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 담론 비판(2)[한국현대미술사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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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호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편집자)

2. 민중미술 양식의 문제

민중미술 진영이 모더니즘 미술 진영보다 한 발 앞선 것은 미술이론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원리적이면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1) 구상 미술 문제

민중미술은 그 양식에 있어서 이른바 ‘민중적 리얼리즘’을 제창한다. 여기에서 ‘리얼리즘’은 추상미술 대신 ‘구상 미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서구에서 한껏 발달하고 있는 각종 아방가르드적인 기법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여실한 리얼리즘만은 아닐 터이다. 이에 관련해서 최열은 맨 먼저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을 매우 진보적인 이론으로 꼽는다.

“김윤수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매우 진보적인 수준에 도달한 이론이다. 그는 ‘구상미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 대상(현실)에 대한 인식을 중요시한다. ②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파악한다. ③ 자연의 질서대로가 아니라 의미내용에 따라 화면을 구성한다. ④ 개인의 주관적 ? 정서적 표현을 배제하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역사관이나 세계관과 관련되는 것이다.’ (…) 이것은 사실주의 이론의 빼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창작실천의 부재였으며 당시 경향적인 미술가들에게 있어서조차 이 구상미술론이 확고한 창작방법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김윤수,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계간미술』, 1981. 겨울)을 참조한 최열의 정리. 최열,『한국현대미술운동사』(돌베개, 1991), 184쪽.)

최열이 소개하고 있는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은 리얼리즘이 소박한 재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기법의 원리를 핵심적으로 잘 정돈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소련에서 1934년 [사회주의 작가회의]를 통해 그 이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알려지게 되는 네 가지 규칙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가) 프롤레타리아적일 것 : 예술은 노동자들에 관련된 것이어야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 전형적일 것 : 인민의 일상생활의 전형을 담은 장면들을 그려야 한다. 다) 사실적일 것 : 재현적인 의미에서 사실적이어야 한다. 라) 당파적일 것 : 국가와 당의 목적을 지지해야 한다. 등의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①에서 현실을, 만약 민중을 프롤레타리아로 보고 민중의 현실로 읽는다면, ①은 가)와 바로 직결된다. 그리고 ②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총체적인 파악’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나)에서 제시하는 ‘전형성’이다. 또 ③에서 ‘의미내용’은 다)에서 제시하고 있는 ‘재현적인 의미’와 일정하게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④에서 말하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라)에서 말하는 ‘국가와 당’이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면, 양쪽이 서로 직결된다.

김윤수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할 때,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원칙들을 당시 한국적 상황에 맞게 나름대로 조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윤수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적인 것을 일정하게 수용하는 열린 태도를 겸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초현실주의라든가 포토몽타주와 같은 팝 아트적인 기법들을 일정하게 허용함으로써 민중미술의 지속성을 향한 격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김윤수가 신학철의 몽타주기법을 대단히 높이 산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민중적 순정주의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최열은 다음과 같이 민중미술의 구상미술의 경향에 서구적인 경향이 가미된 것에 대해, 예컨대 표현주의 양식이라든가 극사실주의 양식 혹은 초현실주의 양식을 결합한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이 경향도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적 한계 혹은 현실인식의 한계와 더불어 표현양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양식의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특징은 그 현실인식의 한계와 결합하여 형상화 작업을 매우 추상적인 데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의 작품화면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삶의 구체성, 동시대적인 구체성, 사회적 삶의 총체적 개괄성과 그 인간의 전형성을 찾아보기 어렵다.”(최열(1991), 188쪽.)

이러한 최열의 입장은 민중의 예술적 상상력과 감각이 반드시 도식화된 전형성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한편으로 민중의 예술적 자질 자체를 한정할 뿐만 아니라 폄하하는 우를 범하는 것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2) 민중적 리얼리즘론

구상미술론에 이어 좀 더 구체적으로 민중미술의 양식을 구체화하고자 한 논의가 ‘민중적 리얼리즘론’이다. 이에 관련해서는 민중미술이 노동투쟁의 현장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선 라원식의 주장이 들어볼 만하다.

“민족미술의 내용 즉 주제, 제재, 소재는 민족의 현실을 토대로 나와 너의 삶,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찾아지는 것 (…) 민중의 미의식, 정서를 체화한 작품, 다시 말해 민중의 꿈과 사랑, 의리와 인정, 분노와 회한, 저항과 절규, 재생과 부활, 희구와 염원 등등을 폭넓게 담아내면서 민중의 인생관, 세계관까지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을 요구한다.”(라원식, 「민족민중미술의 창작을 위하여」(『민중미술』, 공동체, 1985) 중에서. 최열(1991), 219-220쪽에서 재인용.)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한 한국에서의 이른바 진보 진영의 모든 활동들은 설사 계급적인 소외의 체제적인 극복을 그 목적으로 주장한다 할지라도 일정하게 민족의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구도가 마치 비켜가는 쌍곡선처럼 대립되는 측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양쪽을 함께 아우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라원식 역시 민족미술의 방향을 대략 제시하면서 민중미술이 표현해야 할 주제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역시 리얼리즘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민중의 인생관, 세계관까지도’ 더군다나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라야만 진정한 민중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품이라 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용문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이 점에 있어서 민중미술의 방법론이 가장 힘겨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러한 민중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민족미술 내지는 민중미술을 추구하면서 여러 관련 작가들은 ‘분단’, ‘6 ? 25’, ‘일제강점의 만행’, ‘한국전쟁의 비참함’, ‘광주민중항쟁’, ‘유격대 투쟁’, ‘노동현장의 고통’, ‘농민생활’, ‘4 ? 19’, ‘민족통일’, ‘빈민생활’, ‘이산가족’, ‘신식민성’ 등을 주제로 선택하여 작업에 임했다.

이런 와중에 민속그림이 민중미술에 대해 그 기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정하게 모델로 작동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그런 차원에서 조선후기 민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는 이미 1970년 어간에 김지하가 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관해 최열이 전하는 원동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원동석은 민속그림을 곧바로 민중미술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고 역사적 존재로서 민중을 정식화한 다음, ‘민중예술은 역사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소외의 압제로부터 탈출하려는 총체적 삶의 표현이며, 민속예술에서 그 뿌리를 찾아 공동적 삶의 염원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규정한 다음 그 뿌리를 조선 후기의 민화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탈춤, 마당굿, 민요와의 접속에서 오늘날 민중예술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미술에서 ‘민화와 접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원동석, 「민중그림은 가능한가」(『일과 놀이 1』, 일과놀이, 1983) 중에서. 최열(1991) 229쪽 재인용 및 참조.)

탈춤, 마당굿, 민요 등은 분명 1980년대 민중예술에서 약방 감초처럼 전국적으로,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확산되고 있었다.(이를 당시의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순치시킴으로써 그 근본정신의 뿌리를 잘라내 버리려고 한 것이 이른바 ‘국풍’이었음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미술 영역에서 이 같은 성격의 민중예술을 찾아야 할 터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고, 이에 원동석은 조선조 후기의 ‘민화’를 적극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 민화가 대중적으로도 여러모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이에 따른 평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원동석은 같은 글에서 조선 후기 민화(문인화도 포함)의 양식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추려냈다.

“① 대상의 대소, 비례관계 무시 ② 공간의 상하, 원근의 무시 ③ 공간의 분할과 연속의 임의성 ④ 역원근법과 삼원법의 병용 ⑤ 시점의 이동에 따른 물상전개의 다면화와 물상 표현의 상괘성 이탈 ⑥ 시간의 동시성 표현 ⑦ 주제설정의 이중삼중적 결합에 따른 이미지 복합의 자유로움 ⑧ 색채 표현의 대비효과 및 화면의 평면화에의 복귀 ⑨ 전달의 간결성, 명확성, 즉흥성”(최열(1991) 231쪽에서 재인용)

원동석이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는 민화(문인화 포함)의 이런 특징들은 그 자체로 보면, 분명 근대 이후 서양미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대단히 아방가르드하고 그래서 모더니즘적이기도 한 특징들이다.

3. 민중 예술가론

1984년 원동석이 「민중미술의 논리와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민중미술에 대해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미술’이라고 규정했을 때 ‘민중에 의한’이란 것을 강조하게 되면 민중이 곧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에 다음과 같은 사안들이 제기된다.

1) 공동체적 신명 문제

민중미술이 전체 민중예술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그 나름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집단 창작 내지는 집단 미술의 향유 문제였다. 이에 관련된 것 중에 대단히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공동체적인 신명 문제다. 이는 주로 마당놀이를 통한 복합적인 민중예술에서 얻어낸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부산에서 주로 활동을 한 채희완의 연구가 심도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천적 과제는 결속을 강화(예술의 문제와 사회적 삶의 문제 – 지은이)하는 공동체 의식과 적에 대한 대결을 강화하는 갈등의식, 이 두 가지로 요약되는 민중적 사회의식 ? 이는 갈등을 통한 통합을 거쳐 다시금 갈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표현상으로서는 풍자적 해학, 해학적 풍자, 웃음과 눈물의 미적 유화, 한을 뚫고 나오는 역동적 신명 등으로 표출된다. ? 의 예술적 승리라는 예술 사회학적 기능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오늘의 사회문제를 공동체적 관점의 표적으로 부각시키고 거기에서 성취된 사회인식을 행동화하는 오늘의 ‘삶의 축제’로 정착시키는 일임에 다름이 아니다.”(채희완, 「역사적 지속성의 질긴 숨결」(『마당』, 1983. 12) 중에서. 최열(1991), 205쪽에서 재인용.)

채희완이 제시하는 민중의식과 이에 의거한 ‘삶의 축제’로서의 민중예술은 궁극적으로 민중의 삶 자체를 가장 넓은 의미의 예술적인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결의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작품과 관객 혹은 작가와 관객 간의 상호작용이 없이는 작품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이른바 ‘매체 미술’에서 소폭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채희완이 제시하는 ‘삶의 축제로서의 민중예술’은 아예 전체적으로 상호작용이 관통하는 그런 예술이다.

2) 미술의 주체인 민중

1983년 8월 이후 ‘광자협’(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은 ‘시민미술학교’를 열면서 민중이 미술의 주체임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시인만이 시를 쓰고 화가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바람직한 예술은 다른 사람의 생존의 체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서로 공유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바야흐로 정직하고 튼튼한 민중예술이 그 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최열(1991), 196쪽 참조.)

한편 ‘광자협’의 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으로 보이는 최열은 이렇게 말한다.

“민족과 민중의 관점을 지키고 반민족, 반민중 세력을 비판하는 방식에 있어서 민족과 민중의 잠재된 생명력이라는 정서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형식은 내용의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범주가 아닌 소재적 함정으로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형식을 세련된 기교나 탁월한 회화적 질서 개념이 아니라 민중적 정서를 갖는 내용과 그것을 담는 그릇의 뜻이다.”(최열, 「80년대 미술운동의 한계와 극복」(『시대정신』1권, 일과놀이, 1984) 중에서. 최열(1991), 199쪽.)

그런가 하면, 1983년 7월 창립 예행전을 가지면서 창립된 ‘두렁’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제시한다.

“우리는 미술을 위한 미술이거나 생활에 미를 심기 위한 미술이 아닌 ‘삶에 기여하는 미술’이 되기를 노력한다. 사회와 미술을 유기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이기적 개인주의의 온상인 강조된 전문성을 경계하고, 공동 작업을 지향한다. (…) 개방적인 공동작업과 민중과의 협동적 관계는 전문성의 공동생활과 미술행위의 민주화를 위한 기초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산 그림’을 지향한다.”(두렁, 「산그림을 위하여」(『산그림』, 두렁, 1983) 중에서. 최열(1991) 202-203쪽에서 재인용.)

미술 작업이 전문가들만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창작 집단 ‘두렁’의 이러한 입장은 아방가르드적인 창조 활동을 통해 기왕의 지배적인 체제를 지향하는 일체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양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적인 정신과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일부 예술 천재들에 의한 아방가르드를 제시한 것과 완전히 대립된다.

이러한 ‘두렁’의 민중적인 집단 창작 정신은 그 형식에 있어서 오늘날 시민참여형의 공공미술 내지는 사회예술의 선구적인 모범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이러한 미술들이 확보해내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심층에서의 삶의 질을 암암리에 선도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대략 정리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예술은 항상 이중적인 긴박감 속에서 그 현존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민중적인 삶이 일상에 있어서 체제의존적인 측면이 강한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이는 예술이 지닌 아방가르드 정신을 뒷받침한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 지닌 감각적인 힘으로써 민중적인 삶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한다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예술을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것인가 하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일컫자면, 일정하게 스스로를 민중의 삶으로부터 분리해 냄으로써 오히려 그 민중의 삶으로 스며들어가고, 스스로를 민중의 삶 속으로 깊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오히려 미래를 향해 민중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는 것이 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과 삶 간의 역리적인 역동성을 가장 신랄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민중미술 진영을 형성한 여러 입장들이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을 내보인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그저 예술을 바라보는 전략적인 관점의 차이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에 따른 전술적인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아쉬운 것은 벌써 20-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되돌아 볼 때,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하나의 학적 체계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의 전체 맥락 속에서 최고도의 난맥상을 보이는 한국 미술의 모습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민중미술이야말로 미술과 구체적인 사회역사적인 삶 간에 목숨을 건 가장 뜨거운 긴장감을 연출했기에, 그 다기한 정신과 실천에 대해 굳건한 예술철학적인 바탕 위에서 학적인 차원으로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더라면 그 파급력은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영역에까지 크게 미쳤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갖고서 깊은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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