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2-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물방울 논쟁[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2-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물방울 논쟁
1)
앞에서 형식적으로 본질론의 운동이 반성 운동이라는 점을 서술했다. 이제 본질론에서 다루는 개념들이 내용적으로 반성 개념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서는 반성 개념에 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반성 개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반성 개념으로 ‘아버지와 아들’, ‘학교와 공장’, ‘민중과 지도자’, ‘왼손과 오른손’, ‘아래와 위’ 등과 같은 개념들을 들고 있다. 이런 개념들은 흔히 짝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라 하는데, 여기서 짝을 이룬다는 것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서로 대립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개념들은 그중 하나를 규정하기 위해 반드시 이와 짝을 이루는 다른 것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왼쪽은 오른쪽이 아닌 것이며 오른쪽은 왼쪽이 아닌 것이다. 지도자는 민중의 지도자이고 민중은 지도자의 민중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아버지며,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반성적인 규정성은 사물을 고립적으로 본다면, 발견될 수 없는 규정성이다. 왼쪽에 있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살펴보아도 거기에 왼쪽이라는 성질을 발견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왼쪽에 있지만, 또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는 오른쪽에 있다. 아들이 없이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아버지 없이 아들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반성적 규정성은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관계해서 볼 때만 비로소 생겨나는 규정성이다.
어떻게 본다면 모든 성질은 관계 속에 있다. 관계 속에 나타나지 않은 성질은 없다는 점에서,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반성 규정이 직접 발견되는 성질에 우선하고 그 근거가 된다. 심지어 본질주의적 인식론에서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직관적으로 인식된다고 보는 많은 개념조차 따져보면 이런 대립적 관계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은 없다.
자주 가장 구체적인 감각적 질로 여겨지는 빨간색을 보더라도, 이는 이미 파란색이나 노란색에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감각적 성질들조차 지시를 통해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분석철학자 콰인이 지시의 불확정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2)
논리학에서는 이런 반성 개념 가운데 판단 형식에 속하는 범주적인 것만을 다룬다. 그런 범주의 구체적인 예로서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네 가지를 거론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형식과 내용, 내면과 외면 등과 같은 개념인데 이런 반성 개념은 칸트가 다루면서 비로소 철학적인 논의의 영역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칸트 이전 로크가 반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를 외적 경험과 구별되는 내적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할 뿐이었다. 즉 감정이나 어떤 지각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을 로크는 반성이라 했는데 이는 외적 지각과 마찬가지로 직관적인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이기에 외적 경험과 개념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나 로크는 이미 반성 개념에 관한 그와 다른 유래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유래는 외적 지각이든 내적 반성이든 일정한 관념들을 서로 비교할 때다. 이런 비교는 마음의 능동적 활동에 속하며 이런 비교를 통해 우리는 관념들이 서로 동일하다든가 차이가 있다라고 말한다.
로크는 이를 ‘논리적 반성 개념’이라고 했는데, 이 논리적 반성 개념은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유명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그의 선험주의를 옹호하려 했다. 논란의 출발점은 라이프니츠가 제시한 동일성의 원리 때문이다.
이 동일성의 원리는 마음의 능동적인 활동 즉 비교를 통해서 사물에 적용된다. 즉 이런 비교를 통해서 비교된 대상이 서로 동일한지 차이가 있는지가 규정된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두 사물의 모든 성질이 동일할 경우 두 사물은 하나일 뿐이라는 원리를 제시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두 물방울이나 두 나뭇잎을 예로 들면서 성질이 동일하더라도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존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은 ‘현존’이라는 개념이다. 라이프니츠는 현존[Dasein]을-이는 곧 공간적 존재[Da-Sein]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성질로 간주하였으므로, 이조차 같으면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반면 칸트는 현존은 경험을 통해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이는 사물의 성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성질에서 배제했으니, 다른 성질이 다 동일하더라도 공간적 존재가 다를 수 있으니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틀렸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사물의 성질과 공간적 현존은 주어지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성질은 지성의 범주에 귀속하는 것이며, 공간적 현존은 감성의 형식에 귀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을 성질에 적용하는 경우와 공간적 현존에 적용하는 것은 구별된다. 즉 성질은 동일하더라도 현존은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공간이 선험적 수용 형식이라고 보았으니, 공간을 주관화하게 된다. 그러면 사물 자체에는 공간적 현존이 있는가 없는가? 사물 자체는 공간적 현존이 없는데 주관의 공간적 형식 속에 수용하면서 공간적 현존이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사물 자체는 공간적 현존성을 지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주관의 감성인가?
칸트로서는 주관의 형식 이전의 사물 자체는 알 수 없으므로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어느 입장에 서든가 칸트는 라이프니츠에 대해 불리한 처지에 빠진다. 즉 자가당착에 빠진다는 말이다.
사물에는 공간성이 없다면, 공간적 현존은 사물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을 지나가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 칸트가 말한 두 물방울의 현존이나 두 나뭇잎의 현존은 주관적 차이에 불과하니, 사물 자체는 라이프니츠의 주장과 같이 성질이 동일하다면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사물에 공간적 현존이 있고 그것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 그 역시 다시 라이프니츠의 주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공간적 현존이 사물의 성질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질이 동일하다 할 때는 공간적 현존조차 동일하게 되니, 여기서도 역시 오직 하나의 사물만이 있게 된다.
4)
그런데 칸트의 라이프니츠 비판을 통해 헤겔에서 반성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시 라이프니츠가 틀렸고 칸트가 옳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동일한 성질이더라도 그것이 성질로서 여겨질 수도 있고 공간적 현존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고투가 필요하다.
칸트의 라이프니츠 비판의 전제가 된 것은 성질과 현존의 구별이다. 전자는 지성에 속하고 후자는 감성에 속한다. 그러나 공간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공간의 개념이 문제가 된다.
공간이란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것처럼 사물의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성질처럼 범주 개념이 구성하는 판단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공간의 질과 공간의 양을 논할 수 없다. 모든 공간은 규정성이 없는 것 즉 빈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공간 개념을 주관화하여 공간을 다만 감성의 형식이 만들어내는 산물로 보면, 사물 자체는 공간적 차이가 없으니 이 사물들은 마치 꿈속 부유하는 것이고 서로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헤겔은 공간을 사물이 맺는 비교의 관계로 본다. 사물은 여러 성질을 지니고 이런 성질에 따라 다른 사물과 비교된다. 이렇게 다른 사물과 어떤 성질의 측면에서 비교될 때 이 비교 관계가 공간을 이룬다. 즉 어떤 사물은 이 공간에 어떤 위치에 현존한다. 그 위치란 곧 그 공간 속의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의 사물은 여러 성질을 지니므로 그 성질에 따라 ① 여러 공간 속에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소금은 맛의 공간에 들어 있거나 색깔의 공간에 들어 있다. 각 공간은 사물의 어떤 색깔이나 소리와 같은 성질이 이루는 것이므로 고유하게 어떤 질을 지니지만, 이 공간을 사물이 비교되는 측면에서 본다면 동질적이고 ② 그 동질성 외 다른 측면에서는 아무 차이도 없는 무규정성을 지닌다.
이 관계하는 공간 밖에서 사물은 공간의 질적 성격과 구분되는 ③ 다른 독자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으니 이를 공간적 현존과 구별되는 성질이라 한다. 이 성질은 그 공간에 들어 있는 사물마다 다른 성질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간은 구체적이다. 즉 공간은 사물의 특정한 성질에서 서로 맺는 관계이니, 독자적인 질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들어가는 사물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 공간은 개별적이다. 화학의 공간이 있다면 생물의 공간이 있고 사회적 공간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물이 모두 하나의 물체로서 속하는 아주 추상적이며 포괄적인 공간 흔히 자연 과학의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공간을 이처럼 관계로 본다면, 사물의 성질에 적용되는 지성의 범주와 구별되는 공간적 현존에 적용되는 범주를 생각할 수 있으니 그 후자가 곧 반성 개념이다.
라이프니츠와 칸트는 사물의 현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성질에 대해서도 반성 개념을 사용했다. 즉 성질이 동일하거나 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색깔이 동일하고 두 소리가 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성질에 대해 반성 개념을 사용할 때 이는 사실 성질을 성질로 이해하기보다 하나의 공간적 관계 속에 있는 현존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사과와 장미를 빨간색의 사물로 보면, 여기서 두 물체는 다른 성질에서는 다르지만, 색깔이라는 공간적 현존에서는 동일하다. 또는 거꾸로 빨간 사과와 파란 사과를 색깔에서 비교해 보면 두 물체는 색깔에서 서로 다른 공간적 현존이 된다.
어떤 성질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니, 동일한 성질이 비교의 대상이 될 때는 공간적 현존에 속하며, 그렇지 않고 다른 성질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이는 사물에 속하는 하나의 성질로 된다.
이와 같은 서로 관계 맺는 공간이 없다면, 두 물체는 서로 동일한지 차이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빨간색과 G음은 같은가 다른가? 코끼리와 수3은 같은가 다른가?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있으므로 거기서 반성 개념이 적용된다.
나아가서 서로 관계 맺는 공간이 달라진다면, 동일한 물체의 동일성과 차이도 달라진다. 신호등의 체계에서 주황색은 빨간색과 같고 녹색은 파란색과 같다. 그러나 무지개색의 체계에서 주황색과 빨간색, 녹색과 파란색은 서로 다른 색깔이다.
6)
그렇다면, 어떤 성질이 비교의 관계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공간은 달라지고, 공간적 현존에서 동일하거나 달라지니, 이런 관점에서는 칸트의 주장이 옳게 된다. 즉 다른 모든 성질이 동일하더라도, 그것이 처한 공간적 현존(비교되는 성질의 관계에 따라)이 다르면, 두 개의 사물이 있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현존을 성질과 구분하는 것이 칸트의 핵심인데, 현존을 성질에 집어넣거나 아니면 현존을 성질과 완전히 분리한다면,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옳게 되며, 동일한 성질이더라도 성질로 언급될 때와 현존으로 언급될 때를 구분한다면, 칸트의 주장이 옳게 된다.
중요한 것은 칸트와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아니라, 반성 개념이 공간적 현존에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반성 개념의 한 특징이 드러난다. 칸트가 말하는 지성의 개념은 사물의 성질과 관계한다. 그것과 달리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용과 형식, 외면과 내면 등과 같은 논리학에서 다루는 반성 개념은 사물이 공간 속에 가지는 위치 즉 공간적 현존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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