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여름, 로맨스 드라마에서 여성이 ‘구원’(?)받는 법[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은주(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박사 수료)

신문을 보다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20-30대 미혼여성 60%. 조건 맞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 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여성은 비정규직이었지만, 자신보다 나은 조건을 갖춘 안정적인 정규직 남성과 결혼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독신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을 밝혔다. 혹자는 이 기사를 보며, ‘여자들은 원래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해. 속물!’ 이라고 단정 짓고 끝낼지 모르겠다.

결혼이 행복한 로맨스의 결말이라는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다. 그렇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이제 낭만적 사랑인 로맨스와 결혼은 완전히 분리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이제 점점 더 경제적 안정성의 담보물이자 계급 상승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확실하지 않다면, 미혼 여성에게 결혼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현실에서 결혼과 로맨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점점 더 무관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사에도 불구하고, 소위 ‘로코’라고 불리는 로맨스 코메디와 일일 연속극의 여주인공은 여전히 로맨스에 몰입하며 결혼에 분투하면서, 답답한 일상과 현실의 시련으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2011년 멜로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앤서니 기든스에 따르면, 연예소설로서의 로맨스는 대중이 읽은 최초의 문학 장르이다. 특히 19세기에 혼인 관계를 경제적 가치와 분리하기 시작하면서, ‘로맨싱(romancing)’은 구애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러한 로맨스 개념은 부르주아 집단에서 주로 지속되었던 낭만적 사랑의 개념이 사회에 확산되면서, 사랑의 이상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혼인 관계가 보다 폭 넓은 친족 관계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로맨스는 결혼으로 귀결되면서 더욱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낭만적 사랑인 로맨스에서 성공한 남편과 아내는 아이와 상관없이 부부 관계에 헌신하는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를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형적인 로맨스와 결혼의 관계는 현재의 트랜디 드라마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하나의 변수를 더 넣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혼인 여주인공의 직업과 경제 사정이다.

요즘 ‘로코’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안정적이며 전문직인 여성, 경제 사정이 좋지 않지만 전문직 여성이 될 수 있는 여성, 별 볼일 없는 집안에 스펙조차 없는 여성. 첫 번째 부류가 무용과 졸업생이나 기생이 된 “신기생뎐”의 단사란, 두 번째는 재벌남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5급 행시를 패스한 공무원인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 세 번째는 스펙 자체가 없어 ‘식모’를 직업으로 택한 “로맨스 타운”의 노순금이다.

아직 종영을 하지 않은 로맨스 타운을 제외하고는 두 부류의 여주인공 모두 결국 결혼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완전히 성공한 결혼으로 골인하는 전형적 로맨스는 첫 번째 여주인공에게 일어난다. “신기생뎐”의 단사란은 재능과 미모, 자존심도 있지만, 돈에 눈이 먼 계모의 강요로 결국 기생이 된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재력 있는 남성과 결혼하여 구원받는다.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은 결혼에 어떻게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사건과,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이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가장 바닥의 상황에서 시련을 겪는 품위 있는 여주인공이 가부장제의 처가 되는 결혼에 성공하여 행복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두 번째 분류인 공아정은 행시를 패스한 엘리트 여성이지만 ‘결혼’을 해보고 싶어서 거짓결혼을 하는 활극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거짓 결혼 상대자인 재벌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여주인공이 원했던 것이 낭만적 연애였음이 밝혀진다. 두 주인공 모두 경제적인 시련은 겪지 않는다. 그녀의 시련은 사랑으로 인해 직업을 잃을 뻔 하는 사건에 있다. 일이냐 사랑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일을 인정해주는 재벌남과 그의 배려를 사랑으로 이해하는 여주인공의 결혼 승낙을 통해, 드라마는 해피엔딩에 이른다. 이 드라마의 주요한 축을 이루는 로맨스는 경제적 현실을 고민하는 않은 주인공들에게 분명하게 보장된다. 문제는 결혼에 있다. 드라마의 엔딩은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확인으로 끝난다. 결혼을 상징하는 웨딩드레스 장면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일과 사랑 모두를 붙잡는 것, 그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두 번째 부류의 여성에 있어서, 로맨스는 결혼과 무관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일과 사랑의 공존이지 구체적으로 결혼은 아니다.

위의 두 부류의 드라마에 비해, “로맨스 타운”은 로맨스와 결혼에 대해 냉소적이다. 여고 동창인 두 여성은 어떤 남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식모가 되고 사모님(미모의 여성이 성공한 남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모님은 트로피 사모님이라고 불린다.)이 된다. 드라마는 오히려 결혼이 계급을 구축하는 도구라는 사실만을 명료하게 보여줄 뿐이다. “로맨스 타운”은 점점 로맨스와 무관해진 채, 로또에 당첨된 식모들의 추리 복수극으로 나아간다. 스펙도 내세울 집안도 없는 여성에게 있어 로맨스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여주인공은 정서적 위로와 다정한 친밀감을 로맨스 상대에서가 아니라 식모들의 공동체에서 찾는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그녀, 노순금에게 있어서 사실상의 구원은 로맨스의 대상인 남자가 아니라 로또이다.

드라마에서 더 이상 로맨스와 결혼은 짝을 이루지 않으며, 여주인공들에게 구원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결혼은 더 이상 로맨스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돈 없는 남자와의 로맨스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로맨스에 가장 몰입하고 있는 여주인공은 누구인가? 위 세 부류에 해당하지 않은 번외편이자, 가장 적극적인 시청률을 자랑하는 저녁 8시 매일 연속극의 여주인공이다. 주인공인 아줌마는 더 이상 남편의 불륜에 목매거나 이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다.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주인공 아줌마는 캐리어 우먼이 되어 성공하고, 자신에게 목숨 거는 애교덩어리 식스팩 말 근육 총각과 사랑에 빠진다. 이제는 매일 연속극의 단골 소재가 되어버린 ‘줌마렐라’의 탄생! 아줌마는 결혼에 실패했지만, 로맨스에 성공한다.

여기서 로맨스가 결혼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로맨스만이 중요하다. 아줌마는 로맨스를 겪으면서 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이자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으며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줌마렐라 소재가 인기를 끄는 것은 줌마렐라야 말로 낭만적 사랑, 다시 말해, 가족이나 계급, 돈과 상관없이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정서적 친밀감에 이르는 데이트와 구애의 과정인 로맨스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불굴의 며느리”에서 아줌마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직후 비정규직인 콜센터 직원인 오영심(신애라 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하버드 졸업하고 월 스트리트서 펀드 매니저로 일하던 재벌 2세.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오영심 역을 맡은 신애라가 1994년에 방영된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성공한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사실에 있다. 신애라가 맡은 여주인공은 집안도 별 볼일 없고 심지어 백수 오빠까지 딸린 백화점 비정규직 직원이었지만 재벌 2세와 극적인 로맨스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실제로 신애라는 이 드라마 후 남자 주인공인 차인표와 결혼하여 드라마의 실사의 주인공으로 이목을 끌은 바 있다.

성공한 로맨스 신화의 주인공인 신애라가 십 오년 후, 줌마렐라라는 새로운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2011년 여성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여성은 결혼으로 구원받지 않고 로맨스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시청자 모두가 알고 있듯, ‘줌마렐라’의 로맨스는 환상이다. 구원은 그래서 거짓이다. 그래, 구원은 없다. 잔혹한가?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사랑, 배신 그리고 자살

송지선 아나운서의 투신자살이 5월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언론이 문제네, 악성댓글이 문제네, 우울증이 문제네, 야구선수 임태훈이 문제네 등등 말들이 많았다.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였을까? 자살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기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송지선에게 임태훈은 함께 한 사랑에 책임질 줄 모르는 혹은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송지선은 그가 그녀를 배신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의 예의 없는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

작고한 탤런트 최진실 역시 애정 관계에서 비롯된 배신감 때문에 자살을 했다. 결혼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조성민은 자신의 사랑이 식었음을 전했고 그의 사랑을 철석같이 믿었던 최진실은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랑의 실패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지 않다. 경제적 파탄의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만큼이나 사랑의 실패로 인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살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애정의 문제로 슬픔에 잠기고 오랜 시간을 절망과 한탄 속에 ‘죽은 듯’ 혹은 ‘죽지 못해’ 살아간다. 평생 동안 바람피운 아버지를 원망하고 울분을 토했던 우리 엄마에서부터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자리에 누워버린 내 친구까지.

이러한 사건을 두고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누가 잘못을 했는가. 원인이 무엇인가, 뭐 이런 것이 아니다. 사건의 진실이나 원인은 경찰이나 기자들이 더 잘 파헤쳐 줄 수 있고, 누가 얼마만큼 잘못을 했는가는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점에서 답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왜 이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강행하게 되었는가이다. 사랑의 실패는 왜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드는가? 왜 그러한 사건은 삶의 의미와 생동감을 일거에 빼앗아 가는가?

나의 경험과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대화를 반추해 볼 때 배신은 언제나 심리적 자존감의 파괴와 관련되어 있었다. 평생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를 향해 우리 엄마가 항상 했던 말은 “나를 어떻게 보고!”였고, 자신의 애인이 동거하는 여자 친구에 대해 숨겨왔음을 나중에 알게 된 한 학생은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 괴로워했으며, 천청벽력과 같이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은 내 친구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고 호소했다. 그렇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 존재 전체, 나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다.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가 거절되는 느낌이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렇다면 왜 사랑은 이렇게 존재 전체와 관련된 사건이 되는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당사자의 존재를 뒤흔들고 삶의 의미마저 잃게 만드는가? 최근에 내가 본 한 권의 심리 에세이는 헤어짐이나 배신을 내 존재 자체가 거부되는 사건으로 보지 말 것을 권고한다. 자존심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니 그럴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사랑이 무엇인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사랑을 “인정(recognition)”관계로 설명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뿐 아니라 연인, 친구 간의 사랑은 모두 내가 너를 그리고 네가 나를 구체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로 배려하고 정서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행위라는 것이다. 호네트는 사랑이라는 인정관계를 두 사람의 절대적 합일상태로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 속에서 두 사람은 독립된 개체로 분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절대적 공생기를 지나 상대적 공생기에 아이는 엄마를 환상 속에서 파괴한다. 그러나 아이의 파괴행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곁에 남아 아이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계속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환상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이러한 독립된 어머니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서적 합일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네트는 제시카 벤자민을 인용해 사랑을 “자기주장과 타자 인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정행위로서의 사랑이 실패할 때 왜 우리는 존재 전체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패와 더불어 우리는 사랑을 통해 획득한 자신감(Selbstvertraun)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사랑을 통해 나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욕구가 배려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자신이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우리는 구체적 타자에 의한 정서적 인정의 경험을 통하여 나의 구체적인 존재가 가치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정서적 인정, 즉 사랑이 철회될 때 우리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훼손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사랑의 실패는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실패는 내 자존심과 자신감을 뒤흔든다.

이러한 존재의 상실감이 더욱 절망적인 것은 사랑이 바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심리학 에세이는 또한 이번에 사랑이 가면 아주 사랑이 안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하고 권고한다. 사랑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은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의 실패를 통해 잃게 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형성한 특별한 자신감과 자손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또 다른 사랑은 올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바로 그 사람과의 사랑, 그 사람의 정서적 인정, 그 사람을 통해 형성된 나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대체될 수 없다. 사랑이 끝나면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을 지우고 추억이 될 만한 물건들을 버리는 이유는 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형성했던 그 특별한 나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그런 나의 존재는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대체될 수 없기 때문에.

이렇듯 사랑의 실패가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것은 사랑이 나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구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패가 지독하게 절망적인 것은 그것이 대체될 수 없는 사람과 만들어낸 구체적이고 특별한 나의 존재의 의미를 한 순간에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토록 의미를 부여했던 나 자신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생각, 자존심이 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든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무거움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가볍게 수행된다. 예전과 달리 사람들은 쉽게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실패는 참을 수 없이 무겁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이 극단적일수록 사람들은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뒤흔든다. 이런 의미에서 호네트 역시 정서적 인정이 되지 못하는 상태가 윤리적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호네트는 아쉽게도 사랑이라는 인정형식이 구체적인 개인들 간의 특수한 관계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로 확장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적인 관계는 보편적 학문의 담론이 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호네트의 생각일 뿐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사랑이 학적 가치를 갖지 않는 에세이나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학문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사랑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생각, 나아가 감정에는 어떤 윤리적 잣대도 들이댈 수 없다는 생각이 어떤 끔직한 풍경을 만들어 냈는가? 우리는 방금 전까지도 사랑했던 사람을 내팽개치고 거리와 공론의 장으로 나와 사회를 비판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다. 그가 혹은 그녀가 죽어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건 당사자가 겪어 내야할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래서 사회비판과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나는 것일까?

『혜화, 동』-‘여성적’인 영화에 대한 단상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 수 현(서울시립대학교 박사과정)

몇 년 전에 나는 하이메 로살레스(Jaime Rosales) 감독의 <고독의 편린>과 훌리오 메뎀(Julio Medem) 감독의 <혼란스런 아나>를 약간의 시간간격을 두고 보게 되었는데, 이 두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서로 다른 방식이 흥미로웠다.

두 영화는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서도 차이가 났다. 특히, 나는 두 영화 중 어떤 것이 좀더 ‘여성적인’ 감수성에 맞는 표현형식일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혼란스런 아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어떤 불편함이 남았다. 반면, <고독의 편린>은 영화 속 그녀들의 삶에 공감하게 되면서 나의 마음 속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듯했다. 거칠게 말하면 영화의 진행 과정에서 <혼란스런 아나>는 관객을 몰입하게 하고 <고독의 편린>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인물들의 삶을 지켜보게 만든다. <혼란스런 아나>가 ‘역사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조금은 추상적인 여성성을 보여준다면 <고독의 편린>은 ‘지금 여기’에서의 여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신비로운 존재’이거나 ‘성적 대상’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은 힘겹게 삶을 꾸려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잘 찾지 못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여성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들은 서로 소통하지도 못하며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는다. 인물들의 대화는 허공을 맴돌며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이야기한다. 인물들의 표정 변화도 극적이거나 급격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덤덤하거나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녀들의 고독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텅 빈 공간과 사물들이 인물들의 고독을 더 차갑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현란함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인물들의 고독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견 딱딱해 보이고 덤덤해 보이며 때론 무표정하기까지 한 인물들의 표정 이면의 감정을 관객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무의식의 깊은 심연과도 같은 존재이다. 또한 죽음의 고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존재다. 주인공인 아나는 모든 여성을 대신해 ‘고통으로서의 여성의 역사’와 만난다. 그런데 <혼란스런 아나>와 함께 한 심연으로의 여행은 사실 감독의 여성에 대한 사고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다. 아나의 무의식 여행에 동참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 다음에 감독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여성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여성이 처한 억압에 대한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혼란스런 아나>는 감독을 비롯한 남성이 생각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반복하는 듯 보였다.

이 두 영화가 특별히 여성 영화의 표현방식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감독들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이나 성을 묘사하는지에 대해 눈길이 가게 된다. 그렇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뒤로 한 채 영화전체의 구조나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중점에 두고 영화를 보게 된다. 또한 영화의 이미지나 그 이미지들의 배치 및 표현방식이 얼나마 ‘영화적’인가를 두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인 감독이 여성을 소재나 주제로 다루면서 여성문제의 현실을 잘 진단하고 보여준다면 ‘좋은’ 여성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 보인다. 오히려 나는 영화의 표현방식과 감독이 인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성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여성적’이라 생각하는 영화에서는 여성을 대하는 담담하고 관조적인 시선 가운데 어떤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 속 그녀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조금씩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모습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혜화, 동>이 보여주는 ‘여성적인 것’

여성영화에 대한 이런 개인적인 고민이 있던 차에, 지난 3월에 본 민용근 감독의 <혜화, 동>은 다루는 소재와 주제, 그리고 표현방식이 내가 평소에 생각해 왔던 ‘여성적’인 영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영화는 한 여성의 마음 속 상처를 관조적이고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감정의 변화들을 보여준다. 또한 그 과정은 인물에게는 상처와 마주하여 치유하는 과정인데, 관객에게는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혜화, 동>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영화는 혜화와 그녀의 마음 속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하게 된 문제의식은 아이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보살핌으로서의 ‘모성성’이다. 가족을 둘러싼 해체와 파괴의 문제, 가족을 구성하는 일에 대한 문제의식도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몇몇 평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영화의 소재나 주제가 진부한 데 비해 영화의 화법이 흥미롭다고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도 한 여성의 삶과 그녀의 내면의 감정의 변화들을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1> 영화의 표현형식과 관찰하는 시선

혜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버려짐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우리의 주변에서 살고 있을 법한 여성이다. 유기견을 돌보며 사는 애견미용사인 스물 세 살의 혜화에게 5년 전에 자신을 떠났던 한수가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이 때부터 그녀는 5년전 과거와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생이던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귀었고 혜화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혜화는 학교를 그만두고 네일아트를 배우면서 둘이 함께 하는 미래를 준비한다. 혜화의 어머니는 혜화를 잘 보살피려 하고 그녀를 데리고 한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한수의 어머니는 한수의 장래를 걱정하며 혜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혜화는 혼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몸이 약해서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한수는 그 당시 혜화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작성했던 입양통지서를 들고 와서 혜화에게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영화는 이 아이를 둘러싸고 미스테리한 플롯으로 전개된다. 혜화의 현재 삶에 과거의 기억들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묻혀진 상처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혜화를 향한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보여진다. 묻혔던 상처를 꺼내보는 혜화는 마치 고였던 감정이 흐르듯 혼란스런 감정의 변화들을 겪게 된다.

영화의 미스테리한 플롯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탈장된 개와 그들의 아이인데, 탈장된 개와 아이는 혜화의 ‘마음 속의 아이’를 상징한다. 이들이 과거 속 혜화의 집에서 사라진 그 강아지인지, 진짜 혜화의 아이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감독은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실제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혜화의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사실, 혜화와 한수의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마음 상태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는 혜화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를 통해 다가가고자 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혜화와 한수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입양통지서에 적힌 주소에서 한수가 본 아이는 다른 아이였음이 밝혀진다. 한수는 자신이 찾아갔던 집에서 그 아이의 부모들에게 사실을 전해들었어도 믿지 않는다. 결국은 혜화가 임신했던 당시에 태어난 자신의 조카(나연)가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혜화를 속이게 된다. 한수가 의도치 않게 꾸민 조금은 엉뚱한 일로 인해 혜화는 그 아이를 진짜 자신의 아이라 믿게 된다. 그리고 혜화의 집에서 세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혜화는 아이를 부모들에게 보내기 전에 씻겨주고 대화를 하면서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에게 하듯 아이와 작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영화 속에서 아이와 탈장된 개와 함께 중요한 이미지는 폐허가 된 집터이다. 영화 초반에 혜화는 탈장된 한 유기견을 따라 폐허가 된 집터로 가게 된다. 영화 속에서 이 집터는 혜화와 한수가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며, 마치 잃어버린 그들의 아이와도 같은 유기견의 흔적을 끝없이 찾게 되는 곳이다. 폐허가 된 집터는 두 사람의 단절된 관계와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 한 편으로는 두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소재이거나 주제일 법한 이 영화의 이야기가 갖는 가장 큰 미덕은 감독이 신적인 화자가 되어 혜화의 마음 속을 설명하고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주변에서 보게 되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고 궁금증을 품게 될 때,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의 미스테리적인 구성이나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의 연결 방식은 이런 식으로 혜화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가 말을 아끼고 담담하면서도 건강한 캐릭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그녀의 아픔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2> 아이, 모성성 그리고 관계를 맺어가는 법

영화를 보다보면 특별히 혜화라는 인물의 건강하고 강인한 면모가 돋보인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지닌 실제 여배우만큼이나 혜화라는 인물도 맑고 깨끗해 보인다. 어떤 관객은 혜화라는 인물이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관용하는 어떻게 보면 성인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지만, 나는 혜화의 강인한 면모는 그녀가 특별히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녀의 강인함은 처음부터 영화에서 설정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상처를 마주하고 그것을 치유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혜화는 자신이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의 아들(현웅)을 거의 3년 동안 돌봐왔다. 여섯 살인 이 아이를 향한 혜화의 시선은 흡사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라도 돌보듯 사랑스런 눈길이다. 혜화는 현웅이 잠들때까지 기다리다가 자신의 집으로 간다. 현웅은 시시때때로 혜화의 가슴을 만지기도 하며, 때로 혜화는 잠든 현웅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도록 놔두기도 한다. 또한 현웅이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고 할 때,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한편, 혜화는 유기견을 구조하는 일을 하는데, 입양되지 못한 유기견을 그녀의 집으로 데려와 키우고 있다. 그녀의 집에는 조금은 병이 든 것도 같은 유기견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혜화가 이렇듯 버려짐에 대한 감정에 민감하고 그만큼 또 보살핌에 대해 민감한 까닭은 그녀가 한 번 버려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지금의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혜화를 냉대하지 않고 따뜻하게 잘 길러줬다. 혜화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어머니는 혜화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잘 도와주겠다고 말하였다.

혜화가 지닌 이런 면모를 보면서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모성성’이란 말을 떠올렸다. 레비나스는 주체에 대한 책임을 넘어서 고통받는 타자, 헐벗고 굶주리는 타자를 위해 나를 내어주고 책임을 다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강조한다. 고아나 과부, 굶주린 사람 등 비참한 타인의 얼굴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고 타인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그런데 이러한 타인의 얼굴과의 마주침에 의한 고통의 경험이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든다고 한다. 그는 주체 안에 있는 이러한 타자성을 ‘내 안에 있는 타자’ 혹은 ‘동일자 안의 타자’ ‘내재 속의 초월’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가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나를 키워내는 것을 일컬어 ‘모성성’이라 불렀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타자와 모성성 개념이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함의들을 제쳐놓고 생각해 본다면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주는 유기견과 아이, 그리고 한수에 대한 태도를 ‘모성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모성성은 타자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이 만들어낸 것이다.

혜화에게서 그녀의 모성성을 길러냈던 타자는 무엇보다도 죽은 아이이다. 덧붙이자면 그녀의 첫 번째 버려짐의 경험과 그런 그녀를 거두고 돌봐준 지금의 어머니가 있다. 또한 그녀가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함께 기르던 개가 낳은 강아지들과의 이별의 경험이다. 한수의 가족에게 외면당한 혜화는 오랫동안 기르던 개 혜수와 혜수가 낳은 강아지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 기어코 가려 하지 않던 혜수를 억지로 새로운 주인에게 넘긴다. 그 때 아빠가 달랐던 꼬리가 노란 강아지는 어딘가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한수의 집에서 거부를 당하고 절망감에 손목을 그으려던 순간에 그 어린 강아지가 집구석에서 나와 그녀의 품에 안긴 일이 있었다.

한편, 영화의 결말에서 혜화와 한수는 폐허가 된 집터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구조하는 일로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한수에게 혜화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또 그 때 혜화가 찾아 헤매던 탈장된 그 개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 혜화는 어린 강아지들을 데리고 혼자 집으로 가다가 다시 후진하여 한수를 향해 가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이런 결론을 두고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렸다고 감독이 전해주었다.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거나 회복되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를 매개로 하지 않고 두 사람이 직접 마주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준 ‘모성성’은 한수에게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한수는 영화에서 계속해서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한수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조금은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마도 어머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고, 그만큼 그녀들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면서 자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수는 혜화에게는 유학을 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집에는 가끔 들어오는 등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지난 5년의 시간을 보냈다. 군대를 갔던 것도 가족들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이다. 다리를 다쳐서 약간 절룩거리는 상태만큼이나 한수는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탈장된 개와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가 해결되면서 혜화의 감정도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혜화의 타자에 대한 보살핌의 ‘모성성’을 드러내고 또 한편 키워냈던 이 두 타자와의 만남 이후에 한수라는 또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물음으로 남기고 영화가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인물의 삶을 하나하나 지켜보게 하면서 나에게도 그녀의 마음 속에 차근차근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모성성의 문제가 어머니로서의 희생 이전에, 한 사람의 상처와 내면에 관한 것, 즉 삶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잔혹한 복수극 판타지, 『건축학 개론 』/이지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잔혹한 복수극 판타지 영화『건축학 개론 』

 

글: 이지영 (홍익대학교 강사)

 

친구와 ‘건축학 개론’을 보았다. 재미있었다. 깔깔거릴 수 있는 에피소드들, 재미난 캐릭터(남자 주인공의 재수생 친구), 대학 1학년 시절과 현재를 오가는 깔끔한 편집, 당시에 20대를 보냈던 나에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추억 속 여행을 하게 하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지루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두 시간 남짓을 아주 재미나게 보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여자주인공은 너무 눈이 커졌고, 남자 주인공은 머리가 너무 커졌구나! 눈이 저렇게 두 배로 커졌으니 남자주인공이 첫사랑을 못 알아볼 법도 하겠다는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시절 그 공간으로 돌아간 듯 추억 속을 헤매이고 있었고, 그 추억 속 여행은 문득 문득 당시의 풋풋하고 어린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뿐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 많은 사람들의 감상평 ‘8월의 크리스마스와 번지점프를 하다를 잇는 오래도록 마음을 울릴 멜로 영화’도,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며 술을 마시고 싶게 하는 가슴 찡한 감동의 영화’도 아니었다. ‘기억의 습작’을 듣는 건 좋았다. 원래 좋아하는 노래였으니까. 그런데 그뿐. 난 궁금했다. 왜 난 재미만 느낄 뿐 감동을 받지 못했을까?

▲ 영화 건축학 개론

함께 영화를 본 친구와 밥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우리의 결론은 ‘첫사랑에 대한 남자들의 모든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에 모자람 없는 영화다, 그러니 평소 멜로 안 보던 남자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그리 흥행했지’였다. 뭐 여성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영화나 드라마도 많으니, 남자들의 첫사랑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뭐가 나쁜가. (수많은 드라마에서 남편에게 구박받다가 이혼하고 나면, 출세를 하면서 연하의 꽃미남 재벌 2세 실장님들의 구애를 받는 여자 주인공들이 몇 년간 브라운관을 휩쓸지 않았던가. 그런 드라마 보면서 리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드라마니까 라고 접고 넘어가지 않는가.) 이렇게 가끔 판타지가 충족이라도 되면 즐거운 거지. 솔직히 나 역시 매일 매일 눈 부릅뜨고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워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판타지를 충족하는 걸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이 영화가 꼭 나쁘고 후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영화가 함축하는 ‘팩트’를 지적하는 것뿐이다.
15년 만에 만난 남자 주인공 승민은 첫사랑 수연을 첫눈에 알아보지도 못한다. 뭐 가끔 떠올리며 살았겠지만, 첫사랑에 목매달고 살지 않고 나름 쿨하게 살았음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나름 쿨하게 살아온 듯 보이는 그도 사실 과거엔 쿨하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 그리 쿨한 인간이 많으랴. 희망사항일 뿐, 대부분의 인간들은 ‘쿨하지 못해 미안해’하며 살지 않나.) 건축학 개론 시간에 뛰어 들어온 수연에게 첫눈에 이미 호감을 느낀 승민은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하며, 숙제를 함께 하면서 수연과 가까워진다. 외모는 청순하나 성격은 나름 호탕하고 쿨한 수연은 승민과 친구와 애인의 경계선에서의 풋풋하고 파르스름한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승민은 수연이 건축과 선배(돈 많고, 잘 생기고, 키 큰 바람둥이- 그 당시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대학생)를 좋아하고 있다고 굳게 믿게 되고,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어찌 고백을 하나, 어떻게 하면 수연의 마음을 얻을까를 재수생 친구와 의논하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문제의 종강 날이 왔다. 그는 수연의 자취방 앞에서 팩소주를 들이키며 수연이 나중에 살고 싶다고 그려줬던 2층집을 모형으로 만들어와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고, 수연은 종강날 나타나지 않은 그에게 삐삐를 치며 기다리다가, 선배의 권유로 술을 마시게 되어 떡실신이 된 채 선배와 함께 자취방에 도착한다. 떡실신 직전의 수연에게 선배는 키스를 시도하지만 수연은 얼굴을 피했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수연을 선배는 자취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 장면을 목격한 그는 분노에 떨며 수연을 “썅년”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한참 후 그를 찾아온 수연에게 “꺼져줄래”라는 엄청 센 말을 날리고는 표표히 사라진다.

자… 이제 그의 첫사랑을 다시 되짚어 볼까? 사랑하는 여자가 떡실신 일보직전에 바람둥이 뺀질이 선배에게 겁탈을 당할지도 모르는(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나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큰 순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순간을 목도한 그는 선배를 욕하며 그 상황을 막는 대신 비겁하게 피하고 나서는, 그녀를 “썅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충분히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선배가 수연에게 키스를 시도했으나 몇 번이나 수연이 그것을 거부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당연히 수연이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이고 특별한 관계가 아닌 그냥 친구라도 수연을 곤경에서 구해줘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못 한 건지 안한 건지 하여간, 승민은 자신의 비겁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를 “썅년”으로 취급해버린다. 그리고는 방학 내내 연락하고 기다려온 그녀에게 “꺼져줄래”라고 쿨한 척하며 한마디를 날리지만, 이건 쿨한게 아니라 자신의 비겁함에 눈감으며 저지르는 싸가지 없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왜? 최소한 애인이 아닌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런 결별에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할 만큼 승민은 화가 났던 거다. 그런데 무엇에? 수연에게도 화가 났겠지만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화가 상당 부분 차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승민은 그 두 가지의 화를 잘 구분하지 못했고 자신의 찌질함은 잊고 모든 사태의 책임을 수연에게 돌렸다. 그러니 수연을 ‘썅년’이라고 삼십대 중반까지도 호명하지 않았을까? 그 나이까지도 그렇게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반성 능력이 없는 건 사실 좀 심각해 보였다.

여하튼 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첫사랑이 떠나간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꺼져줄래”라는 말 대신 오히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며 떠나가는 첫사랑을 붙들고 징징거렸든, 아니면 혼자 징징거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마치 과거에 첫사랑에게 차였던 남자들의 대리 복수라도 해주듯 “꺼져줄래”라는 대사는 남자들의 판타지에 정확히 내다꽂혔을 것이다. 그리고 15년 만에 만난 첫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으로까지 복수는 제법 잘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차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첫사랑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간절히 원했으나 실패한 사랑의 기억이 첫사랑으로 남으니까.. 자신이 싫다고 거절한 여자는 그저 잠깐 만났다거나 뭐 별거 아닌 기억으로 남지,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것 같다.)

수연을 보며 나는 안타까웠고 불쌍했다. 하지만 영화는 수연을 잔혹하게 밀어붙였다. 수연의 첫사랑은 실제로는 주인공 승민이었으나, 승민은 수연이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연의 캐릭터는 돈 많은 의사 남편 만나 결혼했으나, 3년 만에 버티다가 이혼당하고 혼자 사는, 즉 순수한 그의 첫사랑을 짓밟은 죄 값을 톡톡히 치른, (어릴 때보다 눈은 커졌지만) 성취한 것도 없는 이혼녀일 뿐이다. 왜? 과거에 “썅년”이었으니까. 지금은 술 마시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쌍욕’을 하며 한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때 복수가 이 정도면 충분한 걸까? 아니 아직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첫사랑을 못 잊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들 그런다. 뭐 나를 비롯하여 주변을 봐도 맞는 말 같다. 가끔 생각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전혀 첫사랑에 목을 매거나 그리워하거나 그러지들 않는다. 사실 냉정히 말하면, 기억도 잘 안 난다. 아마 그립다면, 그리움의 대상은 그 시절의 젊음과 나의 감정이지 과거의 누군가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수연은 승민을 지난 15년간 마음에 품고 그가 버리고 간 집 모형을 아직도 간직하고, 수소문해서 그를 찾아오기 까지 했다.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에 딱 좋은 설정이다. 게다가 수연은 나이를 먹었으나 눈에 확 띄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판타지의 절정은 아마 이 부분일 것이다. 솔직히 첫사랑을 다시 만났는데 푹 퍼진 아줌마가 되어 있을까봐 무서워서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판타지에 금 갈까봐. 충분히 이해가는 상황이다. 현재의 수연은 남자들의 판타지 로망에 너무나도 적합한 상대가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가 아직까지 미혼이라면 곧 결혼을 해야 하는 그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설정일 것이다. 혹은 그녀가 유부녀라면 그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법적, 도덕적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돌싱, 즉 이혼녀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잠깐 다시 만나 추억을 되새기며 원나잇 스탠드를 하기에 아무 부담 없는 상대로 나타나 주었다. 와. 기가 막힌 판타지 아닌가. 더구나 그녀의 집을 완성해준 그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상황이다. 미국으로 가버리게 되면 그녀 쪽에서는 그를 찾을 수 없다. 이혼녀 첫사랑이 다시 만나자고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이 되겠는가. 게다가 첫사랑 못지않게 아름다우며,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능력자에, 부모님마저 부유한 약혼녀와 외모와 추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첫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승민은 지난 15년간의 수연의 마음을 확인하고, 격한 키스를 나눈 후(키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주도 외딴 집에 둘만 남아있던 밤 시간에 벌어진 상황이니 뭐 대략 짐작 가능하다.) 미국으로 ‘깨끗이’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지어준 집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며 정착했다. 게다가 그 곳은 제주도. 조선시대의 유배지였던 그곳은 살기에는 좋은 자연 환경이지만, 정말 거기에만 산다면 죽을 때까지 외롭게 혼자 살아야 할 가능성이 99%로 보인다. 게다가 수연은 제주도에 사는 걸 싫어했었고, 서울로 탈출하기 위해 무지하게 노력했던 소녀였는데 말이다. 와….정말 처절한 응징이다!!! 후덜덜. 이혼녀로도 모자라 사회적 무능력자로 패배자를 만들고, 심지어 외딴 섬에 유배까지 시켜 버렸다. 아무리 새로 지은 집이 예쁘면 무엇 하나. 거기서 평생 혼자 아버지 병간호나 하고 살면. 첫사랑 그를 못 잊는 수연의 집을 우리의 주인공 그는 주소와 위치를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다. 언제든 사실 맘만 먹으면 올 수도 있다. 이거 뭔가. 지금 조선 시대인가? 마음 내키면 한 번씩 찾을 수도 있는 첩실(?) 같은 분위기마저 난 느껴졌다. 너무 처절한 복수의 판타지 아닌가. 이 정도만으로도 복수는 처절하다.

그러나 복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자신의 주소조차 없이 보낸 택배 상자에는 첫눈 오는 날 그를 기다리던 수연이 약속장소에 놓고 갔던 전람회 씨디가 들어있다.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자신의 기억조차 깔끔하게 털고 가는 듯 보였다. (뭐 좋게 해석해 주자면 자신도 그곳에 갔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오해의 해소를 위해서라면 굳이 그 씨디를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키스하던 그날 밤 말했어도 충분한 일이다. 그러니 씨디를 보내는 그의 행동은 과거와 수연을 모두 털어내는 일종의 이별식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승민이 보낸 ‘기억의 습작’ 씨디를 듣는 수연의 얼굴은 어떠한가. 허전함? 아쉬움? 아니, 수연의 얼굴은 아련한 추억에 잠겨드는 모습으로 엔딩! 와우! 이거 쿨한거라고 할 수 있어? 첫사랑에서 상처 좀 받았다고, 첫사랑 수연에게 이렇게까지 복수와 응징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이 들어서인지, 감성이 풍부하기론 남부럽지 않고, 평소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조차 이 영화는 그닥 멜로스럽게 감성에 다가오질 않았다.나를 잇는 감성멜로? 아니, 아니! 그보단 오히려 잔혹하고 처절한 복수극 판타지였다. 복수를 대놓고 하게 되면, 복수하는 자의 품격을 손상시키기 쉽고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복수를 하려면 감쪽같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복수를 당하는지조차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경제적이다. 이 영화의 복수극은 바로 이렇게 교묘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영화의 광고 카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 대한 ‘썅년/놈’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사실 첫사랑의 대상은 예쁘고 잘생긴 소수에게 몰려 있었던 것이 현실 아니던가. 사실 누구의 첫사랑도 아니었던 사람들도 허다하다고 본다. 뭐 여하튼 우리를 첫사랑을 하던 시절로 불러내는 데에는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카피임은 인정한다. 그 카피를 보고 내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시절과 그 시절에 대한 기억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평소 낭만적이고 감성이 매우 풍부한 인물로 평가받는 필자로 하여금 감동이 아닌 재미만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에 대해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과 영화 잡지를 뒤져 보아도 필자처럼 이 영화를 읽고 투덜거리는 영화평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요즈음은 첫사랑 떠올리기 열풍이라도 불고 있는 듯하다. 다들 정릉의 골목길, 710번 버스 노선 등 당시의 추억에 빠져 이 잔혹한 복수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관심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필자만 뭔가 삐딱하고 곱지 않은 심성의 소유자가 되어 버린 듯한 이 분위기. 그래서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이 뭔가 눈치가 보이는 듯한 상황임을 느끼고 있는 나의 이 동요하고 있는 마음상태가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문제적 지점인 듯도 싶다. 나의, 즉 개인적인 추억과 관련되는 것이면, 특히나 첫사랑처럼 아련하고 가슴시린 기억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객관적인 반성적 사고나 비판적 시선조차 용납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분위기 말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련했다 하여도, 찌질한 것은 찌질한 것이고, 비겁한 것은 비겁한 것이고, 제대로 자신의 못남을 맞닥뜨리지 못했었다면 시간이 지나도 찌질하고 비겁한 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아련한 추억으로 포장만 하지 말고 생각도 좀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과 관련하여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영화 보기 전 전람회 CD를 꺼내어 ‘기억의 습작’을 오랜만에 다시 들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김동률의 마성의 저음이 울려 퍼지던 2012년 어느 봄날 오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있었고 오랜만에 다시 들었던 그 노래의 감동은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PS. 사실 영화에 대해 이런 식의 영화평을 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도 아니다. 그저 줄거리, 캐릭터 설정에 대한 분석만 가지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비영화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나의 글에 대한 아쉬움과에 대한 미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밝히고 싶다. 이 영화에는 장점도 상당히 있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펼쳐지는 것 같은 구성방식도 아주 깔끔하고 효과적이었으며, 첫사랑의 판타지가 과도한 낭만주의나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촌스럽게 가지 않고, 상당히 세련되고 깨끗하게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힘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의 처절한 복수극이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만일 촌스럽고 후진 멜로 영화였다면 비판도 할 필요 없었을 것 같다. 그만큼 잘 만들어진 장르 영화였기 때문에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장을 한 여자와 페미니즘적 주체[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조선 후기에는 남장을 한 여자가 주인공인 여성 영웅소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등의 소설은 당시의 답답한 가부장제적 현실을 벗어나려고 했던 여성들의 열망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남장 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을 시작으로, <바람의 화원>(2008), <선덕여왕>(2009), <미남이시네요> (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의 드라마는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 상위 시대, 알파 걸, 역차별 등의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공격하는 시대에 쏟아져 나온 남장 여자를 다루는 드라마를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야기의 한 축인 러브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남장을 하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 끝에 서로 호감을 갖게 된 남녀 주인공. (<선덕여왕>을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고백하면, 여주인공은 사실은 자신이 여자였노라고 털어놓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많은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은 성녀와 창녀, 캔디같이 착한 여자와 이라이자 같은 나쁜 여자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다양해진 여성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조금씩 변주한 것에 그쳤다. 씩씩하거나 좀 남자 같은 데가 있는 여성은 꼭 한번 정도는 연약하고 순진한 면을 보이고, 혹은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 그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고은찬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한다. 그녀는 일부러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줄곧 소위 여성스러운 면보다는 남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터라 남자행세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주인공과 서로의 애정을 확인 한 후, 본격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난 고은찬은 달라진 모습으로 귀국한다.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파마도 하고 화장도 해서 훨씬 더 여성스러워진 것이다.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녀는 소위 4차원의 민폐형 캐릭터라서 전형적으로 얌전하고 착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해줄 남자가 필요한 약하고 순진한 여자다.

두 여자 모두 결말에 이르러 남자 주인공의 품에 덥석 안기는 대신 각자의 삶의 계획에 따라 멀리 떠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에서 여성 영웅들이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과 달리, 남장을 한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고은찬과 고미녀가 기존의 여성 캐릭터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체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이런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 드라마들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기 때문에 갖는 자연스러운 한계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두 주인공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혹은 목숨처럼 소중한 꿈을 위해서 남장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달달하고 설레는 사랑 이야기에 무겁고 심각한 고민 따위는 안 어울리지 않는가.

진화하는 남장 여자

하지만 남장 여자가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과거로 옮기면 오히려 여성 캐릭터는 조금 더 진화한다.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은 여자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이다. 조선 후기 여성영웅 소설에서처럼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으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찾게 되거나 이루게 된다. 앞의 두 드라마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사극인 <바람의 화원>, <선덕여왕>,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은 여자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페미니즘적 여성 주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은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남성적인 정치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바람의 화원>의 윤복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역시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윤희는 이 두 인물의 한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에 도전하는 인물이다.

윤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남동생은 병약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으로 치면 십대 여성 가장인 셈이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윤희는 남장을 하고 글을 팔아 돈을 벌었다. 과장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임금의 명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윤희는 세 명의 꽃미남들과 동고동락 하게 된다. 물론 생계유지와 어명이라는 이유도 주요했지만, 윤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렇게 윤희가 생계와 꿈을 위해 남자의 모습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상황은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질서를 따라야만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윤희는 남성적 특성을 체현함으로써 남성적 질서를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남성중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비판하며 그 질서를 이겨내는 인물이다. 윤희는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성균관에서 벌어지는 체육활동에서도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자인 윤희가 남자와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권위는 가부장제에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던 정약용조차도 여자인 윤희가 학문을 탐하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희는 그런 스승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스승의 허를 찌르는 질문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안 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키실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날부터 지금껏 전 단 한 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

“계집에겐 관원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원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윤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 질서가 추구하는 보편성과 공명정대한 원칙이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남성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윤희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남성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여성 주체와 닮아있다.

남자의 탈을 쓴 여자들

조선 후기의 윤희와 이 천 년대의 여성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윤희에게는 없는 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교v b 육받을 수 있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할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윤희가 갖지 못했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만족했던 평등한 참정권, 교육, 동일임금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이다.

이 평등한 권리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똑같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여성들은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똑같이 야근을 할 수 있고, 결혼 후에도 아이를 낳아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며, 부족함 없는 이성적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과 가치들,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는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고, “누구에 대한 평등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지는 것이 과연 진정한 여성해방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서 남성이 수립한 언어를 사용하고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는 한, 남성의 타자일 뿐 진정한 여성 주체가 아니다. 남성과 인간이 동의어인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처럼 되어야만 인간으로 또는 시민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뭔가 덜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여성 주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남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남성이 ‘인간’ 개념을 구성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여성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진정한 여성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여자답게’ 변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고은찬(커피 프린스)은 겉모습만 변했을 뿐 여전히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 이미지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이는 한 발 나아가, 남성과 똑같은 힘과 권리를 가진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바랐던 여성의 모습이다. 이런 덕만은 성 주류화 정책에 힘입어 고위관직에 진출하고 기업의 CEO가 된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이 가부장제적 관점을 철저히 내면화한 ‘명예남성’으로서 오히려 반여성적인 언행을 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렇다면 윤희는 진정한 여성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여성 주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적 주체

이리가레와 같은 차이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진정한 여성 주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여성이 될 수 있는지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진정한 여성’의 내용을 못 박아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구성해 가는 여성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고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명예남성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남성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한다. 즉 윤희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서도 그 중심 자체를 뒤흔드는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윤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동력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의 욕망이다. 이런 모습은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 주체와 많이 닮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여성들의 일상적 모습과도 비슷하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모두 남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이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특성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어느 정도는 남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자의 탈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에게 남성중심적 사회 질서에 적응하고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 질서가 여성을 방해하고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핵을 깨뜨리는 것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소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엄동설한에 본 따뜻한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송종서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엄동설한에 본 따뜻한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

글: 송종서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시와 자전거

 

2009년 5월 8일 건설기계를 만드는 중장비 회사 팀장 박동하(정우성)는 청두(成都)행 비행기를 타고 쓰촨(四川) 지역으로 출장을 간다. 신혼여행을 떠난 담당자 대신이지만 기내에서 동하가 손에 들고 있는 책갈피 속에는 언젠가 중국 친구 메이(까오 위안위안)에게서 받은 엽서가 꽂혀 있다. 쓰촨 청두는 메이가 태어나서 자란 고장이다.

메이와 동하는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나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품었지만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동하는 메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준 기억이 있고, 메이는 미국에 있을 때 동하가 써서 보여준 영시들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시와 자전거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함께 가진 영화 『호우시절』(2009, 허진호)의 영상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씨줄과 날줄이다. 그러나 두 남녀가 지닌 이런 낭만적인 기억들은 동하가 시내 관광을 하러 잠시 두보초당(杜甫草堂)에 들른 출장 첫날, 오후의 햇살 아래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드리운 긴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날 저녁 둘이 만나 맥주를 연거푸 마시고 또 고량주를 마시러 포장마차로 2차를 가면 두 사람의 미국시절 기억은 서로 엇갈린다.

▲ 영화 호우시절

말하자면 현재와 무관한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와 밀접하게 관련된 과거로 옮겨간다. 동하는 미국 유학시절에 메이에게 키스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하지만 메이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동하는 짐짓 자신이 메이의 남자 친구였다고 주장해 보지만 메이는 둘이 연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심지어 메이는 동하에게 자전거를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현대 영화의 오랜 주제인 진술(기억)의 문제를 던져놓는다. 물론 이것은 멜로드라마의 흥미와 감동을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그는 다림(심은하)과 정원(한석규)의 연애담을 각자의 시선과 기억으로 나누어 보여줌으로써 애틋한 감동의 느낌을 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 열쇠는 진술자의 기억 또는 시선 속에 숨겨진 욕망일 것이다. 욕망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진술자의 적극적인 의지를 통해 드러날 수도 있고, 진술자가 처한 무기력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차이는 있어도 결국 모두가 진술자의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다. 동하와 메이는 예전과 다름없이 매력적인 서로에게 이끌리고 서로를 원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처한 현실상황은 사뭇 다르다.

돼지곱창쌀국수

 

“메이, 너 그거 알아? 네가 김치를 좋아했더라면 우린 그때 완벽한 커플이 되었을 거야.”

“아니지. 네가 중국 음식을 잘 먹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결혼을 했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중국 음식을 얼마나 잘 먹는데……”

『호우시절』은 남녀의 사랑에 관한 심각한 주제를 다룬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대화는 적당히 우스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멜로 주인공들의 연애감정을 더욱 진전시키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페이창펀’이라는 사실적인 소재와 연결되어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연애 무드를 무르익게 한다.

동하가 처음 청두에 도착한 날 공항으로 마중 나온 능청맞은 지사장(김상호)은 그를 데리고 노천 식당에 가서 유명한 쓰촨의 국수를 맛보게 한다. 딴딴미엔(擔擔麵)으로 보이는 국수를 마주한 동하에게 지사장은 자꾸 자신의 페이창펀(肥腸粉)을 맛보라고 권한다. 동하는 어쩔 수 없이 한 젓가락 입에 가져가지만 비릿한 돼지창자와 혀를 마비시키는 아리고 매운 향신료에 숨이 막힌다. 쓰촨의 맛은 그렇게 강렬하고 이질적이다. 한국인의 ‘중화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김치와 중국음식으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끝에 메이는 배가 부르다는 동하에게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있다고 말한다. 동하는 손사래를 쳤지만 꽤 진지한 메이의 태도에 더 이상 만류를 할 수가 없다. 에누리 없이 그것은 페이창펀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돼지곱창 쌀국수’ 쯤 된다. 메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동하. 나는 페이창펀을 잘 먹는 남자가 좋아.”

여기서 동하의 기호나 선택은 무의미하다. 메이와 어렵게 다시 만나 이번에는 잘해보리라 마음먹은 동하는 컥, 컥 하면서도 페이창펀을 열심히 먹는다. 돼지창자를 삶다가 또 삼각형, 팔각형의 울긋불긋한 향신료들을 넣고 끓인 국물에 그 곱창을 썰어 넣고 쌀국수를 말아서 낸 붉고 느끼한 외계인의 음식을, 먹게 만드는 힘은 연애다. 하지만 이런 단순명쾌한 연애감정은 주로 박동하의 것이다. 메이는 동하와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가 기쁘지만 그녀가 처한 현실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메이에게 페이창펀은 단순한 고향 음식일 뿐만이 아니다. 물론 이 음식은 청두에서 나고 자란 메이의 삶과 기억의 상징이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안고 있는 상처와 관계가 깊다.

요즘 유행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뜻하는 ‘트라우마’라는 의학 용어를 빌려 말하면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페이창펀을 분리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다. 다시 말해 페이창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 나오지만 메이는 1년 전에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했다. 메이의 남편은 페이창펀을 좋아했고 사망 1주기가 되는 날 메이는 동하와 함께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한스럽게 오열하며 페이창펀을 끓여서 남편의 영정 앞으로 가져간다.

착각과 추측

 

미국 유학 시절에 동하는 메이에게 미국인 남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고, 메이는 동하에게 일본인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모두 착각이었다. 어쩌면 그들 자신의 자기보호본능이 만들어낸 두려움 때문에 갖게 된 착각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만 서로의 주변에 있는 다른 이성을 핑계로 자신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메이가 겨우 용기를 내서 고백했을 때에는 동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그날 동하가 말한 대로 두 사람은 키스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동하는 메이에게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주었다. 그러나 메이는 동하가 떠난 후 자전거를 팔아버렸고 1년 뒤 청두로 돌아왔다. 메이는 중국인답지 않게 자전거를 무서워했지만 동하의 자전거를 팔아버린 진짜 이유가 자전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동하가 없는 시?공간에서 자전거는 무의미한, 죽은 사물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하는 메이를 알면서 시적 영감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시들은 메이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귀국한 뒤에 메이는 동하에게 안부를 묻는 엽서를 보냈지만 동하의 답장을 받지 못했다. 갓 취직을 했을 때에는 너무도 바빴고, 좀 여유가 생겼을 때에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동하는 대답한다. 사실 몇 통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여러 번 답장을 쓰고도 보내지 못한 동하였다. 처음에는 메이를 그리워했을 것이고, 그럴수록 메이가 멀리 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메이는 고향에 돌아와 대학에서 일하면서 두보초당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영어 가이드를 했다. 선후는 불분명하지만 두 가지 일을 모두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메이는 동하를 잊지 못하고 엽서를 보냈고 기다리던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메이는 두보초당에서 만나 함께 일하던 다른 사람과 사랑하게 되었으며 결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메이는 동하와 다시 만난 며칠 동안 예전 미국 유학시절로 돌아가 다시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을 꿈꾸었다. 그 시절 동하와 메이는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설레임과 기쁨이 클수록 현실은 더욱 무겁고 절망적이다. 메이는 결국 동하에게 자신이 결혼한 여자임을 털어놓지만 남편을 잃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그녀는 이제 동하를 그만 놓아야 할 때라고 느낀다. 그리고 좀 더 가볍고 강해지려고 애쓰지만 혼자 감당하기 힘든 괴리에 부딪혀 넘어진다. 메이를 쓰러지게 한 것은 교통사고가 아니다.

동하가 쓰촨으로 출장을 온 목적은 ‘사천 현장 장비 조사 및 딜러 방문’이다. 여기서 ‘사천 현장’은 무거운 언어다. 박동하가 출장을 오기 1년 전인 2008년 5월 12일에 중국 쓰촨성 원촨(汶川)에서 리히터 8.0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쓰촨 전역에서 죽고 행방불명이 된 사람이 9만명이었다. 청두에서만 4,276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메이의 남편도 그들 중 한명이다. 무너져 내린 집과 건물은 21만 6천동이다. 지금도 쓰촨성 각지에서는 복구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동하와 지사장의 기업에서 생산하는 중장비가 호황을 누리는 것은 중국의 일반적인 건설경기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쓰촨 대지진 때문이다. 죽은 자와 산 자, 메이 남편과 박동하.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가

 

동하의 출장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청두 시내에는 촉촉하게 밤비가 내린다.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길가에 서 있다. 메이는 비에 젖은 얼굴로 동하를 보면서 묻는다. “옛날에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걸 기억하니?”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객관적인 ‘사실’이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할 때가 있다. 동하와 메이가 미국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국적의 차이, 민족의 차이, 문화의 차이, 또 그보다 유서 깊은 양국 사이의 오랜 선입견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만고불변의 차별의식이, 두 사람 사이에도 왜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현실’은 그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도 있고 거역하는 사람도 있다.

슬픈 얼굴로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동하,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 말은 시(詩)의 성인(聖人) 두보(杜甫)의 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보는 전란과 당쟁 속에서 심한 굴곡을 겪었지만 청두에서 초가집을 짓고 5~6년 동안 살았던 그 시절이 그의 인생에서 그나마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봄날 밤의 반가운 비」
두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니
봄에 내려 생명을 피어나게 하네
바람을 따라 밤중에 살며시 들어와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고 있구나
들길에는 먹구름 드리워 컴컴한데
강 위에 저 조각배 홀로 불을 밝혔네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청두는 온통 꽃으로 덮여 있구나
「春夜喜雨(춘야희우)」
杜甫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
江船火獨明 (강선화독명)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

 

두보의 이 시구에서는 해가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 시를 읽으면 마치 따사로운 봄 햇살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는 두보의 시가 이 영화의 따스한 이미지와 어우러지면서 생겨난 착각일 것이다. 『호우시절』은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과 운명적인 이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희망이 쓰촨 청두의 햇살과 촉촉한 봄비, 그리고 자전거와 잘 어우러져 아름답고 슬픈 감흥을 주는 영화다. 특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실적이지만 추악하지 않은 사물들은 이 영화가 지닌 서정시의 느낌을 더한다. 허진호 감독은 이전 영화들에서도 주인공들의 삶, 주변 인물, 사물의 리얼리티를 음으로 양으로 균형감 있게 보존하면서 꺼져가는 생명이나 지켜지지 못하는 약속들, 변해가는 사물의 속절없는 운명들을 조용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허진호의 영화는 시적 정서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본다면 마지막으로 갈수록 드러나는 메이의 아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햇살이 내리쬐고 물이 흘러가는 듯한 자연스러운 시나리오가 한 몫을 했다. 또 결이 섬세하면서도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까오 위안위안의 연기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우성의 연기도 이전과 사뭇 다르게 새로운 인물 전형의 가능성을 느끼게 한다.

 

커다란 무협, 『검우강호』/최인실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커다란 무협, 『검우강호』

글: 최인실(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

 

1.『검우강호』의 줄거리

 

『검우강호』는 달마의 시신에 관한 프롤로그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림 맹주를 만들어준다는 달마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한 강호인들의 혈투이다. 그리고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강호 최대의 살해집단 흑석파의 소개와 함께 장해단 일가가 살해된다. 하지만 곧 흑석파 최고 살수 세우가 팀을 배신하고 달마의 시신을 훔쳐서 달아난다. 흑석파는 세우의 목과 달마의 시신에 현상금을 건다. 그녀를 쫓는 강호인들. 세우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바꾼다.

이 숨 막히는 15분이 지나고 나면 『검우강호』는 세우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얼굴(장르)을 바꾼다. 증정이 된 세우는 등장과 함께 집을 구하고 비단 장수란 직업을 갖는다. 그리고 그녀는 우편배달부 강아생을 만난다. 강아생은 증정의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다음에야,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초반 15분 동안의 빠른 전개와는 다르게, 증정과 강아생의 사랑은 느긋하게 진행된다. 영화는 스피디한 무협에서 느긋한 로맨스로 변화한다.

증정의 도피 생활이 탄로가 난 것은, 강아생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자신의 무공을 드러낸 이후이다. 세우가 얼굴을 바꿨지만, 그의 무술을 바꾸진 못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한 번 얼굴을 바꾼다. 이제 『검우강호』는 흑석파에 속한 인물들의 욕망,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주로 다룬다. 세우라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남녀 관계(로맨스)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흑석파라는 모의 가족 관계로, 영화가 다루는 단위는 점차 복잡해진다. 그리고 영화는 육죽이 가르쳐준 4개의 초식으로 전륜왕을 물리친 증정과 강아생이 행복하게 맺어지는 것으로 엔딩을 맞는다.

 

2. 거세된 아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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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검우강호』에서 흑석파의 수령, 전륜왕은 이름 그대로 강호의 절대고수이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모습은 9품 서한잡이 환관 조봉이다. 강호에서 조봉은 절대 고수이지만, 그의 실체는 거세당한 환관에 불과하다. 그는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에 의해 남성성을 거세당한 인물이다. 그가 라마의 시신을 욕망하는 유일한 이유는, 거세된 자신의 신체를 정상인으로 돌려놓기 위해서이다. 명나라에 살던 조봉은 페니스를 거세당함으로써 국가의 폭력을 자신의 신체에 각인한다. 여기선 결핍이 곧 (통제의) 흔적이다. 『검우강호』에서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은 자신의 신체적 결핍, 즉 자신의 신체에 남아 있는 국가 폭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국가의 통제 이후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던 시절로 되돌리고자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봉이 흑석파의 수령이라는 점이다. 무술을 가르쳐주는 스승이자 전륜왕으로 불리는 수장으로서 조봉은, 흑석파 일원의 아버지 자리에 위치한다. 하지만 조봉은 페니스가 없는 아버지, 거세된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더 큰 아버지, 명나라 황제가 버티고 있다. 그러나 전륜왕을 통제하는 아버지, 황제는 『검우강호』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조봉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혹은 황제의 존재는 이 영화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거세된 아버지들’, 더 구체적으로는 거세된 아버지들의 욕망이다.

『검우강호』에서 조봉을 포함한 나이 든 남자는 모두 라마의 시신을 욕망한다. 채희서(마법사)는 자신의 병든 몸을 고치기 위해, 그리고 앉은뱅이 은행장 장대경은 다시 걷기 위해 라마의 시신을 욕망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모두가 무림맹주라는 강호의 큰아버지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거세 이전의 완전했던 자신의 신체를 욕망한다. 단지 그뿐이다. 또 그들은 자신이 거세된 이유나 시스템에 대해선 감히 불만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시체가 중국 외부인인 인도인 라마의 신체라는 점이다. 나이 든 남자들은 중국 외부의 신체로 자신들의 몸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즉 그들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결핍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부인인 라마의 신체는 800년 전 시체이다. 게다가 반 토막이 난 시체이다. 바로 여기가 그들의 욕망이 실현 불가능함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검우강호』 속 나이 든 남자들은 시체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한다. 그들은 이미 죽어버린 것 속에서 새로운 생명 혹은 건강한 신체를 욕망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시간屍姦에 몰두하는 병자처럼 광기에 사로잡혀있다. 『검우강호』의 풍경은 이 불가능성,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는 장 이머우의 2002년 작품 『영웅』과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이다.

 

3. 중국으로부터 무협, 홍콩(대만)으로부터의 무협

 

“(…) 유가의 ‘의(義)’가 통치계층의 경전중심주의와 결합한 것과는 다르게, ‘협의(俠義)’는 피압박계층의 도덕적 준칙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협의’가 약자의 철학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광범하게 중국대중의 심층을 형성하고 있는 요인이 되었다. 중국의 무협문화는 유가와 법가 통치의 경전중심주의적 권력에 대항하는 수단이었다.” – 박병원,「시가, 경극, 무협-중국 영화 속의 시의와 국가 상상」,『중국학논총中國學論叢 제19집』,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2006, p,107

중국 무협장르는 『와호장룡』 이후와 이전으로 나뉜다. 2000년 『와호장룡』이 세계화된 무협블록버스터 시대를 예고했다면, 이 흐름을 본격화한 것은 2002년작 장 이머우의 『영웅』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와호장룡』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지만, 중국대륙에서만큼은 예외였다는 사실이다. 중국 관객들과 평단은 대만식, 그리고 미국식으로 변형된 이안의 무협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반면 장 이머우의 『영웅』은 중국 ‘본토’인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 본토 내 흥행에서 처음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앞선 작품이다). 그러나 『영웅』 속 진왕의 ‘천하통일’에서 드러나는 중국인의 제국주의적 욕망은 중국 ‘외부인’들에게는 불편함을 주었다.

원래 무협은 약자의 장르이다. 무협에서 (유)협은 국가의 해체를 시도하고, 그들은 체제 밖에서 체제를 감시했다. 하지만 장 이머우의 『영웅』은 기존의 무협 장르를 뒤집는다. 영화 『영웅』에서 무명(자객 형가)은 사라지고, 진왕의 업적만이 남는다 (『영웅』의 마지막 장면은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진왕의 업적을 기록한 문자텍스트와 이를 읊는 나레이션이다). 2002년 중국의 욕망이 ‘진시황’으로 구체화되어 스크린에 등장했다. 피압박계층의 문화이자 도덕 준칙이었던 협객 문화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세계를 향한 중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드러내는데 이용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장 이머우는 『연인』, 『황후화』 등을 통해 이 경향을 이어갔다.

하지만 홍콩 출신 오우삼과 대만 출신 수 차오핑이 만든 영화 『검우강호』는 다르다. 의리가 땅에 떨어진 강호에서의 고아들의 생존기, 그것은 홍콩 누아르 장르인 동시에 홍콩 영화 자체이다. 홍콩 누아르의 시작은 오우삼 감독의 1986년 작품 『영웅본색』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송자호(적룡)과 송자걸(장국영) 형제의 아버지는 병들어 침대에만 누워있다가 영화 중반에 죽는다. 그리고 소마(주윤발)에겐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었다. 『영웅본색』 이후 오우삼의 영화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아예 사라진다. 이는 비단 오우삼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홍콩영화에는 대부분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형제가 있고, 연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마치 홍콩은 고아들이 만든 도시처럼 느껴진다.

중국 대륙에 의해 거세된 아버지 조봉, 마술사로도, 무술인으로도 완전할 수 없었던,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채희사, 최고의 경제적 부를 가졌지만 정작 걷지 못하는 장대경. 이 나이 든 세 명의 남자는 묘하게 홍콩을, 그리고 대만을 상기시킨다. 홍콩영화에서 사라졌던 아버지는 그렇게 온몸에 결핍의 흔적을 가득 갖고서 2010년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결핍은 결코 채워지지 못한다. 그리고 결핍(거세)된 아버지들의 아들과 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4. 살부, 가족의 해체 그리고 커다람

 

『검우강호』의 모티브 중 하나는 원수 집안의 딸과 아들의 사랑이야기인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세우와 장인봉은 이름과 얼굴을 버리고, 두 번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 사랑을 이뤄낸다. 둘의 사랑이 이뤄지는 과정은 언뜻 불교에서의 업보와 윤회, 그리고 결국 깨달음을 얻는 과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정확히 그것은 세우와 장인봉의 가족이 살해되고, 둘이 각자의 가족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아버지를 거부하고, 당신의 이름을 버리라”라고 로미오에게 요청한다. 그들은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지만 결국 둘의 사랑을 가로막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여전히 살아 있던 그들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줄리엣과 로미오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세우와 장인봉은 서로의 가족을 죽인다.

세우가 처음 스크린에 등장해서 하는 일은, 장해단 일가의 살해이다. 그리고 곧 그녀는 자신을 쫓는 강호인들로 이루어진 모의 가족을 살해한다. 하지만 정작 세우는 자신의 가족인 흑석파로부터 쫓긴다. 그녀는 얼굴과 이름을 바꾸지만 “細雨池上看 微風木末知 이슬비(세우)는 못 가운데에서 볼 수 있고, 가는 바람은 나무 밑에서 알 수 있다.” 라는 말처럼, 세우는 자신의 무공인 벽수검법으로 인하여 정체를 들키게 된다. 세우는 얼굴은 바꿨지만 자신의 무술을 바꾸진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는 조봉에게서 배운 무술을 버려야 했다.

조봉은 세우에게 잘못된 초식을 가르쳐 주고, 소림사 스님 육죽이 이를 바로잡아준다. 그리고 이는 세우의 스승, 즉 아버지가 조봉에서 육죽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불교가 중국 외부로부터 들어온 종교라는 것이 상기되어야 한다. 세우는 자신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던 결핍된 신체의 아버지를 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건강한 아버지를 선택한다. 육죽이 라마의 시체를 푸는 열쇠가 불심이라고 한 것은, 또 영화 내내 ‘돌다리’라는 모티브가 계속 등장한 것은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 중국 안의 이미 죽은 시체가 아니라 중국 ‘외부’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아버지 세대는 이를 깨닫지 못했고, 세우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세우는 이름을 버리고, 얼굴을 버리고, 무공을 버리고, 아버지이자 스승인 조봉을 살해함으로써 겨우 증정이 되었다. 장인봉은 흑석파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죽인 세우를 용서하고서(혹은 망각하고서) 강아생이 되었다.

『검우강호』 속 나이 든 남자들은 모두 죽는다. 장해단, 채희사, 장대경, 조봉은 자신의 욕망, 혹은 결핍을 메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거세된 아버지의 욕망은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었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거세’의 흔적은 극복되지 못하고, 아들과 딸에 의해 그들과 함께 통째로 제거된다. 그리고 남은 아들과 딸은 무덤가에서 되살아난다. 때문에 『검우강호』의 터무니없이 낙천적인 마지막 장면은 사실 무섭도록 냉정한 결론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는 거세된 아버지 세대를 죽여야지만 새로운 세대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이다. 또 그 새로운 세대는 중국 내부가 아닌 중국 바깥에서 새로운 스승,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거세된 아버지들이 신체에 집착하는 반면, 아들과 딸은 신체가 아닌 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이 새로운 세대들이 말하는 것은 영토를 넘어선 국가, 진정한 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중국 대륙으로부터 파생된 국가 정체성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 홍콩, 대만(그리고 마카오)이라는 거세된 국가성은 제거해야 한다. 무덤으로부터의 부활, 탄생.

많은 사람들이 『검우강호』가 기존의 무협블록버스터에 비해 소작인 것에 아쉬움을 표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배우 정우성이 주연한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장 이머우의 『영웅』이 중국으로 모아지는 한 점, 단지 일一을 말하고 있다면 수 차오핑의 『검우강호』는 중국을 넘어서는 세계, 다多를 말한다. 『영웅』이 모든 걸 한 점으로 모으는 깔데기라면, 『검우강호』는 뒤집힌 깔데기이다. 작은 점으로부터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뒤집힌 깔데기 말이다. 또 『검우강호』는 영토 국가, 민족 국가를 넘어선, 세계인으로서의 상생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보기에 『검우강호』는 작은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커다란 영화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성은?, 일본 드라마 ‘mother’ / 신우현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당신이 생각하는 모성은?

– 일본 드라마 ‘mother’를 보고 –
글: 신우현 (상지대 강사)

 

모성신화 추종자의 고백

 

지금 나는 모성신화를 믿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희생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도 꽤나 오랫동안 이 신화의 추종자였다. 결혼 전에는 친정어머니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엄마가 이래?’ 라며 이런저런 불평을 해댔다. 엄마라면 당연히 자기희생적이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아이를 낳고나서는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처음 아이를 낳고 삼 년 간은 무척 힘들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엄마의 모든 시간과 주의력과 육체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좋아하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여유,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모두 허용되지 않았다. 아이가 원할 때 젖을 물려야 했으며, 수시로 찾아오는 젖몸살, 젖 먹이느라 손목이 나가서 침을 맞아야 했던 일 등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시기의 일로 육체적인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봐도 내 몸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 일본 드라마 머더mother

게다가 아이가 좀 더 크자 육체적인 고통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힘들었다. 끼니를 챙기는 등의 엄마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무게, 온전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사회의 일원으로 규범을 익히도록 돕는 일,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바른 방법 등 모두 어려운 일 투성이였다. 매일 자기 한계를 느껴야 했다. 그러니 자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도 부족한 엄마인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일과 나만의 시간을 원하는 내가 또 있었다.

나는 현명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으며, 여전히 이기적이어서 헌신적이지도 않은 열등한 엄마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모성이 부족한 여자구나.

일본 드라마 ‘mother’

이제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마더’는 김혜자 씨가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다던 한국의 영화가 아니다. 전해 듣기로는 모자란 아들을 지키려고 엄청나게 싸워나가는 엄마가 그려졌단다. 하지만, 가뜩이나 엄마로서 열등감에 싸여 있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평상시 즐겨가는 블로그에서 이 드라마를 알게 되었다. 무척이나 짜임새가 있는 이야기가 좋았고, 특히 여덟 살 여자아이 역할을 했던 아역 배우의 연기가 좋았다.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희생적인 어머니를 찬양하는 모성신화를 신봉하는 작품이 아니라서 좋았다.

찾아보니 ‘mother’는 2010년 4월부터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TV 드라마였다. 진지한 소재에 비해 16%라는 상당히 높은 시청률로 보인 것으로 미루어 일본에서도 꽤나 호응이 컸던 작품이다. 게다가 아동학대와 유괴라는 선정적인 소재의 이야기라 자칫하다가는 막장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라는 평가받고 있었다.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스즈하라 나오는 30대 중반의 철새를 연구하는 대학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하지만, 연구소가 폐쇄되는 바람에 아이를 싫어하면서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임시로 떠맡은 학급의 담임으로서 미치키 레나라는 8살짜리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레나는 온 몸에 멍이 들어 있어 학교로부터 아동학대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받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차가운 얼굴로 방관하던 나오는 우연히 영하 4도의 날씨에 얇은 원피스 바람으로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어진 채 골목에 버려져 있던 레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나오는 레나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여 레나를 데리고 떠난다. 하지만, 생모가 아닌 여자가 아이에게 모성을 품는 것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범죄다. 결국 나오는 유괴범으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나오가 레나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학대받던 아이를 보호하는 범주에서 벗어난다. 아동보호소와 경찰이 부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기를 놓쳐 학대당하던 아이가 죽을 수 있다 해도, 새로운 연구소의 일자리까지 마다하고 잡히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유괴범이 되기로 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사실 나오는 생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였다. 생모로부터 버림받은 기억 때문에 나오는 친자식 못지않게 사랑해준 양어머니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버려질 당시 자신이 웃는 것을 보고 안심한 생모가 자신을 떠났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버려진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오가 눈앞에서 처절하게 버려진 레나를 보고 외면할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진정한 엄마가 될 수 없다. 처음에 나오는 츠쿠미(나오가 엄마로서 레나에게 다시 붙인 이름)의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하지만, 츠쿠미의 손이 커지고 키가 크는 걸 보고 기뻐하면서, 식사를 챙겨주고, 발에 맞는 편한 신발을 사주고, 도망다니는 처지에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에 보낸다. 이러는 과정에서 나오는 배 아파 낳지도 않은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하게 된다. 자신이 엄마이기를 자처하면서 츠쿠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구하려 하고,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

나오는 뒤쫓아 온 레나의 생모에게 아이는 부모를 미워할 수 없는 존재니까 진짜 엄마의 품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의 행복이라면, 레나를 돌려주겠다고 이야기한다. 만일 나오가 버린 아이를 구원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어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면, 나오가 체포된 뒤에 신문에 난 기사처럼 독신 여성의 외로운 마음의 틈을 메우기 위해서였다면, 어떤 이유로도 생모에게 츠쿠미를 돌려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츠쿠미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나오는 엄마로서의 사랑을 츠쿠미에게 쏟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오의 사랑은 기존의 모성 신화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런 환타지 안에서 자신이 낳지도 않은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하는 나오는 절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성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스스로 ‘이 아이는 내 아이다’, ‘내가 이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는 의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를 현실로 실현하여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유지된다. 아이의 존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을 통해서 사랑은 현실화된다.

모성은 어떻게 상실되는가

 

레나의 생모는 드라마의 중반까지도 남자에게 미쳐 자신이 낳은 아이를 방치하고 학대하는 이해될 수 없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레나는 감수성이 뛰어나며 명랑하고도 사랑스러운 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아이답지 않다. 과연, 드라마 중반부에는 레나와 나오를 뒤쫓아 온 레나 생모의 과거가 나온다.

레나의 생모는 원래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사랑을 주는 엄마였다. 뉴스에 보도되는 아동학대의 사건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치부하는 엄마였다. 하지만, 레나 아빠와 이혼하면서 점점 망가진다.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집안일을 하고, 점점 커가는 아이의 양육을 담당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도움이 될 만한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이 전혀 없는 상황은 레나의 생모를 막다른 벽으로 몰고 간다.

숨을 돌리러 들어간 술집에서 만난 남자를 집에 들이게 되고, 그 남자는 재미로 레나를 벽장에 가두거나 목도리로 목을 조르는 등의 학대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만류했지만 남자가 집을 나가려 하자 레나의 생모는 레나를 방치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조숙한 레나가 엄마를 감싸기 위해 병원이나 학교, 이웃에 몸의 상처에 대해 거짓말을 하자 오히려 그 거짓말에 숨어버린다.

하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레나는 어느날 밤 엄마에게 이제는 도와달라고 울면서 요청한다. 하지만 레나의 생모는 이를 외면했고, 다시 남자가 레나에게 원피스를 입혀 화장을 시키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는 이번에는 자신이 원피스 차림의 레나를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골목에 내놓고 외출을 해버린다.

가사와 양육,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을 혼자서 힘겹게 하면서 애쓰지만 결국 망가져버린 레나의 생모 이야기는 충분히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었다. 영화에서처럼 극한 상황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자신을 엄청나게 희생하는 엄마만 위대한 엄마가 아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일상의 무게를 견디면서 끊임없이 아이와 자신을 위해 무엇이 좋은지 고민하고 삶을 살아온 모든 엄마들은 위대하다.

하지만, 레나의 생모는 결국 자신을 놓아버렸고, 아이도 놓아버렸다. 자신이 직접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이와의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드라마에는 레나의 생모가 쫓아와서 레나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레나가 울며 보호를 요청했을 때도 외면하고, 딸을 쓰레기봉투로 포장해 버린 엄마면서도 말이다. 자신은 사랑하기를 그만두어도 아이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모성은 상실될 수 있다. 엄마라고 해서 자연스레 모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인 아이를 끊임없이 배려하고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엄마로서의 사랑은 없어진다. 가꾸지 않으면 사랑은 상실된다.

모성 신화가 극복되어야 하는 이유

 

레나의 생모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엄마라면, 좀 더 강하게 자신을 추스르고, 아이를 사랑했어야 했다고 가르치는 것도 쉽다. 하지만, 누가 레나의 생모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물론 아무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레나 생모의 잘못을 옹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존을 추구하는 약한 자의 사랑이라는 면에서 풀이하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계 맺은 첫 상대에 대한 조건 없는 호감의 감정이라 풀이하든 아이는 부모를 사랑한다. 그런데도 현실 속에서 아직 아무런 힘도 없는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방기하고 학대하는 것은 범죄다. 하지만, 가사와 양육, 생계유지까지 혼자서 담당해야 했던 레나 생모의 실패는 동정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모성신화에 비추어 레나 생모를 비난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모성 신화는 아이의 양육을 전적으로 엄마에게 떠넘기는 전략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기꺼이 주고 배려한다. 엄마의 적극적인 배려와 사랑은 성장해야 하는 아이를 제대로 돕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올바른 의미의 양육은 엄마 혼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빠의 사랑과 도움도 필요하고 사회의 제도적인 뒷받침도 필요하다.

현실 속의 엄마는 모성 신화 속의 엄마처럼 강하지 않다. 그저 나약한 인간으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에서 사랑하는 아이와 자신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싸워가며 살아나갈 뿐이다. 그래서 엄마는 강해져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본래적으로 자기희생적이고도 강한 모성을 지니는 존재라고 신화로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비극을 낳는다. 레나 생모와 같은 방황하는 엄마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노력을 사전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힘 낼 수 있었을 엄마들이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는 힘껏 아이를 사랑으로 안아 줄 수 있었을 아빠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게 되고, 아이들은 받을 수 있었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모성 신화가 강조될수록 양육에 2차적인 책임이 있는 사회는 그 책임을 면하게 된다.

되돌아오는 모성신화

 

드라마의 최고 반전은 나오의 생모가 나오를 버린 이유다.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산 듯한 그녀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막다른 골목의 나오와 츠쿠미를 있는 힘껏 돕는다. 게다가 나오의 생모가 츠쿠미에 대해 쏟는 사랑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배려 깊은 할머니의 사랑이어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나오를 버렸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드라마 중반에 나오의 생모는 폭력을 행사하던 남편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살인을 저지르고 딸과 도망을 다니다가 나오를 버린 뒤 경찰에 체포되어 13년을 복역했던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결말 부분에 가면 사실은 어린 나오가 엄마를 구하기 위해 집에 불을 질렀고, (엄마는) 딸의 죄를 덮기 위해 자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암시가 나온다.

드라마를 볼 때는 이 부분을 보면서 ‘아아,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그 기구한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곧 마음이 불편해졌는데 제작진이 모성신화를 이야기의 절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승부처로 사용했다는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었다.

한 때 잘못한 엄마여도, 아이를 버리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속죄하고 진심으로 아이를 대했다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저렇게까지 강한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은 것 아니었을까? 오히려 나오의 생모가 과거에 잘못이 있었던 설정으로 딸과 화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주제의식에 맞았던 것 아닐까? 모성신화는 문화 상품 생산의 산업적 전략에서 더 부풀려져왔던 것인 걸까? 라고 부족한 엄마인 나는 계속 뇌까리고 있었다.

사랑, 그리고 또 사랑

 

나오는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츠쿠미를 구하고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 차가운 무표정의 얼굴로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던 나오는 츠쿠미의 엄마가 되면서 웃음을 서서히 되찾는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인생이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더욱이 자신을 버린 생모를 만나게 되고, 정면으로 마주 대하게 되었고, 버림받은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상처를 치유하고 또 다른 사랑을 낳게 되었다.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지를 갖는 일, 그 상대인 아이를 끊임없이 지켜보면서 배려하는 일은 힘들지만 희생적이지만은 않다. 아이와 사랑하는 과정에서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엄마이고, 소중한 사람의 존재 덕분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엄마이기 때문이다. 모성이 부족한 엄마여도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손발이 오그라들더라도 말해보고 싶다. 믿는다. 사랑의 힘을.

 

 

아피찻퐁의 아름다운 시선/이지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아피찻퐁의 아름다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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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올해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영화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쿨(Apichatpong Weerasethakul)이라는 이름도 낯선 태국 감독의 영화 [엉클 분미Uncle Boonmie :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라는 생소한 영화였다. 영화를 유독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이 태국 감독의 이름을 외우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들뢰즈의 영화론을 전공한 필자에게 주변 사람들은 이 감독의 영화들을 꼭 보라고 추천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들과 게으름으로 지난 봄까지 그의 영화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스쳐오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봄, 이름만 들어왔던 이 낯선 감독의 영화를 드디어 보고야 말았다. 맨 처음 본 것은 2006년작 ?징후와 세기Syndromes and a Century?였고, 이 영화를 시작으로 그의 영화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었다.

아피찻퐁의 독특한 영화세계

 

시골의 병원에서 어떤 여의사와 그를 좋아하는 어떤 남자, 그리고 여의사가 좋아하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중반부에 이르자 배경은 갑자기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고 똑같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여 전반부와 거의 동일하지만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완전히 이상한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관객들이 기대할만한 어떠한 서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서사를 방해하기 때문에 편집되어 마땅할 만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그래서 처음엔 ‘대체 이 영화는 뭐지…’라며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영화의 매우 느린 리듬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영화 속 세상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었다.

매우 느리면서도, 묘한 리듬. 그리고 영화 속에 흩뿌려지듯 드러나 있는 정부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뉘앙스. 나중에 이 영화가 군부의 검열에 의해 몇 장면 가위질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참으로 놀랐었다. 검열 자체나 가위질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묘하고 어려운 예술 영화에 뉘앙스로 산포된 비판적 정조를 군부 당국이 알아차렸다는 점 때문이었다.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자면, 태국 군부는 대체 얼마나 지적인 심미안을 가졌기에 이 영화의 비판적 뉘앙스를 해독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엉클 분미

실은 이 우스갯소리를 빌어 말하고 싶은 점은 아피찻퐁의 영화는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성취를 이루어낸 보기 드문 수작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글에서는 자세한 분석을 하지는 못한다. 그저 그의 영화를 지금 이 시대에 왜 보아야 하는가만을 말하고자 한다.
하여간 필자는 [징후와 세기]를 출발점으로 아피찻퐁의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2004년작 [열대병 Tropical Malady]과 2002년작 [친애하는 당신 Blissfully Yours], 그리고 2000년작 [정오의 낯선 물체 Mysterious Object at Noon]로 필자의 아피찻퐁 영화에 대한 애정은 이어졌다.

그의 영화들은 모두 독특한 구조와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열대병]과 [친애하는 당신]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영화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한 이분법적 구조를 띠고 있는데, 주로 도시와 정글의 서로 다른 삶의 모습과 흐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느린 흐름의 영화 속에는 서사와 무관한 태국인들의 삶의 모습들이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방식으로 담겨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영화는 응시한다. 도시의 삶, 그리고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과 동물 그리고 그들 모두를 끌어안는 그들의 역사적 기억으로서의 신화적 믿음이 펼쳐진다. [열대병]의 경우 호랑이와 인간의 교감이 후반부에서 매우 강렬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제목부터 낯선 [정오의 낯선 물체] 역시 매우 새로운 방식의 구조와 리듬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허구와 실재가 서로를 넘나드는 기묘한 다큐멘터리 형식을 보여주며, 초현실주의자들의 창작방법론인 ‘우아한 시체(cadavre exquis)’ 개념에 기초하여 전개되는 독특한 개념 영화이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이어가게 하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신화로 갔다가 전쟁의 역사로 갔다가, 주변의 이야기로 갔다가, 멜로 드라마로 가기도 한다.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허물며 태국 시골 지방에 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이고도 역사적인 기억들과 집단적 무의식을 그들의 삶의 모습과 함께 담아낸 이 영화 역시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 삶의 어떤 부분을 바라보고 듣게 된다. 서사로 직조된 극적 효과를 갖는 어떤 이야기에 관객이 흡수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삶과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바라보고 듣게 된다. 그 느리고 묘한 그러면서도 매우 단순한 리듬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과 같은 리듬을 타고 함께 흘러가게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 많은 관객들의 경우 서사와 무관한 흐름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뜬금없이 깜깜한 숲속을 헤매던 군인이 호랑이와 마주하며 교감하는 신화적인 이야기에 놀라 영화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허구도 실재도 아닌, 혹은 허구이면서 실재인 영화의 기묘한 방식에 놀라고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낯선 영화를 거부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관객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관객들은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특정한 영화 방식에만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보기와 듣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 눈과 마음에 퍼부어지듯 쏟아져 들어왔던 헐리우드식 영화는, 아피찻퐁의 표현을 빌자면, 관객을 스크린 앞에 붙잡아 두기 위해 대략 2시간 동안 너무나도 복잡한 장치와 스펙타클을 만들어 내왔다. 코카콜라에 익숙해지듯 그런 방식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에 아피찻퐁의 영화는 정말로 ‘낯선 물체’이고, 그래서 경우에 따라선 불편하고 이상한 물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응시와 성찰

하지만 헐리우드식 영화의 속도와 볼거리에만 익숙한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마음과 의식의 리듬 속에서 그의 영화를 본다면, 그가 보여주는 태국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숲과 그들의 기억과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가서 우리도 함께 그들의 삶을 응시하게 된다. 아피찻퐁의 영화의 미덕과 관련하여 필자가 말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 응시이다.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건, 아니면 핸드헬드로 사람들을 따라가건, 혹은 매끈한 달리샷으로 화면을 관통하건 간에 감독은 태국의 삶과 자연과 기억을 응시하게 만든다.

응시, 즉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그것이 지닌 상처가 무엇인지를 알아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의미와 상처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싯구절을 인용해 다시 표현하자면,

오래 쳐다보다보면 사랑하게 된다.
오래오래 쳐다보면
상심하여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최민, [그대만 허락한다면] 中에서)

그리고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면밀히 생각하고, 성찰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성찰’이란 결국 철학자가 하려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닌가. 세상을 이해하고, 그 세상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을 좀 더 낫게 만들고자 성찰과 실천을 하는 것. 이것이 철학이 하고자 하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피찻퐁의 영화는 헐리우드식 폭력과 스펙타클에 눈과 영혼을 빼앗겨 버린 관객들의 영혼을 정화시켜주며,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연과 그 속에 깃든 인간사의 모든 기억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에게 사유하게끔 해준다.

들뢰즈식의 언어를 사용하여 다시 표현하자면, 아피찻퐁의 영화는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감각과 영화적 기호들을 창안하여, 관객인 우리로 하여금 그 기호들이 강제하는 사유를 창조하게 만든다. 물론 이 낯선 기호들은 우리에게 이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쉽게 허락해주지는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새롭고 낯선 기호들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거부하거나 피곤해하며 고개를 돌리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다른 예술과 달리 영화의 경우 오락물이라는 선입견이 워낙 강해서 관객들은 익숙하고 편한 재미만을 찾으려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그의 영화를 난해하고 이상하다고 외면하는 것도 이상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언제나 우리의 익숙한 관습만을 답습해야 할까.

영화는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거나 새로운 예술적 감각을 구성해내면 안된단 말인가. 말이나 글을 통해 보여줄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바라보며 느끼고, 그러한 응시와 감응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전개해야 하는 건 소위 영상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새로운 성찰 방식이 아닐까 싶다.

아피찻퐁의 이러한 성찰과 사유방식은 올해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엉클 분미]에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피어났다. 바로 며칠 전 서울에서 열렸던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CinDi)’에서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커다란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삶과 환상과 꿈과 존재의 모든 차원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이전 영화들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관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도, 슬퍼서도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저 어떤 존재하는 생명의 리듬과 하나로 만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이유를 말한다면, 아마도 독자들 중에는 너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글로 쓰고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영화로 만들기 때문에, 이 영화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는 감독의 언급은 영화를 보며 흘렸던 내 눈물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다.

폭력의 시대와 시선의 윤리성

난해한 예술영화라고 평가되는 외국 감독의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아피찻퐁의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영화가 새로운 사유를 촉발시키고, 영화의 개념 자체를 새롭게 반성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져 흥행하고 있는 ‘나쁜 영화들’ 때문이기도 하다. 피의 향연과 난도질, 복수의 끝을 보여주는 몇몇의 한국 영화가 요즈음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평론가들의 의견과 평가도 갈리고 있는 모양이다.

폭력성 때문에 상영이 몇 차례 지연되기도 했던 어떤 영화의 경우, 왜 이런 잔혹한 영화를 만드느냐는 질문에 감독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대답했다. 그 이야기에 필자는 사실 화가 났었다. 현실에 그런 폭력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영해야 할 현실엔 우리가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할 다른 현실들도 분명 존재하는데, 그 감독이 대중들에게 엄청난 돈을 들여 보여주려고 선택한 ‘현실’이라는 것들은 대체 무슨 근거에서 선택된 것인가.

물론 피범벅이 난무하는 영화라고 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보여주느냐 하는 ‘시선의 문제’이다. 타인의 고통을 가학적인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고, 카메라는 그저 도구일 뿐이라며 모든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한 시선. 이것은 분명 ‘나쁜 바라보기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런 나쁜 방식으로 세상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세상 보는 방식도 병들어 타인의 삶의 고통에 둔감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일례로 며칠 전 앞서 언급한 영화제에서 피범벅+난도질 한국 영화를 한편 보았는데, 그 영화를 보는 내내 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한 여자의 삶을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까지 가학적으로 몰고 가서 결국은 그 여자가 모두를 죽여버린다는 설정의 영화였는데, 이 영화가 끝난 후 몇몇 관객의 박수소리에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영화가 얼마나 기존의 장르 영화의 관습과 상투성들을 짜깁기하고 뒤섞어서 영화적으로 촌스러운지는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타인의 불행과 그 불행을 관음증적으로 즐기는 시선에 동조하여 박수를 치는 관객은 대체 뭐란 말인가.

시대가 하수상하여 끝없이 피범벅+난도질 영화가 생산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며 시대탓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모든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가. 논리와 글을 사용할 줄 안다고 모두 철학자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카메라를 사용할 줄 안다고 모두 영화감독이 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쁜 영화에는 그것을 만드는 감독과 제작자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영화를 흥행하게 하는 관객도 나쁘다고 본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가학성과 폭력에 동참하면서, 인간이라면 자신이 사는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관객으로 아무 죄의식 없이 동화되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나쁜 관객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나쁜 시대에, 저예산으로도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감독의 영화들이 소중한 것이다. 삶을 새롭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바라보고 성찰하게 해주는 영화. 좋은 영화란 바로 이런 영화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 친절하게도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진들의 게재를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역시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입니다. (글쓴이)

숭고한 히스테리자 몬드리안/박영욱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숭고한 히스테리자 몬드리안

박영욱(숙명여대 교수)
몬드리안은 헤겔주의자이다?

 

지젝에 따르면 헤겔은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이다. 히스테리 환자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는 강박충동이다. 헤겔의 텍스트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헤겔이 거의 똑같은, 하지만 헤겔 자신에 따르면 이전의 단계보다 고양된 논리구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음을 쉽게 경험하였을 것이다.

히스테리 환자에게 반복된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는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대상이나 목적을 결코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환자는 애초에 도달할 수 없는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며, 그러한 집착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소유하고 싶지만 소유할 수 없는 이성에 대한 집착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것이 히스테리 환자의 정해진 운명이다.

헤겔의 대상은 애초에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물자체’(Ding an sich)라는 초월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아예 인식의 대상에서 제거함으로써 히스테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헤겔의 소유욕은 히스테리와 같은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는 절대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인식의 틀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러한 절대지는 소유하고 싶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히스테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이 대상은 숭고한 대상이다.

▲ 몬드리안ⓒ위키피디아

물론 헤겔이 추구하는 대상은 실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숭고한 어떤 것은 아니다. 단지 헤겔에게 숭고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대상 자체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숭고는 그러한 덧없는(?)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 헤겔의 태도에 있을 뿐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er Cornelis Mondriaan, 1872-1844)의 작업 역시 헤겔과 마찬가지로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의 히스테리적인 집착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향을 넘어서 모더니즘 예술 일반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근대철학을 막장까지 끌고 간 헤겔에게서 숭고함 혹은 위대함을 느낄 수 있듯이 몬드리안의 작업 역시 모더니즘의 막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위대하다. 헤겔에게 ‘위대한’ 헤겔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몬드리안에게도 당연히 ‘위대한’ 몬드리안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차가운 추상이라는 무식하고도 억지스러운 명칭이 붙기도 한 몬드리안의 회화는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라는 이름으로 요약된다. 신조형주의의 목적은 재현주의를 거부하고 이미지가 어떤 대상의 이미지가 아닌 그 자체가 즉물적인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러하다. 재현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회화의 이미지는 어떤 대상 혹은 모델을 재현한 것으로서 그 자체는 항상 어떤 것의 이미지일 뿐이다.

몬드리안에 앞서서 피카소 역시 회화를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그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피카소의 작업은 모델에 대한 단순한 복제를 넘어서 변형하고 왜곡하였지만, 여전히 모델에 대한 재현주의의 관점을 완전히 넘어설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무수한 단면으로 대상을 쪼개었지만 여전히 모델이 되고 있는 형상들 자체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신조형주의는 재현주의에 대한 완전한 단절의 소산이다. 몬드리안은 회화에서 재현된 어떤 것을 암시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 경우 회화는 여전히 무엇인가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회화를 어떤 것의 이미지가 아닌 하나의 즉물적인 사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회화의 이미지는 어떤 것의 환영이 아닌 존재 자체인 셈이다.

어떤 것의 이미지가 아닌 사물로서의 이미지 자체를 만드는 것이 몬드리안 작업의 핵심이다. 몬드리안에게 이는 곧 회화에서 어떠한 재현적인 암시도 배제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신조형주의를 선언한 이후 몬드리안의 작업은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재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자 하는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모더니즘의 그리드

 

흥미로운 사실은 몬드리안이 재현주의를 거부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식이 모더니즘 회화 일반의 패러다임을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는 피카소의 작업이 (분석적 큐비즘 시기의 피카소)가 어정쩡하게 재현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것과 달리, 그리드(grid)를 내세움으로써 재현주의를 청산하고자 한다. 너무나 잘 알려진 1920년의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구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그리드(격자)는 르네상스회화에서 모델을 공간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사용하던 장치이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모더니즘 회화에서 사용된 그리드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참고할 그림: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구성’(몬드리안, 1920)

모더니즘 회화에서 그리드는 어떤 것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리드 자체가 그려지고 있다. 말하자면 회화는 그리드로 만들어진 어떤 이미지가 아닌 그리드 자체인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회화를 대변하는 것이 바로 그리드라는 미술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크라우스는 모더니즘 미술의 그리드를 헤겔 논리학을 빌어서 설명한다. 헤겔 논리학에서 최초의 범주는 ‘존재’(Sein)이다. 이때 존재는 적어도 세계가 나타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범주로서 논리적 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존재’는 단지 ‘있다’(존재)라는 규정 외에는 어떠한 규정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단지 ‘존재한다’가 아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세계의 존재론적 토대로서의 순수한 존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존재는 어떠한 규정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실질적으로 공허한 것이며 ‘없음’(무, Nichts)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모더니즘 회화에서 그리드는 정확히 헤겔 논리학의 ‘존재’와 일치한다. 그것은 어떤 것, 즉 어떤 조형적인 것이 있기 위한 최초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어떠한 구체적인 사물도 아닌 셈이다.

헤겔의 논리학에서 존재라는 범주가 사고의 형식을 추상화한 것이 아닌 존재론적 범주이듯이, 모더니즘 회화에서 그리드는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형식이 아닌 그 자체 존재론적인 위상을 갖는다. 말하자면 그리드는 조형적인 것의 존재론적 토대인 셈이다. 아마도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해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을 헤겔주의자로 자처하며 끊임없이 헤겔을 인용하였으며 자신의 작업을 헤겔 철학과 연관지었던 몬드리안에게 그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헤겔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몬드리안 또한 단번에 직관적인 통찰만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헤겔이 셸링의 낭만주의를 비꼬았던 것처럼 몬드리안 역시 낭만주의와는 달리 숭고한 가시밭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에게 그리드는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드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어떤 것이었다.

가령 1920년의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구성’을 다시 보자. 이는 단순한 그리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단순한 검은색 선과 면적이 다른 사각형의 면, 그리고 기본적인 색의 배치는 적어도 조형적 차원에서 볼 때는 존재의 시원을 나타내며 어떠한 재현적인 암시도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결코 몬드리안에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생각지도 못하였던 재현적인 요소가 발견되었다. 이 그림에서 선과 면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처럼 어떤 위계질서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선은 형상을 형성하고 면은 자연스럽게 배경이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재현의 구도인 셈이다. 이러한 위계질서를 극복하지 않을 경우 재현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셈이다.

그리드의 변형과 파괴는 회화론의 변화가 아닌 일관성의 결과

 

부주의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약간의 형태변화로만 여겨질 수 있을 뿐인 변화는 1930년대 초반부터 나타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의 선이 아닌 두 개 혹은 세 개의 겹친 선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그는 선을 두 세 개로 겹침으로서 선과 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가령 1932년 ‘이중선과 노란색의 구성’을 보면 화면 상단에 검은색 수평선이 두 개로 겹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검은색 수평선 사이에 낀 흰색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좁은 흰색 면일까 혹은 흰색 선일까?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선과 면의 중첩 혹은 구별짓기 자체의 파괴가 나타난다. 화면은 선과 면, 혹은 형상과 배경의 위계질서가 아닌 오로지 리듬에 의해서 구성된 단일한 화면이 되는 것이다.

*참고할 그림: ‘이중선과 노란색의 구성’(몬드리안,1932)

선과 면의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리듬만을 강조하는 그의 작업은 1940년대 이후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1942-3년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는 선과 면의 차이가 없어지고 리듬만 남는다.

많은 이론가들은 1940년대 이후 몬드리안의 작업이 신조형주의의 원칙을 파기하고 재현주의로 전향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가령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는 브로드웨이가의 현란한 거리를 재현한 것으로서 예전의 비재현주의 회화를 포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이 아닌 ‘뉴욕시’,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등의 구체적인 거리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였다는 것도 이러한 해석의 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뉴욕시, 브로드웨이 등은 그의 그림이 재현하는 대상이 아닌 그저 그가 작업한 장소를 나타낼 뿐이다. 당시 그림은 분명하게 선과 면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고자 한 그의 작업을 더욱 극단적으로 몰고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유작이자 미완성 작품인 ‘승리의 부기우기’가 왜 미완성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1942년부터 44년 죽기 전까지 몇 번이고 이 그림을 다시 그렸지만 결국은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미완성의 작품이 말 그대로 작품의 완성도면에서 미성숙한 것이며, 몬드리안의 극히 실망스러운 말년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몬드리안이 정작 이 작품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고친 이유가 있다. 그는 재현주의를 피하고자 선과 색의 위계질서를 해체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 이 그림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어떤 시각적인 번쩍거림, 즉 시각적 환영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참고할 그림: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몬드리안,1942-3) ; ‘승리의 부기우기’(몬드리안,1942-4)

마치 네온사인처럼 빛나는 이 시각적인 번쩍거림은 심지어 브로드웨이의 밤거리를 묘사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기에도 충분하다. 그에게 시각적 환영이란 곧 또 다른 의미의 재현적 구조를 암시하는 것이므로 피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몬드리안은 이러한 시각적 환영을 피해야만 하였다. 그러지 못할 경우 그의 작업은 송두리째 실패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시각적 환영이 발생하지 않을 때까지 그림을 몇 번이고 고쳐 그려야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인 것이었다. 어떠한 것의 이미지도 아닌 사물 자체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지만 결코 죽고 나서도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몬드리안은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대상을 소유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그것에 집착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몬드리안에게 회화는 단순히 하나의 표현수단이 아닌 숭고한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몬드리안의 작업은 단순히 몬드리안 개인의 성향이 아닌 모더니즘 회화 일반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모더니즘 회화는 현실과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서 초월적인 숭고한 대상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 돌아오는 부메랑 효과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뿐이었다. 그것은 헤겔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헤겔은 ‘위대한’ 히스테리 환자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몬드리안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위대한’ 히스테리 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을 이유로 몬드리안의 그림을 싣지 못하고 ‘참고할 그림’ 목록만 나열했습니다. 독자들의 양해와 저작권에 대한 깊은 분노의 공유를 바랍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