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없는 것과 관련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이 교탁이 보이지요??이 교탁은 크기가 있습니다.?그런데 크기가 있는 것은 모두 쪼개질 수 있다고 했지요??이제부터 우리 머릿속에 있는 칼날로 이 교탁을 한번 쪼개 봅시다.?쪼개고 또 쪼개고……?한없이 쪼개지지요??이제 잠깐만 칼날을 멈추세요.?그리고 생각해 봅시다.?왜 이렇게 크기를 가진 것은 한없이 쪼개질 수 있지요??왜 우리는 크기가 있는 것은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쪼개고 또 쪼개도,?크기가 있는 한,?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칼날이 무디어지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우리가 쪼개는 작업은 물리학으로 말하면 작용입니다.?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작용에 아무런 반작용도 하지 않고 작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이 신기한 것은 무엇일까요??순수하게 수동성만 지니고 있는 이 신기한 것,?크기를 가진 것 속에 숨어 있는 이것,?바로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없는 것만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있는 것은 쪼개지지 않습니다.(있는 것에 작용을 하면,?작용도 있는 것이므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저는 없는 것을 순수하고 절대적인 수용 가능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쯤 해 두고 이제 쪼갤 때 생기는 다른 현상을 살펴보기로 할까요?크기를 가진 것은 아무리 쪼개고 또 쪼개도 크기가 아예 없어져 버리지는 않습니다.?그러면 아무리 작용을 해도 끝끝내 그 작용에 맞서서 저됨(자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있는 것만이 저됨을 잃지 않습니다.?있는 것이 저됨을 잃고 바뀌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그러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될 수 없고,?없는 것도 있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다시 말해서 끝끝내 저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은 크기 속에 있는 있음의 측면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그것은 크기를 가진 것은 모두 그 안에 순수 수동성과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곧 크기 속에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제까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에 분필이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여기에 분필이 없다.’고 말하면 저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크기 안에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 교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고,?이 말을 넓히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모순을 반영해서 있는 것도 파악하고 없는 것도 파악하여?‘있다’,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없는 것을 받아들여?‘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거짓에 이르는 함정이 아니라 세상살이와 주고받는 이야기와 그 말들을 뒷받침하는 우리 생각에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저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4

 

윤구병 그림 1-5

그리고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여기에서 고백할 말이 있습니다.?그것은 이 그림은 제가 생각해 내서 그린 것이 아니고 제 스승인 박홍규 선생님이 그려 주신 것을 본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물론 그분은 있는 것,없는 것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와 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앞의 그림?4를 보십시오.?보다시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순이 선을 보인 것입니다.?여럿〔多〕의 최소 단위인 둘〔2〕은 이렇게 모순과 함께 태어납니다.?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있는 금〔line〕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앞에서 했던 질문과 꼭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이 금은 있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없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요.”

어떤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있는 것이므로 이 그림의 왼쪽 칸에 있는 있는 것에 달라붙어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려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고,?그에 따라 없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네요.”

“그럼,?없는 것에 속하겠네요.”

다른 학생이 잽싸게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없는 것이므로 오른쪽 칸에 있는 없는 것과 구별이 안 되어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겠네요.?그리고 그 결과 없는 것만 남게 되어 있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는데요.”

그러면서 저는 칠판에 금을 잔뜩 그어서 한 번은 없는 것을 뭉개 버리고 또 한 번은 있는 것을 뭉개 버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6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요??그러니까 달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라 주는 금은 동시에 있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없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므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그리스 철학에서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아페이론은?‘규정할 수 없는 것〔indefinite〕’이고?‘한계가 없는 것〔infinite〕’입니다.?피타고라스가 그처럼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페라스(peras), ‘한계’, ‘끝’의 반대말이 바로 이것입니다.?여기에서 잠깐 옆길로 들어서서 페라스,?곧 한계이자 끝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봅시다.?아다시피 피타고라스는 페라스가 하나뿐인 것을 점〔point〕으로 규정했습니다.?두 개인 것을 선으로 보고,?세 개인 것을 면〔plane〕,?곧 삼각형으로 보고,?네 개인 것을 입체로 보았습니다.?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점?●●─선?●●─면?●●─입체(세 개의 점 위에 점을 하나 올려놓은 것).?피타고라스가?1, 2, 3, 4라는 숫자를 그처럼이나 애지중지하고?1+2+3+4에서 나온?10이라는 숫자를 신성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점이나 선이나 면이나 입체로 되어 있어 이 네 개의 숫자 속에 우주의 구성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사실 이 끝이라는 낱말(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것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이를테면 여기 있는 이 교탁을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여러분의 망막에 나타나는 것은 이 교탁의 끝,?다시 말해서 이 교탁이 끝나는 표면입니다.?겉모습이지요.?우리는 투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탁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우리는 늘 어떤 것이 그것이 아닌 것과 만나는 한계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다른 예를 하나 더 들지요.?여기 칠판이 있는데,?여러분이 이 칠판에 아주 가까이 서서 이 칠판 안쪽에 있는 어느 지점만을 볼 때는 그것이 칠판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칠판의 테두리까지 보아야만 비로소 이것이 칠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끝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기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기타를 가지고 있는 학생 없습니까??좋습니다.?여기에 기타 줄이 하나 있습니다.?이 줄은?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이 줄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무한한 끝이 숨어 있습니다.?기타를 잘 치는 사람은 이 숨어 있는 끝〔peras〕?가운데 자기가 바라는 끝을 아주 잘 찾아냅니다.?손가락으로 줄을 길게 또는 짧게 짚고 튀길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들리는데 그 까닭은 이 기타 줄에 숨어 있는 끝이 저마다 다른 소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끝이 없는 것〔apeiron〕’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집니다.?무엇인 것도 아니고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닌 것,?더 정확하게 말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규정할 수 없는 것,?끝도 갓도 없는 것,?한없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윤구병 그림 1-5

“자,?이제 그림?5를 다시 한 번 봅시다.?이것을 당구공이라고 합시다.?있는 것은 하얀 공을 가리키고 없는 것은 빨간 공이라고 칩시다.?보다시피 이 당구공 둘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둘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붙어 있으면 하나가 되어서 뗄 수가 없지요.?그렇다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떨어져 있으면 이 두 당구공은 서로 독립되어 있어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다시 말해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문제는 이 두 개의 공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맞닿아 있다.’는 말을 수학에서는 탄젠트(tangent),?곧 접선(接線)이라는 낱말을 써서 나타냅니다.?이 탄젠트라는 말은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유래한 말인데?‘닿는다’, ‘만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영어의 콘택트(contact)도 어원이 같습니다.?함께〔con〕+닿아 있는 것〔tactus〕이 콘택트이지요.?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는 영어에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낱말이 있습니다.?프랑스어로는 콩텡장스(contingence)이지요.?그런데 이 낱말의 뜻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 ‘우연성’, ‘우발성’이 이 낱말의 뜻입니다.그러면 맞닿아 있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우연을 가리키는 말로 탈바꿈했을까요??우리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맨 처음 나타나는 두 괴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며 이 둘이 몸을 맞대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이 두 괴물이 서로 몸을 맞대야 할 아무런 필연적인 까닭이 없습니다.우리는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을 보통 사라진다,?파괴된다고 말하고,?거꾸로 없는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생겨난다,?창조된다고 말하는데,?엄밀하게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거나,?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정확하기로 소문이 난 물리학자들도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있는 것이 생겨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면 이미 있는 것,?아원자나,?원자나 분자의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만일에 정말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뀐다면,?이런 사태는 우리가 머리로 이치를 따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우연입니다.?기독교의?‘하나님’이 무(無)로부터〔ex nihilo〕?이 세상을 창조한 것〔creatio〕이 우연이듯이.?하나님이 무에서 다른 세상을 창조해 내지 않고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 냈는지 그야말로?‘하나님’만이 아는 일,?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맞닿아 있는 당구공 두 개를 다시 살펴봅시다.있는 것이라는 흰 당구공과 없는 것이라는 빨간 당구공이 맞닿아 있는 점을 우리는 접점이라고 부릅니다.?접촉하고 있는 점〔point〕이라는 뜻이지요.?이 접점은 있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없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 했습니다.실제로 당구장에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이 붙었다 떨어졌다 해서 그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실금 같은 공간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는 무규정적인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은 어떤 때는 있는 것과 붙어 있어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存在〕이 되는가 하면,?또 어떤 때는 없는 것과 붙어 있어서 없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無〕이 되기도 합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apeiron〕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고,?그런 점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제 그림을 다시 하나 그려 보겠습니다.”

윤구병 그림 1-7

① ㄱ에서 점점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ㄱ′′,?ㄱ′′′ ……

② ㄱ에서 점점 없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 -ㄱ′′, -ㄱ′′′ ……

저는 칠판에 위와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그림과 비슷한 것을 우리에게 그려 보여 주신 분도 박홍규 선생님이었습니다.)

“자,?보십시오.?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두 괴물이 서로 나란히 몸을 맞대자마자(관계를 맺자마자)?곧 두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세 번째 괴물(무규정적인 것)이 나타나고 이 세 번째 괴물이 나타나자마자,?첫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있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있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없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없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 -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한없이 많은 괴물들(ㄱ′,?ㄱ′′,?ㄱ′′′ ……-ㄱ′, -ㄱ′′, -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섰는데 이것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곧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보기를 들어 설명하지요.?이?50센티미터 남짓한 기타 줄 안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어서 이 줄의 어느 지점을 짚고 줄을 튀기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가 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기타 줄에 숨어 있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은 아직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소리들입니다.?다른 보기를 들어 설명해도 마찬가지입니다.?한 무더기의 진흙 속에는 그것을 빚어서 찻잔을 만들 수도 있고,?벽돌을 만들 수도 있고,?화분에 담아 꽃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한히 많은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려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2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자,?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어요.?그러나 지금 우리가 따져 보려는 건 어느 낱말의 울타리 속에 더 많은 것들이 들어가느냐가 아니고 낱말이 지닌 틀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니까,?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더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제가 알고 싶었던 건?‘있는 것’이라는 낱말이 그 안에 담길 수 있는,?더 그릇이 큰 낱말이 따로 있느냐는 것입니다.?그러니까?‘사람’보다는?‘동물’이 더 그릇이 큰 낱말이고, ‘생물’보다는?‘있는 것’이 더 그릇이 크지요??그럼?‘있는 것’?다음에?‘있는 것’까지 담을 수 있는 더 그릇이 큰 낱말이 있나요,?없나요?”

“글쎄요??없는 것 같은데요.”

학생들의 시큰둥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이제 이 그릇이 가장 큰 괴물 단지〔논리학에서는 이것보다 더 울타리가 넓은 낱말이 없다고 해서 잔뜩 어려운 말로?‘존재라는 개념은 최고의 유개념(類槪念)이다.’라고 게거품을 무는데,?그런 말은 잊어버리고〕?‘있는 것’이라는 낱말에만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그리고 여러분 말대로?‘있는 것’이라는 이 괴물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고 칩시다.?그런데 여럿의 가장 작은 수(이것을 여럿[多]의 최소 단위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는 몇이지요??그렇습니다.?둘이지요??하나,?둘의 둘.?그러면 이제?‘있는 것’이 두 마리라고 치고 그놈들을 나란히 놓아 보기로 할까요?”

그림1

그림1

“앞에 있는?‘있는 것(ㄱ)’과 뒤에 있는?‘있는 것(ㄴ)’이 서로 다른 것이 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요??만일에 이 두 놈이 한데 붙어 있으면 우리는 두 마리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그런데 이 두 마리가 떨어져 있으려면 둘을 떼어 놓는 무엇인가가 사이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여러분과 저 사이에 공간이 있듯이 말입니다.”

학생들은 제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앞에?‘있는 것(ㄱ)’과 뒤에?‘있는 것(ㄴ)’을 갈라놓는 이 금은?‘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학생들은 갑자기 어리둥절해진 것 같았습니다.

“‘있는 것’이요.”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있는 것’이라고요??그럼?‘있는 것(ㄱ)’, ‘있는 것(금)’, ‘있는 것(ㄴ)’?죄다‘있는 것’이네요.?구별이 안 되네요.?따라서?‘있는 것’?두 마리를 갈라 놓는 금도?‘있는 것’이라는 괴물이라면 이 괴물을 구태여 셋이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죄다?‘있는 것’이니?‘있는 것’은 하나이지요.”

야바위 노름에서 잠시 딴전을 피우다가 헛짚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학생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럼, ‘없는 것’이요.”

“그럴까요??그런데?‘없는 것’이 뭐지요??그거 그냥 없는 것 아니에요? ‘없는 것’이니까 없지요??그럼?‘있는 것’?둘을 갈라 놓을 수 있다는 금은?‘없는 것’이네요.?그러니까 금은 없네요.?따라서?‘있는 것’이라는 괴물은 여전히 하나로 있네요.”

학생들은 야바위 노름에서 호주머니를 죄다 털려서 빈털터리가 된 풋내기 도박꾼처럼 씩씩댔습니다.

“이건 제가 꾸며 낸 야바위 노름이 아니고,?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생각입니다.?그 사람은 이 세상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데 있는 것은 이렇게 모두 달라붙어서 하나로 있다고 주장했어요.?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특별히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두메 산골 할머니에게 물어 봐도?‘그래,?이 할멈은 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해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제 잉,?그래도?‘있는 것이 없네.’?이 말이?‘하나도 없네.’라는 말이라는 것까지 모르까 잉.?그것이 뭣이 그렇고롬 어렵다고 그래들 해쌓는지 모르겠어 잉.’?하고 대답할 것입니다.?그러니까,?있는 것이 없어지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없어진다는 건데,?그것은 있는 것이 하나로 뭉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조금씩 떼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뒤이어 저는 파르메니데스라는 괴짜가?‘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선생님,?서양 철학의 특징 하나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고 까닭을 밝히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인지 허여무레데스인지 하는 자가 그렇게 주장한 까닭이 뭡니까?”

한 학생이 당돌하게 묻더군요.?그래서 믿거나 말거나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대답했지요.

“우리는 흔히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믿고 있잖아요??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인지 누르무레데스인지 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과거란 뭐냐??그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또 미래란 뭐냐?그것은 아직 없는 것이다.?이미 없거나 아직 없거나,?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따라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그러니 시간이라는 게 있을 게 뭐냐?있는 것은 현재뿐이다.’?어때요??그럴 듯하지 않나요??그럴 듯하지 않다고요?”

그러니 별수 있나요??저는 자기 선생의 이 이상한(?)?이론을 뒷받침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던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Zenon)까지 들먹여야 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시간이 없다고 하자 사람들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들고 일어섰어요.?그러자 제논이 나섰지요.?제논이 그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는 대강 이런 것이었어요. ‘당신들 말대로 시간이 있다고 치자.?그러면 시간의 최소 단위가 있을 것 아니냐??그 최소 단위를 시간의 원자로 치고 그것을 순간이나 찰나라고 부르기로 하자.?그런데 그것이 시간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이니까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이어야 하겠지.?그리고 시간은 그 구성단위들이 보태져서 생겨난 것이겠지.?그럼 내가 여기에 그림을 하나 그려 보마.

그림2

그림2

이 그림에서 한 칸 한 칸은 시간의 최소 단위인 찰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치자.?그림의?ㄱ은 정거장을 나타낸다.?그리고?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나타낸다.?이 기차는 한 찰나에 정거장 한 칸을 지나간다.?ㄷ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나타낸다.?이 기차도 마찬가지로 한 찰나에 정거장 한 칸을 지나간다.?ㄴ과?ㄷ의 한 칸 한 칸도 마찬가지로 한 찰나를 나타낸다.?두 찰나가 지나면 이 두 기차는 동시에 정거장에 들어와서 그림?3과 같이 바뀐다.

윤구병 그림 1-3

정거장?ㄱ을 중심으로 보면?ㄴ과?ㄷ은 두 찰나에 모두 정거장에 들어왔다.그러나?ㄴ과?ㄷ을 비교해 보자.?그러면?ㄴ과?ㄷ은 두 찰나에 네 칸을 서로 지나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우리는 앞에서 시간의 최소 단위는 찰나이고,기차는 한 찰나에 한 칸밖에 갈 수가 없다고 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두 찰나가 네 찰나로 둔갑한 것이 아닌가??다시 말하면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다고 믿었던 시간의 최소 단위가 둘로 쪼개진 것이다.?따라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시간의 최소 단위가 있다는 말은 헛소리고,?시간의 최소 단위가 없으므로 그 최소 단위들이 모여서 이루는 시간도 없다는 게 맞는 이야기다.?그렇지 않은가?’?제논은 공간이 없다는 것도 비슷한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들었어요.?파르메니데스는 그저?‘공간이 있다면 여기,?저기라는 말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잘 아다시피 여기는 저기에 없는 것이고 저기는 여기에 없는 것이다.?그런데 없는 것은 없으므로 저기 없는 것인 여기도 없고,?여기 없는 것인 저기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는데,?제논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공간은 일정한 크기를 가진 것이 놓인 자리이거나 일정한 크기를 지닌 빈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크기를 가진 것은 쪼개질 수 있다.?우리가 크기를 가진 것이 있다고 말하려면 크기를 이루는 최소 단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여기에 일정한 크기를 가진 줄〔line〕이 하나 있다고 치자.?그리고 우리가 머릿속에 칼을 가지고 있어서 그 줄을 쪼개고 또 쪼갠다고 치자.?크기를 가진 것은 아다시피 무한히 쪼개질 수 있으니까 우리는 이 줄을 무한히 쪼개 갔다고 보고,?그 결과로 크기의 가장 작은 알맹이를 얻었다고 하자.?그런데 그 크기의 가장 작은 구성 단위는 크기가 없거나 크기를 가진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만일에 그 가장 작은 구성 단위가 크기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면 크기가 없는 것을 무한히 더해 봤자 거기서 크기가 있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마치 수학에서?0을 아무리 보태 보았자?0밖에 안 되는 것처럼.?반대로 만일에 그 가장 작은 단위가 크기를 가지고 있고 모두 꼭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다면 크기를 가진 것을 무한히 더하면 처음에 가정했던 일정한 크기를 지닌 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긴 줄이 나오게 된다.?이 두 가지 모순되는 결과가 나오는데 어떻게 크기의 가장 작은 단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며,?크기의 최소 단위를 찾을 수 없는데 어떻게 크기로 이루어진 공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이렇게 해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시간과 공간마저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고 나서 저는 마치 제가 파르메니데스라도 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여러분은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나요?”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요??왜 못 해요??황금산,?우주마왕,?춘향이와 이 도령,?이렇게 우리는 현실에 없는 것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없는 것에 들어가지 않아요.?상상 속에 있든지,?소설 속에 있든지 그것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에요.?아예 없는 것,?흔히 허무라고 하잖아요?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글쎄요.?그건 생각할 수 없는데요.”

한 학생이 마지못해 뾰로통하게 대답하더군요.

“그러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지요??그렇지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학생들이 불만스럽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나요?”

저는 다시 다짐을 했습니다.

“예에―.”

모두 고삐에 묶인 소처럼 대답을 길게 뺐습니다.?자,?이렇게 해서 우리는‘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덫에 치이고 말았습니다.?마침 서양 중세 철학사 시간이었기 때문에,?그리고 저는 그리스 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철학자(신학자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지요.)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참이기에 내친김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파르메니데스인지 까마무레데스인지 하는 괴짜와 그 사람 제자인 제논인지 남의 논인지 하는 자의 세 치 혀끝에 녹아나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모두가 달라붙어서 하나가 되어 버린 있는 것만 있는 세계까지 와 버리고 말았습니다.?이 하나뿐인 있는 것,?시간도 공간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유일신?‘하나님’입니다.?시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영원하고,?공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여기나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루 있는 것,?곧 편재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중세 신학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신은 히브리의?‘하느님’이 아니라 그리스의?‘하나님’인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곧 하나입니다.”

제 말이 얼마나 맞아떨어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플라톤의 정신적인 부모이고,?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정신적인 자식인데,?중세 철학자들,그 가운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둥으로 삼아 자기들의 신학을 세웠다고 하니,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닐 듯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시간도 공간도 없고,?따라서 이것,?저것도 없고,?과거도 미래도 없다면,?이 세상도 말짱 헛것이겠네요.”

제 이야기를 듣던 학생 하나가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이렇게 뇌까렸습니다.

“물론이지요.?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것을 현상 세계라고 하는데,?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이 세상은 말짱 덧없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되게 허무하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지요.?중세 기독교 신학에 젖어든 많은 기독교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헛되고 또 헛되도다.’?하고 중얼거리는 것도 파르메니데스의 탓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그러나 여러분,?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을 허무주의자나 허무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여담이지만 제논에 대해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제논이 살던 엘레아에 네아르코스라는 독재자가 있었는데,제논은 네아르코스의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지하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어쩌다 들통이 나서 제논은 동료들과 같이 붙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그런데 네아르코스의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다른 동료들이 전부 자백을 했는데도 제논은 끝까지 동료들을 팔지 않고 버텼대요.?그리고 제논을 죽이기 전에 네아르코스가 직접 고문을 하면서 이제 그만 털어놓으라고 하자 네아르코스에게?‘아직도 나는 내 혀의 주인이다.’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는 자기 이빨로 제 혀를 끊어서 네아르코스의 얼굴에 내뱉었다고 합니다.”

한참 지껄였다고 생각했는데,?이제 보니?‘있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만 곁가지를 친 셈이군요.?그러면 다음으로?‘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 넘어가기로 하지요.?이 말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를 거짓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함정입니다.?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사실이기도 합니다.?구태여 파르메니데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참말이고,?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던가요??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 우리는?‘없는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따라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말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줄곧 없는 것이라는 말과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지 않았습니까??그러고 보니,?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없는 것을 빼면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없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없다는 없다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을까요??이 세상 어딘가에 없는 것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요??왜냐하면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을 되비추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따라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단순한 거짓말로 돌려 버릴 수 없습니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른바 서양에서?‘존재론(存在論?: ontology)’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한 분야에 대한 것입니다.?이 분야는 전통적으로 존재와 무를 다루는 분야로 알려져 있습니다.?존재(存在)와 무(無)라니!?여기에서 잠깐 제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한 이야기를 끼워 넣겠습니다.

“여러분,?장 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잘 아시지요?”

“예,?그분 소설가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그런데 그분이 비교적 초기에 썼던 유명한 철학책이 있습니다.?그 책 이름을 아는 분 계십니까?”

“예.”

“뭐지요?”

“《존재와 무》?아닙니까?”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존재와 무라??대단히 어렵고 심오한 말인 것 같은데,?여러분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말 자주 씁니까?”

“가끔 씁니다.”

“그럼,?여러분들 가운데서 지난 한 주일 동안 날마다 한 차례 이상 존재나 무라는 낱말을 입 밖에 내본 사람이 있으면,?한번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난 한 주일 동안 이 낱말들을 한 번도 써 본 기억이 없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강의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 거의 모두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습니다!?이것은 바로 제 강의를 듣는 철학과 학생들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제 강의실에서나 있었던 특수한 경우일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그러면 사르트르가 붙인 원래 제목을 써 보겠습니다.?《Letre et le Neant》입니다.?이 프랑스 말을 토박이 우리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L’etre et le neant =?있음과 없음(또는 임과 아님)입니다.?다시 물어 보겠습니다.?여러분 가운데 있다,?없다,?이다,?아니다라는 말을 빼고 단 일 분간이라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는 분은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제?‘존재론’?강의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저는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쓴 글은 우리가 보통 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이 말을 참과 거짓이 구별되는 문장,?곧 논리학에서 말하는 명제(命題?: proposition.?참 끔찍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논리학 책을 보면 이런 낱말이 나옵니다.)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개가 아니다.”

학생들이 외쳤습니다.?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일상 언어)?→?사람은 개가 아니다. (참말,?논리적 명제)

“그런데 왜 우리는?‘사람은 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참말이라고 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게 생겼잖아요.”

“개는 네 발로 걷고 사람은 두 발로 걷잖아요.”

“개는 냄새를 잘 맡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

강의실이 온통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잠깐,?사람과 개가 서로 다르니까 사람은 개가 아니라는 말은 아까 나왔던 말이고,?이제 한 단계 더 높여서 이른바?‘존재론’답게 말해 봅시다.?다시 말해서?‘있다’, ‘없다’는 말을 써서 사람이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보자는 거지요.”

여기까지 이르면 학생들은 거의 잠잠해지기 마련입니다.?저는 칠판에 이렇게 썼습니다.

일상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와 다르다.

논리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가 아니다.

존재 언어의 차원?:?사람에게 있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없고,?사람에게 없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같다’, ‘다르다’는 말은?‘이다’, ‘아니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또 이 말은?‘있다’,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다시 말하자면,?우리 둘레에 있는 서로 다른 온갖 것들을 가르는 기준이 있음과 없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저는 네 개의 문장을 칠판에 써 내려갔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자,?이 네 개의 글 가운데 어느 것이 참말이고 어느 것이 거짓말입니까?”

학생들은 문장 네 개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더니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구별하기 힘든데요.”

“왜,?왜 그렇지요?”

“글쎄요.?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은?‘ㄱ은?ㄴ이다.’나?‘ㄱ은?ㄷ이 아니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잖아요.?그러니까?‘사람은 동물이다.’나?‘사람은 개가 아니다.’와 같이?‘이다’, ‘아니다’로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이어져 있어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있는데,?이 문장들은 그냥 있다,?없다로 끝나잖아요.?그래서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쏭달쏭한데요.”

“맞습니다. ‘저기 사람이 있다.’나?‘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같은 말은 그 말만 보아서는 그것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따라서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논리적인 명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모른다는 말이 참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칠판에 적혀 있는 이 네 마디 말들은 모두 뜻이 있는 말인가요??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나요?”

“예,?알아들을 수 있겠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우리 그 뜻을 한번 캐 보기로 하지요.”

학생들과 제가 머리를 짜내서 캐낸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달리 이 말을 바꿀 필요가 없다.?이를테면 우리는?‘있는 것은 있고,?없는 것은 없는 거야.’라고 할 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2.?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눈여겨볼 낱말?: ‘하나’)

3.?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 (눈여겨볼 낱말?: ‘빠진 것’)

4.?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눈여겨볼 낱말?: ‘다’)

자,?여기서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첫 번째 말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치더라도 두 번째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하나도 없다.’는 뜻을 지니게 될까??배운 도둑질이라고 저는 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생각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하나일까요,?여럿일까요?”

제가 이렇게 물었더니,?학생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습니다.?틀림없이?‘저 선생 어떻게 된 거 아냐?’?하고 머릿속으로 내 머리를 향해 손가락을 서너 바퀴쯤 돌렸음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에이,?선생님도!?있는 것은 당연히 여러 개지요.?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여기 책상도 있고,?가방도 있잖아요.”

“잠깐,?잠깐만요.?제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제가 조금 설명을 하고 나서 다시 묻지요.?저기 있는 예쁜 여학생,?학생은 여자가 분명하지요?”

와그르르 웃음소리.

“요즈음에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도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때가 많아서 한 말이니 노엽게 듣지 말아요.?그럼 제가 칠판에 몇 개의 낱말을 적어 볼 테니까 이 낱말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여자―사람―동물―생물―있는 것

학생들은 이 낱말들을 연결시켜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사람이다. (여자 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다.)

사람은 동물이다. (사람 수보다 동물 수가 더 많다.)

동물은 생물이다. (동물 수보다 생물 수가 더 많다.)

생물은 있는 것이다. (생물 수보다 있는 것 수가 더 많다(?))

“어때요,?한 방 먹으셨지요??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잖아요.?있는 것이 하나뿐이라니 말이나 돼요?”

아이고 골치야.?그야말로 제가 여우처럼 제 꾀에 넘어가고 만 셈이었습니다.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철학을다시 쓴다]-27

있음과 없음의 연속성[철학을다시 쓴다]-2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파르메니데스(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존재론 및 인식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존재의 철학자라 불림)나 고르기아스 같은 사람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사실 파르메니데스는 아까 제가 했던 이야기의 뼈대를 세운 분입니다.?파르메니데스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면, ‘있다’, ‘없는 것은 없다.’?있는 것은 굳이 형상화하자면 하나로 있고,?뭉쳐 있고,?구(球)형태, ‘스파이로에이데스’(sphairoeides)로 있다,이런 식 이야기를 합니다.?만일에 없는 것이 있다고 치자,?있는 것은 공간 속에 있거나 시간 속에 있어야 한다,?공간을 놓고 보면 여기 있는 것은 저기에 없고 저기 있는 것은 여기에 없다,?그런데,?없는 것은 없다,?따라서 공간은 없다.?아주 불친절하지만은 훨씬 더 정교한 논리를 그 제자인 제논이 개발을 해서 스승의 말을 뒷받침합니다.

다음으로 시간이 실제로 있다고 해 보자.?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지는데,?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고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오,?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다,?따라서 시간도 없다,?이 말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를 그 제자 제논이 만들어냅니다.?그런데 제논은 얼마나 우직한 사람이냐 하면 파르메니데스도 그렇고 제논도 그렇고,?여러분들이 잘 아는 피타고라스도 그렇고,?어떤 사람은 유클리드까지 여기에 포함시킵니다.(피타고라스도 유클리드도 이탈리아반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전부 이태리학파들입니다.?파르메니데스,?티마이오스,?제논 이 사람들이 전부 명석한 이태리학파 사람들이다,?그다음에 운동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적인 운동을 뒤집어버린 사람인 갈릴레오까지 이태리 사람입니다.)?워낙 명석한 사람들입니다.

파르메니데스와 고르기아스는 같은 이태리 사람들인데,?이 두 사람이 내세우는 주장은 정반대입니다.?이 파르메니데스는?‘있다/?없는 것이 없다’,?이렇게 주장을 하고 있죠.

이 말에 고르기아스가 정면으로 치받습니다. ‘없다.?있는 것이 없다’?반대죠.?파르메니데스는?‘있다’고 하는데,?고르기아스는 없다,?무엇인가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무엇인가 그 없는 것을 우리가 안다 치더라도 그걸 다른 사람한테 전달할 길이 없다,?입 밖에 낼 수도 없다,?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사람은 있다고 하고,?한 사람은 없다고 하고.?그런데?‘있는 것’이?‘하나’라 하면 우리가 도대체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어요,?없어요?(대답 못하고 일동 웃음.)?조금 생략을 하려고 했는데 여러분들 표정을 보니까 생략을 못할 지점들이 자꾸 생겨납니다.?아까?‘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죠??이것이 참말이라고 그랬죠,?그렇죠?”

“네.”

“그리고 이것이 참과 거짓을 가리는 기준에도 들어맞죠??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이?‘이다’라는 잇는 말로 연결돼 있으니까.?그런데,?가만 있자, ‘앞에 있는 것’과?‘뒤에 있는 것’이라…….?그럼 있는 것이 둘로 있네요.?우선 있는 자리가 다르지 않습니까??하나는 주어의 자리에 있고 하나는 서술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하나는 임자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하나는 풀이말 자리에 있는데 이게?‘이다’로 연결이 되네요.?둘 이상이 되어야?‘이다/?아니다’로 연결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그렇죠?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이게 말이 되요??아까 있는 것은 둘로 있을 수 없다고 그랬잖아요.?그런데 지금‘있는 것’이 둘로 나뉘어 멀쩡하게 저마다 자리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잖아요.?이게 말이 되냐고요.?말이 안 되죠.?이건?‘거짓말’이다. ‘참말’임을 보장해주는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라고 생각했던 게?‘거짓말’이 돼 버리네요. ‘둘’이 있으면?‘둘’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기 때문에?‘이어짐’?곧 연장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공간’이 곧 거기에 딱 나와 버립니다.?아까?‘있는 것’과‘없는 것’?둘을 놨을 때?‘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이 둘을 나누는 경계가 되어서 이 세 개가 관계를 맺게 되지요??다 이어져 버리죠??그래서 연장선이 생겼는데…….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여러분들 가운데 수학을 잘 하시는 분 계시죠??뭘 기준으로 해서?‘하나’라 하죠??피타고라스는?‘하나’를 뭘로 봤습니까??점(point). ‘하나’?하면 한계가 하나인 것이죠.?한계가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안보입니까?”

“보여요.”

“연장성이 없는 것도 보입니까?”

“아,?아뇨 안 보여요.”

“안 보이죠??그렇죠??안 보여야 합니다.?그러면?‘둘’은요??점이 둘이 모이면 이건?‘선’(line)이라고 하는데 선분에는 한계가 둘 있죠.?양쪽에.?그렇죠?그런데 두 한계도 안 보이지만 그 사이에 있는 것도 안 보이죠??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장성을 가진 것입니다.?그래서 눈에 들어오죠??그 다음에 이제?‘셋’?하면 무엇이 되죠?”

“면.”

“그렇죠. ‘면’,?한 계가 셋인 것은 면(plane).?삼각형.?삼각형이 최소의 한계로 이루어진 면이죠.?그러면?‘넷.’?한계점이 네 개 있는 것은 뭐죠??입체!?이렇게 한계가 넷이 있는 것을 입체라고 그러죠.?우주에 있는 삼라만상을 다 살펴봐라,?한계가 하나가 있거나 둘로 있거나 셋으로 있거나 넷으로 있거나 하지 않으냐, ‘점’, ‘선’, ‘면’, ‘입체’로 모두 이루어져 있다,?이 모든 것을 전부 보태면 몇입니까,?점이??열 개죠? 1+2+3+4는?‘열’이 되는데 이것은 신성한 숫자다,?테트락티스(tetraktys)는?‘신성한 수다’라고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주장합니다.?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수로 이 세상의 모든 다(多)와 운동을 규정하려고 들었습니다. ‘결혼’이란 건 수로 나타낼 때 몇이냐??이를테면?24다. ‘행동’이란 건 뭐냐? 36이다라든지 이렇게 모든 것을 수로 규정하려고 들었습니다.?여기서 합리적인 핵심을 여러분들께서 이해해야 합니다.?수와 비례관계로 삼라만상을 파악하려고 했다는 거.?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우주를 지배하는 합리적인 법칙을 찾아내려고 그 나름으로 무척 애를 썼다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사고 내용을 들여다보자,?하나만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입도 벙긋할 수 없다,?왜 그러냐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게 될 때 참과 거짓이 구별되려면 꼭 주어와 술어의 형태로 나와야 하는데,?같음과 다름을 구별하려는 순간에 있는 것이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버린다,?또는?‘있는 것’이 아닌?‘없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는 게 거짓말이라고 했죠.?그런데 없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와 운동을 설명할 길이 없고,?이것과 저것을 가려볼 길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이게?‘거짓말’의 여러 모습인 오류,?실수,?사기…….?이런 모든 것의 존재론적인 근거가 되는 겁니다.?우리가 말을 하면서 이 세상 살아가려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절반쯤 거짓말을 깔고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면 됩니다.?온전한?‘참말’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온전한 참말이라는 것은 침묵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그래서 선불교에서 면벽수련하는 수좌들이?‘개구즉착’,?입만 벙긋하면 틀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입만 열면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겠죠??이게 죄다 거짓말입니다.?귀가 왜 두 개 있느냐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라고 양쪽에 있는 겁니다.?절대로 외우지 마세요.?여러분들에게 솔깃했던 말들도 다시 한 번 의심해 보십시오.?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설득술’이라고.?제가 이제까지 했던 말이 바로 그?‘설득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저도 모르는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국어: ‘뭐 하지?’?독일어: ‘Was tun?’?불어: ‘Que faire?’?영어: ‘What do?’

시제는 현재로 되어 있죠,?그렇죠??그런데 이게 현재입니까? (대답 없음.)현재라면 여러분께 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여러분들 멀쩡하게 제 강의 듣고 있잖아요.?뭐 하지??하고 질문 던질 시간도 없어요.?그렇죠??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지??이 이야기죠??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그렇죠??올 날하고 연결이 되어 있는데…….

저도 사실은?‘할’?일은 많은 거 같은데?‘하는’?일 없이?‘되는’?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래서 그냥 실제로 뭐 할 일이 없을까??되는 대로 살지 않으려면 조금 정신 바짝 차리고 할 일을 찾아야지,?이런 생각을 해서 그 가운데서 골라낸 것이 시골 가서 농사짓는 일인데…….

 

있음과 없음의 구분[철학을다시 쓴다]-26

있음과 없음의 구분[철학을다시 쓴다]-2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 몇 가지로 정리를 해봅시다. ‘있다/?없다가 가장 위에서 모든 것을 가려주는 근거가 된다.’?라는 이야기를 방금 드렸죠??철학은?‘원인학’(aitiology)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그러니까 왜,?왜,?왜를 끝까지 묻고,그 원인을 밝혀서 맨 위에 있는 놈이 뭐냐,?최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철학이라고 합니다.?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같고 다르고,?이고 아닌 것을 뒤에서 끈으로 허수아비처럼 놀리는 두 놈이 있다,?그 두 놈은?‘있음’과?‘없음’이다 하는 것까지는 밝혀냈습니다.?그러면 있다/?없다라는 게 도대체 어떤 괴물이길래 이렇게 삼라만상을 다 뒤에서 조종하고 있느냐,?이걸 한번 살펴보죠.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혹시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있음과 없음’이라는 제 존재론 강의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이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까닭은 여러분들이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정리를 해 보죠.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있는 것은 있다’?하고?‘없는 것은 없다’?하는 것을 참이라 그랬죠. 2번도 아까 말씀드렸습니다.?참말입니까,?거짓말입니까?”

“거짓이요.”

“3번도 이렇게 되면 거짓말이라 그랬죠.?제가 앞에 적은 글 가운데?1과?4번은 참, 2와?3은 거짓의 근거가 된다고 말씀드렸죠.?그런데 정말 그런지 봅시다.

있는 것이 있다는 말,?여러분들 잘 이해하실 수 있죠??그냥 머리에 딱 들어옵니다.?그렇죠??있는 것이 있지.?그다음에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했는데,?이 말에는 뜻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 뜻도 없습니까??이렇게 있다/?없다로 끝나는 말을 논리학에서는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합니다.?그러니까 임자말과 풀이말이 이다/?아니다로 연결되는 말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진술’이고, ‘판단’이고, ‘명제’라고 합니다.존재의 영역에 있는 말들은 참과 거짓을 가릴 수가 없고 다만 뜻이 있느냐 없느냐만 따지면 됩니다. ‘있는 것이 없다’라는 말이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

“지금 여러분들이 못 알아들을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알아듣겠죠??그렇습니다.?이 말에는 분명히 뜻이 있습니다.?무슨 뜻을 가졌을까요? ‘있는 것이 없다’라는 말에는?‘하나도 없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분명히 대답하십시오.?그 다음에?‘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했는데 이 말에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없는 것이 있다’는 말에도 뜻이 담겨 있지요?무슨 말입니까??혹시 이 말이?‘빠진 것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인지 보십시오.?맞습니까?”

“네.”

“그다음에?‘없는 것이 없다’는 말에는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있어요. ‘다 있다.’”

“그렇죠!?똑똑한 학생들이네. ‘다 있다’라는 뜻이죠.

자,?그러면 이제 여러분,?수수께끼입니다.?분명히 이유가 있을 텐데?‘있는 것이 없다’라고 해버리면 부정이 되는데,?왜 느닷없이?‘하나’가 튀어 나오지요??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유구조가,?우리 생각이 어떻게 움직여 가길래?‘있는 것이 없다’가 느닷없이?‘하나도 없다’는 말로 바뀔 수 있느냐??그리고?‘없는 것이 있다’고 할 때,?실제로는 이 말도?‘거짓’의 울타리 속에 있는데 왜?‘없는 것’이 갑자기?‘빠진 것’이 돼 버리느냐.?우리 머리가 어떻게 움직이기에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고 이런 의미를 가진 낱말들이 갑자기 도깨비처럼 튀어나오는지,?그리고‘없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왜 이것이 여럿을,?모두를 가리키는?‘다 있다’는 말로 바뀌게 되느냐,?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없죠?”

“전체를 머릿속에 두고서 없는 것이 있다라고 하고 그 전체성에 없는 것들이 꽉 찬 상태로 있다 생각하면 그 중 빠진 게 있다,?있는 것이 없다,?원래 다 있어야 되는데 그 있는 게 없으니까 하나도 없는 거죠.”

“제가 저 야바위 놀음을 하려고 그랬는데 대신해 주네요.(일동 웃음.)

그런데?‘전체’라고 하려면 최소한의?‘단위’가 있어야 합니다.?여럿의 최소 단위가 있어야 그것들을 모두 뭉뚱그려 전체라고 합니다.?하나 가지고 전체라고는 안 하죠.?그러면 전체라고 할 때 전체를 이루는 최소단위는 몇이어야 합니까??적어도?‘둘’이어야 하지요??여기서 여럿의 최소단위인 둘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합니다.?둘 이상이 있어야 좌우간 다(多)라는 말을 쓸 수 있고,전체라는 말을 쓸 수 있어요.?그 둘이 무엇입니까?(대답 없음.)

지금까지 이야기한 가운데 밝혀진 것은?‘있는 것’과?‘없는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이?‘있는 것’과?‘없는 것’이?‘전체’를 구성한다고 봐야죠.?그러면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까,?없어야 합니까?”

“있어야 해요.”

“있어야죠.?지금 우리는 당장 속절없는 거짓말의 수렁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고 그랬죠.?그렇죠??그러니까 우주의 구조,?그것을 반영하는 우리 사유의 구조.?이게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없는 것’을 실체화해서 있다고 생각하거나 상상하거나 혹은 그런 것을 실제로?‘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그렇죠.?이제 여러분들 반은 제 거짓말에 넘어갔습니다.?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꼭 필요하다,?없는 것이 있을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는데,?그 말을 여러분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시간이 저로서는 괜찮습니다.?왜냐 하면 제가 한 스무 해 전에 풀어먹었던 것을 그냥 되풀이하면서 그냥 적당히 강의시간 때울 수 있으니까,?저로서는 이런 강의가 괜찮은데…….?아마 바쁘신 여러분들한테는 시간낭비가 될 겁니다.?이런?‘거짓말’이 바닥에 깔린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안 바쁜데…….”

“하하하,?안 바쁩니까??그러면 이제 한 단계 더 진전시켜서 봅시다.?있는 것이 하나로 있다고 칩시다.?있는 것이 없다고 했을 때?‘하나도 없다’가 된다고 했죠??있는 것은 하나로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된 거죠.?여러분 가운데?‘선생님 무슨 그런 헛소리하세요??이게 어디 하나로 있습니까??둘로 있죠.?귤과 무화과 둘로 있는데 하나로 있다니요?멍청한 소리 그만하세요.?우리가 하나로 있으면 입이나 벙긋할 수 있고 이것저것 가려나 볼 수 있겠어요??똥,?오줌도 못 가리지.?그러니까 이제 그런 헛소리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그런데 여럿의 최소단위는 뭐라고 그랬죠??둘!?여럿의 최소단위는 둘입니다.?그러면 이제 여기 있는 것을 둘로 나눠 보자,?하나는 있는 것 기역(ㄱ)이고,?하나는 있는 것 니은(ㄴ)이다,?그러면 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을 나누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그렇죠??그래야 나눠지지 않겠습니까?그런데 이 둘을 나누는 선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는 거요.”

“예??있으면 하나로 합쳐져 버리죠.?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인데 뭣 때문에 둘로 있습니까??또 다른 대안은 이 경계선이?‘없는 것’이어야 하겠죠??그런데 없는 것은 그 자체 규정상 없습니다.?그러니까 또 하나가 되는 거죠.있는 것은 하나로 있죠.”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다시.?만일에 여럿의 최소단위는 둘인데 있는 것이 둘로 있다고 쳐 보자,그러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그러려면 나누어 주는 경계선이 있어야 될 것 아니냐,?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을 나누어 주는 것이 있어야 그걸 둘이라 그러지,?달라붙어 있어서 하나로 있다,?그러면 둘이라고 안 하지 않느냐,?그러면 이 나누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있다.”

“그렇게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이 되어서 달라붙어 버린다.?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고 가정을 해버리면 경계선이 없는 것이 돼죠??또 달라붙죠??그래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고 할 때?‘하나도 없다’라는 말과 같아져서?‘있는 것’이 통째로 부정이 돼 버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있는 것은 하나로 있기 때문이요.”

우리 나라 사람들 굉장히 머리 좋죠.?그걸 압니다.?우리는 옛날부터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그래서 있는 것이 부정이 되면 통째로 부정되어서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된다.?그 다음에 없는 것이 있다 할 때 이건 빠진 것이 있다고 그랬죠.?그런데 실제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서양의 존재론 역사를 이끌어오면서 말썽에 말썽을 거듭해서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이것은 서양 사람들의 사유 구조에서는 실제로 논리적인 사고에서나 초월적인 사유에서나 똑같이 어려움을 불러일으키는데,?기독교에서는 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이 사람들은?creatio ex nihilo (무로부터의 창조),?무에서 창조하는 것.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난다는 창조를 믿습니다.?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난다는 가정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열역학 제일의 법칙이 다 무너져 버리죠.?그렇지 않습니까??무에서 유가 나온다,?그러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무너져 버립니다.?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말을 히브리 사람들은 하거든요.?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하나님이 주물럭주물럭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nihil)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다,?그래서 유일신(有―神)이다,?하나로 있다,?그러니까?‘있는 것’은?‘하나’고 그래서?‘하나’님인데,하나님만 있고 나머지는 전부 헛되고 헛된 것이다,?없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진 거니까 헛되다고 하는 건데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서 보면,?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입니다.?없는 건 없다,?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그러니까 없는 것이 있다고 하지 말고 다른 말로 바꿔 보자,?이렇게 해서 계속 맴도는 쳇바퀴를 만들어 낸 게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고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서 현대 실증과학에까지 내려옵니다.

자,?그러면 이제?‘없는 것이 있다’,?거짓의 근거가 되는 말이라고 했지만?‘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 사고가 요청하는 거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놓고 한번 가 보도록 하죠.

그러면 우선 여럿(多)은 확보되죠??없는 것도 있고,?있는 것도 있다고 하면 둘이 확보되지 않습니까??이렇게 해서 이 세상은 구제받을 길이 열리는 겁니다. ‘같고’, ‘다르고’, ‘이고’, ‘아니고’,?하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없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없는 것을 빼놓고는?‘아니다’라는 부정사 쓸 수 없죠??그리고 다르다는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있다고 보면 여기서도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그렇죠??그러면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있습니다.”

“경계선이 있으면 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해 가지고 없는 것이 차츰차츰 줄어들어서 다 없어져 버려요.?그럼 거꾸로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고 치면 없는 것,?없는 것,?없는 것,?해서 있는 것이 다 없어져 버려요.?그렇죠??이 경계선이 누구 편을 드느냐에 따라서 없는 것이 온통 다 삼라만상을 지배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 온통 다 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고,?그렇게 되는데 그러면 이게 뭐죠??이 경계선은 어떻게 봐야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야죠.?있는 것이 아니니까 있는 것과도 구별되고 없는 것이 아니니까 없는 것하고도 구별되면서 경계선 노릇을 하는 거죠.?그렇죠?”

어떤 것이 끝나는 지점,?이를테면 선분(line)의 두 끝을 그리스 사람들은‘페라스’(peras)라고 합니다.?우리말로 바꾸면?‘끝’입니다.?끝,?갓,?겉,?다 같은 어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주는 경계 지점에 있는 것을 우리는?‘겉’이라 하고?‘갓’이라 하고?‘끝’이라 하기도 합니다.?그러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은 뭐냐고 하느냐?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합니다.?이것은 끝이 아닌 것,?끝이 없는 것,?경계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라틴어로는?‘인피니스’(intfinis),?영어로는?‘인피니트’(infinite)입니다.?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하나는 무한한 것,?무한히 연장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그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이것이 그리스어?‘apeiron’이 지니고 있는 뜻입니다.?그러면 이제 세 가지가 나왔죠??없는 것 하나,?있는 것 하나,?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세 가지가 나왔죠??여러분,어떤 원시인들 가운데 수를 셀 때?‘하나’, ‘둘’, ‘많다’?그렇게 표현하는 부족들이 있다고 하죠??그게 아주 정확한 겁니다.?하나,?둘,?그 다음에?‘많다’입니다.?그 이유도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마는 아마 여기서 밤새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앞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그랬죠??그런데 없는 것은 하나로 있겠습니까,?여럿으로 있겠습니까??하나로 있습니까?”

“아니요,?여럿으로.”

“이유는?”

“아까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다 있다’고 그랬죠.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빠진 것’이 있다는 말도 된다고 그랬고.”

“그 빠진?‘디펙트’(defect)가 꼭 하나일 이유는 없어요.”

“그렇죠.?빠진 것이 꼭 요렇게 빠져야 하고 이만큼 빠지게 할 필요는 없다,빠진 것에는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은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없는 것은 많다,?있는 것은 하나이지만 없는 것은 무한이 많다,?이래 없고,?저래 없고 없는 사람 죽을 맛이지만 어쨌든 없는 것은 엄청 많다.”

 

참말과 거짓말[철학을다시 쓴다]-25

참말과 거짓말[철학을다시 쓴다]-25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짝짝짝짝.)

“안녕하세요.?앉아서 해도 상관없겠습니까?”

“네.”

“제가 여기 계시는 선완규 선생님하고,?또 다른 한 분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차피 모든 학문은 거짓말에서부터 시작한다.?그리고 특히,?제가 하는 거짓말은 멀쩡한 거짓말이어서 윤구병과 함께 하는?‘거짓말 잔치’?이렇게 강좌 제목을 붙였으면 참 좋겠다.’?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거짓말이 된다는 각오 없이는 입도 벙긋 할 수 없는,?그런 지점이 있거든요,?그래서 선불교에서 스님들이?‘입만 벙긋하면 틀린다’는 말을 합니다. ‘개구즉착’(開口卽錯),?입만 벌리면 거짓말한다는 뜻이죠.

제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죠.

우리가 무엇이 참말이고 무엇이 거짓말이냐 라고 물어볼 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가 있죠.?여기서 가장 총명해 보이는 분에게 여쭤 볼까요??여기 어머니,?학구열이 대단하신 거 같은데 우리는 어떤 때 참말을 한다고 그러고 어떤 때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말은 거짓말이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은 참말이라고…….”

“저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거짓말하는 건데요.(일동 웃음.?하하하하.)?제가 워낙 여자를 좋아하니까 이번에는 저쪽에 있는 여자 분에게 여쭤 보겠습니다.?우리는 거짓말을 허위라고 하기도 하고 오류라고 하기도 하고 착오라고 하기도 하고,?참말은 진리라고 하기도 하고 진실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는데,?우리는 어떤 때 참말을 한다고 하고 어떤 때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까?”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떨 땐 거짓이 되고 어떤 땐 참이 되고…….”

“지금 철학 선생 앞에 두고 철학하실래요?”(일동 웃음.)

여러분들이 죄다 우리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어렵게 어렵게 하는 연구만 하고 그런 교육만 받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쉽게 대답할 줄 모릅니다.

내가 우리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여쭤 보면 바로 튀어 나오거든요.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게 참말이고 없는 걸 있다 하거나 있는 걸 없다 하면 거짓말이지.?안 그려?”?이렇게 대답하십니다.?여러분들 그 말 틀렸습니까??있는 것을 없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 하면,?그건 거짓말이죠.?참말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게 참말이고.?인 걸 아니라 하고 아닌 걸 이라 하는 게 거짓말 아닙니까,?그렇죠?

실제로 참과 거짓의 구별이 왜 이렇게 중요한지 말하자면,?어차피 사람도 생명체니까 제 앞가림을 해야 하는데 사람 가운데 혼자서 자기 앞가림하는 사람은 드물죠.?지금 끼고 계시는 안경,?곱게 매만지는 생머리,?두텁게 껴입은 양복,?이거 다 스스로 만드신 거 아니죠??이렇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더불어 살 길을 찾아야 살 수 있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습니다.?저는 사실은 제가 맹수였으면 더 좋겠습니다.?그러나 제가 사람 탈을 썼으니 여러 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끼치고 이렇게 삽니다.?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서로 말을 주고받아서?‘나 지금 뭐 없는데 너 지금 가진 거 있냐?’?라든지 서로 이렇게 의사소통을 해서 남거나 모자라는 것을 주고받고 나누면서 살 길을 찾지 않습니까??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게 죄다 거짓말이다.?그렇게 되면 의사소통할 길이 차단돼 버려요.?그러면 혼자 살기 싫어도 혼자 웅크리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형편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말을 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거짓말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분 손들어 보세요.?그런 뻔뻔한 분이 있는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예,?없을 겁니다.?누구나 경우에 따라 거짓말은 할 수밖에 없고 어쨌든 거짓말은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러셀을 비롯해서 널리 실증주의자들에게 난제로 알려졌던 것들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어떤 크레타 사람이 아테네에 와서 이야기하기를?‘크레타 사람은 죄다 거짓말쟁이다’라고 했대요.?그 사람 말이 참말이겠어요,?거짓말이겠어요??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해답을 알고 계신 분 한번 이야기를 해 주시죠.?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참말이요.”

“참말입니까??그 사람은 크레타 사람이니까 거짓말쟁이입니다.?그런데 거짓말쟁이가 참말을 해요?”

그 형편입니다.

여러분 앞에 선 제가 그 크레타 사람이라고 여기십시오.

제가 하려는 이야기가 그 거짓말인데 넘어가지 마세요.?거짓말에도 계보가 있고,?전제하는 근거가 있습니다.?거짓말의 계보를 여러분들에게 잠깐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기 한번 써 봅시다.(칠판에 적음.)

 

참말?: 1.?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

2.?인 것을 이라고 하고,?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

3.?같은 것을 같다고 하고,?다른 것을 다르다고 하는 것

 

거짓말은 여러분들이 거꾸로 대입해 보면 되겠죠.?따로 쓰지 않겠습니다.

귤과 무화과는 다르죠.?그럼 한번 적어 보죠.(칠판에 적음.)

 

*?귤과 무화과는 다르다?:?일상 언어의 차원(보통 말)

 

‘같다/?다르다’라는 말이 철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요즘 철학자들은 이런 천한 말을 안 쓰고,?차별성과 동일성,?이런 말을 써서 그런데,?실제로?‘같다/?다르다’라는 말이거든요. ‘귤과 무화과는 다르다’?우리가 왜?‘같다/?다르다’라는 말을 많이 쓰냐면,?같은 것끼리 모아서 일반화하고 추상화해야 말에 효율성이 생기고,?의사소통을 빨리 할 수 있거든요.?그러려고 어떤 때는 추상화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구체화하기도 하는데 만일에?‘같다/다르다’라는 말로 이 귤과 무화과를 구별하지 못하고 이 매직펜과 마이크를 구별하지 못하면 참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힘들겠죠.?이 세상은?‘여럿’과?‘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다(多)와 운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익숙할지 모르겠습니다.?보통 말(일상 언어)에서?‘귤은 무화과와 다르다’고 하는데 이 말을 참과 거짓이 갈라서는 논리 언어로는 어떻게 나타냅니까?

귤과 무화과는 왜 다르다고 하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학생들이 대답이 없자)?꿀들 안 잡수셨죠?(일동 웃음.)

간단합니다.?굉장히 쉽게 생각하십시오.?제 강의는 제가 알고 있는 낱말이 몇 개 안 되기 때문에 복잡하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다. (논리 언어)

 

우리가?‘이다/?아니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임자말과 풀이말을?‘이다’와?‘아니다’로 연결시키게 되면 거기서 참과 거짓이 쉽게 드러납니다.?그래서 이것을 논리적인?‘진술’이라 부르기도 하고?‘판단’이라 하기도 하고?‘명제’라 유식하게 말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혹시 대학 다닐 때 논리학 강의를 들어 보신 분 있습니까??우리는 논리학시간에?‘프로포지션’(proposition)이라는 끔찍한 낱말,?괴물 같은 낱말을 배웁니다.?그것을 또 괴물 같은 한자로?‘명제(命題)’라고 번역하는데,?이 낱말을 그냥?‘논리 언어’라고 부릅시다.?여러분들이 조금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요.?그럼 왜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라고 그러죠?”

“귤은 귤이고 무화과는 무화과니까.”

“어휴.(일동 웃음.)?이거 보세요.?제가 질문을 다시 하고 여러 사람의 답변을 충분히 들어보고 싶습니다마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나중에 토의 시간 때 자세히 이야기합시다.”

‘귤에 있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없고,?귤에 없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있다.’(존재언어)가 정답입니다.?왜 귤과 무화과는 다르냐고 했을 때에,?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가 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고,?그럼 왜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귤에 있는 어떤 것,?그것이 형태가 됐든 맛이 됐든 색소가 됐든 무엇이든지 귤에 있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없고,?귤에 없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귤은 무화과와 다르다 하고 귤은 무화과가 아니라고 합니다.?여러분들이 여기에 동의 안 하면 저는 더 이상 강의를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죠??바로 여기까지!

‘있다’, ‘없다’는 말이 끼어들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존재 언어’라고 합니다.

‘있음’과?‘없음’을 나타내는 말을?‘존재 언어’라고 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죠?그런데 여러분들 지난 한 주일 동안?‘존재’나?‘무’(無)같은 말을 한 번이라도 입에 올린 분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없을 겁니다.?그러면 여러분 중에 단 오 분이라도?‘있다/?없다’, ‘이다/?아니다’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있습니까??없죠.?우리가 다(多)와 운동 속에 있는 서로 다른 삼라만상을 가려보는데?‘있다/?없다’, ‘이다/?아니다’, ‘같다/?다르다’라는 말이 아주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쓰지 않고는 우리의 생각을 펼쳐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이 모두 다 참말인가요?”

“네.”

“여러분 같은 분들만 있으면 제가 농사 안 짓습니다.?힘들여서 농사지을 까닭이 없어요.?속여서 먹고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땀 흘리며 힘들여서 농사짓습니까??제가 한 말을 참말이라고 보시다니 참 딱합니다.(일동 웃음.)

말하자면 여기까지 제가 지꺼린 말 재주도?‘기술’입니다. ‘설득술.’?제 말을 듣고 내적인 확신이 여러분에게 생겼습니까??아직 아닙니다.?다 동의를 했지만(처음부터 끝까지 동의를 얻지 않고 진행시킨 말이 없지요.)?왜 동의를 했지요??그럴듯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이게 바로?‘설득술’인데 제가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상당히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이야기해 갑니다.?곧 파탄이 나게 되고요.”(일동 웃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철학을다시 쓴다]-24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발전한 문자[철학을다시 쓴다]-2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번에 제가 이야기했죠.?지역 탐사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거래를 원만히 성사시켜야 하니까 다른 나라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이렇게 해서 여러 나라 사이의 문화 융합이 일어납니다.?가치관이나 종교형태가 저마다 다르고 기록하는 방식들도 이집트사람이 기록하는 방식과 중국 사람이 기록하는 방식이 다 다른데 각 지역의 특수한 언어를 아우를 수 있는 일반 소통구조,?사람들 의식에 어떤 공통치가 있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다 보니까 언어학에 대한 관심과 일반 문법에 대한 연구들도 생겨나죠.

여러분들 가운데?‘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본적이 있습니까??그 잡지를 보면?‘1976년’을 글자로 어떻게 표기했습니까??그냥 우리 한글로?‘천구백칠십육년’이라고 표기했습니다.?사람들이?‘6’을 써놓고 거기에 월을 붙일 때‘유월’이라고 읽어야 하는데, ‘육월’이라고 읽고, ‘3살’이라고 써놓고?‘세살’이라고 읽지 않고?‘삼살’이라고 읽는 일이 있습니다.?아라비아 숫자로 쓰인 글을 보고 하나,?둘,?셋,?넷,?하루,?이틀,?사흘,?나흘 이렇게 읽지 않고 일일,?이일,?삼일,?이런 식으로 읽는다고 개탄하는 분을 봤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 없음)?사실 아라비아 숫자를 중국식으로 읽는 거죠.?그렇지 않습니까??일,?이,?삼,?사,?오,?육,?칠,?팔…?중국 한자를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죠.?아라비아 사람 탓이 아니죠??그리고 아라비아 숫자를 아라비아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안 읽죠??그러면 그것을 우리 방식으로 읽도록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거나 그렇지 않으면?‘뿌리 깊은 나무’처럼 정직하게 우리식 한자음인 천구백칠십육년으로 써야죠.?그런데 그걸 왜 아라비아 숫자로 쓰지 않았냐고 야단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왜 야단치겠어요??습관이 안 돼서 눈에 안 들어온다는 거지요.?이게 시각을 통해서 정보가 한순간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건데,?이것은 도시사회에서 청각문화보다 시각문화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도시사회에서 문자가 발명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정보가 시각화된 형태로 남아야 서로 믿고 의사소통을 원만히 할 수 있다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사람들이 시각 정보를 신뢰하고,?유기체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사라지는 청각 정보에 대해서는 믿음을 잃었다는 것은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출발을 알리는 현상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집트 사람들이?‘네오이’(neoi)라고 부릅니다. ‘네오이’라는 말이 뭐냐면?‘풋내기들’, ‘젊은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어린것들’이라는 뜻도 있지요.?문화의 지층을 두고 말하자면 표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과 땅속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의 삶의 결이 다르다고 할까요??아마 이런 사실을 두고 한 말일 겁니다.

제가 초기에 그 이야기를 했지요.?생명의 시간,?모든 생명체의 몸을 관통하는?(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의식도 관통하겠죠.)?그런 생명의 시간 가운데서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나누어지게 되는데,?농경민의 의식 속에서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하나였습니다.?달과 해의 순환이 자연의 시간을 규정짓는 것들이어서 자연의 시간은 순환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루해가 떴다 지면 하루가 지나고,?날마다 해는 동쪽에서 떠올랐다가 서쪽으로 지고,?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것이 되풀이되어 한 달이 되고,?이십사절기를 지내서 한 해가 되고,?이렇게 순환하는 시간의 질서에 맞춰서 사람이 살아갔기 때문에 자연의 시간은 농경민에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목 생활을 시작하는 집단이 나타나게 되면서 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에서부터 조금씩 갈라서게 된다,?목초지를 찾아다니는 동안 항구적인 계절을 유지해야 가축과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도려내서 그것을 항구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그래서 유목민의 경우엔 인간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더불어 병행해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완전한 독립변수로서 자리 잡지는 못했다,?그런데 해안도시 사회에 들어서면서 자연의 시간은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시간이 독립변수가 된다고요.?이 시간의식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입니다.?여러분들이 현재 알고 있는 시계로 측정하는 시간,?유클리드기하학적인 공간,?이런 게 전부 인위적인 시공간입니다.?자연에 바탕을 둔 시공간이 아닙니다.?아이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에 나오는 우주공간도 자연적인 공간이 아닌 인위적인 공간입니다.?여러분들은 하도 많은 학자들이 떠들어대서 이런 공간들이 실재하는 걸로 착각하기 쉽지만,?그런 시공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규제하는?‘정지하는 것은 정지해 있고 마찰이 없는 한 움직이는 것은 일정한 속도로 수평운동을 한다’(관성의 법칙). ‘무게를 지닌 것은 중력에 의해서 낙하 운동을 한다’(중력의 법칙).?이런 이론들 모두 실재하는 운동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법칙으로 보기 쉽습니다.?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여러분들 귀에 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현대인들이 받아들이는 인위적인 시공간 개념은 실재하는 시공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이 이야기는 서양의 과학체계를 뒷받침하는 모든 가정들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저로서도 아주 조심스러운 화제여서 시간이 있으면 나중에 더 자세한 보충설명을 하겠습니다.

 

도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철학을다시 쓴다]-23

도시사회에서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철학을다시 쓴다]-2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난번에 농경민과 유목민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화,?의식,?관습 이런 것을 이야기했는데,?오늘은 도시사회 중에서도 전제군주가 다스리던 행정도시가 아니라 이오니아 식민지라는 지중해 해안도시에서 성립한 도시사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멈췄습니다.?제가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을 두고 쌓은 경험이 지혜의 함수가 되고,?유목사회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된다고 그랬죠.?그러니까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가 있고,?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가 있는데,?최초의 서양식 철학자인 탈레스가 태어나고 활동했다는 이오니아 지방의 식민지인 밀레토스,?이런 상업 중심의 도시사회에서는 실제로 두뇌의 회전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 사회입니다.?물론 이 사람들은 뱃길을 통해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고,?불평등 거래를 평등거래로 위장하는 데 필요해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그 지역 언어를 익히고,?말하는 최초의‘코스모폴리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말하자면?‘세계인’들이죠.

지중해 연안 뱃길로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거래를 해야 하니까,?수시로 바다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자기들이 힘이 세고,?다른 사람들이 힘이 약할 때는 수시로 서로 노략질을 하는 해적으로 바뀌기도 하고,(호머 서사시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도 해적선에 붙들려 가서 오랫동안 고생한 적이 있죠.)?때로는 떼강도로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장사꾼으로 거래를 하기도 하고 하는데,실제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대체로 도둑놈 기질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혹시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상처되는 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하하.)

어쨌든 지난 시간에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조그만 해안도시에 아시리아인,?바빌로니아인,?리디아인,?페니키아인,?인도인,?이집트인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는데,?그 좁은 도시 공간 안에는 생산지가 없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에서 의식주에 필요한 것도 끌어들어야 하고,?그 밖의 살림밑천이 될 만한 물건들도 끌어들여야 하는데,?그러기 위해선 내부 결속력이 생겨야 하고,?그것이 생기기 위해선 일정한 규율에 따라서 위계질서가 성립할 필요가 있습니다.?이?‘하이라키’(hierarchy)를 설립시키는 데 두 가지 계기가 작용할 수 있죠.?물리적인 강제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설득입니다.

‘폭력적인 국가 기구’와?‘이념적인 국가 기구’의 원초적인 형태가 이 도시에서 나타난다는 것,?어차피 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식민주의자의 습성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생산지에서 생산의 교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시민으로서는 목숨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먹을 것이 제 때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도시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생산지를 확보하고 생산물을 장악하는 것은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주변 생산 공동체를 설득해서 고분고분 양식을 내놓게 할 길이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바로 이때가 폭력적인 국가 기구가 작동을 하는 순간입니다.?도시 거주자들은 외교관이나 교사 같은 설득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폭력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군대나 경찰도 그 내부에서 같이 길러 내야합니다.?살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시인들이 주변 생산 공동체를 식민화하는 작업은 불가피한 생존 조건이 됩니다.?한걸음 더 나아가 더 안정된 삶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해외식민지까지 두게 되는데,?델로스 동맹 이후로 아테네 제국주의가 걸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나중에 로마도 같은 길을 밟게 되지요.)

농경공동체에서는 마을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최소 단위였으니까 말로 소통이 가능했고,?유목민들도 소단위로 천막을 치면서 흩어져 다녔기 때문에 의사소통 수단이 말이었습니다.?그런데 지중해 연안의 광범한 지역에 장삿길이 열리고 삶터가 넓어지면서 말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그 대안으로 글을 통한 의사소통이 요구되지요.?시골에서는 말과 행동이 다르면?24시간도 버텨내기가 힘듭니다.?유목사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도시인들의 삶은 대부분이 서로에게 은폐되어 있고,?거리로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길이 차츰차츰 막히게 됩니다.?서로 속셈이 달라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더라도 쉽게 가려볼 수가 없습니다.?말로는?‘그쪽에서 소 한 마리 보내면 여기서 곡식 세 말 보낼게’?하다가도 곡식을 구하기 힘들어지면 소 한 마리를 받고도?‘내가 언제 세말 보낸다고 그랬어??여기 흉년이라 한말 보낸다고 그랬지.’?하고 시치미를 떼면 할 말이 없거든요.?그러니까 계약을 글로 맺어야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온 거죠.

이렇게 세계의 온갖 생산물이 도시로 모이게 되면서 삶의 양식은 급속도로 바뀌게 됩니다.?단일 공동체에서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식이 비교적 단순합니다.?자산은 거의 모두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농경사회에서 생산되는 것,?재산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유기물이고,?유목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온갖 물류가 이곳을 거쳐 이동을 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도시사회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돈으로 바꿀 수 있는 환전가치가 큰 무기물들이 유기물을 대신해서 도시인들의 자산가치를 무한히 부풀리게 하지요.

유기물이 의식주에 꼭 필요한 것인데도 교역품목에서 뒷전에 밀리고 무기물들이나 사치품들이 더 활발히 거래된 까닭은 어디 있을까요??유기물은 수요가 일정하지 않습니다.?도시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 보았자 곧 썩어버려서 하루아침에 자산가치가 없어져버리기도 하고 가격탄력성이 없어서,?이른바?‘한계효용의 법칙’이라는 기묘한 법칙이 작용해서 조금만 공급이 넘쳐버려도 똥값이 됩니다.?유기물은 도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공급받으면 되고,?떼돈을 벌어 주는 것은 사치품이나 금,?은,?보석,?향신료나 비단 같은 것입니다.?다행히 사치품들은 무게도 적게 나가 짐이 가벼워요.오늘날에도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유럽과 교역을 하는데 흘수선이 잠기도록 과일이나 곡식 같은 것들을 잔뜩 실어 가지만,?내려올 때는 동당동당 기계 하나 달랑 싣고 내려오는 일들이 벌어지죠.?옛날부터 육로를 통해서건,해로를 통해서건,?장사꾼들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장삿길에 나서야 했는데 위기의 순간에 짐이 가벼워야 빨리 달아날 수 있고,?싸워도 홀가분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된 측면도 있어요.?이런 이야기 웃자고 한 이야기죠?(일동 웃음.)

 

도시의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2

도시의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한편으로는 시간 축을 따라서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지혜의 함수인 사회가 있고,?공간 축을 따라서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 지혜의 함수가 되는,?서로 다른 원초적인 사회를 살펴보았습니다.?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라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원형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일은 없는데요.?어쨌든 주어진 시간과 공간,?삶의 형태가 다름에 따라서 사람들의 의식이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고요.?이 두 공동체에서는 한 개인이 무엇을 할까,?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농경공동체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이,?유목공동체에서는 그 마을을 이끄는 수장들이 고민하고 결정을 내립니다.?그런데 도시사회에서는 지혜의 함수가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도 아니고,?시간적인 경험의 축적도 아닙니다.?개개인이 얼마나 똑똑하고 셈이 빠른지가 지혜의 함수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는데,?그것이 바로 도시사회입니다.?전제행정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잠깐 빼고,?해안도시사회부터 이야기하지요.?원초적인 도시사회는 이오니아 식민지였던 지중해 연안의 바닷가에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지중해를 중심으로 배를 띄워서 무역을 하고,?사막으로 낙타를 타고 중국까지 장삿길을 연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오니아 식민지 가운데서도 서양철학이 가장 먼저 발생했다는 밀레토스라는 도시사회를 잠깐 머릿속에서 그려 봅시다.?이 도시사회는 이미 몇 천 년 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정보나 유물,?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오로지 우리 상상력을 통해서 이 도시사회를 재구성해야 합니다.?그러니까 거짓말일 수 있다는 거 아시겠죠??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시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한 개인이 유목사회나 농경사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특히 농경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큰 범죄를 저질러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거나 먹고 살길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지거나 마을 공동체가 규범으로 강제하는 관습을 지키지 않아 그 사회에서 추방되거나,?삶에 큰 변화가 생겨 집단으로 떠도는 그런 경우가 아니면 벗어나기 힘들지요.?대대로 뿌리내린 공동체에서 뿌리 뽑힌다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농사짓던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삽니까??이웃마을로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왜 살던 마을에서 벗어났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거든요.?그러니까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사형신고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유목사회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수장을 따라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옮겨 다니던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서 독립적인 삶을 개척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두 가지 경우죠,?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야반도주를 하거나,?아니면 주민 전체가 뿔뿔이 흩어져서 여기저기 흘러 다닌다거나.?쫓겨나거나 굶주려서 거렁뱅이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남의 것을 훔칠 수밖에 없지요.?개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이 뜨내기들에 대한 대비책이 아니었을까요?

야밤을 틈타서 누군가가 와서 물건을 훔쳐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칼 들고 와서 강도짓을 하고,?저항하면 죽이고 그럴까봐 인기척이 들리면 멍멍거리라고 개를 키우는 거거든요.?농경민들이 개를 기르는 것은 유목민들이 양 떼를 모는 데 쓰려고 개를 기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경우죠.?다른 가축들에 견주어 개를 기르는 것은 식용으로는 대단히 비효율적입니다.?개는 엄청나게 식량을 축내는 짐승이거든요.?어쨌든 불량배가 되서 떠돌다가 강도나 절도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해코지하거나 먹이를 훔쳐가는 사람이 생겨나면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람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개를 길러야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해안도시에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굶주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흘러든 사람들이거나 대체로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서 미움받던 삐딱한 사람들입니다.?삐딱한 사람들이 누구냐면 어른 말 안 듣고 지도자 말 안 듣는 사람들이거든요.?대부분의 삐딱이들을 보면 머리가 잘 돌아갑니다.?우직한 사람은 삐딱이가 안 됩니다.?이 삐딱이들이 해안 도시사회에서 장사로 먹고 삽니다.?이 사람들은 살판났지요.?바보 같은 어른도 어른이라고 꾸벅꾸벅 죽어지내야 하는 일도 없고,?너 씩씩하고 용감하게 죽어!?하고 어거지로 전쟁터에 앞장세우는 사람도 없고.?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 중에는 몸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없습니다.?몸 놀려서 살 수가 없으니까 머리를 굴려서 사는 겁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가 얼마나 급격했으리란 건 상상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이집트에서 온 사람이 태양신을 상징하는 새를 믿는데,?그 새는 나에게 일주일에 두 번 쉬지 않으면 죄라 하고,?그래서 상점 문을 닫고 있는데,그날 문을 닫으면?‘너하고는 다시 거래를 안 해.’?하고 중요한 거래처에서 을러대면 어떻게 해야겠어요??또는?‘나는 아침시간엔 조용히 명상에 잠겨야 하는 종교적인 전통에서 자라왔는데,?니가 아침부터 찾아와서 거래를 하자고 하다니.?말이 돼??어림없는 수작이지.’?이렇게 저마다 자신이 태어난 문화적,?사회적,?종교적인 배경을 들이대면서 서로 가게 문을 닫거나 상거래에 지장을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살길이 없죠??그래서 시골에서 땅을 파다가 왔든,?풀밭에서 짐승을 몰고 다니다 왔든,?인도에서 왔든,?이집트에서 왔든,?자기가 살았던 지역의 모든 관습과 전통을 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익힌 제 고장 말을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그리스 사람들이 야만인을 가리킬 때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하였는데,?그것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고,?공동체를 이뤄 살고,?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지키려고 드는 사람은 죄다 이상한 사람들이고,?야만인이라 여기고 깔보게 되죠.?그런데 도시 공동체에서 인도 말을 하면 야만인이다,?혹은 페니키아 말을 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다 하면서 서로 상대를 하지 않으면,?좁은 지역에 모여살고 거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집니다.(설상가상으로 해안 도시사회는 내부에 생산지가 없습니다.)

어쨌든 외부에서 먹고 살 것을 끌어들여야 살아갈 수 있는데,?이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주변의 유목공동체나 농경공동체에 가서 돈 될 만한 상품을 끌어올 수가 없습니다.?이런저런 이유로 해안 도시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주 삶의 형태가 다양하고 자기 정체성을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잘 바꾸어냈습니다.?그러니까 바다에서 장사를 하다가 갑자기 해적으로 바뀐다든지,?낙타를 타고 먼 길을 오가면서 정직한 장사꾼 흉내를 내다가 어느 순간에 도둑 떼로 돌변해서 마을을 습격해 물건을 약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이 사람들은 먼 길을 다니면서 중국에서 대진국인 로마까지 가기도 하고 또 거꾸로 지중해에서 비단길을 따라 중국까지 가서 중국에서 비단 같은 것을 수입해서 몸에 걸치고 살 수 있었습니다.?싣고 다니는 것 가운데 의식주에 필요한 유기물들,?밥이나 반찬을 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도시 근처에 있는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서 가지고 와야 합니다.?먼 길에서 가지고 오게 되면,?비를 맞아서 썩어 버리거나,?채소는 비를 맞지 않아도 하루 이틀 지나면 다 썩어 버리기 때문에 주변에 생산 공동체들이 널려 있어야 합니다.?다시 말해서 주변 농경공동체와 유목공동체를 식민화해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처로 만들어야 합니다.?먹고 사는 문제는 이렇게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예를 들어 도시사회인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벼농사 짓는 곳이 어디입니까??김포평야,?여주 이천이죠.?김포평야에서 서울시민이 쌀을 가져다 먹는데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고스란히 그곳에만 기대고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죠.?그러니까 여주 이천에도 빨대를 대고 더 멀리는 호남평야까지도 빨대를 대야겠죠.?그래서 이곳에서 생산 교란이 일어나면 저쪽에서 끌어오고 저쪽에서 일어나면 이쪽에서 끌어와야겠죠??그러니까 도시는 자기 내부에 생산지를 갖추고 있지 못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을 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국주의적인 확장정책을 펴는 데 필요한 일차적인 것은 무엇입니까??조직이죠.?그리고 잘 조직된 약탈자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창과 칼 같은 무기죠??무기 생산은 도시인들에게 목숨이 걸린 일이 됩니다.농사꾼은 낫과 호미,?괭이 같은 농사 도구가 필요해서 대장간을 찾아갑니다.?그러나 도시사람들이 대장간을 찾아가는 목적은 창과 활,?칼,?이런 것을 벼리기 위해서입니다.?농경민이나 유목민의 경우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잘 조절하면 살길이 열립니다.?이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나 연장으로서 낫이나 칼,?이런 것을 벼리는 겁니다.

그런데 도시인의 경우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뒷전입니다.?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도시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의 관건이 됩니다.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각축하고 때로는 서로 맞서야 하는데,?칼과 창이라는 것이 뭡니까??인간 문제를 가장 빨리 해결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입니다.설득을 해서 안 되고,?세뇌를 해서 안 되면 죽여야죠.?전쟁의 기원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닙니다.?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길,?그것이 전쟁입니다.

그런데 해안 도시사회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습니까??공멸이죠.그리고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엄청나게 큰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어느 날 종교적인 천재가 나타나서 우리 이런 종교를 만들자 하더라도 모두가 약삭빠른 삐딱이들인데 누가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안 된단 말이죠.이 사람들을 묶을 길이 없어요. ‘사는 게 먼저고 철학하는 게 그 다음이다.’(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우선 살고 볼 일이다.’?모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그러니까 도시민들은,?특히 장사꾼들이 모여 사는 해안도시 사람들은 이해관계로 뭉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이해관계를 따지다 보면 머리가 비상해져야 하고 계약을 어기면 안 되니까 규칙들이 생겨나야 하죠.?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 인위적인 규범들과 약속들이 생겨나고,?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서 일치하는 점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부터 말과 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죠.?말이라는 게 어떻죠?우리 기억에도 한계가 있고,?말로 한 약속은 다음 순간 뒤집어 버리면 그만입니다.?이집트나 중국 같은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행정 중심 도시에서 상형문자가 생겨나고 그것을 써서 이런저런 통치에 필요한 일들을 하는데,?그것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특권층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들과 연관되어 상형문자가 생겼는데,?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가 피지배자들의 감성과 의식을 획일화하는 것이었습니다.?사상과 감정,?모든 것을 획일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문자다.?그래서 이 사람들이 문자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전제군주가 만들어낸 획일화의 도구로서 부여받은 기능과는 또 다른 기능이 글에 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들은 장사꾼들이었습니다.?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에서 발명된 쐐기글자를 보면 점토판에 적힌 글이라는 것이 돼지 몇 마리,?소 몇 마리,?밀 몇 자루 죄다 이런 것들 투성이입니다.?그러니까 거래하는 사람들이 서로?‘돼지 열 마리 보냈으니 곡식 열 말 가져다 다오’?이런 식으로 쐐기글자를 만들어 쓴 겁니다.?이 문자의 발생과 연관해서 보면 재미있는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시골 장터에서 술집을 연 할머니가 막걸리를 외상으로 먹은 사람들을 벽에 적어놓는데,?박 서방을 나타내는 브이(V)?자를 그어 놓고 한 잔 외상으로 먹었다고 일(/)자를 그어 놓고,?홍 서방을 나타내는 동그라미(ㅇ)?그려 놓고 일자(/)?그어 놓고 하다보니,?벽이 다 차게 생겨서 다섯 잔째 마실 때는?/////?이렇게 그어 놓고 하는 것들을 문자 발생의 초기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종교도 버려야 한다.?가치관도 버려야 한다,?장사하는 사람들이 버려야 할 것은 정말 많습니다.?이해관계를 서로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소통을 잘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버려야 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불평등 거래는 장사꾼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불평등 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상대편이 알아차리면 어떻게 됩니까??그러면 거래가 안 되겠죠.?그러니까 상대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하죠??돼지 키우는 마을에 가서 싼 값으로 돼지를 사오려면 파는 사람들을 그럴 듯하게 속여야 하고 그러려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배워야겠죠??그 사람들의 정서,?사고방식을 익혀야겠죠.그 전에 농사를 짓거나 짐승을 키우고 살 때는 제 고장 말만 알아도 살 수 있었으니까 저마다 독특한 온갖 토템과 터부를 마련하고 섬기면서 자기들만의 세계에서,?몽상과 상상력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고유한 신화와 신앙의 체계를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할 수 있었는데 이제 실증적인 조사와 탐구가 필요하게 됩니다.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그러죠??헤로도토스는 장사꾼들을 따라 여기저기 탐사 여행을 합니다.?리디아 같은 곳에 가 보니까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어요.?이 놀이를 보면서 이렇게 유추합니다. ‘아이들이 굶주림을 잊어버리려고 공기놀이를 만들어 냈다.’?그러니까 현대식으로 말하면 종족학,?각 민족의 민속이라든지 풍습 같은 여러 가지 보고 들은 것을 기록에 남기고 조사 연구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해안도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낼 필요가 생깁니다.?농경사회나 유목사회는 모든 자산이 유기물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여기서는 증서,?약속어음 같은 것들이 양 백 마리와 바뀌기도 하고,?배 한 척과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가증권 같은 것들이 자산의 중요한 목록으로 편입됩니다.

유기물과는 달리 무기물로 이루어진 자산은 썩을 염려가 없어 무한축적이 가능해지니까,?부의 거대한 축적들이 이루어지면서,?변화들이 생겨납니다.그리고 지혜의 함수는 이미 시간적인 경험의 축적이나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아닌,?얼마만큼 셈이 빠르고,?속셈이 멀쩡하냐에 따르는 계산력이 됩니다.?누가 너 속셈이 뭐냐??할 때 네가 속으로 뭘 헤아리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죠??상대방의 속셈을 알아내고 자기의 속셈을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불평등 거래를 하는데 주무기가 되니까 머리를 써도 자꾸 그 쪽으로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거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인간이 단순한 마을 공동체와 유목공동체에서 벗어나 도시에 모여 살면서,?사고방식이나 감성에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생겨나죠.?그래서 우리의 상상력과 몽상 같은 것들이 우리를 꿈의 세계에 머물게 만드는 신화공간이 아주 엄혹한 현실공간으로 바뀌게 되면서 누구 마음도 다치지 않고 어떤 종교나 신념체계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그 길을 찾다보니까 하늘의 신(우라노스)과 땅의 여신(가이아)이 이 세상의 만물을 끌어안던 세계 해석이‘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식으로 우주의 근원에 대한 아주 밋밋하고 메마른 새로운 해석으로 탈바꿈하는 낯선 세계관이 싹트는 겁니다.

 

신화 해석의 중요성: 우리 사회의 지식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1

신화 해석의 중요성:?우리 사회의 지식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은 바다를 끼고 지중해 해안가에 세워진 그리스 이오니아 식민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여러분들 밀레토스라는 지역을 아시죠??밀레토스가 어떤 곳입니까??철학개론 배우신 분들 손들어 보세요.?탈레스라는 이름은 압니까??서양에서 최초의 철학자라 알려진 탈레스가 밀레토스 출신입니다.?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한 거로 유명한 사람이죠.?여러 방면에 다양한 재질을 가지고 있어서 천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고,?늘 하늘만 쳐다보고 다니다가 웅덩이에 빠진 적도 있어서 가까운 것은 못보고 먼 것만 보고 다닌다고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죠.?실제로 만물의 근원이 뭐냐 하는 물음은 오랫동안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중요한 주제였습니다.?종교에서도 이 우주,이 세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왔고,?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하나가 무엇이고,?그것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현대 입자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가장 큰 하나인 우주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느냐,누가 이 큰 우주를 만들어 냈느냐,?혹은 저절로 이 큰 우주가 생겨났느냐 하는 화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관심이 크죠.

이야기가 좀 재미있어야 하니까 우리 쪽으로 눈길을 돌려봅시다.?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천지창조 신화가 없었던 걸로 생각을 해요.?이 잘못된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냐면,?단군신화를 엉터리로 해석해 온 이른바 신화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데서 생긴 고정관념에 매달린 탓이 커요. ‘웅녀’설화를 예로 들면 토템사상을 끌어들여 웅녀는 곰 부족을 상징하고 환웅은 호랑이 부족을 상징한다,?이 부족국가들이 결합해서 고조선이라는 민족국가를 형성한 것이다,?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이 엉터리 없는 이야기를 맨 처음에 퍼뜨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았더니 육당 최남선이 나옵디다. ‘불함문화론’에 나오는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신화학자 김열규 선생이 확산시킵니다.?너무 그럴싸한 이야기여서 많은 학자들이 거기에 넘어가 우리나라에는?‘토템’과?‘샤만’?이런 것들은 있었지만,천지 창조신화는 없다,?이런 식으로 규정을 짓는데,?아무리 조그만 부족도 천지창조의 신화가 없는 부족은 없습니다.?전부 나름대로 가장 큰 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설명해 내려고 애씁니다.?물론 설명 체계는 짜임새가 정교한 것도 있고,?느슨하거나 엉성한 것도 있지만,?없는 곳은 없습니다.?우리 나라 사람들만 별종이어서 천지창조 신화가 없는 거냐 아니면 유실된 거냐??이런 생각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한 삼십 년 전부터 단군신화는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신화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떠벌리는 말이라고 권위를 인정해 주질 않아요.?이제부터 제가 제대로 해석을 할 테니까 여러분들 들어 보세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설화를 보면?‘환인’의 아들?‘환웅’이 아버지에게 아래로 내려가 중생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주겠다고 해서, ‘신단수’?아래로,?바람,?비,?구름,?번개,?우레 같은?‘손’(사)을 데리고 내려옵니다.?그런데 환히 빛나는 멋있는 수컷?‘환웅’(해)에게 반한 암컷 둘이 찾아옵니다.?이른바‘곰’과?‘범’이지요.?환웅이 쑥과 마늘을 먹고?‘100일’을 견디면 짝으로 삼겠다고 말하자, ‘호랑이’는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달아나고?‘웅녀’는 견디고 참아서 환웅의 짝이 되어?‘단군왕검’을 낳았다.?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죠.

‘호랑이’는 우리말로?‘범’이죠.?언어학자들은 어원을 추적할 때 모음은 제껴 놓는 일이 많습니다.?그 만큼 모음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자주 바뀌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범’은?‘밤’으로도 발음되고,?그렇게 기록된 예도 있습니다.?그리고?‘곰’은?‘검’도 되고, ‘굼’도 되고, ‘감’으로도 바뀝니다.?처음 낱말을 가르칠 때 한 낱말을 비슷한 다른 말로 바꿔서 그 말의 뜻을 일러주는 것이 일반적인데,?이것을?‘사전적 정의’(lexical definition)라고 합니다.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가르치는 천자문을 보면 뭐라고 되어있어요??하늘천,?따지,?감을현,?누르황.?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면,?한 낱말을 뜻이 같은 다른 낱말로 바꾸어서 하늘은?‘검’이요,?땅은?‘누리’다,?이렇게 한 낱말의 뜻이 다른 낱말과 같다는 것을 밝혀주지요.?왜 하늘을?‘검’이라고 할까요??나중에?‘감’, ‘곰’, ‘구무’, ‘가마’, ‘개마’,?임금 할 때?‘금’,?이런 것들이 모두?‘거무(검)’에서 파생된 말인데,?우리 옛 분들은 빛의 간섭이 없는 밤하늘 빛깔이 본디 하늘빛이라고 봤습니다. ‘하늘은?‘검’이다.?그리고 땅은?‘누리’다.’?이렇게 옛날에?‘하늘’이라는 이름도 있었지만,?그것을?‘검’(거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개마’고원을 왜 그렇게 부르느냐 하면 하늘에 닿아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개마,?고마,?구마,?다 같은 말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입니다.?이렇게 따지면 실마리가 잡힙니다.?밤도 깜깜하고 하늘도 깜깜합니다.?깜깜하다는 점에서는?‘밤’(범)과?‘검’(곰)은 다르지 않습니다.

‘백일’이라는 말도 달리 해석해야 해요.?해가 나는 동안, ‘온(백)날’, ‘온날’은 해가 비추는 동안,?온종일이라는 소리죠.?해가 비치는 동안에 자기와 함께 견딜 수 있는 것을 자기 짝으로 삼겠고 했는데,?해가 비추자마자 범(밤)은 달아나고 곰(검)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하늘’과?‘해’가, ‘웅녀’와?‘환웅’이 짝을 맺게 되어,?하늘이 해의 아낙이 되었다,?이것이 단군설화에서 나타나는 우리식 천지창조 신화입니다.

“우리 신화에서는 하늘이 여성이고 태양이 남성입니다.?이게 그리스 신화 책엔 거꾸로 되는 거죠.?저쪽에서는?‘우라노스’, ‘천공’이 남성이고, ‘가이야’, ‘땅’은 여성으로 상징되지요.?하늘과 해가 짝을 지어서 낳은 게 무엇이냐……. ‘다’, ‘따’, ‘다알’(달,?딸),?땅.?이 지구도 그렇게 생겨났고,?달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그럴 듯한 말이죠??아무도 이것을 학설로 봐주지 않으니까?‘거짓말’로 여겨져?30년 동안 여기저기 귀에서 귀로 흘러 다니다가 사라져 버렸어요.?어때요,?그럴 듯해요?”

“네.”

그럴 듯하면 하나 더. ‘오행사상’?있죠??오행에서 기본색으로 다섯 가지 색이 나옵니다.?중국에서는 목,?화,?토,?금,?수가?‘오행’이죠??목은 동쪽과 풀,화는 남쪽과 불,?토는 중앙,?계절적으로 보면 여름과 가을 사이고,?금은 가을.?수는 겨울입니다.?말하자면 오행의 자리는 동,?남,?중,?서,?북인데 빛깔로 나타내면 목은 푸른색으로 나타나고,?화는 붉은색,?토는 누른색,?금(金)은 흰색,?수는 검은색으로 나타납니다.?목화토금수로 나타나는 오행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대로 가져다 쓰기 어렵다는 것을 곧 알 겁니다.?유럽이나 러시아,?그 밖에 다른 지역을 가보면 부엽토가 뒤섞이고 썩어서 물이 검습니다.그러나 우리나라 물은 맑아서 투명합니다.?색깔이 없습니다.?우리나라는 산구비가 가파르고,?나무가 많기 때문에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검지 않아요.?중국에서 만들어진 오행설을 보면 갑자기 하얀 해 대신에 숫돌에 하얗게 간?‘쇠’가 끼어듭니다. ‘금’(金)이?‘쇠’지요.?중국에선 오행이 색깔로 보면 푸른색,?붉은색,?누런색,?흰색,?검은색으로 되는데, ‘쇠’를 흰색으로?‘물’을 검은색으로 나타냅니다.?우리말 형용사?‘푸르다’는?‘풀’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붉다’는?‘불’에서 나오고, ‘누르다’는?‘누리’에서,?다시 말해 황토 땅에서 나온 것이고, ‘희다’는?‘해’에서 나왔고, ‘검다’는?‘검’?곧?‘하늘’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부터 우리 나름으로 오행설이 있었고 그에 따라서 빛깔이 지정됐다면 우리나라 기본 색채가 훨씬 더 원초적이고,?전부 자연물로 됐다, ‘쇠’?대신?‘해’가 들어가고,?물 대신 하늘이 들어갑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삶에 밀접한 자연물에서 우리의 색채를 끌어내었다.?이게 민족주의적인 발언입니까??아니죠?

잘 들어 보십시오.?우리나라에서는?‘물은 맑고’, ‘불은 밝고’, ‘바람은 부는’것입니다.?이름씨(명사)와 움직씨(동사),?그림씨(형용사)가 같은 소리,?하나의 말에서 흘러나옵니다.?우리민족은 이런 점에서 아주 좋은 언어를 물려받았고,?이런 말을 부려서 쓸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이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그런데 여러분들은 우리 조상들이 시원찮아 보이니까 있다/없다,?이런 말을 시시하게 여기고?‘존재’와?‘무’(無)하면 대단하게 보고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