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고조선 역사가 없으면 한국사도 없다: 윤내현이 쓴 『고조선연구』

‘고조선 역사가 없으면 한국사도 없다.’ – 신채호 선생

:윤내현이 쓴 『고조선연구』

 

나태영(한철연 회원)

 

이 책은 900쪽이 넘는 책이다. 그런데도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고조선 부분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 『한국사』 고조선 부분은 4쪽에 불과하다. 고조선 관련 참고도서는 통사 몇 권에 불과하다. 왜 이리 되었을까? 바로 지금 주류 강단사학자들이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내현은 원래 중국 상고사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가 고조선 관련 사료를 자주 보게 되었다. 현재 주류 사학자들이 받아 들이는 내용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류 사학계에 자극을 주려고 『한국고대사 신론』이란 책을 출판했다. 하지만 주류 사학계는 그가 제기한 문제를 귀담아 듣지 않고 그를 미친 놈 취급했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상고사 전문가 윤내현은 한국상고사 곧 고조선 전문가가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우리나라 역사 책 중에서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이라는 이름이 맨 처음 사용되었다. 일연은 단군조선만을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고조선은 단군조선에 대한 이름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옳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고조선과 똑같이 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지대인 난하 하류 동부유역만을 차지했다.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지대인 난하에서 대릉하에 이르는 지역만을 차지했다.
 

고조선 나라 수명이 서기전 2333년〜서기전 108년까지라고 말한다. 위만조선이 서기전 108년에 망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옳지 않다. 위만조선이 망할 때도 고조선은 훨씬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 위만조선의 영토는 난하에서 대릉하까지였다. 고조선은 서기전 108년이 아니라 서기전 100년 전후까지 유지된 나라이다. 고조선은 위만조선이 망한 서기전 108년부터 고조선 제후국이었던 부여가 독립국이 된 시기 사이에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부여가 독립국이 되었던 해는 서기전 59년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망한 시기는 서기전 108년〜서기전 59년으로 봐야 할 것이다.
 

1. 여섯 가지 조선 윤내현 선생님은 중국 역사 기록물에 나오는 조선을 여섯 가지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1) 고(단군)조선
(2) 고조선 안에 있는 고조선 직할국(진국: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린 땅, 지금의 요하부터 청천강 까지, 대조영이 발해 세울 때 진국이라 나라 이름 지은 것은 고조선 직할국 진국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기자조선(난하 동부유역)
(4) 위만조선(난하〜대릉하)
(5)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난하 동부유역: 『한서漢書』 「지리지」 <낙랑군> ‘조선현’조를 보면 조선현에 대해서 동한의 학자 응소가 이리 주석을 달았다.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낙랑군의 조선현에 주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는 것이다.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시기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세기 말 즈음이었고 한사군이 설치된 것은 서기전 108년이었다. 따라서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은 기자가 망명했던 곳이라는 뜻이다. 기자조선 영토는 난하 동부유역이었다. 따라서 한사군 낙랑군 조선현은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나라 역사 책『진서 晉書』 「지리지」 <낙랑군> ‘조선’조에 ‘(조선현)은 서주가 기자를 봉했던 땅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6) 고조선이 무너진 뒤 단군 일부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후한서』「동이열전」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맞닿아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은 동한시대에 고구려 남쪽에 조선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 조선은 고구려와 국경이 맞닿아 있고 그 남쪽에 있었다. 때문에 그 위치나 영토 넓이로 봐서 고조선과 다른 조선임이 확실하다.) 중국 역사 기록물을 읽을 때 조선이 몇 번째 조선인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 관련 유물/ 출처: www.koreaikultura.hu

고조선 관련 유물/ 출처: www.koreaikultura.hu


 
세 가지 요동(遼東)
 
고대 요동의 위치를 올바르게 알아야 고조선 서쪽 국경선을 올바르게 알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요동이 어느 곳이었는지 그 이후 요동이 어찌 옮겨졌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 중국 기록물에 나오는 조선을 여섯 가지로 구분해 봐야 하듯이 요동에 대해서도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로 구분해 봐야 한다. 앞으로 한국 상고사 책 읽을 때 요동이라는 땅 이름이 나오면 주의 깊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1) 난하로부터 동쪽 지역
(2) 요하로부터 동쪽지역
(3) 중국 행정구역 요동군

 
(1) 난하로부터 동쪽 지역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로부터 동쪽 지역이었다. 지금의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위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대에 요수(지금의 난하)라는 강 이름이 먼저 생기고 그 강 이름을 기준으로 하여 요동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 영토의 동쪽 끝을 극동(極東: 동쪽 맨 끝 땅)이라는 뜻으로 요동이라 불렀다. 요(遼)라는 한자를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첫 번째 뜻이 ‘멀다’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 영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땅을 요동(遼東)이라 불렀다. 요동은 그 대부분이 중국 영토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2) 요하로부터 동쪽지역
 
오늘날의 요동은 지금의 요하(遼河)로부터 동쪽지역을 말한다. 이것은 요동이라는 땅 이름이 동쪽으로 옮겨갔음을 뜻한다. 요수(遼水)도 두 가지가 있다. 전국(전쟁나라)시대, 진제국시대와 서한 초기까지는 요수가 지금의 난하였다. 동한시대(23년)부터 요수는 지금의 요하(遼河)이다. 따라서 동한시대 이전에 요동은 난하로부터 동쪽지역이었다. 동한시대부터 요동은 지금의 요하로부터 동쪽 지역이다.
 
(3) 중국 행정구역 요동군
 
『후한서』「동이열전」과 진수가 쓴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吏傳)」의 <고구려전>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맞닿아 있었다.’
동한시대 이후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지역에 있었는데 고구려가 요동으로부터 천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이 기록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기록에서 요동은 중국 행정구역인 요동군을 말하는 것이다. 서한 무제 때에 서한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요수라는 강 이름과 난하로부터 동쪽 지역이었던 요동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의 요하로부터 오른쪽 지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하지만 행정구역인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지금의 요하로부터 동쪽 지역이었던 요동에 있었지만 중국의 행정구역인 요동군으로부터는 동쪽으로 천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조선은 고조선 무너진 뒤 고조선 왕족 포함 일부 세력이 살던 나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행정구역이었던 요동군은 난하 하류유역 일부에 불과했다. 『한서(漢書)』 「장진왕주전(傳)」에는 번쾌가 노관의 반란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곡군, 우북평군, 요동군, 어양군을 평정하고 장성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요동군이 장성 안의 중국 영토였음을 말해 준다. 이 장성은 진시황제 때 쌓은 장성이다. 이 장성은 서쪽으로부터 지금의 난하를 가로질러 갈석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요동군은 장성 안 쪽, 즉 갈석산 서쪽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 위만조선과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여섯 가지 조선과 세 가지 요동을 구별할 수 있으면 21세기 한국상고사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