그 후 그는 왕선산의 기 철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규성이 빠졌던 딜레마는 어쩌면 90년대 중반 지식인이 부딪혔던 딜레마와 닮았다. 평등한 사회주의에 관한 관심은 고조되었으나 정작 사회주의 진영은 무너지고 만 그 황당함 앞에 지식인은 당혹에 빠졌는데 이규성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3) – 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3)-황종희 철학의 딜레마

1)

기가 운동하는 두 양태는 물체의 형성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그 가운데 양의 운동은 전진적이며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발산하는 운동이다. 반면 음의 운동은 후퇴하면서 자기를 보존한다. 이것은 수렴하는 운동이다. 이런 과정은 더 구체적으로 사계절의 흐름처럼 네 단계로 전개된다. 그것이 곧 생산, 성장, 성숙, 저장의 단계다.

발산하는 운동은 변화시켜 유행을 낳으며 수렴하는 운동은 보존하니 이를 통해 물체가 생겨난다. 발산은 생겨난 물체를 변화하고 수렴은 다시 물체를 회복하게 하면서 이 운동은 거듭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다. 마치 계절이 오가고 해와 달이 교체하는 것과 같다. 이런 시간적 질서가 곧 이법이다.

이 이법은 자연의 운동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니 이를 곧 자연에 내재하는 질서 즉 ‘천’이라 한다. 질서가 운동에 의해 생겨나지만, 일정한 질서를 자연적으로 따른다는 점에서는 기는 이 운동을 주재한다. 그렇다고 이 기의 질서가 초월적인 것은 아니며, 자연의 운동에 맡겨졌다고 해서 다만 무질서한 것만도 아니다.

“춥고 더움은 자신의 법칙을 잃지 않고 만물은 각기 자신의 질서를 가진다. 평화와 혼란, 가득참과 텅빔, 사라짐과 생겨남, 흥성과 쇠망은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다. 일월성신은 번갈아 운행하면서 그 법도를 상실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어떤 인위적인 흔적을 보지 못하며 다만 자연에 따라 형상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속의 깊고 깊은 곳에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른바 천이란 주재를 말한다.”(황종희, 70)

“유행 가운데 반드시 주재가 있으므로 주재는 유행의 밖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유행에 조리가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관점에서 유행이라 하고 불변의 관점에서 주재라고 한다.”(황종희, 70)

기가 전개하는 운동을 통해 물체가 생성하고 운동의 이법이 성립한다. 이법은 자연 전체의 반복된 흐름일 뿐이므로, 이법은 기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을 내재의 철학이라 한다.

 

2)

기의 이런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여러 가지 자연의 원리를 끌어낸다.

① 이런 기의 운동은 발산과 수렴의 운동을 통해 자연의 다양한 물체를 낳는다. 여기서 다양한 물체는 서로 고립된 단절된 개체는 아니다. 개체를 개체로 유지하는 본질은 없다. 하나의 물체는 운동 속에 있는 한 국면, 양태이며, 개체란 여러 운동이 교차하는 매듭일 뿐이다.

“본체로서 기는 스스로를 확산 전개시키면서 다양의 세계를 생산한다. 다양의 세계는 기의 자기 변양태들이기 때문에 기에 근본하며 독자적 세계로 분리될 수 없다. 본체는 하나이다. 형체와 색깔은 본체의 변양된 사물들의 속성이지 본체가 될 수 없다.”(황종희, 100)

개체의 운동은 전체적으로는 더 큰 운동의 한 양태이며, 이 운동은 인과적 필연성에 따르는 것이 아닌 기 자체의 자발적 운동에 따르니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다. 전체 우주는 하나의 통일된 기의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우주적 기가 물체를 서로 연결하는 운동의 실체다. 그러므로 만유는 서로 개방되어 있고 서로 소통한다.

“이 형질 때문에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막혀 있지만, 본질의 차원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 있어서 전체적으로 하나이다.”(황종희, 101)

이와 같은 우주의 전체 모습은 베르그송이 전개한 우주와 닮았다. 우주의 본체인 엘랑 비탈은 비약적인 도약을 통해 다양한 우주를 전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서로 공감한다. 이 본체가 없는 물체의 우연한 전체 연관의 체계가 우주적 진화의 모습이다.

“모든 물체나 우리의 신체도 무한성에 그 자체로 관여하고 있다. 신체는 그 형태적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무한성에 의해 이미 그리고 본성상 비호되고 있다.”(황종희, 80)

② 이런 변화와 보존은 모두 자연의 이법이며 선과 악이라는 판단은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악이 실체적인 것도 아니고 무가 영원한 것도 아니며 거꾸로 물체도 언젠가는 무너지니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신체와 물체를 억압하고 이법의 도덕을 강조하는 주희의 입장에 비해본다면, 신체와 물체를 인정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현실세계에는 본래적으로 초월적인 선의 결여라는 의미에서의 악의 실체는 없으며, 허무로 부서질 무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황종희, 80)

“그의 생성과 생의의 철학에는 우리의 신체성과 현상적 물체들과의 본래적 적극성과 긍정성을 강조하는 의의가 충분히 있다.”(황종희, 92)

 

3)

하나의 기가 전개하는 운동, 그것의 다양한 운동 양태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황종희의 형이상학에서 자연 물체와 생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응결과 유통이라는 양태가 다시 개입한다. 우주적 기 전체가 응결하여 무겁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자연 사물이 된다. 우주적 기가 약동하여 가볍게 되는 양태에 있을 때 관념이 된다.

“천은 기의 변화 유행을 통해 사람과 사물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한 덩어리의 조화로운 기이다. 사람과 사물은 그것을 품수받으니 곧 인식하고 깨닫는다. 인식하고 깨닫는 능력 가운데 정수가 되는 것은 영민하고 밝아서 사람이 되고 인식하고 깨닫는 것 가운데 거친 것은 혼탁해서 사물이 된다.”(황종희, 99, 재인용)

그러나 황종희에서 이 양태는 하나의 기가 지닌 운동에 불과하니, 기의 운동 상태를 넘어선 기의 실체적 본질은 무엇인가? 마치 베르그송의 엘랑비탈이 관념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고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이미지이듯, 황종희에게서도 기의 본질은 마음인데 이 마음은 단순한 관념이 아닌 심적인 것 즉 관념적인 동시에 신체적인 것이다.

 

4)

마음이 지닌 이런 본체로부터 인식과 도덕에 관한 주장이 도출된다.

① 마음은 가볍고 유동적이므로 관통하는 성질을 지니니 이를 통해 마음은 우주와 합일에 이른다. 이런 합일은 정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일어나는 합일이며(천인합일) 이 합일은 곧 실천적 행동으로 출현한다. 이런 합일을 위해서는 마음의 가볍고 유동적인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지행합일) 즉 마음을 응결시켜 욕정화하는 물질적 운동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도덕적 실천이다(체인).

“왕양명과 황종희에게서도 마음은 실재를 능동적으로 비추는 비춤의 작용을 하는 광명의 존재이다. 그것은 항상 비추고 있는 존재다. 그것은 일종의 지의 힘인데 능동적으로 운동하지 않은 적이 없는 존재 즉 다른 존재에 의해 움직여진 적이 없는 존재로서 비추는 마음이다.”(황종희, 97)

② 이런 마음이 다시 다양한 운동 상태에 있으니 마음이 응결하면 욕정이 되고 마음이 유동하면 사단이 된다. 황종희는 마음의 운동 단계를 생기와 장기, 수기, 장기의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에서 출현하는 마음을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넘어 따로 인간의 본연지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본연지성에 속한다고 말해지는 인의예지는 다만 마음을 오랫동안 지킴으로써 얻은 덕에 해당한다.

“측은한 마음은 운동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생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기쁨에 속하며 슬픈 감상이 아니다. 사양하는 마음은 질서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성징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에 속하고 엄숙이 아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극복의 양태인데 본질의 거두어들이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분노에 속하며 분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비의 마음은 안정의 양태인데 곧 본질의 숨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속하며 분별이 아니다.”(황종희, 158)

“그렇다면, 인의예지는 본질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중용은 성의 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덕이라고 하면 괜찮지만, 성이라고 하면 안 된다. 문자적 의미에서도 낳음과 마음이 합해서 성이 된다. 성이 선하기 때문에 마음이 선하다.”(황종희, 160 재인용)

“우리의 의지가 마음의 본질상에서 투명하게 꿰뚫어 안정 상태가 되면 천기가 욕망을 발하므로 욕망이 다름아닌 천기이다.”(황종희, 177 재인용)

③ 욕정과 사단이 마음의 운동 양태이므로, 욕정조차 버릴 수 없다. 마치 음양이 자연의 기의 운동 양태이어서 그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황종희는 마음이 응결된 상태에서 활발한 유동적 상태로 이행하기를 기대하지만, 응결된 상태 역시 마음의 운동 과정에서 없을 수 없다.

 

5)

이상에서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을 통해 소통성의 근거를 발견하려 했다. 만유가 기의 작용 속에 들어 있으므로 서로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황종희는 이런 기의 일원론 위에서 마음을 통해 우주와 합일하며 이를 통해 실천적 행동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마음이 우주와 합일에 이를 때, 이 상태는 평등하다. 우주적 기의 운동은 두 양태로 전개되며, 마음 역시 네 자기 운동 양태 속에 있다. 각 운동 양태는 운동의 과정상 불가피한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기의 우주적 생명의 리듬에 속한다.

더구나 황종희에서 양의 운동 양태는 전통 유가적 지배 질서를 의미하며, 반면 음의 운동 양태는 이런 이 질서가 무너지고, 내적으로는 이욕이 지배하며 외적으로는 반란이 일어나는 상태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황종희가 자신이 부딪혔던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그가 처했던 현실은 이민족의 지배이며, 지배층으로서 사족이 몰락하던 시기였다. 그는 이런 현실은 기의 운동 상 불가피하게 도래한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그는 지배층의 사족으로서 이런 단계를 지나가면 기의 운동에서 다시 긍정적 현실의 단계가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 희망은 그가 부딪힌 현실을 인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유행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 황종희의 생각이다. 유행은 천리로서의 구심점에로 회귀하는 수렴 운동에 의해 고정된 안정성을 찾아야 한다.”(황종희, 185)

“황종희는 철학사 연구와 대규모 반란에 대한 체험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인지하였다. 그는 유행과 발산의 힘에 대해 다시 주렴계의 주정론에 의거해서 그 힘을 주재와 수렴 쪽으로 휘려고 하였다. 그는 유행의 역동성을 받아들여, 그것을 타고서 그것을 순화지도하는 방향을 선택했다.”(황종희, 186)

그러나 양의 양태가 운동의 한 양태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곧 그 양의 양태의 정당성을 의문시하게 만든다. 모든 양태가 기의 측에서 보면 불가피한 것이니 양의 양태나 음의 양태는 무차별하게 된다.

더구나 황종희에서 양의 양태는 전통적인 유가의 지배 질서를 의미한다. 왜, 유가의 지배 질서가 양의 양태가 되어야 하는가? 오히려 서로 평등한 상태가 또는 욕망이 지배하고 피지배 계급과 이민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 양의 양태가 아닐까? 양의 양태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가 소위 양명 좌파로서 현성파의 지반이 된다.

황종희는 양명 우파로서 앞에서 보았듯이 명의 멸망이 현성파의 무차별성에 기초한다고 보면서 전통적 지배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대했으나, 이상에서 제기된 것과 같이 양의 양태란 상대적인 단계일 뿐이며 더구나 그 양의 양태가 전통적 지배 질서가 아닐 수도 있다. 이규성은 이제 차라리 평등한 세상을 양의 양태로 규정하는 현성파의 논리를 다시 음미하게 된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2) – 주자학과 황종희의 내재철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2)-주자학과 황종희의 내재철학

 

1)

이규성은 서구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려는 형이상학적 혁명에 착수한다. 그는 서구 철학 가운데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의 철학에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이들의 철학이 실재의 본질을 생명의 약동하는 의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서구 철학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거기서 어떤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인데, 그 한계는 앞으로 논증돼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그는 이제 차라리 동양철학의 전통 형이상학에서 무언가 대안을 찾으려 한다. 그가 여기서 특별하게 주목했던 것은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은 그가 쓴 논문을 일별해 볼 때 90년대 걸쳐 여러 송명 이학자들에게 관심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그가 특별하게 주목했던 철학자는 두 사람이니 곧 황종희과 왕선산이다. 그는 이 두 사람에 관해 각기 하나의 책을 헌정했으니, 1994년 쓴 『내재의 철학: 황종희』이며, 2001년 쓴 『생성의 철학: 왕선산』이다.

황종희와 왕선산은 명말 청초의 이학자인데, 양자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차이는 단번에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그런데 이규성은 전자에게는 ‘내재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후자에게는 ‘생성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책을 직접 읽어보면, 어느 책에서나 이규성이 형이상학을 통해 찾으려 했던 자주성과 소통성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보면, 그는 두 책에 걸쳐 그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발견하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전반적으로 보면, 94년 쓰인 황종희의 철학에 대해서는 천인합일, 혼연일체의 소통성이 전체를 지배한다. 반면 2001년 쓰인 왕선산의 철학에서는 물론 자주성과 소통적 연대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한다. 이런 변화는 이규성이 살았던 그 시대의 시대 정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본다.

90년대 초반까지는 시대 정신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때 연대가 주로 논의되었다. 반면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발성이 강조되니, 개인적 자발성과 소통적 연대가 이규성의 철학 속에서 동시에 추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성은 두 철학자의 철학을 규정하는 말로 황종희는 ‘내재의 철학’, 왕선산은 ‘생성의 철학’으로 규정했는데 그 개념이 곧 위의 문제의식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한다. 우선 거슬러 올라가 그가 왜 송명 이학의 창시자라고 할 주자의 철학에 머무르지 못했는가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2)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송명 이학의 형이상학의 근본 축은 곧 이와 기의 관계다. 기는 음양으로 이루어지며, 음양은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한다. 그런 가운데 만물의 이법이 출현하는데, 이때 음양의 동정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기와 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이규성이 보기에 주희에서 음양의 동정은 무질서하고 부단히 운동하는 것이다. 그 자체 속에는 지속성과 통일을 지닌 이법을 발견할 수는 없으므로 외부에서 이법이 주어져야 한다. 이 이법의 원천은 음양 이전에 실재하는 태극에 있다.

주희의 이런 이원론적 관점은 서양철학적으로 본다면, 플라톤의 철학과 흡사한데, 이에 관해서 이규성은 나정암의 주희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기초해서 이규성은 약간 주저하기1는 하지만,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주희는 궁극적으로는 이가 먼저 있은 후에 기가 있다.고 단언하였다. 이가 존재한 후에 기를 생산한다는 이생기[의 입장으로 귀결된다.”(황종희, 75)

“자연의 존재는 이에 의해서 부여된 것으로서 이의 존재 부여 능력이 없이는 소멸되고 말 본래부터 불완전한 존재이다.”(황종희, 77)

이와 같은 주희의 형이상학에서는 비록 주희에서 이미 천인합일의 개념이 나온다고는 하더라도 그 결과는 개방적 소통성의 윤리는 아니다. 주희의 형이상학에서 초월적 이의 지배는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위계적 질서가 나오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운명적으로 불완전성과 악에의 가능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황종희, 78)

 

3)

이규성은 주자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양명학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양명학파 가운데 좌파라고 할 태주 학파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결국 그는 양명학을 계승하면서도 태주학파를 비판하는 황종희의 철학에 이르게 된다.

이규성은 황종희의 철학적 의도나 배경에 관해 왕양명의 제자인 호한의 말을 빌어 온다.

“송의 유학은 분별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주석과 그 해설에 노력하였다. 명의 유학은 총괄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종지를 세웠다. 그러나 명유는 훈고의 지리멸멸을 싫어하여 반드시 종지를 표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그 폐단은 훈고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도라는 것은 천하의 보편적인 도이고 학이란 천하의 보편적인 학이다. 어찌 따로이 종지를 표방할 필요가 있겠는가?”(황종희, 49)

호한의 말을 통해 황종희가 주희나 양명학을 동시에 넘어서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규성은 황종희의 형이상학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황종희에서 이는 기의 운동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기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데, 우선 그에게서 기는 하나의 기이며, 이 기의 양태가 곧 운동과 정지이며 이때 운동하는 상태를 양이라 하고 정지한 상태가 음이 된다.

“하늘과 땅을 관통하고 고금을 꿰뚫어 하나의 기가 아닌 것이 없다. 기는 본래 하나이다. 그러나 가고 오며 닫으며 열고 오르고 내리는 차이가 있기에 나누어져 운동과 정지가 된다. 운동과 정지가 있어서 나누어져 음과 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음양의 운동과 정지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변화하고 어지러이 얽히고 설키지만, 결국 혼란스럽게 되지 않는다. 영원히 이렇게 추웠다고 더워지며 영원히 이렇게 생산하고 성장하며 거두고 저장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변화한다. 이것이 곧 이른바 이이며 이른바 태극이다. 그것이 문란하지 않은 측면에서라 하고 그 궁극성의 측면에서 태극이라 한다.”(황종희 64, 재인용)

황종희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규성은 음양이 일기의 양태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음양이 독자적인 실체인 기가 아니라, 하나의 기가 운동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성은 이를 ‘기의 변양태’(황종희, 66)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기를 황종희는 정명도의 말을 빌어 ‘생의’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약동하는 생명으로서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을 닮은 개념이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1) –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 철학과 생성의 철학(1)- 이규성 철학의 문제의식

 

1)

이규성 선생(이하 이규성) 철학의 본령이 어디 있을까? 이규성이 지은 여러 저서를 읽는 가운데 항상 느꼈던 의문이 바로 이런 질문이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는 단순한 철학 연구자는 아니다. 그는 무언가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기 위해 고투했으니, 그의 글을 읽으면 누구나 이규성 철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철학은 기존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일종의 논평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그 때문에 안타깝게도 그의 철학적 주장은 그가 쓴 글의 맥락에 따라서 제시되었기에 여러 차례 중복되는 발언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겹칠 뿐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그의 철학은 그런 논평 가운데 흩어서 말해졌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을 읽는 가운데 필자에게 든 의문이 그런 주장들 가운데 이규성 철학의 핵심, 본령이라고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2)

일단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시대 상황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여러 글 가운데 아마도 자신의 철학을 위해 체계화를 시도했던 유일한 글이 있다면,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이라는 책 3부 현실과 전망>이라는 글일 것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철학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도래하는 시대의 철학을 제시했는데, 다만 자기의 철학의 출발점과 극복해야 할 철학, 그리고 앞으로 기대하는 철학의 지향점만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최종적 결론 즉 그가 형성하려는 형이상학 자체는 이 글에서 빠져 있다는 점에서 미완성의 글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통해서 그의 철학적 의식만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 글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 그가 처했던 그의 시대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은 그가 철학을 개인적인 선호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대한 극복이라는 과제에 복무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하겠다.

이 글의 목적상 그런 비판을 상세하게 다루는 것은 생략하려 한다. 다만 그는 자기 시대를 외적으로는 서구의 지배 아래 종속되어 있으며, 내적으로는 억압과 불평등으로 가득한 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그가 70년대 이후 종속적 발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는 사정을 안다면, 누구나 시인할 만한 시대 의식일 것이다.

그는 이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실천적 운동에 뛰어든 흔적은 찾기 어렵다. 몇몇 에피소드적 사건1을 제외하면 그는 시대 극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근원적인 실천에 종사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서 이 더 근원적 실천이 바로 철학함이다.

 

3)

이 글은 그의 철학 가운데 그가 형성하려고 했던 형이상학을 찾아보려는 시도인데, 이런 형이상학이 어떤 맥락에서 제시되었는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을 읽어 볼 때 대체로 그의 철학적 정신은 다음과 같이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①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종속적 발전, 억압과 불평등의 근원은 자본의 탐욕과 서구 과학 기술의 지배에 있다고 보며, 이런 자본의 탐욕과 서구 과학 기술은 그 밑바닥에 서구의 전통을 이루는 형이상학 즉 초월적 실재론 또는 객관적 관념론이 존재한다고 본다.

② 그는 이런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 서구 철학 내부에서 일어난 비판적 철학에 주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이다. 하지만, 그는 쇼펜하우어나 베르그송에서도 어떤 한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③ 그가 쓴 논문의 순서만 가지고 보면 그는 동양철학 가운데 80년대 초기에는 주로 맹자나 주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초월적 실재론이나 객관적 관념론의 전통에 부딪히면서 실망한다. 그는 이 시기 대진(1982)이나 유기(1990),  이대조(1990), 정자(1999), 강유위(2003)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④ 80년대 말에서 2000년까지 그는 두 권의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곧 황종희의 내재 철학(1994)이고 왕선산의 생성 철학(2001)이다. 여기서 그는 생성의 세계와 합일(천인합일)하는 가운데 자주성과 소통성에 도달한다는 원리에 이른다. 그에게서 실재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생성하는 세계이며 이는 단순히 실재를 인식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재를 온몸으로 채특하는 실천적 혁명이다.  그는 두 철학자에게서 자신이 발견하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어느 정도 찾은 것으로 보인다.

⑤ 그에게서 실재는 단순한 이론적 세계가 아니라 윤리적 세계이므로 형이상학적 혁명은 곧 윤리적 혁명이 된다. 그는 이런 내적 혁명을 통해 개방성과 소통성을 갖춘 위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실천적 혁명이 가능하다고 본다.(내성외왕의 정신) 그러나 그는 두 철학자가 제시한 윤리는 여전히 봉건적 윤리에 머무른다는 한계 때문에 고민한다.

⑥ 2011년 발표된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에서 그는 생성의 형이상학에서 발굴할 수 있는 저항정신, 시대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신적 혁명,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그는 그의 철학적 고투의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주성과 소통성을 토대로 해서 건설되는 새로운 사회는 공화주의(공화적 소유)에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는 자유 민주주의와 구별되며 그렇다고 사회주의 혁명이나 무정부주의적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⑦ 그 이후 그는 쇼펜하우어에 관한 연구서(2016), 한국현대철학자(2012)이나 중국의 현대철학자(2020)에 대한 논평에 몰두하는데 이는 자신이 발전시킨 철학을 완성하기 위한 선배 철학자를 비판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 그의 철학의 핵심은 형이상학적 혁명에 있다. 그는 이 형이상학적 혁명을 존재가 아닌 생성의 철학에서 발견하며 이 생성의 철학을 통해 자주성과 소통성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지는 사실 앞으로 논증되어야 할 테제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가운데 특히 하나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는데 바로 그가 몰두했던 생성의 형이상학이다.  이규성의 철학의 주춧돌이라고 할 주장 즉 생성의 철학을 통해 내적 개방성과 소통의 연대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성공적이었을까?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바로 그가 제시한 생성의 철학이 어떤 점에서 자주성과 소통성의 근거가 되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에 있다.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3- 헤겔과 베르질리우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3- 헤겔과 베르질리우스

1)

베르질리우스(1779-1848)는 헤겔과 동시대에 살았던 스웨덴 화학자이다. 그의 업적은 많다. 그는 달톤, 라부와지에의 원자가설을 옹호했으며, 엄격한 실험을 통해 많은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 특히 그는 동위원소[isomorphe]나 동소체[isomerische]의 발견으로 유명하다. 그는 오늘날 스웨덴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헤겔은 선택적 친화성을 논하는 실재하는 척도 A절 c항의 주석에서 이 탁월한 화학자 베르질리우스를 맹공하고 있다. 헤겔이 근대 과학자에 대한 비판은 유명하다. 앞에서 미적분을 논하면서 헤겔이 뉴턴을 어떻게 비판했는가를 소개했다. 헤겔에 따르면 뉴턴이 미적분에서 무한 개념이 비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지키지 못하고 다시 무한소 개념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비판했다.

후일, 미적분의 토대를 확립했다고 알려지는 바이어스트라스는 헤겔의 무한 비율 개념이 무한 수학의 토대가 된다고 말했으니, 헤겔이 논리학을 통한 과학의 이해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웨덴의 국가적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베르질리우스를 헤겔이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화학적 결합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베르질리우스는 당대에 볼타가 발견한 전지에 주목했다. 그는 볼타의 방식대로 구리판과 아연판을 쌓아서 전지를 만들어 화학적 실험에 도입했다.

이런 실험 끝에 그는 모든 화학적 결합이 전기력에 의한 것 즉 +전기와 -전기 사이에 작용하는 힘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산과 알칼리의 결합은 예를 들어 H+와 OH-의 결합에서 보듯이 전기력에 의한 견인으로 보이므로 베르질리우스의 주장은 광범위하게 옹호되었다.

그러나 헤겔은 화학적 결합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하려는 베르질리우스의 주장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원자론에 대한 헤겔의 비판과 연결되며 이를 통해 헤겔은 상호 침투라는 개념을 확립하는데, 그는 이를 주석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이제 주석에서 헤겔이 전개하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헤겔의 주장을 이해해보자.

2)

헤겔 당시에 라부와지에의 원자 가설이 확립되었다. 이는 원자량이 일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어서 리터와 피셔는 실험을 통해 물질의 결합에서 원자량은 일정한 비율로 결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예를 들어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물을 만드는 비율은 1:8이다. 여기서 수소의 원자량이 1이고 산소의 원자량은 8인데, 물은 수소와 산소가 2:1의 비율로 결합하니, 그 질량의 비율은 1:8이 될 수밖에 없다. 일반화하면, 원자량 a와 b의 결합은 결합비율 x:y의 비율이 곱해져야 한다. 그러면 결합비율은 a:(b*y/x)가 된다.

베르톨레는 실험적으로 같은 결합에서 질량 비율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소위 동소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결합에서 질량 비율의 차이는 외적인 상황에 의존한다고 생각했지 이를 결합 이율의 일정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보지는 않았다.

“결국 그[베르톨레]는 이런 배제 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사정 예컨대 응집의 강도나 고형화된 염산의 물속에서의 비용해성은 작용 인자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정은 그밖에 또 다른 사정 예컨대 온도를 통해서도 그 작용이 지양될 수 있음을 밝혀 놓았다.”(논리학 재판, GW21, S. 356)

그러므로 이런 외적 상황을 제거한다면, 리터나 피셔가 주장한 대로 물질의 결합에서 질량은 일정한 비율에 따른다고 보았다.

3)

헤겔은 베르톨레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갑자기 베르젤리우스를 끌어들인다. 베르젤리우스는 베르톨레*가 일정 비율의 법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주장했는데, 이는 베르젤리우스가 베르톨래를 곡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 베르질리우스는 1818년 파리에 들러 베르톨레의 실험실을 방문하여 그와 교류했다. 그러나 베르질리우스는 베르톨레의 견해를 비판한 결과 둘 사이는 서먹해졌다.

문제는 화학적 결합에서 일정 비율의 법칙이 아니다. 헤겔이 베르질리우스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화학적 결합에서 일정 비율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원리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화학적 결합은 결합된 원자가 결합하는 다른 원자에 의해 둘러싸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둘러싸인다는 것은 결합하는 원자가 결합된 원자가 지닌 원자 사이의 공간에 끼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사이의 공간에 있다는 것은 결합하는 원자가 결합한 원자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결합은 외면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한다고 본다.

“이 말은 곧 용해된 것이 용해 매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는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용해 매체의 사이 공간은 용해 매체가 비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해된 실에는 용해 매체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비록 그 용해 매체가 그것을 둘러싸고 에워싸고 있든가 아니면 그것에 의해 둘러싸이고 에워싸여 있든 간에 용해 매체 밖에 그러므로 확실히 그 용해 매체에 의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357)

헤겔은 이런 주장을 통해 베르질리우스가 외면적 관계에 머무르는 입자론 철학을 옹호하면서 역동론적 철학을 부정했다고 한다. 역동론적 철학은 화학적 결합을 상호 침투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인데, 이런 역동론은 물체의 결합에서 적어도 일정 부분적으로는 단순히 외면적 결합에 그치지 않고 내적인 통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베르질리우스는 상호 침투에 기초한 역동론적 결합 개념을 받아들이면, 물질의 결합에서 원자량이 보존되고, 그 결합이 항상 일정한 비율에 따른다는 비율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 원자량 보존이나 결합 이율의 법칙은 이런 불면의 원자를 가정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화학적 결합에서 역동론적 개념은 사물의 부분에의 합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사물의 모든 면에서 합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화학적 결합에서 원자량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다만 부피에서 변화가 생겨남으로써 비중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4)

화학적 결합을 이처럼 외면적 결합으로 보면, 이제 화학적 결합을 유지하는 힘이 문제가 된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결합하는 힘을 전기적 힘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미 앞서 말했지만, 산은 + 전기를 띄고 알칼리는 -전기를 띠니, 양자의 결합은 마치 전기적 힘에 의한 결합처럼 보인다. 이를 일반화하면 모든 화학적 결합은 전기력에 의한 결합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베르질리우스는 이런 전기적 힘은 물질의 질량과는 무관한 것이며, 따라서 화학적 결합에서 일어나는 외면적 결합을 설명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더구나 그는 이 화학적 결합이 “다수간의 거리에서 작용하는 것이며 결합 직전의 견인과 결합을 통해 발생하는 연소의 현상을 잘 설명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360)고 본다.

그러나 알다시피 화학적 결합에서 전자가 매개 역할을 하지만, 그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더라도 그 힘이 전기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전자가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궤도로 넘어가는 것에는 다양한 힘이 작용한다. 어떤 에너지라도 전자를 원자로부터 이탈해서 다른 원자의 궤도로 옮겨가게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전기의 힘도 작용할 수 있지만, 자주 화학적 반응에서 열을 가하거나 빛을 비추어서, 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헤겔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화학적 결합으로서 전자 공유를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기적 힘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았는데, 그는 이를 여러 가지 논증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이제 그가 제시한 논증을 열거해 보자.

① 전기적인 결합력은 중화되면 사라지는데 화학적 결합은 지속한다. 그것은 결합 후에도 지속적으로 결합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는 더는 전기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② 전기가 결합의 원인이더라도, 화학적 작용은 결합에 의거하는 것이다. 화학은 물질의 결합 때문에 변화하는 성질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전기력 외에 다른 결합을 일으키는 원인(열에너지나 빛 에너지, 심지어 운동 에너지 등)이 있을 수 있다.

③ 전기는 물체의 외면적 결합(일종의 혼합)을 이루지만, 화학은 질적 변화를 다루는데 그 질적 변화는 외면적 결합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질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내적 연관성이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전제다.

④ 실험적으로 전기력에서는 같은 전기를 지닌 물질이 결합하는 경우가 대립하는 전기를 지닌 물질의 결합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황과 산소의 결합이 산소와 구리의 결합보다 더 강한 예를 들고 있다.

5)

이상 설명했듯이 화학적 결합은 여러 힘으로 일어날 수 있다. 전기나 열, 운동 에너지, 빛 등도 화학적 결합을 일으킨다. 이런 결합을 통해 물질의 상호 침투가 일어나게 되며 그 결과 물질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헤겔은 라브와지에, 리터, 피셔 등이 원자량이 보존되고, 물질의 결합에서 일정 비율의 법칙이 있다는 주장은 올바른 경험 과학의 길이라 한다. 그런데 베르질리우스가 이를 원자론적 철학과 결합하고 다시 전기력을 결합 원인으로 끌어들인 것은 입자론적 철학에 사로잡힌 결과로 주장한다.

“올바른 이상에 이르는 실험적 길이 그런 비율에 그리고 리터 이래로 전면적으로 획득된 확장에 있었다면 그런 짓[베르질리우스의 전기화]을 통해서 이 위대한 발견이 경험의 길 밖에 놓여 있는 소위 입자론의 송가와 뒤섞이는 일이 그 자체로 더 확인된다. 그 출발점에서 경험의 원리를 내던지는 것만이 동기가 되어서 이전에 리터가 특별하게 시작한 착상을 받아들여서 전기적 양의 물체와 전기적 음의 물체의 확고한 질서를 제시해서 화학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가정하게 되었다.”(논리학 재판, GW21, S. 361)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2-선택적 친화성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2-선택적 친화성

1)

앞의 글에서 척도 관계[또는 비례]를 다루었다. 그 대표적 예가 곧 음조다. 도미솔, 레파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외운 음조 즉 장조와 단조다. 도레미파… 각 음이 이미 하나의 척도 즉 두 정량의 비율이다. 이런 척도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관계가 이루어지니, 그것이 곧 장조와 단조다. 헤겔은 이를 척도 관계 또는 비례라고 한다.

척도 관계에서 음조와 구별되는 새로운 관계가 출현한다. 이제 예를 들어 화학적 결합을 보자. 예를 들어 산[H+]와 알칼리[OH-]은 서로 결합하며 물[H₂O]이 된다. 이 결합은 알다시피 전자 공유에 따른 결합이다. 수소와 산소는 그와 동시에 원자가를 지닌다. 그런 원자가는 결합에서는 무관하다.

산소와 수소의 화학적 결합에서 산소와 수소는 원자가에서 일정한 척도를 지닌다. 산소가 16이라면 수소는 1이다. 이제 원자가에서 두 척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데, 물론 이 관계는 전자를 매개로 하는 관계다. 이 관계는 앞에서 말한 음조의 관계와 다른 특징을 지닌다.

2)

예를 들어 장조 즉 도미솔의 관계에서 그 관계는 다만 외적인 관계다. 그것은 그저 동일한 주파수의 배음 관계일 뿐이다. 관계하는 음들은 그 고유성을 잃지 않으며, 다만 같은 주파수의 음이 도미솔 사이에서 배가 된 채로 반복된다는 것 때문에 조화로운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나 화학적 결합은 다르다. 일단 여기서는 이중적 관계가 출현한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에서 그 원자가는 단순한 더하기로 끝난다. 물의 원자가는 결합한 수소와 산소의 무게의 단순한 합산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두 물체는 자신의 척도인 무게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보존된다.

그러나 결합한 물에서 산과 알칼리의 전자 값은 서로 상쇄되어 사라진다. 그것은 양자가 서로 전자들을 공유하면서 자기에게 부족한 전자를 상대방의 전자를 통해 채우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유를 통해 두 결합하는 물체는 자신의 전자 값(즉 이온 상태)을 잃어버리고 중화된다.

산과 알칼리와 같은 결합을 이제 일반화해서 화학적 결합으로 나가보자. 화학적 결합 역시 전자가 공유됨으로써 일어난다. 이런 결합은 일정한 비율로 이루어진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은 2:1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반면 황과 산소의 결합은 1:2의 관계다.

더구나 이런 관계는 단순한 비율 이상으로 배타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수소는 산소와 결합하지만, 황과 결합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런 화학적 결합은 일정한 배타성을 지닌다. 어떤 것끼리는 결합하지만, 다른 것끼리는 결합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화학적 결합은 배타적인 통일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런 배타적 통일은 물체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물체의 다른 측면 즉 원자가의 측면에서 두 물체의 결합은 없다. 그것은 다만 공존할 뿐이다. 이런 물체에서 일어나는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헤겔이 말하는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다. 그러나 선택적 친화성의 결합에서 결합은 물체의 전면에 걸쳐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결합은 물체의 원자와는 무관하게 다만 전자의 측면에서만 일어나는 부분적인 결합이다.

3)

우리는 오늘은 구체적으로 산과 알칼리의 결합, 일반화해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는 이유를 위와 같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것은 원자의 구조가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관계는 전자 공유를 통해 일어난다.

각 원자는 핵 주변에 전자 궤도를 가지고 있고 각 궤도는 일정한 수의 전자가 채우고 있다. 각 궤도에 들어가는 전자의 수는 일정한 데 특히 마지막 궤도에서 전자는 넘치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다른 원자 사이에 서로 전자를 공유하면서 안정된 궤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화학적 결합이다.

그러나 헤겔 당시에는 아직 이런 원자 구조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다만 일정한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화학적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당시 과학의 지식에서 원자 구조니, 전자 공유니 하는 개념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소들이 서로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합에는 일정한 비중의 비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졌다. 헤겔은 이 절의 주에서 이 비율 법칙에 관한 리히터와 베르톨레의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헤겔은 이런 화학적 결합을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설명에서 헤겔은 비중을 가지고 설명하는데 비중은 곧 무게와 부피의 비례다. 각 사물은 이런 비중에서 고유한 척도를 지닌다. 이제 두 사물이 결합하게 되면 이 결합 관계를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비중을 무게A/부피B로 표현하자. 하나의 물체(예를 들어 수소)가 지닌 비중을 a/b 라고 하고 다른 물체(예를 들어 산소)가 지닌 비중을 c/d 라고 한다면, 결합한 물체의 비중은 a+c /b+d 가 된다.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지만, 이때 결합한(물)에서 분자를 이루는 두 물체의 무게는 결합 전과 결합 후가 동일하다. 그러나 비중은 서로 달라진다. 이런 비중의 차이는 곧 부피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결과다.

4)

이런 사실을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비중에서 무게와 같은 것을 내재 존재[Insichsein]라고 한다. 타자와 결합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내재 존재는 플라톤적 이데아 개념에 가깝다. 물체의 무게가 물체의 고유성이라는 생각은 그리스 원자론자로부터 유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받아들인 견해다.

“그러나 다만 무게는 결합 이전에 출현했던 무게의 합으로서 발견된다. 무게에 더해지는 측면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측면으로서 고정된 현존으로 되며 이를 통해 지속하는 직접적 정량을 지니게 되는 측면이다.”(논리학 재판, GW21, 348)

반면 부피와 같은 것은 외면적인 것이자 관념성[Ideelle] 즉 타자와 결합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다.

“두 특정화된 상이한 물질의 혼합에 따라서 더해진 부피에서 변화가 -통상적으로는 축소인데- 제시된다는 사실은 감각적 지각에서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공간 자체는 병존하는 등장하는 물질의 존립을 이룬다. 그러나 대자 존재가 자체 내에 포함하는 부정성에 대립하여 존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가변적인 것이다. 공간은 이런 방식으로 진정한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서 관념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 (논리학 재판, GW21, 348)

여기서 헤겔은 일반적 공간과 비중 속에 있는 공간[부피]을 구분한다. 전자는 병존하는 공간이며 서로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이 경우 두 공간을 합하면, 단순히 더해진 공간만이 나온다. 그러나 후자는 결합하면 가변적으로 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를 관념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비중의 부피는 공간인데 이처럼 가변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여기서 부피는 “대자 존재가 포함하는 부정성에 지배되는[gegen]” 것이기 때문이다. 즉 두 물체의 부피가 대자 존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대자 존재라는 것은 통일하는 힘이다.

헤겔은 비록 아직 이 부피의 변화가 전자 공유의 결과인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상호 침투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상호 침투란 곧 두 물체의 결합에서 각자의 한 부분이 서로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호 침투를 통해 두 물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이 결합하게 된다. 이런 두 물체를 결합하는 관계이므로 이 관계를 헤겔은 대자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화학적 결합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이를 대자 존재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즉 이 결합이 ① 사물의 내재 존재[사물의 이데아]와는 무관한 외면적 측면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 ② 또한 상호 침투의 결과라는 것만은 헤겔이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겠다.

4)

헤겔은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두 물체 사이의 관계에 상호 침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이를 오늘날 전자 공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호 침투가 원자 핵이 아닌 전자 사이의 공유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런 전자 공유를 일으키는 힘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화학적 결합 가운데 산과 알칼리는 +전기와 -전기 힘을 보여주니, 이 결합은 전기적 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 당시에 스웨덴 화학자 베르질리우스가 이로부터 모든 화학적 결합은 전기적 결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에 대해 의문을 표명하며, 이 관계는 설명하기 위해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은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괴테가 문학적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1809년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에서 결혼한 부부가 서로의 친구를 초대함으로써 서로 교차적으로 재결합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그 재결합은 부부였던 남녀가 헤어지고, 이성적이지만 부드러운 여성과 이성적이며 힘이 있는 남자가 서로 결합하고 감성적이지만 열정적 남자와 감성적이지만 우아한 여성이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이런 자연적으로 출현하는 선택적 친화의 관계가 있어서 아무리 제도적 강제를 통해서도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설을 통해 주장했다.

우리는 앞에서 두 대립하는 성질[Eigenschaft]의 상호 작용을 통해 양[Quantiaet]이 생성되는 것을 보았다.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비례 관계인 척도[Mass]가 출현한다. 이제 두 척도의 결합 관계를 통해 상호 침투가 작용하게 된다. 이 상호 침투를 통해 일어나는 결합 관계가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다.

질에서 양으로 이행할 때 두 성질의 통일적 관계를 대자 존재라고 했다. 이제 두 척도 사이의 통일적 결합 관계에서 대자 존재가 다시 출현한다. 물론 아직은 척도의 일면에서 일어나는 통일이며 부분적인 대자 존재가 되겠다. 이것이 선택적 친화성이다. 그러나 마침내 척도의 전면에서 이런 대자 존재적인 통일이 일어나게 되면 본질로 이행하게 된다.

5)

앞에서 헤겔은 화학적인 결합을 두 척도 사이의 선택적 친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이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을 통해 두 물체는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게 된다.

헤겔은 이런 계열이 물체의 한 측면이 대자적인 존재에 의해 결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음정에서 장조와 단조는 동일한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화학적 결합은 상호 침투에 의한 결합이다.

헤겔은 이런 배타적인 통일의 관계를 중화[neutralisieren]라고 한다. 이 중화는 한 측면에서는 단순한 혼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 다른 측면에서는 대자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비중을 지닌 두 물체의 화학적 결합에서 무게는 단순한 혼합이었으나 부피는 대자적인 통일이었다.

이런 중화하는 배타적 통일에 의해 척도의 계열이 성립한다. 예를 들어 산소는 수소와는 2:1의 관계로 결합하고 황과는 1:2의 관계로 결합한다. 수소는 탄소와 1: 3의 관계로 결합한다. 이런 결합 관계는 수소를 단위로 본다면, 산소와 탄소가 각기 1/2, 1/3이라는 비율로 관계한다. 이제 산소를 단위로 본다면, 2개의 수소와 1/2의 황과 결합한다. 이런 비율을 헤겔은 비례 수라고 하며 이런 비례 수는 일련의 계열을 형성한다. 이것이 곧 척도 계열이다.

6)

이런 척도 계열은 특정한 계열이며, 다른 계열에 대해 고유성을 지닌다. 척도 계열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것은 곧 이 척도 계열이 타자 즉 중화를 위해 결합하는 항과의 관계를 통한 것이다. 즉 이 중립화의 관계가 전개된 것이 이 척도 계열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비례 수 계열의 전체 속에 척도의 대자적으로 규정된 존재가 놓여 있다”라고 한다.

이제 척도 계열에서 항들의 관계를 보자. 앞에서 내포량을 규정할 때 그 정도는 비교되는 양을 지닌 다른 타자와 비교되면서 성립했다. 그것은 그저 크고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크고 작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동일한 양적인 측면에서 크고 작은 것이다.

반면 척도 계열에서 항들의 관계는 내포량의 관계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다르다. 내포량이 그 계열에 속하는 항들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 것이라면, 척도 계열에서는 자기 계열과 중화하는 계열에 있는 어떤 것과 관계하여 규정된다.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 산소와 황의 관계에서 척도 계열을 이루는 각 항의 비례 수는 산소를 단위로 해서 수소와 황은 1/2: 2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이런 척도 계열에서 각 항은 서로 독립적이다. 여기서 수소의 비례 지수가 1/2이고 황의 지수가 2라고 하더라도 황이 수소에 비해 더 크거나 작다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비례 수의 크고 작음은 다만 비교되는 단위를 통해서 규정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례 수는 다만 중화의 특정한 규정성을 의미할 뿐이다. 이 점은 수소와 황이 산소를 단위로 하지 않고 다른 원소를 단위로 한다면, 그 비율 즉 비례 지수가 달라진다는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가 중화라고 불렀던 결합은 내포성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그 지수는 본질적으로 척도 규정이며 이를 통해 배타적이다. 수들은 이런 배타적 태도의 측면에서 그 연속성과 상호 융통 가능성을 상실했다. 부정적 성격을 유지하는 것은 크다거나 작다는 것인데, 하나ㄱ의 지수가 다른 지수에 대해갖는 우월성은 이런 크기 규정성에서는 머무르지 않는다.”(논리학 재판, GW21, 353)

7)

양적인 것은 자기를 벗어나 타자 속으로 연속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척도 계열에서 등장하는 양적인 것에서는 이런 이행이 사라진다. 각 항은 다른 항으로 넘어가지 않으며, 자기 고립적인 것이니, 이런 측면에서 각 항은 다른 항에 대한 부정의 부정이다.

각 항은 양적인 것이면서도 이제 양성을 벗어나 질적인 차이를 가지게 된다. 헤겔 논리학은 질에서 시작하여 양적인 것으로 이행했다. 이제 양적인 것은 오랜 여정을 끝내고 척도 계열에 이르러 다시 질적인 것으로 이행하게 됐다.

“이 관계 속에 두 가지 특정화하는 것이 어떤 것 즉 제삼자인 지수에 대해 자기를 특정화하는데, 나아가서 이 관계가 함축하는 것은 일자가 그 속에서 타자로 이행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부정 일반일 뿐만 아니라 양자가 그 속에서 부정적으로 정립된다는 것이며 각자가 그 속에서 서로 무차별하므로 그 부정은 다시 부정된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51)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1-척도 관계로서 음의 장조와 단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 61-척도 관계로서 음의 장조와 단조

1)

헤겔 논리학 존재론 3편 척도 2장의 제목은 ‘실재하는 척도’(초판의 경우 ‘자립적 척도’)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존재론의 경우 헤겔은 재판을 작성하면서 초판의 많은 부분을 뜯어고쳤으나 그래도 대체로 2/3 정도는 초판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초판과 재판을 대응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양자를 비교해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존재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실재하는 척도’ 부분에서 초판과 재판은 너무나 달라서 초판의 다만 몇몇 구절만이 재판에 이용되고 있어서, 양자를 축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행히 초판과 재판의 절 제목은 유사하고 내용도 읽고 또 읽으면 비록 말은 다르지만, 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서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초판과 재판의 비교보다는 헤겔이 사용하는 예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초판과 재판의 내용상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재판

자립적 척도

실재하는 척도

A 자립적 척도의 관계

A 자립적 척도의 관계

1 중화

a 두 척도의 결합

2 중화의 특정화

b 척도 비례의 계열로서 척도

3 선택적 친화성

c 선택적 친화성

B 매듭 선

B 대듭 선

C 무-척도

C 무- 척도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면 ‘자립적 척도’가 ‘실재하는 척도’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A 절에서 중심인 2항에서 초판은 화학적인 ‘중화’가 다루어지며 재판에서는 ‘척도 비례’가 다루어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장의 핵심은 ‘척도 비례’의 개념이며, 그것이 ‘화학적 중화’와 상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학적 중화는 산과 알칼리의 결합을 말한다. 더 넓게 말하자면 대부분 화학적 결합을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헤겔은 이런 화학적 결합의 개념을 척도 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화학적 중화와 연관된다는 사실만을 힌트로 삼아서 이제 척도 관계의 개념부터 이해해 보자.

2)

척도 관계(척도 비례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척도란 앞에서 규정했듯이 두 정량의 비례 관계다. 이 척도의 대표적 예가 비중이다. 사물마다 고유한 척도가 있는데, 어떤 사물의 척도가 다른 사물의 척도를 재는 단위로 사용될 때, 그것이 잣대[Regel]이다.

이런 잣대는 아직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이런 잣대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실재하는 사물 밖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잣대는 구체적 사물이다. 즉 고유한 척도를 지닌 하나의 임의로 선택된 사물이 그런 잣대로 사용된다. 이런 구체적 사물로서 잣대가 특정화하는 척도[spezifische Mass]이다.

이 특정화하는 척도는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온도계는 수은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은의 팽창 정도가 다른 사물의 온도를 재는 척도다. 그런데 이것은 수은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자신의 척도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서 다른 사물의 척도를 특정화한다. 예를 들어 비중병을 사용하여 사물의 비중을 잰다면, 물의 비중은 1이며 철의 비중은 10이며 나무의 비중은 0.1이다(이 숫자는 이해를 위해 상정한 임의적인 수치다) 이런 척도는 정량의 관계를 통해 나름대로 하나의 질을 이루니, 곧 무게/부피는 곧 비중이라는 철이나, 나무의 질을 낳는다.

3)

앞에서 이런 특정화하는 척도가 실재하는 척도로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비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물마다 고유하지만, 모든 사물에서 고정적이다. 철은 부피를 아무리 늘리더라도 그 비중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10이다.

그런데 사물의 온도의 경우 사물마다 고유한 온도 비례를 지니지만, 각 사물의 온도는 비례적으로 증감한다. 철[Fe]의 온도는 급격하게 상승하며 구리[Cu]의 온도는 천천히 상승한다. 이처럼 어떤 척도가 일정한 비례를 통해 증감할 때, 헤겔은 ‘실재하는 척도’ 또는 ‘자립적인 척도’라고 한다. 여기서 척도 비율의 증감은 직선적이라기보다 제곱 함수나 제곱근 함수처럼 곡선적이다.

사실 특정화하는 척도 개념과 실재하는 척도 개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 사물이 척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척도로 다른 사물이 규정될 때 사물마다 고유한 특정화가 이루어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특정화하는 척도에서 두 정량 사이의 비율이 고정되어 있다면(직선 함수), 실재하는 척도에서 그 비율은 가변적(곡선 함수)이다.

“이제부터 다루어지는 실재하는 척도는 우선 어떤 물체의 자립적 척도다. 그것은 다른 물체에 관계하여 이런 관계 속에서 동일한 물체를 특정화하며, 그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립적 물질을 특정화한다. 이런 특정화는 많은 다른 물체 일반에 외면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므로 다른 관계들을 즉 척도에서 다른 관계들을 산출하는 것이며 특정화한 자립성은 직접 비례 속에 머무르지 않으며 오히려 척도의 계열이라고 할 특정화한 규정성으로 이행한다.”

(논리학, 재판, 345-346)

4)

특정화하는 척도에서 실재하는 척도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런 발전을 통해서 출현하는 것이 척도 관계인데, 이제 이 척도 관계가 어떻게 출현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장 끝에서 온도를 통해 실재하는 척도가 설명되었는데, 헤겔은 2장에 들어오면서 실재하는 척도의 예로 흥미로운 예를 소개한다. 그것은 곧 음정이다. 음정은 알다시피 진동하는 현의 길이의 비례로 이루어진다. 도가 어떤 현의 길이라면, 미는 그 현의 1/2에 해당하는 길이며, 솔은 다시 1/4에 해당하는 길이다.(여기서도 숫자는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 때문에 임의적으로 설정했다. 그저 예라고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온도에서 외부 열에너지가 주어지면, 그것에 비례하여 물체의 온도가 증가한다. 온도의 증가는 비례(곡선 함수)에 따른다. 음정에서 도, 미, 솔도 온도처럼 비례하여 상승한다. 이 비례도 함수적으로는 곡선적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실재하는 척도로서 온도와 음정의 차이가 나타난다.

철의 온도가 상승하는 비례와 구리의 온도가 상승하는 비례는 서로 무관하다. 양자의 온도 상승이 그리는 곡선은 중첩되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질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음정의 경우는 다르다. 한편으로 모든 음정은 일정한 현의 길이 비율이다. 이 비율은 비례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비례를 지닌 음정들 사이에는 어떤 특정한 관계가 존재한다.

도, 미, 솔과 같은 음의 결합은 레, 파, 라와 같은 음의 결합과 구분되는 특정한 관계를 이룬다. 이 특정한 관계는 고유한 질적 차이를 낳는다. 전자는 장조이며 후자는 단조이다. 이처럼 장조와 단조로 구분되는 특정한 관계가 곧 척도의 관계이다. 간단히 말해서 척도 관계는 여러 사물을 일정한 척도로 비교했을 때 그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관계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5)

두 정량의 관계가 척도다. 다시 이런 척도들 사이의 관계가 바로 척도 관계다. 이제 두 척도가 어떤 특정한 관계를 이룰 때 그 관계를 구성하는 요인들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두 척도의 관계를 다루면서 헤겔은 비유의 무대를 화학의 관계 즉 산과 알칼리의 결합이나 화학적 결합과 같은 관계로 변경한다.

이런 척도들 사이의 일정한 관계는 화학적인 결합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음정에서는 그저 장조와 단조의 관계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화학적 결합은 더욱 특정한 관계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수소는 산소 2:1의 관계로 결합한다. 수소와 탄소는 1:3의 관계로 결합한다. 황과 산소는 1:2의 관계다. 반면, 철과 구리는 매개 없이는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척도 사이에서 화학적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0-실재하는 척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0-실재하는 척도

1)

잣대는 어떤 정량을 측정하는 단위다. 어떤 사물의 정량은 그 잣대로 측정된 특정화된 정량 즉 개수이다. 잣대나 사물은 양적 관계 외에 각기 고유한 질적인 측면을 가진다.

“정량은 그 이중적 존재 속에서 외적인 것이며, 동시에 특정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며, 구별된 양적인 것 각각은 이런 이중적 규정을 그 자신에서 갖고 동시에 단적으로 타자와 교차되어 있다. 질적인 것들은 오직 그 속에서만 규정된다. 이 질적인 것들은 서로에 대해 존재하는 현존 일반일 뿐만 아니라 분리될 수 없이 정립되어 있고 그런 질적인 것에 묶여 있는 크기 규정은 질적인 총수[Einheit]다. 즉 이런 질적인 것들이 개념상 본래 연관되어 있는 척도 규정이다. 따라서 척도는 두 질적인 것의 내재적 양적 상호 관계다.”

잣대와 사물의 정량 사이의 양적 관계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제 헤겔은 잣대나 사물이 양적 측면 외에 질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이 양적인 관계의 측면과 질적인 측면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앞에서 두 잣대를 비교했다. 하나는 비중(무게/부피)과 같은 잣대이고 다른 하나는 온도(열에너지/물체의 부피)와 같은 잣대다. 둘 다 두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잣대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각 잣대는 두 정량의 비례이지만, 비중의 경우, 어느 사물에서나 두 정량은 동일한 비례 관계에 있다. 어느 사물에서나 부피가 늘면 일정하게 무게도 증가한다.

그러나 온도의 경우, 두 정량의 관계는 비례하지만, 그 비례지수는 사물마다 각기 다른데, 예를 들어 동일한 열에너지에 대해 철 온도가 돌 온도보다 몇 배 빨리 증감한다. 철은 빨리 뜨거워졌다가 빨리 식는다면, 돌은 천천히 뜨거워지며 천천히 식는다. 헤겔은 온도와 같은 잣대가 지닌 이런 특징을 일러서 “특정화하는 척도”라고 한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단순한 척도 즉 잣대와 달리 사물마다 다르게 작동한다. 단순한 잣대 예를 들어 비중은 물체에 대해 외적, 무차별이지만, 특정화하는 척도 즉 온도는 물체에 내적인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2)

내적인 연관은 발전한다. 온도만 해도 두 정량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직접 비례 또는 정비례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이런 직접 비례가 반비례를 거쳐 제곱에 이르게 되면, 그 관계는 더욱 밀접해진다.

기체의 압력과 부피는 서로 반비례한다. 그것은 압력과 부피가 동일한 분자 운동 에너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압력과 부피는 밀접한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제 제곱 비례하는 경우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전기에너지는 전류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렇게 제곱의 관계나 비례에 있을 때, 헤겔은 그 관계를 통약할 수 없는 비례라고 한다. 제곱 관계는 앞에서 개별 정량을 다룰 때 이미 등장했다. 그때 거리의 제곱은 곧 면적이라는 명제가 다루어졌는데, 여기서 보듯이 하나의 질은 자기를 양적으로 제곱함으로써 새로운 질이 출현한다.

그러나 거리로부터 면적으로 새로운 질이 생성한다 할 때, 거리나 면적은 모두 공간의 일부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질적 생성은 아니었다. 그것은 같은 정량이 좌표상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척도에서도 양적인 제곱의 관계가 다시 출현한다. 그러나 지금 다루어지는 관계에서 예를 들어 속도가 제곱해서 운동에너지를 낳는다고 할 때 양적인 제곱 관계에서는 서로 다른 새로운 질이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서로 무관한 독자적인 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질’의 생성이라는 측면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질적 존재가 관계한다. 그 관계는 양적인 제곱 관계이다. 예를 들어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이다. 그중 하나[속도]는 그 자체로 규정된 양이며 단위다. 다른 것[운동에너지]은 그 단위에 의해 특정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정량이며 그 개수이다.

이런 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각각은 이런 양적 관계 바깥에 독자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운동에너지이며 다른 하나는 속도다. 여기서 운동에너지의 질적인 측면과 속도의 질적인 측면은 서로 무관하다. 어떤 현존(속도든, 운동에너지든) 양적 측면은 질적인 측면과 무차별하다. 양적 측면에서 서로 관계한다. 그런 점에서 양자에는 동일성이 존재한다. 반면 질적인 측면은 서로 무관계하다. 양자는 전적으로 다른 질적 성격을 지닌다. 서로 관계하는 양적인 측면은 무차별한 질적인 측면에 대해 외적이며 양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관계를 맺는 현존 즉 질과 그 현존의 상호 양적 관계가 서로 무관하니, 이 관계를 통해 새로운 질이 생성되었다고 말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곱 관계가 새로운 질을 생성한다고 할 때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제곱 관계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만, 한계가 있다. 길이가 면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 차원을 확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속도가 운동에너지로 확장한다고 할 때 그 질적 생성은 사실, 그 질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마치 동일한 것이 모양만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속도는 운동에너지의 미분적인 힘이다. 어떤 한순간 지닌 운동에너지가 속도이며 이 운동에너지를 일정 시간에 걸쳐 적분하면 운동에너지가 나온다. 이런 점에서 운동에너지와 속도는 서로 동일한 것이다. 서로 동일한 것이 다만 한순간이냐 그것이 쌓여서 나타나느냐 하는 차이가 질적인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3)

비중은 물체와 무관하다. 그리고 온도의 전달은 물체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상당히 외면적이다. 나아가 운동에너지는 속도뿐만 아니라 물체의 무게와도 관계하므로 물체에 더욱 내면적이다. 양적 관계가 물체의 질적 현존에 대해 내면화되는 과정을 헤겔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설명한다.

헤겔은 두 질적 존재 사이의 양적 관계가 점차 고도화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속도는 시간에 직접 비례한다[V=aT). 여기서는 두 정량은 단순 비례의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낙하 법칙에서 거리는 시간에 대해 제곱 비례한다[S=1/2gT²]. 좀 더 발전하면 천체 운동에서 공전 속도의 제곱은 장 직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T² ⍶ a³ ]

헤겔은 속도와 같은 등속도 운동을 부자유 운동, 낙하 법칙과 같은 가속도 운동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라 하며, 마지막으로 천체 운동과 같은 것을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라 하는데, 그 까닭은 직접 비례에서 제곱 비례로, 나아가서 삼 제곱 비례로 발전하면서 운동이 물체 자체에 내재하는 운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침내 천체 운동에 이르면 이는 이제 개념 운동에 개념이 자기 자신을 구별하여 다시 복귀하는 운동에 다가간다. 이제 천체 운동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개념’은 곧 양자의 관계를 이루는 비례지수다. 즉 a³/T²이다. 이 지수가 자기를 분화하며 다시 통일한다. 그런 가운데 천체 운동 궤적 위에 모든 점이 형성된다. 그 점들은 비례지수라는 ‘개념’의 특정한 ‘현존’에 지나지 않는다.

천체 운동을 위에서 개념의 현존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직 천체 운동을 개념과 현존의 관계로 규정할 수 없다. 개념과 현존의 관계는 논리학 개념론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그 이전에 본질론에서는 유사한 관계가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지금 이 관계는 아직 본질과 현상의 관계라고도 할 수 없다. 이 관계는 다만 대자 존재와 일자의 관계다. 질적 범주에서 이미 대자 존재와 일자가 출현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자 존재는 질적 대자 존재와는 구별된 양적 대자 존재라고 보아야 한다.

4)

이미 설명했듯이 헤겔은 이 관계에서 양적 관계는 처음에는 두 질적 존재에 대해 무차별했다. 구체적으로 비중은 물체의 질적 측면에 대해 무차별하다. 그러나 양적 측면과 질적 측면 사이에서 연관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열에너지는 사물마다 다르게 전달된다. 각 사물에는 열이 전달되는 고유한 척도가 있다. 이렇게 사물마다 달라지는 척도가 곧 특정화된 척도다.

직접적 척도는 다만 어떤 정량이며, 사실 질적인 것을 자기에 부착하고 있는 하나의 개별적 정량 일반이다. 선행하는 규정인 척도는 단순한 외면적인 정량을 질적인 것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특정화하는 척도 속에서는 두 가지 크기 규정성의 구별이 정립되며 이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외적 정량에서 다수의 척도가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337)

마침내 두 질적 존재 사이의 양적 관계가 직접 비례, 반비례, 제곱 비례로 발전하면서, 두 질적 존재의 양적 관계의 측면은 각각의 질적 측면과 더 긴밀하게 통일을 이루게 된다. 마침내 두 질적 현존 사이에 천체 운동의 법칙과 같은 관계가 출현한다. 이 천체 운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듯이 두 질적 현존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두 현존의 양적 관계는 두 질적 현존에 내재하게 되며, 이를 통해 자유로운 관계가 출현하게 된다.

이 자유로운 관계에서 두 현존의 양적 비례지수가 개념이 된다. 이 개념을 헤겔은 부정적 통일성이라 하며, 관계를 맺는 두 측면은 즉 질적 현존은 이 개념의 자기 구별에 해당한다. 이 개념은 이제 완전한 자립성을 획득하며, 자기를 이중화하면서 두 현존이 된다.

처음에 직접 비례적인 양적 관계는 질적 현존에 대해 무차별한 관계다. 이때 질적 현존은 그 양적 관계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운동에 이르면, 양적 관계는 질적 현존에 내재화하면서 이제 더는 양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것은 이미 통약 불가능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질적 현존의 양적 관계를 넘어서 질적인 것 자체의 관계가 출현한다. 순전히 질적인 것들 사이에 어떤 상호 연관을 헤겔은 실재화된 척도라고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화성의 관계다.

“그러나 좀 더 발전된 규정을 이루는 것은 척도가 이제 이런 방식으로 실재화된다는 사실이며, 그 두 측면이 하나는 직접적이며 외면적인 척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내에서 특정화된 척도라는 점에서 구별되는 척도라는 사실이다. 이런 통일로서 척도가 이루는 관계 속에서 크기는 질적인 것의 본성을 통해 규정되고 상이하게 정립되며, 따라서 그 관계 규정성은 전적으로 내재하며 자립적이고 동시에 직접적 양을 구성하는 대자 존재 속으로, 직접 비례를 구성하는 지수 속으로 몰락하고 만다.”(논리학 재판, GW21, 462)

“부정적 통일성이 곧 실재적인 대자 존재이며 어떤 것의 범주 즉 척도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질의 통일로서 존재한다. 이는 완전한 자립성이다. 두 가지 상이한 비례로 발생한 이 두 가지 질은 직접적으로는 이중화된 현존을 제공한다.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그와 같은 자립적 전체는 대자 존재하는 것 일반으로서 구별된 자립적인 것으로 반발하는 것이며 그것의 질적 본성과 존립(물질성)은 척도의 규정성 속에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44)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59-척도의 종류: 비중과 온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59-척도의 종류: 비중과 온도

1)

정량은 외연량, 내포량, 제곱 양을 거쳐 척도에 이른다. 이상에서는 하나의 정량이 다루어졌다. 제곱 양에서 두 정량이 관계하지만, 아직은 하나의 정량이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두 정량이 서로 관계하면서 척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부피와 무게가 서로 관계하는 것으로서 비중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정량은 개별적 사물에 속하지만, 척도는 여러 사물에 공통으로 속하며 그런 점에서 특수성[Besonderheit]을 지닌 정량이 된다. 이 척도는 어떤 사물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것 즉 특정[sdpezifisch] 양이 된다. 그러나 아직 이 고유성은 주관적인 것에 지닐 뿐이니, 이제 논리학의 운동은 객관적으로 고유한 것 즉 본질 또는 이데아에 이르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런 운동에서 핵심은 앞으로 서술되겠지만, 이해의 단서를 위해 미리 제시하자면, 사물에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척도가 그 사물에 필연적인 척도로 이행하는 과정이며, 이런 이행은 동시에 개별 사물의 부수적 속성에 그치는 척도가 독자적으로 실재하는 척도가 되는 과정이다.

헤겔은 이런 운동을 마치 논리적 범주 자체가 자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서술했지만, 이는 서술의 문제이며 사실 이 운동의 바닥에는 경험의 발전이 놓여 있다. 그런 경험의 발전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정신현상학에서 이 운동은 지각에서 지성으로 발전하는 운동이며, 역사적으로는 그리스 철학에서 소피스트를 넘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등장하는 시기다.

여기서는 그런 경험의 발전에 관한 정신현상학의 설명은 전제로 할 뿐,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만 이를 전제로 하여 논리적 범주의 운동으로만 서술하자.

2)

앞의 글에서 사물의 척도를 논의했을 때는 척도의 개념은 추상적이었다. 이 척도는 각 사물의 특정량으로 다루어졌다. 이런 척도가 상호 비교될 때 비교의 기준이 되는 것이 표준이다.

예를 들어 물의 비중을 기준으로 하면, 철의 비중은 물보다 크고, 나무의 비중은 물보다 작다. 이런 비중은 물의 비중을 표준으로 하여 비교된 값이므로, 앞에서 다룬 내포량에 해당한다. 물론, 앞서 설명된 내포량은 개별 정량에 관한 설명에서 제시된 범주지만, 이제는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새로운 정량 즉 특수 양에 적용된 것이다.

어떤 것의 표준[Massstab]이 되는 것은 이제 사물의 잣대[Regel]이 된다. 표준은 다만 비교를 위한 기준점에 불과하다. 표준은 다만 크고 작은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철을 물속에 빠뜨리면 가라앉으니, 철의 비중은 물보다 크지만, 나무는 물 위에 뜨니까 물보다 그 비중이 작다.

이처럼 단순히 비교를 통해 아는 것과 달리 잣대가 되면 사물의 척도는 이 잣대의 크기를 통해 산술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단순히 비교의 기준이 된다고 해서 다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철이나 나무도 표준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이 잣대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잣대가 되는 것은 단순히 크고 작다는 비교를 넘어서 다른 것을 규정하는 수적 단위가 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비중의 잣대가 어떻게 규정되는지는 모르지만, 비중을 재는 저울이 있다고 한다. 비중병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모른다. 비중을 재는 비중계를 쓰면, 사물의 비중은 수적으로 증가하는 일정한 크기로 측정될 수 있다.

이 비중병으로 재면 철의 비중은 10이 되고 나무의 비중은 0.1이 된다(예이니까 구체적 수치의 오류에 괘념하지 말자). 0.1에서 10으로 전개되는 이 수적 크기는 하나의 정량을 규정되는 외연량이지만, 이제 여기서 이 잣대는 앞서 설명한 단순한 외연량에 그치지 않고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양에 적용된 범주다.

3)

이 잣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의 관점은 잣대의 양적인 크기에 관한 관점이다. 이 점에서 잣대는 이중성을 지닌다. 이 저울에서 크기는 수적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점진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양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저울은 단순히 무게를 재는 저울과는 다르다. 그것은 비중병을 이용한 저울이니 그 자체 무게와 부피의 관계로 이루어진 특별한 저울이다. 이런 관점에서 비중병은 질적인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즉 비중병이라는 잣대로 다른 사물의 비중을 재는 관점에 보자면, 비중병은 다른 사물의 척도를 재는 단위[Einheit]가 되며, 다른 사물의 척도는 그런 단위를 통해 재어진 결과 얻어지는 양적 크기 즉 개수[Anzahl]가 된다. 전자의 관점에서 비중병은 그 자체로 규정된 크기이며, 후자의 관점에서 크기는 특정한 크기다.

“이민 언급된 것과 같이 잣대나 표준은 그 자체에서 규정된 크기로 존재한다. 그런 규정된 크기는 단위가 되면서 특수하게 현존하는 사물이 지닌 정량에 대립한다. 그 사물의 정량은 잣대가 되는 것이라고 할 다른 것 곁에[an] 현존하고 그 잣대에서[an] 측정되면서 그런 단위의 개수로서 규정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33)

“이런 비교는 외적인 활동이며 그 단위는 그 자체 임의적 크기이며 마찬가지로 다시 어떤 개수로서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보폭은 일정한 수의 뺨이다) 그러나 [비교의] 척도는 다만 외적인 잣대는 아니며 오히려 어떤 정량을 지닌 타자에 대해 그 자체에서 관계하는 특정한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33)

어떤 사물을 잣대로 측정하면 일정한 개수가 나온다. 앞의 예에서 물로 만든 비중계로 측정하면 철은 10이 나오고 나무는 0.1 나온다. 이 비례지수가 각 사물을 규정하는 사물의 척도가 된다.

여기서 어떤 사물이 잣대가 된다고 할 때 그것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단위가 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고유한 양적 크기를 가진다. 물을 표준으로 삼지 않고 나무를 표준으로 삼는 비중 잣대(비중계)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나무 비중계는 물 비중계(현재 사용되는 비중병)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거리를 측정할 때 자로 재든, 미터로 재든 마찬가지인 것과 같고, 은이 화폐로 사용되든, 금이 화폐로 사용되든 마찬가지였던 것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총수를 지닌 것이 하나의 단위로 사용되는가는 자의적인 것(또는 관습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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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척도와 표준과 잣대의 관계가 설명되었다. 유사한 말이지만, 헤겔은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이해된다. 사물의 비례 양을 추상적으로 말하면 척도다. 그 척도가 다른 것과 비교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표준이다. 이 표준이 되면서 외적인 양적 크기로 다른 사물의 척도를 기술해 주는 것이 잣대다. 앞에서 등 비중을 예로 든다면, 비중 자체는 척도이며, 비중을 재는 표준은 물이다. 그리고 이 표준을 이용하는 비중계(소위 비중병)가 잣대다.

이제 척도(동시에 표준과 잣대)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보도록 하자. 이제 다시 관점을 바꾸어서 척도를 이루는 두 요소 즉 두 서로 다른 정량 사이의 관계를 보자. 두 요소 사이 관계는 척도에 따라서 다르다. 우선 예를 들어 비중의 경우를 보자.

비중의 경우 모든 사물의 비중의 기울기는 같다. 부피가 증가하면 무게도 같은 만큼 증가한다. 그러나 온도의 경우는 다르다. 열량과 물체의 온도 사이의 관계는 사물마다 다르다. 어떤 물체는 동일한 열량이 전달되고 다른 물체는 느리게 전달된다. 물체마다 고유한 매체적 성질이 열량을 전달하는 데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열과 물체의 매체 사이에 어떤 내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외적으로 표상된 온도가 특정한 사물의 온도와 맺는 관계는 고정된 비례지수를 갖지 않는다. 사물에서 현존하는 열의 증가와 감소는 외적인 온도의 증가와 감소와 동양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외적인 열기가 가로로서 다른 것이 세로로서 표상된다면, 전자가 동양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후자의 상응하는 변화를 통해서 곡선이 기술될 수 있다.”(논리학 초판, GW11, 197)

“온도는 그 온도 속에 처해 있는 상이한 특수한 사물에 의해 상이하게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이 사물들은 그것에 내재하는 척도를 통해서 외면적으로 수용되는 온도를 규정하며 그런 사물의 온도 변화는 매체의 온도 변화에 상응하지 않으며 다시 말해 그 매체의 온도 변화에 서로 직접 비례 관계 속에서 상응하지 않는다. 여러 사물은 동일한 온도 속에서 비교되면 특정화된 열이나 열용량 비례 수를 준다. 그러나 이런 사물의 열용량은 상이한 온도 속에서 변화되니 특정한 형태의 변화가 등장하는 것은 이 상이한 온도와 결합돼 있다.”(논리학 초판, GW11, 197)

이렇게 비중과 온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비중과 온도가 다 같이 척도이지만, 그 척도가 사물 자체와 맺고 있는 관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중은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지만, 온도는 사물에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게 척도가 사물에 대해 내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그런 척도가 이제 실재하는 척도 또는 특정화하는 척도[spezifische Mass]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