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크네의 계단[카메라 옵스큐라]

어느 날 회현동 좁은 골목을 지나다 2층 창가에서 들려오는 드르륵 하는 재봉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틀 끝에 처연히 매달린 계단. 누구라도 상승을 꿈꾸며 달려들었다가는 필시 깊은 상처를 입고 말 날카로운 쇠창살, 그리고 당장에 거 보란 듯이 이미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는 실 뭉치. 거기서 나는 아라크네가 꿈꾸었을 법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다.

그리스 신화의 아라크네는 신과 인간을 통틀어 최고의 자수(刺繡)실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만 잘 놓으면 신들의 영역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경쟁은 공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수의 여신 아테나와 솜씨를 겨루면서 신들의 ‘더러운’ 모습을 ‘아름답게’ 수놓아 아테나를 이기지만 그로 인해 죽음을 당하고 만다. 아라크네는 아테나로부터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테나가 그녀를 불쌍히 여겨 죽이지 않고 거미로 만들어 계속 실을 뽑아내게 했다지만 그건 일종의 진통제요 마취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죽었다. 처음 그녀는 실력만 뛰어나면 천국의 계단을 올라 저들처럼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오를 수 없는 추락의 계단이었다.

라면과 커피를 파는 구멍가게, 벌겋게 녹슨 에어컨 실외기, 좁은 골목 빼꼭하게 들어찬 손수레와 짐자전거, 비탈에 서서 도심으로 흘러들고 싶은 듯, 그러나 곧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건물, 시커멓다 못해 허옇게 타버린 모습으로 죽어있는 고사목. 이런 풍경이 익숙한 곳이 회현동이다.

‘어진 사람이 모인 곳’이라는 회현동(會賢洞)은 남대문시장 뒤편 가파른 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 ‘회현동 계단’은 나의 사진 주제였다. 회현동의 계단은 그만큼 특이하다. 층계가 길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듯하지도 않다. 층계는 오르막 한 가운데 한 사람 겨우 올라갈 정도로만 비틀거리듯 앉아 있고, 층계 양쪽엔 경사로를 그대로 두고 있다. 계단이 이렇게 된 건 손수레와 자전거, 오토바이 따위가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야 하는, 회현동만이 가진 특이한 사회경제사적 배경 때문이다.

주로 남대문시장에 의류를 공급하는 배후기지 역할을 해 온 회현동에는 곳곳에 “재봉사, 재단사, 객공미싱사 구함”, “○○자수” 등의 광고지가 어지럽게 뒹굴거나 벽에 붙어 있고, 담벼락 위의 철조망에는 색색의 실이 휘감겨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로 남대문에서 벌어먹으며 싼값에 방을 얻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자수, 단추 꿰매기, 지퍼홀치기, 양복주머니 달기, 종이심지 만들기 같은 일을 하는 가내 하청업소가 많다. 그래서 골목 어귀마다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널려있고 그 안에는 각종 천 조각이나 버려진 지퍼 따위가 가득 묶여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간간이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덜덜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의 귀를 창 안으로 이끈다. 이곳이 한창이던 때에는 좁디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밤늦도록 불 밝혀진 창이 많았다고 하며 지금도 간혹 그런 곳이 보인다.

이제 회현동은 서서히 퇴락해 가고 있다. 마을 어귀에서 가내공장을 운영하는 유○○씨는 최근 의류하청물량의 대부분이 중국으로 넘어가 문 닫은 공장이 많이 생기고 비어 있는 집들도 꽤 늘어났다고 귀띔한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이었는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요즘은 노래방 도우미로 전업한 사람이 많단다. 이제 회현동에선 계단을 오를 수 있다는 ‘헛된’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어디 가서 어진 사람들을 찾을 것인가.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

대중옥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건장한 아지매들의 어깨 사이 저 야윈 영감님은 50년 전통의 해장국집 ‘대중옥’ 사장님이시다. 실제론 더 구부정하고 왜소해서 할배티가 확연한데, 문턱을 넘는 모든 이에게 한결같이 ‘어서옵~쇼’를 외친다. 인터넷사이트 회원 가입시 약관 동의절차만큼이나 일방적이고 예외없는 인사이건만 불쾌하긴커녕 묘한 따뜻함을 준다.

가끔은 몸 가누시기도 힘들어 뵐 때가 있는데 그래도 손님이 들면 ‘어서옵쇼’하는 소리를 반사적으로 앓듯이 내뱉으실 정도니 그 지극한 습관 앞에 말문이 닫힌다. 지난 겨울이던가 아무튼 마지막으로 들렀을 무렵부터 유고한 것인지 더 이상 예의 환영을 받을 수 없어 무척 섭섭했다.

‘어서옵쇼’ 하는 외침을 해장국집 ‘대중옥’에서 들을 때면 구어(口語)에서 사라진 말의 한시적 부활이 애틋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 그 외침이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상화된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최근에 ‘라멘’ 등 이른바 정통 일본식임을 자랑하는 식당에 들어설 때 가끔 듣게 되는 ‘이랏샤이마세’ 하는 말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어서옵~쇼’와 ‘이랏샤이마~세’는 의미도 같지만 특히 끝에서 두 번째 음절을 강하고 길게 빼는 특유의 가락도 유사하다. 또 식당 등 가게에서 손님을 맞을 때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도 같다. 집에서 손님을 맞을 때 우리가 ‘어서옵~쇼’ 하지 않듯이 일본에서도 집에 오는 손님에게 ‘이랏샤이마세’ 하지 않는다 한다.

하기야 노인들이 추억하는 평양물냉면 맛에 ‘아지노모도’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건 ‘어서옵~쇼’가 번역된 ‘이랏샤이마~세’이면 뭐 어떠랴? 묽은 국물에 조미료로 맛을 내 배를 채우고, 어서옵쇼를 외치며 조아려 생계를 꾸리고, 뽕짝에 시름을 달래는 일은 자유로운 임노동자로 전락해간 이들이 의지할 동도(東道)의 생활양식이란 애당초 없었던 데서 비롯되니 말이다.

대중옥의 대표 음식은 역시나 해장국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린네(Linne)를 흉내
내 학구적으로 분류하자면 탕類-우거지국目-선지국科에 속한다. 특징은 꽤나 기름지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범한 입맛엔 주문할 때 ‘기름빼고’ 라는 마이너스 옵션이 필수다. 지금이야 마이너스 옵션이 더 일반적일 수 있겠지만 옵션은 옵션일 뿐 여전히 표준은 기름진 해장국이다.

사실 대중옥 주변은 소규모 공업사 등이 밀집해 있던 지역으로 이른바 기름밥을 먹는 이들의 오랜 터전이었다. 금속이나 기계를 주로 다루었던 이들은 미신처럼 소기름이나 돼지비계가 몸속에 쌓인 불순물을 씻어주는 일종의 정화작용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토록 기름진 고칼로리 해장국을 표준적인 메뉴로 자리하게 한 것은 그런 믿음보다 그들의 고되디 고된 노동이 요구하는 열량이었다.

해장국 외에 대중옥은 인상적인 메뉴를 몇 가지 더 갖고 있다. 추탕, 설렁탕, 간천엽, 머리 고기, 갈비찜 등 평범한 음식도 있고, 등골, 곁간처럼 약간 특이한 메뉴도 있다. 하지만 송치, 우랑 등의 메뉴는 범상치 않은 수준이어서 사람에 따라 몬도가네 풍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송치는 배냇송아지를 일컫는 것으로 엽기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머나먼 이국 고대종교의 신성한 제사용 희생(犧牲)같은 느낌도 주는데, 대중옥에선 그냥 고기안주다. 우랑은 수소의 성기로 복용(?) 후에 손오공의 의형인 우마왕, 혹은 라비린토스(Labyrinthos)에 갇힌 미노타우로스 같은 힘이 샘솟을 듯한데, 역시나 그냥 고기안주다.

대중옥은 지역적으로 마장동과 가깝다. 이 특이한 메뉴들은 과거 인근의 도축장에서 공수된 값싼 부산물들을 재료로 삼아 ‘대중’적 음식으로 만든 것일 뿐 기괴한 취향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대중옥은 청계천 바로 옆 왕십리 뉴타운 재개발지에 있다. 전국의 희귀한 담수생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마법의 어항 청계천 남쪽으로, 철거가 거의 완료되어 이 식당을 드나들던 이들과 그 터전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대중옥은 섬처럼 남아 옛동네의 임종을 하고 있다.

철거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그들이 마침내 제 몸뚱이를 허물 때까지 그렇게 민초들의 형단영척(形單影隻), 딱 그 형상으로 말이다.

이병태(춘천교대 강사) /

늦가을의 이야기〔카메라 옵스큐라〕

지난번에는 빛이 보여주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그림자 이야기를 해 보자. 그렇다, 2005년 꽤 늦은 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림자가 건네는 이야기에 붙들려 이 사진을 찍었다.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는지? 웬 사내와 여자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정도? 마주 선 여인이 꽃이라도 들고 있는 듯 보이니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은 아닐까? 그런데 사내는 손에 틀림없이 휴대 전화로 보이는 걸 들고 있다. ‘작업’을 거는 중일지도 모른다. 작업의 진도가 무난하게 흘러가 이제 막 여자 전화번호라도 얻게 된 건 아닐까.

그러나 사실 그림자의 주인은 두 사람 모두 여자였다. 게다가 둘은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저 제 할 일 하며 제 갈 길을 가던 낯선 타인들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거의 나란히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프레임 속에 들어왔을 뿐이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나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상은 비스듬히 비치는 오후 햇살이 그린 그림자를 핑계로 우리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이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반영일 뿐이다. 심지어 그 반영조차도 왜곡되고 굴절되기 십상이다. 때로는 빛이 굴절하고 때로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감상자의 주관적 소망이나 편견에 의해 제멋대로 곡해되기도 한다. 사진을 재현으로만 보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사진이 보여주는 반영은 때로 허망한 것이니까.

일찍이 장자는 그림자 이야기로 우리가 집착하는 현실의 삶 또한 허망한 것일지 모른다고 암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아까는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추고, 아까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서는군요. 어쩌면 그렇게도 지조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럴까? 내가 의지하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림자는 허망한 존재다. 실체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런데 그림자의 그림자인 망양(罔兩)은 허망〔罔〕이 두 번〔兩〕 겹쳐 있는 존재니, ‘허망하고 또 허망한〔罔而又罔〕’ 존재다. 그림자가 실체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망양은 그림자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 뿐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한다. 망양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림자는 실체이다. 그런데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도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 허망한 존재다. 장자는 그림자의 그림자를 통해서 그림자는 물론이고 실체 또한 허망한 것임을 밝힌다. 꿈속의 꿈을 통해 꿈의 허망함을 각성시키고 다시 대각(大覺)을 통해 현실조차도 사실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태연히 한 장자였으니.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왜 사진을 찍는 걸까?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철학) /

오늘은 나, 내일은 너[카메라 옵스큐라]

골목은 침울하다. 일상조차 변변히 흐르지 못할 만치 생동의 기운이 점점 쇠해가는 탓이다. 그러니 작은 화초나 아이들, 햇볕 한뼘처럼 사소한 생기의 편린들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달리 보일 수밖에. 사진을 시작한 후로 몇 차례나 옛 동네의 임종을 했건만 그 쇠락의 면면은 항상 처연한 기시감(旣視感)을 몰고 온다. 병증의 악화 정도만 다를 뿐 소멸의 압박은 늙은 골목 어디에서나 감지되기에, 그 이미지들에 감도는 불길함도 하릴없다.

기억하기에, ‘마카브르(Macabre)’라 불리던 중세 유럽의 회화작품들에도 비슷한 불길함이 흘렀다. 해골이나 시체처럼 칙칙한 오브제를 포함하는 그림들은 모든 인간의 숙명적 종국을 은유하면서 ‘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가르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매개로 피안에 대한 염원을 일깨우고,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강화하려던 것이다. 지극히 중세다운 그림인 셈인데, 그 훈계가 페스트의 참혹한 기억 등을 염두에 둘 때 생각보다 효과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우아하게 빛나는 신성을 위해 고해(苦海)의 현세가 가벼이 부정됨은 마뜩찮지만, 사신(死神)의 흔적들이 어쨌거나 삶(영생)을 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래서, 마카브르는 죽음이 삶에 닿는 역설이다.

골목의 이미지 또한 유사한 역설이지만, 구질구질한 골목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그 자리에 들어설 ‘이 편한 세상’ 따위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그 역설은 온통 스러지는 것들의 이미지가 생존에 관해 절절한 이야기를 하는 데 있다.

재개발은 그 주체인 자본과 국가 권력의 측면에서 때려 부수는 일(타나토스)과 새로 짓는 일(에로스)이 하나됨이다. 부수거나 짓거나 어차피 거시적인 자본 증식의 일환일 뿐이고 양자의 유기적 결합이야말로 그 증식에 더욱 효과적이다. 아울러 그 과정 전체는 권력이 의도하는 도시재개발의 실천이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서 양자는 철저히 분리된다. 타나토스의 저주와 에로스의 축복은 서로 다른 이들의 몫이어서 철거의 대상과 건축의 수혜자는 다르다. 어떤 이는 새집에 깃드는 행복이나 투기의 성취를 누리지만, 주거와 생활의 공간 전체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잔혹한 흑마술은 오로지 가장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집중된다.

이들은 대개 노인으로 그 낡은 담벼락이나 지붕들처럼 수십년을 그곳에 머물러 왔다. 공간의 소멸은 그토록 익숙한 삶의 터전과 이웃들, 그 속에서 형성된 인간 관계, 생활의 습관, 일상의 전개 방식 등이 일거에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는 삶의 기반과 양식의 소멸이며, 정체성의 파괴다. 골목과 옛동네의 무도한 궤멸이 철거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직접적인 폭력성을 넘어 소리없는 홀로코스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 창출보다는 투기로 성장해 온 건설 자본들의 비루한 연명, 마치 염습(殮襲) 같은 도시의 미화가 저 학살을 댓가로 치를 가치가 있는가?

철거가 시작된 동네에서 옛집 근처를 배회하는 이들은 자기 육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살아 있는 영혼이 되지만, 이들의 안식은 또 다른 늙은 동네에서만 허락된다. 사라진 골목들은 남은 골목들에게 가장 비관적인 뉘앙스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이병태 /

오후의 표지(標識) [카메라 옵스큐라]

텅 빈 골목길은 때로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빈 방이 생각날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텅 빈 골목을 찍은 사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진을 본 사람들이 말한다. “도대체 뭘 찍은 거야?”

오후의 표지(標識), 2007, 통의동의 막다른 곳, Contax G1
이 사진은 경복궁 서쪽 통의동의 어느 골목길 막다른 곳을 찍은 것이다. 당신 눈길이 하늘을 향해 잔가지를 뻗은 나무에 먼저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주 피사체는 텅 빈 벽에 비친 오후 햇살이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배경에 있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없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아주 맑은 겨울날이었기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선명한데다 이단으로 된 벽 때문에 굵다란 화살표가 땅을 향해 단숨에 내리꽂히는 듯한 그림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 제목을 ‘오후의 표지’라 했다.

같은 곳을 여러 차례 지나다녔지만 사진을 찍던 저 순간처럼 빛이 비치지 않을 때, 통의동 이 막다른 골목은 눈길을 끌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텅 빈 벽뿐이었다. 같은 장소지만 빛이 없는 빈 벽은 참으로 초라했다. 저 순간은 그래서 ‘빛나는’ 순간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기에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구나 하고 체념하는 골목길, 막다른 공간에서 저런 장면을 만나는 일은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사진을 찍으면서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참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게 많다는 걸 어떻게 알까?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진기를 들고 여러 해를 어슬렁거리면서 나는 숨바꼭질을 하는 술래 같다는 생각도 했다. 두리번거리다 보면 숨죽여 꼭꼭 숨어 있던 사물이 혹은 어떤 공간이 내 앞에 불쑥 튀어나와서는 말을 거는 순간이 있다. 아쉽게도 대체로 그 순간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짧다. 하지만 말을 거는 그 순간, 피사체는 놀랍게도 아주 커다랗게 도드라져 내 앞에 우뚝 선다. 그래, 찰칵! 숨어 있던 친구를 발견한 술래가 “찾았다!” 외치는 소리하고 똑같다.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뭘 찍어요?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기 들고 뒷골목 헤매길 만 6년, 햇수로 8년째 접어듭니다. 비슷하게 영혼이 고장난 동행이 있어 긴 방랑에 지치기는커녕 더욱 기꺼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 골목을 헤맨 것은 분명 아닙니다만 어쨌든 허튼짓의 흔적들과 이야기가 남아 이렇게 ‘카메라 옵스큐라’에 담습니다.

사진 찍는 ‘철학도’들의 수다라서 주로 사진과 피사체, 촬영과 감상, 혹은 사진 너머에 대한 철학적 수상들이며, 당연히 그간 얻은 이미지도 함께 합니다.

프롤로그 ; “뭘 찍어요?”

대개는 재개발 예정이거나 진행 중인 옛 동네 골목들을 돌면서 사진을 찍는데, 이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뭘 찍어요?”다. 사실 이 물음의 함축은 맥락에 따라서 꽤나 복합적이다. 주변의 지인들이 그렇게 묻는다면 가벼운 호기심 때문인지라 대답 또한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그때그때 뭐라 대답했는지 사실 기억도 나질 않는다.

부담스러운 경우는 촬영 중 골목의 주인들(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에 있어야 할 생존의 이유가 있는 이들)이 그렇게 물어 올 때다. 호기심, 의심, 경계, 적대, 심지어 기대와 욕망 등 복잡한 정서적 반응이 때론 강하게 감지되기도 하거니와 어쨌거나 그 시공간의 이방인으로서 위축될 수밖에 없어서 늘 곤혹스럽다.

그나마 마음 편히 대답할 수 있는 경우는 사람들이 별반 경계심 없이, 때론 미소와 함께 조용히 물어 올 때다. 이 허름한 골목에 애써 뭐 찍을 게 있냐며. 왠지 고마운 마음에 공손히 답하긴 하지만, 대개 “꽃이 예뻐서요.”처럼 어정쩡한 것이 되고 만다.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그렇고, 침묵할 수도 없어서다. 그렇다고 고스란히 거짓말은 아닌 게 딱히 꽃이 아니더라도 분명 눈을 끄는 피사체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전에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의 골목은 언뜻 뒤숭숭하고 침침해 보이지만 몇 번을 되풀이해서 다녀도 늘 새롭다. 길의 너비며 방향, 이어짐과 막다름, 담벼락의 빛깔과 재질, 집과 계단의 모양새, 텃밭과 화분,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정경은 또 날씨와 계절, 아침과 오후, 사람들의 필요와 취향 등 수없이 많은 변항들의 함수다. 그렇기에 매순간 어떻게 다른 광경으로 다가올지 그 어떤 예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몇 년을 곱씹어도 버릇처럼 골목에 다시 접어드는 것은 이 공간이 피사체로서 또 성찰의 단초로서 항상 새롭고 묵직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동네 골목이 갖는 이 경탄할 만한 면모는 기실 피맺힌 그 탄생과 소멸의 역사가 낳은 부산물이다. 이 골목들은 처음부터 권력의 통제와 기획 하에 형성되지 않았다. 이른바 저임금 노동력으로서 도시에 유입된 사람들이 일제시대의 토막촌, 전후의 판자촌을 중심으로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며, 서툴고 거친 합의와 치열한 삶이 창조한 미증유의 자율적 건축공간이다.

집이 들어설 자리를 비켜 길이 났으니 곧을 리 없고 또 그 길을 비켜 다른 집이 들어섰기에 집모양새가 반듯할 리 없다. 몇 번의 대선과 총선이 지나가면서 언발에 오줌 누는 권력의 생색내기를 제외하곤, 어떤 지원과 배려도 없이 수백 수천만 그 주인들이 자신들의 생존만큼이나 힘겹게 수십년간 고치고 가꿔온 것이다.

이름도 취지도 쌍스러운 서울의 르네‘쌍’스 따위가 아니더라도 골목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학살되고 있었다. 그 주인들과 함께. 몇 년간의 출사가 어쩌면 골목들에 대한 조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겨울엔 기어이 그 주인들의 진짜 장례식에 다녀오고 말았다.

내일 또 나는 골목에 간다. 그 임종을 위해. 또 혹시 모를 심폐소생을 위해.

이병태 / admin@admin.com

민중미술 담론 비판(2)[한국현대미술사 개관]

*이전 호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편집자)

2. 민중미술 양식의 문제

민중미술 진영이 모더니즘 미술 진영보다 한 발 앞선 것은 미술이론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원리적이면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1) 구상 미술 문제

민중미술은 그 양식에 있어서 이른바 ‘민중적 리얼리즘’을 제창한다. 여기에서 ‘리얼리즘’은 추상미술 대신 ‘구상 미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서구에서 한껏 발달하고 있는 각종 아방가르드적인 기법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여실한 리얼리즘만은 아닐 터이다. 이에 관련해서 최열은 맨 먼저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을 매우 진보적인 이론으로 꼽는다.

“김윤수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매우 진보적인 수준에 도달한 이론이다. 그는 ‘구상미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 대상(현실)에 대한 인식을 중요시한다. ②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파악한다. ③ 자연의 질서대로가 아니라 의미내용에 따라 화면을 구성한다. ④ 개인의 주관적 ? 정서적 표현을 배제하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역사관이나 세계관과 관련되는 것이다.’ (…) 이것은 사실주의 이론의 빼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창작실천의 부재였으며 당시 경향적인 미술가들에게 있어서조차 이 구상미술론이 확고한 창작방법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김윤수,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계간미술』, 1981. 겨울)을 참조한 최열의 정리. 최열,『한국현대미술운동사』(돌베개, 1991), 184쪽.)

최열이 소개하고 있는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은 리얼리즘이 소박한 재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기법의 원리를 핵심적으로 잘 정돈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소련에서 1934년 [사회주의 작가회의]를 통해 그 이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알려지게 되는 네 가지 규칙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가) 프롤레타리아적일 것 : 예술은 노동자들에 관련된 것이어야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 전형적일 것 : 인민의 일상생활의 전형을 담은 장면들을 그려야 한다. 다) 사실적일 것 : 재현적인 의미에서 사실적이어야 한다. 라) 당파적일 것 : 국가와 당의 목적을 지지해야 한다. 등의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①에서 현실을, 만약 민중을 프롤레타리아로 보고 민중의 현실로 읽는다면, ①은 가)와 바로 직결된다. 그리고 ②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총체적인 파악’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나)에서 제시하는 ‘전형성’이다. 또 ③에서 ‘의미내용’은 다)에서 제시하고 있는 ‘재현적인 의미’와 일정하게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④에서 말하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라)에서 말하는 ‘국가와 당’이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면, 양쪽이 서로 직결된다.

김윤수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할 때,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원칙들을 당시 한국적 상황에 맞게 나름대로 조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윤수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적인 것을 일정하게 수용하는 열린 태도를 겸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초현실주의라든가 포토몽타주와 같은 팝 아트적인 기법들을 일정하게 허용함으로써 민중미술의 지속성을 향한 격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김윤수가 신학철의 몽타주기법을 대단히 높이 산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민중적 순정주의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최열은 다음과 같이 민중미술의 구상미술의 경향에 서구적인 경향이 가미된 것에 대해, 예컨대 표현주의 양식이라든가 극사실주의 양식 혹은 초현실주의 양식을 결합한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이 경향도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적 한계 혹은 현실인식의 한계와 더불어 표현양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양식의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특징은 그 현실인식의 한계와 결합하여 형상화 작업을 매우 추상적인 데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의 작품화면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삶의 구체성, 동시대적인 구체성, 사회적 삶의 총체적 개괄성과 그 인간의 전형성을 찾아보기 어렵다.”(최열(1991), 188쪽.)

이러한 최열의 입장은 민중의 예술적 상상력과 감각이 반드시 도식화된 전형성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한편으로 민중의 예술적 자질 자체를 한정할 뿐만 아니라 폄하하는 우를 범하는 것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2) 민중적 리얼리즘론

구상미술론에 이어 좀 더 구체적으로 민중미술의 양식을 구체화하고자 한 논의가 ‘민중적 리얼리즘론’이다. 이에 관련해서는 민중미술이 노동투쟁의 현장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선 라원식의 주장이 들어볼 만하다.

“민족미술의 내용 즉 주제, 제재, 소재는 민족의 현실을 토대로 나와 너의 삶,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찾아지는 것 (…) 민중의 미의식, 정서를 체화한 작품, 다시 말해 민중의 꿈과 사랑, 의리와 인정, 분노와 회한, 저항과 절규, 재생과 부활, 희구와 염원 등등을 폭넓게 담아내면서 민중의 인생관, 세계관까지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을 요구한다.”(라원식, 「민족민중미술의 창작을 위하여」(『민중미술』, 공동체, 1985) 중에서. 최열(1991), 219-220쪽에서 재인용.)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한 한국에서의 이른바 진보 진영의 모든 활동들은 설사 계급적인 소외의 체제적인 극복을 그 목적으로 주장한다 할지라도 일정하게 민족의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구도가 마치 비켜가는 쌍곡선처럼 대립되는 측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양쪽을 함께 아우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라원식 역시 민족미술의 방향을 대략 제시하면서 민중미술이 표현해야 할 주제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역시 리얼리즘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민중의 인생관, 세계관까지도’ 더군다나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라야만 진정한 민중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품이라 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용문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이 점에 있어서 민중미술의 방법론이 가장 힘겨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러한 민중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민족미술 내지는 민중미술을 추구하면서 여러 관련 작가들은 ‘분단’, ‘6 ? 25’, ‘일제강점의 만행’, ‘한국전쟁의 비참함’, ‘광주민중항쟁’, ‘유격대 투쟁’, ‘노동현장의 고통’, ‘농민생활’, ‘4 ? 19’, ‘민족통일’, ‘빈민생활’, ‘이산가족’, ‘신식민성’ 등을 주제로 선택하여 작업에 임했다.

이런 와중에 민속그림이 민중미술에 대해 그 기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정하게 모델로 작동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그런 차원에서 조선후기 민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는 이미 1970년 어간에 김지하가 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관해 최열이 전하는 원동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원동석은 민속그림을 곧바로 민중미술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고 역사적 존재로서 민중을 정식화한 다음, ‘민중예술은 역사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소외의 압제로부터 탈출하려는 총체적 삶의 표현이며, 민속예술에서 그 뿌리를 찾아 공동적 삶의 염원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규정한 다음 그 뿌리를 조선 후기의 민화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탈춤, 마당굿, 민요와의 접속에서 오늘날 민중예술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미술에서 ‘민화와 접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원동석, 「민중그림은 가능한가」(『일과 놀이 1』, 일과놀이, 1983) 중에서. 최열(1991) 229쪽 재인용 및 참조.)

탈춤, 마당굿, 민요 등은 분명 1980년대 민중예술에서 약방 감초처럼 전국적으로,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확산되고 있었다.(이를 당시의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순치시킴으로써 그 근본정신의 뿌리를 잘라내 버리려고 한 것이 이른바 ‘국풍’이었음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미술 영역에서 이 같은 성격의 민중예술을 찾아야 할 터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고, 이에 원동석은 조선조 후기의 ‘민화’를 적극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 민화가 대중적으로도 여러모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이에 따른 평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원동석은 같은 글에서 조선 후기 민화(문인화도 포함)의 양식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추려냈다.

“① 대상의 대소, 비례관계 무시 ② 공간의 상하, 원근의 무시 ③ 공간의 분할과 연속의 임의성 ④ 역원근법과 삼원법의 병용 ⑤ 시점의 이동에 따른 물상전개의 다면화와 물상 표현의 상괘성 이탈 ⑥ 시간의 동시성 표현 ⑦ 주제설정의 이중삼중적 결합에 따른 이미지 복합의 자유로움 ⑧ 색채 표현의 대비효과 및 화면의 평면화에의 복귀 ⑨ 전달의 간결성, 명확성, 즉흥성”(최열(1991) 231쪽에서 재인용)

원동석이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는 민화(문인화 포함)의 이런 특징들은 그 자체로 보면, 분명 근대 이후 서양미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대단히 아방가르드하고 그래서 모더니즘적이기도 한 특징들이다.

3. 민중 예술가론

1984년 원동석이 「민중미술의 논리와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민중미술에 대해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미술’이라고 규정했을 때 ‘민중에 의한’이란 것을 강조하게 되면 민중이 곧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에 다음과 같은 사안들이 제기된다.

1) 공동체적 신명 문제

민중미술이 전체 민중예술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그 나름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집단 창작 내지는 집단 미술의 향유 문제였다. 이에 관련된 것 중에 대단히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공동체적인 신명 문제다. 이는 주로 마당놀이를 통한 복합적인 민중예술에서 얻어낸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부산에서 주로 활동을 한 채희완의 연구가 심도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천적 과제는 결속을 강화(예술의 문제와 사회적 삶의 문제 – 지은이)하는 공동체 의식과 적에 대한 대결을 강화하는 갈등의식, 이 두 가지로 요약되는 민중적 사회의식 ? 이는 갈등을 통한 통합을 거쳐 다시금 갈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표현상으로서는 풍자적 해학, 해학적 풍자, 웃음과 눈물의 미적 유화, 한을 뚫고 나오는 역동적 신명 등으로 표출된다. ? 의 예술적 승리라는 예술 사회학적 기능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오늘의 사회문제를 공동체적 관점의 표적으로 부각시키고 거기에서 성취된 사회인식을 행동화하는 오늘의 ‘삶의 축제’로 정착시키는 일임에 다름이 아니다.”(채희완, 「역사적 지속성의 질긴 숨결」(『마당』, 1983. 12) 중에서. 최열(1991), 205쪽에서 재인용.)

채희완이 제시하는 민중의식과 이에 의거한 ‘삶의 축제’로서의 민중예술은 궁극적으로 민중의 삶 자체를 가장 넓은 의미의 예술적인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결의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작품과 관객 혹은 작가와 관객 간의 상호작용이 없이는 작품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이른바 ‘매체 미술’에서 소폭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채희완이 제시하는 ‘삶의 축제로서의 민중예술’은 아예 전체적으로 상호작용이 관통하는 그런 예술이다.

2) 미술의 주체인 민중

1983년 8월 이후 ‘광자협’(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은 ‘시민미술학교’를 열면서 민중이 미술의 주체임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시인만이 시를 쓰고 화가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바람직한 예술은 다른 사람의 생존의 체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서로 공유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바야흐로 정직하고 튼튼한 민중예술이 그 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최열(1991), 196쪽 참조.)

한편 ‘광자협’의 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으로 보이는 최열은 이렇게 말한다.

“민족과 민중의 관점을 지키고 반민족, 반민중 세력을 비판하는 방식에 있어서 민족과 민중의 잠재된 생명력이라는 정서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형식은 내용의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범주가 아닌 소재적 함정으로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형식을 세련된 기교나 탁월한 회화적 질서 개념이 아니라 민중적 정서를 갖는 내용과 그것을 담는 그릇의 뜻이다.”(최열, 「80년대 미술운동의 한계와 극복」(『시대정신』1권, 일과놀이, 1984) 중에서. 최열(1991), 199쪽.)

그런가 하면, 1983년 7월 창립 예행전을 가지면서 창립된 ‘두렁’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제시한다.

“우리는 미술을 위한 미술이거나 생활에 미를 심기 위한 미술이 아닌 ‘삶에 기여하는 미술’이 되기를 노력한다. 사회와 미술을 유기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이기적 개인주의의 온상인 강조된 전문성을 경계하고, 공동 작업을 지향한다. (…) 개방적인 공동작업과 민중과의 협동적 관계는 전문성의 공동생활과 미술행위의 민주화를 위한 기초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산 그림’을 지향한다.”(두렁, 「산그림을 위하여」(『산그림』, 두렁, 1983) 중에서. 최열(1991) 202-203쪽에서 재인용.)

미술 작업이 전문가들만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창작 집단 ‘두렁’의 이러한 입장은 아방가르드적인 창조 활동을 통해 기왕의 지배적인 체제를 지향하는 일체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양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적인 정신과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일부 예술 천재들에 의한 아방가르드를 제시한 것과 완전히 대립된다.

이러한 ‘두렁’의 민중적인 집단 창작 정신은 그 형식에 있어서 오늘날 시민참여형의 공공미술 내지는 사회예술의 선구적인 모범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이러한 미술들이 확보해내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심층에서의 삶의 질을 암암리에 선도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대략 정리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예술은 항상 이중적인 긴박감 속에서 그 현존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민중적인 삶이 일상에 있어서 체제의존적인 측면이 강한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이는 예술이 지닌 아방가르드 정신을 뒷받침한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 지닌 감각적인 힘으로써 민중적인 삶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한다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예술을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것인가 하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일컫자면, 일정하게 스스로를 민중의 삶으로부터 분리해 냄으로써 오히려 그 민중의 삶으로 스며들어가고, 스스로를 민중의 삶 속으로 깊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오히려 미래를 향해 민중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는 것이 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과 삶 간의 역리적인 역동성을 가장 신랄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민중미술 진영을 형성한 여러 입장들이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을 내보인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그저 예술을 바라보는 전략적인 관점의 차이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에 따른 전술적인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아쉬운 것은 벌써 20-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되돌아 볼 때,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하나의 학적 체계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의 전체 맥락 속에서 최고도의 난맥상을 보이는 한국 미술의 모습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민중미술이야말로 미술과 구체적인 사회역사적인 삶 간에 목숨을 건 가장 뜨거운 긴장감을 연출했기에, 그 다기한 정신과 실천에 대해 굳건한 예술철학적인 바탕 위에서 학적인 차원으로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더라면 그 파급력은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영역에까지 크게 미쳤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갖고서 깊은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민중미술 담론 비판(1)-범 모더니즘 비판 [한국현대미술사 개관]

*이전 호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편집자)

민중미술의 이론적인 입장은 우선 외래의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에서 모더니즘은 비단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를 중심으로 한 그린버그식 후기모더니즘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본격 모더니즘이나 20세기 중반의 후기모더니즘, 그리고 그 이후 6-70년대를 풍미한 반(反)모더니즘적인 미니멀리즘, 팝 아트, 개념미술 등을 지시한다. 그 바탕에는 한국 현실의 당시의 역사적 ? 정치적 ? 사회경제적 상황을 철저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특정 상황에 입각한 예술 사회학적 입장이 작동하고 있었다.

민중미술 진영의 논객들이 보여주었던 이러한 태도는 그러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상황의 긴박함에 의거해 일정하게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현실 상황이 일변할 때(예컨대, 쉽게 전망할 수는 없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문민정부에 의거한 민주화가 달성된다거나 소련 해체를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든가 하는 상황의 변화) 지속적으로 예술적 창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일을 도외시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예컨대『한국현대미술운동사』(돌베개, 1991)라는, 민중미술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역사적 보고와 더불어 필자 나름의 입장을 담은 비판적 평가를 담은 책을 낸 최열은 이렇게 말한다.

“미학과 이념의 부재는 여전했고 현대주의[즉 모더니즘]에서는 미니멀리즘이라 해서 최소한의 예술, 가령 가능한 한 그리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색면이나 흔적만 남기는 방향으로 획일적인 형식주의가 만연하였다. 거기에 동어반복적이고 현학적인 용어를 개입시켜 철학적 근거를 조작해 나가는 논리부재의 이론이 성행하면서 동양 고전을 교묘하게 차용, 사이비 동양사상을 과시하여 새로운 미학적 이념을 형성해 낸 듯한 인상을 꾸며 냈다.”(160쪽)

이 글은 특히 한국에서 1970년 후반기에 해외진출과 더불어 힘을 발휘했던 흔히 모노크롬 회화로 불리는 단색회화의 흐름을 직접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단색회화를 중심으로 한 한국모더니즘의 진영에서 제시한 여러 단색회화에 대한 해석들을 보자면, 한국의 단색회화가 결코 서구의 모더니즘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동양 전통 내지는 한국 전통의 사상에 입각한 것인 양 분식(粉飾)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적 미니멀리즘’, ‘범자연주의’, ‘우주적인 흰색’ 등의 개념을 조성해서 일종의 사이비 형이상학적 놀음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작태’에 대한 최열의 공격은 그 자체로 볼 때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와 대립해서 과연 민중미술에 대해 어떤 확고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는가이다. 최열이 소개하고 있는 민중미술 이론가 중 최고의 선배격인 김윤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그저 일시적으로 상상의 세계, 추상적인 가교의 미적 질서의 세계로 데려간다는 의미의 해방이 아니라 삶을 위협하고 현실의 구체성을 가리고 있는 장막으로부터 진실을 체감하고 확인케 함으로써 인간과 현실의 풍부함을 다시 발견하게 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예술은 언제나 구체적인 생의 진실과 자유 그리고 휴머니즘에서 규정되어야 하며 이를 위협하는 갖가지 요소는 예술에 대한 폭력에 다름없다.”(김윤수, 「폭력과 예술」(『다리』, 1972. 2.)에서. 최열(1991), 162쪽에서 재인용.)

휴머니즘적인 예술론이 제시되고 있다. 예술에 대한 김윤수의 관점이 상당히 깊이가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술을 인간 해방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이 글에서 김윤수는 인간 해방을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 삶 일반이 지닌 추상적인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삶의 구체적인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전자를 모더니즘적인 해방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리얼리즘적인 해방이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해방은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본질적인 구분이다. 우연한 탄생과 필연적 죽음 사이에서 영위되는 인간 삶 자체가 지닌 부조리함으로부터의 해방이 전자의 방향이라면, 구체적인 사회역사적인 현실에서 주어지는 사회적인 모순으로부터의 해방이 후자의 해방이다.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자의 해방은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조건과의 투쟁이고, 후자의 해방은 인간 존재의 현실적인 조건과의 투쟁이다. 이 두 가지 투쟁은 본래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후자의 투쟁, 즉 현실적인 조건과의 투쟁이 주된 목표로 설정될 수 있거니와, 김윤수는 이러한 점을 예술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김윤수가 두 가지의 투쟁이 본질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인 양 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김윤수의 민중미술적인 투쟁 전략은 70년대 초 당시의 박정희 독재와 긴밀하게 결합되었거나 혹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전개되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질곡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어쩌면 필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조건과의 투쟁 역시 함부로 방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이를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인류가 낳은 풍부하고 깊이 있는 문화예술의 유산의 힘을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상당히 정곡을 찌르는 듯한 필설을 통해 민중미술의 전략을 설정한 이러한 김윤수의 기본적인 입장은 역시 민중미술의 이론가인 원동석에게 연결되어 그 실천적인 원리가 이렇게 제시되고 있다.

“민족의 실체는 민중이며 문화의 주체자도 역시 민중이다. 살아 있는 민족문화의 발현은 주체자가 스스로 민중이 되는 창조적 활동에 의해서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 민중미술이란 민중 속에서 진실을 찾고 이를 확인하려는 예술이며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민중의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 의식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개발되는 것이다.”(원동석,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1975)에서. 최열(1991), 163쪽에서 재인용.)

민족의 실체를 민중이라고 한 점에서 원동석은 민족 개념을 민중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민중적 민족’으로 정립하고 있다. ‘민중적 민족’ 개념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민족 개념이 있다. 그것은 ‘국가적 민족’ 개념이다. 국가적 민족 개념은 국가주의적인 하향적 정치 체제에서 흔히 동원되는 민족 개념이다. 히틀러가 제시한 아리안주의, 스탈린이 제시한 슬라브 민족주의, 박정희가 이순신을 내세워 강조했던 민족주의, 현재 북한에서 작동하고 있는 민족주의 등이 그러하다. ‘국가적 민족’은 그 자체 민중으로서의 민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볼 때, 1975년 당시 이미 이렇게 민족의 실체를 민중으로 본 원동석의 민족 개념은 80년대 한국 사회를 진동시킨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계급투쟁의 측면을 바탕으로 역시 분단과 외세의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면서 당시 큰 이슈가 되었던 민족투쟁의 측면을 아우를 수 있는 제언이라 할 수 있다.

원동석이 말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 민중의 현실 속으로 파고드는 예술을 제안하는 데서 핵심이 되는 것은 ‘민중적인 진실’이라는 것이다. 인용문에만 의거해서 볼 때, 민중의 진실에 관해서는 요령 있게 제안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원동석은 민중의 진실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인 소외, 즉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에 의해 오히려 억압받고 지배받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엄혹한 사상 검열과 탄압의 상황에서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민중 개념을 정확하게 발설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원동석은 한국의 예술보다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직접적인 정치사회적인 저항이 불가능한 시절, 그 우회 전략으로서 예술을 공격 대상 영역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예술에 대한 그의 애착을 간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원동석이 1970년대 후반의 상황에서 위 인용문이 담긴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이라는 글을 발표한 것은 그 역사적인 의의가 대단하다 할 것이다. 뒤이어 발표된 원동석의 글에 대해 최열은 그 핵심을 이렇게 정돈하고 있다.

“원동석은 또한 1977년에 이르러 「한국추상미술의 외세주의」제하의 논문을 발표하여 형식주의와 획일주의에 빠진 현대주의 미술에 대한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는 추상미술의 이웃 없는 내면세계의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자유는 관념의 유희이며 공허한 것이라고 하면서 추상미술은 서구의 것이건 우리의 그것이건 모두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밝혀 놓았다.”(163쪽)

최열의 이 해석에 의하면, 원동석이 추상미술의 모더니즘을 ‘이웃 없는 내면세계의 자아 충족’이라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가 자신의 유아론적인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추상미술의 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이러한 원동석의 규정에 대해 설사 모더니즘을 주창하는 자라 할지라도 쉽게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원동석이 모더니즘적인 예술관이 그렇게 내면세계의 자아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 한편으로 대대적인 자본주의의 흐름과 적대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은 가능할 것이다.

만약 모더니즘 미술이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상품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러한 비판을 피해가고자 한다면, 오늘날 한국의 민중 미술 역시 자본주의적인 상품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비판함직한 반모더니즘적인 서구의 개념 미술에서 예술의 자본주의적인 상품화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는 사실 등을 통한 반박을 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민중미술 진영의 논객들은 당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모더니즘 계열의 한국 현대 미술가들을 전격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정확한 입지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의 모더니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민중적 리얼리즘의 입장과 아울러 외세배격의 민족자주의 입장도 일정하게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원동석이 저 앞에서 ‘민족의 실체는 민중이다.’라고 하고, 또 여기에서 ‘추상미술은 서구의 것이건 우리의 그것이건 모두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제언을 했던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김윤수나 원동석의 입장에 대해 최열은 이상적 순수주의에 입각한 듯 선언적이고 개념일변도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현실과발언’ 및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의 선언문이 보여 주는 미술운동의 성격은 매우 도덕적인 예술가의 현실에 관한 비판 및 그것을 통한 기여로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 그것은 그러나 기존 미술계의 고답적이고 폐쇄적이며 도피적인 유희, 자족적 탐미라는 형태에 대한 거부이며 기존질서, 즉 정치 ? 경제 ? 사회적 과제에 대한 정확한 검증 없이 소박한 체제내적 변화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개량주의 혹은 문화주의적 차원의 한계를 고스란히 진 것이었다.”(최열, 「현단계 민중미술의 위상」(『동덕여대신문』, 1986. 8. 30) 중에서. 최열(1991), 170쪽에서 재인용.)

1979년과 1980년을 거치면서 창립된 ‘현발’과 ‘광자협’의 입장에 대해 최열이 ‘소박한 체제내적 변화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개량주의 혹은 문화주의적 차원의 한계를 고스란히 진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글을 쓸 당시인 1980년대 말의 상황이 일변했기 때문이다.

‘힘전’ 탄압 사건에 이어 1985년 ‘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이 결성되어 상당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어서 1987년 6월 항쟁이 있고 난 뒤 ‘민미협’에 일정하게 대립하면서 1988년 ‘민미련건준위’(민족민주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가 뜨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개량주의’ 혹은 ‘문화주의’ 등의 딱지는 이른바 ‘배신자’ 비슷한 뜻을 지닐 정도로 나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최열은 ‘민미협’보다 ‘민미련건준위’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민미협’의 입장을 이렇게 폄하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다음 호에 ‘민중미술 담론 비판(2)-민중미술 양식의 문제’가 이어집니다.(편집자)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미술계의 민주화 운동과 민중 미술의 탄생과 전개[한국현대미술사 개관]

이전 호의 ‘민중 미술의 발흥과 전개’와 연결되는 글입니다.(편집자)

이런 와중에 미술계라고 해서 전적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미술가들이야말로 이런 억압적인 정치 ? 사회 상황에서 가장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이들이야말로 본래 자유와 그에 따른 상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 부류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선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룹이 ‘현실동인’과 ‘현실과 발언’이다. 그 외 1980년대에 들면서 너무나도 많은 미술인들이 저항과 투쟁의 기치를 내걸고서 조직을 만들어 싸웠기 때문에 그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1) 현실동인

1970년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1969년, ‘현실동인’ 창립전이 선언문만 남긴 채 강력한 억압에 의해 좌초되고 만다. ‘현실동인’은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윤(1946-1986), 임세택, 오경환 등에 의해 현실을 반영한 사실주의적 회화를 추구하려는 그룹이었다. 이들이 그룹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이들보다 4-5년 선배인 김지하 시인(1941- )과 김지하 시인이 선배로 모시던 미술 평론가 김윤수(1936- )의 자극이 컸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실동인’의 창립선언문을 기초한 인물이 김지하였고, 교열을 맡은 인물이 김윤수였다. 이 선언문에 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그 핵심만 따 내어 보기로 한다. 선언문은 현실, 현실의식, 현실주의 등에 관해 정의를 내리고, 현실주의의 의의는 물론 그 구체적인 기법과 방안까지 다소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요약을 하자면, 사물과 생과 상황 속에서 대립하고 충돌하고 발전하는 모순의 작용에 의해 현실은 힘과 힘의 운동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역학은 현실주의의 기본 기법이며, 갈등은 이러한 현실 모순의 공간적 반영 형식인 동시에 시각적 구성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지하가 추구하는 미술과 김윤수가 추구하는 미술이 다소 방향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김지하는 대체로 민족주의적인 미술을 강조하는 반면, 김윤수는 리얼리즘 미학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지하는 대중적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통해 미술에서 현실을 반영하되 서구 미술을 무비판적으로 모방을 해서는 안 되며 전통을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윤수는 현대인이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의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소외 현상이 예술에도 반영됨으로써 예술과 대중이 분리되는 부작용을 낳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반인간적 ? 반대중적 ? 반사회적인 태도를 버리고 사회와 개인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안점이 다소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민중 주체의 민족 문화운동’이라고 하는 대의에 뜻을 같이 한 것은 19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용기를 북돋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현실과 발언

‘현실동인’이 처참하게 당한 뒤 이어진 유신말기의 엄혹한 정치 ? 사회 상황은 현실의 반영을 주장하는 미술 운동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1979년 기존 미술계의 내적인 문제점은 물론이고 미술의 사회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개혁하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운동이 준비되었다.

이른바 ‘현실과 발언’이라는 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이 그룹은 ‘현실동인’의 정신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그 사이 10년이라는 제법 긴 세월이 흐른 탓에 많은 인물들이 창립에 참여했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 창립에 미술 이론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어지는 모든 민중 미술 계열의 그룹들에 공통된 특징으로 자리 매김 된다.

‘현실과 발언’의 창립에 참가한 미술 이론가는 성완경, 최민, 원동석, 윤범모 등이었고, 작가로는 임옥상, 오윤, 김정헌, 김용태, 노원희, 민정기, 심정수, 신경호 등이었다. 이들은 1980년 10월 정부 산하의 미술관인 문예진흥원에서 창립전을 열기로 했고,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신군부의 서슬이 퍼런 시절이었다. 문제가 어찌 없었겠는가. 미술관측이 이들의 작품을 두고 미술이 아니라느니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있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어 전시장 문을 폐쇄했다. 작가들은 게릴라 작전으로 개막행사를 시도하였고 미술관측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시장의 전원을 꺼버렸다. 전시장은 촛불로 조명을 대신했으나 그 역사적인 전시는 30분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내용이 어떠하건, 적어도 이미 결정된 예술 전시회를 신군부가 이렇게 탄압한 것 자체만 보더라도 ‘현실과 발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해야 한다. 결국 이들은 작업보다 수색과 도주, 구금, 그리고 고문과 투옥이라는 가혹한 탄압을 감수하면서 행동하는 미술가로 거리에 나서야 했다.

이들은 “미술가에게 있어서 현실은 예술 내부적인 수렴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예술 외부적 충전의 절실함으로 확대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미술가의 의식과 사회현실의 만남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현실 인식의 각도와 비판의식의 심화, 자기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에 대한 통찰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회복 및 미래의 긍정적 현실에 대한 희망을 추구할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미술인들에게 사회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인식과 그에 따른 실천을 요구했다.

아울러 “누가 발언자이며 무엇을 향한 발언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작가와 관람객 간의 주객 문제를 반성할 것을 촉구했고, “기존의 표현 및 수용 방식의 비판적인 극복”을 주문함으로써 사회 현실을 사는 관람 수용자와 발언자로서의 작가 간의 상호작용을 촉구했다.

3) 민족미술협의회

‘현실과 발언’에 이어 ‘임술년’, ‘두렁’, ‘삶의 미전’ 등이 1980년대 초반을 달궜고, 이들 외에 각 지방마다 일정하게 대학이나 지역문화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민중 미술의 열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봇물 터지듯 전문미술가 조직들이 곳곳에서 형성되었고, 전체적으로는 민중 미술 혹은 민족 미술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에 가장 먼저 중심 역할을 한 큰 조직이 바로 1985년에 11월 22일에 창립총회를 해서 결성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이었다.

민미협이 결성되는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있었던 ‘힘전’ 사건을 살펴보아야 한다. 1985년 7월 13일부터 35명의 작가가 출품한 ‘힘전’이 많은 관람객을 동원하면서 8일째 되던 날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5명이 들이닥쳐 전시중인 그림을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결국 전시장을 폐쇄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에 ‘힘전탄압대책위원회’를 당장 꾸리고, 곧이어 이를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로 바꾸어 전국적인 운동 단체의 지원 하에 전례 없는 대대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결국 구금된 5명의 작가들은 즉심에서 풀려났다.

참고로 이때 당국이 문제 삼았던 작가와 작품명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 같다. 손기환의 ‘타! 타타타타!’, 박영률의 ‘비극의 역사, 80. 5. 광주’, 장명규의 ‘X도 못하냐’, 박불똥의 ‘1980. 5. 17. 생’, ‘핫라인’, ‘경찰의 보호감시 아래 서울 목동주민들 이른 아침 일터로 향하다’, 김우선의 ‘이불을 꿰매면서’, ‘김의기 열사 신장도’, 두렁의 공동작품들인 ‘사랑’, ‘산자여 따르라’, ‘구속된 내 친우를 생각하며’, ‘노동자의 힘’, ‘대우 어패럴 해산’, ‘연대투쟁’, ‘이렇게 슬기롭게’, ‘당신은 당국의 노동대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모두 26점이었다고 한다.

이 ‘힘전’ 사건을 바탕으로 결성된 것이 바로 ‘민미협’이다. 이는 미술계에 민족미술진영이 정식으로 규합하여 힘을 모은 첫 모임이라 할 것이다. 대표에 손장섭, 대의원으로는 지역과 단체의 대표성을 고려해 16명(강요배, 김방죽, 김영동, 김우선, 박건, 박불똥, 박상대, 박진화, 박충금, 손기환, 송만규, 이종구, 이홍원, 박흥순, 황재형, 홍성담)을 선출하고, 대위원회의는 운영위원 11명(강대철, 강행원, 김정헌, 문영태, 박석규, 성완경, 신학철, 여운, 유홍준, 주재환, 황효창)을 추천하여 총회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운영위는 박용숙, 김윤수, 원동석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민미협’은 이른바 민중미술의 초대 결집체이기 때문에 그 선언문이 중요하다. 내용은 이렇다.

첫째, 민족분단의 현실과 삶을 갈라놓는 제도적 억압 장치와 방해공작으로부터 벗어나서 냉엄한 통찰과 행동을 통하여 공동체적 삶, 통일의 삶으로 가는 길을 다 같이 모색하는 일이며
둘째, 민족미술의 창조적 발전을 향한 다양하고 통일적인 이론과 실천을 통하여 참신한 참미술인들을 발굴하고 여러 장르의 풍성한 작품의 수확을 거두는 일이며
셋째, 창조나 수용이 조화롭게 만나지며 함께 나누는 통로로써 민중적 삶을 함께 하는 수용의 운동과 교육의 실천방법을 다각적으로 확대하는 일이며 넷째로, 본 협의회의 회원 상호간의 친목도모, 권익옹호, 복지향상 등 제반 사업 활동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홍보하고 실천할 것이다.

선언문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민족분단을 극복한 통일의 삶을 강조한 것과 민중적 삶을 함께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명칭이 ‘민중미술협의회’라 하지 않고 ‘민족미술협의회’라고 한 것은 미술인들이 지닐 수 있는 계급의식이란 것이 그다지 강할 수 없는 데 반해, 창조성을 생명으로 하는 미술인으로서는 우리 스스로의 민족 미술에 대한 의식은 쉽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민미협’이 결성되기 이전에는 막연하게 통칭 민중 미술이라고 이야기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물론 ‘민중’이란 말을 통해 ‘계급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쪽이 나름대로 득세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민중’이냐 ‘민족’이냐, 아니면 ‘민중으로서의 민족’이냐 하는 등의 입장 차이가 내부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활동에 있어서는 민중미술 계열과 민족미술 계열이 나뉜 것으로 보인다. 민중미술 쪽은 노동현장을 지원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예술변혁 운동보다는 사회변혁 예술운동에 치중하게 된다. 이 진영의 논객으로는 라원식, 이태호, 심광현, 이영철, 박신의, 최석태, 장해솔 등이 있다. 이들은『시각매체론』(우리마당)을 통해 그들 나름의 비평적 시각과 이론을 모아 발표한다.

한편 1988년에 이르러 민족미술 진영이 힘을 발휘하면서 ‘민족민주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건준위)를 발족하게 된다. 이들은 평양축전 참가투쟁과 ‘평축 축하그림’ 사건 등을 통해 일부 작가가 구속되기도 하는 등 해서 서서히 ‘민미협’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아 간다. ‘민미련’의 기관지는 『미술운동』이었다.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민미협’과 ‘민미련건준위’라고 하는 두 거대 단체가 이른바 민중미술계 내에서 내부 투쟁을 한 셈이다.

두 조직은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1990년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는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들 운동권 미술인 조직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3. 주요 작가들

1) 오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오윤은 특히 칼 맛을 잘 드러내는 목판화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판화는 평범한 대중의 일상적 삶의 모습을 단순화하여 힘찬 윤곽선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나무의 풍부한 재질감과 고도로 숙달된 칼놀림으로 여백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오윤의 작업 방식은 사회적으로 힘없는 자로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자들의 모습을 결코 수동적이거나 비관적인 방식의 모습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희망적이며 내면에서부터 몸 전체로 드러나는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게 된다. 인민 대중의 고통을 그리되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고 그 내면에서부터 강렬한 자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1970년대 초반, 경주나 지리산에 심취하고 민족의 전통 종교인 증산교에 빠져들어 토속적인 것이나 대중적인 삶의 뿌리, 기에 대한 정열 등을 심화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오윤의 개인적인 편력은 김지하의 민족예술론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 것이었고, 결국에는 김지하가 주장하는 바, 민중을 주체로 하는 민족미술의 실현으로서 현실주의(사실주의 내지는 리얼리즘이라 달리 부를 수도 있음)를 지향한다.

오윤은 1970-80년대 많은 저항 지식인들의 시집이나 저작의 표지 그림을 많이 그려주었다. 특히 그가 그린 ‘칼노래'(1985)는 각종 사회를 더럽히는 악이나 부정적인 것들을 혁파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부패, 사악, 오염, 가난, 요괴 등을 민중의 날카롭고 강력한 칼로 다 베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윤의 ‘원귀'(1980년대 초반)는 분명 광주민주화항쟁의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면서 그 살인자들을 고발하는 그림임에 틀림없다.

2) 신학철

신학철(1943- )은 1970년대 ‘AG’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미술 양식들, 예컨대 초현실주의, 오브제, 꼴라주, 단색회화 등, 이른바 전위적인 작품 양식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이렇게 이른바 민중미술 쪽으로 선회했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유명한 미술 작품들이 전해오는 위대함을 동경했고, 그러한 예술의 위대함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위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서는 그런 위대함에 다다르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1974-5년경부터 ‘나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고, 자신의 신체를 통한 직접적인 체험의 중요성과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여러 초현실주의적인 오브제나 꼴라주를 하게 된다.

그는 회화적인 묘사 능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런데 1979-80년 쯤에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본 한국 100년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 사진들에 들어 있는 한민족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근대사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에 ‘한국근대사’ 시리즈를 그리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신학철은 평론가 김윤수의 눈에 띄게 되고, 김윤수가 추구하는 사실주의 미학의 현대적인 변용을 충족시키는 작가로 평가받게 된다. 김윤수는 적극적으로 신학철을 평가했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민중미술을 통해 중요한 활약을 하게 된다.

신학철의 ‘한국근대사-3’을 보면, 사진을 그대로 붙여 활용한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그 정교함이 대단하다. 그보다도 은유와 상징의 처리 기법이 너무나 기기묘묘해 설명할 거리가 많다.

특기할 것은 그의 ‘모내기'(1987)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내기’의 초가집이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라는 혐의로 1989년 8월 17일 구속되어 1989년 11월 15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검찰의 대법원의 항소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지방법원으로 환송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방법원 환송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았으나 본인은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그러나 1999년 11월 26일 상고를 기각 당했다. 그러나 다시 불복하여 유엔인권위원회에 재소했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한국의 법무부에 사건을 심의하고 있는 동안 ‘모내기’ 작품을 파기하지 말 것을 통보하였다. 결국 2000년 8월 15일 법무부는 사면을 했다.

3) 임옥상

“더 나아지기 위해 어둡고, 칙칙하고, 질척이는 곳을 더듬어 넘어지고 꺼져야 한다. 인습의 굴레, 역사의 층, 철학의 늪, 예술의 허위, 문명의 우상, 그 모두를 헤쳐 맞서자. 이 세계에 한 인간으로 부딪쳐보자.”

1979년 임옥상(1950- )이 그의 작업노트에서 한 말이다. 임옥상은 역사 인식에 의거해 사회 현실을 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 그의 ‘보리밭II'(1983)에서 잘 나타나듯, 그의 그림은 일종의 초현실주의적인 구축을 한다. 그러면서도 붓질 등의 표현 기법은 철저히 사실주의적이다. 그의 초현실적인 측면은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예기치 않게 통념을 확 찌르고 들어오는 힘을 갖도록 한다. 그 힘은 우리네들이 흔히 잊고자 하는 힘들고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결코 외면할 수 없도록 하는 힘이다.

4) 박불똥

비판적 리얼리즘을 위한 포토콜라주의 완전한 대가이다. 본명은 박상모인데, 불꽃이 탁탁 하고 소리를 내면서 튈 때 일으켜지는 불똥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 자신이 붙인 이름이 발불똥이라고 한다.

가장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1988년의 ‘코화카염콜병라’라는 오브제 작품이다. 코카콜라병에 미국 국기를 찢어 입구를 쑤셔 막아 만든 화염병이다. 가히 패러디와 풍자의 최고 일인자라 할 수 있다.

5) 홍성담

1989년 7월 평양에서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의 여대생 임수경의 방북으로 떠들썩했던 당시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의 슬라이드가 북한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명박 정권 하의 지금도 그랬으면 하고 바라고 이명박 정권에서 언필칭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지난 두 정권의 시절이라면 그 그림 내용에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비록 1987년의 대 격변을 거쳤다고는 하나 여전히 군사 정권의 연장이었던 그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건의 중심에는 홍성담(1955- )이 있었다. 그는 광주 5·18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금남로를 뛰어다녔고, 광주시내버스에 페인트로 일련번호를 매기며 5·18에 미술로 ‘복무’했던 화가이다. 공안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는 이제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이적표현물’을 제작 배포한 불순분자가 된 것이다.

이른바 ‘민해운사’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 평양에 보내진 것이었다. 걸개그림은 세로 2.5미터에 가로 7미터 그림 11폭이 이어진 즉, 가로 77미터의 초대형이었다. 동학혁명에서 일제강점기, 6·25, 5·18 광주민중항쟁 등 우리 근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사건 11개가 나누어 그려졌다. 1989년 6월 홍성담은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을 미국 L.A.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으로 보냈다. 작품은 이미 한양대학교에서 열렸던 집회에 내걸렸다가 경찰이 불태워 없앤 뒤였다.

당시 안기부와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민해운사’ 중 홍 화백이 직접 그린 광주민중항쟁 부분에 대해 “5월 광주민중항쟁이 반미, 반파쇼, 반봉건 투쟁의 시각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으로 형상화하여 제작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김선수 · 윤종현 변호사 등 홍 화백의 변호인단은 화가의 미술작품이 과연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변론 요지서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는 헌법에 의해 보장된 절대적 기본권”이라며 “국가형벌권이 화가의 작품 활동에까지 행사된다면 표현과 예술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침해”라고 반박했다.

안기부와 검찰은 홍성담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간첩죄), 회합통신, 금품수수 혐의 등 총 7개의 혐의를 적용, 기소했고 홍성담은 1심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홍성담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간첩죄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변호인 접견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이뤄진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호인 접견권 보장을 명시한 이 판결은 당시 공공연한 관행으로 자리 잡았던 수사기관의 위법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영장 발부 이전의 불법 구금과 수사기관에서의 고문과 가혹 행위 등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행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간첩죄 등 5개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혐의에 대해서는 그 죄를 인정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홍성담에 대한 상고심 주심대법관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다.

“우리들의 살과 피를 조국이 더 원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량과도 관계없이 출옥하는 그날까지 제가 이를 악물고 가슴에, 이 좁은 가슴이나마 시퍼런 정의 신념으로 건강하게 징역살이를 할 것입니다.”

1990년 1월 30일 1심 선고공판에서 7년 선고를 했을 때, 최후진술로 홍성담이 했던 말이다. 그는 최초로 남북의 문화예술 자주교류를 성사시킨 통일화가로 불린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 저서『오월에서 통일로』(청년사, 1990)와 작품집『해방의 칼꽃』(풀빛, 1990)을 냈다. 홍성담을 높이 평가하는 최열은 그를 1980년대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민중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남겼다고 말하면서 그의 인격적인 면모에 있어서도 개인주의나 행세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품성이 단호하고 야멸차면서도 매우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4. 대강 정리

민중미술은 1980년대 한국 미술이 낳은 가장 세계적인 자생적 미술 양식이다. 자생적이라 함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현실과 현장에서 빚어지는 여러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문제들을 스스로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 인식된 내용을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양식(良識)과 양심에 따라 진실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중미술에 대한 이러한 가치와 중요성을 어쩌면 짐짓 또 어쩌면 몰라서 그냥 무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 강의를 기화로 필자도 독자도 다 함께 민중미술의 탄생과 흐름을 통해 한국 미술의 비극적인 열정과 힘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민중미술에 힘을 쏟았던 여러 미술가들은 현재에도 대체로 오늘날 이슈가 되는 여러 문제의 현장을 찾아서 현실의 미술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그들의 자생적인 창조적인 상상력과 나름의 분명한 현실 인식이 결합된 결과 항상 그렇게 열심히 작업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더 깊이를 더하고자 한다.

* 다음번에는 ‘민중미술 담론 비판’을 연재할 것이다.(필자)

**저작권 문제로 작품들을 실을 수 없습니다. 참고할 작품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독자들의 양해와 저작권에 대한 깊은 분노의 공유를 바랍니다.(편집자)
홍성담, ‘대동세상’(1985, 목판화)
홍성담 관련, ‘민족해방운동사 중 광주민중항쟁도’(1989)
오윤, ‘칼노래’(1985, 목판화)
신학철, ‘모내기’(1987, 캔버스에 유채)
신학철, ‘한국근대사-3’(1981, 캔버스에 유채)
박불똥,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1990, 사진콜라주)
박불똥, ‘코화카염콜병라’(1988, 혼합매체)
두렁, ‘만상천하’(1982, 걸개그림)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한국현대미술사 개관] 민중 미술의 발흥과 전개

들어가는 말

앞으로 몇 회를 거듭해서 연재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번 한국 민중미술의 연재를 기화로 해서 한국현대미술을 그 시초에서부터 개관하고자 한다. 철학 전문 단체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발간하는 ‘웹진’에 한국 미술에 관한 글을 연재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나아가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글에서 심도 깊은 분석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략의 기본적인 교양 정도로 여기기 바란다.

사실 이 글을 연재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필자가 지난 2년간 대구에 있는 ‘수성아트피아’에서 미술관련 강의를 하면서 이미 마련되어 있는 강의록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강의였기 때문에 그다지 근본적인 분석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필자가 그럴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강의를 염두에 둔 표현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양해 바란다. 한국현대미술을 차례로 하되, 먼저 한국이 낳은 거의 유일한 독창적인 미술인 민중미술을 살펴봄으로써 여러분의 관심을 얻은 뒤, 다시 한국현대미술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오늘날의 한국미술에까지 되돌아오고자 한다.

1. 한국 민중 미술의 발흥과 전개

1) 상황

역사는 여러 ‘물줄기’를 낳는다. 그 ‘물줄기’들은 서로 다투면서 결국에는 새로운 ‘물줄기’들을 낳고, 그 새로운 ‘물줄기’들은 결국 새로운 다툼을 낳는다. 역사가 빠져버린 현재란 있을 수 없다. 현재는 이미 늘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역사를 어떻게든 함께 끌고 간다. 현재가 없는 역사도 없지만, 역사가 없는 현재도 없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생각을 ‘역사주의’라는 이름으로 강하게 비판한다. 제아무리 역사가 다변화한다 할지라도 역사 전체를 관류(貫流)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진리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주의’에는 이 같은 ‘본질주의’가 대립한다. 역사를 강조하게 되면 본질이 훼손되는 경향이 있다. 그 반대로 본질을 강조하면 역사가 퇴색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강조하면 민족의 문제가 생겨나고 그 역사를 누가 어떤 계층에서 주도하는가 하는 주도 세력과 관련하여서는 민중의 문제가 생겨난다. 그 반면, 본질을 강조하면, 보편적인 인류의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시대적인 주도 세력은 본질적인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임시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반도에서 서양풍의 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10년 일본으로 유학 간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1915년 일제 강점의 조선으로 돌아 온 뒤부터로 잡는 것이 관례다. 그 이후 21세기 오늘날 팝 아트류의 미술들이나 미디어 아트가 전개되는 데 이르기까지 거의 1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의 서양미술은 여러 갈래로 전개되어왔다.

하지만, 싸잡아 말하자면, 한국 민중미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의 대부분의 미술은 서양에의 유행을 뒤늦게 수입한 것들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우리네의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미술계만의 미술’, ‘아카데미즘적인 저들만의 미술’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작가 개개인의 목숨을 건 열정이 스며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바탕에는 이러한 경향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 미술사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주도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결국 앵포르멜이나 단색회화 등의 모더니즘 계열이었다. 이들은 미술에 어느 특정 계층이나 어느 특정 민족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예술적인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내세운다. 그런 까닭에 실제로 미술을 창작하는 작가나 미술을 받아들이는 관람객이 어떤 사람인가, 즉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입장을 갖는가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색이 중요한가 아니면 선이 중요한가를 그 자체로 다루고, 미술 재료 자체의 질감이 중요한가 아니면 그 미술 재료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한가를 그 자체로 다룬다.

그런데 1980년대 민중미술이 나타나 전혀 다른 미술 작업의 판을 만들었고, 당시 제도권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발휘하던 이들 모노크롬(단색화)의 흐름과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그런 가운데, 그동안 일천했던 미술에 관한 이론들도 아울러 개발되기 시작했다. 민중미술은 한국 미술계의 모더니즘적인 미술과 관련 사상에 대해 대대적인 도전을 하고 어쩌면 치명적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상처를 입혔다.

민중미술은 미술인들과 미술을 애호하고 향유해야 할 사람들이 지금 당장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가를 크게 염두에 두었다. 더 나아가 미술과 상관없어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지금 당장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가를 특별히 염두에 두었다. 그 현실은 폭압적인 비민주적 군사독재와 이를 뒷받침하는 남북분단에 따른 비자주적인 외세의존의 정치에 의거한 것으로 진단되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고발과 저항이 긴급한 현안이었고, 이를 극복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뒤따랐다.

거의 20년에 걸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민주화의 거센 물결에 의해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최고의 독재자인 박정희가 가장 믿었던 심복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일거에 막을 내린다. 민주화의 열기를 잠재우고 장기 집권을 획책하면서 1972년 선포된 유신은 한국의 1970년대를 최대한 억압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주범이 피살된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의 기쁨은 잠시였고 전두환 일당을 필두로 한 이른바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 과정에서 5 ? 18 광주민주항쟁이라고 하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감행했다. 이에 민주화의 열기는 일거에 지하로 가라앉는 듯 했으나 결국은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 체육관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호헌을 철폐시키고 일반 시민의 선거에 의해 대통령을 뽑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두환의 동지인 노태우 정권으로 귀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독재와 민주운동은 여러모로 격돌할 수밖에 없었고 온갖 불행한 사건들이 줄어 이어 일어났다. 감시, 추적, 수배, 연금, 투옥, 비밀 살해, 분신 등 학교에서나 사업장에서 그리고 정치권에서 끊임없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미술계라고 해서 완전히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면서 대학마다 사복경찰과 이른바 ‘백골단’이라고 하는 특수무술경관들이 가득 차 있었고, 학내 곳곳에서 숨바꼭질하듯이 아슬아슬한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그 와중에 1985년을 기점으로 대학 내에는 대대적인 이른바 운동권 세력들이 심지어 학과 단위로 생겨나 민주화의 열망을 불태웠다.

한편에서는 민주화의 방향을 소외되고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기본적이면서 현 단계 가장 주요한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켜 외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기본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현 단계 가장 주요한 것이라 했다. 오늘에 이르러 전자는 주로 ‘참여파’라 일컫고, 후자는 주로 ‘자주파’라 일컫는다. 이 두 양 진영의 각각의 주된 개념은, 전자의 경우 ‘계급’이었고, 후자의 경우 ‘민족’이었다. 아직도 이 일은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지 않은 데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현재의 한국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필자의 원고 분량이 너무 많은 관계로 이번 호에서는 민중미술 발생의 시대적 배경에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민중미술의 탄생과 전개, 그리고 주요 작가들에 대한 글이 이어질 것입니다.(편집자)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admin@ad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