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크네의 계단[카메라 옵스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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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회현동 좁은 골목을 지나다 2층 창가에서 들려오는 드르륵 하는 재봉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틀 끝에 처연히 매달린 계단. 누구라도 상승을 꿈꾸며 달려들었다가는 필시 깊은 상처를 입고 말 날카로운 쇠창살, 그리고 당장에 거 보란 듯이 이미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는 실 뭉치. 거기서 나는 아라크네가 꿈꾸었을 법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다.

그리스 신화의 아라크네는 신과 인간을 통틀어 최고의 자수(刺繡)실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만 잘 놓으면 신들의 영역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경쟁은 공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수의 여신 아테나와 솜씨를 겨루면서 신들의 ‘더러운’ 모습을 ‘아름답게’ 수놓아 아테나를 이기지만 그로 인해 죽음을 당하고 만다. 아라크네는 아테나로부터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테나가 그녀를 불쌍히 여겨 죽이지 않고 거미로 만들어 계속 실을 뽑아내게 했다지만 그건 일종의 진통제요 마취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죽었다. 처음 그녀는 실력만 뛰어나면 천국의 계단을 올라 저들처럼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오를 수 없는 추락의 계단이었다.

라면과 커피를 파는 구멍가게, 벌겋게 녹슨 에어컨 실외기, 좁은 골목 빼꼭하게 들어찬 손수레와 짐자전거, 비탈에 서서 도심으로 흘러들고 싶은 듯, 그러나 곧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건물, 시커멓다 못해 허옇게 타버린 모습으로 죽어있는 고사목. 이런 풍경이 익숙한 곳이 회현동이다.

‘어진 사람이 모인 곳’이라는 회현동(會賢洞)은 남대문시장 뒤편 가파른 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 ‘회현동 계단’은 나의 사진 주제였다. 회현동의 계단은 그만큼 특이하다. 층계가 길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듯하지도 않다. 층계는 오르막 한 가운데 한 사람 겨우 올라갈 정도로만 비틀거리듯 앉아 있고, 층계 양쪽엔 경사로를 그대로 두고 있다. 계단이 이렇게 된 건 손수레와 자전거, 오토바이 따위가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야 하는, 회현동만이 가진 특이한 사회경제사적 배경 때문이다.

주로 남대문시장에 의류를 공급하는 배후기지 역할을 해 온 회현동에는 곳곳에 “재봉사, 재단사, 객공미싱사 구함”, “○○자수” 등의 광고지가 어지럽게 뒹굴거나 벽에 붙어 있고, 담벼락 위의 철조망에는 색색의 실이 휘감겨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로 남대문에서 벌어먹으며 싼값에 방을 얻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자수, 단추 꿰매기, 지퍼홀치기, 양복주머니 달기, 종이심지 만들기 같은 일을 하는 가내 하청업소가 많다. 그래서 골목 어귀마다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널려있고 그 안에는 각종 천 조각이나 버려진 지퍼 따위가 가득 묶여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간간이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덜덜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의 귀를 창 안으로 이끈다. 이곳이 한창이던 때에는 좁디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밤늦도록 불 밝혀진 창이 많았다고 하며 지금도 간혹 그런 곳이 보인다.

이제 회현동은 서서히 퇴락해 가고 있다. 마을 어귀에서 가내공장을 운영하는 유○○씨는 최근 의류하청물량의 대부분이 중국으로 넘어가 문 닫은 공장이 많이 생기고 비어 있는 집들도 꽤 늘어났다고 귀띔한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이었는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요즘은 노래방 도우미로 전업한 사람이 많단다. 이제 회현동에선 계단을 오를 수 있다는 ‘헛된’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어디 가서 어진 사람들을 찾을 것인가.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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