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과 됨’, ‘있음과 없음’의 연관성[철학을다시 쓴다]-⑩

‘함과 됨’, ‘있음과 없음’의 연관성[철학을다시 쓴다]-⑩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는데, 먼저 유클리드 기하학과, 리만(Riemann) 기하학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공간의 성격에 연관되는 것인데, 닫힌 공간이냐 열린 공간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열린 공간에 대해서 맨 처음 이야기한 사람은 원자론자들이었습니다. 로이키푸스에서부터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를 잇는 원자론자들이 열린 공간을 생각했고, 이 사람들은 이 우주는 공간과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그 안에 빈 틈, 공간이 하나도 있지 않으므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 ‘아토마’(atoma)이다, (템네인(temnein)이라는 그리스어가 있는데, 그것은 가른다, 쪼갠다라는 말입니다.) 아토마의 ‘아’는 부정사로서 ‘아톰’(atom)은 쪼갤 수 없는 것,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있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또는 ‘있는 것’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있음’과 ‘있는 것’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이 지닌 성격을 원자론자들은 원자라고 불렀다.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이다로 이해하면 됩니다.

파르메니데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요. ‘있는 것’ 또는 ‘있음’(einai)을 구(球)처럼 생겼고, 모든 것이 달라붙어서 하나로 되어 있고,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을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하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하나’를 무한히 작은 것들로 쪼개서 무한한 공간 속에서 흩뿌려놓은 사람들이 원자론자들입니다. 그리고 원자론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죠. 이 우주 속에서 원자의 수도 무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무한하고, 공간도 무한하다. 그런데 고대 원자론자들의 원자와 공간의 성격은 각각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함’과 ‘됨’이 어떻게 다르냐고 이야기 했을 때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죠. 함은 능동성이 강조되는 말이고, 됨은 수동성이 강조되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됨’은 수용성, 받아들임, 외부에서 어떤 작용이 있을 때, 거기에 대해서 반작용을 하지 않고 그 작용을 받아들이는 측면입니다. ‘함’은 작용을 하는 측면이죠. 여기에서 이런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가 ‘대상’이라고 부를 때, 불란서말로 ‘오브제’(objet), 영어로 ‘오브젝트’(object), 독일로 ‘게겐슈탄트’(Gegenstand)라고 그러는데, ‘오브제’, ‘오브젝트’라는 말은 ‘오브’(ob) ‘이케레’(icer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가로막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게겐슈탄트’라는 독일말은 라틴어가 어원인 불어와 영어의 독일식 직역입니다. ‘맞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맞서 있는 것은 어떤 작용에 대해서 반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저 학생은 내 시선을 가로막아서 저하고 맞서 있고 버티고 서 있는, 내 시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저는 이 학생 뒤에 있는 다른 학생을 보고 싶은데 말이죠. 이렇게 장애물이 되는 것, 제 시선에 대해서 반작용을 하는 것이죠.

“반작용의 능력을 무화시키는 방식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책상 표면만 보면 원목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진짜 원목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죠. 두들겨서 소리를 듣는 방법도 있고, 옆과 앞을 살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이것이 원목인지 아닌지 확인이 안 되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잘라 봐요.”

“네, 잘라 봐야죠. 그런데 자르려는데 이 책상이 반항을 한다, 그럼 어떻게 하죠?”

“자를 수 없죠.”

“자를 수가 없죠. 그렇죠? 색은 원목색인데 금강석이다, 그래서 이걸 자를 수가 없다, 그러면 이것이 나무인지 금강석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물질에는 저항하는 임계점이 있죠. 모든 물질들은 저항하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원자 이하인 아원자 수준으로 계속해서 쪼개서 소립자, 그것도 쪼개서 그 결을 보고 이것이 어떤 물질인지,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어떤 운동을 하는지를 알아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쪼개면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이 사물을 어떻게 인식을 합니까? 이 사물의 겉을 보고 우리가 인식을 합니다. 갓, 겉, 끝, 어원으로 보면 전부 같은 말입니다. 이 사물과 사물이 아닌 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사물을 우리가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을 보고, 옆을 보고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되도록 많은 겉을, 표면적을 살핀다는 소리죠. 그런데도 잘 알 수가 없어, 가르고 쪼갠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겉을 들어낸다는 것이죠? 자꾸 쪼개서 표면적을 늘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삼차원 세계를 이차원으로 전부 환원할 수 있다면 모든 결들이 자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사물을 깊이 없는 것으로, 삼차원 공간을 이차원 공간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이 모든 물리 현상을 이해할 수 있고, 물리현상이 이해된다면 화학, 생물학, 사회, 역사, 인간현상까지도 전부 단순한, 이런저런 것들의 복합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서 출발을 합니다.

이 출발 지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리스철학에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엮어낸 우주론은 둘로 갈라집니다. 그 주인공 가운데 하나는 원자론자들, 또 하나는 플라톤입니다. 원자론자들이 열린 우주, 개방된 공간을 그렸다면, 플라톤은 닫힌 우주, 폐쇄된 공간을 그립니다. 이것이 현대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두 가지 ‘거대이론’(Grand Theory)입니다. 이 우주를 열렸다고 보느냐 닫혔다고 보느냐죠. 유클리드는 원자론자적인 전통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열린 공간, 등질적인 공간을 상정하고 기하학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렇지만 로바쳅스키(Lobachevskii)나 리만의 경우는 공간을 달리 봅니다. 휜 공간, 그것이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닫힌 공간으로 보느냐, 아니면 닫힌 것인지 열린 것인지 구별하기는 힘들어도 공간 자체가 휘어 있는 것으로 보이냐, 평행으로 보이느냐 하는 점에서 유클리드와 견해가 다릅니다. 그런데 대단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간은 ‘없는 것’에서 나오는 건데, 이것이 휘어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없는 것’은 ‘휘어있다’? 공간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없는 것’뿐이지요? ‘있는 것’은 대상이 됩니다. 맞서고, 저항을 합니다. ‘없는 것’만이 어떤 작용에도 반작용하지 않고 순수 수동성을 띠게 됩니다. 공간이 원자한테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간의 특성이 ‘없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공간’은 ‘없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면 ‘있는 것’은 뭐냐? ‘원자’만 있다, 데모크리토스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로바쳅스키(Lobachevskii, 1792~1856) 초상화 , 레프 크류코프 작(1843)


 

‘있는 것’을 상정하고, ‘없는 것’을 상정하게 될 때, 거기서 운동이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함’이 됐든 ‘됨’이 됐든 한쪽은 능동적인 운동의 양태이고, 한쪽은 수동적인 운동의 양태인데 ‘있는 것’과 ‘없는 것’ 안에 운동을 포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한번 살펴봅시다.

*있음 (있는 것)
*없음 (없는 것)

운동은 변하죠. 바뀌는 것을 뜻하죠? 변하는데, 이 ‘바뀜’을 두 가지로 갈라볼 수 있겠죠, 한쪽은 없는 것에서 무언가 새로 생겨나서 있게 되는 것, 또 한쪽은 있는 것이 사라져서 없어지는 것, 보통 상식으로 이 두 가지 운동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운동이 ‘없음’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강운동을 ‘없음’ 아래로도 할 수 있을까요? 없죠. 말하자면 ‘없음’은 운동도 없는 정지지점을 나타내는 거죠. 거긴 운동이고 뭐고 다 없다, 우리가 ‘운동’과 ‘정지’로 어떤 변화를 규정하자면 없는 것에 이르러서 하강운동은 멈춘다, 상승운동은? 있는 것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없죠. 있는 것 이상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서 없는 것으로 돌아선다는 것이죠.

‘있음’과 ‘없음’, 또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두 한계지점입니다. 이 한계 안에서 운동이 이루어집니다. 지난번에 제가 당구공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던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있음’이 여럿으로 있다면, 여럿의 최소 단위가 뭐라 그랬죠? 둘, 둘이 여럿의 최소 단위죠. 만일에 ‘있는 것’이 둘로 있다고 치자. 그럼 이것을 ‘있는 것 기역’(ㄱ), ‘있는 것 니은’(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에서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둘을 나누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이 경계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하고 물었을 때, ‘있는 것’이라 하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은 달라붙는다, ‘없는 것’이라고 보면 ‘없는 것’은 그 자체 규정상 없으므로 ‘ㄱ’과 ‘ㄴ’은 하나로 달라붙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있는 것’은 ‘하나’라고 이야기했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다’고 ‘있는 것’이 부정돼버리면, 부분 부분 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없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랬죠. 통째로 부정이 돼서 ‘있는 것은 하나다.’, 그때 제가 여러분들한테 동의를 얻어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일동 웃음.)

‘있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다(多)와 운동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설명하려면 ‘있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있는 것’ 하나만 놓고 가버리면 ‘없는 것’이 다 사라져 버린다. ‘원자’와 ‘공간’으로 나누든 ‘질료’와 ‘형상’으로 놓든 어떤 방식으로든지 두 개를 놓고 나가야 하는데, 최초의 두 개는 뭐냐? ‘있음’과 ‘없음.’ 이게 최초의 두 개인데 있음과 없음이 서로 관계 맺을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관계 맺을 필연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이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다, 있음과 없음이 접촉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왜 이 우주에 원자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대응해서 또 공간이 있어야 되는지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자론이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왜 ‘있음’과 ‘없음’이, ‘원자’와 ‘공간’이 우주를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설정되었느냐, 동시에 공존하게 되느냐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우연’이다, ‘필연’이다, 어쩔 수 없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가 헛돌고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⑨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⑨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함과 됨’: 운동의 난제
 

여러분들, 서양의 ‘히스토리’(history)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물리학사, 철학사, 생물학사 같은 ‘역사’를 이야기하고, 서양에서는 그것을 ‘히스토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 ‘히스토르’(histor)라는 말에서 나온 건데 히스토르라는 말은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실증적인 증언의 뒷받침이 없으면 신화나 상상, 환상이라고 하지 역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실증과학이라고 하는 말, 이 말을 널리 퍼뜨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실증과학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불란서 사람인 오귀스트 콩트(August Conte)입니다. 그 사람은 물리학, 화학뿐만이 아니라 사회학, 철학까지도 실증과학으로 만들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근대과학의 밑바닥에는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과학이 깔려 있습니다. 물리현상이나 생물현상이나 화학현상이나 인간현상이나 전부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보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그 법칙을 설명하지 않으면 전부 헛소리로 치부하는 거지요.

“화학에서는 가장 큰 난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불.”

“그렇죠!”

불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간단하게 급격한 산화현상이라고 배웠지만, 산화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극히 후대의 일이고, 불이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화학에서 가장 큰 난제였습니다.

생물학에서 가장 큰 난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자연 발생설에 대한 논박이었습니다. 파스퇴르가 나타나서 비로소 아주 조그만 생명체도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에서만 생명체가 나온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전에는 그냥 세균이라는 것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오귀스트 콩트(1798~1857) / 출처: blog.joins.com


 
물리학에서 가장 큰 난제이고 현재까지도 큰 난제인 것은 무엇입니까? 운동의 문제입니다. ‘한다’, ‘된다’, 이런 것이 전부 운동하고 연관된 문제입니다. 크게 봐서 운동에는 몇 가지 운동이 있습니까? 질적인 운동과 공간운동, 두 개로 크게 나눌 수 있죠? 질적인 변화와 공간에서 위치 변화, 물리학자들은 질적인 운동을 어떻게 봐요? 양적인 운동으로 환원하죠? 어찌 보면 물리학자들이 극단의 환원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고대원자론자들이 그랬듯이 단순한 요소를 가지고 전체 우주 삼라만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그런데 질적인 운동을 양적인 운동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가? 이 운동 문제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지금 현대 물리학자들이 빠진 궁지가 있습니다.(홉킨스도 마찬가지고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고, 저는 다 그 수렁에 빠져 있다고 봅니다.) 원자론자들은 개방된 우주를 상상했습니다. 원자들도 무한하고 우주 공간이 외연적으로도 무한하다고 해서 개방된 우주를 생각했는데 현대 물리학자들은 폐쇄된 우주를 그립니다.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이 일차적으로 밑바닥에 깔고 있는 것은 하나의 폐쇄된 우주입니다. 질서 있는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폐쇄된 공간이 필요한 겁니다.

“열역학 제1의 법칙이 뭡니까?”

“에너지 보존의 법칙.”

“네, 에너지 보존의 법칙입니다. 이게 철학적으로는 어떤 뜻을 지니고 있습니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없는 것에서 무언가 새로 생겨나지도 않고, 있는 것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거죠? 안 그렇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철학적인 문제를 물리학적인 동어반복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 다음 열역학 제2의 법칙은 뭡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건 무엇입니까? 무규정성이 늘어난다는 말이죠. 무질서해진다는 것은 무규정성이 늘어난다는 거고, 그리스 사람들 이야기를 따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라는 거고, 그걸 물리학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어떤 말이 되겠습니까?”

“…….”

“이놈 저놈이 질적으로 구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등질화된다는 말입니다. 고전물리학의 완성자로 알려진 뉴턴은 운동을 두 개로 나누는데 수평운동과 수직운동이 합쳐져서 무한히 튕겨나가지도 못하고, 무한히 오므라들지도 못하고, 우주에 떠 있는 것들을 둥글둥글 돌게 만든다, 이 두 개가 합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서 우주선도 돌고, 지구도 돌고, 달도 돌고, 해도 돌고, 천체도 운행된다고 이야기하죠. 참 아름다운 이론입니다.”

그런데 중력 중의 중력은 뭐라 그러죠? ‘블랙홀.’ 지금 우주 산지사방에 블랙홀이 있는데, 그 블랙홀을 전부 끌어 모으는 최종 블랙홀이 나올 겁니다. 그게 중력중의 중력이거든요. 중력중의 중력에 중심이 있어서, 흩어지려는 모든 무게 있는 것들을, 성운이라든지 개별적인 별들을 끌어 모아서 통일장을 이룬다는 것이 아이슈타인의 생각이고, 거기에서부터 현대 물리학자들이 한 치도 벗어나려고 들지 않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파괴 정도에 있어서 고대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 학파의 이론을 못 따라갑니다. ‘빅뱅’(Big Bang)이든지 ‘블랙홀’(Black Hole)이든 옛날부터 원자론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것들을 이론적인 정교함, 섬세함을 더하고 수학을 덧붙여서 새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정치경제학 이론이라든지 현대 자연과학 이론, 이 모든 이론들이 물리학 이론을 중심으로 마치 성단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중심은 ‘환원’입니다. 소립자로 환원시키든,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환원시키든, 이 모두가 환원론들입니다. 여기저기서 환원론이 지배질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물을 던져서 그 그물에 걸리는 고기만 잡아야 하니까, 그것이 이론적으로 아름답고 깨끗하니까, 이론을 그렇게 만들어 내는데, 도시사람들은 서로 무엇이 닮아 간다 했죠? 생각이 닮아간다, 시골사람들은 손이 닮아 가는데, 도시사람들은 생각이 닮아 간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을 통일시키려고 듭니까? 왜 모두 이렇게 단순한 걸로 환원시키려고 들까요?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번 강의 주제는 ‘함과 됨’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한 개인의 자각으로부터 싹트는 것은 도시사회에서입니다. 농경사회에서나 유목사회에서는 이런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는 노인들이 결정해주고, 유목사회에서는 유목민들을 이끌고 목초지를 찾아서 앞장서는 사람들이 결정해 줍니다. 도시사회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 개인에게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뭘 할까?’ 레닌의 책으로 유명해진 질문이지요. ‘무엇을 할 것인가?’

‘함과 됨’은 둘 다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한다’ 하고, 어떤 때 ‘된다’고 하지요? ‘함’과 ‘됨’이 운동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하죠. 사람이 하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 하는 것이든, 또 무엇이 어떻게 되든 ‘하는 것’, ‘되는 것’은 모두 운동을 나타내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능동성이 크고, 하나는 수동성이 큰 운동 형태입니다.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태초에 운동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운동이 뭡니까?”

“시간과 공간에서 뭔가 바뀌는 것이요.”

“원자론에서는 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를테면 고대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과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은 어떻게 다릅니까? 조금 더 쉬운 문제부터 접근을 할까요? 고대원자론자들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고대원자론자들 전통이 로이키푸스(Leucippus)에서 시작해서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에피쿠로스(Epicuros),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이렇게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 사람들이 밑에 깔고 있는 가장 큰 가정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겁니다. 그 외에는 없다, 원자는 수적으로 무한하고 공간은 외연으로 무한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운동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죠?”

“원자들의 충돌로.”

“예, 충돌과 반동으로 이 세상이 생겨났다 그러는데, 그러면 원자들이 왜 충돌하게 됐는가? 원자에 무게가 있습니까? 있지요? 그런데 무게가 있는 것들은 현상계에서 모두 수직 하강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면 원자는 무게가 있고 무게가 있는 것은 외부의 간섭이 없으면 수직하강운동을 한다, 그런데 무한한 공간 어디에 앞, 뒤, 좌, 우가 있느냐? 그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하죠?”

“사방으로 낙하한다.”

“사방으로 낙하한다는 거, 제 갈 길이 있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거기서 충돌을 하게 되나요?”

“빨리 떨어지게 되면…….”

“저 친구는 지금 갈릴레오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질의 물리학은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뒤로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의 물리학인데, 현상계를 이루는 중요한 것들에는 저마다 제 자리가 있다, 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하고, 돌이나 흙은 밑으로 떨어지는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운동체의 본성상 그렇게 되어 있다고 질로 설명을 하는데, 갈릴레오의 실험이 있은 뒤로 그게 다 사라져 버립니다.”

말하자면 등질적인 운동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고전물리학’이 자리 잡게 됩니다. 뉴턴(Newton)이 앞장섰고 라플라스(Laplace)가 철학이론으로 뒷받침을 하죠. 등질적인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제가 뭡니까? 등질적인 공간과 등질적인 시간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등질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시공을 통틀어 꼭 같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초로 우주 공간을 등질적으로 보고 원자를 등질적인 실체로 본 것은 고대원자론자들입니다. 대단히 큰 혁명입니다.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리고 정말 자연계에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실재하는가? 혹시 우리 의식에만 있는 시간과 공간은 아닌가?

아이작 뉴턴(1642~1727) / 출처: www.bbc.co.uk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은 원자들이 이합집산을 해서 이 우주가 생성된다고 이야기할 때 우연히 그 가운데 하나가 충돌을 하게 되면서, 여러 놈이 그에 대한 반작용을 하여 복합체들이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발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자가 운동의 주체다 하는 말이 겉보기엔 가장 무책임한 이야기 같고 어쩌다 그렇게 됐다는 말도 무책임한 말 같지만, ‘우연’이라는 것을 끌어들인 것은 서구 ‘운동’ 이론을 뒷받침하는 주춧돌을 놓은 것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처음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려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는데,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말 생각나요? 당구공을 예로 들어서 얘기했죠. 원자론도 로이키푸스에서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에서 루크레티우스로 오는 동안 그 나름대로 진화를 합니다. 이 이론이 날이 갈수록 세련된 모습을 띠는데,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로마의 시인이자 유물론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현상계에서 바람 없는 날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듯이 원자가 위에서 아래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경사운동을 한다, 무수히 많은 원자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중에 한 놈이 살짝 휜다, 그렇게 해서 충돌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로 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충돌과 반동을 일으켜서 형성되고 해체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증명들을 합니다. 우주공간이 무한하고 원자가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우주공간이 유한하고 원자가 무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우주공간과 원자가 둘 다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해 질문하고 그런 경우에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이 그리스 철학에 기원을 두고 있고, 그리스 철학은 인도철학과 중국철학과는 다릅니다. 물론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에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동양철학의 전통은 증명에 약하고, 또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책임지고 증명을 해서 다른 사람이 수긍을 해야 그 다음 단계로 진행을 합니다.

정지해 있는 것은 정지해 있는 것이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해 있는 것은 영원히 정지해 있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운동한다, 그 운동은 등질적인 수평운동이다, 수직으로 하는 중력에 의한 운동은 가속이 붙지요. 이 운동 관념이 교과서에 나오는 거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우리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운동 관념인데, 운동과 정지는 다르고 운동하는 것은 정지하지 않고 정지하는 것은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한다는 식입니다. 여러분 공간은 운동을 해요, 안 해요? (대답 없음) 공간이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여러분들 여기서 수학이나 자연과학, 물리학 하는 분 계십니까? 없어요? 실제로 등질적인 공간이란 측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공간관념이란 것은 유클리드기하학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삼각형을 내각의 합이 180도인 세 직선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평면공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⑦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⑦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학생들은 모처럼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를 시작하나 싶더니 중동무이를 하고 마는 나에게 못내 불만스럽고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모르는 척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변화의 필요는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는 상황에서 생겨납니다.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왜 때매김이 미래로 되어 있는 있을 것이라는(또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야 할 것(없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지 간단하게나마 밝혀 놓는 게 좋을 듯하군요. 지금 있는 것, 곧 현재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은 하나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 하나는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크기가 없는 것, 따라서 지속도 변화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헤겔의 말마따나 지금 있는 것(헤겔 식으로 말하면 순수 존재)은 지금 없는 것(헤겔 식으로 말하면 순수 무)이나 마찬가지로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의 처지에서 보면 지속이냐 변화냐는 살아남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하는 선택의 기로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속해 왔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러저러한 변화를 거쳐 왔다는 기억 내용만으로서는 삶에 도움이 되는 지침이 될지 모르나 삶의 보장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은 걸러진 것, 곧 규정된 정보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 없는 것인 미래는 규정되지 않은 것, 무엇이라고, 어떻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속된 것, 또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변화된 것을 구체적인 자료〔data〕를 통하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있었던 것이 없다, 없었던 것이 있다, 없었던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을 기초 삼아 정보 철을 만들지만 그 기억된 정보의 사용 가치는 미래의 상황이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에 저장된 정보 철을 뒤지는 인간의 의식이 따르는 통상 경로가 있습니다. 원칙은 간단합니다. ‘간단한 것에서 먼 것으로’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라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자료들을 뒤져 나갑니다. 생명 유지는 시간 축을 따라 이루어지니까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과거가 일차 탐색의 대상 영역입니다. 시간 축에 따라 현재로부터 더 먼 과거와 더 가까운 과거 사이에는 이런 대응 관계가 성립합니다.

 


 

가장 가까운 과거의 시점에서 보면 현재는 있을 것(없을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체의 지속과 변화를 통한 생명 유지의 처지에서 살피면 늘 있을 것(없을 것)을 중심으로 있는 것(없는 것)에 대한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고 정보 철을 만들고 찾아왔다는 말이 됩니다. 있을 것(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이 다 있고, 없을 것(생명 유지에 장애가 되는 것)이 다 없다면 생명의 유지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테니까 기억도 정보도 필요 없는 생명의 순수 지속만 있었을 것입니다. 생명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 지속이냐 변화냐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데에는 이 세상이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있을 것이 없기도 하고, 없을 것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결핍과 위협이 때로는 간헐적으로 번갈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집중적으로 한꺼번에 몰아닥치기도 하는 세상이라는 까닭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 것과는 달리 생명체에게, 그리고 특히 본능으로 전화한 생체 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생명체들과는 달리 의식에 주어진 외부 세계의 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인간에게 가치 판단이 사실 판단에 앞선다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이쯤 해서 물의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렇다면 미래가 현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윤구병 도서출판 보리 대표. 출처:http://news.kyobobook.co.kr/

“그렇지요. 생명체에게는 그렇습니다. 생명체에게 현재란 무엇입니까? 살아 있음 아닙니까? 이 살아 있음이 이어지느냐, 끊어지느냐, 다시 말해서 목숨이 앞으로도 붙어 있을 것이냐, 떨어질 것이냐가 문제지 우리가 지금 여기 살아 있음에 무슨 주의를 기울여요? 지금 여기 살아 있음에만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면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 다 부질없어져요. 우리가 왜 하나에다 존칭을 덧붙여 하나님〔唯一神〕이라고 해요? 지금 여기 있음이 바로 하나이고,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은 과거도, 미래도, 시간도, 공간도, 다 여의고 자기 자신에게만 주목하는 자라는 뜻에서, 불교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번뇌 망상을 벗어던졌다는 뜻에서 하나님, 유일신, 부처님 뭐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경지는 존재론의 탐구 영역을 벗어나요. 그런 경지에 이르면 학문이고 철학이고 다 필요 없어요. 그야말로 똥 친 막대기만도 못하지요.

이런 말을 하면 지나치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사실 판단이 가치 판단에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모두 하나님이나 부처님 경지에 있거나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멍청이들이에요.”

제 말이 지나쳤나요? 아마 지나쳤을 겁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지금 ‘있을 것이 없다.’(이 말은 곧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라는 것은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고 아우성인데, 점점 심화되는 결핍감이 끝간 데 모를 탐욕으로 전화되는 판에 지금 있는 것에만 주목하자는 말이 당키나 하나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없을 것이 있다.’는 게 세 살배기 아이도 알 만큼 산더미를 이루고 있어서 물질세계에만 국한하더라도 온갖 산업 쓰레기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판에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하여 이른바 선진되었다는 나라에서 국가 정책으로 복제 인간까지 만들어 내려는 꿍꿍이셈을 품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지금 여기 있는 것에만 넋을 팔고 있다는 게 말이나 돼요?

어느 시대에 누가 맨 먼저 그 말을 썼는지 모르겠으되,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리더군요.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⑥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⑥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학생 하나가 다시 질문을 하더군요.

“선생님, 용어에 관한 문제인데,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나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주어에 나오는 있을 것과 술어에 나오는 있을 것은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 문장들은 ‘있을 것이 있으리라.’ ‘없을 것이 없으리라.’고 표현해서 두 말의 성격이 다름을 분명히 밝혀 주는 게 좋을 듯한데요.”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엎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라는 속담이 있지요? ‘있으리라’, ‘없으리라’는 표현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 말이 ‘있을 이라’, ‘없을 이라’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젊은 이’나 ‘젊은 것’이라는 말이 어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대상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있을 것’, ‘없을 것’이나 ‘있을 이’, ‘없을 이’도 어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 문장들에서 기본 형식은 꼭 같이 ‘ㄱ은 ㄴ이다.’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을 바꾸어도 상관없겠지요.”

뒤이어 저는 서둘러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메마른 문장 분석은 저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지겨울 뿐만 아니라 이 문장 분석은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자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문장들은 아직 없는 것의 내부 관계입니다.

ㄷ-1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동어 반복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있어야 할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라는 말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ㄷ-2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남을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ㄷ-3 ‘없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빠질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뜻도 있고 ‘없어야 할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뜻도 있지요.

ㄷ-4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앞으로 다 있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는 뜻으로도, 또 ‘없어야 할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아직 없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무엇이라고, 어떻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 사이의 내부 관계, 다시 말해서 미래의 세계에는 예상과 기대와 추측뿐만 아니라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까지도 포함한 복잡한 판단들이 잠재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판단 형식의 메마른 분석은 큰 뜻이 없습니다. 판단과 사태가 늘 일치하지는 않으니까요. 긍정 판단(이다)에 부정 사태(아닌 일)가 대응할 수도 있고 부정 판단(아니다)에 긍정 사태(인 일)가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또 동일성(저됨)을 드러내는 듯이 보이는 문장이 실제로는 차별성(남됨)을 내포하기도 하고 차별성(남됨)을 부각시키는 듯이 보이는 문장이 동일성(저됨)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다만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서른여섯 개의 판단 형식이 모두 있음과 없음에 연관된 이른바 존재 판단인데, 여기에는 사실 판단도 있고, 가치 판단도 있고, 헤겔이 말하는 긍정(임)과 부정(아님), 칸트가 이야기하는 여러 판단 형식들이 빠짐없이 대응한다는 것만 눈여겨보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과거, 과거─현재, 과거─미래, 현재─과거, 현재─현재, 현재─미래, 미래─과거, 미래─현재, 미래─미래라는 세 가닥으로 꼬인 세 개의 밧줄이 다시 하나로 꼬여 역동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속과 변화의 흐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어서, 현재에서 과거로, 현재에서 미래로, 또 과거에서 현재로, 과거에서 미래로,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미래에서 현재로 넘나드는 통로로 안내되는 길목에 서 있음을 이 서른여섯 개의 판단 형식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셈입니다.”

제 말이 여기에 이르자 이번에는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부질없는 현학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회의가 일면서 이 존재론 강의와 주체 현실의 관계 고리가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앞으로 강의가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엉클어진 생각의 가닥이 조금씩 잡혀 가겠지 하는 기대 때문에 이렇게 아직까지 듣고는 있습니다만.”

“그래요? 아마 내가 칠판에 적어 놓은 서른여섯 개의 판단과 그 판단들에 대한 틀에 박힌 설명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이 판단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의식에 주어진 것과 감각에 주어진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관에 주어진 것까지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요긴한 길잡이가 되리라 여기고, 시간 나는 대로 들여다보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이 판단 형식들의 상호 관계를 전체로 이해하기는 어렵겠지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ttp://simmye.tistory.com/131

우리가 지속과 변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상계의 법칙과 의식의 법칙을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모두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와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개념의 틀 안에서 이 문제들이 어떻게 구체 상황들과 연관을 맺는지 힘이 닿는 대로 밝혀 나가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칠판에 적힌 판단 형식들 가운데서 미래가 주어의 자리에 있는 세 계열의 문장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지웠습니다. 칠판에 남아 있는 문장들을 다시 눈여겨보시지요. 눈여겨보는 순서는 관심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미래─현재, 미래─미래, 미래─과거 차례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습니다. 문장 앞에 있는 표시 기호는 일부러 지웠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기호들이 도리어 방해가 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미래─현재
있을 것이 있다.
있을 것이 없다.
없을 것이 있다.
없을 것이 없다.

“자, 이 문장들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기로 할까요? 꽤 오래 전에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떨 때 좋다고 하고, 어떨 때 나쁘다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좋음의 형상을 모든 형상들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을 구태여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가치 판단은 맨 나중에 좋다, 나쁘다로 모아집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말투를 따르자면 좋음의 형상(나쁨의 형상)을 바로 보는 눈이 필요한데,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직관하는 눈이 열려 있지 않으니, 추상 공간의 마지막 계단에서 정의〔definition〕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노력합시다. 앞 강의에서 나는 좋음과 나쁨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좋음 :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음

나쁨 :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음

그리고 보기를 들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냐 나쁜 사회냐를 판가름하려면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느냐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 억압, 착취, 부정, 부패, 탐욕, 이기심, 분열, 전쟁의 공포, 국토의 분단……들이 있는데 이 현상들이 있을 것(있어야 할 것)이냐, 없을 것(없어야 할 것)이냐, 또 우리 사회에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협동, 관용, 정의, 공과 사의 분명한 구별……들이 없는데 이 현상들이 없을 것(없어야 할 것)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있을 것이 다 있고 없을 것이 하나도 없으면 그 사회는 온전한 뜻에서 좋은 사회다, 있을 것이 하나도 없고 없을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회는 온전한 뜻에서 나쁜 사회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으면 그 정도에 따라 더 좋은 사회, 덜 좋은 사회로 등급이 매겨지고, 있을 것이 많이 없고, 없을 것이 많이 있으면, 그 정도에 따라 더 나쁜 사회, 덜 나쁜 사회로 평가된다.─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사회는 그대로 온전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어떤 변화도 마다하는 극단의 보수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속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지속이 주요 변수라면 변화는 종속 변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양한 편차가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 생기겠지만 보수주의(이른바 우파)의 득세가 정당화됩니다. 그러나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사회는 전체가 변화해야 합니다. 어떤 기존 질서나 가치의 지속도 거부하는 극단의 진보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변화에 더 힘써야 합니다.(변화가 주요 변수가 되고 지속은 종속 변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나타나겠지만 진보주의(이른바 좌파)의 득세가 당연시됩니다.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느냐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보수주의가 좋으니 진보주의가 좋으니, 수구니, 개량이니, 혁신이니, 혁명이니 하고 말로만 내세우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제가 잠시 말을 멈추자 그 틈을 타고 학생 하나가 저에게 이렇게 묻습디다.

“선생님 말씀은 책상머리에서 듣고 있으면 그럴싸한데요.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분명히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그런 사회가 줄곧 변화 없이 지속되어 온 측면이 두드러지거든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요?”
제 이야기의 흐름이 또 한 차례 끊긴다고 느꼈지만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실제 상황이야 어떻든 보수주의자들이 쓴 안경에 비치는 현실은 늘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좋은 세상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더러 ‘있을 것이 없다.’ ‘없을 것이 있다.’는 현실 상황이 그 안경을 통해 눈에 들어올 때도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손을 대면 ‘긁어 부스럼’이라는 두려움이 보수주의자들의 의식에 완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변화되면 더 나빠진다는 거지요. 보수주의의 기본 성격인 현실 긍정은 보수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기득권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런 설명만으로는 보수주의의 특징이 모두 해명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는 지속을 고집하는데, 지속은 안정과 동의어입니다. 무엇이든지(비록 그것이 나쁜 관습, 나쁜 제도, 나쁜 체제라 할지라도) 오래 지속되면 안정이 이루어집니다. 안정 상태에서는 긴장의 이완이 옵니다. 긴장은 힘의 소모를 가져옵니다. 생명체의 경우에는 그것은 생명력의 낭비로 나타납니다. 판판한 길, 잘 닦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일정한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습관이지요, 습관이 형성되면 우리의 걸음걸이는 자동화합니다. 자동화는 우리가 생체 에너지(생명력)를 최소로 소모하면서 걷는 방식입니다. 자동화, 긴장의 이완은 행동이나 기능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고, 이 반복에서 행동 양식이나 기능의 동일화가 확보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동일한 형상, 동일한 의식으로 굳어집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나요? 자연 상태에서 나무나 풀은 왜 종마다, 또 개체마다 같은 잎, 같은 꽃을 반복해서 피워 낼까? 한 그루의 나무, 이를테면 떡갈나무 가지에 온갖 형태의 잎이 다 달려 있는 것이 떡갈나무가 살아가는 데 더 좋지 않을까?

떡갈나무가 꼭 같은 형태의 잎을 자동 기계처럼 찍어 내는 데는 떡갈나무 나름의 삶의 경제가 작용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자리가 있겠지만 미리 귀띔해 두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군요. 만일에 떡갈나무가 같은 잎만 지속?반복해서 찍어 내지 않고 순간순간 다른 형태의 잎을 피워 낸다고 칩시다.(여기에서 내가 같은이라는 말과 다른이라는 말을 강조한 데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 경제계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다품종 소량화 정책’에 해당할 텐데, 왜 이런 일이 한 개체나 한 종의 단위에서 생존 전략으로 채택되지 않느냐 하는 데는 큰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나중에 우리가 흔히 양, 질, 척도라고 부르는 같음과 다름, 저됨(동일성)과 남됨(차별성), 이어짐과 끊어짐, 크기와 모습 들을 포괄해서 다룰 때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보수성이 모든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생명력을 배분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중요한 특질이라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인간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보수성도 정치 경제학의 틀 속에서 간단히 해명될 특질이 아니고 물질과 생명의 관계, 생명체 상호 관계까지 포함한 더 큰 틀 속에서만 제대로 밝혀질 수 있습니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⑤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파르메니데스가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과거와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미래와 있는 것으로 규정한 현재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몇 개의 문장으로 나타내 볼까요?

1-1. 있었던 것이 있었다.
1-2. 있었던 것이 없었다.
1-3. 없었던 것이 있었다.
1-4. 없었던 것이 없었다.

2-1. 있는 것이 있었다.
2-2. 있는 것이 없었다.
2-3. 없는 것이 있었다.
2-4. 없는 것이 없었다.

3-1. 있을 것이 있었다.
3-2. 있을 것이 없었다.
3-3. 없을 것이 있었다.
3-4. 없을 것이 없었다.

위에 적은 열두 개의 문장은 모두 이미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본 과거─과거, 현재─과거, 미래─과거의 관계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1-1은 과거의 실재를 단순히 확인하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그보다 앞선 과거가 지속되어 왔음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2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앞선 과거에는 있었던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보니 없어졌음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3은 빠진 것이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거나 그보다 앞선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있게 됨을 나타낸 문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4는 다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또 그보다 먼 과거에도 없었던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사태를 가리키지 않고 여럿(둘 이상)의 사태를 가리키는 까닭(다시 말해서 언어의 모호성)은 사태의 무규정성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이미 없는 것, 지나간 것, 끝난 것으로 파악하는 과거에도 여전히 규정되지 않는 것, 유동적인 것, 바뀔 수 있는 것, 변화의 계기가 들어 있고, 바로 이 과거에,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된 것에 남아 있는 변화와 운동의 숨은 힘이 어떤 계기에 현재와 미래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파르메니데스(Παρμεν?δη?, 기원전 510년경 – 기원전 450년경) /출처: athenakanenas.blogspot.com

1-1에서 1-4까지 살펴본 문장이 이미 없는 것 사이의 내부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2-1에서 2-4까지는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과 이미 없는 것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은 실재하는 것이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지금 있는 것이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2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은 있는 것이 지난날에는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2-3은 빠진 것이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 지난날에는 있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2-4는 다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지금 없는 것이 지난날에도 없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2-1과 2-4 문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온 과거의 사태를 가리키고, 2-2와 2-3 문장은 변화된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2-2, 2-3, 2-4 문장이 단순히 과거의 관점에서 본 현재와 과거의 지속이냐, 변화냐를 나타내지 않고, 이미 없는 것 자리에서 하나와 빠진 것과 여럿(다는 여럿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을 문제삼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이미 없는 것에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이 문제 상황으로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뜻은 다르지만 1-1에서 2-4까지 여덟 개의 문장은 전체로 보아 모두 과거의 관점에서 내린 사실 판단의 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볼 3-1에서 3-4까지 문장은 사실 판단의 틀을 벗어납니다. 물론 이 문장들이 지닌 뜻의 일부는 사실 판단의 틀 속에 가둘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실 판단의 틀을 아무리 넓혀 놓아도 여전히 그 밖에 서 있는 의미의 계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3-1은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되는 사태가 지난날에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문장은 사실 판단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또 있어야 할 것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아니라 지난날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 있었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는 거지요. 3-2, 3-3, 3-4 문장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사이에 사실 판단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까지 내릴 수 있는 관계가 성립한다는 게 기묘하지 않습니까?

판단 주체의 문제로 돌아가자고요? 그 주체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인간의 의식인가요? 아니면 초월의식인가요? 혹시 개미나 선인장은 그 주체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나머지 문장들을 분석해 보고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하지요.

아래에 다른 열두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 문장들은 지금 있는 것의 관점에서 본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과 있는 것의 관계를 드러내는 문장들입니다.

가-1. 있었던 것이 있다.
가-2. 있었던 것이 없다.
가-3. 없었던 것이 있다.
가-4. 없었던 것이 없다.

나-1. 있는 것이 있다.
나-2. 있는 것이 없다.
나-3. 없는 것이 있다.
나-4. 없는 것이 없다.

다-1. 있을 것이 있다.
다-2. 있을 것이 없다.
다-3. 없을 것이 있다.
다-4. 없을 것이 없다.

여기에서, 문장 가-1은 ‘지난날에 있는 것이 지금도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또 ‘지난날에는 하나도 없었단 말이냐?’라는 질문에 ‘아니다. 지난날에도 무엇인가 있었다.’는 답변의 뜻으로 이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장 가-2는 ‘지난날에 있는 것이 지금은 없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또 ‘하나도 없었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뜻풀이에서 없다는 현재가 없었다는 과거로 때 매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십시오.

문장 가-3은 ‘지난날에 없는 것이 지금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빠진 것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에서 과거로 시점 전환이 또 한 번 더 이루어졌습니다.

문장 가-4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장이 지닌 뜻 하나는 ‘지난날 없는 것이 지금도 없다.’이지만 다른 뜻은 ‘다 있었다.’입니다. 여기서도 지금 있는 것(지금 없는 것)이 의미 전환을 통하여 이미 없는 것으로 때매김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 미래와 과거, 미래와 현재를 이어 주는 비밀의 통로가 없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가상의 통로일 뿐이라고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문장 나-1에서 나-4까지는 이 강의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제까지, 또 앞으로도 두고두고 되풀이되는 분석의 대상이므로 여기에서는 빼기로 합니다.

문장 다-1에서 다-4까지는 모두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눈에 보일 것입니다. 물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1을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지금 있다.’는 뜻으로, 다-2를 ‘앞으로 있게 될 것이 지금 없다.’는 뜻으로, 다-3을 ‘앞으로 없게 될 것이 지금 있다.’는 뜻으로 또 다-4를 ‘앞으로 없게 될 것이 지금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러나 이 문장들을 그런 사실 판단의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왜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에서는 사실 판단만 성립하는데 미래가 끼어들면,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미래와 과거, 미래와 현재가 관계를 맺을 때는, 그리고 미래가 주체가 될 때(미래를 나타내는 말이 주어의 자리에 올 때)는 가치 판단이 성립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고 난 뒤로 돌리기로 하지요.

이제 아직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본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있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아직 없는 것’ 들 상호 관계를 드러내는 열두 개의 문장을 적겠습니다.

ㄱ-1. 있었던 것이 있을 것이다.
ㄱ-2. 있었던 것이 없을 것이다.
ㄱ-3. 없었던 것이 있을 것이다.
ㄱ-4. 없었던 것이 없을 것이다.

ㄴ-1.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ㄴ-2.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ㄴ-3.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ㄴ-4.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다.

ㄷ-1.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
ㄷ-2.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
ㄷ-3. 없을 것이 있을 것이다.
ㄷ-4.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

ㄱ-1에서 ㄱ-4까지 이미 없는 것이 주어가 되고 아직 없는 것이 술어가 되는 과거와 미래의 관계에서 있을 것,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있어야 할 것이나 없어야 할 것이라는 당위나, 있으리라 또는 없으리라는 예상이 아니라 추측의 성격을 띱니다. 칸트의 분류에 따르면 이른바 개연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ㄱ-1을 ‘지난날 있는 것이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ㄱ-2를 ‘지난날 있는 것이 앞으로 없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ㄱ-3을 ‘지난날 없는 것이 앞으로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빠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ㄱ-4를 ‘지난날 없는 것이 앞으로 없으리라 예상된다.’ 또는 ‘지난날 다 있었을 것이다.’로 뜻풀이하자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생략 어법에 따라 현재라는 관계 고리가 빠져도 이해되는 그런 상황에서가 아니라면 이 문장들을 보고 예상이나 예측이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빠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다 있었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각각의 문장에 함축되어 있어서 술어에서 아직 없는 것이 이미 없는 것으로 시점 전환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과거의 미래가 현재의 과거로 바뀌는 상황인데 이러한 변화는 나중에 변화와 운동을 통틀어 다룰 때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ㄴ-1에서 ㄴ-4까지 문장도 예상, 예측의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ㄱ-1에서 ㄱ-4까지 문장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들에서도 추측의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ㄴ-1은 ‘무엇인가 있으리라 추측한다.’

ㄴ-2는 ‘하나도 없으리라 추측한다.’

ㄴ-3은 ‘빠진 것이 있으리라 추측한다.’

ㄴ-4는 ‘다 있으리라 추측한다.’

의 뜻으로 자연스럽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 다시 쓴다]-④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④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있는 것’보다 ‘있을 것’이, ‘없는 것’보다 ‘없을 것’이 더 앞선다. 따라서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

 
다시 한 번 제 신상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꽤 큰 변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삶의 변화가 제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말투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글에 맞지 않는 사사로운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국립 대학 대학원의 교환 교수 노릇을 끝으로 저는 강단을 떠났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해안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 산자락에 묵어 가는 밭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한 해 반이 흘렀습니다. 늦깎이 농사꾼으로 처음부터 농사일을 다시 배우다 보니, 해뜨면 일어나 들에 나가고 해지면 개울물에서 손을 씻고 들어와 저녁을 먹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자는 날의 연속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 돌이켜보면 내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애써 그 때 상황을 되살려 보려 합니다만 제 단순한 삶이 기억까지도 단순화시켜 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옛 기억의 복원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실제 상황과 많이 다르더라도 그 동안 정신이 흐려져 꿈과 현실, 실제와 가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엉클어진 실타래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탓이라 여기고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제가 하는 말에 두서가 없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칠판에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메마른 문장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본디 뜻은 제 생각을 정리하고 학생들에게 제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을 명확한 형태로 전달하려는 데 있었습니다만 그 작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제 제가 그 때 적어 내려갔던 문장을 다시 적어 보지요.

1. 있었던 것이 있다.
2. 있었던 것이 없다.
3. 없었던 것이 있다.
4. 없었던 것이 없다.

“자, 보다시피 여기 적힌 문장들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과거와 현재가 관계 맺는 네 가지 방식을 문장의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진술을 존재 판단이라고도 합니다. 이 판단들은 모두 사실 판단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문장들 가운데 1과 4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있음의, 또 없음의 지속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2와 3은 변화를 드러냅니다. 2와 3에서 우리는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뀜’(있었던 것이 없다.)과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뀜’을 상식의 기준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한 변화의 구체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있었던 것이 없다고 할 때 이 변화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결핍을 나타낼 수도 있고, 군더더기가 없어졌다는 뜻에서 평형을 나타낼 수도 있고,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낳을 수 있는 여러 차원(현실, 심리, 판단……)의 달라진 사태를 확인할 수 있겠지요. 없었던 것이 있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1, 2, 3, 4의 문장은 모두 객관화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 그래서 어떻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바람직하다, 바람직하지 않다 들에 대한 판단의 근거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속이나 변화가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과 관계를 맺으면 사실 판단은 가치 판단으로 바뀌는 계기를 맞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학생 하나가 제 말을 가로막더군요.

“선생님, 있었던 것이 없다나 없었던 것이 있다는 판단이 그 안에 어떤 가치 판단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요. 실제로 오늘 저는 있었던 것이 없어서 기분이 몹시 언짢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강의 발표 요지를 분명히 책가방 안에 넣고 왔는데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기분이 안 좋다.’ 이것도 가치 판단이 아닙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없었던 것이 있다는 판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굶주린 사람에게 어떤 계기로 밥이 생겼다 할 때 그 사람에게 없었던 것이 있게 된 계기는 결핍의 충족이라는 점에서 ‘좋다’는 판단을 내리게 하겠지요. 반대로 갑자기 없었던 위장 장애가 생겨 배가 몹시 아프다면 ‘나쁘다’는 판단을 내릴 겁니다. 학교 교문이 자유롭게 열려 있다가 어느 날 전투 경찰들이 교문을 닫아걸고 기관총을 걸어 놓았다면 두렵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겠고요.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판단은 이제부터 말하려는 미래의 영역, 곧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과거의 존재를 있었던 것으로, 현재의 존재를 있는 것으로, 미래의 존재를 있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또 과거의 비존재를 없었던 것으로, 현재의 비존재를 없는 것으로, 미래의 비존재를 없을 것으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있는 것, 없는 것, 있었던 것, 없었던 것과는 달리 있을 것과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예측이나 추측이고, 다른 하나는 마땅히 그러해야 함, 곧 당위〔sollen〕입니다.

‘여기 있는 칠판은 내일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여기 없는 분필은 내일도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또는 ‘있을 것으로 여긴 모래무지는 없고, 없을 것으로 여긴 붕어는 많이 있다.’ 같은 말에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은 추측이나 단순한 예상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요,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와 같은 말에서 있을 것과 없을 것은 단순한 예측이나 추측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여기에서 있을 것이라는 말에는 있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또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없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있을 것, 없을 것이라는 말에 이런 이중의 뜻이 담겨 있을까요?

파르메니데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서양 존재론의 전통에 따르면 미래는 ‘아직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네 개의 문장을 보기로 들면서 ‘있었던 것이 있다.’나 ‘없었던 것이 없다.’는 있음의 지속 또는 없음의 지속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 없다.’나 ‘없었던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음과 없음의 관계의 변화를 나타낸다고 한 적이 있지요?
 

보티첼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중앙포토] http://p.joongang.co.kr/kr/news.do?_method=webcontent&newsid=20110624N0026#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원인 또는 이런저런 원인과 조건에서 이런저런 지속이나 변화가 결과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필연의 법칙을 유추해 내는 거지요. 그런데 그 필연의 법칙은 엄밀히 말하자면 의식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속의 측면에서는 필연의 법칙을 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나 변화의 측면에서는 필연의 법칙이 안 나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있었던 것이 없게 되거나, 없었던 것이 있게 되는 이 극단의 변화에 어떤 필연성이 있습니까? 필연성이 없어서 필연의 법칙을 끌어 낼 수 없으니까 우리의 의식은 자꾸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바뀌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모든 관계는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상관관계이고, 이 관계가 어느 측면에서는 지속으로, 어느 측면에서는 변화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하는 식으로 외곬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듯이 있는 것은 하나로 있지 여럿으로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상관관계라는 말은 일상의 차원에서는 편의에 따라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어불성설이요 모순입니다. 마치 야바위꾼이 품속에 무엇인가 감추어 놓고 모르는 사람을 속이려 들듯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는 없는 것이 있어서 이 있는 것과 저 있는 것을 갈라놓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논리에 모순이 생기므로 없는 것은 없다고 하고 논의를 진행시키자.’고 강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야바위 노름이 서양의 철학과 과학에서 어찌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세뇌시켜 왔던지, 지금 대부분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이 엉터리없는 일면적인 의식의 법칙을 자연의 불변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표정에 불만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손을 드는 많은 학생 가운데 한 학생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반박을 하더군요.

“지나친 매도인 것 같은데요. 만일에 선생님 말씀처럼 있는 것이 하나로 있고,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의 관계 법칙이 야바위 노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동안 물질의 최소 단위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밝혀진 물질세계의 여러 법칙들, 또 생명체의 최소 단위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파생된 여러 과학 기술의 축적과 그것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공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요? 도대체 시공 연속체인 이 우주 안에서 단위인 여러 하나를 찾으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철학이고 과학이고 다 사상누각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의 틀도 다 무너지지나 않을까요?”

다른 학생이 일어나서 또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이 우주 안에서 양〔quantity〕의 최소 단위나 질〔quality〕의 최종 단위를 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부질없는 노력인 것같이 여겨지는데요, 그리고 그 최소 단위나 최종 단위가 확정되지 않으면 무엇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거나 무엇이 얼마라고 측정하는 일이 불가능한데요. 질과 양, 척도 뭐 이런 것에 대한 규정이 없이 어떻게 어떤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나요?”

“잠깐, 내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성급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요. 그러나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미 꺼낸 말이니까 먼저 사실 판단에서 가치 판단으로 전환하는 데 아직 없는 것으로 규정된 미래가 어떤 구실을 하느냐에 대한 설명을 마저 하기로 합시다.

파르메니데스의 규정을 받아들이면 있을 것도 아직 없는 것이요, 없을 것도 아직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또는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현재와 관계에서 아직 없는 것은 단순히 있는 것(없는 것)의 지속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이 경우에는 지금 있는 것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낳겠지요. 또는 지금 없는 것이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낳을 겁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또는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있음과 없음을 저마다 독립된 항으로 놓고 실체화시키는 관점에서 보면 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변화를 모순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로 못 박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③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③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쯤에서 내가 첫 강의에서 한 말로 되돌아가기로 하지요.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는 뜻에서가 아니라, 딴 이야기를 하자는 뜻에서요.

다 아는 뻔한 말인데도 굳이 상기시켜 드렸듯이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여기는 우주도 없습니다. 또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다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여기는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히 여럿이 됩니다.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받아들이는 우주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은 하나가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받아들이는 우주는 하나입니다.

이 네 마디 말은 저마다 존재론이나 우주론의 주춧돌로 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말로 주춧돌을 놓느냐는 개별 상황이나 집단 상황의 반영일 수도 있고, 시대가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을 주춧돌로 삼기 꺼리고 그 쪽으로 돌려지는 생각을 거짓으로 못 박아 자꾸만 외면하려는 데에 까닭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의식 안에 자리잡고 있고, 자꾸 자맥질시켜 물 속에 잠기게 하려고 해도 끊임없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이 불길한 말에 끝까지 귀를 막을 수는 없지요.

더 솔직히 말할까요? 의식이 몰아내고자 하는 이 어둠의 소리는 사실 의식 활동의 숨은 전제들입니다. 없는 것이나 없다는 말을 빌리지 않으면 의식은 한 걸음도 발길을 떼 놓을 수 없습니다. 있는 것만 있는, 하나만 있는 세상에는 의식이고, 감각이고, 추억이고, 기대고, 행복이고, 불행이고, …… 그야말로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를 살려 내기 위해서도, 단위를 설정하고 법칙을 세우기 위해서도 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질과 양으로,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고 그 나누어진 것을 다시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도 없는 것이 있어야 하고, 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참말이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인데, 참말이 참말로 들리는 것은 거짓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멀쩡하게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긴다고 해서 없어지나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세상에는 있을 것도 없고, 없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하나로 이어진 물의 흐름을 지난날의 물방울, 지금의 물방울, 앞날의 물방울로 나누어 고정시킨 뒤에 물방울 저마다에 있었던, 있는, 있을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거꾸로 없었던, 없는, 없을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하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이 딱지 이론을 조금 가까이서 눈여겨보기로 할까요?”

“선생님께서 앞 강의 시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고백을 장황하리만큼 길게 인용하신 것이 혹시 이 딱지 이론을 펼치기 위한 전제는 아니었나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과 연관되는 딱지 이론의 대가이니까요. 아다시피 아우구스티누의 시간은 살아 있는 시간(참된 운동)이 아니라 의식 속에 고정된(매장된) 시간 의식입니다. 이 점에서는 그 전통을 이어받은 후설(Husserl)도 마찬가지지요. 이 이론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핀으로 고정시키는 의식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를 이미 없는 것으로 미래를 아직 없는 것으로 못박습니다. 그러니까 있었던 것은 이미 없는 것이고, 있을 것은 아직 없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지금 있는 것? 그것은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을 이어 주는 흔들리는 접점 노릇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말하면 이미 없는 것도 아니고, 아직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 출처: www.kitabinomurgasi.com

아우구스티누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없음과 연관지어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을 겁니다. 있음과 연관지어 있었던 것, 있는 것, 있을 것이 저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킨다면, 여기에 짝이 되는 없음의 계열은 없었던 것, 없는 것, 없을 것이 되겠지요. 여기에서 없었던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없을 것은 아직 있는 것을 가리키겠지요? 없는 것은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있는 것 사이를 이어 주는 흔들리는 접점 노릇을 합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은 여기에서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있는 것을 한편으로는 갈라놓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어 주는 징검다리 노릇을 하는데, 있는 것과 대비시켜 이야기하자면 이미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있는 것도 아닌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말장난 같다고요? 아닙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을 붙들고 말장난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길은 멀고 마음은 급하고’라는 말이 내 심정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시간 축을 중심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토막 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기능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본디 공간이 없는데 여기저기가 어디 있으며, 본디 시간이 없으니 과거가 따로 있고 현재가 따로 있고 미래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의식이 분별지를 요구하니 당분간 그 요청에 순응하기로 합시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숨이 가쁘고 두려웠습니다. 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음울하고 불길한 경고의 소리가 울려 왔습니다.

‘너는 지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사유와 추론이 이루어지는 의식 공간에 한 발짝만 들어서도 의식의 칼날 아래 토막 나고 산산이 저며져서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것을 제물로 삼아 네 이론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다니, 바로 이런 오만을 경계하여 옛날 불가(佛家)에서 한 말이 있지 않더냐. 개구즉착(開口則錯). 입만 벙긋해도 틀린다. 차라리 입을 다물려무나.’

어쩌면 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직관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시간과 공간으로 파편화한 분별지의 영역으로 끌어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논하다니요? 이것은 작은 그릇 안에 큰 그릇을 담으려는 것이나 좁쌀 안에 우주를 집어넣으려는 시도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습니다.

“자, 지금 우리는 시간 축 속에서 토막 난 운동의 시체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여섯 토막 난 시체, 그야말로 육시처참한 시체의 부위들을 하나하나 들어 볼까요? 이것은 있었던 것, 이것은 그 짝이 되는 없었던 것, 또 이놈은 있는 것, 그 짝인 이놈은 없는 것, 그리고 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뭉개져 버린 것은 있을 것, 그리고 이 흉측하게 생긴 놈은 없을 것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놈들인데, 그리고 본디 하나였던 몸인데, 이렇게 의식이라는 백정이 토막 내 놓으니까 저마다 다른 놈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시체 해부 시간인데 어떤 놈부터 분해를 할까요?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자고요? 할 수 없지요. 여러분들의 의식이 그렇게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으니, 그리고 한 방향으로 고정된 시간의 회로를 유일한 흐름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 요구를 따를 수밖에요.

우리는 앞에서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된 서구 철학의 오랜 전통을 짐짓 받아들여 과거는 이미 없는 것으로, 미래는 아직 없는 것으로 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있음과 없음과 연관하여 정말 과거가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가 아직 없는 것인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있었던 것과 연관하여 과거를 살펴볼까요? 있었던 것은 아까 내가 말했듯이 이미 없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있었던 것을 이미 없는 것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지난 날 있었던 것이 지금도 있을 수 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창 밖의 저 관악산이 지난날부터 있었던 것이고, 지금도 있는 것이고, 내일도 있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있었던 것은 이미 없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지금 있는 것, 앞으로도 있을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니까 있었던 것의 테두리는 이미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 것까지 담을 수 있는 크기를 가졌다는 말이지요.

이와 연관되는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돌리기로 하고 이번에는 있었던 것과 짝을 이루는 없었던 것을 살펴보지요. 앞에서 짐짓 없었던 것은 이미 있는 것이라고 단순화시켜 규정했지만 지금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네모난 동그라미라는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형상은 지난날에도 없었던 것이지만 지금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에는 저마다 있음과 없음의 결이 동시에 숨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있음과 없음으로 추상의 최종 단계에서 나누어지는 원초적 관계가 어떤 때는 있었던 것으로 또 어떤 때는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실체화의 오류’(이런 식의 거만한 표현을 싫어한다는 것은 전에 한 번 이야기했지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있음과 없음은 있었던 것에도 없었던 것에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를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있었던 것을 이미 없는 것으로, 그리고 없었던 것을 이미 있는 것으로 단순 규정하고 더 넓은 테두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만큼이나 섣부른 일이지요. 비록 우리의 의식이 이런 단순화를 통해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을 얻기는 하지만요.

과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와의 연관 속에서만 드러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독립된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계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관계가 없으면 관계항도 없습니다. 관계항이 먼저고 관계가 나중이 아니라 관계가 먼저고 그 관계를 의식 공간에서 분석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관계항을 놓게 되더라는 이야기이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하자면 있음과 없음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있는 것은 이 둘의 관계이고, 우리의 의식이 분석의 최종 단계에서 이 두 항을 실체화하는데, 여기에 따르는 위험이 너무 커서 서구 존재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함정에서 벗어난 철학자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고 해서 이 함정에서 쉽사리 비켜 서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지난날이다, 과거다, 있었던 것이다,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못박는 그 무엇은 스스로 아직도 흐르고 있고, 또 앞으로도 흐를 것이지만 우리 의식은 그것을 고정시켜 완고하게 기억 속에 가두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요동치고 반란을 일으키는 과거의 모습을 직관하는 힘을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과거는 추억과 반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스스로 움직여서 현재와 미래의 모습까지도 바꾸어 낼 힘을 지닌 살아 생동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니 과거가 이미 없는 것이라느니, 우리의 의식, 우리의 기억, 우리의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어서 우리 머리나 몸에 간직된 정보를 통해서만 현재나 미래에 힘을 미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과거는 있음과 없음이라고 실체화되어 고정된 그 어느 것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함과 됨의 영역입니다.”

“잠깐, 잠깐만요.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지금 증명되지 않는 수사로 우리를 현혹하고 계시는데, 과거가 그 나름으로 살아 흐른다느니,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느니, ‘함’ 곧 능동의 힘과 ‘됨’ 곧 수동의 힘을 지닌 무엇이라느니 하는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에게 대들듯이 따져 물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넘나듦은 우리의 의식, 우리의 말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현상은 아니지요. 이를테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지난 추석에 말이야. 고향에 갔는데, 차에서 내리니까 어떤 사람이 서 있어. 많이 본 얼굴이야.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지 뭐야. 그제야 기억이 났지. 어렸을 때 내가 무던히도 골려 주었던 초등학교 동창이야.’ 이 말 속에서,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자연스럽게 넘나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유전 정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생명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과거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미래입니다. 과거가 거미의 꽁무니에서 실을 빼내 거미줄을 치고, 벌에게 밀랍을 만들게 하여 정교한 육각형 집을 짓습니다. 죽어 없어진 저 하늘의 별은 몇억 광년을 가로질러 이 하늘에서 저렇게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럴 것입니다. 땅 속에서 뿜어 나온 과거의 불은 현재 저렇게 큰 바위로 웅크리고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스러져 바닷속으로 흘러가서 밑에 깔렸다가 압력이 점점 커지면 다시 한 번 불길로 뿜어 오를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그런 힘이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더 엄밀한 증명이 필요하다면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지요.”

그 학생은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저는 그 학생에게 ‘자네의 그 표정을 만드는 힘도 자네의 과거일세.’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②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②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 것, 다시 말해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이 세상에는 진짜로 있는 것도 없고 진짜로 없는 것도 없다고 주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시지요?”

“이를테면 나 윤구병은 윤구병으로서는 있는 것이지만 나 밖의 다른 모든 사람으로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윤구병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그물코에 얽혀 있는 관계의 산물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간적으로 여기 있는 것은 저기 없는 것이고, 저기 있는 것은 여기 없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인데 지금 있는 것인 현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비롯해서 여럿과 운동으로 드러나는 삼라만상 모두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지요.”

“선생님은 없는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에는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과 같다고도 하셨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없는 것은 빠진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없는 것이 갖는 특성 가운데 두드러진 것 하나가 바로 빠진 것, 결핍이지요.”

“그런데 빠진 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 없는 것을 가리키거나 어느 자리에 있는 것이 다른 자리에는 없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을 것이 없다 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있을 것은 반드시 과거에 있었던 것만을 가리키거나 지금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지만 머지않아 있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고 아무 데에서도 눈에 띄지 않지만 거시 세계나 미시 세계의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요.”

“아무튼 빠진 것은 무엇인가가 없음을 가리키는데 그 무엇은 있는 것을 가리킬 터이므로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꼭 없음, 곧 허무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자, 우리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썼던 낱말들을 다시 한 번 달리 규정하고 들어갑시다. 그 동안 나는 일부러 있음이나 없음 같은 낱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우리 말에서 있음이나 없음을 하나의 개념어로서 쓸 경우에 자연스러운 우리말 질서를 깨뜨리는 흠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사이에 존재나 무(이런 말 내가 무척 싫어하는 까닭은 이미 밝혔지요?)의 여러 층위에 관해서 혼동이 있는 것 같으니, 앞에서 우리가 있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했던 것을 있음으로 고쳐 부르고, 아예 없는 것이라고 불렀던 것을 없음이라고 바꾸기로 하지요. 앞에서 여러 차례 밝혔듯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의 사유 공간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있음이나 없음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있음이나 없음을 두고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생각은 사유의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이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도무지 입 밖에 나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주장대로라면 있는 것 바로 그것이나 있음이나 아예 없는 것이나 없음 같은 말도 존재나 무의 실상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고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것을 근거삼아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도 맞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을 빼 놓고는 여럿과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상계를 의식에 제대로 반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에요. 있다, 없다는 말은 모든 인류의 사유에 바탕이 되는 기본 언어예요. 에이나이(einai)가 없는 그리스 말, 에세(esse)가 없는 라틴어, 에트르(etre), 비(be), 자인(sein)이 없는 불어, 영어, 독일어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언어학자들에게 우리말 있다, 없다에 해당하는 말을 일상 언어에서 빼놓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 공동체가 어디 하나라도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존재론이 인식론이나 가치론 같은 철학 분야의 기초가 되는 까닭은 바로 있다, 없다는 말, 그리고 그 말이 반영하는 사유 체계의 주춧돌 위에 철학, 과학, 상식…… 이 모든 것의 기둥과 벽과 지붕과 창틀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의식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추상의 최고 단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이 개념을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가장 자주 쓰는 낱말로 삼았느냐를 밝힐 수 있느냐인데, 나로서는 아직 이 수수께끼를 풀 능력이 없어요.

다만 있다, 없다는 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기에 앞서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말이고, 이 주어진 말의 통로를 따라 우리의 생각이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은 이 말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만 밝히기로 하지요.

어쨌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 생각 속에 들어와 우리 사유의 가장 넓은 테두리를 이룹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이 울타리 안에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의 의식 공간에서 있음과 없음이 관계를 맺으면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있음은 여러 하나인 있는 것들로 분산되고 없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는 하되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아들이는 어떤 것으로 바뀌어 나름으로 있게 되고 있는 것으로서 어떤 힘을 지니게 됩니다.”

“선생님이 우리의 사유 속에 있는 것이든 현실 세계에 있는 것이든 있는 것, 또는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도 실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 관계의 이름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있는 것,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여러 하나와 운동의 세계가 있음(하나)과 없음의 관계 맺음에서 비롯한다는 것도 받아들인다고 칩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럿과 운동 속에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상대적 규정일 뿐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다를 바도 없으며,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극단의 가능성까지도 인정할 수 있겠지요. 불교 경전의 하나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則是空 空則是色)’이라는 말도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어 순간순간 바뀌는 이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늘 머무는 것〔常住〕’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덧없이〔無常〕 생겨났다가 없어졌다〔生滅〕 하겠지요.

<반야심경>,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620&docId=556489&mobile&categoryId=1620

그런데 관계라는 이 끝없는 흐름의 어느 측면을 어떤 방식으로 고정시켜서 우리는 있는 것이라 일컫고, 또 어떤 측면을 일컬어 없는 것이라고 부르지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어쩌면 우리는 이 논의를 통해서 의식이 저지르는 잘못 가운데 가장 큰 잘못인 실체화의 오류(이 끔찍한 말을 용서하기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살아 있는 화석(化石) 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한어(漢語)를 예로 들어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 갈까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어에는 명사가 따로 있고 동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놓이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명사가 되기도 하고 동사가 되기도 하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글자가 전체 문장의 어디에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고정된 실체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운동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섣부르다는 욕을 먹을 셈치고 물리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한 낱말의 위상을 관계 고리의 어느 측면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낱말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그때 그때 달리 드러나는데, 이것은 관찰자의 위치에 탓이 있는 게 아니라 낱말과 그 낱말이 반영하는 객관 세계의 여러 있는 것 안에 그것들을 고정시키는 공간과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공간도 시간도 관계의 이름입니다. 공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질〔quality〕은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 고정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간 관계 안에서 흩어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시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는 질들이 서로 엉켜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이 하나의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한데 엉켜서 이어진 음의 계열을 이루는데, 30센티미터의 기타 줄 안에 엉킨 채로 들어 있는 저마다 다른 이 소리들의 무한한 계열을 어떤 무모한 사람이 하나하나 따로 떼어 내어 공간 속에 늘어놓으려고 든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현악기의 줄을 건반 악기의 건반으로 바꾸려고 들 텐데, 이 경우에 30센티미터의 현악기 줄에 담긴 소리를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담는 건반 악기의 건반 수는 무한할 수밖에 없고, 만일에 이 우주 공간이 유한하다면 그 건반 악기는 우주 공간을 다 채우고도 우주 밖에서 무한히 늘어놓이는 건반들을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모순되면서도 불가사의해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현상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공간 속에 좌표화할 수 있다는 사고는 이런 단순한 좌표화의 실험조차도 견딜 수 없는 무지몽매한 단순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로써 밝혀졌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이 우주가 원자(편의에 따라 이렇게 부릅니다만 물질의 최소 기본 단위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겠습니다.)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고대 원자론자들로부터 현대 물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공유하고 있는 전제를 틀렸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자를 만들고, 그 자로 질과 양을 나누고 재는 일, 공간 축과 시간 축이라는 좌표를 만들어 차원을 설정하고 그 단순화된 차원 속에 삼라만상을 배치하는 일은 삶의 필요에 따라 사람의 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텅 빈 공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진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든 질이 다 빠진 텅 빈 순수 공간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의 흐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이른바 ‘비가역적’이라는 말도 바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미 개념화한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이 우주는 서로 엉켜 있는 질〔quality〕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말을 더 단순화하면 이 우주(이 말도 개념입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습니다.)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이 우주는 일관된 사유의 법칙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진화의 방향을 두뇌 용량을 늘리고 두뇌 회로의 길이를 연장하여 의식이 성장하는 쪽으로 돌려 삶의 길을 찾은 인간의 경우에 떼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는 사정도 겹쳐, 말하자면 흐르는 물을 하나하나의 물방울로 고정시키려는 소망이 싹텄습니다. 그 소망의 가장 명료한 표현은 옛 그리스인들의 의식 속에 못박힌 뒤로 지금까지 이 우주를 재는 바뀌지 않는 잣대 노릇을 해 온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또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 세계에는 참된 변화와 운동은 없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은 바뀔 수 있으나 우주는 바뀌지 않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이러한 세계관의 반영입니다. 우주는 있는 것을 대표하는 하나, 곧 영원불변한 하나의 단위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큰 단위가 설정되면 그 다음 일은 쉬워집니다. 그 큰 단위를 이루는 하부 단위들을 일정한 체계에 따라 설정하면 되니까요. 그리스 학문의 전통은 이것을 주춧돌로 삼아 세워졌고, 그 전통은 현대 과학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의심할 여지없는 전제 위에 서구 과학도 종교도 서 있습니다. 이 우주는 하나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우주는 그 사람들의 우주고 당신들의 우주입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마찬가지 말입니다.”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 다시 쓴다]-①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①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이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 왔던 ‘운동’의 문제라는 ‘벼랑 끝에서 허공으로 한 번 내딛기’의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다룰 길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저는 사막 한가운데서 제자리를 맴도는 여행자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몇 말씀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몸담아 왔던 지방 대학을 떠나 한 해 말미로 이 땅에서는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중앙 도시의 국립 대학 대학원 철학과 석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존재론’을 강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계획은 거창했습니다. 이 기회에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존재론 전통의 맥을 짚어 가면서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중심에서부터 파고들자는 욕심을 부렸으니까요. 이 무리한 욕심이 저를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저는 제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동’의 깊은 늪에 뛰어드는 시기는 되도록이면 뒤로 미루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은 그 동안 제가 조금씩 쌓아올렸던 존재론의 비축 양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으로 버텼습니다. 잘 하면 이미 쌓아 놓은 양식으로 한 학기를 더 버틸 수도 있겠다는 약삭빠른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지만 저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어차피 이번 한 학기가 제가 대학에 머무는 마지막 날들이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좋은 기회를 적당히 뭉개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동안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뜸만 들이고 있던 솥뚜껑을 열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더 이상 ‘모순’을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제 모순 속에 빠져들어 모순을 극복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는 원탁 강의실에 둘러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두 점이 있다고 칩시다. 점〔point〕은 물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로 있는 것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모든 끝(한계, peras)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두 점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 않는 이 두 점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칩시다. 당구공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당구대를 연상해도 됩니다. 이 때 서로 맞닿아 있는 이 두 점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 물음이 무슨 뜻을 지녔는지 모르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저는 달리 물어야 하겠다고 느꼈습니다.

“두 개의 점이 나란히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점 사이에 크기(또는 길이)로 드러나는 공간이 생긴다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 질문에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선생님, 점은 본디 크기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긴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맞닿아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지요? 만일에 두 개의 점이 맞닿아 있는데 그 사이에 크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두 점이 서로 따로따로 차지하는 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두 점은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이 되고, 두 점이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은 두 점이 겹쳐서 하나가 된다, 곧 합동(合同)이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끝, 곧 한계〔peras〕가 하나인 것만이 크기를 갖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두 개의 점이 있다는 말은 끝이 두 개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끝이 둘인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선〔lin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옛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끝이 두 개인 것은 선분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선〔line〕에서 두 끝 사이에는 끝이 없는 것〔apeiron〕이 들어 있지요?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점이 두 개 있고, 그 두 개의 점이 관계를 맺으면 그 두 점 사이에는 끝이 아닌 것, 곧 끝이 없는 그 무엇, 다시 말해 크기가 생겨나고, 길이로 나타나는 끝이 아닌 그 무엇과 두 개의 끝을 서로 연관시켜 우리는 그것을 선분으로 정의한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싸하기는 한데, 그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요. 어떻게 크기가 없는 점 두 개가 맞닿는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겨난다, 공간적인 거리가 생겨난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둘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특성이자 하나와 다른 점이지요. 모든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의 규정을 벗어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형상〔idea〕의 세계에는 모든 형상이 하나하나 다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없습니다. 플라톤의 형상들은 하나, 둘…… 하고 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다시 말해 둘이 나타나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점의 형상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두 개의 하나가 저마다 크기가 없는 것, 끝, 한계이므로 이 하나도 저 하나도 아닌 것은 크기가 없는 것이 아닌 것, 끝이 아닌 것,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입니다. 여럿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둘(여럿의 최소 단위)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것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니까요.”

“아니, 선생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이 하나, 저 하나’‘점 두 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여러 하나’라든지 ‘모든 하나’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런데 금방 말을 바꾸어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하나가 두 개가 모여서 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여럿이 ‘만남의 이름’이고 ‘관계의 이름’이라니, 그런 엉터리없는 논리의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정하지요. 저는 지금 분명히 모순되게 여겨지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유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추론을 반영하는데, 알다시피 추론에는 공간, 다시 말해서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끼어들어,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보이게도 하고, 관계를 실체로 여기도록 만들기도 하니까요. 미리 앞당겨서 성급히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고, 추론을 이끌어 낼 수도 없는데,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이 전개된다는 한계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이렇게 왔다갔다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아무튼 이제까지 내가 한 말 가운데서 이 말만 귀담아들어 두면 됩니다. ‘공간은 두 하나의 만남에서 생겨나는데, 하나는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으므로, 두 하나라는 말은 관계 맺음의 다른 이름이다.’”

학생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짐짓 모르는 척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씨름해야 할 문제는 공간의 생성 배경이 아니라 ‘운동’의 생성 배경이라고 보았고, 어차피 ‘운동’과 ‘공간’은 한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이므로 ‘운동’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공간 탄생의 내력도 저절로 드러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점이 만날 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상한 사건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자, 다시 두 점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크기가 없는 점이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힘들다면 당구공 두 개가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도 좋겠지요. 당구공 두 개는 한 점에서 맞닿아 있겠지요? 우리는 이 점을 ‘접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접점은 당구공 두 개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하겠습니까?”
 

윤구병, <철학을 다시 쓴다>, 보리출판사, 2013.


 
제가 이렇게 묻자 한 학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접점이 어느 당구공 하나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힘들겠는데요.”

“그러면 그 접점은 당구공 두 개에 모두 속한다, 그러니까 당구공 두 개가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어느 한 점을 공유하고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은 붙어 있다.(이어져 있다.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둘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나온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글쎄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그 접점은 어느 순간에는 이 공에, 또 다음 순간에는 저 공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 공, 저 공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두 공이 맞닿아 있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두 개의 공이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개의 공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요?”

“소박하게 표현하면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다시 말해서 접점이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할 수도 있고…….”

“더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입체인 구(球)를 단순화해서 두 개의 원(圓)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로 합시다. 이 때 두 개의 원은 한 점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접점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점은 끝(한계, peras)이 하나인 어떤 것을 말한다, 그리고 끝에는 크기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고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다(정지해 있다)’는 말도 했지요?”

“예, 파르메니데스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두 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다른 원 위로 굴려서 처음에 두 원이 맞닿아 있던 점까지 한 바퀴 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때 한 원의 모든 끝은 다른 원의 모든 끝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맞닿는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의 실험에서 우리는 아주 기묘한 결과를 얻게 되니까요.”

“무엇이 기묘하지요?”

“먼저 원 둘레의 모든 점은 한정된 것〔peperasmenon〕이므로 이 한정된 것의 집합도 역시 한정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주율을 측정하려는 현대 수학은 아직까지도 한정된 측정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복되는 수의 계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율에는 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되풀이되지 않는 수의 계열이 무한히 연속된다는 것은 원을 이루는 곡선 안에 무한〔apeiron〕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우리의 추론과 실제 측정치 사이의 이런 불일치가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거 참!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기묘한 결과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요?”

“점은 끝이고 크기가 없는 것이라는 정의가 맞다면, 크기가 없는 점을 무한히 더해 보아야 크기가 있는 어떤 것이 나올 수 없는데, 알다시피 선분〔line〕의 한 끝을 한 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다른 끝을 고정된 한 끝과 같은 거리로 움직여서 드러나는 자취를 그린 원은 크기를 갖게 되거든요. 크기는 없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을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크기가 없는 것에서 크기가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지 않습니까?”

“이거야 뭐. 야바위 노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선생님 말씀을 드러내 놓고 야바위 노름으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당장 뭐라고 하기 힘든데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접점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접점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 참! 그렇고 보니 끝이 두 개 있으면 그 사이에 끝이 없는 것, 크기로 드러나는 것이 끼어들어 선분〔line〕으로 규정된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셨지요?”

“기억을 해냈군요.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접점의 성격 가운데는 더 까다로운 무엇인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걸 이른바 둘이 가지는 모순, 둘에서 생기는 원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모순의 측면을 적극적인 것으로 원시 우연의 측면을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먼저 두 점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는 원초적인 공간 규정인 크기도 생겨나지만, 원초적인 시간 규정인 운동도 생겨난다고 귀띔했던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접점에서 만나는 두 점은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조금 앞서 했습니다. 그런데 만남, 관계의 성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만 있다면 만남도, 관계도 없지요. 만남은 늘 둘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바로 하나라는 특성 때문에 사유의 공간에서도 벗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사유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 바로 그것도 사유의 대상이 아님은 거듭해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다, 없다고 하는 것,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그 무엇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