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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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번 강의 주제는 ‘함과 됨’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한 개인의 자각으로부터 싹트는 것은 도시사회에서입니다. 농경사회에서나 유목사회에서는 이런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는 노인들이 결정해주고, 유목사회에서는 유목민들을 이끌고 목초지를 찾아서 앞장서는 사람들이 결정해 줍니다. 도시사회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 개인에게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뭘 할까?’ 레닌의 책으로 유명해진 질문이지요. ‘무엇을 할 것인가?’

‘함과 됨’은 둘 다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한다’ 하고, 어떤 때 ‘된다’고 하지요? ‘함’과 ‘됨’이 운동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하죠. 사람이 하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 하는 것이든, 또 무엇이 어떻게 되든 ‘하는 것’, ‘되는 것’은 모두 운동을 나타내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능동성이 크고, 하나는 수동성이 큰 운동 형태입니다.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태초에 운동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운동이 뭡니까?”

“시간과 공간에서 뭔가 바뀌는 것이요.”

“원자론에서는 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를테면 고대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과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은 어떻게 다릅니까? 조금 더 쉬운 문제부터 접근을 할까요? 고대원자론자들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고대원자론자들 전통이 로이키푸스(Leucippus)에서 시작해서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에피쿠로스(Epicuros),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이렇게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 사람들이 밑에 깔고 있는 가장 큰 가정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겁니다. 그 외에는 없다, 원자는 수적으로 무한하고 공간은 외연으로 무한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운동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죠?”

“원자들의 충돌로.”

“예, 충돌과 반동으로 이 세상이 생겨났다 그러는데, 그러면 원자들이 왜 충돌하게 됐는가? 원자에 무게가 있습니까? 있지요? 그런데 무게가 있는 것들은 현상계에서 모두 수직 하강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면 원자는 무게가 있고 무게가 있는 것은 외부의 간섭이 없으면 수직하강운동을 한다, 그런데 무한한 공간 어디에 앞, 뒤, 좌, 우가 있느냐? 그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하죠?”

“사방으로 낙하한다.”

“사방으로 낙하한다는 거, 제 갈 길이 있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거기서 충돌을 하게 되나요?”

“빨리 떨어지게 되면…….”

“저 친구는 지금 갈릴레오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질의 물리학은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뒤로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의 물리학인데, 현상계를 이루는 중요한 것들에는 저마다 제 자리가 있다, 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하고, 돌이나 흙은 밑으로 떨어지는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운동체의 본성상 그렇게 되어 있다고 질로 설명을 하는데, 갈릴레오의 실험이 있은 뒤로 그게 다 사라져 버립니다.”

말하자면 등질적인 운동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고전물리학’이 자리 잡게 됩니다. 뉴턴(Newton)이 앞장섰고 라플라스(Laplace)가 철학이론으로 뒷받침을 하죠. 등질적인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제가 뭡니까? 등질적인 공간과 등질적인 시간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등질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시공을 통틀어 꼭 같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초로 우주 공간을 등질적으로 보고 원자를 등질적인 실체로 본 것은 고대원자론자들입니다. 대단히 큰 혁명입니다.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리고 정말 자연계에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실재하는가? 혹시 우리 의식에만 있는 시간과 공간은 아닌가?

아이작 뉴턴(1642~1727) / 출처: www.bbc.co.uk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은 원자들이 이합집산을 해서 이 우주가 생성된다고 이야기할 때 우연히 그 가운데 하나가 충돌을 하게 되면서, 여러 놈이 그에 대한 반작용을 하여 복합체들이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발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자가 운동의 주체다 하는 말이 겉보기엔 가장 무책임한 이야기 같고 어쩌다 그렇게 됐다는 말도 무책임한 말 같지만, ‘우연’이라는 것을 끌어들인 것은 서구 ‘운동’ 이론을 뒷받침하는 주춧돌을 놓은 것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처음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려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는데,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말 생각나요? 당구공을 예로 들어서 얘기했죠. 원자론도 로이키푸스에서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에서 루크레티우스로 오는 동안 그 나름대로 진화를 합니다. 이 이론이 날이 갈수록 세련된 모습을 띠는데,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로마의 시인이자 유물론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현상계에서 바람 없는 날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듯이 원자가 위에서 아래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경사운동을 한다, 무수히 많은 원자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중에 한 놈이 살짝 휜다, 그렇게 해서 충돌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로 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충돌과 반동을 일으켜서 형성되고 해체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증명들을 합니다. 우주공간이 무한하고 원자가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우주공간이 유한하고 원자가 무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우주공간과 원자가 둘 다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해 질문하고 그런 경우에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이 그리스 철학에 기원을 두고 있고, 그리스 철학은 인도철학과 중국철학과는 다릅니다. 물론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에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동양철학의 전통은 증명에 약하고, 또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책임지고 증명을 해서 다른 사람이 수긍을 해야 그 다음 단계로 진행을 합니다.

정지해 있는 것은 정지해 있는 것이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해 있는 것은 영원히 정지해 있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운동한다, 그 운동은 등질적인 수평운동이다, 수직으로 하는 중력에 의한 운동은 가속이 붙지요. 이 운동 관념이 교과서에 나오는 거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우리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운동 관념인데, 운동과 정지는 다르고 운동하는 것은 정지하지 않고 정지하는 것은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한다는 식입니다. 여러분 공간은 운동을 해요, 안 해요? (대답 없음) 공간이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여러분들 여기서 수학이나 자연과학, 물리학 하는 분 계십니까? 없어요? 실제로 등질적인 공간이란 측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공간관념이란 것은 유클리드기하학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삼각형을 내각의 합이 180도인 세 직선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평면공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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