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 내일은 너[카메라 옵스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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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침울하다. 일상조차 변변히 흐르지 못할 만치 생동의 기운이 점점 쇠해가는 탓이다. 그러니 작은 화초나 아이들, 햇볕 한뼘처럼 사소한 생기의 편린들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달리 보일 수밖에. 사진을 시작한 후로 몇 차례나 옛 동네의 임종을 했건만 그 쇠락의 면면은 항상 처연한 기시감(旣視感)을 몰고 온다. 병증의 악화 정도만 다를 뿐 소멸의 압박은 늙은 골목 어디에서나 감지되기에, 그 이미지들에 감도는 불길함도 하릴없다.

기억하기에, ‘마카브르(Macabre)’라 불리던 중세 유럽의 회화작품들에도 비슷한 불길함이 흘렀다. 해골이나 시체처럼 칙칙한 오브제를 포함하는 그림들은 모든 인간의 숙명적 종국을 은유하면서 ‘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가르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매개로 피안에 대한 염원을 일깨우고,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강화하려던 것이다. 지극히 중세다운 그림인 셈인데, 그 훈계가 페스트의 참혹한 기억 등을 염두에 둘 때 생각보다 효과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우아하게 빛나는 신성을 위해 고해(苦海)의 현세가 가벼이 부정됨은 마뜩찮지만, 사신(死神)의 흔적들이 어쨌거나 삶(영생)을 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래서, 마카브르는 죽음이 삶에 닿는 역설이다.

골목의 이미지 또한 유사한 역설이지만, 구질구질한 골목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그 자리에 들어설 ‘이 편한 세상’ 따위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그 역설은 온통 스러지는 것들의 이미지가 생존에 관해 절절한 이야기를 하는 데 있다.

재개발은 그 주체인 자본과 국가 권력의 측면에서 때려 부수는 일(타나토스)과 새로 짓는 일(에로스)이 하나됨이다. 부수거나 짓거나 어차피 거시적인 자본 증식의 일환일 뿐이고 양자의 유기적 결합이야말로 그 증식에 더욱 효과적이다. 아울러 그 과정 전체는 권력이 의도하는 도시재개발의 실천이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서 양자는 철저히 분리된다. 타나토스의 저주와 에로스의 축복은 서로 다른 이들의 몫이어서 철거의 대상과 건축의 수혜자는 다르다. 어떤 이는 새집에 깃드는 행복이나 투기의 성취를 누리지만, 주거와 생활의 공간 전체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잔혹한 흑마술은 오로지 가장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집중된다.

이들은 대개 노인으로 그 낡은 담벼락이나 지붕들처럼 수십년을 그곳에 머물러 왔다. 공간의 소멸은 그토록 익숙한 삶의 터전과 이웃들, 그 속에서 형성된 인간 관계, 생활의 습관, 일상의 전개 방식 등이 일거에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는 삶의 기반과 양식의 소멸이며, 정체성의 파괴다. 골목과 옛동네의 무도한 궤멸이 철거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직접적인 폭력성을 넘어 소리없는 홀로코스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 창출보다는 투기로 성장해 온 건설 자본들의 비루한 연명, 마치 염습(殮襲) 같은 도시의 미화가 저 학살을 댓가로 치를 가치가 있는가?

철거가 시작된 동네에서 옛집 근처를 배회하는 이들은 자기 육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살아 있는 영혼이 되지만, 이들의 안식은 또 다른 늙은 동네에서만 허락된다. 사라진 골목들은 남은 골목들에게 가장 비관적인 뉘앙스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이병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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